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 13: 1-7)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주님 /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
요 13:1-17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 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예수님의 세족은 윤리적 도덕적인 교훈의 가르침이 아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 성찬 중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사건을 유월절 희생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 십자가 죽음과 연결하여 “사랑”이라 선포하고 있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은 주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쳤으며, 지금 그대로 주님이 희생양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 “자기 사람들”에게 향한 한없는 사랑을 나타내 주셨다. 즉 우리에게 향한 그 사랑이 어떠한 사랑이며, 또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신 사건이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종의 모습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세족 사건을 도덕적인 교훈으로 받기 이전에, 먼저 십자가 구원의 차원에서 복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마지막 이벤트는 단순히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더럽고 추악한 세상과 세상 사람들을 위해 낮은 자리에서 희생하고 봉사하는 겸손으로 섬겨드려야 한다는 윤리와 도덕적 권고로 행하신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겸손과 섬김은 예수님의 성품이며 이 땅에서 살아내신 예수님의 삶 그 자체이다. 요한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놀라운 사건을 제자들에게 향한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3:1). 즉 예수님은 자신이 져야 하는 십자가 고난과 죽음의 고통이 바로 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임을 세족예식으로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십자가 구원이 어떠한 원리로 완성되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시기 위한 의도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체’로 자신을 완성시키셨으며, 철저한 순종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우리 주님은 ‘종의 형체’로 죄인의 육을 입고 오셨으며, 섬김을 받는 왕궁에서 만 백성이 영접하는 왕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세상은 영접하지도 아니하였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음으로 태어날 곳조차 없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 마구간은 짐승과 같은 죄인들이 사는 이 죄악된 세상을 상징하며, 죄인을 섬겨주시는 종이 되시기 위해 마구간을 택하여 비천한 자리로 내려오셨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자신을 구유에 눕히게 하심으로 자신을 몽땅 죄인에게 내어주심으로 죄인들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구원을 받게 됨을 상징한다. 그리하여 주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으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4-56)라고 제시하여 주셨다.
우리 주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평범한 삶을 살아내셨으며, 친히 종이 되셔서 이 세상 각종 질병으로 죽어가는 자들을 고치셔서 정결한 자로 만들어 주셨으며, 굶주린 자들에게 하늘에서 떡을 내려 먹여주시고, 목마른 자에게는 생수를 마시게 하셨으며, 죄와 허물로 죽은 자를 자신의 권능으로 살려 내셨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자 마지막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살아내신 그 인생은 예수님 자신의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종의 인생’ 이었으며, 사랑하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전부를 온전히 내어주시는 ‘종의 삶’이었음을 나타내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제자들을 모여 놓고 마지막 성찬에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자신의 종 된 삶을 한 폭의 그림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식사 중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이제 아버지께서 이 땅에 보내주신 십자가 구원의 뜻을 이루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을 계시하여 행하신 십자가 복음에 관한 계시이다. 단지 예수님이 자신의 겸손을 나타내시기 위해, 또한 제자들에게 겸손의 본을 따라 낮은 자리에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로 세상 사람들을 섬겨드리라는 숭고한 도덕적 가르침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처럼 겸손과 사랑으로 이웃을 위해 희생하라는 도덕적 고상함을 가르치기 위해 십자가 지시기 직전에 행하신 세족 의식이 아니다. 주님은 세족이라는 사건을 마지막 식사 중에 주입하심으로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셔야 하셨으며, 어떻게 자신을 희생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어떻게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는가를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즉 예수님의 전 인생이 바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인생이며, 그 사랑은 왕이시며 메시아이시며 그리스도이신 그분이 ‘종의 형체’를 입고 우리를 섬겨주시는 종이 되셔서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내어주신 그 종의 삶을 충실히 완성하셨음을 나타내시기 위해 십자가 지시기 바로 직전에 마지막으로 행하신 세족예식이었다. 그리고 그 종의 사역은 이제 십자가를 지심으로 완성이 되어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이 임하게 되는 은혜의 복음 시대가 열리게 됨을 제시하셨다.
