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 7:11-24) 사람의 교훈과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의 특징
요 7:11-24
11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12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 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기는도다 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23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명절 중간에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들이 열심히 절기를 지키고 율법을 행하고 있음에도 그 속에 담겨 있는 참 의미는 알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들의 의와 영광 높이기에만 집착하고 있는 외식된 행위를 지적하시며 외모로 주님을 판단하고 죽이려고 하는 악행을 폭로하며 경고하신 것이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5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무나 탁월하여 사람들은 감탄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7:15). 하지만 이들은 그 가르침의 말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다만 예수님의 출신과 배경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 갈릴리 나사렛 출신으로 비천한 목수의 아들이며 랍비와 같은 정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무식한 사람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들의 특징에 대하여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7:25), 즉 너희는 나의 출생으로 나를 판단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로 나를 판단하라고 이들의 그릇된 사고방식을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가르침에 놀란 이들에게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 (7:16)라고 말씀하심으로 당신의 교훈은 당신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주셔서 오신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힌 것이다. 예수님의 교훈은 이 세상에서 배워서 얻는 “사람의 교훈”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직접 주신 하늘나라에 속한 지혜이며 생명을 낳는 진리임을 계시하신다. 예수님께서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것임이라’(7:16)라고 말씀하신 의도는, 너희는 아버지께로 온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니 너희가 가지고 있는 교훈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교훈이 아니라 너희 자신들의 교훈이며 너희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여 나를 죽이려 하고 있으니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그다음 구절에서 확실히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7:17-18). 즉 나의 교훈은 내 스스로 말하는 교훈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직접 나에게 주신 교훈이며,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한 교훈이기에 참되며 불의가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너희는 아버지께로 온 나의 교훈을 너희 교훈으로 판단하고 나를 대적하고 있으니 너희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기에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라는 뜻을 함유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쟁취하고 지키는 데만 초점을 두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기들의 영광을 구하는 이들의 외식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참된 진리와의 대조를 통해 그 교훈이 하나님께로 왔는지 아니면 사람에게로 왔는지의 진위를 가려낼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의 교훈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지만, 이들의 교훈은 자기들의 영광을 위한 욕망에 두고 있음을 확실히 밝힌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교훈은 하나님을 아는 영적 계시와 영적 지혜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오로지 당신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며,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앞으로 나오게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길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14:6-7)라고 말씀하심으로 이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고 말만 하였지 실상은 하나님을 알지도 믿지도 뜻대로 행하지도 않았음을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 영광만을 구하는 자”로 지적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은 자신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아들로 정하셨기에 그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에게로 나올 수 있는 자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영의 차원에서는 이들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으며’(5:42),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으며”(12:43), 하나님을 섬겨드린다는 구실로 자신들의 육적 의와 영광을 추구하는데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고 살해하는 “독사의 새끼”로 드러난 것이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이 추구하는 이 세상의 교훈은 육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데 목적을 두지만, 하나님의 교훈은 구원과 생명에 관한 영의 말씀이며 인간의 노력과 열심을 배제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주시는 오직 당신의 백성에게만 주시는 영의 계시이며, 이는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기에 세상적 지식과 교훈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말씀하기를,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0). 진리의 말씀 앞에서는 이 세상 학식의 높음이 아무 효력이 없으며 오히려 이 세상 지식으로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신이 그동안 배워왔던 그 어마한 지식에 대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 라고 자신이 취득한 최고의 지식이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데 해가 되는 ‘배설물’이라고 부른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의 신령한 말씀이 너무나 고상하며 영생을 얻는 진리이기 때문이며, 이 땅의 육적 교훈은 오히려 죄와 사망을 낳는 육의 죽음으로 끝나기 됨을 사도바울은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와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의 특징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자는 진리의 말씀이 이끄는 삶을 사는 자들이기에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자들이며 그 속에 불의가 없다”(7:18)고 말씀하신다. 즉 이 세상 지식은 그 삶의 목표를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데 두기에 스스로 이 세상 사람의 교훈으로 말하고 행동하지만, 하나님께로 교훈을 받은 자는 그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데 목표를 두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의와 영광을 구치 아니하며 오히려 자신을 낮추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추구하기에 ‘그 속에 불의가 없다’는 말씀이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들의 특징
예수님은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한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유대인들의 교훈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교훈이 아니기에 스스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말함으로 그 목적은 자신들의 영광을 세우기 위함이며 그 속에는 불의가 가득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예수님은 스스로 말씀하지 않고 ‘보내신 이의 교훈’을 말씀하심으로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기에 “그 속에 불의가 없으며” 참되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언하신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영광 곧 그의 뜻을 성취하여 구원과 생명에 이르는 영생의 말씀이시며,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가르침을 알아듣는 영적 계시를 받음으로 그분을 알아보고 그 교훈을 생명으로 받아먹으며 생명으로 잉태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지만,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는 자’인고로 예수님의 교훈을 배척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기에 절대로 예수님에게로 나올 수가 없음을 말씀하신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5:42).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5:40).
