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 19:16-17) 해골 땅에 꽂힌 십자가 / 함께 동행하시는 십자가의 길, 함께 죽는 십자가의 삶
요 19:16-17
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 17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말로 골고다)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막 15:21-22 :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마 27:31-33: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사악한 죄인들
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
하나님은 빌라도의 심문 과정을 통하여 유대인들의 잔인함과 패역함과 추악함을 철저히 폭로하시고,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다. 즉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19:16)라고 기록하고 있다. 빌라도는 이 세상 권세를 상징하는 모형으로 쓰임을 받은 것이고, 하나님께서 빌라도의 손을 빌려 자신의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롬 4:25)라고 하나님께서 우리 범죄함 때문에 십자가에 내어주셨으며 그로 인하여 우리가 의롭다 함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악한 유대인들과 로마 권세자들은 이 세상 모든 죄인들을 대표하며, 죄인이 받아야 할 십자가 심판을 반대로 죄 없으신 예수님에게 뒤집어 씌워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을 계획하시고 주관하시고 일어나게 조종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죄가 얼마나 추악하고 잔인하고 끈질기고 사악하기에, 하나님의 아들마저 죽이려고 발광하며, 그와 같은 독사의 독을 죽이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의로운 생명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음을 빌라도의 심문과 고문의 현장에서 보여주신 것이며,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라고 소리 지르는 미친광의 모습에서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 주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죄인 중의 가장 극악한 강도 두목인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외치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아우성친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 이 세상 왕 가이사를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여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19:15)라고 외친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그 핏값을 자신들의 자손들에게 돌리라고까지 외치는 최악의 모습을 드러냈다. 이와 같은 사악한 죄인을 살리는 방법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그들 앞에서 죽어주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살인강도는 십자가 죽음에서 살아나고, 그 자리에 예수님이 강도가 되어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다. 마땅히 죽어야 할 살인강도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죽어 주심으로 이 세상 아비 마귀의 아들로부터 하늘의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성경에서 굳이 강도의 이름을 ‘바라바’ 즉 ‘아비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붙여준 것이며, 바라바 뒤에 ‘예수’라는 이름을 붙여주므로 예수 십자가로 구원을 받아 마귀의 자식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게 됨을 계시하여 주신 것이다. 성경은 그 말씀 한마디 문자 하나 모두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담고 있다. 바라바 강도는 바로 우리 모든 죄인들의 대표이다. 예수그리스도가 죄인 바라바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그 저주의 십자가 죽음에서 살려 나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임을 계시한다. 그렇게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살려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빌라도의 고문과 심문의 현장에서 인간의 사악함과 잔인함과 부패함을 유대인들을 통하여 철저히 드러내어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 이 땅의 존재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마땅히 지옥 불에 떨어져야 할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들이며, 그럼에도 그러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들 앞에 서서 온갖 매 맞음과 수치와 조롱을 모두 감수하시고 십자가 지심을 받아들이는 한없는 사랑을 대조적으로 부여 주셨다. 도저히 가망이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분이 스스로 십자가 지시기를 원하시는 그 사랑을 인간은 알 길이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 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시간과 사건들은 인간들의 계획에 따라 일어나거나 선악구조에 의해 판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과 일으키심에 의해 판결되며 합력하여 오직 예수 십자가 구원으로 수렴이 되는 것임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과 사랑의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이 필요한 이 세상이 창조된 것이며, 역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설명하시기 위해 일으키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해골’ 땅에 꽂힌 십자가
17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가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 히브리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이 나오시니