예수님은 세족 절차에 있어서 단 한 가지도 제자들의 도움을 받거나 요청하지 않으셨다. 모든 일을 홀로 행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더욱 황송했을 것이다. 윤리적 차원에서 본다면 당연히 황송한 일이며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속죄의 차원에서 본다면 반드시 받아야 한다. 거부하면 예수님과 상관없는 즉 구원에서 배제되는 자가 된다.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시며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이 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씻을 수가 없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씻어 주셔야 우리의 모든 죄가 씻기어지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세족 사건은 오직 십자가 복음을 제시하고 있으며, 장차 제자들이 세상 신을 벗고 복음의 맨발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본을 따라 한 알의 밀로 종의 삶을 살아내는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으로 세상 끝까지 복음이 전파됨을 명쾌하게 한 장의 그림으로 제시하셨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3:1)
누가복음에 보면, 마지막으로 주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귀한 자리에서 제자들 간에 누가 큰 자가 되는가 하는 자리다툼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눅 22:24). 이제 곧 제자들을 떠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의 고통을 감당하셔야 하는 심히 고민하시는 주님 앞에서 제자들은 지금 누가 더 높은 지위에 있을 것인가 하는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싸움의 와중에 하늘나라 왕이신 제일 큰 자이신 주님께서 비천한 종이 되셔서 손수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심으로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큰 자의 성품과 삶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심과 동시에 제자들에게 향한 한없는 사랑을 나타내셨다. 즉 당신의 신부 되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첫 서두에서 주님이 이제 유월절 희생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향한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 십자가 직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 주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마음을 담아서 친히 종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는 말씀이다. 이제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을(요 17:6)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실 때가 왔으며,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영화로운 아들로 신부로 새 생명을 입혀 주시기 위해 십자가 지심을 받아들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다. 요한은 이처럼 십자가를 지시는 시점에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은 매우 파격적인 사건이다. 당시 발을 씻기는 행위는 종이 상전에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주’이시며 스승이시며 하늘나라 왕이시며 메시아 이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종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제자들에게 향한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사도바울의 말씀대로 주님은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 함과 같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친히 종의 형체를 지니시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희생으로 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은 이제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어 신부로 맞이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시점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당신에게 속한 신부들을 사랑하시되 그 사랑은 영원 전부터 있으신 변함이 없는 사랑이었으며, 우리를 신부로 맞이하시기 위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우리를 섬겨주시는 완전한 사랑이었으며,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으심으로 우리에게 향한 영원한 사랑을 확증하셨다. 바로 자신을 죽이기까지 사랑한 그 지독한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어 보여주시기 위해 친히 종의 모습으로 무릎을 굻고 머리를 숙여 우리의 더러운 모든 죄를 씻겨주시어 정결한 신부로 탄생케하는 상징으로 세족예식을 행하신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죄를 씻겨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야 하는 희생과 사랑의 절정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친히 우리의 몸 중 가장 더러움을 상징하는 발을 씻겨주셨다. 한 마디로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 희생에 관한 복음을 제시하고 있다.
제자들의 신발을 벗기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정결한 신부로 새롭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상 속에서 먼지투성이로 신고 다니던 세상 신발을 벗기셨다. 주님 앞에서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또한 제자들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고 이제부터 ‘주’가 인도하시는 복음의 발로 복음의 길을 걷게 되는 철저한 복종을 뜻하며,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주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여 오로지 주 만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의 인도를 받는 순종의 종으로 철저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으로 이끌려가게 됨을 계시한다. 그리하여 주님은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명하신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4-5). 신을 벗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주권을 인정하고 ‘이제부터 당신의 말씀과 인도에 따르겠습니다’라는 순종을 의미한다. 실제로 모세는 평생 하나님의 종이 되어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이라는 세상에서 이끌어내어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는 위대한 중재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예수님의 11 제자들도 평생 복음의 선구자로 땅 끝까지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며 복음을 위해 순교의 길을 영광스럽게 가게 됨으로 우리의 본보기가 된 것이다.
대야의 물과 물두멍
