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깊은 영적 의미

요한복음 (요 15:1-6)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 과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구원에서 ‘제거’ 되는 것인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18. 07:50

요 15:1-6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예수님은 첫 구절에서 “나는 참 포도나무다”라고 선언하신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부르셨으며,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 하나님”(출 3:15, 사 42:28)이라고 밝히셨다. 신약에서 예수님도 자신을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여 "나는 ~ 이다"라고 선언하신다. 즉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하나님께서 신약에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친히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자기 계시'로 스스로 계시는 절대적 진리이시며 구원자 이심을 “나는 ~ 이다”로 선언하신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만이 참 진리이시며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이시며 생명이심을 예수님 스스로 선언하신 일곱 개의 제시로 나열하고 있다.

1). 오천 명을 먹이신 표적으로: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2).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표적으로: “나는 세상의 빛이다”(9:1-7)

3).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으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4).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 ” “양의 문이다”(10:7,11)

5). “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다”(4:14)

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7). “나는 포도나무이다”(15:1).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이요 생명이요 진리요 영생이며,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다 감추어져 있다(골2:3)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다. 그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안에 붙어있는 자는 생명의 열매, 기쁨과 평강의 열매, 사랑과 지혜의 열매와 같은 모든 선한 열매를 풍성히 맺게 되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됨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바로 그와 같은 열매를 맺게 하는 참 포도나무이며 그 포도나무를 가꾸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며, 너희는 열매를 맺는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거짓 포도나무

“내가 참 포도나무다”라고 선언하시는 그 의도는 포도나무 중에 가짜 포도나무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오직 ‘스스로 계시는 분’이신 예수님 자신만이 참 포도나무이며, 포도나무라고 자칭하는 이스라엘 즉 유대인 너희들은 참 포도나무가 아니라 거짓 포도나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민사상으로 우월감을 챙기며 하나님을 섬김다명의로 자신들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의 사역 시작부터 예수님을 극구 배척하고 멸시하고 거역하며, 자기들의 거짓 의와 영광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는 데까갔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들의 극악무도한 악행과 외식을 마태복음 23장에서 일곱까지 화로 폭로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이여 너희가 바로 우맹한 자요 불의한 자이며;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며”(마 23:25);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며”(마 23:27); ‘상좌에 앉기를 좋아하며, 사람들에게 랍비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하며’(눅23:5-7);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며(눅16:14);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막 12:40) 전형적인 외식 자들이라고 폭로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율법을 악용하여 사람의 교훈으로 가르치면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구원을 나누어주는 권위를 가진 자로 자칭하며, 자기들 마음대로 약한 자들을 억압하고 ‘죄인’이라 정죄하고 판단하는 영혼을 죽이는 일들을 행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들이 바로 ‘삯꾼’이며, 양을 물어가고 헤치는 절도이며(10:12),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10:10) 강도와 이리들임을 지적하셨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33.

이와 같이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영광과 기득권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살인하는 데까지 가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의 이와 같은 강퍅한 죄악을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 폭로하였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받지 않은 자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역하되 너희 조상들이 행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행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행 7:51-53). 선택받은 선민으로 자신들이야말로 포도나무라고 자칭하지만 참 포도나무는 예수그리스도이시며 그들은 거짓 포도나무임을 성경은 명백하게 폭로하고 있다. 성경 전체가 특히 히브리서에서는 그들이 대제사장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대제사장이시며, 예루살렘 성전이 참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참된 성전이시며, 그들이 드리는 짐승의 제물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단번에 받쳐지는 예수그리스도의 희생 제물로 모든 죄가 영원히 없어지며, 죄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희생 제물로 구원과 생명이 임함을 증거하고 있다.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왜 이스라엘은 거짓 포도나무인가?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부르심으로 이스라엘은 거짓 포도나무라는 것을 계시하신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열매 맺지 못하는 악한 이방인 가지가 되었는지를 구약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지적하신다. 하나님은 항상 이스라엘을 가리켜 ‘포도나무’라고 부르셨다.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사 5:7),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렘 2:21),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호 10:1). 이처럼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의 상징이요, 표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참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 패역한 거짓 포도나무가 된 것이다. 말씀하시기를,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됨인고”(사 5:4),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렘2:21). 하나님께서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그 포도나무가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었고, ‘들포도를 맺는 가지’가 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여 친히 보살펴 주시고 지켜 주시고 사랑으로 품어 주셨음에도 그들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대적하고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이방인들이 되어 버렸다는 말씀이다. 즉 이 세상 모든 죄인들의 본성과 악행을 가리켜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 ‘들 포도’로 표현한 것이다.

