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 13:8-20)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요 13: 8-20
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 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베드로의 거절
당시 유대 사회의 관습상 발을 씻어 주는 일은 가장 천한 일이었고 종들 중 가장 천한 종이 하는 일이었기에 스승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는 일은 충격적이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늘의 왕이신 그분이 죄인의 발을 씻어주시기 위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있을 수없는 일이며, 주님의 그러한 파격적인 행동에 제자들은 몹시 당황하였기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발 씻김을 강력하게 거부한 것이다. 베드로의 거부는 너무나 송구스러운 겸손에서 단지 발을 씻는데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의 은혜를 거부하는 교만이었기에 주님은 즉시 단호하게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13:8)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거부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을 뜻하며, 자신의 일은 자신이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교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큰 자가 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주님과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귀중한 성찬에서 큰 자 되기 위한 다툼을 벌인 것이며, 종이 되셔서 발을 씻어주시는 주님에게 특별한 대우받기를 원하여 조금도 송구함이 없이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13:9)라고 극과 극을 달리는 황당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베드로는 큰 자가 되어 섬김을 받기를 원한 것이지 섬겨드리는 종이 되기를 전혀 원치 않았다는 것이 스스로 예수님 앞에 폭로당한 것이다.
베드로의 세족 거절은 신랑 되신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거절한 것이 된다. 바로 자신의 정체성과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즉 자신이 바로 죄인이며 스스로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는 무능함과 불가능함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며, 비록 ‘예수님은 진정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위대한 고백은 하였지만 마음으로는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 하시리이다”(13:8)라고 강력하게 거부한 것이다. 만약에 한 끼 밥도 동냥하여야 먹을 수 있는 거지가 동냥을 하면서 거저 주는 음식을 공짜로 받을 면목이 없다고 거절한다면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거지는 자신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누군가가 음식을 주지 않으면 곧 굶어서 죽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동냥을 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음식을 주면 덥석 받아먹고 감사하다고 표현하는 것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나 죄 속에서 살다가 죄의 삯으로 죽음을 안고 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엡 2:1)들이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불가능한 죄인이며 사망에 처해 있음을 깨닫고 인정하고, 그냥 더러운 발을 면목 없이 내밀어 깨끗하게 씻어주심을 면목 없이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목이 마르고 먹을 것 없이 죽어가는 거지가 물과 음식을 거절할 수가 없는 것처럼 살기 위해서는 거저 주시는 것을 받고 감사하며 그 은혜를 마음에 새기는 것뿐이다. 즉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도 또한 받을 자격이 없는 완전한 죄인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은 거지와 방불한 존재이다. 다만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나를 그토록 사랑하여 생명을 주시는 그분 안에 들어가 그분만을 꼭 붙들고 그분 안에서 영원히 함께 있기를 원하며, 그것이 참 행복임을 깨닫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씻음 받는 것을 자기 의지대로 받고 싶으면 받아들이고 받기 싫으면 거절하여도 된다는, 즉 자신의 발이기에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여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13:8)라고 거부한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단호하게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 즉 내가 너희 발을 씻어주는 일은 이미 창세전에 정해진 구원에 관한 아버지의 섭리이기에 너희가 스스로 결정하는 일이 아니며, 만약 내가 너희를 씻지 않으면 너희는 나와 상관없는 자로 죄와 사망에 노출된 구원에서 배제된 자들이라는 무서운 말씀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내 몹시 당황해하는 베드로에게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13:10)라고 위로해 주신다. 주님은 이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여 주실 것이며 정결한 신부로 새롭게 잉태시켜 영원히 한 몸으로 영생을 살게 됨을 제시하여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온몸이 깨끗한 자”라고 칭하여 주신 것이다. 이제 자신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제자들의 모든 죄가 영원히 도말되고 정결한 신부로 신랑 되신 예수그리스도와 사랑의 띠로 하나로 묶으시는 예수님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영원한 신부로 삼아 주심을 미리 제시하신 세족 예식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첫 서두에서 선언하고 있다.