예수님은 굳이 대야에 물을 담아 놓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데는 깊은 의미가 있다. 출애굽에서 하나님은 대야와 같은 것에 물을 담아서 거기에 몸을 씻어 정결하게 하도록 명하셨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겔36:25).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 막과 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 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출 30:18 -19). 구약의 성막 바깥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었다.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려면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어야 들어갈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이러한 규례를 철저히 지키기 위해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고 먹으면 부정한 것으로 여긴 것이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단과 물두멍을 거쳐야하는데, 제단에는 점도 흠도 없는 하나님께 받쳐지는 제물의 피가 뿌려지고, 물두멍에서는 수족을 씻는 것으로 모든 더러운 죄가 씻어져 정결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게 됨을 정확하게 상징하고 있었다. 즉 물과 피로써 모든 더러운 죄를 씻음으로 죽음을 면하게 됨을 말한다.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과 피를 통과하여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신 정결 예식이었다. 구약 때에 물두멍에서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던 행위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모든 죄가 씻기에 정결하게 됨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이었지만 그것으로는 속까지 더러운 마음을 정결하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물로 씻는 것은 다만 십자가 속죄를 상징하는 의식일 뿐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실 때 창에 찔려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아내셨다. 이제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그리스도께서 흘린 피로 모든 죄가 사하심을 받으며, 흘린 생수의 물, 즉 성령으로 새로운 피조물인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잉태하여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는 교회의 탄생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렇게 번제단과 물두멍은 물과 피를 쏟아내어 죄인들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낸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물로 씻겨서 거룩하게 된 공동체라고 표현하고 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자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5-27).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13:10)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모든 죄가 씻어지고 도말되어 정결케 됨을 미리 제시하여 “온몸이 깨끗하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겉옷을 벗으시고
요한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순서를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13:4).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른 이 모습은 당시의 전형적인 종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라고 자신이 바로 ‘종의 형체로 우리를 섬기기 위해’ 오셨음을 제시하셨다. 그 말씀하신 대로 하늘나라 영광의 자리에서 이 천하고 죄악된 세상에 내려오셨음을 상징하여 겉옷을 벗으셨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겉옷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으실 때 군병들이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요 19:23)라고 묘사함으로 당신이 목숨을 버리심으로 사방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앞으로 나오게 되는 복음 전파를 계시한 것이다. 즉 겉옷을 벗었다는 것은 당신이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종이 되어 한 알의 밀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이 예수님이 입혀주시는 은혜의 옷을 입어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태어남을 계시하며, 은혜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됨을 계시하여 군대들이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 가졌다고 상세히 묘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겉옷을 벗으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왕의 보좌를 버리시고 하늘나라 왕의 자리에서 이천한 죄악의 세상에 내려오셨음을 상징하며, 허리에 수건을 두르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죄인을 살려내시기 위해 친히 죄인의 육을 입으시고 우리를 섬겨주시는 종으로 오셨음을 상징하며, 허리를 굽혀 땅에 무릎을 꿇으셨다는 것은 자신의 전부를 세상에 내놓으시고 매 맞음과 멸시와 온갖 고난을 감당하시고 아무런 대항도 아무런 능력도 기적도 행하지 않으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희생양이 되셨음을 상징하며, 그렇게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다 감당하시는 온전한 순종과 철저한 자기 부인으로 자신의 전부를 내어 주셨음을 상징한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예수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신 것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닦아주기 위함보다는 스스로 종이 되셔서 당신에게 속한 ‘자기 사람을’ 이 세상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입혀주시기 위한 섬김을 뜻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심에도 자기를 비우시고 죄인을 섬겨주시는 종이 되어 이 죄악된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죄인을 섬겨주시는 종이 되셔서 각종 질병에 걸린 자들을 고쳐주시고 주린 자를 먹여주시고 목마른 자에게 생수를 주시는 능력으로 이제 당신이 우리를 모든 죄의 증상에서 구원하여 주실 것이며,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게 함으로 영원한 죄 사함과 영원히 사는 생명을 입혀주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영원히 함께 살 것임을 나타내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 그렇게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왕의 신분이 아닌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내어 주신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수건을 허리에 두른다는 것은 내 생각과 방법, 내 뜻과 의지, 고집과 자존심을 몽땅 수건에 싸서 허리에 두르고,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으로 이끌려가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종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십자가 복음이 전파되어 생명이 잉태되는 증인의 삶이며, 그 삶을 통하여 예수님의 겸손과 사랑과 온유와 자비와 긍휼과 용서의 성품이 흘러나가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 그리고 사도들이 어깨에 둘렀던 수건이 바로 오늘날 목회자들이 예배 인도할 때에 어깨에 두르는 영대와 같은 것이며, 그 영대를 어깨에 두르고 한 알의 밀이 되어 썩어서 죽음으로 다른 이들이 살아나는 십자가 삶을 상징하며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종의 삶일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목회자들은 어깨에 영대를 두르고 위에서 교인들을 자기중심과 주기 영향력을 강화하는 ‘군림’으로 통제하려고 하고 있다. 겸손과 온유와 자기 부인과 희생의 정신으로 영대를 어깨에 두리고 상처를 씻어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흠과 실수를 덮어주는 섬기는 종의 모습이 아니라 지도권을 세워 자신의 의와 영광을 세우고 확장하는 군주의 모습으로 위에서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권하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우리 주님이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는 것은, 자신이 마땅히 취할 것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우시고 자신을 부인하시고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종으로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순종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늘나라 원리로 이끌려가는 하나님 백성들의 삶이다. 