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 60-71) 베드로의 신앙고백 과 예정된 마귀 가룟 유다
요 6:60~71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 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요한복음 6장은 아주 긴 장이지만 주제는 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시며, 그 생명의 떡은 오직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만 주실 것이며, 그 생명의 떡을 먹은 자는 곧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자로 하나가 되어 영생을 살게 된다는 말씀이다.
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예수님은 육신의 떡을 달라고 좇아온 유대인 무리에게 육을 위한 떡에 관하여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오직 영으로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으로 제시하시고, 그 생명의 떡이 바로 자신의 살과 피라고 말씀하신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6: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6). 유대인 무리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육의 지성으로는 이해되지 않자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60) 라고 제자들까지도 수군거린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6:61)라고 반문하심으로 이들의 속내를 들춰내신다.
주님의 말씀이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영의 말씀이 이들의 육적 탐심을 폭로하고 브레이크를 거는 역할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이들이 당신을 찾아온 의도가 바로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탐심의 배를 채우기 위함임을 알고 계셨기에 영의 말씀으로 이들의 육적 탐심을 드러내고 부시고 있었던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며, 너희가 나에게 육신의 떡을 구하는 그 탐심이 바로 “썩은 양식을 구하는 일”이며, 너희는 내 아버지께서 보낸 자가 아니므로 “나에게로 나오는 것을 원치 아니하며”, 너희는 내 아버지의 백성이 아니므로 절대로 나에게 올수 없으며,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만 내게로 나와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연속하여 암시적 공격을 하신 것이다. 때문에 주님의 말씀이 이들에게는 주님께로 나오는 걸림돌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고, 이들은 육적으로 자신들의 타산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육을 깨는 생명의 말씀이 부담이 되었고, 듣기 싫었으며, 거부감을 일으키게 됨으로 의문과 불만을 쏟아내게 되었고, 결국 모두가 예수님을 떠나게 된다.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은 서로 대적하게 됨으로 결코 하나를 이룰 수 없음을 말한다. 바울이 말한 봐야 같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죄인으로 태어난 육은 오로지 내 육의 편리와 유익과 탐욕을 채우는 ‘자아’를 세우는데 출발점을 두고 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은 육적인 것으로 통하는 종교가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직선적으로 영의 계시를 주셔야 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영으로만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육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동원하여 오로지 육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지할 수도 인식할 수도 더더욱 영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유대인들은 육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모태에서부터 배워왔고, 어릴 때부터 제사의 섬김과 율법 지킴 등 육의 지성으로 하나님을 읽혀 왔기 때문에 의지적 노력과 행위의 의로움을 추구하여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높임을 받는 것이 신앙의 주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정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성경 말씀에서 배우고 그 속에 감추어 주신 진리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구원과 생명을 읽어내어 영으로 드리는 신령한 예배였다. 그러나 성령의 계시를 받지 못한 그들은 육의 지성으로는 영이신 하나님을 인지할 수도 알 수도 없었기에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손꼽아 기다리던 약속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핍박하고 거역하여 결국 십자가에 못 박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까지 하게 된다.
영의 말씀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늘나라의 생명을 말함으로 이 땅에 속한 혼적인 지성으로는 절대로 알아들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기에 걸림이 된다는 말씀이다. 그분의 생명은 이 땅에 속한 육신의 목숨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영원을 사는 생명이며, 반드시 영으로만이 이해되고 알아듣게 됨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생명의 떡을 먹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베드로에게는 “영이요 생명”이 됨으로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68-19) 라는 확고한 신앙고백을 하게 되지만, 그 나머지 무리와 다른 제자들에게는 ‘걸림’이 됨으로 영생인 주를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한 것이다(6:66).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2)
주님이 말씀하신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간다”는 말씀은, 당신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이시며 태초부터 하나님과 하나로 함께 계셨음을 증언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은 하나이며,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항상 강조하셨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4:10). 사도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1-4) 라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승천하게 될 것임을 제시하는 말씀이다. 즉 너희는 곧 내가 있었던 곳으로 승천하게 됨을 보게 될 것이며, 그럼에도 너희는 나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계시적 말씀이다. 실제로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믿지 않았고, 심지어 부활하신 주님과 대화까지 나누었던 제자들까지도 알아보지 못하였으며, 부활의 예수와 얼마 동안 함께 있었음에도 예수를 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다시 갈리리로 돌아가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예수님 자신도 부활하신 후 오직 제자들과 여인들, 그리고 그를 사모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보여주셨으며 많은 무리들에게는 감추셨다. 