자기 영광만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특징은 바로 외식이다. 예수님은 이들을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이여” 라고 부르시면서 이들의 외식을 일곱 가지 화로 선포하셨다 (마 23:13-33). 이들이 자기들의 의와 영광을 세우기 위해 얼마나 외식하는 자들인지를 천하에 공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아,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독사의 새끼들아’ 라는 아주 강한 어조로 책망하셨다. 왜냐하면 이들의 신앙 초점이 “스스로 자기 영광만을 구하기”위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위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자기를 나타내는 ‘의’ 이었으며 (마 6:1),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구제하는 일을 자랑하며 (마 6:2),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길거리에서 기도하고,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자신을 의로운 자로 나타내며,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 (눅18:11-12)다고 종교 열심을 자랑하며, 구제를 할 때도 나팔을 불며 (마 6:1-4),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경문을 넓게 하고 옷술을 크게 했으며,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에 앉기를 좋아했고,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들에게 랍비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하며 (눅23:5-7),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며 (눅16:14),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들이며” (막 12:40),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며”(마 23:25),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마 23:27) 전형적인 외식 자들임을 폭로하셨다. 이들이 즐겨 먹는 것들이 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다”(요일 2:16). 그리하여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5:44)라고 이들의 외식된 패역함을 지적하신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지적대로 하나님이 주신 선한 율법을 악용하여 사람의 교훈으로 가르치면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구원을 나누어주는 권위를 가진 자로 자칭하며, 자기들 마음대로 다른 이들을 ‘죄인’이라 정죄하고 판단하는 영혼을 죽이는 일들을 행한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들이 바로 ‘삯꾼’이며, 양을 물어가고 헤치며 (10:12),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기에 (10:10)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 (마 23:15) 라고 화를 선포하셨으며, 자신들의 영광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살인하는 살인강도까지 가게 됨으로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라고 지옥의 심판을 선고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의 외식이며 결국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의 특징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서 영광과 섬김을 받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시며, 또한 세상과 맞서 싸우기 위해 오신 분도 아니시다. 오히려 도살당하는 무력한 어린 양이 되어 자신을 세상 죄인들에게 내어주어 온갖 고난을 다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단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여 영생의 주가 되셨다. 이러한 십자가 죽음이 바로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12:28) 일이며, 십자가의 때가 바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때라고 말씀하셨다(17:1; 12:23).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자로 살았으며, 아버지의 영광의 성취를 위해, 죄인으로부터 멸시와 조롱과 핍박을 당하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고 부활하셨다. 우리 주님은 이와 같이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이 세상에서 온갖 멸시와 조롱과 수치와 핍박과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우리 성도도 주님이 살아내신 십자가 삶으로 이끌려 감을 미리 말씀하여 주셨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3).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막 13:9).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눅10:3). 분명 양이 세상 이리 속에 들어가게 되면, 이리에게 잡혀 뜯기고 찢겨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다. 구약에서도 믿음의 선지자들이 그 길을 갔으며, 신약에서도 주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그 길을 갔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세상 이리에게 잡혀 먹히는 양의 길을 순종으로 받아들임으로 주님의 증인이 된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죽임을 당하는 일이 바로 주님을 증거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십자가 삶으로 이 세상 힘의 원리를 무력하게 함으로 십자가 앞에서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여 보여주는 일이다. 십자가의 삶은 세상에 대하여서는 죽음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가 원하시는 삶을 순종으로 살아내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이다. 우리 주님이 먼저 이 세상으로부터 거절당하고 천대받고 버려지고 핍박받고 죽임을 당하는 십자가 삶을 살아내셨다. 주님은 어린 양이 되어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하늘나라의 원리로 세상을 이기시고 아버지에게는 영광의 성취로, 우리에게는 구원과 생명이 임하게 하셨다. 이것이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죽임을 당하나 오히려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이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라고 당당하게 말씀하고 있다. 즉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무력하고 연약하고 미련한 것으로 보이지만, 성도에게는 구원이며, 부활이며, 영생이며, 천국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요구되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란 바로 우리 주님이 살아내신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이다. 말하기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6-11). 