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깊은 영적 의미

요한복음 (요 18:28-40) 예수님은 왜 로마법정에 서야 하셨을까? / 하늘나라 왕의 삶이란 어떠한 삶인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16. 09:18

요 18:28-40

28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30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1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40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예수님은 왜 로마 법정에 서야 하셨을까?

대제사장들과 공회는 예수님을 먼저 데리고 가서 자기들 마음대로 때리고 조롱한 다음 ‘사형언도’를 내렸다(마26:66). 그리고 자신들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다”(18:31)라는 이유를 달아 예수님을 로마 법정에 넘긴 것이다. 그들은 로마법 뿐만아니라 율법을 악용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얼마든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악행들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간음한 여자를 데리고 와서 율법을 들이대면서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고, 여러 번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한 자들이다. 스데반과 같은 수많은 예수 믿는 성도들을 돌로 때려 죽였고 사도바울이 바로 그 증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구약 때부터 그들의 조상들은 줄곧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들을 돌로 쳐 죽인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그들의 패역함에 대하여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23:29-30)라고 그들은 선지자들과 의인들을 죽인 조상들의 살인죄를 덮어 감추기 위해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면서 자신들은 선지자와 의인들을 살해하지 않았다고 변명한 죄악들을 폭로하신 것이다. 그들은 줄곧 선지자들을 죽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에게도 ‘사형언도’를 내리며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는데 혈안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에 대하여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다”라는 이유를 달아 로마 법정에 넘긴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이기에 반드시 로마 법정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으셔야만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공회로부터 ‘사형언도’를 받으심과 동시에 로마 법정에서도 ‘사형언도’를 받으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유대인들 중 택함을 받은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며, 더 나아가서 온 인류, 온 세상 중에 있는 당신의 백성을 저희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며, 온 백성의 구세주가 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사도신경에서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고난과 핍박과 죽임을 당하셨음에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굳이 빌라도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빌라도는 로마 황제의 대리인과 심판관으로 예수님의 유죄와 무죄를 선포하는 권세를 가진 총독으로 임명되어 이 세상 권세자의 대표로 쓰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있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 임금으로부터 고난과 죽임을 당하셔야 하셨기에, 세상 임금을 대표하는 빌라도 법정에 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세상 권세자 앞에서 당당하게 “내가 왕이다”, ‘내가 바로 세상 죄를 짊어지고 세상에서 내 백성을 구원하려 오신 하늘나라 왕이며 진리이다’라고 세상을 향하여 우리를 위한 선언을 하신 것이다.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18:37). 하지만 이 세상은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메시아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절대적 진리 이심을 알아볼 수도 알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함으로 “진리가 무엇이냐?”(38)라고 되묻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본디오 빌라도는 한 개인을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권세와 모든 죄인들을 상징하는 대표 인물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다만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만 알아보고 유대인들로부터 들은 것을 되풀이하여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18:33)라고 묻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18:34)라고 되묻는다. 즉 ‘네가 스스로 내가 왕임을 알아보고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유대인들로부터 듣고 말하는 것이냐?’라는 질문이다. 예수님이 이와 같이 물은 것은, 너는 지금 네가 심문하려는 사람이 바로 이 세상 권세를 다스리는 왕이심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고, 지금 내가 행한 일을 보고 그 일에 대해 심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들의 거짓 고소를 가지고 나를 심문하려고 하니 너의 심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빌라도는 예수님의 의미 깊은 말뜻을 알 리가 없었으며, 자신은 유대인들의 일에 상관하고 싶지 않지만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로마 법정에 넘겼기 때문에 마지못해 심문하는 것으로 대답한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18:35). 즉 예수님이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대제사장까지 동원하여 로마 법정에 넘기기까지 하였느냐는 질문이다. 이에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즉 나는 이 세상에 속한 자도 아니요 또한 유대인들에게 속한 자도 아니며 스스로 계시는 하늘나라에서 오신 왕이시며 그러므로 대제사장도 이 세상 권세자도 예수님을 심문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밝히신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라고 거듭 두 번씩이나 강조하여 자신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며, 하늘나라의 왕이심을 확실하게 밝힘으로, 빌라도가 지금 누구를 심문하는지를 확실하게 알려주신다. 즉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도 아니요 이 세상 임금도 아니시며,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하늘나라의 왕이시며, 이 세상 모든 권세를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이시기에, 이 세상 죄를 심문하고 심판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은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확실히 밝히시는 선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만인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18:36)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내가 무력하여 힘과 권세가 없어서 지금 너의 앞에 잡혀와 너에게 심문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나에게는 나를 위해 싸우는 종들이 있으며, 내가 온 것은 너희와 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진리를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18:37).

