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 14:4-12)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 나를 믿는 자는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요14:4-12
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으며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왔다고 말씀하셨다(요8:42), 그리고 이제 다시 아버지께로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함으로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14:3)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을 너희는 알리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아버지 집으로 가는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라고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이시며, 예수님 외에 구원의 길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확실하게 선포하여 주신다. 즉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곧 열릴 것임을 제자들에게 계시하셨으며, 너희도 곧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가 간 그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될 것이며, 그 길만이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임을 계시하신 것이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창세전부터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여 주신 영원을 사는 하나님의 나라, 즉 우리 아버지의 집이다. 주님은 이 세상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데리고 가시려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셔서 자신의 의로운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기시고 정결한 신부로 새롭게 잉태시켜 영원히 하나로 사는 구원을 이루셨다. 이 위대한 구원을 미리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마지막 성찬에서 세족예식을 진행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며” “다시 와서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2-3)라고 보장된 약속을 하신 것이다. 아버지의 집은 우리의 힘으로 노력과 의지로 공로와 업적으로 갈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길을 통하여서만이 들어갈 수 있음을 제시하여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라고 확실한 선언을 하신 것이다. 이는 창세전 하늘나라에서 완성된 묵시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기에 우리는 마치 철이 강한 자석에게 끌러가는 듯이 하나님의 은혜의 덮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로 불가항력적으로 끌러가는 것임을 계시하신 것이다.
예수만이 길이며, 그 길만이 진리요 생명이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 첫 서두에서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정확하게 증거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며”,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함과 같이 그분의 본체가 구원의 길이며, 영원한 생명이시며, 그 생명을 주시는 절대적 진리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성취하신 십자가 구원을 믿음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새롭게 거듭남으로, 영원한 생명을 입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라고 그 길의 목적지가 바로 아버지의 집이며 예수님 자신이 바로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구약 출애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이끌어내어 홍해를 갈리셔서 가나안으로 향한 길을 열어주셨으며, 광야에서 길이 되셔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품에 안으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셨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으며, 부족함 없이 지켜주시며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그 길이 바로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이심을 계시하셨다. 즉 구약에서 등장한 광야, 만나, 반석의 물, 놋 벰, 성막, 법궤, 율법과 제사 등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당신의 백성과 매일 함께 있게 하셨으며 한시도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셨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예수그리스도 품 안에 집어넣어 하나로 만드셔서 영원히 함께 거하는 구원을 성취하여 주심으로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며 생명이며 진리이심을 천하에 제시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행 4:12 새번역).
요한복음 10장에서, 주님은 당신이 친히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 우리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끄집어내어 당신의 품에 넣으셔서 영원한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여 주시는 길이며, 천국의 문이며, 생명의 꼴을 먹이시는 선한 목자이며 양의 문이라고(요 10:7) 선포하셨다. 비록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사53:6) 함과 같이, 우리는 죄와 사망의 길로 향하고 있었지만 우리 주님이 희생제물이 되어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여 주심으로 그분의 피의 공로로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주님 자신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절대적 진리로 오셨으며,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으며, 영원히 사는 생명을 입혀주셨다. 오직 당신만이 길이며 절대적 진리와 생명이심을 여러 면으로 증거하신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6:35); ‘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의 강이라’(7:38); “나는 세상의 빛이라”(8:12). “나는 양의 문이라”(10:7) “나는 선한 목자라”(10:11). 그분은 자신의 말씀대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요10:11). 즉 우리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공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한 것이다. 주님이 지신 그 십자가가 바로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요 문임을 제시하셨다(14:6). 그분이 이제 우리를 품에 안으시는 선한 목자가 되셔서 말씀을 생명의 떡으로 먹이실 것이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주어 당신의 신부로 거듭나게 하실 것이며, 우리의 빛과 길이 되셔서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실 것이며,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영생으로 하나로 살 것임을 제자들과 우리에게 확실하게 제시하여 주신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길과 생명이 되시기 위해 하늘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다 버리시고 이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이 되셔서 오셨다. 당신의 백성을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다시 살려내어 아버지의 품에 안기게 하는 화평을 이루시기 위해 당신이 먼저 몸이 찢기는 온갖 수난을 다 당하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 머리 둘 곳이 없이 가난한 삶을 사셨으며, 우리의 나음과 화평을 주시기 위해 온갖 매와 멸시와 수모를 당하셨다. 그분은 존귀와 영광과 섬김을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오히려 섬기는 종이 되셔서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온유와 사랑으로 죄인들을 섬기셨다. 