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 18:12-27)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대제사장들 /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베드로, 그리고 나
요 18:12-27
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 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가로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예수님은 우리를 이 세상 어둠의 죄악과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이 세상 권세자들에게 결박당하여 끌려가게 된다. 우리를 사단의 권세에서 풀어주시기 위해 당신이 사단의 권세자들에게 결박당하시면서 ‘제자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18:8)라고 명하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이 사단의 종에서 영원히 풀려나는 해방과 자유를 선언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풀어주시기 위해 당신 자신이 결박당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심문하는 대제사장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본격적으로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된다. 유대교 권력자들은 그동안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더디어 자신들의 뜻대로 로마 권력과 결탁하여 예수님을 결박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예수님의 계획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창조주이시며 만물을 통치하시는 심판자이시며, 아무런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지금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최고의 권력을 가진 대제사장으로부터 심문을 받는 현장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대표하는 중보자로 유일하게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대면하는 대제사장이 지금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죄인으로 정죄하여 죽이기 위해 거짓 증거를 조작하는 심문을 하고 있는 참람한 장면이다. 대제사장 안나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수 있는 증거를 찾기 위해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묻는”(18:19) 심문을 하고 있었다. 그 목적은 첫째는 예수님을 제자들을 선동하여 로마 황제를 위협하는 정치적 폭군으로 고소하여 로마 법정에 넘기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한 하나라고 선포하심으로 신성 모독 죄로 율법을 범한 ‘죄인’으로 몰아 죽이기 위함이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로마 법정으로는 정치적 폭군으로, 종교재판으로는 신성모독 죄로 사형 언도를 내리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안나스의 이러한 음모와 의도를 파악하시고 바로 반박하신다.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요18:20-21).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기에 오직 아버지께서 주시는 진리의 말씀만을 선포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주시는 일만을 하셨으며, 그 어떤 잘못된 말도 그 어떤 잘못된 일도 하지 않았음을 증명하신 것이다. 그러자 곁에 서 있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치신 것이다(18:22). 오만방자한 피조물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때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18:23)라고 당당하게 자신의 무죄를 선고하신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예수님 스스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진리이며, 진리는 숨김이 없이 진리로 드러나 있으니 내가 가르친 진리가 나를 증거할 것이며, 내가 한 말이 너희를 심판할 것이라는(요12:48) 계시적 말씀이다. 예수님은 똑같은 내용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요 5:45). 즉 너희는 지금 나에게서 고소 거리를 찾아 율법으로 나를 죄인으로 정죄하여 죽이려고 하는데 오히려 모세로부터 받은 그 율법이 너희를 죄인으로 고소할 것이며 심판을 핑계치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즉 진리를 말씀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오히려 진리를 고소하고 심문하고 있으니 그 진리가 너희를 심판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12:48).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심문을 당하는 예수님
아무런 고소거리를 얻지 못한 안나스는 이내 예수님을 가야바에게 보낸다.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18:24). 요한은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신성과 거룩하심과 위대하심에 초점을 두고 기록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죄인들에게 무참하게 수모 당하시는 나약한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그 생략한 부분을 마태복음에서 상세히 읽을 수 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이사로부터 또다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려가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인 공회에서 심문을 받게 된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하나가 되어 예수를 죽이려고 거짓 증거와 거짓 증인까지 동원한 것이다.
마 26:59-68 : 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 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 모독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하는 말을 들었도다 66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사악한 대제사장과 공회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거짓 증거와 거짓 증인으로 예수님을 죽이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예수님을 죽일만한 명확한 증거들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사악한 궤계를 아셨기에 침묵으로 아무 말씀도 아무 대항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자 그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냐”라고 물은 것이다. 예수님은 그 물음에는 숨김없이 직선으로 “네가 말하였느니라”, 즉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라고 분명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시며,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내려놓으시고 이 땅에 오셨으며, 이를 위해 그들 앞에 섰으며, 이제 곧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 구원을 성취하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며, 그리고 이 세상의 어둠을 종결짓기 위해 영광의 주로 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확실하게 대답하신다.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26:64). 예수님은 그들의 고소와 정죄로 십자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곧 부활하실 것이며, 승천하셨다가 다시 재림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시려 오실 것임을 제시하여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의 본체이신 영광으로 심판자의 권세로 다시 오실 것이며, 그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임을 똑똑히 볼 것이라는 선포이다.