부활의 예수는 성령의 계시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부활의 영으로 영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의 임재와 함께 성령으로 거듭나자 그때에야 비로소 십자가를 져야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 안에서 역사하자 새롭게 거듭난 그들은 비로소 담대함으로 예수 부활을 전하는 참 제자들이 된 것이다. 사도 바울도 부활한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새 생명으로 중생한 기쁨으로 부활의 예수 생명을 전하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예수 부활의 사건은 “하나님께로서 난자”, “위로부터 난자”가 되는 영의 사건이다. 즉 영으로 깨닫고 영으로 체험하는 사건이기에 육의 지성으로는 알 수가 없다.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는 실체로 보고 기록된 역사의 증거가 있지만, 부활하여 영으로 오신 성령의 예수는 육감으로는 보이지도 이해되지도 믿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즉 부활하신 예수는 승천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와 우리와 하나로 계신다. 우리가 구하여서 주관적 의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먼저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여야 하며, 그분이 먼저 내 심령 안에 들어오셔야 만이 비로소 새 생명이 잉태하는 중생을 체험하게 된다. 즉 예수 부활은 죄로 죽은 나를 다시 살리는, 영으로 새 생명이 잉태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늘나라로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말한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나는 죄인으로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은 상태에 있을 뿐 (갈 3:13) 영생하는 생명을 얻을 수가 없다. 십자가 구원의 목적이 부활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 (고전 15:17).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셨기에 성령으로 다시 우리를 찾아와 주셔서 영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연합을 이루심으로 영원히 함께 사는 신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 라고 부활을 선포하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오직 부르심을 입은 영에 속한 자들에게만 구원의 능력으로 생명의 지혜로 알아보고 영접하게 된다.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며, 자신이 하신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육으로 사는 목숨은 무익하며 영으로 사는 것만이 생명이며, 그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에게만 성령으로 부어주시며, 그분의 영의 속성을 따라 영원을 사는 생명임을 제시하신다. 그리하여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라고 오직 믿는 자에게만 구원과 생명의 능력이라고 말씀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영에 속한 자만 예수님의 말씀을 살아있는 생명으로 감지하게 되며, 그 생명의 말씀이 곧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고 믿고 영접하여 영생을 얻게 됨으로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육에 속한 자는 이 땅의 육을 위한 육신의 떡에만 목숨을 걸기 때문에 육이 사라지만 목숨도 함께 사라짐으로 주님은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태까지 기나긴 강론으로 반복하여 내가 곧 생명의 떡이며 영생이며 나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원히 살 것이라고 설명하여 주셨다. 하지만 무리들은 생명의 말씀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여 수군거리며 예수님을 비방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에게 막힌 하나님의 계시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으로 자신들만이 구원받은 민족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이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롬 9:4-5) 함과 같이, 이러한 뚜렷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제사와 안식일을 굳게 지킴으로 자신들을 이 세상에서 구별된 백성으로 자고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우월성과 선민적 독특함을 굳게 세워 세상에서 으뜸가는 민족으로, 자신들만이 구원받은 민족으로, 자신들만의 하나님으로 세상에 나타내어 종교적 지도자로 자신들의 의와 이름을 널리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율법의 정신은 버리고 오로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행위에 목숨을 걸게 된다. 한마디로 자신들의 율법 지킴으로 세상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백성으로 이름을 날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율법을 613가지로 세분화하여 지켜내려고 애썼지만 지켜낼 수 없게 되자 형식적으로 지키는 척하는 외식 자가 된 것이다. 지킬 수 없음을 깨닫게 하려고 율법을 주셨음에도 다 지켜 행하였다고 자기 의를 자랑하는 거짓을 꾸미는 더 불의 한 자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율법을 이용하여 신처럼 행사하려는 그 탐심과 욕망이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에 사실상 마귀의 자식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불렸고,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며”(마 23:25),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27-28)라고 이들의 외식된 악행을 폭로하시면서 이들의 행사가 곧 ‘마귀의 행사’이며, 거짓말쟁이며, 살인하는 “마귀의 자식”(8:44)이라고 철두철미하게 폭로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마음이 꽂혀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성경 말씀을 오로지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추구하는 방패로 삼고 성경에 없는 수많은 규칙들을 자기 마음대로 세분화하여 ‘율법’이라 부르면서 스스로 자신들을 가두는 틀을 만들어 놓고 자신들에게만 속한 집단적 종교 놀이에 도취되어 있었기에 메시아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예수를 증오하는 이들의 광적인 기세가 예수님 앞에서 여지없이 드러났고, 그동안 하나님을 섬기며 제사와 율법에 몰두한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마귀의 행사였음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사사건건 예수님을 비방하고 자신들의 율법 기준으로 예수님을 정죄하고 야심과 질투로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는 원수로 드러난 것이다. 이들은 메시아가 오셔서 자신들의 목숨으로 지켜왔던 제사와 율법을 부정하시고 ‘성전을 헐라고’고 말씀하시며, 안식일을 범하며, 세리와 창녀와 같은 ‘죄인’이라 정죄하는 연약한 자들에게는 친구가 되어 주시고, 자신들에게는 사정없이 내면의 추악함을 폭로하며, 자존심과 선민사상과 우월성을 깨고 부수고 들어오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여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게 되였고 죽이려는 악독한 궤계를 꾸민 것이다(마 11:18).