요한복음 (요 20:1-18) 안식 후 첫날에 부활 / 마리아를 통하여 보여준 동산의 회복 /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사실
요 20: 1-18
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쌔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은 말씀대로 사흘 만에 안식 후 첫 날에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를 찾아와 주셨고, 우리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영으로 당신에게 속한 신부로 아버지의 아들로 새 창조를 일으키기 위해 부활하셨다. 즉 예수 십자가의 죽으심은 육신에 속한 죄의 사망이요, 예수 부활은 영에 속한 새 생명, 성령의 법을 세우려 하심이다. "그 첫째 것을 폐하 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히 10:9).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6) 함과 같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향하신 구원은 영적인 진실과 육신적인 현실을 포함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히, 온전히, 영원히 성취된 것이다. 육신으로는 우리의 모든 죄의 뿌리를 제거하시기 위하여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멸하시고, 영으로는 자신의 본체이신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또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히 함께 사는 영생으로 새 생명을 입혀 주셨다.
예수님은 왜 굳이 사흘을 무덤에 계시다가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셨는가?
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미리 자신이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땅속에 묻혀 있어야 함을 요나의 이야기를 예를 들어 말씀하여 주셨다. “그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 12:38-40). 예수님은 표적을 보여 달라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라고 책망하시고, 그들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처럼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어야 하는”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물고기 안에 들어가 사흘 동안 갇혀 있음으로 다른 이들이 죽음에서 살아 올라오는 구원에 관한 이야기다. 거센 바다 풍랑으로 방주가 침몰하여 모든 존재가 빠져 죽어야 하는 그 사망에서 요나 한 사람이 생명을 삼키는 풍랑 속에 던져짐으로 방주 안에 있는 자들이 살아난 그 표적이 그대로 예수님에게 재현될 것임을 말씀하여 주셨다. 요나가 던져진 곳은 도저히 살아나올 수 없는 캄캄한 지옥 땅을 상징하는 고기 뱃속이다. 큰 물고기의 악취가 나는 캄캄한 구덩이 같은 뱃속에 깊이 빠져 사흘을 꼼짝하지 못하고 완전히 죽은 자로 갇혀있었다. 사망이 그를 삼켜버렸음을 상징한다. 요나는 그 캄캄한 지옥의 고통 속에서 사흘 동안 죽었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난 것이다. 주님은 요나의 이 이야기를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결부시키셨다. 즉 예수님 한 분이 저주의 바닷속에, 우리가 받아야 할 그 지옥 땅에 사흘을 묻혀 있음으로 그분 안에 있는 우리가 아무런 해함이 없이 온전히 살아나게 됨을 주님은 요나의 이야기로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왜 바리새인 유대인들에게 하필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굳이 요나의 이야기를 하셨는가?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 악에게 먹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만이 죄인들이 살아날 수 있음을 제시하심과 동시에 바리새인들과 같은 유대인들이 바로 요나이며 그들의 패역함과 불순종으로 저주의 바다에 던져 고기 뱃속에 갇혀 죽어 마땅한 자들이라는 것을 제시하셨다. 즉 너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한 요나이며, 그 결국이 바로 저주의 바다에 던져져 물고기에게 삼킴을 받아 도저히 살 가망이 없는 완전한 죽음의 심판에 갇혀있는 자들임을 지적하신 것이다. 세례요한의 외침과 같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7,10) 함과 같이 그들은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렇게 완전히 죽음의 지옥에 던져진 악한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죄악과 저주를 끌어안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동안 땅속에 갇혀 있어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패역한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표적은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 외에 다른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요나처럼 저주의 바다에 던져져 지옥과 같은 고기 뱃속에 갇혀 있는 너희가 어찌하여 나에게 살려달라는 생명의 표적은 구하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 지옥에서 왕이 되려는 저주의 표적을 구하고 있느냐! 그러니 너희가 바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이며, 너희는 지금 죽음에 임박한 요나처럼 애통의 회개로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고 그들에게 회개를 독촉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독사와 같은 그들의 죄악을 도말하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참 백성으로 살려내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회복을 위하여 사흘 동안 무덤에 갇혀 있었다. 그 사흘은 주님에게 있어서,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나간 영적 파탄을 회복하시기 위한 것이며, 타락으로 저주와 죽음에 빠진 죄인을 구원하여 하나님과 다시 화평을 이루시는 관계의 회복을 위한 것이며, 구약의 모든 언약과 약속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 생명을 잉태시키기 위한 새 창조를 일으키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사흘 동안 인간의 죄악으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파멸로 치닫고 있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당신의 백성을 채우시는 하늘에서 이루신 뜻이 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시는 일들을 하신 것이다. 즉 창세기에서 먼저 틀과 질서를 세우시고 그 텅 비어 있는 곳에 내용물을 채우신 것과 같이, 예수님은 죽어서 사흘 동안 무덤에 계심으로 영적으로 틀도 내용도 아무것도 없었던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구조와 틀을 세우심으로 장차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모여 들어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땅 끝까지 확장되어 새 생명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새 창조를 일으키고 계셨다.