이것이 바로 한 알의 밀이 되어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신 주님의 삶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내 놓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수많은 영혼들을 영원한 죄와 사망의 파멸에서 구원하시는 길이 되셨으며 진리와 생명이 되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그분의 생명으로 잉태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된 신부들이다. 그렇게 그분은 우리의 영생의 길이 되셨으며 그 길이 바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진리이심을 제시하여 주셨다(14:6)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9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보았다”는 말씀은 육적으로 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말씀으로 계시하는 아버지를 본다는 뜻이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알 수있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방법을 말씀으로 정하시기고 창세전에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를 말씀으로 이루셨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완성된 묵시를 이 세상에 펼쳐놓고 역사를 주관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으며, 요한은 영적 계시로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신 그 말씀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모든 만물은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에 나왔다고 바울도 증거하고 있다. “만물이 다 그분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그분을 통해서 생동하며 그분을 위해 존재합니다. 하나님께 길이길이 영광을 돌립시다” (롬11:36, 현대인 성경). 즉 천지가 창조되기 전 예수그리스도는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만물은 말씀이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고 통치되고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말씀’이라고 선포함으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되는 유일한 길이 바로 말씀임을 제시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나님이시니라“(요 1:1)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 내셨느니라”(요 1:18). 이 땅의 티끌로 피조된 육신으로는 절대로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볼 수 있거나, 알거나, 인식하거나,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으로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에게 나타나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땅의 존재는 타락으로 영이 죽어있는 상태이기에 스스로 하나님을 알거나 찾거나 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그리하여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말씀으로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말씀으로 그분을 보게 하시고, 말씀으로 그분을 알게 하셨으며, 말씀으로 진리를 깨닫게 됨으로 말씀으로 그분을 나의 구원자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의 ‘본다’는 진의는, 바로 말씀으로 영적계시로 주님을 알아보고 믿고 영적하는 거듭남을 통하여 비로소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즉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보는 유일한 길이 바로 말씀이다. 주님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24:44-45)라고 말씀하심으로 성경은 아버지 사랑의 본체인 예수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펼쳐나가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주님은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직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예수를 볼 수 있고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다는 말씀이다. 오직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예수가 누구이시며, 그 분이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며,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으며, 왜 우리의 구주가 되시며 구원과 생명이 되시며, 우리의 영원한 주가 되시며, 영원히 함께 하시는 영생인지를 알게 됨으로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바 아버지”가 되심을 보고 믿게 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기에 말씀으로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사도 요한은 예수그리스도를 한마디로 ‘말씀’이라고 부름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 알고 믿게 되는 유일한 길이 바로 말씀이심을 제시하고 있다. 그 말씀이신 예수님이 아버지를 계시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육신을 입고 자신을 계시하시려 오신 것이다. 하지만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보면서 그 누구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다. 제자들은 3년 넘게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였음에도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자들을 대표한 빌립이 예수님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말한 것이다. 이에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라고 말씀하신다. 즉 예수님이 곧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이시기에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면서 매일 생명의 말씀을 들려주셨고, 능력으로 기적과 표적들을 수 없이 행하여 보여주셨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기적과 표적으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함으로 예수님이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14:26).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눈으로 예수님을 봐서가 아니라 반드시 육체가 아닌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뚫고 들어오셔야만 이 영으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고 아버지를 보게 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은 이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시는 방법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영으로 계시하여 주심을 말씀하셨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무한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다 나타내어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진리의 말씀으로 오셔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전달하시며 자신을 계시하신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24:35).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말이 그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8).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 데도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이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요 6:63 새번역). 이와 같이 말씀이 곧 예수그리스도 자신이시기에 심판의 권세와 생명의 능력이 말씀에 있다고 하신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성경으로 기록하여 매일 일용할 양식으로 주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마 4:4). 말씀이 곧 생명임을 제시하셨다.