즉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란 바로 우리 주님이 살아내신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철저한 순종임을 말씀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과 맞서서 싸우는 자도 아니요, 또한 빛과 소금의 착하 행실로 세상 부패를 방지하는 정화로, 세상 어둠을 밝히는 빛의 역할로 인정과 칭찬과 모델로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는 위인이 아니다. 반대로 성도는 썩어지는 세상과 분리된 썩지 아니하는 소금이며, 이 어둠의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아 하늘나라로 입성하는 빛의 자녀이다. 그 빛과 소금의 삶은 세상이 공격하는 모든 고난과 핍박과 조롱과 살해를 감당하는 십자가 삶으로 세상을 무력하게 만드는 하늘나라 원리로 사는 삶이다. 주님이 앞서가 신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나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라는 진실된 고백이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자의 삶은, 세상 것이 털리는 가난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애통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온유로, 이 세상의 양식을 끊는 굶주림의 금식으로 옛사람이 죽고 오직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오직 진리의 말씀만을 받아먹는 진리의 아들로 완성의 지점까지 끌려가는 삶이다.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예수님은 지금 율법을 다 지켜 행하였다고 자랑하고 자고하는 이들을 향하여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라고 질책하신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준 것은, 그 율법으로 너희 죄를 깨닫고 그 율법이 제시하고 설명하여 주는 그리스도의 구원과 생명을 읽고 나에게로 인도하기 위한 역할과 목적이었는데 너희는 율법을 다 알고 지킨다고 하면서 지금 “나를 죽이려고 하니” 너희는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범한 자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그분의 존재 자체로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데, 그런 분을 죽이려 하는 것은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 반대로 율법을 악용 하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모세 오경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계시하는 구속사’이다. 즉 창제 전부터 하늘나라에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 사역을 장차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는 약속들을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 사랑의 본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있기에 주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5:39-40)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들은 모세오경을 열심히 상고하고 연구하며 다 지켰다고 자고 한 자들이지만, 모세가 가리키고 증거하는 예수그리스도는 읽어내지도 믿지도 않았다. 만약 자신들의 말대로 모세의 글을 믿었다면 예수를 영접하고 믿게 되어있다. 모세 오경이 모두가 예수님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5:46) 라고 이들이 실상은 모세가 준 율법을 믿지 않았음을 제시하신 것이며, 그리하여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7:19) 라고 책망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일 수밖에 없는 가장 강력한 핑계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증언들을 주셨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증언도, 모세 율법의 증거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보여주고 들려주어도 믿지 않았고 대적하여 끝까지 자기들의 고집을 내 세워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섬긴다고 열심히 율법을 지킨다는 이들에게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 (7:19)라고 지적하신 것이다. 즉 너희는 지금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을 지킨 자로, 월등한 민족으로, 택함을 받은 선민으로 자칭하지만, 너희는 하나님을 마음에 둔 것이 아니라, 너희 자신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고 하나님을 너희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소유로 만들고, 너희들의 의를 세우고 그 의로 영광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율법마저 자신들의 탐심의 배를 채우는데 도용하고 있으니 너희는 율법을 지킨 자가 아니라 도리어 율법을 범한 패역한 자들이라는 뜻이었다. 이들은 예수님의 지적대로, 예수그리스도의 구원과 생명을 제시하는 율법을 사람의 교훈으로 정하여 놓고 자기들의 의와 영광을 쌓는 방패로 개조하여 자신들의 선민적 월등과 자존감을 지켜주는 육신의 떡으로 먹은 것이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율법을 주신 의도는, 자신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과 추악한 죄를 깨닫고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구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오로지 하나님 나라의 의와 그분의 영광만을 구하며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추구하라는 것이 율법의 정신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율법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완전히 반대로 율법을 이용하여 이웃들에게는 율법으로 ‘죄인’이라 마음대로 정죄하고, 약한 자를 짓누르고 빼앗는 횡폭으로 자신들의 유익을 챙겨가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에게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나를 죽이려고 하니 만약 율법으로 판단하려거든 공의롭게 하라고 (7:23-24) 말씀하신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의 생명을 구하신 것을 율법으로 안식일을 범하였다 하여 죽이려고 한 것이다. 이들은 율법으로 공의로우신 예수님을 안식일 범한 죄인이라 몰아붙이고 죽이려는 용납 못할 죄악을 정당화하려는 잔인한 자들이었다.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7:20)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 지킴이 거짓으로 폭로되자 이내 심히 노하여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라고 모욕하면서 자신들의 추악한 죄를 감추려고 이내 거짓말로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7:20)라고 오히려 예수님을 공격한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뻔뻔스러운 거짓말쟁이요 마귀의 자식임이 틀림이 없음을 스스로 증면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명명하시고 이들에게 가장 저주스러운 뱀들,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욕과 함께 너희는 반드시 지옥에 간다는 저주를 쏟아내신 것이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33).