창세기에서 빛이 임하자 ‘혼돈’된 곳에 틀과 질서가 세워지는 첫째 날과 둘째 날과 셋째 날이 등장하고 넷째 날부터는 그 텅 비어있는 공간에 생명체를 채우시는 창조를 일으키셨다. 그리고 하늘과 땅을 분리하심으로 끝없는 위의 하늘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끝이 닿는 아래의 땅을 인간의 거처로 정하셨으며, 낮과 밤을 분리하여 빛과 어둠의 세계를 정하셨으며, 바다와 육지를 가르심으로 죄인과 세상에 대한 물의 심판이 제시되었고 또 그렇게 실행되었으며 (노아 홍수의 심판), 택함을 받은 성도에게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임을 노아 방주의 구원으로 미리 계시하여 주셨다. 그리고 신약에서, 빛과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말씀으로 이 세상에 친히 내려오셨으며, 십자가 죽으심으로 구약의 모든 언약과 약속들을 온전히 성취하여 주셨다. 창세기에서 물질적 창조가 일어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의 임재와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침노해 들어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된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함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한 것이다. ‘혼돈’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구조와 틀이 세워지고, ‘공허’한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은혜의 충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흑암’의 죽음에서 새 생명이 창조되는 성령의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벽하게 죄인들의 마음 안으로 침노해 들어온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시며 (마 4: 17),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 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며, 여기 혹은 저기 어떤 방향과 위치로 정해진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와 공간을 초월하여 곧바로 우리 마음 안에 성령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동고동락하시는 그 관계의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임한 것임을 확실하게 제시하여 주셨다.
안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사도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어떻게 임하게 되는가를 창세기와 같은 문맥으로 그려내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빛과 말씀으로 이 세상에 뚫고 들어 오셨으며, 즉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증거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첫 사역에서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 택함을 받은 당신의 백성을 이 세상 속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나라의 틀을 세우는 일과 채우시는 일을 하셨다. 영적 이스라엘 12지파, 즉 우리 성도를 상징하여 12를 제자로 불러 당신의 나라 틀을 세우시고, 제자들이 예수 안에서 하나로 동거동락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증된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틀이 세워지자 예수님이 첫 번째로 일으키신 일이 바로 안식을 상징하는 가나 혼인 잔치였다. 예수님은 세상과 율법을 남편으로 삼아 세상 포도주에 도취되어 있는 세상 잔치에 포도주가 끊어지게 하심으로 구약시대가 끝났음을 제시하셨다. 그리고 이 세상 죄와 사망의 포도주에 도취되어 있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심으로,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영원한 신랑이 되어주시는 하늘나라 혼인 잔치의 완성을 제시하여 주셨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과 생명이 임하게 되는 신약의 개시를 상징하기에 사도 요한은 이 기적을 “첫 표적”이라 부르고 예수님의 십자가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행한 표적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제 세상과 혼인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물의 세례로 깨끗하게 하시고, 자신의 보혈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정결한 신부로 탄생시켜 영원한 혼인을 하여 한 몸이 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음을 나타내어 보여주는 표적이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이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펼쳐지게 됨을 제시하여 주신 것이다.