예수님은 우리가 져야 하는 그 저주의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로 지시고 해골이라 불리는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신 것이다. 이 장면은 창세기 22장에서 미리 보여 주셨다. 아브라함이 아들이삭에게 자신이 죽을 번제 나무를 짊어지게 하고 손에 칼을 들고 함께 모리아 산으로 동행한 그 장면이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이삭에게 지우고”(창 22:6). 한 번도 아버지와 떨어져 본 적 없는 아들이 이제 아버지의 칼에 죽어서 번제로 드려지기 위해 번제 나무를 등에 지고 함께 죽음의 산을 오른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장차 당신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죽여서 우리를 살려낼 것임을 제시하여 주셨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매, 하나님은 우리가 져야 할 그 저주의 십자가를 아들에게 지우시고 골고다 해골 언덕길에 오르게 하신 것이다. 바로 패역한 쓰레기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장면이다. 오직 죄 없으신 의로운 당신의 아들이 죽어야만이 그 흉악한 죄에서 우리를 살려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아들의 희생이 없이는 죄를 사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죄가 쏘는 것이 사망이기 때문에 그 흉악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희생 제물로 보내셨고, 우리의 흉악한 죄를 상징하는 십자가를 등에 업게 하시고, ‘해골’이라는 골고다 언덕을 오르게 하신 것이다. “해골”은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이 세상의 멸망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차단된 이 세상은 죄와 저주와 죽음에 갇혀있는 피할 길 없는 멸망으로 정해진 세상으로 죽은 자들의 해골들로 가득 찬 죽은 땅이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죄로 말미암아 죽고 또 죽은 헤아릴 수 없이 차고 넘치는 이 해골 땅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꽂힌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이 해골이라 불리는 골고다 언덕 위에 오르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19:17). 죽은 자들의 해골로 찬 이 세상 땅에 십자가가 꽂힘으로 죽은 자들이 살아올라 온 것이다. 선지자 에스겔이 에스골 해골 골짜기 마른 뼈를 향하여 살아있는 영의 말씀으로 대언할 때 그 해골들이 살이 붙어서 다시 살아나서 언약의 백성이 됨을 미리 보여주셨다(겔37:1-10). 마찬가지로 “허물과 죄로 죽은”(엡 2:1) 이 해골 땅에 십자가를 세워놓고 자신을 그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심으로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보고 믿는 자에게는 구원과 영생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자신을 장대에 매달린 놋 뱀으로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상 애급에서 빼내어 40년 동안이나 황폐한 고난의 광야 길을 걷게 하셨다. 광야는 말 그대로 황폐한 곳이며,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거처도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생존이 불가능한 사막이다. 그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에게 애급 세상 양식을 완전히 끊게 하심으로 세상 사람으로 살던 옛사람은 죽게 하시고, 여호와 입에서 나오는 말씀, 즉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만 먹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새사람으로 잉태하여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다(신 8:2-3). 그렇게 세상 애급 사람이 죽는 광야의 생활이 이스라엘에게는 당연히 고통과 절망과 죽음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끊임없이 모세에게 원망하고 불평하며, 죽음으로 몰아가는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다. 그러한 패역한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가장 강력한 독을 가진 불뱀을 보내어 즉사하게 하셨다(민 21:6). 그리고 모세에게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달아 그 장대에 매달린 놋 뱀을 쳐다보는 자만 불뱀에서 살아나게 하신 것이다.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 21:9). 뱀에 물려 죽어가는 자에게 다시 뱀을 쳐다봄으로 살려준다는 말씀은 가혹한 일이기에 그 말씀에 순순히 따라 자신을 물어 죽인 뱀을 다시 쳐다볼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그런데 그중에서 하나님의 가혹한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을 물어 죽인 그 뱀을 다시 쳐다보는 자가 있으니 그들에게만 생명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불뱀의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원망과 불평으로 애급으로 다시 되돌아가려고 아우성치는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주심으로, 너희들이 탈출한 애급이 바로 불 뱀, 즉 마귀의 소굴이며, 그 불뱀의 소굴에서 너희가 구원을 받았으며, 다시 애급으로 돌아가려는 자는 애급의 불뱀에 물려 멸망하게 됨을 보여주신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은 뱀의 후손으로 태어나 육의 본능을 따라 오직 자신만을 추구하는 ‘자아’에 집착되어 자아 욕망과 탐심으로 악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의 정체가 바로 독사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 안에 있는 독사 마귀의 본성이 얼마나 악렬하고 끈질고 추악하며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불뱀을 내려주셔서 깨닫게 하신 것이다. 그렇게 육신의 일을 도모하며 오직 육신을 위해 사는 인간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대적하게 되며, 심지어는 자신의 자아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도 살해하게 되는 패역한 극악까지 가게 됨을 이스라엘의 자손인 유대인들을 통하여 보여주셨다. 즉 우리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독사와 같은 죄의 본능을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에서 완전히 폭로하신 것이다.