이들은 지금 자신들의 기대와 완전히 어긋나게 말씀하시고 사역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귀신이 들렸도다” 라고 극치에 달한 모욕으로 예수님을 대적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귀신들린 자는 부정한 자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배척하였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에게 ‘귀신이 들렸다’라고 말한 그 의도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 마귀로부터 왔다는 최대의 모욕이었다. 이와 똑같은 말로 예수님의 영을 훼방한 사건을 마태복음 12장에서 읽을 수 있다. 이들은 예수님의 축귀사역을 ‘바알세불을 힘입어 행한 일’ (마 12: 22-24),즉 마귀가 행한 일이라고 매도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율법으로 귀신들린 자와 눈먼 자와 귀먹은 자와 각종 질병에 걸린 자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부정한 자’로 ‘죄인’으로 정죄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의 권세와 능력으로 고쳐주셔서 ‘부정한 자’를 ‘정결한 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아무런 노력과 행함과 공로 없이 이들이 율법으로 ‘부정하다’고 정죄한 자들을 예수님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혀 깨끗한 자로 자유한 자로 만들어 놓았기에 극토록 분노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의로운 구원사역을 ‘바알세불의 사역’이라 모욕하고 대적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의 극치에 달한 악행에 대하여 ‘영원히 사함을 얻지 못하는 성령 훼방죄’ (마 12:31-32)로 정죄하셨다. 즉 이들이 바로 자신들의 율법 지킴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모독하고 생명의 근원인 예수그리스도의 영을 대적하는 영원히 사함을 얻지 못하는 마귀 바알세불의 자식들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이야말로 마귀 ‘바알세불’임을 드러내기 위해 일곱 귀신 들린 비유를 들려준 것이다.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우월감을 내세워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행위로 자신을 의로운 자로, 청빈과 도덕과 윤리로 깨끗한 자로 자칭하며 사람들 앞에 칭찬을 받고자 하는 그 ‘깨끗함의 소제’는 귀신이 나간 것이 아니라, 반대로 더 악한 귀신 일곱을 초청하여 완전한 마귀의 소굴로 만들어 버리는 최악의 상태가 되었음을 7의 완전수로 일곱 귀신 들린 자들로 표현하신 것이다. 즉 ‘너회가 바로 일곱 귀신 들린 마귀의 세간’이라는 비유였다. 그렇게 열심히 지키고 행하고 있는 그 율법적 행위가 ‘깨끗함의 소제’가 아니라 반대로 일곱 귀신을 초청하는 행위이며, 때문에 너희에게 나오는 행위가 바로 ‘너회 아비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마귀의 행사라는 말씀이었다. 그렇게 귀신들린 자의 모습이 어떠한 모습인가를 똑똑히 보여주기 위해 무덤 사이로 벌거벗고 돌아다니며 쇠사슬로 묶어도 감당이 안 되는 군대 귀신 들린 광인을 등장시킨 것이다. 너희들은 비록 거룩한 옷을 입고 성전에서 열심히 제사를 드리며 율법 지킴으로 자신을 의롭다고 자랑하여 사람들의 높임과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지니고 의인의 행세를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너희는 미친 광인과 같이 벌거벗어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썩어빠진 무덤과 방불한 존재이며, 쇠사슬로 묶어놓아도 감당이 안 되는 목이 굳은 끈질긴 군대 귀신들린 자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광인 안에 있는 그 많은 귀신들을 돼지 안에 몰아넣고 2천 마리의 돼지 떼들을 물에 직사 시킴으로 이들의 결국은 멸망의 심판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귀신들린 마음 상태가 노아 홍수 때와 소돔과 고모라의 때보다 더 악하여 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됨을 선포하셨다(마 10:15). 그래서 세례요한도 이들을 가리켜 독사의 자식들아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너희에게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더는 피할 수가 없다고 외친 것이다 (마 3: 7-10).