제자들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다만 죄인의 모습 그대로 자신을 예수님에게 맡긴 것이며, 예수님이 스스로 종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기에 정결한 신부가 된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친히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서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몽땅 도말하여 주심으로 피의 공로로 죄가 사하여 지고 정결한 신부로 새롭게 탄생되어 신랑과 하나가 되는 영원한 혼인을 계시하는 세족이었다. 그럼에도 신랑의 한없는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한 베드로가 거부반응을 일으켜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을 거절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데 대하여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그렇게 거절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면목 없이 앉아서 더러운 발을 내밀어 우리 주님께서 친히 씻어주심으로 정결한 자가 된 것이다. 도저히 불가능하고 추악하고 더러운 죄투성으로 탐욕과 탐심으로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던 패역한 죄인이었다. 그런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과 공로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다만 더러운 죄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받은 면목 없는 자들이다. 그렇게 구원은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으로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어짐을 확실하게 제시하여 주신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세족예식이다. 베드로는 더디어 나중에 이 진리를 깨닫고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라고 오직 십자가 구원만을 외치며 십자가 복음을 위해 순교까지 가게 된다.
죄 사함을 받지 못한 가룟 유다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하늘나라 왕이시며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예수님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었고, 모든 것의 주님이시지만 모든 것의 종이 되는 낮은 자리로 내려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섬겨주셨으며, 자기 백성들을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 친히 유월절 희생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향한 영원한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반면에, 마귀의 후손을 대표한 가룟 유다와 같은 이 세상 육신에 속한 자들은 오로지 육신의 욕망을 이루는데 목적을 두며, 오로지 내 육의 편리와 유익과 탐욕을 채우는 ‘자아’를 추구하며, 오로지 물질과 부귀와 명예에 가치를 두고 있다. 즉 이 세상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들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마귀의 후손을 상징하고 있었기에 마귀와 한 통속이 되어 예수님을 배신하고 예수님을 팔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이다. 비록 예수님은 자신을 팔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가룟 유다의 발도 씻어주셨지만 유다는 죄 사함과 온 몸이 깨끗하게 되는 십자가 구원의 대상이 아니었음을 주님은 확실하게 밝혀 주신다. 즉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십자가에서 흘리신 의로운 피는 당신의 백성을 상징하는 제자들에게는 온 몸이 깨끗게 되는 영원한 죄 사함과 구원과 생명의 은혜가 입혀지지만 유다만은 아니라고 확실히 말씀하신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13:10-11).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13:18)라고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은 12 제자 중 자신을 팔아넘길 유다를 가리켜 “마귀”라고 부르셨으며(요 6:70),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마귀’로 택함을 받아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이미 구약 (시 41:9)에서 예언되어 있었음을 말씀하신다. 즉 성경 예언대로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마귀의 역할을 하도록 주님 곁에 두셨다는 말씀이다. 때문에 주님은 실수 많은 제자들은 끝까지 붙들어 주셨지만, 유독 가룟 유다만은 붙들어주시지 않으시고 스스로 지옥을 택하게 내버려 두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유다에 대하여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 라고 말씀하심으로, 유다의 운명이 마귀로 태어나 지옥으로 떨어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됨으로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였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어차피 마귀로 정해진 인생으로 영원한 지옥 고통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며 좋았다는 무서운 욕설이다.
주님은 처음부터 마귀의 역할을 하는 유다도 차별 없이 사랑하셔서 3년 동안 함께 하시면서 미워하거나 질책하거나 정죄하는 일이 없으셨다. 다만 묵묵히 유다가 가지고 있는 인성 그대로 인정하셨으며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실 때 유다의 발도 씻겨 주셨다. 그리고 그런 유다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창피를 주시지 않고 조용히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13:27)라고 유다만 알아듣게 말씀하셨다. 비록 자신을 팔아넘겨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악한 제자였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긍휼과 사랑의 성품으로 한결같은 마음으로 유다를 대하여 주셨다. 하지만 구원만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는 이 세상 모든 자에게 해당되는 죄 사함과 구원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 속한 “자기 사람들”에게만 베풀어주시는 은혜임을 확실하게 제시하여 주신다.