빌라도는 당시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로마 통치자의 대리인으로 이 세상 권세 잡은 임금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왕의 대척점에 서서 감이 하늘나라 왕을 심문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신분을 확실히 밝히심으로, 너는 이 세상에 속한 자요 나는 하늘에 속한 자이기에, 너는 나를 심문할 권리가 없으며, 오히려 너는 하늘의 왕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암시하신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18:37). 당신이 이 세상에 진리로 내려오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며, 오직 예수만이 구원과 생명과 진리임을 만백성들이 곧 알게 될 것이며, 그를 믿는 자는 진리에 속한 자들이며,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음성을 듣고 구원받게 됨을 세상 임금을 대표한 빌라도에게 선포하신 것이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18:37).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창세전 하늘나라에서 완성된 묵시이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의 선언과 함께 하늘나라 묵시의 두루마리가 이 땅에 확 펼쳐진 것이다.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는” 통치와 “빛의 임재”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사역이 이 땅에서 시작된 것이며, 이제 곧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희생으로 당신의 백성을 이 세상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만백성에게 알리기 위해 이 세상 권세를 대표하는 빌라도에게 자신의 왕 되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18:37).

예수님은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며, 보이지 않게 감추어 있는 은닉 성으로 오직 진리이신 당신에게 속한 자에게만 보여주고 믿게 하시고 소유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18:37). 즉 이 어둠의 세상에 “진리에 속한 자”, 즉 하늘나라에 속한 자가 있으며, 그들만이 진리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들만이 구원에 이르게 된지만, 이 세상 육신에 속한 자들은 예수님이 바로 코 앞에 나타나 보여주어도 알아보지 못하며 절대로 믿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수님은 처음 시작부터 이들에게 한결같이 자신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시며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고 수없이 강조하여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믿지 않았던 것은 그들 자신들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10:25)라고 다시 한번 천명하시면서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않는다’(10:26)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과 빌라도와 같은 이 세상 육신에 속한 자들은 메시아를 직접 눈으로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였고, 진리를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였으며, 믿을 수 있는 수많은 기적과 능력들로 증거를 보여 주어도 절대로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진리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에게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반문한 것이다. 빌라도에게 있어서 진리는 이 세상 권력과 재물을 쟁취하여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도 초라한 모습으로 무력하게 자신 앞에 선 예수가 곧 진리라는 것을 알 수도 또한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가난한 모습으로 나약한 어린 양의 모습으로 온갖 멸시와 조롱과 핍박을 당한 십자가 예수를 “나의 구주”로 알아보고 믿고 따르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진리에 속한 자들이며 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자들임을 말씀하신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18:3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27-30).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었기에,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알지도 못함을 유대인들과 빌라도를 통하여 확실히 보여주셨으며, 진리에 속한 자와 이 세상에 속한 자를 구별하여 주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닉 성으로 이 세상에 임하여 있기 때문에 세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한 자아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아무리 공격당하고 핍박당하고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절대로 응전하여 맞서 싸우지 않고 오히려 육신은 세상에 내어주는 것임을 우리 주님이 먼저 살아내어 보여 주셨다. 즉 성도는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에 이 세상은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리에 속한 자는 하늘나라 백성이기에 하늘나라 왕의 통치를 받으며, 하늘나라 삶의 원리로 이 세상을 잠시 사는 자들이다. 때문에 예수그리스도 진리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며 이 세상을 상대로 맞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빌라도에게 기꺼이 조롱과 멸시와 심문과 매맞음과 죽임을 당하는 모습으로 몸소 본을 보여주셨다.

로마군에게 잡혀가실 때 예수님은 아무 능력도 행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검을 뽑아들고 응전하는 베드로를 책망하셨으며, 베드로의 검에 베어진 귀를 다시 붙여주시면서 베드로에게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라고 책망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힘과 권세로 싸우는 전쟁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과 같이 도살당하는 어린 양으로 자신의 육신을 완전히 내어주는 것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즉 보이는 육신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기에 이 세상에 내어줌이 되고, 보이지 않는 영은 하나님에게 속한 영이기에 영으로 태어난 자는 하늘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이며 영생을 사는 자임을 주님은 말씀해 주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마 10:16).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에 응전하여 싸움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의 삶으로 이 세상에서 이리에게 뜯기고 먹히는 것으로 이루어지며, 은닉 성으로 반죽이 부풀어 오르는 것과 같이 죽은 것같이 보이지만 부풀어올라 오는 성령의 역사로 확장됨을 보여주셨다.