그러므로 이들이야말로 곧 자신들의 멸망을 자초하는 “귀신 들린 자”들이며, 매일 씻는 정결 의식을 행하여 깨끗하다고 하지만 실상은 부정한 돼지와 방불한 존재이며, 일곱 귀신 들린, 군대 귀신 들린 바알세불임을 이들 스스로 자기들의 말과 행동으로 증명한 것이다. 주님은 이들의 죄악을 폭로하기 위한 의도로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7:19)라고 묻은 것이다. 그러자 이들은 이내 자기들은 주님을 죽이려 한 적이 없다고 반박하면서 자신들의 죄악을 감추기 위해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7:20)라고 자신들의 죄를 극구 부인하고 있었다. 인간의 종교적 열심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을 살해하는 행위임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인간의 본심은 자신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또한 죄가 폭로되면 그 폭로한 사람을 죽여서라도 ‘자아’를 철저히 지키려고 한다. 유대인들의 그러한 마귀의 본심이 그대로 드러났고, 자신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 하나님을 “귀신들린 자”로 몰아붙이고, 자신들의 죄악을 폭로하는 하나님을 죽이려고 하였고, 결국 자기들의 영광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살해하게 된 것이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21절 - 24절)
주님은 이들의 외식을 폭로하시고 자기 영광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마저도 살해하기를 서슴지 않는 죄인들의 종교적 열심을 지적하시고, 율법으로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이들을 향하여 ‘너희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는 모든 일을 겉모양으로 판단하는데 하나님의 공의의 차원에서 판단하라’라는 뜻으로 권고하시면서 이들의 거짓된 율법 지킴을 폭로하기 위해 할레와 안식일을 예를 들어 말씀하신다.
할례와 안식일 준수
유대인들은 율법과 안식일조차 예수님을 죽이는데 악용한 것이다. 바로 자신들의 영광과 종교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불의로 하나님의 공의를 이기려는 이들의 어리석음과 패역함에 대하여 주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7:24)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할례를 예로 들어 그분이 하신 일의 정당성과 이들이 바로 율법을 어긴 자들임을 변론하신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난지 팔 일만에 모두 할례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안식일을 목숨처럼 지키는 이들에게 고민이 생긴 것이다. 만약 안식일에 아기가 태어나면 그다음 안식일에 할례를 받아야 하는데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만약 안식일에 할레를 행하게 되면 안식일을 범한 것이 되고;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할레를 행하지 않으면 할레를 범하는 일이 된 것이다. 이들은 고민 끝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할례를 행하는 법이 더 큰 법이라는 결론을 스스로 내렸고 안식일에 태어난 아이는 다음 안식일에 할례를 행할 수 있도록 정한 것이다. 주님은 지금 이 사건을 예를 들어 너희는 할레가 더 중요하다고 하여 안식을 범하면서, 내가 죽어가는 자를 살려 생명을 주는 일로 안식일을 범하였다 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사람의 목숨이 더 소중함에도 너희는 안식일을 범하였다 하여 나를 율법으로 판단하는데 하나님의 공의로 판단하라는 말씀이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 날 고쳐준 일로 모세의 율법으로 예수님을 안식일 범한 자로 정죄하고 죽이려는 음모에 근거로 삼고자 한 것이다.