그렇게 잔인하고 추악하고 포악한 인간의 죄를 죽이기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장대에 매달려 죽게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자신도 누군가로부터 들려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을 십자가에 들어 올려 죽인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이었다(마 16:21 / 살전 2:15). 유대인들은 바로 우리 모든 죄인의 대표이다. 우리는 본래 마귀 뱀의 유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타락함으로 마귀의 자식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독사의 자식들이었다. 그런 우리를 마귀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 그분이 우리의 저주가 되셔서 놋뱀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그분이 대신 받아 내신 것이다. 우리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들어 올린 뱀임을 인정하고 십자가에 달린 그분을 내 주로 바라보고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 3:14-15). 장대에 매달린 놋 뱀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뱀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생명으로, 즉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신랑으로, 영생으로 보이는 믿음의 눈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믿음으로 바라보고 믿게 됨으로, ‘십자가에 달린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 해골 땅에 꽂힌 십자가 구원이다.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십자가의 길
막 15:21-22 :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십자가는 저주와 죄악과 사망으로 치닫는 우리 죄인을 상징한다. 즉 주님이 우리 죄인을 등에 업으시고 죄인과 함께 죽음의 해골 언덕을 동행하신 것이다. 신명기에서 죄를 범한 자는 나무에 매달라고 하였고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 22-23)라고 말씀하고 있다. 죄를 범한 자는 하나님 앞에 부정함으로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려 죽게 함으로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시며, 그 죄의 대가는 죽음이며, 우리가 바로 그 형벌을 받아 그 무시무시한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 죄인을 등에 업으시고 죄인과 함께 죽으심으로 우리를 저주의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한없는 사랑을 확증하셨다.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이 죄인을 등에 업으시고 죄인과 함께 죽으시는 자신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 주신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하셨다. 우리는 그 십자가가 바로 우리 자신의 실존이며 죽음의 결국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 옛사람 죄인이 함께 죽고 새사람으로 함께 부활하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라고 항상 주님과 우리는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4-5)라고 정확하게 정립하여 주고 있다. 예수그리스도를 내 신랑으로 맞이하고 오직 그분의 생명력으로 사는 연합은 먼저 나 옛사람의 십자가 죽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 옛사람 죄인의 몸이 영원히 죽어야 만이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로 탄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잉태된 영생하는 생명이다.
새 생명의 잉태는 내 옛사람 죄인이 반드시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어야 하는 고통과 고난을 세상 임금으로부터 받아내야 하며, 그 십자가 고난은 우리 주님과 함께 겪는 고난이며, 우리의 모든 일에 함께 동참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해 그분은 우리 죄인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자기 십자가”로 등에 업으시고 골고다 해골 언덕으로 오르신 것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나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함으로 그 옛사람의 철저한 죽음에서 진정한 자신을 예수 안에서 되찾는 하나가 되는 죽음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6-7). 이와 같이 예수와 함께 내 옛사람 죄인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사람으로, 그분의 의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십자가의 길은 우리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는 길이며, 함께 죽고 함께 사는 부활과 생명의 소망으로 천국으로 향해 가는 길이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은 복된 죽음이며 귀한 죽음이라고 성경은 거듭 말씀해 주고 있다(계 14:13).