비록 이 역사 속에서는 세상이 항상 하나님의 나라에 응전하여 진리로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성도를 끊임없이 무참하게 잔인하게 핍박하고 살해하는 피 흘림으로 기독교 역사가 성도의 피로 얼룩지어 있지만 그 피의 씨앗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고 확장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기독교 역사는 하늘나라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핍박, 멸시, 천대, 고난, 환난, 도살당하는 피의 역사이다. 하지만 성도의 영혼이 이 세상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아버지와 신랑과 영원히 하나로 영생을 살게 되는 축복이 임하는 승리와 은혜의 역사이다. 그리하여 성경은 반복하여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1-4) 라고 진리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격려해 주고 있다.

사도신경에서 “저리로서 죽은 자와 산자를 심판하려 오시리라”라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는 다시 부활하셔서, 성도에게는 "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셨다”(롬14:9). 하지만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마귀의 자식들에게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시는’ 심판 주가 되셨으며, 반드시 모든 악을 제거하시는 최후 심판을 진행하신다. 주님은 심판에 대하여 ‘아버지께서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요 5:22)고 말씀하셨다. 즉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모든 피조물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며, 만물을 심판하시는 모든 권세를 아들에게 맡기셨다. 그 심판은 이 세상 임금과 이 세상 임금에게 속한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영원한 심판이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8).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는 이 세상에 속한 믿지 않는 ‘저들’이며, 자신의 이름을 높여 사람들로부터 숭배와 영광을 얻어내기 위해 탐심과 욕망으로 자기 확장과 실현을 도모하는 자들이며, 진리를 대적하는 마귀와 한 몸이 된 자들이기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8).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불같은 형벌이 쏟아지며,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 종말에서 끄집어내어 당신의 나라로 들어 올리는 편 가름을 하신다는 말씀이다.

내가 왕이니라 … 하늘나라 왕의 삶이란 어떠한 삶인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당당하게 자신이 바로 “하늘나라 왕이심”을 이 세상에 선포하셨다. 우리는 비록 세상 임금에게 당하는 나약한 양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하늘나라 왕에게 속한 자들이기에 장차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될 것임을 계시하셨다. 이 땅에서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고하며 대제사장 권력을 누리든 유대인들과 이 세상에서 권력과 부귀를 누리든 빌라도와 같은 육신에 속한 자들이 하늘나라에서 오신 진짜 대제사장과 진짜 하늘나라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대제사장과 왕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시며,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우리가 진정 대제사장과 왕 노릇하게 됨을 제시하여,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18:37)라고 우리를 위하여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왕이니라”라고 자신의 신분을 확실히 밝히셨다. 그럼에도 그분은 왕의 권위를 온전히 내려놓으시고, 영광의 자리에서 이 천한 땅에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우리를 섬기려 오신 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그분은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아버지가 시키는 말만 하시고 아버지가 하라는 일만 하시고 아버지의 때에 따라 세상 권세자에게 자신을 내어주어 양으로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살아내신 하늘나라 왕의 삶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는 완전히 대립됨을 제시하여 주셨다. 이 세상은 자신의 꿈과 야심과 욕망과 온갖 탐심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성취되는 내가 왕이 되는 삶을 추구하지만, 하늘나라의 왕 노릇은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부인되고 죽어야만이 하늘나라 백성으로 태어날 수가 있으며, 내가 완전히 죽음으로 내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채워짐을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 삶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 하늘나라 왕의 권세와 영광을 몽땅 내려 놓으시고 ‘없음’으로 오셨다. 그 없음의 삶으로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이며, 땅 끝까지 당신의 나라가 확장된 것이며,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지 않고 당신의 품에 안게 되는 풍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신이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으심으로 많은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나라 ‘왕 노릇’의 삶이다.