농부가 포도나무에게 바라는 것은 열매이다. 포도나무가 잎이 열리고 꽃이 피어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줄기와 가지는 덩굴과 같아서 나무로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쓸 수도 없는 덩굴 그 자체이다. 그리하여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하지 아니하였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겔 15:1-5).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불에 들어가서 타버리면 더더욱 쓸모가 없다는 말씀으로 이미 불탄 가지와 같이 이스라엘은 전혀 쓸모없는 존재로 패역해 버렸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6절 이후에서 심판을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수풀 가운데에 있는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땔감이 되게 한 것 같이 내가 예루살렘 주민도 그같이 할지라 내가 그들을 대적한즉 그들이 그 불에서 나와도 불이 그들을 사르리니 내가 그들을 대적할 때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내가 그 땅을 황폐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범법함이니라”(겔 15:5-8). 바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과의 계약을 저버린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다.

남 유다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고 있는 이유는 므낫세를 비롯한 유다의 왕들이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함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 앞에 패역하였기 때문이다.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케 하였도다”(왕하 21:11).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토록 미워하시며 증오하시는 그 악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구약 성경에서 반복하여 지적하고 폭로하고 있다. 열왕기하 21장에서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죽자 이내 우상의 산당을 세우고 바알과 아세라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세웠고 자기의 아들들을 우상의 제단에 불살라 바치기도 하고, 점을 치고,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무당을 끌어들이는 악들을 서슴없이 행한 것이다(왕하 21:1-10).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행에 대하여 이렇게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내리리니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 보던 추로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 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지라 내가 나의 기업에서 남은 자를 버려 그 대적의 손에 붙인즉 저희가 모든 대적에게 노략과 겁탈이 되리니 이는 애굽에서 나온 그 열조 때부터 오늘까지 나의 보기에 악을 행하여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니라”(왕하21:12-15).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짓밟고 자신들의 뜻과 야망과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멸시하고 자기 자신의 꾀와 다른 우상들과 열강의 힘을 의지한 것이다.

유다 왕 여호야김이 죽고 그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되어서도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였다. “여호야긴이 그 부친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왕하 24:9). 하나님은 또다시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셨다(왕하 24:10-13). 하나님의 선포대로 유다는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고, 그때 다니엘과 세 친구도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것이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은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아가고 그 여호야긴의 숙부인 시드기야를 유다의 왕으로 세우고 충성을 맹세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시드기야가 그 약조를 어기고 몰래 애굽으로 가서 원군을 청한 것이다. 그 내용이 바로 에스겔서 17장에 나오는 독수리와 포도나무의 비유이다. 한 독수리가 포도나무를 심어서 잘 가꾸고 있었는데 그 포도나무가 다른 독수리에게 뿌리와 가지를 뻗으며 물을 대 달라고 요청을 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포도나무를 심으셨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데서 힘을 빌려 자신들을 세우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지키심과 은혜를 뿌리치고 이방의 힘을 얻기 위해 이방 우상 앞에서 절하며 제사를 드리는 악행들을 행한 것이다. 그 교만과 배신과 불순종과 이방 숭배에 하나님은 진노하신 것이며 그 악에 대한 심판을 내리심을 말씀하셨다(겔 17:9, 18-21).