그렇게 창세기 시작에서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물질적 창조가 일어나는 역사가 펼쳐지고,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임재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면팔방에서 모여 들어와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끝까지 확장됨을 제시하셨다. 즉 이 세상에 속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완전히 삭제되고, 오로지 영원한 빛과 생명으로 충만한 하나의 통일체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영원한 안식의 완성을 가나 혼인 잔치로 보여주신 것이다. 안식은 하나님께서 쉬셨다는 뜻이 아니다.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뜻하며, 즉 창조주 하나님께서 뜻하신 모든 구원의 일들을 완료하시고 하늘나라 왕의 자리에 앉으셔서 당신의 백성들과 하나가 되어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되는 그 상태의 완료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그 영원한 하늘나라 안식의 완성자로 오셨기에 그분이 곧 안식일의 주인이시다(막 2:28).
그러므로 안식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에 순종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하나님 나라 완성을 뜻하며, 절대적 순종과 의존과 하나 됨이 바로 안식이며 예배이다. 성도의 안식은 나의 뜻, 나의 모든 것이 기각되고,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 하나님으로 채워짐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 절대적 순종과 의존으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경배하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의미한다. 그 예배와 찬양을 통하여 성도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강과 기쁨과 감사로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하늘의 평화로 채워짐을 뜻한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나의 운명을 하나님께 의탁함으로 그분이 나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는 것이다. 나의 욕망과 탐심이 몽땅 기각되고 하나님에게 나의 자신을 몽땅 맡기는 상태가 바로 안식이다. 나는 나를 알 수가 없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나를 알 수 있으며 나를 주관할 수 있으며, 그분은 자신의 생명으로 나를 얻으셨기에 자신의 생명으로 나를 사랑하신다. 때문에 그분에게 나 자신을 몽땅 맡기는 것이 바로 영원한 안식이며 자유이다. 즉 피조물이 피조물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며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절대적 의존자로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모든 복을 함께 누리는 그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며 예배이며 안식이다. 그렇게 12제자로 채워진 하나님의 나라가 십자가 구원 성취로 세상 땅 끝까지 화장되는 성령시대가 펼쳐짐을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이다
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일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자는 막달라 마리아였다. 그런데 무덤의 돌은 열려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은 없어지고, 예수님이 입으신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이 따로 동그랗게 ‘개켜 있었다’. 머리 수건은 머리 편에, 세마포는 그 누운 자리에 아무런 흐트러짐 없이 그대로 동그랗게 말려있는 상태에서 몸만 신비롭게 쑥 빠져 나가심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철저히 막기 위해 경비병들에게 돈을 주어 “사람들에게는 밤에 예수의 제자들이 찾아와 우리가 잠든 사이에 그 시체를 훔쳐 갔다고 말하라”(마태 28:12-13) 라고 거짓 소문들을 퍼뜨리게 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예수님의 부활까지 중상모략하고 있었다. 만약 누눈가가 가만히 시체를 훔쳐 갔다면 세마포와 머리 수건이 그 자리에 그대로 동그랗게 놓여 있을 수가 없다. 아무 흐트러짐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개켜 있었다고 기록함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증거하기 위해 두 천사가 예수님의 머리와 발끝에 앉아 있은 것이다. 바로 시은좌 법계에 두 천사가 날개로 덥기를 덥고 있는 그 그림대로 성경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시은좌가 바로 은혜의 자리 죄가 사하여지는 자리이다. “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출 25:19-20). 즉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자리에서 영원한 속죄가 일어났음을 증명하기 위해 법계를 덮은 두 그룹의 천사가 실제로 예수님의 부활의 자리에 그대로 재현함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영원한 도말되는 속죄가 성취되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임하는 은혜가 내려짐을 한 치의 차이도 없이 성경대로 실현된 진실임을 증명한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시신 자리에 두 천사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20:12).