주님의 사랑은 완전하시며 원수까지도 포옹하시는 조건 없는 온전한 사랑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해 주님은 마지막 끝까지 유다에게도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의미에서 유다의 발을 씻어주셨다. 주님은 자신의 성품을 따라 모든 인간에게 차별 없는 보편적인 사랑과 배려를 베풀어 주시는 ‘사랑’이심을 나타내셨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사랑”이라고 부르며 서두에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양립할 수 없는 두 구절을 연결하여 예수님의 무한하신 조건 없는 사랑을 제시하신 것이다. 첫 서두에서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사랑을 선포하시고, 곧바로 이어서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13:2)라고 갑자가 가룟 유다를 등장시킴으로 주님은 자신을 팔아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마귀로 등장한 가룟 유다까지도 사랑하셨음을 계시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신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진의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3-48).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그 사랑에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는 차별 없는 온전한 사랑이라는 말씀이다. 그 사랑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 은혜를 베풀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는” 보편적인 사랑임을 계시한다. 당신께서 택한 백성이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또한 이 세상 육신의 사람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보편적인 은혜를 차별 없이 내려주신다고 확실히 말씀하여 주시고 있다. 즉 하나님은 온전하신 사랑이시기에 그분은 모든 인간에게 차별이 없이 해와 비와 공기와 자연의 모든 것을 공유하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하고 마귀의 역할로 당신을 팔아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마귀임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차별 없이 가룟 유다를 3년 동안이나 옆에 두시고, 마지막 성찬에서 발까지 씻어주신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까지 자기를 비방하며 욕하며 침을 뱉으며 죽이라고 아우성치는 군중과 창을 들고 자신을 찔러 죽이는 로마군, 모든 이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용서하여 달라고 부르짖으셨다. “아버지여 저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용서와 사랑의 극치를 나타내심으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자신을 죽이는 원수까지도 사랑하심으로 아버지의 완전하신 사랑과 의와 영광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당신의 백성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들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셔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 어떠한 대적도 욕설도 멸시도 조롱도 채찍도 죽음도 당신의 백성에게 향한 한없는 사랑을 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십자가 사랑의 실체를 깨달은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구하여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다(행 7:59-60). 그럼에도 하나님의 그 위대하신 한없는 사랑을 거부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가룟 유다와 같은 마귀에게 속한 이 세상 육신에 속한 자들이며 그들은 스스로 구원과 생명을 거절하고 배척하고 대적하며 멸망을 선택하였음을 성경은 반복하여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의 세족 예식은 원죄와 자범죄에 관한 회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너희는 이미 목욕한 자이기에 온 몸이 깨끗하기에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목욕을 하여 깨끗한 자가 되었기에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영원히 도말하여 주심으로 정결한 신부로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임을 확증하여 주시는 말씀이다. 즉 이제 십자가의 피로 모든 죄가 씻기어 정결한 신부가 되었음을 깨닫게 하는 세족 예식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족 의식은 원죄는 주님이 해결해 주셨으니 매일 발 씻는 행위로 자범죄를 회개하여 매일 죄 씻음을 받으라는 뜻이 아니다. 즉 너희는 온몸이 깨끗하게 되었으니 매일 발을 씻는 행위로 매일 짓는 죄를 회개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를 왜곡하는 잘못된 해석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사하거나 없이 하는 그 어떤 기능도 능력도 아예 없이 처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으며,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이 죄악된 세상에서 죄인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죄밖에 없기 때문에 죄만을 생산하며 자신이 짓은 죄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엡 2:1)라고 부르고 있다. 처음부터 인간에게는 죄를 없이하는 기능이 없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없이하여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만 정결케 되는 십자가 구원을 성취하여 주셨다. 그러므로 정결은 손을 씻고 발을 씻는 매일 반복되는 회개로 죄가 사하여지거나 깨끗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이 죄 사함을 받아 영원히 정결한 자로 새롭게 태어나는 새 생명의 창조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정결하게 하는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정죄할 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에서 입을 통하여 나오는 것들이라고 말씀하신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18-20). 예수님은 열심히 정결 의식을 행하여 겉으로는 의롭고 경건한 자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자처럼 자신을 위장하고 마음으로는 오로지 자신들의 의와 영광만을 추구하는 겉과 속이 다른 자들의 이중적인 삶이야말로 썩은 송장과 같은 삶이라고 지적하신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5, 27-28)라고 거침없이 경건한 행위를 추구하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폭로하셨다.