하나님은 그 포도나무들에게 가셔서 잎사귀를 마르게 하고 뿌리를 뽑아 버리겠다고 하신다(겔17:9)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에 복종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신한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됨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는 맹세한 것을 헌신짝처럼 버렸고 협약 맺은 것을 깨뜨렸다. 그가 손을 잡았다가 이런 짓을 했으니 반드시 죽을 것이다. 주 야훼가 말한다. 그가 내 앞에서 한 맹세를 헌신짝처럼 버렸고 내 앞에서 맺은 계약을 깨뜨렸으니, 나는 반드시 그에게 죄벌을 내리리라. 나는 그물을 쳐서 그를 망으로 옭아 바빌론으로 끌어다가, 거기에서 그를 재판하고 나를 배신한 죄를 벌하리라. 그의 군대 가운데 정병은 모두 칼에 맞아 쓰러지고 살아남은 자는 사방으로 흩어지리라”(겔 17:18-21 공동번역).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똑같은 한탄을 쏟아내신다.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사 5:1-2). 하나님께서 극상품 포두나무를 심어놓고 정성을 다하여 가꾸어 주셔서 좋은 열매를 기대했는데, 들 포도를 맺은 것이며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렘 2:21)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극토록 패역하여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유다에게 하나님은 분노하셔서 이르기를,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를 너희에게 말하겠다. 울타리를 걷어치워서, 그 밭을 못 쓰게 만들고, 담을 허물어서 아무나 그 밭을 짓밟게 하겠다. 내가 그 밭을 황무지로 만들겠다. 가지치기도 못하게 하고 북주기도 못하게 하여,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만 자라나게 하겠다. 내가 또한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겠다”(사 5:5-7). 그렇게 하나님께서 좋은 열매를 바라시며 심었던 포도나무는 전부 뿌리가 뽑히고 잎사귀가 말라비틀어져 죽어버리는 형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황폐된 그 포도원이 다시 회복되는 대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사 27:2-6).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이 전부 이방 악한 가지로 들 포도를 맺게 됨을 알게 되었다. 그리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극토록 패역하여 죽어 마땅한 포도나무 가지들을 심판으로 완전히 쓸어버리실 것인가? 아니면 예수라는 참 포도나무에 접붙임으로 다시 살려내실 것인가? 하나님께서 어떠한 해답을 주시는지를 알아보자.

과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구원에서 제거되는 것인가?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15장 2절은 구원받은 성도도 중간에서 타락하면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거된다는 해석으로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구절이다. 즉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 것인가, 아니면 중간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는 것인가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열매를 맺지 못하면 농부께서 제하여 버린다고 하셨고,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밖으로 내다가 불살라 버린다고 말씀하심으로(15:6), 한번 받은 구원도 취소될 수 있다는 알미니언 주의와 같은 잘못된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만약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린다"는 말씀을 문자 구절로만 해석한다면, 성경 전체가 계시하는 하나님의 원대한 사랑과 구원의 은혜와 어긋나게 되며 또한 요한의 전체 문맥과 상충하게 된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의 자격이나 열심의 정도나 행위의 의로움으로 공로와 업적에 따라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중도에 실수하거나 시험에 걸려 범죄 하였다 하여 탈락을 시키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설명하여 증명하며 증거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성경이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라는 진의는,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완전히 잘라서 제거하여 버리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가지가 결실하게 자라지 못하도록 기운을 빼앗아가는 잡것들에 대한 제거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그다음 구절에 “깨끗하게 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제하여 버리다’는 말씀은 가지가 튼튼하게 자라도록 ‘깨끗하게 손질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님은 “깨끗게 하다"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강조하여 쓰심으로 가지치기가 곧 ‘깨끗하게 하여 더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임을 제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에게 향한 마음을 여러 갈래로 밖으로 뻗어나가게 하여 세상 재물과 자기 자신을 실현하려는 탐심과 욕심과 야망과 유혹 같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즉 세상 밖으로 향해 뻗어나가는 수많은 잡 가지들은 하나님을 향해 곧게 뻗어가는 마음을 빼앗아 열매 맺지 못하도록 기운을 막기 때문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이다”(막 4:18-19), 그렇게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잔 가지들은 진리의 말씀을 막아섬으로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방해요소들이기에 반드시 제거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만약 포도나무를 가꾸시는 농부가 가지치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잔가지들은 제멋대로 뻗어서 서로 엉클어져서 서로의 가지를 상하게 하며 통풍도 안 되고 잡초까지 함께 엉클어지면 숨을 쉴 수가 없음으로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다. 그래서 농부는 줄기 가지가 튼튼하게 곧게 자라도록 옆으로 뻗어나간 잔 가지들을 반드시 제거하여야 한다. 줄기가 튼튼하게 곧게 서야 그 옆의 가지들도 결실하여 좋은 열매를 맺게 되며 강한 바람에도 떨어지지 않고 튼튼히 붙어있게 된다. 때문에 적절한 가지치기는 농부가 하시는 필수적인 일이다. 수시로 가지치기 해주고 원하는 방향으로 자라도록 이끌어주고, 건강하게 돌보아 주고, 병든 부분을 제거해 주고, 깨끗하게 해주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하는 것이 농부의 수고이다. 예수님은 그리하여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시고 우리를 가지로 표현하시며 그 가지가 결실이 자라도록 수시로 가지치기를 하시는 농부를 하나님 아버지로 표현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가지치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주님은 “내 아버지는 농부라"라고 말씀하셨으며,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1-2)라고 깨끗게 하기 위한 가지치기라고 말씀하신다. 즉 가지를 잘라 없애 버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지를 튼튼하게 세워 오직 열매 맺는 일에 매진하도록 깨끗하게 가꾸어 튼튼한 가지로 살려내신다는 정 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포도나무 안에 거하는, 즉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상태에서 튼튼히 자라도록 진행되는 가지치기이며 깨끗하게 하여 결코 농부가 원하는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약속이다. 즉 예수 안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때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부실한 자같이 보이고, 행위가 의롭지 못한 더러운 자같이 보인다. 끝없이 세상과 간음하는 창녀 고멜과 같은 모습, 십자가에 달린 살인강도와 같은 모습, 민족의 피를 빨아 이익을 챙기는 세리 마태와 같은 모습,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베드로와 같은 모습,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교회를 박해하는 난폭한 바울과 같은 모습, 거짓을 꾸미고 사기로 자기 유익을 챙기는 비겁한 야곱과 같은 모습, 간음 죄뿐 아니라 살인죄까지 범한 다윗과 같은 모습... 우리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경건치 않는 패역한 죄인의 모습들이다. 죄인에게서 무슨 의로운 행위가 나올 수 있으며 믿음이 있겠으며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선한 열매가 나올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와 주셨고, 불러내시어 자신의 빛과 생명 안에 끌어당겨 예수에게 접붙여 주심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가지치기와 같이 죄를 끊어내시고, 깨끗한 자로 가꾸어 주심으로 오직 그분의 의의 생명을 공급받아 생명이 태동되고 탄생된 것이다. 그분의 사랑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초월하여 조건과 대가가 없는 무한한 아가페 신적 사랑이시기에 우리 죄인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능력이시다.

