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 10:1-13) 나는 양의 문이라,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 10: 1-13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 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 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적이 오는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6장부터 9장까지 핵심 요약
6장에서는 유월절을 배경으로 오병이어의 표적을 일으키심으로 예수그리스도는 이 땅에 육신의 떡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유월절 희생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당신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떡이 되심을 나타내셨다. 그분은 하늘나라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먹이시는 “생명의 떡”이시며,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심으로 우리는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그분과 하나가 되어 영원을 사는 자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은 유월절 양으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6:54-56)라고 선언하셨다.
7장에서 주님은 당신이 바로 초막절의 당사자인 메시아 이심을 밝히셨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서 계시는 영원한 생수이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여전히 구약적 형식으로 엉뚱하게 실로암의 물을 길어서 제단에 뿌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주님은 성전 앞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요7:38) 라고 외침으로 자신이 바로 초막절의 완성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계시하셨다.
8장에서 죄인으로 등장하는 간음한 여인과 대조적인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이 함께 심판 주이신 예수님 앞에 서서 재판을 받는 선명한 그림으로 구원이 어떤 자에게 임하며 어떻게 임하는지를 유대인들은 간음한 여인을 주님 앞으로 끌고 와서, 첫째는 예수님 앞에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이었고, 둘째는 여인을 미끼로 예수님을 율법 범한 죄인으로 규정하여 공개적으로 처형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들의 사악한 음모를 파악하시고, 죄인을 상징하는 땅의 흙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심으로 여인의 모든 죄를 자신에게 전가시키시고 대신 율법의 정죄로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여인을 율법의 정죄에서 구원할 것임을 계시하셨다. 그리고 다시 두 번째로 땅에 생명의 법을 쓰심으로 그 여인을 자신의 영으로 죄와 상관없는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시키실 것임을 나타내셨다. 하지만 율법을 들고 여인과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여 죽이려고 한 유대인 무리들은 심판주 예수 앞에서 ‘죄인’으로 폭로됨으로 한 사람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오직 여인만 구원받아 참 신부로 탄생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라고 자신을 초막절 빛으로 선언하셨다. 즉 여인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고, 유대인들은 다시 심판의 어둠 속으로 스스로 들어간 것이다.
9장에서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통하여, 유대인들의 더욱 완악하고 끈질게 예수님을 핍박하여 죽이려는 패역함을 폭로하여 이들이 바로 죄와 사망의 어둠에서 헤매고 있는 진짜 맹인임을 드러내시고, 진짜 맹인으로 태어난 즉 죄인으로 태어난 자에게 구원이 임하는 은혜를 대조적으로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자신의 생명을 상징하는 춤을 죄인을 상징하는 흙에 이겨서 하나가 되어 죄인의 모든 죄를 자신에게 전가시키고, 죄인에게는 자신의 의의 생명을 전가시키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아무 조건도 한 일도 없이 그렇게 택함을 받은 자에게 구원이 임하게 되는, 즉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문둥 병자가 깨끗해지며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전파되는”(마 11:5) 복음이 현실로 소경에게 임하였음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10장에 와서 그분이 친히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 우리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끄집어내어 우리를 당신의 품에 넣으셔서 영원한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여 주실 우리의 영원한 목자이심을 선포하여 주신 것이다.