막달라 마리아를 통하여 보여준 동산의 회복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본 사람은 제자들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자였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 타락은 여자로부터 시작된다. 여자가 먼저 뱀의 꼬임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모든 인간이 죄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첫 과정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자로,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본 자로, 먼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한 자로 쓰임을 받은 것이다. 에덴동산에서의 타락이 다시 회복되는 의미에서 동산을 연상케 하는 ‘동산 지기’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이다. 첫 번째 여자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온 인류를 죄에 빠지게 함으로 저주와 죽음이 임하여 동산에서 쫓겨나고, 하나님은 죄인의 상태에서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없음으로 화염검으로 생명나무의 길을 막으셨다. 두 번째로 동산에 등장한 여자는 첫 번째 여자의 타락으로 이 세상 마귀에게 종속되어 일곱 귀신 들린 마귀의 종으로 죽음에 처해 있었던 여자였다. 막달라 마리아는 하와의 타락으로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대표 인물로 등장하여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른 새벽에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이며 그 동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오직 마리아에게만 보여 주셨고 또한 마리아를 통하여 자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전하게 하셨다.
막달라 마리아는 우리 성도의 대표 인물이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마귀의 유혹으로 죄와 사망의 저주에 빠진 그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막달라 마리아의 삶으로 보여주셨다.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린(눅 7:2) 마귀의 완전한 점령으로 육체도 정신도 마음도 완전히 파괴된 폐인이었다. 일곱 귀신이 들어있었다는 것은 완전한 마귀의 소굴로 되어버린 최악의 상태를 7의 완전수로 표현한 것이다. 도저히 살 가망이 없는 완전한 페인, 즉 모든 인간의 마음 상태가 바로 마귀의 세간이 되어 마귀의 종으로 일곱 가지 죄악, 즉 완전한 죄인으로 저주 받아 사망에 빠져있는 모든 죄인을 상징한다. 그 죄악의 지옥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과 함께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살아난 것임을 나타내시기 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먼저 마리아에게만 보여주셨다. 첫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실패한 것을 마지막 아담이 성취하여(고전 15:45) 주심으로 마리아와 같은 우리 죄인이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하여 하나님과 화평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롬 5:19). 그리하여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심과 동시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성소 휘장이 찢어진 것이다. 첫째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죄가 들어오고 그 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게 되었으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영생으로 부활한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해주고 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7-18).
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로 에덴동산의 실패가 승리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나아가는 화평이 이루어진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굳이 하와를 모형하여 막달라 마리아가 먼저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것이며, 그 동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20:17)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첫 부활의 열매로 아버지께 드려져 확증을 받으셔야 비로소 그분을 소유할 수 있음을 뜻한다. 똑같은 원리로 인간이 선악과 시험을 통과하지 못함으로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실과’를 만지지 못하게 화염검으로 막으셨다. 이는 그 누구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생명나무에 들어갈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로 아버지에게 드려져 확증을 받으셔야 만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도 예수 안에서 부활의 몸으로 영생을 살 수가 있기 때문에 ‘아버지께로 올라가기 전에 나를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은 이제 눈에 보이게 만질 수 있는 육신으로 오시지 아니하시고, 보이지 않는 영으로 우리 안에 직접 뚫고 들어오셔서 하나로 영원을 살게 되는 성령의 임재를 계시하여 주셨다. 이제 영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됨으로 하나님이 곧 우리의 ‘아바 아버지’가 되시는 특권이 주어짐을 계시하여 이내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20:17)라고 하나님이 우리의 참 아버지가 됨을 확증하여 주셨다. 예수님이 첫 열매로 아버지께 온전히 드려짐으로 우리가 생명나무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하나로 연합을 이루게 됨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셨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20:17)라고 제자들과 한 가족, 하나가 되는 새로운 영적 관계를 맺어주셨다.