우리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육의 본능으로 죄만을 생산해내는 패역한 자들이다. 무지하고 이기적이며, 바른길을 벗어나 제멋대로 뻗어나가 탐심의 배를 채우는 패역한 악한 가지들이며, 열린 무덤과 같이 악취만 뿜어내는 송장과 같은 존재이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하여 아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롬 3:10-18). 인간의 본성은 더럽고 강퍅하며 자아에 굶주려 있다. 자신의 욕망, 야심, 목적을 성취하는데 오히려 하나님마저 이용하여 자신의 유익을 챙기는 패역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의 선한 뜻을 거슬러 반항하며, 그분의 은혜로운 부르심에 대적하며, 그분의 말씀을 도둑 질하여 자신의 이름을 높여 영광을 갈취하며, 자신의 탐심과 정욕으로 지은 죄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린다. 세상 법으로도 하나님의 법으로도 우리는 철저한 죄인이기에 저주의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는 것이 지당한 일이다. 그런데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거하여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잘려나가 불어 던져지는 그 영원한 지옥에서 우리를 살려내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에게 먼저 잘려 나가는 죽음의 고통을 당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살려내신 것이다. 그분이 먼저 죄인을 찾아와 주셨고,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을 박으셨다. 그리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죄와 상관없는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시키시고, 의인이라 칭하여 주시고, 하나로 연합을 이루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포도나무의 진정한 의미이다. 우리에게 향한 그분의 한없는 사랑과 무조건적인 구원을 무엇으로 더 표현할 수가 있단 말인가! 어찌 그분의 영원한 한없는 사랑을 인간의 티끌 같은 판단으로 ‘구원에서 탈락’이라는 조건적 사랑으로 영원한 구원을 제한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된 황폐한 포도원이 어떻게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열매 맺는 참 포도나무로 회복시켜 주시는지를 구약에서부터 상세히 알아보자.

사 27:2-6   그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3 나 여호와는 포도원 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4 나는 포도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 질려와 형극이 나를 대적하여 싸운다 하자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  5 그리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  6 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에 채우리로다

그렇게 악한 질려와 형극이 되어 하나님을 배신하고 언약을 깨고 끊임없이 불순종으로 대적하는 이스라엘은 반드시 말라비틀어지고 뿌리가 뽑혀 죽어 마땅한 자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죽어가는 포도나무들을 지키기 위해 악한 질려와 형극과 같은 불순물들을 깨끗하게 제거하시자 그 뿌리가 튼튼하게 박히고 꽃이 피어 결실한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포도원으로 회복된 것이다. 이는 그 죽어가는 포도나무에 영원히 죽지 않는 참 포도나무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참 포도나무로 영원 전에 세우시고, 그를 마침내 이 세상에 보내셔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를 제해 버리시고 과실을 맺도록 가지들을 깨끗게 하신다’는 말씀은, 열매가 없다 하여 구원에서 제거하고 탈락시킨다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제거되고 깨끗하여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됨을 약속으로 주신 말씀이다. 이사야 27: 2-6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황폐된 그 포도원이 다시 회복되는 대 반전이 일어난 것과 같이, 15장 2절의 말씀에는, 한번 구원하시기로 약속한 당신의 자녀는 아무리 중도에서 타락하고 실수하고 죄를 범하여도 결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그 죄악들을 제거해 버림으로 정결한 신부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는 복음이 약속되어 있다. 창세기 49장에서 하나님은 이미 동일한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