양의 우리와 양의 특징
팔레스타인에서 사는 유대인들은 양들을 들짐승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동네마다 공동 양 우리를 짓고, 문지기가 문 앞에서 잠을 자면서 양을 지켜야 했다. 그 공동 양 우리에는 온 마을의 양들이 다 들어가 있다. 아침이 되면 목자가 와서 자기 양들을 부르면 그 목자의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자기 목자 앞으로 나온다. 양은 성품이 미련하고 두려움이 많으며, 특히 시력이 나쁘고 방향 감각도 전혀 없어 목자 없이는 자주 길을 잃거나 제각기 흩어지며 자기 능력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다. 하지만 청력은 아주 발달하여 다른 사람이 아무리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불러도 절대로 따르지 않고 오직 자기 목자의 음성만 알아듣고 자기 목자만 따라간다. 양들은 목자의 인도가 없이는 스스로 풀을 찾아 먹을 수도 스스로 물을 얻을 수도 스스로 자신을 들짐승으로부터 보호하는 능력이 없는 나약하고 무력한 존재이기에 목자 없이 스스로는 살아갈 수가 없는 동물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바로 양의 우리와 같은 곳이다. 각종 다른 양들과 섞여져서 이 세상 어둠에 잠시 방치되어 방황하며 무력하게 살아가는 연약한 죄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 안에 갇혀있는 양의 모습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목자의 인도 없이 제각기 흩어져 길을 잃는 양들의 습성을 우리 죄인들이 각기 자기 마음대로 행하여 자기 죄에 빠져있는 모습으로 비유하고 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사53:6)라고 우리가 어떤 상태에서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를 미리 예언하여 주셨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 어둠에 속하여 살고 있지만,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셔서 이름을 불러주시기에, 성도는 자기 목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음성을 알아들으며 오직 자기 목자이신 예수그리스도만을 따라나선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10:3-4).
너희가 바로 절도며 강도요 삯꾼이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예수님은 선한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선명하게 자신을 선한 목자라 부르시고,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유대인들은 절도, 강도, 삯꾼이라 부르신다. 그럼에도 이들은 여전히 영안이 어두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10:6), 말씀을 전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절도와 강도와 같은 악행으로 예수님을 배척하고 대적하며 죽이려고 한 것이다 (10: 20,31).
절도, 강도, 삯꾼이란 말은, 자기의 소유가 아닌 다른 자의 소유를 도둑질하거나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들의 특징을 말씀하여 주신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10:10),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10:12). 즉 절도, 강도, 삯꾼, 이리들은 다른 양들은 도덕 질하여 자기들의 지배를 받는 종으로 부린다. 이들은 연약한 양들을 잡아다가 자기들의 말만 듣는 자기들이 하라는 대로 하도록 억압하며,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며, 불법을 행하도록 유도하며, 자신들의 말에 거역하면 마음대로 죄인이라 판단하고 정죄하여 쫓아내거나 죽여 버리는 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켜 절도 강도라고 한다. 9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소경을 잡아다가 마음대로 심문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답을 내놓지도 않고 오히려 자기들의 잘못을 지적하자 이내 분노하여 권력으로 유대교 밖으로 쫓아 내버린(출교) 것이다.
율법은 하늘나라의 의로운 삶을 나타내는 선하고 의로운 법이기에 온전히 지키는 자에게는 진리가 되는 법이다. 그래서 선한 법 의로운 법 거룩한 법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첫 인간 아담이 하나님이 주신 첫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타락함으로 죄인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마귀의 본능으로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절대로 하나님의 의의 법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타락한 본질과 마귀의 습성을 드러내어 죄란 무엇이며, 왜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가 없으며,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으로 구원이 임하는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율법의 거울로 자신들의 죄악을 들여다보고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정 반대로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고집하며 율법을 구원의 문으로 만들어 놓고 가식적으로 지키고 행하는데 목숨을 걸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10:8)라고 지적하신 것이다. 이들은 참 구원의 문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막아서서 대적하고 박해하여 죽여버리는 절도요 강도요 살인자로 결국 드러나게 된다. 주님은 이들이야말로 담을 넘어 들어간 절도와 강도이며, 양을 해치는 거짓 삯꾼이라고 마태복음 23장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폭로하신다.