사도 요한은 이 장면을 계시록에서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계 1:7).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모든 피조물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며, 만물을 심판하시는 모든 권세를 아들에게 맡기셨으며, 이제 그분은 영광의 주로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말씀이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5:22).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8-19). 그러므로 “하늘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다시 영광의 주로 심판자로 오실 것이며, 그때에는 이 세상과 진멸하시기로 정해진 마귀의 세력과 마귀에게 종속된 믿지 않는 모든 자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진노의 심판이 임하게 된다는 종말적 선언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영광의 주이시며, 이제 심판자로 그들의 모든 사악한 행위를 심판하실 것임을 계시하심으로 공회 모두를 격분케 만드셨다. 그들이 그토록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하고 핍박하여 십자가에 못을 박음으로 자신들이 승리하였다고 착각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영광의 주이시며, 만물을 심판하시는 권능으로 다시 오실 것임을 증거하여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26:64)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절대적 진리에 격분한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신성 모독’이라는 거짓된 죄로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된다’고 판단을 내린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내가 그리스도이다”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는 이유로 터무니없는 거짓된 사형을 언도하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때리며, 마음껏 조롱을 하고 있었다. “너희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마26:66-68; 막14.:65). 만물을 창조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하나님을 그렇게도 잔인하게 대우하는 인간의 사악한 독사의 정체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분은 우리를 만드시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이시다. 그런데 이 땅의 티끌로 지음을 받은 분토 같은 죄인들로부터 잔인한 때림과 온갖 멸시와 조롱과 수치를 당하시면서도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죄인에게 당한 그 극치의 수난만큼 우리에게 한없이 부어주실 사랑과 은혜를 바라보셨기 때문에 그토록 잔인한 인간을 관대하셨던 것이다. 우리에게 향한 그분의 사랑을 인간이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의 독사와 같은 창궐함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시고 아무런 능력도 아무런 반항도 하시지 않으셨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그러한 죄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그 모든 수난을 자신 스스로 홀로 감당하신 것이다. 이는 이사야에서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 예수님이 죄인들로부터 그토록 잔인한 채찍과 침 뱉음과 모욕과 수치를 모두 감수하실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그분의 위대한 사랑이 그토록 잔인한 죄인을 품을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죄인에게 향한 그 사랑이 너무나 위대하시고 너무나 크기에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라고 복음의 진수를 선언한 것이다. 인간의 생사(生死)를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피조한 죄인들로부터 당하셔야 하는 그 수모들을 오직 사랑의 힘으로 참아내신 것이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위해 변론해 줄 사람이 없이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하셔야 하셨다. 항상 하나로 함께 계신 아버지는 아들이 이제 죄인으로 정죄 받음으로 그 죄로 인하여 아들에게 등을 돌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게 내버려 두셨으며, 제자들마저 자신을 배신하고 뿔뿔이 도망하였으며, 잔인한 대제사장과 공회는 이 세상 권력과 결탁하여 예수님을 몰살하려고 물어뜯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일들을 홀로 묵묵하게 감당하신 것이다. 십자가를 져야 하는 예수님의 그 고통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처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시 22:14).