창 49: 8-11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 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르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 즙에 빨리로다

야곱이 열두 아들 중 유다에게 유언을 하는데 유다의 후손에서 ‘실로’ 곧 메시아가 올 것이며, 그 메시아는 암 나귀 새끼를 타고 그 옷을 포도주에 빨게 될 것이라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구원을 미리 예언하고 있다. 즉 메시아는 포도 즙에 자신의 옷을 빨게 될 것이라는 말인데 바로 주님이 십자가에 피를 흘림으로 그 보혈로 당신의 백성들의 죄가 씻겨 없어지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게 됨을 계시한 말씀이다. 이사야 63장에서도 우리 주님이 스스로 당신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시고 포도주 틀(십자가)에 들어가셔서 온몸이 찍기도 뭉개져서 피로 자신을 붉게 적시는 그 십자가 피 흘림을 이미 예언하여 주셨다.

사 63: 1-6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바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2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냐  3 만민 중에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4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5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6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해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구원자가 공의와 구원의 능력으로 임할 것이며, 모든 죄인에게 향하여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냐”라고, 즉 ‘어찌하여 너희 죄가 그렇게도 붉으냐?’라고 묻을 것이라고 한다. 그 죄는 ‘먹과 같이 검고 주홍빛과 같이 붉으며’, 너무나 차고 넘쳐서 구원자의 옷까지 붉어졌다고 말씀하신다. "만인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 즙을 밟았는데, . . .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혀는 데"라고 너희 그 주홍같이 붉은 죗값을 예수그리스도께서 당하게 됨을 말씀하신다. 구원자의 옷을 붉게 물들게 한 죄인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하시는데 그 진노의 심판을 예수님이 대신함으로 지나간 것으로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에게 밟혀 멸망의 자리로 갔어야 할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밟히심을 당함으로 죄인이 참 포도나무로 회복됨을 선포하고 있다.

계시록 19:11-16에서, 예수님이 앞장을 서셔서 모든 저주와 심판을 다 받아내어 온통 피가 뿌려진 옷을 입으심으로 뒤에 따라오는 당신의 군대들인 성도가 희고 깨끗한 하얀 세마포를 입게 된 것임을 더 선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다.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계 19:13-14). 그렇게 우리 주님이 죄인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셨음을 성전 제사에서도 확실하게 제시하여 주셨다. 우리를 위하여 제물이 되심과 동시에 제사장이 되셔서 자신의 옷에 피를 바르시고 제물이 되어 하나님에게 받쳐지는 그제야를 구약에서 줄곧 행하여 왔다. 제사장이 아무리 금실 은실로 짠 거룩한 옷을 입고 있다 하더라도 제사를 드리면 그 제물의 피가 옷에 낭자하게 묻게 된다. 하물며 죄인들의 죄를 뒤집어쓰신 제사장 자신이 제물로 받쳐짐으로, 죄인의 그 주홍 같은 붉은 죄가 깨끗이 씻긴 것이다. 점도 흠도 없는 그분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를,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죄까지, 철저하게 완전히 도말하여 주셨음에도 어찌 구원받은 자가 중도에서 죄를 지었다고 하여 자신의 핏 값으로 구원한 신부를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옙 2:8).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아무런 조건 없이 구원하여 주셨음을 깨 닫으라고 호세아서를 우리에게 주지 않았는가! 우리는 바로 창녀 고멜과 같이 세상과 끊임없이 간음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뿌리치고 육신의 욕망으로 사는 패역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에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서기에는 너무나 더럽고 버림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다. 그럼에도 그분은 끊임없이 용서하여 주시고,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오직 사랑으로 우리의 그 더러운 죄를 깨끗하게 제거하여 주시고, 자신의 의의 옷을 입혀서 신부로 맞아주셨다.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긍휼과 사랑이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하나가 되는 사랑이기에, 창세전 구원하기로 정하셨기에, 그 죄가 아무리 주홍같이 붉으지라도 변함없이 조건 없이 다만 긍휼히 여겨주셔서 사랑으로 구원하여 주신 것이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니라”(사 1:18). 이것이 바로 죄인에게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이시며 영원한 구원이다.