그 순종의 삶이 바로 생명 충만으로 가장 은혜로운 복된 삶이며, 그 복된 순종의 삶을 우리에게 돌려주시기 위해 주님이 이 땅에 종의 형체로 오셔서 종의 본보기를 보여주시고 종으로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음으로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영화로운 신부로 탄생케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3:17), 즉 너희가 이 생명의 진리를 깨닫고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십자가 삶으로(눅 9:23 ) 정착하게 됨으로 하늘나라의 큰 자로 영화로운 신부로 들림을 받게 됨을 제시하신 것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고난과 수모와 죽임을 당한 십자가 예수이지,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영광을 취하려 오신 세상 왕의 신분으로 오시지도 또한 인간에게 이 세상 부귀영화를 주어 이 세상의 삶을 형통케하여 주는 인간이 원하는 세상 임금으로 오신 분도 아니시다. 그분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하늘나라의 왕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이 죄악된 세상에 종의 형체를 입고 오시기 위해 굳이 어린 아기로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탄생하셨다. 이 세상의 더러움과 추악함과 죄로 가득한 죄인들이 사는 곳을 상징하여 마구간을 택하여 태어나셨으며, 우리와 똑같은 인생을 30년이나 시골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평범한 삶을 사셨으며,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굳이 세상 죄인들로부터 온갖 수모와 매를 맞는 고난과 조롱과 수치를 다 당하셔야 하셨으며, 저주의 사형들인 십자가에 못을 박아 피를 흘리는 죽임을 당하셔야 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분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과 멸시를 받았으며, 아픔과 고통을 많이 겪으셨으며’ (사 53:3),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아무런 대항을 하지 않으셨으며’ (사 53:7), 무력한 양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다. 하지만 “그가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며 그가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고 그가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사 53:5). 바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도말하기 위하여 죄인들로부터 배척당하고 핍박당하고 고난과 수모를 받으셨으며, 죄인에게 죽임을 당하심으로 우리는 그의 십자가 피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 영광의 삶을 종의 삶으로 나타내신 예수님의 삶이었다.
이와 같이 그분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서 섬김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반대로 멸시와 천대와 배척과 핍박과 고난을 받으셨으며,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순종의 삶으로 철저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살아내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한 알의 밀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는 그 일이 바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 23-24). 예수님께서는 이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자신의 종의 삶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으로 하늘나라 큰 자가 되는 영광의 삶이란 바로 스스로 자신을 부인하고 다른 이를 섬기는 사랑만이 생명을 잉태하는 복음의 길임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 것이며”(13:7), 너희도 이제 나를 본 받아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으로”(13:14), 즉 종이 되는 순교의 삶으로 복음의 열매가 맺힐 것임을 제시하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놓고 성찬식에서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한 것이며, 이어서 종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 제자들에게 향한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셨다. 즉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확증하여 주실 것이며, 참으로 우리의 영원한 주가 되시며, 신랑이 되어주실 것임을 증거하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영광을 추구하는 높아지기의 삶과 반대로 ‘낮아지기’의 삶과 ‘종’의 삶을 살아내신 분이 있으니 그가 바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통치자이시다. 하늘나라를 사는 하늘의 백성들은 우리 주님이 사신 하늘나라의 삶으로 자신을 부인하는 티끌의 자리로 내려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며 세상을 향하여는 십자가 삶을 지향하는 자들임을 몸소 보여주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다
우리 주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왕의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으며, 자신에게 속한 ‘자기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희생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하늘나라 왕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섬기기 위해 친히 종이 되셔서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땅에 무릎을 꿇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불가항력적 은혜로 우리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실 것임을 확증하셨다. 즉 자신의 목숨을 다하여 끝까지 사랑하시는 십자가 희생을 계시하며, 이제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된 자들은 그렇게 세상 신을 벗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 내실 것임을 계시하셨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의지를 발동하여, 띠를 띤 종의 삶을 산다거나, 열심히 무엇인가를 해서 주님을 섬겨드린다는 그런 기특한 일을 할 수도 또한 우리에게서 발산될 수도 없는 타고난 죄의 본능으로 죄만을 짓고 사는 철저한 죄인이다. ‘우리가 다 죄 아래에 있으며’(롬 3:9), 때문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이 먼저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우리에게 찾아와 주셨으며, 이 세상에 잠시 있는 동안에 종의 삶으로 그분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이시며 생명과 영생이심을 제시하여 주셨다.
그렇게 자신을 아낌없이 몽땅 내어주시는 종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희생으로 구원의 의를 성취하심으로 우리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내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의 삶 속에 깊이 간섭하시며 우리를 깨어있는 섬김의 종으로 그분이 만들어 내신다. 즉 주님의 종 되심이 우리의 종 됨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3:15)의 진의이다. 우리 자신의 노력과 열심과 행위로 종의 삶을 살아내어 주님을 섬겨드리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격발이 아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도 또한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누가 큰 자가 되는가 하는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주님인 친히 종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자 베드로는 너무나 당황하여 이내 강력하게 예수님의 발 씻음을 거부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13:7)라고 너희가 지금은 이해할 수도 내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지만, 장차 내가 오늘 너희에게 행한 일을 이해하고 나의 한 일을 본받아 섬김의 삶을 순교로 맞이할 것임을 계시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