율법주의자들의 절도와 강도와 삯꾼의 죄악을 폭로하신 예수님의 확실한 증언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율법적 행위가 바로 절도이며 강도이며 삯꾼의 행함이라고 확실히 밝히고 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계시하는 진리는 저버리고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숨 막히는 외형적인 세부 규칙들과 유전들을 괴이하기 짝이 없는 법으로 정해 놓고 율법을 지킨다는 명의로 자신들의 의를 내세워 사람들로부터 의인이라 칭함을 받아 영광과 기득권을 얻는 방패로 삼았으며, 자기들끼리 서로 법에 묶어놓고 위선과 거짓 의와 교만을 자극하는 종교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들이 반대로 ‘서로의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도 않고’(요 5:44), 오히려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들에게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를 “화 일을진저”로 선포하심으로 이들이 바로 절도요 강도요 삯꾼임을 구체적으로 폭로하시면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저주하신 것이다.
이들의 신앙 초점은 오로지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나태내기 위한,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외식’에 맞추어져 있었다(마 6:1).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구제하는 일을 자랑하였으며(마 6:2),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길거리에서 기도하고, 세리와 창녀와 각종 질병에 걸린 연약한 자들을 정죄함으로 자신을 의인으로 나타내며,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눅 18:11-12)고 종교 열심을 자랑하며,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경문을 넓게 하고 옷술을 크게 하며,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에 앉기를 좋아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들에게 랍비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하며(눅 23:5-7),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다(눅 16:14). 심지어, 불쌍한 과부를 돌봐준다는 명목하에 과부의 가산을 정리하며 빼돌리는 도둑이었다(막 12:40). 이들이야말로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10:10) 절도요 강도들이다. 이들이 즐겨 먹는 것들이 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 2:16) 라고 지적하고 있다.
마태복음 23장 13~15절에 보면,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3-14)라고 책망하셨다. 이들은 ‘율법’이라는 열쇠를 가지고 천국 문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막아 나서 대적함으로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율법으로 ‘죄인’이라 정죄하여 못 들어가게 막고 있었다. 율법의 문을 지키기 위해 은혜의 문으로 양의 문으로 오신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율법으로 ‘죄인’이라 정죄하며 대적하고 박해하여 죽이려고 한 절도이며 강도들이다. 이들은 교인들을 끌어모아 자신들을 추앙하게 하며, 자신들의 권력과 세력을 키우며 확장하는 데에 이용하고 있었다. 거짓 진리를 가르치며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구원을 나누어주는 권위를 가진 자로 자칭함으로 배나 더 되는 지옥 자식이 되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들이 바로 ‘삯꾼’이며, 양을 물어가고 헤치는 이리이며(요 10:12),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고(요 10:10) 폭로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23장 16~25절에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라고 책망하고 있다. 이들은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세리와 창녀’와 비교하여 자신들을 도덕과 윤리적으로 깨끗한 의인으로 자칭하지만, 주님은 이들의 내면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차 있다고 지적하신다. 주님의 말씀대로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8-9)함과 같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마음속에는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과 영광 갈취에만 집착되어 있었다. 심지어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 고르반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렸다’(막 7:11)고 갈취하는 자들이며,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마 23:16)라고 양들의 돈을 뜯어내기 위한 규칙까지 정해놓고 강요함으로 하나님의 성전보다 제물로 드려지는 금과 은에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돈을 좋아하는 절도요 강도요 삯꾼들이다. 이들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세심한 조항들을 지키는 일에는 열심에 특심이지만, 신앙의 본질인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마 23:23)고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들의 영적 우매함에 대하여 ‘하루살이가 부정하다 하여 걸러내면서도 부정한 짐승인 낙타는 꿀꺽 삼키는’(23:24) 자들이라고 이들의 탐욕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폭로하셨다.