예수님은 아버지의 선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죄인들로부터 채찍에 맞는 온갖 수모를 다 당하시고, 아무런 능력도 대항도 없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끝까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으로 세상 불의한 공격과 살해에 자신을 기꺼이 내 놓으신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이 그 모든 치욕을 당하시는 진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진실된 사랑이시다. 죄인에게 향한 그분의 한없는 용서와 인내와 자비와 긍휼의 사랑은 인간의 말로는 이루다 말할 수가 없다.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죄인들이 퍼붓는 그 사악하고 잔인한 폭행과 수모를 모두 감수하시면서 끝까지 죄인을 사랑으로 품어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사악한 세상에 넘겨주어 온갖 수모와 십자가 죽음을 당하게 하심으로 그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로 이와 같은 사악한 모든 죄를 도말하시고, 부활의 승리로 당신의 백성을 죄와 상관없는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시켜 당신의 나라로 옮기시는 구원을 성취하셨다. 이는 창세전부터 정하신, 즉 당신의 백성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시는 일이 바로 주님이 성취하셔야 하는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주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베드로의 세 번 부인
예수님과 동행한 제자는 베드로와 요한이었다. 요한은 자신을 다른 제자라고 표현하고 대제사장 안나스와 친분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예수님의 대적인 안나스와 친분이 있었고 자유롭게 그 집을 드나들고 있었던 것이다(18:15-16). 예수님이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 안에서 심문을 받게 될 때, 베드로는 집 뜰에서 여종에게 질문을 받게 되고 이내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다. 여종은 이미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알고 있었기에 요한과 같이 온 베드로에게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18:17), 즉 “너도 요한처럼 예수님의 제자 맞지”라고 물은 것이다. 그 질문은 베드로에게 위협을 주는 심문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일상적 질문이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었기에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밝혀진다 하여 잡혀가는 위협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과민으로 반응하여 여종 앞에서 예수님의 제자 됨을 극구 부인한 것이다. 베드로는 바로 우리의 연약함과 악의 본성을 그대로 폭로하는 역할로 그 현장에 선 것이다.
베드로는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고 죽는 자리까지 함께 하겠다고 맹세까지 한 수제자였다. 다른 제자들도 똑같이 예수님을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마26:35).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셨다. “네가 정말 나를 위해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분명히 너에게 말하지만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요13:38). 베드로는 3년 넘게 주님과 동고동락하면서 매일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과 기적들을 눈으로 다 보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11:27)라는 믿음으로 신앙고백까지 한 수제자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주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겠다’고 최고의 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처음에는 능력과 기적으로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예수님의 그 신성함과 전지전능하신 능력에 압도된 것이며, 그 능력을 믿어 대업을 이루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주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겠다”고 영웅의 모습으로 나온 것이다. 주님이 가지고 계시는 능력을 빌어 높은 자로 승진하리라는 기대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이 로마를 뒤엎고 다윗 왕국을 회복하면 누가 예수님의 우의정과 좌우정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다투기까지 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태까지 행하셨던 능력과 기적들을 전혀 행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검을 뽑아든 자신을 책망하시며 다시 종의 귀를 붙여 주시고 순순히 자신을 결박하게 하여 로마군에게 끌려가신 것이다. 전혀 기대치 못한 예수님의 연약한 모습에 베드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좇아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대제사장 안나스 집 뜰까지 좇아갔고, 이내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옮길 때도 동행한 것이다. 얼마 전만 하여도 예수님은 전능하신 능력과 기적들로 많은 군중들의 열광 속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 12:12-13). 예수님은 많은 군중들이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치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환호하는 행렬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아무런 능력도 기적도 행하지 않으시고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대제사장과 공회 앞에 죄인으로 묶여서 묵묵하게 불의 한 자들로부터 불의를 당하게 있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으로부터 심문을 받는 현장에서 주먹으로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조롱과 수모를 당하시면서 아무런 대항을 하지 않은 예수님의 그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에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기대하는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의 기세로 맹렬한 진노로 유대인들을 억압하는 대적자들을 물리치고 다윗의 왕국을 회복하여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며, 부와 명예와 존귀를 가져다줄 메시아로 기대하고 믿고 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도살당하는 나약하고 초라한 양의 모습으로 그 모든 수모를 묵묵히 당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베드로는 완전히 실망하게 되었고, 그렇게 무능하게 당하시는 나약한 스승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며 부끄러웠던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그동안 쌓아온 모든 공로와 기대와 꿈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허탈함과 실망과 원망과 같은 복잡한 마음으로 더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며, 자신의 마음에서 미련 없이 지워버리기 위해 여종과 하인 앞에서 비겁하게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며, 전혀 상관없는 자라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는 자로 돌변한 것이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18:74). 세 번 부인했다는 것은 완전히 철저히 자신의 마음에서 지워버렸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내가 믿는 대상이 나보다 더 큰 능력의 소유자여야 하며, 인간은 그 능력을 빌어 자신의 유익을 챙기려는 도구로 삼아 버리게 되며, 그 대상이 나의 유익을 챙겨주지 않을 때에는 완강한 부인으로 이어지며, 나에게 불필요한 존재로 인식될 때에는 가착 없이 버리게 됨을 베드로를 통하여 선명하게 보여주신 것이다.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은 실수가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는 분노와 실망에서 오는, 자신의 마음에서 지워버리려는 강력한 부정이었다. 베드로는 그렇게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는 우리 죄인의 모습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생각은 오로지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탐심과 욕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모든 생각 하는 것이 오로지 나를 위한 유익에서 출발함으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추악한 것이다.