그렇게 하늘에 속한 자는 우리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이 세상에서는 고난과 시련과 핍박과 때로는 순교로 십자가 죽음의 삶을 살아가게 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영원히 왕 노릇하게 됨을 사도 요한은 확실하게 선포하고 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5). 하늘나라에서 세세토록 누리는 ‘왕 노릇’의 삶이 이 땅에서는 어떠한 삶으로 나타나는지를 히브리서에서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5-38).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살아내신 영생을 약속받은 하늘나라 백성들의 ‘왕 노릇’의 삶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 미래 현재가 통합된 개념으로 바로 “너희 안에 있다” 즉 너희가 살고 있는 그 십자가 고난의 삶이 바로 하늘나라를 살고 있다는 증거임을 산상수훈의 설교에서 또한 여러 가지 비유에서 상세하게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내 안에 임한 영생이기에,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고난도 핍박도 권세도 죽음도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사도바울은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왕 노릇의 삶을 살아낸 증인들의 진실 된 고백이다. 그 왕 노릇의 삶을 구약의 선지자들이 살아내셨고, 신약에서 세례요한부터 시작하여 제자들과 사도들, 그리고 그분들의 뒤를 이어 믿음의 선배들이 살아낸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세례요한의 삶은 이 세상에서 누리는 그 어떤 것도 누리지 못한 삶이었다. 그는 대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들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광야의 삶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광야의 삶을 살아낸 것이다. 그는 낙타의 가죽 옷을 입고 광야를 거처로 삼고 메뚜기와 석청만 먹고 예수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삶으로 처참하게 세상 왕에게 참수당한 순교로 자신의 전부를 예수그리스도에게 받친 것이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11제자들과 바울과 같은 사도들이 모두 세상에 참수당하는 순교의 삶을 살아냈다. 완전히 자신을 부인하는 십자가 죽음으로 예수그리스도로 온전히 채워지는 연합의 삶이 바로 하늘나라 왕의 삶임을 예수님이 먼저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셨고, 또한 믿음의 선배들이 그 왕의 삶을 이 세상에서 살아낸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그 어떤 죄도 찾을 수 없다고 예수님의 무죄를 세상에 선포하였다. 그것은 이 세상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의 세력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선포였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23:14-15; 18:38)라고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한 유대인들에게 법정으로도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것을 증거한 것이다.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힌 강도도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23:41)라고 예수님의 ‘무죄’를 증거했고, 예수님을 판 마귀 가룟 유다도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27:4)라고 예수님의 ‘무죄’를 증거했고, 예수님을 처형하던 백부장도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 었도다”(23:47) 라고 예수님은 진정 죄 없으신 ‘의인’이심을 증거하였다. 하지만 유대주의 권력자 대제사장과 공회가 죄 없는 예수님을 ‘유죄’로 뒤집어 씌워 ‘사형언도’를 내리고, 로마 법정에 넘겨주고, 로마 법정까지 협박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고 세 번씩이나 강요한 것이다(눅 23:21-23). 그럼에도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사도신경에서 굳이 빌라도의 이름을 거론한 것은, 그가 로마 통치자의 심판관으로 예수님의 유죄와 무죄를 선포하는 권세를 가진 총독으로 등장하여 이 세상 권세자의 대표인으로 쓰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과정과 진행 방법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예수님의 원하심으로 예정대로 일어난 계획과 섭리였다. 그리하여 패역한 유대인들과 무지한 이 세상 임금이 하나가 되어 창조주 하나님을 심문하고 심판하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펼쳐진 것이다. 마치 개미 같은 벌레들이 모여 인간을 심문하고 심판하려는 어이없는 장면이다. 인간들이 벌이는 악행들은 악인들이 원하는 뜻대로 일어지는 일같이 보이지만 그러한 악행들을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이시며 이는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뜻이며, 이 모든 것들을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들은 다만 악행을 감행하는 악역으로 쓰임을 받는 것뿐이다. 예를 들면,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하여 악을 행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계략임을 출애굽기에서 말씀하고 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급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급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출7:3-4).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이 이 세상 권세자를 대표하는 빌라도와 하나가 되어 예수님을 박해할 것이며 이는 이미 예정된 일이라고 사도행전에서 기록하고 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6-28). 하나님의 예정하신 일을 이루시기 위해 그들을 하나로 모이게 하셨다는 놀라운 기록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위루시기 위한 섭리이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와 '유죄를 선포한 것은, 예수님은 진정 아무 죄가 없으신 공의로 우하나님이심을 증거하여 세상에 선포하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니라, 세상 죄 때문에 즉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천하에 알리기 위한 하나님의 계략이셨다. 