사람이 더러워지는 것은 타고난 마귀의 본능으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죄의 본성이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오로지 죄뿐이며 그 어떤 것으로도 절대로 마음속 깊이 박혀있는 죄의 뿌리를 제거할 수가 없다고 성경은 반복하여 증거하고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 3:10-18).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인간의 타고난 마귀적 본능을 아주 철두철미하게 폭로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족은 정결 의식으로 매일 범하는 자범죄, 즉 행위 죄를 회개하라는 윤리적 교훈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세족 예식은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당신의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정결한 신부로 삼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주시는 복음의 계시이다. 이제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마지막 끝까지 자신의 피를 몽땅 흘리시고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심으로 자신을 아낌없이 드리는 예수님의 기름부음이 우리에게 쏟아부어짐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탄생되는 성령 부으심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세족예식 전에 바로 12장에서 마리아의 향유 도유를 등장시킴으로, 그 향유의 도유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몽땅 쏟아부으심으로 그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도말되고, 그 물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가 되어, 즉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심으로 우리를 신부로 잉태시켜 영원히 하나가 됨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직전에, 최후의 만찬에서 ‘나의 피를 마시고 나의 살을 먹으라’라고 말씀하시고, 우리를 신부로 삼아주시기 위해 친히 신랑이 되셔서 무릎 굻고 신부의 발을 씻겨주셨다.
이와 같이 주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아버지와 당신의 뜻이었기에 기꺼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오셨으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으며,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주시는 죽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사랑하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 자신의 권능으로 다시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점도 흠도 없는 의로운 생명으로 새 신부로 잉태시켜 주셨다. 십자가의 사랑은 바로 우리 주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고난과 고통과 수치와 수모를 모두 당하시고,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가장 쓰디쓴 대가를 지불하신 희생이다.
그리하여 요한은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13:1)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 사랑의 절정은 우리의 죄를 자신에게 전가시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죄의 고통과 죽음을 당하시고, 우리에게는 영원히 사는 생명을 쏟아부어주시는 은혜이다. 즉 그분이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위해 피와 물을 몽땅 쏟아내심으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6) 함과 같이 우리를 신부로 맞이하여 영원히 하나가 되게 하셨다. 이것이 주님이 당신의 신부를 위해 자신의 피를 몽땅 흘리신 사랑의 결합이다. 그리하여 장사에 쓰이는 또한 결혼식 신랑에게 뿌려드리는 향유 옥합을 든 마리아가 잔치에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거룩하신 피 흘림과 기름부음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것을 화목하게 하여 아들이라 신부라 칭하여 주시는 그 은혜로운 복음을 계시하여 예수님이 친히 신랑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신부로 맞아주시는 세족 예식이 등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원죄는 해결되었으나 매일 짓는 자범죄는 매일 발 씻는 행위처럼 회개로 정결을 유지하여 성화되어야 한다고 행위의 의를 강조하고 있다. 즉 ‘고해성사’와 같은 회개로 매일 짓는 죄를 자복함으로 구원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신 십자가 영원한 죄 사함에 대한 모독이다. 우리가 날마다 발을 씻는 행위처럼 날마다 짓는 죄를 자복하는 회개로 죄가 없어지거나 사하여 지거나 의로워지거나 성화로 구원이 유지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즉 회개가 우리 죄를 깨끗이 씻어주거나 우리를 의롭게 하는 효능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철저한 회개를 강조하며 모든 인간은 양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찔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회개는 구원과 생명을 동반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회개하지 못한 죄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면 우리에게는 영원한 멸망일 뿐 살길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이 사는 동안 매일 생각으로도 마음으로도 말로도 행위로도 죄를 떨쳐버릴 수 없는 마귀의 본능을 가지고 육적 욕망을 이루는 죄인의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에 죄를 떨쳐 버릴 수도 죄가 쏘는 사망을 피할 수도 없는 것이 육신으로 사는 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회개의 참 의미