내가 져야 하는 '자기 십자가'
막 15:21-22: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주님은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주님이 살아내신 그 십자가 삶을 살게 됨을 확실하게 보여주셨다. 또한 그 십자가 삶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임을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시기 위해, 굳이 해골 골고다를 오르는 길에서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에게 억지로 주님이 지시던 십자가를 건너 지게 하시고 함께 골고다 언덕길에 오르신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빠져있지만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는 우리 성도를 대표한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건너지고 함께 십자가 길을 동행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우리 성도를 대표한다. 그는 자신이 원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서 진 것이 아니다. 그는 구레네에서 내려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는 것을 무리에 섞여서 구경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얼떨결에 강제로 예수님이 지시고 가시는 그 십자가를 받아진 것이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피가 묻어있는 그 십자가를 받아짐으로 예수님과 똑같이 사람들의 놀림 걸이가 되어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 길에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게 된 것이다. 그 십자가는 바로 우리 자신이며,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에 주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시며, 나를 상징하는 그 십자가에 주님이 못 박힘으로 나와 하나가 되어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게 되는 부활신앙을 제시하고 있다.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반드시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길로 이끌고 가시며, 반드시 내 옛사람 죄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만이 다시 예수님에게 속한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됨을 나타내어 깨닫게 하시기 위해, 굳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에 오르는 길에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예수님 자신이 지시던 십자가를 건너 지시게 하시고 예수님의 뒤를 쫓게 하신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이 져야 하는 십자가 길을 확실하게 제시하여 주셨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구레네 시몬은 구레네라는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위에 있는 트리폴리 지역에서 온 사람임에도 ‘시몬’이라는 유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아 그는 아마 디아스포라로 홀연 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북아프리카라는 먼 이방 땅에서 유월절 제사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온 것이며 어떨 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지고 골고다 언덕 위에 오른 것이다. 그는 결국 초대교회의 일원으로 이방인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증인의 삶을 살아가게 됨을 로마서 16장에서 읽을 수 있으며, 십자가 순교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렇게 선택받은 성도의 십자가 삶을 그려내는 역할로 구레네 시몬이 쓰임을 받은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와 함께 내 옛사람 죄인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고, 그분의 의로운 생명으로, 즉 그분의 신부로 부활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은 바로 이제 그분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주님이 이끌고 가시는 십자가의 삶이라는 것을 제시한 말씀이다.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물질과 성공을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놔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거슬러서 고난의 길로 우리 육신이 원치 않는 삶으로 인도하시며, 베드로가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당한 것 같이 우리의 삶을 거꾸로 돌려 그분이 원하는 삶으로 이끌고 가시겠다는 주님의 견고한 주권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때문에 세상을 거슬러 사는 그 삶은 예수와 함께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십자가의 길이며, 내 옛사람 죄인이 죽는 죽음의 길이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나를 따르라’라고 성도가 가야 할 십자가 길을 정확하게 제시하여 주셨다.
예수와 함께 죽는 십자가 삶
주님은 우리 성도에게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낼 것을 요구하신다. 그리하여 주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향하는 언덕길에 우리 성도를 대표하는 구레네 시몬에게 자신이 지시던 십자가를 건너 지우게 하신 것이다. 우리의 본체는 창세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우심을 받은 자”(엡 2:10)들이며, 즉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함께 부활하여 천국의 백성으로 영원을 사는 자들로 선택받은 자들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는 더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의 마음의 원하는 것을”(엡 2:3) 할 수가 없는 자로 정착되어 간다. 이제 더는 나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쌓아 올리는 힘과 성공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반대로 이 세상에서 부인되고, 세상을 향하여 죽어지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리로 하늘나라 백성으로 지어져가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백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이다. 바로 사도 바울의 고백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사도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라는 확실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기에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하고, 동시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세상 또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을 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나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마귀의 종노릇하던 내 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며 이 세상 또한 죽은 해골로 가득 찬 죽음의 세상이라는 말씀이다. 바울은 성도의 삶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을 본받는 삶이기에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라고 정확하게 자신을 정립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즉 세상을 향하여 자신이 죽는 고통과 고난이 연속되기에 바울과 같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는 외침이 나오게 되며, 주님이 하신 말씀과 같이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으로 이끌려가게 된다.
하나님은 제한된 시간과 멸망으로 정해진 이 세상 공간에 마귀의 세력을 허락하심으로 마귀의 속성을 따라 육체를 따라오는 모든 탐심, 쾌락, 명예, 재물 등 나에게 힘과 복이 되는 가치로 추구하여 왔던 것들이 곧바로 죽음과 지옥으로 직행하는 속임수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한 생명과 복의 근원이라는 것을 이 세상 광야의 인생을 통하여 배우게 하시고 체험케 하신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의 고백은, 세상을 쫓아가던 내 옛사람이 반드시 그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음을 깨닫는 고백이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4-5).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거듭나는 새 생명의 연합은 먼저 나 옛사람의 십자가 죽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 옛사람 죄인의 몸이 영원히 죽어야 만이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로 탄생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잉태된 영생하는 생명이다. 그 새 생명의 잉태는 내 옛사람 죄인이 반드시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어야 하는 고통과 고난을 세상 임금으로부터 겪어내야 한다. 하지만 그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여 영생을 얻게 되는 복된 죽음이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은 복된 죽음이며 귀한 죽음이라고 성경은 거듭 말씀해 주고 있다(계 14:13).