죄 없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고난과 수치와 저주와 죽음의 심판을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셨음을 알고 깨닫게 하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핍박과 고난과 죽임을 당하셨음에도,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라고 사도신경에서 거론한 것이다. 즉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감당하기 위해 세상 임금 (본디오 빌라도) 으로부터 고난과 핍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나의 신앙으로 고백하기 위한 의도였다. 때문에 예수님은 이 세상 임금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기 위해 오신 분이심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18: 36)라고 거듭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생을 한마디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요약하셨다. 이 세상은 그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를 대적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그렇게 그분은 아버지에게 향한 완전한 순종으로 세상이 주는 온갖 채찍과 조롱과 수치와 핍박에 아무런 대항도 능력도 행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 백성에 대한 극치의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40 저희가 또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눅 23: 21-23: 21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23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스라엘의 명절 관례 중에 총독의 권한으로 죄수 중 한 명을 사면해 주는 관례가 있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아무리 심문하여도 그 어떤 죄도 찾아낼 수가 없었기에 당연히 죄 없으신 예수님을 풀어줘야 한다고 생각하여 명절 관례를 들어서 예수님을 풀어줄 것을 유대인들에게 권면한 것이다.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18:39).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소리 질러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18:40)라고 살인강도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호소하였다. 유대인들은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을 저지른 강도 '바라바를 풀어 주라'고 호소하고, 반대로 로마 법정으로부터 “죄 없다”고 선고받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3번씩이나 외침으로 호소한 것이다. 진짜 구원자로 오신 메시아는 죽이고, 자신들의 왕국을 위해 민란을 일으키며 살인을 저지른 강도를 그들은 사형 집행에서 살려낸 것이다. 그들이 원한 것은 자신들의 영광과 다윗 왕국의 재건을 위해 싸워준 바라바와 같은 강도였기에 로마 법정에 항거하여 강도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바라바’라는 이름의 뜻은 ‘아버지의 아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의 아들’은 ‘마귀 아비의 아들’임을 암시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마태복음 27:16-17사본에는 ‘예수 바라바’로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훗날 사본가들에 의해 ‘예수’라는 이름이 삭제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예수’라는 이름이 살인강도 바라바에게 사용된다는 것은 혐오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진짜 살인강도로 사형에 처하게 된 바라바에게 동일하게 “예수”라는 이름을 붙여서 성경에 등장시킨 것은 독자인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계시하기 위함이다. 유대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메시아를 민란을 일으킨 강도로, '신성모독' 이라는 죄를 뒤집어 씌워 ‘사형 언도’를 내려 로마 법정에 넘겨주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세 번씩이나 법정에 호소하였다. 동시에 다윗 왕국의 재건과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싸운 민란을 주도한 살인강도를 ‘메시아’로 추앙하고 법정의 ‘사형언도’를 뒤엎고 사형에서 살려낸 것이다. 바라바는 이 세상 힘과 권력과 재물과 인기를 위해 싸운 ‘민속 메시아’ 역할을 했던 사람임을 계시하여 그에게 굳이 ‘예수’(메시아)라는 이름을 불혀준 것이다. 즉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싸우는 강도 바라바와 같은 자를 자신들의 ‘예수’로 추앙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장면이 바로 이스라엘이 출 애굽 후 시내산에서 풍요의 신 바알을 금송아지로 만들어 놓고 자신들의 욕구를 채워주리라 믿고 바알신을 ‘여호와’라고 부른 것과 유사한 장면이다. 그들은 지금 그들 조상들과 똑같이 자신들의 영광과 다윗 왕국의 재건을 위해 싸워준 살인 강도 바라바를 '예수(메시아)로 부추겨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바라바’가 굳이 ‘바라바 예수’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것이며, 유대인들이 원한 메시아는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참 아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탐심을 채워주고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싸워주는 ‘마귀 아비의 아들 거짓 예수’였다는 것이 여지없이 폭로당한 장면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달라고 빌라도 앞에서 아우성을 치면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시오”(마 27:25 )라고 자기들 자손들의 피를 담보로 걸고 그리스도를 대적한 것이다. 그들의 요구대로 그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고, 유대 인 120만 명이 기근과 불과 칼에 살육을 당하고 포로로 노예로 세상에 흩어진 것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쫓겨나 “예수를 죽인 잔인한 유대인”이라는 악명을 달고 있었기에 세계 각국에서 가는 곳마다 멸시와 천대와 박해와 추방과 살육을 당하였다. 중세기에 십자군에 의한 유대인 학살과 독일에서 저질러진 600만 유대인 학살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들 스스로 자초한 비참한 심판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의 순간에도 그 중 택하신 남은 자들은 끝까지 보존하여 주셨다. 