그러므로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 것이며 취소되지 않는다

구원받기로 작정된즉 창세전 택하심을 받은 자는 이미 포도나무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포도나무에게 붙어있는 가지이기에 하나님의 은혜에서 탈락시키거나 구원을 취소하거나 중도에서 잘라내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구원은 한번 받은 것으로 영원하며 취소될 수가 없다. 구원은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웹 1: 4), 영원부터 예정하신 뜻이기에 (옙 3:11), 그분의 성품과 선한 뜻을 따라 영원한 것이다. 그분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약 1:17) 태초로부터 계시는 영원하신 분이시다. 때문에 새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분의 영원한 속성을 따라 영원한 자녀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라고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을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려는 뜻을 성취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고 성취하셨다. 즉 그분은 태초로부터 계시는 영생이시기에 우리가 받은 구원은 그분의 속성을 따라 변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 영원한 구원이다(히 5:9).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며”(마 l2:2), 끝까지 자기 백성을 품에 안으시고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셨으며, 그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중도에서 다시 빼앗는 일은 결단코 없다는 것을 성경 전체가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실수하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고 하인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약속의 아들로 만들었다고 하여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취소할 수가 있겠으며 이스마엘을 약속의 아들로 세울 수가 있겠으며 아브라함을 버리고 다른 자를 택할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은 그렇게 실수하고 허물 많은 아브라함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뜻대로 언약대로 결국 믿음의 아버지로 세워 주셨다.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야곱은 한 번도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거나 말씀에 청종하는 일이 없이 매사에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자기의 유익만을 추구하며,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축 복을 받아내는데 집착하여 끈질긴 고집으로 하나님과 씨름까지 벌이는 무식하고 한심한 자였다. 그런 야곱을 하나님께서 끝까지 참아주시고 환도뼈를 쳐서라도 항복시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이름을 주신 것이다.

다윗 왕이 간음과 살인죄를 지었다고 하여 다윗의 혈통으로 오시는 메시아의 약속과 언약을 끊을 수가 있겠는가?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였다고 하여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신 인류의 구원을 중단할 수가 있겠는가? 이스라엘의 4000여 년 역사를 보라. 끝없이 하나님께 반항하고 대적하며 범죄로 실패와 절망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그분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약속대로 메시아의 구원을 성취하여 주셨다. 이와 같이 그분이 한번 택한 자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시며 오직 사랑으로 모든 것을 자신이 세우신 선한 뜻대로 결코 성취하셨으며 성취하시고 있다. 그리하여 그분은 자신에 대하여 “나는 알파와 오 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3)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에서(눅13:6-9), 주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살려내심을 획을 히 제시하여 주셨다. 비유 시작에서부터 포도원에는 포도를 심어야 하는데 포도원에 포도가 아닌 엉뚱한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다. 즉 주인의 말씀을 거역하여 자신들이 맺고 싶은 무화과나무를 심었음을 의미한다. 처음부터 잘못 심어진 나무이지만 주인은 그들을 용서하시고, 무화과나무를 심었기에 그 열매를 기대하고 있었다. 주인은 인내하여 3년 동안이나 열매 맺기를 기다렸지만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찍어버리라”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그런데 포도원 지기가 나서서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13:9)라고 3년이 되어도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찍어 버려움을 당하여야 할 나무를 살려내기 위해 주인의 진노를 막아 나서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죽어가는 나무를 살려내어 열매를 맺게 하시겠다고 다짐하신다. 주님은 포도원에 포도를 심지 않고 무화과나무를 심은 잘못된 소재에 자신을 개입시켜 십자가 구원을 설명하시고 있다.

그렇게 예수님은 자신을 한 알의 밀알로 묘사하고 그 밀알이 썩어서 거름이 됨으로 말라비틀어진 나무에서 생명이 잉태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게 되는 십자가 구원 성취를 제시하신다. 말라비틀어져 전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가지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의 몸에 접붙여 그분의 생명으로 살아나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지 제거”는, 그렇게 제거해 버림을 받아야 하는 가지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결국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는 은혜의 복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4절에서 답을 주신다. “내 안에 머물러 있으라” ‘내 안에서 나에게 붙어있기만 하면 내가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음으로 너희는 반드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약속이다.