요한복음 5장 10-16에서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아무것도 행하지 아니하시고, 단 한마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38년 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일어나 걷게 되자 유대인들은 이내 안식일을 범했다는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5:10). 이들은 안식일에 말씀으로 38년 된 병자를 고친 일로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한 것이다. 참으로 유대인들만 할 수 있는 잔인한 트집이다. 병이 나아서 병자가 자리를 들고일어났는데,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일어난 것이 안식일을 범한 일이라고 황당한 트집을 잡고 이내 독사처럼 달려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으로서는 일어날 수가 없는 기적이었기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겨되자 이들은 이내 자기들의 기득권에 위기를 느꼈고 시비를 걸고 예수님을 비난하고 대적하고 죽이려고 한 것이다. 종교적으로 지키는 신앙생활이 얼마나 악독한지를 너무나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누가복음에서도 읽을 수 있다. 18년 동안 귀신들려 몸이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여인을 회당에서 안식일에 고쳐주자 회당장은 화를 내며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한다 (눅 13:14). 그러자 예수님은 안식일에 너희들은 소나 나귀를 끌고 가서 물을 먹이는 것은 허락하면서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눅13:15-16) 라고 이들의 모순된 거짓 지킴을 지적하신 것이다. 즉 너희들은 소나 말도 안식일에 목말라 죽을 까봐 외양간에서 끌어내어 물을 먹이면서 귀신에게 매여 18년을 고통당하던 여인을 고쳐 준 나를 너희는 못 마땅히 생각하고 죽이려고 하느냐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꿰맞춘 규칙들의 허상을 폭로하고 깨뜨림으로 너희가 지키고 행하는 것들은 사람을 살리는 법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는 규칙이라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환자를 고침으로 안식일의 참된 정신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병든 자를 고쳐서 자유롭게 하여 참된 안식을 주는 일이며, 그러므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 2:27-28) 함을 실제로 증거로 보여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율법 틀에 갇혀 안식일을 신으로 모시고 섬기는 이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까지 죽이려는 그야말로 잔인한 이리이며 독사들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율법을 굳게 지키는 이들의 행위를 ‘마귀의 행사’라고 정죄하고, 이들을 ‘회칠한 무덤’, 군대 귀신 들린 광인, 더러운 돼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개로 비유하시고, ‘독사의 새끼’라고 부른 것이다. 분명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롬 8:2) 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음에도 그 죄와 사망의 법들을 지켜 행하여 자신들의 죄 된 의를 세우는데 목숨을 걸어 결국은 더 극악한 죄로 스스로 사망의 심판을 자초하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유대인들과의 대화에서 유대인들의 끈질긴 죄악들이 바로 우리 인간의 본체임을 뼈저리게 들여다보게 된다. 그들이 바로 우리 자신들 안에 들어있는 마귀적 본성을 들여다보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오로지 자아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악을 택하게 되어있다. 운명적으로 죄를 져야 살 수 있는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것이 생각이든 행위이든 상관없이 죄인으로 태어남을 스스로 의인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자신들의 자존심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목숨을 걸고 상대방을 죽이려 하는 마귀 본성이 유대인들에게, 아무 죄도 없으신 의인이신 예수님을 끈질게 대적하여 죽이는 데서 너무나 선명하게 나타난 것이다. 인간은 참으로 잔인한 존재이다. 때문에 우리를 구원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의 그 어떤 것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독립적 주권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그리고 죄인에게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하늘의 의가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 구원과 생명을 오직 은혜를 입혀주시는 방법으로 선물로 조건 없이 주시기로 정하셨으며, 하지만 오직 당신이 택하여 놓은 백성에게만 주시기로 정하셨다. 이 진리를 깨달은 바울은,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 (갈 1:15)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엡 2:5),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라고 말씀하고 있다. 얼마나 정확한 말씀인가!
내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죄인이었던 내가 의인이 된 것은 그분께서 나를 택하셨다는 그 이유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나는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날 수가 있었다. 그분의 의로운 죽음이 나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그분의 영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의인의 신분으로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의인이 된 것은 그분이 먼저 나를 택하셨고 사랑하사 아무 대가 없이 입혀 주신 은혜이다. 그런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 24). 얼마나 정확한 말씀인가. 이는 내 행위와 노력과 상관없이 내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하늘나라에서 이룬 뜻이기에 값없이 내려주시는 은혜와 영광의 구속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택함을 받은 자는 이 세상의 육신의 욕망을 거슬러 하늘나라 원리의 삶을 추구하게 된다. 그 삶은 이 세상의 것을 취하고 긁어모아 자아를 세우는 인생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주셔서 먼저 우리를 죄인으로 티끌의 존재로 분석하시고 폭로하셔서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는 십자가 죽음을 통과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리의 말씀은 검으로 우리를 죄인으로 해부한다. 그 말씀의 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히 4:12) 투명한 해부를 겪게 하신다. 이때껏 자신의 수치와 죄를 덮어 감추기 위해 마음속 깊이 감추어 두었던 수많은 위장과 가면들이 벗겨지고 부서지고 깨짐으로 무가치한 존재로 벌거벗은 수치스러운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신다. 우리의 부끄러운 수치를 가리 주시기 위해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벌거벗은 모습으로 매달린 것이다.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을 제시하여 주셨다 (눅 9:23).
사도바울은 성도에게 오직 하늘의 존재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자랑과 자기의 영광과 자기의 자존심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자랑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고 말씀을 주고 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나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전 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