막달라 마리아의 슬픔과 통곡, 그리고 부활을 믿지못한 제자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12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마 28:5-6 : 5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예수님은 말씀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말씀대로 부활하셨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와서 예수님의 시신이 안 보이자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기뻐하는 대신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은 시신이 없어졌음에 통곡한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야 마리아가 살고 우리가 산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함을 매일 체험함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평강의 충만을 누리기 보다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에 초점을 두고 죽은 시체에 무엇인가를 해 드리려고 열심을 내고 있다. 마치 마리아가 죽은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지자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함에 슬퍼하며 통곡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은 시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드리고 싶었고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과 보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향품을 준비하여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그 향품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진 것이며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은 시신이 없어지자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수가 없음으로 슬퍼하며 통곡하였다. 마리아의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본 천사는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눅 24: 5-6)라고 깨우쳐 준다. 마리아는 슬픔에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이내 기뻐하며 제자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부활의 기쁨소식을 전하였다. 하지만 11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였다“(눅 24:11). “그들은 예수의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막 16:9-11) 함과 같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수없이 반복하여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여 주셨다(마 17: 22-23; 20: 18-19). 하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에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무덤에 달려가 친히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믿었다고 하지만 부활의 진정한 뜻은 알지 못하였다.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20:8-10). 예수님은 여전히 부활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 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책망하셨다. 그리고 친히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옆구리에 손을 여어서 만져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즉 예수님은 혼적으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부활한 몸임을 확인하고 부활을 믿으라는 말씀이었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부활신앙을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하였다. 죽은 자가 살아서 돌아오는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부활의 기적을 눈으로 보고 확인하였음에도 믿지 못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기적으로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죽은 나사로가 살아 내려가도 그들은 절대로 듣지 않을 것이며, 기적과 이적을 보여준다고 하여도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기적과 표적을 구하는 이 시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마 12:39)라고 책망하신 것이다. 바로 우리의 마음 상태를 지적하신 것이다. 우리는 보이는 이 세상에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에 표적과 이적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믿음 생활을 추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라고 말씀하셨다. 성도에게 있어서 하늘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 임하였고, 우리 마음 안에 임하였으며, 우리는 하늘나라 백성으로 부활한 몸으로 살고 있다. 이 세상 속에서 다가오는 천국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마 12:28)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내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한 몸으로 천국 백성의 삶을 살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롬 6:5-7).
예수님은 부활의 몸으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그들과 동행하였음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경 말씀을 풀이하여 말씀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설명하여 주었을 때 그들은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고 이내 영의 눈이 열려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예수님은 이내 그들에게서 사라졌다. 이는 예수님은 이제 말씀으로 당신의 백성들 마음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말씀으로 함께 하실 것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말씀으로 임함을 제시하신 것이다. 즉 성령이 오시고 믿음이 온 이후로는 기적과 보이는 것으로 그분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르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히 11:1). 십자가 성취 전에는 기적이 필요했고 예수님이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야만 하셨다. 하지만 성령시대는 성령으로 임하여 말씀으로 믿게 하신다. 우리에게 십자가 예수님이 현실로 다가오고 현실로 체험하게 되는 것은 오직 말씀과 믿음뿐이라는 것이다. 그분은 이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말씀으로 깨우쳐 주시고 은닉된 상태로 우리를 끌고 가신다. 즉 그분이 내 안에 영으로 들어와 계시기에 육적으로는 그분을 볼 수도 알 수가 없으며 오직 영으로만 하나님을 인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때 예수님은 우리 눈에 보이게 나타나주셔서 우리를 영접하여 주신다.
신앙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임하였음을 믿는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울고 있는 마리아를 본 천사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너희에게 주신 그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믿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복음서 첫 서두에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하신 예수님이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선언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임한 그 증거로 하늘나라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에서 살리기 위해 부활하셨다. 반드시 부활하신 그리스도 생명 안에 있어야만이 구원받은 죄인이 의인으로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 영생을 살 수가 있다. 십자가 아래에서 죄인으로 있으면 저주와 죽음이다. 생명과 영생이 부활하신 예수 안에 있다. 나를 죄인으로 처형한 저주의 십자가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는 바울이 지적한 바와 같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갈 3:13) 함과 같다. 예수 십자가의 구원을 믿었으면, 저주의 십자가에서 해방 받아 부활하신 예수 생명 안에 거하여만이 아버지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태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분이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하나로 동행하시고 있다. 그분 안에 있으면 빛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사실