만약 내가 수시로 유혹에 빠져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됨으로, 죄를 짓게 됨으로, 또한 행위가 의롭지 못함으로, 또한 말씀대로 살지 못함으로, 믿음이 약함으로... 이와 같은 행위에 따라 구원이 얻어지거나 취소되거나 중도에서 탈락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과 위반되는 일이며, 그분을 영생이라고 부를 수가 없으며, 그분이 주시는 구원은 은혜와 선물이 아니다. 행위에 따라 줬다가 도로 빼앗아 가는 구원이라면,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는 단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에게서는 죄 밖에 나올 것이 없으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와 선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고 말씀하고 있다.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행위가 의로워서 구원을 약속받은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연약한 티끌로 지음을 받았기에 유혹에 빠졌으며, 죄와 죽음에 처한 죄인이었기에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아무런 대가도 조건도 없이 구원을 선물로 약속받은 것이다. 처음부터 의인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구원을 이루셨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처음부터 우리에게 행위에 따르는 구원을 요구하지 않고,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선물로 주시기로 창세전 하늘나라에서 정하신 선한 뜻이다.

그러므로 한번 받은 구원은 그분의 영원한 속성을 따라 영원한 것이다. 증언하시기를,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웹 2:8). 인간은 죄를 짓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며, 우리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 “예수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시 시니라”(히 13:8). 그분은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영원한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셨으며, 이는 영원부터 하늘나라에서 예정하신 일이기에 우리가 받은 구원은 영생이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으로 택하여 부르시고, 그분을 따르는 믿음을 주셨으며, 자신의 피로 우리를 잉태시킨 귀한 생명이기에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거나 버릴 수가 없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8-29)라고 영원한 구원과 영생을 약속하셨고 성취하셨고 입혀주셨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1:4-5).

예수 밖에 있는 가지는 불에 던져 태워진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어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하지만 생명이신 예수님의 안에 거하기를 원치 않는 가지들로 있다고 말씀하신다. 처음부터 그들은 포도나무에게 붙어있지 않은 가지들이다. 예수에게 붙어 있지 않은 가지들은 예수 밖에 있는 예수와 상관없는 자들이며, 그들에게는 생명의 열매가 약속되지 않은 세상 가지들이기에 당연히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으며 그 결국은 불에 던지게 된다고 확실하게 말씀하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어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4-6). 참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가지치기로 깨끗하게 농부가 가꾸어 주심으로 더 열매를 맺는 가지로 튼튼하게 자라도록 세워 주지만,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는 포도나무에 속한 가지가 아니기에 농부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양분과 수분을 나무에서 받아야 사는데 나무에 붙어있지 않는 가지는 이미 죽은 가지이기에 거두어 불쏘시개로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안에 거하여 참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는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들어 올리시고 방해하고 기를 막는 잔 가지들을 쳐서 깨끗하고 튼튼한 가지로 잡아주셔서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농부의 영원한 약속이 반영되어 있다. 이는 이미 약속된 언약으로 창세기 인간 타락에서부터 예수그리스도의 희생 제물로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실 것임을 약속하셨다(창 3:15).

두 번째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어 던져 사르게 하신다"라는 의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위에 덕지덕지 얹어놓는 인간들의 업적과 행위들에 대한 불사름이다. 이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만약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이 세상의 것들로 집을 짓는다면 마지막 심판 때 모두 불어 타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전 3:12-13). 이 세상의 재물과 힘에 근거한 인간들의 인본주의적 행위와 공력들을 예수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세운다면 하나님께서 몽땅 태워 버리시고 오직 예수의 공로만 오롯이 남겨 두시며 그 공로를 의지하여 예수에게 붙어있는 자만 천국에 넣으신다는 말씀이다. 불에 태운다는 것은 인간이 내어놓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태워 없애야 하는 불순물이기 때문이며 그것들이 제거되어야만 이 온전하고 깨끗한 아름다운 상태로 회복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어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라는 말씀은, 예수 안에 거하지도 예수에게 붙어 있지도 아니하고,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업적과 공로를 쌓아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모든 시도들을 말한다. 그것들이 종교적 행위이든 도덕과 윤리적 지킴으로 의롭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예수그리스도 밖에서 행하여지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 생명이 없는 악한 가지들이며 반드시 태워버리신다는 것이다. 농부가 기대하시는 열매는 선한 일, 착한 일, 도덕적 윤리적으로 합당한 일, 종교적 열심과 업적들이 아니다. 그러한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은 ‘독사의 새끼들’이여 너희가 열심을 부리는 그 종교적 행위가 바로 마귀의 행위이며 너희는 마귀의 자식이라고(요 8:41,44) 욕을 하셨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며 구제하며 도덕적 윤리적으로 흠이 없는 자로 살기 위해 거짓말하는 입을 바늘로 꿰매는 등의 자해도 서슴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사도바울은 거듭나기 전 자신을 가리켜 율법의 의로는 전혀 흠이 없는 자로 살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게 의인이라 자칭한 바울이 교회를 박해하고 예수를 핍박하는 괴수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행위와 업적들을 불어 던져 없앤다고 하신다. 그리하여 주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오직 하나만을 원하신다. “내 안에 거하라”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 예수라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그 가지는 저절로 과실을 ‘많이’ 맺을 수 있다는 은혜이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영원하신 주님과 영원을 사는 하나의 연합을 의미한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주님이 우리를 거처로 삼고 함께 계시기에 당연히 그분이 우리 안에서 당신의 성품에 합당한 성령의 열매를 맺어 주신다.