회개는 오직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임하게 되는 죄에 대한 깨달음과 용서, 즉 죄를 완전히 도말하여 없애주시는 영원한 사하심과 영원한 생명이 임하는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다. 인간의 주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 주셔서 영적 눈을 열어주심으로 내가 바로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나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과 그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실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는 영적 계시를 말한다. 즉 “나는 누구인가?” “왜 나는 죄를 짓을 수밖에 없는 불가능한 존재인가?” “누가 나를 이 죄와 사망의 지옥에서 건져줄 수 있는가?” 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과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의 은혜를 갈망하는 믿음을 그분이 이미 택한 자녀의 마음에 겨자씨로 심어 주셨기에 그분이 친히 싹이 나도록 가꾸시며 장성하게 하시며 열매를 맺게 하신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 즉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엡 2:1) 자신의 실체를 인식하는 그 돌이킴은 모든 자에게 일어나게 되는 회개가 아니다. 오직 창세전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은혜를 입혀주심으로 깨닫게 되며, 즉 그분이 먼저 나를 찾아와 주셔서 불러내어 주시고, 나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죄에 대한 깨달음과 의에 대한 진리를 가르쳐 주심으로 죄에서 돌이키는, 즉 옛 죄인이 죽고 새 생명이 잉태되는 획기적인 전환을 말한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요 16:8). 그러므로 회개의 주체는 인간 측에서 일어나는 인간 주도가 아니라, 그렇게 죄를 짓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태어나 사망의 몸으로 던져진 자신의 실체를 알아보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가르침과 인도를 뜻하며 불가항력적 은혜의 덮음으로 깨닫게 되는 것을 성경은 ‘회개’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눅 15:3-10)에서, 양 100 마리 중 99 마리는 주인을 잘 따라 길을 잃지 않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주인이 진정 원하시는 양은 99 마리 의인이 아니라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이었다. 그 한 마리가 본래 주인에게 속해 있었던 양이었기에 주인은 오직 자신에게 속한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것이다. 잃어버려진 양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회개하고 스스로 목자를 찾아온 것이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없는, 잃어버려진 그 상태로 있는 것이 바로 양의 역할이다. 길을 잃은 양은 목자가 먼저 찾아와 주셨기에 다시 주인의 품에 돌아온 것인데 주님은 ‘회개’하였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잃어버린 드라크마에서도 드라크마가 스스로 자신이 잃어버려졌음을 깨닫는 회개로 주인을 찾아온 것이 아니다. 드라크마는 자신이 잃어 버려졌음을 알 수도 회개할 수도 찾아다닐 수도 없는 생명이 없는 물체이다. 그 드라크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물체이지만 다만 화폐라는 값어치가 있는 것뿐이며, 주인에 의해 찾아진 것이며, 주인이 찾아낸 것을 주님은 ‘회개’한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양이나 드라크마는 잃어버려진 그 상태에서 아무것도 할 수없는 그 자체이며, 모두가 주인의 열심에 의해 찾아짐으로 주인의 품에 안겨진 것이다. 주님은 이 비유에서 목자가 원하는 양은 100 마리 전부가 아니라 그중 한 마리가 택함을 받은 양이었으며, 잠시 길을 잃고 있었지만 반드시 목자에 의해 되찾게 되며, 하늘나라로 복귀되는 예정과 편애를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잃어버림’이라는 핵심적 문구를 쓰심으로 이들은 처음 소유된 소속지가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4)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5) 함과 같이, 우리는 본래 그리스도에게 속한자였으며, 다만 창세전 정하신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목적으로 잠시 육신을 입고 이 세상 속에서 죄인으로 태어났고, 잃어버려진 상태로 방치된 자 같이 보이고, 방탕한 자로 죄와 죽음에 버려진 자 같이 보이지만, 결코 버려진 자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죄와 죽음에 처해 있는 우리를 결코 찾아내셔서 자신의 신부로 맞이하여 주시며, 아들로 아버지께로 돌려보내 주신다는 약속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7-39).