인간에게 주신 첫 계명의 말씀
하나님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며, 즉 말씀을 생명으로 주셨다. 첫 인간 아담에게 말씀을 계명으로 주셔서 당신의 말씀이 곧 생명임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6-17).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께서 “명하여 이르신 말씀”을 거역하자 곧바로 ‘죽음’이 내려짐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곧 생명임을 제시하셨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곧 ‘죽음’이라는 절대적 진리를 선악과나무를 통하여 보여주시고 알게 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면 곧 죽음이라는 것을 첫 인간 아담을 통하여 선포하셨다. 그리하여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자 곧바로 임한 것이 바로 ‘죽음’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죄와 죽음에 빠져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는 선악과를 따 먹지 않는 자로 영생을 사는 자로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그리스도의 임재를 ‘말씀’이라고 선언하고 만물이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기에”, “그 안에 생명이 있다”(요 1:3-4)고 선언하고 있다. 즉 성경은 잠시 사는 육체의 목숨을 생명이라 하지 않고 죽음이라고 하고(엡 2:5), 하나님의 말씀으로 잉태된 자를 생명이 있다고 하며, 그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이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즉 예수님은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며 그분 안에만 생명이 있음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 증거하고 있다. 때문에 그분은 말씀으로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며, 말씀으로 교통하시며,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며, 말씀으로 그분을 믿게 하시며, 말씀으로 영접하여 구원과 생명을 얻게 하신다. 우리가 그분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소통의 매개체는 바로 성경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본다’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빌립과 같이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며 육신의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며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과 같은 신비한 체험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한다. 하지만 보이는 것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수 없이 보고 체험하였다. 애급에서 일으키는 10가지 재앙을 보았고, 홍해를 갈라주셔서 바다를 마른 땅으로 건넜으며, 매일 밤낮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으며, 하늘에서 만나를 먹이셨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다. 그럼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불평불만하며 하나님을 배신하고 대적함으로 패역한 민족으로 광야에서 시체가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그들과 함께 살면서 수 없이 많은 기적과 능력을 행하여 눈으로 보게 하셨다. 귀머거기리가 듣고 소경이 눈 뜨고 앉음뱅이가 일어나고 문둥병이 깨끗이 났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하늘에서 떡을 내려 먹이셨고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시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없는 오직 능력의 주 만이 하실 수있는 수많은 능력들을 행하셔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계시하여 주셨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예수님을 통하여 계시되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멸시하고 대적하여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여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마 12:39)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예수님은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면 족하겠나이다’라고 요구하는 빌립을 향하여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14:8-11)라고 당신을 믿지 못하거던 당신이 행하신 일을 인하여 당신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행하신 일이라면, 피상적으로 볼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각종 병자들을 일으켜 세우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오병이어로 하늘에서 떡을 내려 만 명을 먹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과 이적들로 눈으로 직접 보고 체험한 사건들이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이적과 기사들을 행하여 보여주었음에도 그들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요 12:37).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6:36).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행하는 그 일”은 바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이 구원받아 생명을 얻는 십자가 구원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주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을 향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악하고 음란한 너희들은 눈에 보이는 기적과 이적으로 표적을 구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십자가의 죽음으로서 표적을 보이시겠다는 주님의 의지적 말씀이다. 오직 십자가 죽으심만이 구원과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핑계치 못하는 수많은 기적과 표적들을 보여 주셨으며,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수없이 들려주심으로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원자이심을 증거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였고, 사사건건 비난하고 배척하며, 멸시하고 조롱하며, 핍박하여 죽이려고 음모를 꾸며온 자들이었으며, 결국 자신들이 섬기는 율법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법으로 악용한 독사들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표적을 구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저지른 죄악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계시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도 볼 수도 없음이 증명 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이 세상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볼 수도 없게끔 처음부터 이 땅의 티끌로 만드셨다. 그리고 당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그 계시의 방법이 바로 당신의 아들이 어린양 희생제물이 되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함으로 당신의 백성들의 죄가 사하여지고 죽음에서 살아올라오는 십자가 구원 성취였다. 그분이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 우리는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그분의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나 영화로운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하나로 사는 하늘의 존재가 된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벗겨주어 영화로운 하나님의 아들로, 가장 아름다운 신부로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우리가 죄의 대가로 받아야할 멸시와 천대를 대신 받아 주셨으며,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겪어 주셨으며, 굴욕과 고문을 당하셨으나 잠잠한 양으로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런 대항도 반응도 없이 무력하게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셨다(사 53:3-7). 그리하여 이사야의 말씀대로, ‘그가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며, 그가 맞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얻었고 그가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아서’(사 53:5),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 십자가 고난과 사랑이시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4-56)라고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심을 제시하셨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 일”이다. 우리는 그분이 행하신 십자가 구원 성취로 예수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아버지를 보게 되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아버지 안에 계시는 하나임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14:11)라고 확실하게 말씀해 주고 있다.