우리는 본래 참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였으며, 이 세상에 속한 들 포도를 맺는 가지가 되어버린 자들이었다. 때문에 아무리 열매를 맺느라 수고와 열심을 부려도 처음부터 참 포도나무가 아니기에 참 포도를 맺을 수가 없음으로 들 포도를 맺은 것이다. 이방 악한 가지가 참 포도를 맺는 가지가 되기 위해서는 참 포도나무의 줄기에 접목시키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패역한 모습 그대로 예수님에게 접붙임을 하게 하심으로 예수님의 점도 흠도 없는 생명력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올라 와 참 열매를 맺게 하신다.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이 구원자를 찾아가는 열심과 행위의 대가로 공로에 의해 얻어지거나 보존되는 인간이 붙드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내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천지가 아직 창조되기도 전에, 하늘나라에서 정하시고 이루어 놓으신 뜻이며 섭리이다. 때문에 처음부터 인간의 모든 행위를 배제하여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선물로 주시기로 정하셨다. 그리하여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으로 택하여 부르시고, 그분을 따르는 믿음을 주셨으며, 자신의 피로 우리를 잉태시킨 귀한 생명이기에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거나 버릴 수가 없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8-29)라고 영원한 약속을 주셨다.

이스라엘의 4000여 년 역사를 보면 그들은 끝없이 하나님께 반항하고 대적하며 범죄 하였다. 하지만 그분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약속대로 메시아의 구원을 성취하여 주셨다. 이와 같이 그분이 한번 택한 자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며, 끝까지 참고 인내하시며, 오직 사랑으로 모든 것을 초월하여 역사하신다. 마음이 강퍅하고 고집으로 못난 자도 끝까지 인내하시고, 시련을 허락하시며, 결국 그분 앞에 돌아오게 하신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하는 탕자의 비유를 주지 않았는가. 하지만 자신의 못난 성품과 고집 때문에 수시로 잔 가지들이 제거되는, 즉 자신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고통을 당하여 할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라고 징계를 받을 당시에는 즐겁지 않지만 그렇게 가지치기를 이겨낸 자는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은혜 속에 들어온 택함을 받은 자에 대한 구원의 시련이며 특권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대가를 지불한 지독한 사랑이기에, 그분은 한번 부른 자는 절대로 포기하지 아니하심을 성경 전체가 사랑으로 반복하여 설명하여 증거하여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참 포도나무로서의 신분을 자각하고 이방인의 들 포도나무와 같이 자신의 뜻과 소원을 위해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존재가치로 의존하려는 모든 시도를 멈추고 오직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안에 붙어 사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을 지향하게 된다. 성도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 자신의 지혜와 힘을 이용하여, 그리고 이 세상의 힘을 쌓아서 인간적인 행복에 도달하려는 모든 시도를 십자가에 못을 박는 것이다. 보잘것없는 겨자씨 한 알의 믿음으로 자신을 낮추고 겸손과 사랑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이 세상에서 먼저 살아내는 것이다.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농부이신 아버지에게 의존적으로 순종의 삶을 살아낸 것과 같이, 우리도 역시 예수님 안에 붙어 있어 예수님 의존적 존재로 그분이 이끄시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농부이신 아버지는 참 포도나무가 되신 아들에게 접목된 가지인 우리가 아들 예수를 닮은 열매, 즉 구원받은 성도들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여 더욱 풍성한 구원의 아들들이 맺어지기를 원하시며, 때문에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고 열심을 다하고 있음을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