그러므로 ‘회개’는 올바른 행실에 관한 그릇됨의 뉘우침이 아니다. 주님은 올바른 행실로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을 원하지 않는다고 확실히 말씀하시고 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 17).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주도권이 바로 주님에게 있다고 확실히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와 주셔서 은혜를 입혀주시고 영의 눈과 귀를 먼저 열어주셨기 때문에 “내가 바로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아보는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로 인식하는 것이 바로 ‘회개’이지, 매일 짓는 행위의 죄를 자복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도의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회개이기에 성령님의 가르침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는 항복이며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는 삶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나에게 임하여 그분의 ‘의’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죄가 이미 용서되었음을 깨닫고 죄인으로부터 의인의 길로 들어서는 방향 전환이다. 즉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에게 전가됨으로 그분이 내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심으로 그분의 피의 공로로 모든 죄가 이미 사하여 졌음을 믿고 그분 안에 거하는 믿음이다. 마지막으로, 회개는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 것과 성령의 법으로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빛과 생명 되신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되는 거듭남으로 그분의 신부로 탄생되는 것을 동반한다.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6-17)라고 선포하신다.
복음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다윗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의 남편을 죽인 반드시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심판의 대상이었다. 나단 선지자가 율법으로 그의 죄를 지적할 때 다윗은 재를 뒤집어쓰고 통곡과 금식의 회개 대신, 자신의 죄를 영원히 도말하여 죄와 사망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십자가 피의 공로를 영으로 깨닫고 구한 것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시 51:7~8). 다윗은 아직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이 성취되기도 전에 우슬초, 즉 어린 양의 피로 나를 정결케 하며, ‘주께서 꺾으신 뼈’, 즉 십자가 죽으심으로 자신의 모든 죄가 이미 사하여지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십자가 구원을 구한 것이다. 복음을 깨달은 다윗은 하나님은 매번 드리는 짐승의 제사를 원하시지 않는다고 선포한다. 하나님은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기에”(시 51:16-17), 제사 없이 자비와 긍휼과 은혜의 덮음으로 자신의 죄가 도말 되여 깨끗하여 졌음을(시 51: 1-2) 믿고 기뻐하며 찬미한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모태 중에서 죄인으로 잉태되어 나왔기에(시 51:5) 죄인으로 태어나 죄를 짓을 수밖에 없는 불가능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마음속 깊이 박혀있는 그 본질적 죄는 회개로 행위의 노력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어린양 피로만이 완전히 제거되고 도말되는 복음을 깨달은 것이다. 다윗은 자신 안에 뿌리박고 있는 근본적인 죄의 뿌리 즉 죄의 본질을 영원히 제거하여 주시는 어린 양의 십자가 피를 구한 것이다.
의인의 회개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이미 나의 모든 죄가 용서되고 없어졌음을 깨닫는 자유이며 진리를 깨닫는 기쁨으로 그분의 생명 안에 거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13:10)라고 말씀하심으로 오직 십자가의 피로서 모든 죄가 정결케 됨을 제시하신 것이다. 즉 회개의 주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 측에서 일어나는 인간 주도가 아니라, 그렇게 죄를 짓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태어나 사망의 몸으로 던져진 자신의 실체를 알아보고 십자가 구원을 갈망하게 하시는 영적 계시를 그분이 먼저 주신다. 그리하여 주님은 당황해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13:7)라고 말씀하여 주심으로 장차 그분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라는 말씀은 원죄는 용서되고, 자범죄는 스스로 발 씻는 행위와 같이 날마다 죄를 자복하는 회개로 용서를 받는다는 뜻으로 주신 말씀이 절대 아니다. 예수 십자가는 “다 이루었다”의 선포와 함께 모든 죄,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의 영원한 사함이며, 모든 죄의 사함이다. 십자가의 본질은,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저주와 죄와 죽음이 영원히 없어지는 완성이다. 히브리서 10: 10-14 에서 단번에 흘린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제사로”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분이 흘린 피는 단 한 번의 제사로 완전하며 영원하시다. 오직 십자가의 피로 구속받은 것을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이라 칭하여 주심으로 죄가 다시는 나를 주관치 못 한다(롬 6:14)라고 바울은 확실하게 말씀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 자신의 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 영원히 우리 죄를 없애주셨기 때문이다(히 10:10-14). 