마태복음 23장 27~28절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라고 외식하는 이들의 마음이 바로 무덤의 시체와 같이 탐욕과 방탕과 외식과 불법으로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다고 지적하신다. 마태복음 23: 29-30에서, 이들은 선지자들과 의인들을 죽인 조상들의 살인죄를 덮어 감추기 위해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면서 자신들은 선지자의 피에 참예하지 않았다고 변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선지자를 죽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를 대적하여 죽인 살인자로 드러나게 된다. 주님은 이들이 곧 자신을 죽일 것임을 알고 계셨기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핑계치 못함을 마지막 화로 선포하신 것이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이와 같이 이들은 핑계치 못하는 철두철미한 절도요 강도요 삯꾼이며, 이들의 목적은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양들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10:10) 데에 있으며, 이들의 결국은 지옥의 심판이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 하느니라
주님은 아버지께서 주님에게 주신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르시며, 주님에게 속한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목자 앞으로 나오며 목자를 따른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에게 속한 양은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10:5)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이 실제로 소경된 자에게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눈 뜬 소경은 본래부터 목자에게 속한 양이었기에 유대인들이 아무리 다그쳐 심문하여도 끝까지 예수님을 변호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오신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경건한 자이시며’ “선지자”라고 증거한 것이다. 그러자 화가 난 유대인들은 그를 유대교로부터 쫓아냈다. 소경은 처음부터 목자에게 속한 양이었기에 눈을 뜬 후 예수님을 아직 만나보지 못하였지만 그는 분명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목자를 따르기 위해 담대하게 자기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해치려고 하는 절도와 강도인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고 맞선 것이다. 그들은 소경의 목자가 아니라 절도요 강도이기 때문에 소경은 그들의 음성을 거절하고 그들을 따르지 않음으로 율법주의 교당에서 탈출하여 목자를 만나 목자를 따르는 양이 된 것이다.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10:4-5).
소경은 비록 보지 못하는 맹인으로 목자를 볼 수가 없었지만, 자신을 찾아오셔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순종으로 반응한 것이다. 그는 목자가 춤을 뱉어 흙에 어겨서 자신의 눈에 발라도 아무 말 없이 순종하였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명할 때 시키는 대로 순종함으로 눈을 뜨고 빛을 보는 능력과 구원이 그에게 임한 것이다. 소경은 목자가 하시는 모든 일에 어린 양처럼 묵묵히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주님에게 속한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10:3-4)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소경은 목자가 자기 이름을 불러 찾아와 주셨음을 영감으로 알았으며, 그 음성을 알아듣고 목자가 하시는 모든 일에 순종하였으며, 유대교에서 나와 참 목자를 따르는 양이 된 것이다. 소경은 본래 하루 끼니를 위해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있었으며, 아무런 기대나 한 일이 없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그 어떠한 자격이나 조건이나 노력을 보탤 수 없는 무력하고 불가능한 죄인에게 무상으로 임하는 선물임을 보여주셨다.
대조적으로, 율법주의자 유대인들은 수많은 증언과 증거를 받았으며 눈으로 직접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믿지 않았고 도리어 배척하고 대적하여 죽이려고 한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빛을 보지 못하는 맹인임에도 “우리가 왜 소경인가"라고 자신들의 맹인 됨을 부인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목자에게 속한 양이 아니었기에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였으나, 마귀의 음성에는 귀를 기울이고 마귀가 시키는 대로 마귀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너희는 마귀의 일을 하고 있으니 마귀의 자식이라고 정죄하신 것이다(요 8:44). 즉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10:26)라고 확실하게 주님의 양이 아니라고 지적하신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목자에게 속한 양만 목자의 음성을 분별하여 알아듣고 이 세상과 율법의 속박에서 하나하나씩 빠져나와 목자를 따르며, 오직 목자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목자가 인도하는 푸른 초장에서 목자가 주는 풍성한 생명의 꼴을 먹게 된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10:27).