육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가 없다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창조주가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의 천한 인간에게 내려오셔서 십자가 구원을 성취하여 주심으로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신랑이 되어 주심으로, 천한 우리가 영광스러운 ‘아들’로 귀한 ‘신부’로 거듭난 것이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0-5)이다. 이 땅의 육신의 이성과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도 믿겨지지도 않는 일이다. 이는 창세전 하늘나라에서 이미 완성된 묵시가 이 땅에 펼쳐지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이기에 이 땅에 속한 육신의 지식으로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구원의 성취는 이 세상을 초월하여 일어나는 하늘의 사건이기에 이 땅의 육체로는 그분을 인식할 수도 그분이 하시는 구원사역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리하여 그분은 친히 하늘 위로부터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 하셨으며 인간의 육을 입으셔야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실 수가 있었다. 하지만 육체로 오신 하나님을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였으며 영접하지도 않았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10-11).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눈에 보이는 능력으로 수 없이 많은 기적과 기사들을 행하여 주셨음에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며, 그 누구도 그 표적들이 계시하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고 십자가 구원과 생명을 읽어내지 못하였다. 그렇게 많은 세월을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매일 말씀을 듣고 능력으로 일으키는 기적들을 직접 눈으로 본 제자들도 예수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제자들을 대표한 빌립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의 영으로 제자들의 마음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제자들은 그 때 비로소 저주의 십자가가 영광의 십자가이며 구원과 생명의 십자가임을 알아보게 되었으며, 비로소 예수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었고 영의 아버지를 알게 되었으며, 그분 안에 있는 하늘나라를 인식하게 되었고, 그분 안에서 영으로 잉태되는 성령 거듭남으로 영생을 입게 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그분은 영이시기에 그분을 아는 유일한 길은 바로 육적 관념에서 벗어나 영의 말씀으로 그분을 아는 영적 체험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영의 일은 오로지 영이신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기에 육을 입은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6:63) 함과 같이,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오직 영의 계시를 받은 자에게만 영으로 이해되고 영으로 주님을 믿고 영접하여 생명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육의 차원에서 인식하고 지성으로 받아들이면 생명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법'(롬 8:2)이 되어 육체와 함께 멸망에 이르게 된다.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육으로 지키고 행하는 사람의 규칙으로 만들어 놓고 오히려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세워 하나님을 대적하게 됨으로 심판에 이르게 된 것이다. 육적으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을 굳게 지키는 행위로 의인이라 자칭하는 유대인들은 수천 년 동안 기다리던 하나님의 아들이 정작 눈앞에 나타나자 알아보지도 영접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지키는 율법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죄인'이라 정죄하고 대적하여 십자가에 못을 박는데 까지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도바울은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 5-7) 라고 정확하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사망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일은 내 주관적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분이 먼저 나를 택하셔야 하며, 먼저 나에게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 계시를 주셔야만 나는 비로소 영이신 하나님을 인지할 수가 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영접하여 성령으로 거듭나게 된 것은, 그가 택함을 받은 자녀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방 사마리아 땅을 밟고 우물가까지 찾아가 주셔서 영을 열어주시고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대립되는 방법으로 역사를 자신의 섭리에 따라 주관하심으로 이 땅의 존재는 육적으로는 절대로 그분을 알 수가 없다. 영으로 태어난 자와 육신에 속한 자는 하늘과 땅의 차이로 서로 완전히 다른 영역을 살기 때문이다. 영의 계시는 하나님 자신의 계시와 임재와 능력과 독립적인 주권이다. 인간이 노력하는 이성도, 배워서 취득하는 지성도, 경험으로 얻어지는 지혜도 아니다. 전적으로 그분이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영으로 이해되며 영으로 잉태되는 중생으로 하나님을 알아보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된다.