베드로의 강력한 부인에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며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면 이내 세 번 아니라 수천 번도 주님을 부인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이 필요한 것이며 성령님의 동행과 인도가 필요한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의 그러한 허물과 실수를 모두 사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굳게 세우기 위해 세 번이나 당신을 부인한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5-17)라고 세 번 물으셔서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셨다. 주님은 처음부터 베드로를 제자로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셨기에 그의 모든 실수를 다시 사랑으로 회복시켜 “내 양을 치고 먹이라”고 새로운 사명을 주신 것이다. 그 사명은 베드로의 힘과 의지가 아닌 성령의 이끄심으로 성령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함을 말씀해 주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주님은 베드로가 다시 일어서서 형제들을 굳게 세우는 사명을 감당하도록 친히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다고 미리 말씀해 주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 31-32). 주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심하게 통곡하며 회개로 다시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된다. 비록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음에도 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았다는 그 이유로 주님은 다시 돌이키는 마음을 주시고 다시 사랑으로 회복시켜 교회의 기초가 되는 역할로 세워주신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부인하는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눅12:9).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와 같은 우리에게는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 회개의 영을 주시며 용서와 자비와 긍휼과 인내로 당신의 품에 꼭 끌어안으시지만, 반면에 가룟유다와 같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유기된 자로 예수그리스도를 배신한 죄로 스스로 멸망을 택하게 놔두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양과 염소를 당신의 우편과 좌편으로 갈라 놓으셨다. 택함을 받은 양은 그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횐눈같이 그 죄악을 도말하셔서 예비된 천국으로 끌어 올리시지만, 염소는 이 땅의 지옥으로 밀어 넣으신다. 그렇게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양과 염소를 당신의 우편과 좌편으로 갈라 놓으시고 오직 당신에게 속한 자만 당신의 나라로 끌어올리신다.
주님은 베드로라는 인간의 본능적 실체를 폭로하시고, 그런 그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은혜를 입혀주어 주님의 충실한 종으로 만들어 내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은 인간의 의지와 결단과 열심과 상관없이 불가항력적으로 덮어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임을 확인시켜 주신다. 사랑은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인간의 의지와 희생적 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온통 죄 투성이며, 이기적이며,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하며 자신의 유익만을 타산하는 철저한 죄인이며, 그런 죄인을 위해 주님이 먼저 찾아와 주시고, 죄인을 위해 온갖 고난을 받으시고, 죄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을 박은 그 희생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그 사랑이 입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출발점은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하고 불가능한 죄인임을 인정하며 패역한 죄인으로 폭로되는 절망과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는 자기 부인으로부터 시작된다. 주님은 당신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버리신 희생을 근거로 하여 당신의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 오직 당신의 생명력으로 사는 자 만이 육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게 되며,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는 십자가 삶을 지향하게 됨을 베드로를 통하여 보여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