그리하여 바울은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 지어다”(롬 6:10,11),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라고 선포하고 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내려진 모든 저주와 죽음을 완전히 깨뜨리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여 우리를 의인이라 칭하여 주시고, 영화로운 아들로 신부로 삼아 주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즉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기에 이제부터 나는 그분에게 완전히 속한 하나가 된 의인이며 신부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누가복은 22장 24절에 보면, 제자들은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이 왕위에 오르시면 누가 큰 자로 특권을 얻어 섬김을 받게 되는가를 고대하고 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주님이 겉옷을 벗고 수건을 두르고 종이 되어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 제자들이 기대하고 있었던 큰 자 되기의 욕망을 완전히 부숴버리고, 이제부터 너희는 이 세상에서 큰 자가 되어 다른 이를 지배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종의 삶으로 다른 이를 섬기는 십자가 복음의 발로 세상 끝까지 내 증인이 되는 자로 만들어 내시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3:16-17)라고 말씀하심으로 상전인 주님께서 종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으니 제자들도 주님이 살아내신 종의 삶을 그대로 따라서 살도록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며, 결코 주님이 사신 종의 삶으로 끌고 가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요17: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라는 사명을 주신 것이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주님과 동고동락하면서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과 모든 말씀을 지켜보고 듣고 마음에 담은 것이다. 하늘나라 왕이시며 메시아이신 우리 주님이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종이 되어 제자들과 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겨주셨다. 각종 질병에 걸린 자들을 고치셔서 정결한 자로 자유를 주셨으며, 하늘의 떡을 먹이셨으며, 생수를 마시게 하셨으며, 죄로 죽은 자를 의인으로 살려내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13:19)라고 말씀하여 주신 것이다. 즉 예수님이 살아내신 종의 삶으로 제자들을 오로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순종하여 스스로 낮아지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자로 끌고 가시겠다는 의지적 표현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3-15)라고 하늘나라의 원리로 큰 자의 삶이 바로 이 세상에서는 종의 삶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순종과 겸손의 삶으로 이끌려 가게 됨을 제시하여 주셨다.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이 세상에서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제자들의 지배욕과 권력과 권위주의 욕망으로부터 해방시켜주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선생이라 또는 주”(13:13)라고 불렀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주와 또는 선생”이 되었다고(13:14)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먼저 선생으로 인지하고 ‘주’라고 시인하기에 ‘선생과 주’라고 불렀지만, 예수님은 처음부터 제자들의 ‘주’ 이시며 먼저 주종 관계요 그다음에 가르치는 선생으로 사제 관계임을 명백하게 제시하여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3:13-14)라고 말씀하심으로 종이 상전의 발을 씻기는 이 세상 원리와 관습을 완전히 뒤집고, ‘주’이신 주님이 종이 되어 종의 발을 씻기시고,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는 것으로 큰 자가 종을 섬겨드리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를 가르쳐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세족예식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섬기는 자로 오셨음을 확실하게 보여주시는 그림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 하늘나라 왕이시며 메시아이신 우리 주님이 종의 형체를 입고 오셨으며, ‘주’ 이시지만 종이 되어 제자들을 섬겨주셨으며, 스승이시지만 종의 모습이 되셨으며, 목자지만 양의 모습이 되어 도살당하는 희생양으로 십자가를 지셨으며, 수치와 멸시와 고난과 고통을 감당하시고 십자가 구원을 성취하심으로, 영광의 십자가로, 구원과 생명의 십자가로, 용서와 사랑의 십자가로, 화평과 은혜의 십자가로 우리에게 넘겨주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세족식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과 생명을 제시함으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3:17)라고 말씀하여 주신 것이다.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제자들, 즉 성도들은 주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들(요17:18)이기 때문이며, 당연히 주님이 본을 보여주신 그대로 종의 삶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증거하며 전파하기 때문이다. 즉 종이 되어 다른 이들의 발을 씻는 일은 성도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이며, 우리 주님이 먼저 그 삶을 살아내심으로 반드시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말씀해 주신다. 발 씻음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 열심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종이 되어 섬겨주는 겸손과 희생의 삶을 요구하는 도덕과 윤리적 고상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행위의 의로움과 육적 희생 정신으로 십자가 복음이 전파되어 구원과 생명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에 의해 세상에 보내진 증인들은 이미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리스도의 신부로 잉태된 새 생명을 가진 자로서 신랑이신 예수와 하나로 연합된 자들이기에 당연히 성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이 터져 나오게 되어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분의 피를 마시고 그분의 살을 먹은 연합체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예수님의 살로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의 냄새와 향기가 나오게 되어 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 56). 그리스도 영으로 잉태된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요1:13)이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 삶을 통하여 당신의 성품과 인격을 세상에 나타내시며, 당신만이 구원과 생명과 빛과 진리이시며, 긍휼과 사랑, 자비와 용서, 온유와 화평, 공의와 의로움, 선과 영광으로 충만한 분이심을 나타내신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성도의 삶을 ‘그리스도의 냄새 또는 향기’로 묘사하고 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4-16).