때문에 영으로 잉태된 자는 이 세상이 주체가 아니라 하늘나라가 주체이며, 열심으로 이 세상에서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육의 부인과 육의 죽음으로 영이 사는 일이며,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이며,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아바 아버지’가 되는 영적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영의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고 그 실상을 믿는 것이 바로 기적과 표적이다. 영의 사건은 육의 지성으로 믿어지거나 이해될 수도 설명될 수도 없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 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3-14). 즉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계시가 없이는 예수에게로 나올 자가 없음을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6:44)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장차 당신이 하시는 일을 동일하게 할 것이며, 또한 보다 더 큰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반드시 “나를 믿는 자”라는 주어가 조건으로 붙어있다. 주님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제자들과 우리에게 보여주신 “나의 하는 일”은, 자신을 철저히 비우시고 죽도록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여 종의 삶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섬겨 주셨으며, 어린양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과 고통을 당하셨으며, 도살당하는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당신의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십자가 사랑이시다. 사도 바울이 말씀한 봐와 같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6~8)이다. 바로 주님이 가신 그 십자가 길만이 구원과 생명이기에 제자들과 우리 성도들도 주님이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됨을 미리 제시하여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것이니라”(눅 9:23).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수 없이 많은 기적과 이적들을 행하셔서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것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여 주셨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눈에 보이는 기적과 표적들이 계시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의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으로 우리 마음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장막이 벗어지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 사람으로 잉태되자 더디어 영으로 하나님을 보게 된 것이다. 우리 안에서 새 생명의 창조가 일어나는 성령의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하는 영적 기적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제 십자가 구원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로 죄인이 모든 죄에서 벗어나 영생으로 태어나는 최대의 혁기적인 기적이 모든 믿는 자에게 임하게 되는 은혜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내 옛 사람 죄인이 죽고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다시 거듭나는 획기적인 기적이 눈으로 나타나 보이지 않지만 현실로 성도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행하신 일로 우리 안에서 맺어진 생명의 열매이다. 이는 육의 썩은 장막을 벗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잉태되는 새 생명이며, 이 땅의 죄인이 거룩한 하늘의 존재로 거듭나는 사건이며,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태어나 하나가 되는 연합으로 영원을 사는 영생으로 옮겨지는 최대의 기적이다. 바로 이 일을 십자가 죽으심으로 성취하여 주셨다. 십자가 죽으심으로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롭게 잉태되는 새 생명의 창조를 가리켜 주님은 “나의 한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그 일이 일차적으로 제자들과 우리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며, 이제 다른 이들을 살리는 복음전파에 우리를 동참시켜 주심으로 “너희도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의 진의는, 한마디로 주님이 가신 십자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며, 자기부인과 자기죽음의 십자가 삶으로 생명의 열매가 잉태되는 복음전파에 동참시키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계시한 말씀이다. 그 일을 하시는 분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에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라”라고 확신한 의지를 밝히셨다. 주님은 마지막 성찬에서 친히 종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요 13:15-16)라고 말씀하셨고, 그 전에도 십자가 길을 이미 제시하셨다(마 16:21, 24).
그럼에도 제자들은 주님이 곧 십자가를 지셔야하는 마지막 성찬에서도 누가 큰 자로 특권을 얻어 섬김을 받게 되는가를 고대하고 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눅 22:24). 그런 와 중에 주님은 무릎을 굽고 친히 종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 제자들이 기대하고 있었던 큰 자 되기의 욕망을 완전히 부숴버리고, 이제부터 너희는 이 세상에서 큰 자가 되어 다른 이를 지배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종의 삶으로 다른 이를 섬기는 십자가 복음의 발로 세상 끝까지 내 증인이 되는 자로 만들어 내시겠다는 뜻으로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13:16-17)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상전인 주님께서 종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으니 제자들도 주님이 살아내신 종의 삶을 그대로 따라서 살도록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며, 결코 주님이 사신 종의 삶으로 십자가 삶으로 끌고 가시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담고 있다.