그러므로 나의 옛사람은 진정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새롭게 태어난 나의 새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존재하고 살아가기에 그분이 이끄시는 삶을 지향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내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사람으로 탄생하였기에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로 완성되는 운명을 가진 자들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성도는 이제 자신이 계획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삶을 포기하게 되며, 세상을 향하여 자신을 부인하게 되며, 전적으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대로 살아가는 순종의 삶을 지향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미 나의 인생 전체를 계획하셨고, 그 계획대로 나를 이끌고 가시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살아서 역사하시는 말씀에 대한 순종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 인간 아담에게 오직 한 가지 ‘순종’ 만을 요구하신 것이다. 성도는 무엇인가를 하는 일에 열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을 통하여 구원과 생명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열심을 부리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그 안에 예수의 영인 성령이 계시므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추구하게 되며, 죄를 멀리하게 되며, 자신의 마음을 더럽히는 일을 금하게 된다. 내 안에 있는 그분이 죄를 미워하시기에 바울이 말한 봐와 같이 성도는 죄 가운데 더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1-2).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이끌고 가시는 길이 바로 복된 길이며 선이며 진리이며 영생임을 알고 있기에 수시로 자신을 돌아보며, 성령님의 깨우침과 인도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 품에 다시 안기게 된다. 그분은 우리와 타협이 없이 그분이 정해 놓은 복된 길로 우리를 이끌고 가시며, 절대로 내가 원하는 삶, 내가 추구하는 삶, 즉 멸망의 길로 가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내가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끌고 가겠다’라고 주님의 의지를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복음을 이해한 성도는 그 복음이 깨달아질수록 절대로 자기 옛사람 육신이 원하는 대로 함부로 살 수가 없게 된다. 우리의 ‘주’가 되신 그분은 우리 안에 영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끊임없이 말씀으로 깨우쳐 주셔서 ‘그분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시며’(골 3:10), 그분의 마음에 합한 거룩한 백성으로 하늘나라 입성의 목적지까지 이끌려 가신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함과 같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 속에서 하늘나라 백성에 합당한 지식을 배우고 훈련받고 성숙한 믿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목적지까지 도달하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하나님 절대적 의존자로 ‘새사람을 입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사는 나라이기에 이 세상에서 먼저 육신의 탐욕으로 살던 내 ‘옛사람‘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 그 훈련과 연단의 과정이 나에게는 고통과 고난으로 시험과 시련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들이닥치게 되는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이 진정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처럼 영원히 사는 존재로 성장하고 발전하여 완성으로 간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저주와 죄 안에 갇혀 시간을 쌓아서 늙고 썩어져 가는 죽음의 멸망과 지옥으로 종말을 고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을 “진토”, “거름 더미”(삼상 2:8)라고 부르고, 우리가 바로 그런 ‘거름 더미’, ‘쓰레기’에서 구원을 받았기에 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로 입혀진 것이라고 성경은 거듭 말씀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내가 무엇을 행하였느냐’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즉 나는 얼마나 악하고 불가능한 존재이며, 스스로 죄와 죽음의 심판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티끌’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과 자신에 대한 철저한 부인에 근거한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순간, 죄를 안 짓는 의인이 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여 더 변화되고 성화되어 가는 것에 올인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터져 나오는 그 집요하고 끈질긴 악질적인 본능적 죄악을 바라보고 체험하면서 나는 예수가 아니면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사악한 존재이며, 십자가 없이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죄인 중의 괴수이며, 결국은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거름 더미’의 존재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히 깨닫고 자신에 대한 철저한 부인에 열심을 두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오직 그분만을 굳게 붙들고 의지하는 믿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