음성: 주님은 분명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라고 우리가 주님을 알고 따르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의 역할이라고 말씀하신다. 양들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이 바로 양이 목자를 알고 따르는 유일한 매개체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하게 우리에게 주신 것이 바로 천지는 없어져도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그분이 주신 진리의 말씀이다. 그래서 그분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며, 말씀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며, 말씀으로 우리와 교통하시기에, 그분은 우리를 말씀을 통하여 부르시고 구원으로 인도하여 생명을 풍성하게 얻게 하심을 계시하신 것이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이다”(10:7)라고 선포하신다. 양의 문은 오직 양만 들어가고 나오는 문인데 그 문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6-9장에서 유월절부터 초막절에 이르기까지, 주님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절대적 진리로 오셨음을 여러 면으로 제시하셨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6:35); ‘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의 강이라’(7:38); “나는 세상의 빛이라”(8:12). 그리고 10장에서 “나는 양의 문이라”(10:7) “나는 선한 목자라”(10:11)라고 선포하심으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 14:6)는 절대적 구원자로 생명의 진리로 오셨음을 증거하신다. 그러므로 주님이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이 이제 우리의 구원자가 되셔서 말씀을 생명의 떡으로 먹이실 것이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마시게 할 것이며, 우리의 빛이 되셔서 우리를 빛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임을 계시하여 “나는 선한 목자”라고 제시하셨으며, 오직 그분만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천국의 문임을 제시하여 ‘양의 문’ 즉 양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구원의 문이라고 아주 명확하게 분명하게 선포하셨다.
예수님이 자신을 양의 문으로 말씀하신 데는 깊은 의미가 있다. 목자는 양을 우리 안에 안전하게 들여보낸 후 그 입구를 가로질러 누워서 양과 함께 밤을 지내면서 외부로 오는 짐승들이 양을 해치지 못하게 지키고 있어야 했다. 양은 목자의 지킴과 보호를 받아 안전하게 잘 수가 있다. 목자는 자신의 양들을 지켜내는 문이기에, 밖으로부터 해치러 들어오는 짐승과 도둑을 막아주기 위해 밤새 힘든 밤을 새우면서 자신의 생명으로 양들을 지켜주는 사명에 충실해야 했다. 그리하여 주님은 나는 내 양을 지키는 선한 목자이므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10:11)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이 자신의 양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십자가 죽으심을 가리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목자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공로로 양들이 구원받게 되므로 십자가가 바로 아버지에게로 나아가는 천국의 문이 됨으로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름 그대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로 오신 구원자이시다. 그분은 “생명의 떡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로” “세상의 빛으로” 오심으로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10:10)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직 그분만이 ‘구원의 문’이며 ‘생명의 문’이며 ‘천국의 문’이며, 때문에 주님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10:9)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양의 문은 바로 우리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길이다. 이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베드로는 천하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받을 이름이 없다고 선포했다(행 4:12). 그분은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생명의 목자이시기에 자신을 “들어가며 나오며 먹는 꼴”로, 즉 ‘생명의 떡’이라 하셨으며,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6:55-56)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꼴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생명의 떡이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이다. 하늘나라의 그 영원한 ‘꼴’을 어찌 이 세상의 것으로 비교하랴! 다윗은 양이 하늘나라의 꼴을 먹는 아름다운 광경을 우리에게 그림처럼 펼쳐주고 있다. 양들이 기뻐서 뛰고 놀며 들어가며 나오며 자유로이 주님이 주시는 꼴을 먹는 끝없는 하늘의 푸른 초장으로 묘사한 것이다.
시 23: 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와 같이 그분은 우리 양에게 영원히 풍성한 생명의 꼴을 주시기 위해 양의 문이 되셨다. 그분은 참으로 ‘나의 영원한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는’ 하늘나라의 그 영원한 사랑으로 나를 품어주시는 나의 영원한 신랑이시다. 죽음으로도 끊을 수없는 그 한없는 사랑을 아는 성도에게 무엇이 또 부족함이 있겠는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면서 자신을 버리시는 그 영원한 사랑을 먹는 성도에게 무엇이 부족하여 이 세상의 썩은 것을 달라는 기도가 나올 수가 있겠는가! 성도에게 그분과 함께 거하는 그것 하나면 족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