바울은 주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삶을 향기, 냄새로 묘사하는데, 이는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지만 확실하게 있다는 증거이다. 향기는 내가 만들어 내어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그 존재 속에서 뿜어 나오는 그 존재 자체의 냄새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향기와 냄새는 그 존재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다. 즉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은 겉으로 드러나거나 밖으로 나타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와 삶의 자체에서 뿜어 나오는 것임을 말한다. 즉 그 냄새와 향기는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 자체에서 나오는 냄새와 향기이기에 바울은 “성도의 향기”라고 부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부르고 있다. 즉 성도가 스스로 만들어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의 향기와 냄새’는 세상 온 우주에 가득 차 있음으로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핑계치 못하게 되며, 어떤 이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성도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른 냄새”라고 확실하게 구별하여 말씀하신다.
이 세상 육신에 속한 자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 본질상 진노의 자녀” (업 2:3)이다. 육신에 속한 자는 육신의 일을 도모하기에 욕심, 탐욕, 정욕, 시기, 질투, 분쟁, 거짓, 폭력, 살인 등과 같은 악한 죄의 본능에서 벗어 날수가 없다. 그리하여 인간의 육신적 탐심과 욕망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저회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롬 3: 13-18), 그러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 라고 정확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성도는 이제 더는 이 세상에 속한 자로 살 수가 없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함과 같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기에 당연히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된 그리스도인에게서 나오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향기와 냄새뿐이다. 이 세상에 속한 육신의 사람과 하늘에 속한 영의 사람은 완전히 구별되어 있기 때문에, 선택받은 자와 선택에서 제외된 자는 출생부터 다르며 가는 길이 다르며 결말이 다르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로 세상에서 증인의 삶을 살아갈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어떤 이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고 어떤 이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된다고 말씀한 것이다(고후 2:16).
창세전 선택받은 자는 처음부터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하늘에 속한 자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이며 하늘나라에서 영원을 사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태어난 자들은 이 땅의 권세를 잡은 마귀로부터 태어난 마귀의 자식이며 이들의 결국은 지옥 불에 떨어지는 운명임을 제시하고 있다. 이 둘은 시작부터 결말까지 완전히 반대되는 상극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서로 통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13:18)라고 적그리스도 마귀로 등장한 가룟 유다가 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됨을 미리 말씀하여 주신 것이며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된 이 세상 사람들은 바로 가룟 유다와 같이 마귀의 종으로 마귀의 삶을 살아가며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게 됨을 제시하셨다. 예수님은 오직 창세전 택함을 받은 영에 속한 ‘우리’를 위해 오신 분이심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요 6:44),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요 6:46). 즉 영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창세전부터 택함을 받아 ‘하나님에게서 온 자’들이며, 예수님은 바로 그들을 찾아서 그들에게만 영의 눈을 열어주시며, 하늘의 일을 말씀하여 주시며, 오직 그들만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들으며, 이해하며, 따르며, 믿으며, 의지하며, 그분에게 속한 신부로 연합을 이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