주님은 자신이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으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의 모든 죄가 사하여지고 죽음에서 살아 올라와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듭나는 새 생명의 창조를 “나의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시고, 그렇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은 성도도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로 인도를 받음으로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성도는 이제 내 안에 뚫고 들어온 성령의 인도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아 주님이 하시는 ‘그 일’을 하게 될 것이며, 그 일이 바로 내가 부인되고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십자가 자기 죽음의 삶으로 다른 이들이 그리스도의 생명의 씨를 받아 죽음에서 살아 올라오는 생명을 낳는 일임을 주님이 먼저 행하여 본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내가 한 일을 저희도 할것이라”라는 그 일은 절대로 표면적으로 나타나 보이는 기적과 이적들을 행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알의 밀이 되어 썩어서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이 초기에 행하신 능력의 기적들은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과 영생에 관한 은혜의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기적 그 자체일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과 사도들도 초기에 똑 같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이적들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계시하는 표적 그 자체였다. 그들이 행한 기적과 이적들로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아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됨으로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들과 사도들에게 돌아온 것은 심한 박해와 핍박과 순교였다. 그 대표적 순교자가 바로 스데반 집사였으며, 하나님은 스데반 한 사람의 순교를 통하여 바울과 같은 복음의 선구자를 낳게 하셨으며, 모두를 흩어지게 하심으로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도화선으로 쓰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내가 한 일을 저희도 할것이라”는 진의이다. 예수님은 구원과 생명의 탄생은 영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육신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기에 “내가 아버지께로 감으로” 일어나는 일로 말씀하신 것이다. 즉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아버지께로 승천하신 후 성령으로 다시 제자들의 마음 안에 뚫고 들어와서 성령의 권능으로 더 큰 일을 주관하여 시행하실 것임을 계시하신 말씀이다. 그 큰 일이 바로 제자들과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감당하게 되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라는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이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자기중심의 삶에서 내가 부인되고 내가 죽음으로 다른 어떤 이들이 예수의 생명의 씨를 받아 예수의 신부로 잉태되는 그 십자가 삶은 결코 내 힘과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으로만이 가능함으로 주님은 제자들의 할 일이 바로 “나를 믿는 것”이며,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14:12)라고 오직 주님을 믿는 자에게만 나타나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이 주님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물을 때 주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요 6:28-30)라고 아주 간단명료하게 하나님의 일은 곧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고 정의해 주셨다. 즉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살아내신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을 살아 냄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씨를 태동시키는 생명을 낳는 복음의 길이 바로 성도가 가야하는 길이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삶을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한 알의 밀로 죽음으로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에 도구로 쓰이는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이 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주님은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이 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한마디로 성령의 사역을 가리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장차 성령께서 오시면 성령의 권능으로 예수님이 하신 일을 계속하실 것이며 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바로 이러한 주님의 약속이 성취된 사건이다. 성령의 권능으로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예수님의 몸 되신 교회가 세상 곳곳에서 세워지는 복음시대가 열리는 사건이며, 새로운 성령 시대가 열리는 최대의 사건이다. 예수님을 3번 부인하던 연약한 베드로가 성령의 권능으로 담대하게 주님의 증인이 되어 십자가 구원을 전할 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은 유대인들이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3,000 여명이 회심하여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행 2:37-41). 또한 사도 바울의 설교로 많은 유대인들이 회심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것이다.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행21:20). 