천국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풍성하게 구비된 세상 물질적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복하는 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의 나라이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일곱 귀신 들린 마귀의 세간이 털려 나가고, 부활의 예수가 성령으로 내 안에 들어와 나를 주장함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새사람으로 부활하여 현재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임한 것이다. 첫째, 죄인인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었기에 나의 모든 죄가 영원히 죽어 마귀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된 것이다. 둘째,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함으로 하나님이 나를 낳아주신 ‘아바 아버지’가 되어 그분과 함께 영생을 살게 되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 즉 그분 안에 있는 나는 그분을 따라서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 6:8) 함과 같이,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자가 된 것이다(롬 6:11). 죄로 죽은 자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 의인이 되어 본향 하늘나라에서 아버지와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영광을 입은 것이다. 예수 부활, 성령이 실상이다. 부활하신 예수 안에 영생하는 생명이 감추어져 있다. 이 부활의 생명 씨를 보혜사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태동시키고 잉태시켜 주신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라고 부활의 본질을 말씀하셨다. 부활의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영생을 얻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확실하게 보여주시기 위해 죽어있던 자들이 무덤 안에서 살아 올라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 27:52-53).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죽어도 반드시 살아나 부활의 몸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성령의 시대가 임하였음을 실제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0-22).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태어난 영광스러운 아버지의 자녀들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의로운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하여 주심과 동시에 자신의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심으로 피의 자녀가 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웹 1:7). 하나님의 본체는 부활과 생명이시기에 믿는 자에게는 새롭게 태어나는 부활의 능력을 부여해 주신다. 이 생명은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요 부활로 잉태된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 시작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 20).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는 땅에서 난자가 아니요 하늘에서 난자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이라”(요 17: 14)라고 말씀하셨다. 즉 그분은 죄가 없으신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그분의 영으로 난 자는 새 생명을 가진 ‘의인’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 값으로 ‘의인’이라 인처주신 성도들을 다시 율법으로 ‘죄인’으로 다스리며 철저한 행위의 의로 구원이 임하고 의인이 된다고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망령되게 하는 불법을 행하는 ‘독사의 새끼’들이다. 율법적 행위로 구원받고 의인이 되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성경은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율법은 한마디로 ‘죄와 사망의 법’(롬 8:2)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요(갈 3:10),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라고 말하고 있다. 율법으로는 구원이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율법을 공의로 이루시고, 우리를 향하여서는 페하여 주셨다(웹 2:15).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이라”(갈 2:16)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교회는 교인들을 ‘죄인’이라는 쇠사슬로 십자가 밑에 묶어놓고 율법으로 ‘죄인’으로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새롭게 태어난 부활한 몸으로 복음의 은혜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지도 못하고, 율법의 정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하는 율법과 복음을 평행하면서, 때로는 율법으로 때로는 은혜로 이 두 가지를 얼버무려놓고 분별을 못하는 갈등 속에서 살고 있으며 그 갈등으로 스스로 복음과 율법의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눅 12:51)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분쟁은 율법과 복음의 분쟁이다. 그래서 한집에서 율법과 복음은 함께 거할 수 없음으로 율법을 내어 쫓으라고 말씀하셨다(갈 4: 29-30). 왜냐하면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기”(갈 4:30) 때문이다. 예수님은 택함을 받은 당신에게 속한 자에게는 평화의 왕, 빛과 생명으로,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복음으로 오셨다. 그러나 이 세상 육신에 속한 자들과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에게는 분쟁이었다. 그들은 메시아의 복음을 대적하여 끝까지 율법을 고수하며, 율법으로 메시아를 ‘죄인’이라 정죄하여 십자가에 못 박게까지 복음을 거역하였다. 이와 같이 율법과 복음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관계이며, 필연적으로 분쟁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요(갈 3: 10),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라고 확실하게 지적하고 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나의 죄가 영원히 죽은 것이고, 다시 죽음에서 부활하셨기에 나도 그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한 것이다. 그분의 의로운 죽음이 나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그분의 부활이 나를 하나님의 영화로운 자녀로 잉태시켜 주셨으며, 현재 나를 성전 삼고 내 안에 계심으로 나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하나로 연합되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것이다. 내가 의인이 된 것은 그분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 아무 대가 없이 나에게 입혀 주신 은혜이다. 그런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 24). 이는 내 행위와 노력과 상관없이 내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하늘나라에서 이룬 뜻이기에 값없이 내려주시는 은혜와 영광의 구속이다. 즉 예수 부활과 함께 나는 그분의 은혜를 입어 당당한 의인이 되어 아버지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