이와 같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참 메시아를 죽이기 위해 자손들의 피까지 담보를 건 참으로 잔인한 자들이었다. 아울러 유대 종교와 이 세상이 하나가 되어 참 진리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대적하고 죽이고, ‘바라바 예수’와 같은 거짓 진리를 추앙하고 있음을 여지없이 보여준 것이다. 기독교 역사 내내 이러한 패역함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참 메시아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자신들의 다윗 왕국의 재건과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세우는 일에 오히려 해가 되며, 자신들의 자존심을 철저히 부숴버리며 자신들의 공로와 의를 완전히 부정하여 버림으로,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영광과 전통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죽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림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13:13). 즉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29:4)함과 같이, 이 세상 거짓된 자들에게는 숨겨 놓으셨기에 그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 참 메시아를 알아볼 수도 믿을 수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미워하고 대적하고 핍박하고 조롱하고 멸시하고 죽이는 것으로 나타나며, 또한 이 세상은 어떠한 메시아를 원하는지를 ‘바라바 예수’라는 강도를 통하여 확실하게 보여주셨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예수”라고 부르지만, 실상은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고 나를 높여주고 나를 위해 존재하는 이 세상 아비 마귀의 아들을 ‘예수’라 부르면서 섬기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이 또한 나의 옛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게 연약하고 가난하고 초라한 예수님이 나의 주가 되심을 꺼려하여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하게 되고, 때로는 나의 자존심과 나의 가치관을 부수고 나를 십자가 죽음으로 몰아넣으시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처럼 미워하고 불순종으로 대항하며, 때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마다하고 바로 내 옆에 서 계심에도 거절하고 이 세상 화려한 왕국을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바라바 예수’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지 않는지 유대인들의 모습에서 다시 한번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육신을 입혀서 이 세상에 침노로 들어오게 하시고, 가장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참혹한 방법으로 구원을 성취하시고, 아예 우리 마음 안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나를 우상으로 섬기는 거짓 예수의 실체를 폭로하시고, 계속 밀어내어 처음 자리인 죽은 흙의 자리로 완전히 으로 밀어내시며,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를 채워 가시는 것이다. ‘나’라는 자아를 쫓아내시고 예수그리스도를 채워주셔서 그리스도의 영생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그 영생의 복은 내가 쟁취하는 것도 내가 원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분이 불가항력적으로 강압적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나’라는 자아가 밀려나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라고 한다. 예를 들면, 똑같이 자신을 부인한 유다는 자살로 스스로 지옥에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시고, 베드로만 찾아가 주셔서 다시 3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의 사랑의 질문으로 강압적으로 베드로를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주님을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 자로 끌고 가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불가항력적이며 예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내가 바로 바라바와 같은 사형에 처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이며,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죽고 내가 살아나게 된 구원의 복음을 계시하고 있다. 바라바의 죄는 반란과 반역과 살인이었다. 우리 모든 죄인들의 대표 인물이며 또한 유대인들의 대표 인물이다. 끊임없이 하나님에게 반항하고, 하나님을 배신하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의 아들마저 살인한 악마의 죄로 사형언도를 받은 자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나의 모든 죄를 몽땅 뒤집어쓰시고 나를 죄 없는 자로 사형언도에서 풀어주신 것이다. 내가 죽어야 할 그 십자가에 나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달리시고 나는 그 저주의 십자가에서 풀려나와 자유로운 자가 된 것이다. 강도 ‘바라바’는 자신이 저지른 죄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어 마땅한 자이다. 그는 자신이 사형집행에서 풀려나리라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자가 예수라는 분이 자기가 죽어야 하는 그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자신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저주의 죽음에서 풀려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죄인 그 모습 그대로 죄와 사망에서 풀려난 구원이다. 역시 불가항력적 은혜이다. 그분이 내가 진 십자가를 받아 지심으로 그야말로 얼떨결에 구원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님의 점령으로 구원받은 자들임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즉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으로 죄인이 구원을 선물로 받았기에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