이것이 바로 주님이 약속하신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14:12)라는 약속의 성취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나보다 더 큰 일을 한다”는 그 큰일이 바로 제자들과 사도들이 성령의 권능으로 행하는 복음 전파이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삼년 반 공생애 기간 동안 하신 일보다 더 많은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일들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마지막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라는 사명을 주신 것이다. 그 성령의 권능과 권세는 예수님이 주시며 세상 끝날 까지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시기에 제자들이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8-20). 바로 주님 자신이 성령으로 제자들과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육신으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주님이 하시며, 그 하나님 나라 확장과 완성의 사역에 우리를 동참시켜 주시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큰일인가! 우리는 다만 그분이 하시는 구원 사역에 동참하여 도구로 쓰임을 받는 것뿐이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이미 오른편 양과 왼편 염소의 비유로 상세히 설명하여 주셨다(마 25:31-46). 주님은 오른 편에 있는 양들을 향하여, 주님이 배고프고 목마르고 벌거벗고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 친히 와서 돌봐 주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러한 질병과 사망의 증상들을 가진 분이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우리가 굶주리고 목마르고 죄로 말미암아 병들고 죽음의 어둠에 갇혀 있을 때, 그분이 친히 찾아와 주셔서 생명의 떡을 먹여주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마시게 하시고, 각종 질병들을 고쳐주시고, 한없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은혜를 입혀주셔서 새로운 생명을 주어 신부로 맞아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이 하신 일들을 양들에게 전기시켜 주셔서 양들이 한 일로 말씀하시고 있다. 그래서 양들은 “우리가 어느 때에 그런 일을 하였나이까”(마 25:37) 라고 자신들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극구 부정한 것이다.
오른편 양들은 자신들이 바로 주님이 나열한 그 질병의 증상들을 가진 사망에 던져져 있었던 자들임을 아는 자들이며, 예수님이 친히 찾아와 주셔서 자신들을 그러한 죄의 증상에서 구원하여 주셨기에 생명을 얻었음을 정확하게 아는 자들이다. 바로 그분이 우리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가져가시고, 하늘의 신령한 말씀을 일용할 양식으로 먹여 주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어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잉태하게 하셨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자들이다.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자격도 조건도 대가도 없이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공로로 구원받은 그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너무나 잘 아는 자들이다. 그렇게 모든 일을 완벽하게 성취하여 주시고, 그분의 의로운 행함을 당신의 백성에게 전가시켜 그들이 행한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위대하시며 의로우시며 선하시며 영생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의 연약함과 더러운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음으로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자각할 때 격발되어 나오는 것이 바로 십자가 앞에서 항복하게 되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이다. 그래서 양들은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에, 왼편 염소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공양하였다고 자신들의 공로와 업적들을 주님 앞에 나열하여 놓는데 주님은 “너희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라고 그들이 주님을 위해 했다고 내놓는 것들을 전면 부정하시고, ‘불법적 행함’라고 말씀하신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이와 같이 염소들은 자신들이 행한 일을 의와 공로로 쌓아두어 하나님 앞에서 따지고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며 이를 방패로 자신들의 이름을 높여 영광을 챙겨가지더라는 것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염소로 태어났기에 이들에게서 나오는 행함과 공로와 업적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봐와 같이,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며,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 (마 23:25-28) 일뿐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라고 그들의 종말을 선포하신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 주님의 증인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그 십자가 길은 결코 넓고 평탄한 길이 아니다. 좁고 협착한 길이라고(마 7:13-14) 말씀해 주셨다. 한마디로 다른 이들이 예수 생명으로 잉태하여 살아올라오는 생명의 태동은 내가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어야만이 가능한 일이다. 진리의 말씀으로 나 자신을 죽이는 절대적 순종이다. 나를 세우는 것도 아니고 내 의와 영광을 높이는 일은 더욱 아니며, 자기 자랑도 아니며 자기 가치를 증명하는 것도 아니며 자기 소원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살아나며, 세상을 향하여 죽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롬 6:8-11).
우리는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구원받은 자들이며, 이 세상에서 주님의 재림의 날까지 생명을 잉태하는 영혼구원에 한 알의 밀로 썩어서 없어지는 십자가 삶으로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머리 둘 곳 없는 외로운 길이며, 자기부인과 십자가로 점철되는 고난의 길이며, 좁고 협착한 험난한 길이다. 사도바울은 성도의 신앙생활을 아주 정확하게 정립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