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선한 의도: 말씀은 지켜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그 법을 굳게 지켜 의롭게 되는 인간의 ‘의’를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으로 태어나 죄 밖에 짓을 수 없는 육의 본능을 드러냄으로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갈 2:16),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구원이 선물로 임하게 됨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엡 2:7-8). 실상은 구원과 생명이 임하는 영이며, 율법은 육의 타락과 죄를 드러내는 역할로 ‘죄와 사망’을 깨닫게 하는 몽학선생으로 주신 것이다. 때문에 율법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롬3:10).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선하고 의로운 법, 즉 생명의 말씀을 일수도 또한 지킬 수도 없음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법이라는 것을 주셨다. 그 원시적 율법이 바로 선악과를 주시면서 선포하신 말씀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7). “먹으면 죽는다"라는 말씀은, 육을 입은 존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음으로 지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육이 죽음으로 영으로 사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즉 율법은 지켜서 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키면 죽는다’는 뜻이다. 이 비밀을 깨달은 바울은 율법을 가리켜 “죄와 사망의 법”(롬 8:2)이라고 부른 것이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롬 7:5). 이와 같이 “먹으면 죽음”이라는 원시적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지키면 죽음”의 기능으로 적용된 것이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지키지 못한 법을 유대인들은 지킬 수 있다고 율법 지킴에 목숨을 건 결과는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심판과 멸망의 근거를 쌓았기 때문이다.
율법은 지켜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이 가리키는 나 자신의 정체성, 즉 죄와 사망에 갇혀있음을 깨닫고, 그 율법이 가리키는 구원자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생명이 입혀짐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16, 21). 이와 같이 처음부터 율법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열심히 ‘지켜 행하라’는 의도가 아니라, 왜 육체를 입은 인간은 ‘지킬 수가 없는가?’ 하는 인간의 패역함과 불가능함을 나타내기 위함이며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라고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목적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인간들의 죄 된 상태가 바로 열린 무덤처럼 죄가 목구멍까지 넘친 상태이며, 그 열린 무덤에서 쏘다져 나오는 것은 오직 추악하고 썩은 시체 냄새가 나는 죄뿐이라는 것을 폭로하기 위함이었다. 즉 모태에서부터 전신에 차 있는 그 죄의 실체를 바라보라는 기능으로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육은 무익하며 생명을 얻을 수가 없다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하나님은 인간의 본질을 잘 나타내는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이 땅에서 먼지같이 허무한 인생을 살다가 결국 한 줌의 먼지로 없어지는 ‘없음’으로 정하셔서 육의 무익함을 나타내셨다. 처음부터 인간에게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완전해 지거나 보존할 수 있는 기능을 주지 않으셨다. 즉 인간의 결국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 3:19)로 정하셨다. 육은 흙으로 만들어진 물체이기에 흙의 본성과 같이 나약하고 무가치하다. 그 속에는 선한 것이 없기에 제아무리 노력하고 개선한다 하여도 한 줌의 흙으로 ‘없음’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흙을 입은 육체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무익하다(요 6:63). 그 육의 무익함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선악과나무를 주시고 “먹지 말라"라는 계명을 주신 것이다. 흙으로 지음을 받은 첫 인간 아담과 하와는 아직 타락하기 전, 육의 본능을 따라 하나님의 법에 대한 불순종과 말씀을 왜곡하는 거짓과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망이 먼저 발동한 것이다. 그리하여 하와는 아직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 벌써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 3:6) 하는 생각으로 번민하고 있었다. 즉 육의 본능으로 눈으로 들어오는 탐욕과 마음으로 오는 지성의 욕망으로 뱀의 꼬임을 받고 있었고, 결국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육의 본능대로 타락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육의 본능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도 없다는 것을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통해 확실히 보여 주셨다. 말씀하시기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 7). 인간은 육의 본능을 따라 생각하고 상상하는 자아 욕망과 탐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첫 인간의 타락에서 여실히 보여 주신 것이다. 내육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함과 같이 타락한 육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이 주신 선한 법을 지킬 수가 없다. 허무한 인생에서 어찌 하늘의 의가 나올 수 있으며, 죄로 태어난 육에서 어찌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있으며, 죽음으로 정해진 육에서 어찌 영원히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이다.
육은 한순간에 왔다가 흙으로 사라질 뿐이다. 흙으로 허상인 육을 주셨다는 것은 실상인 영을 주시기 위함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모형으로 잠시 동안 있는 허상일 뿐이다. 즉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은 육적으로 믿는 종교 행위가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영의 계시를 주셔야 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육은 본능적으로 육이 원하는 ‘자아’를 추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지할 수도 인식할 수도 더더욱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도 없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선악을 아는 지식의 실과는 인간이 그 지성으로 오히려 타락하여 영이 죽어있는 상태이기에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육의 행위로 영의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자는 영의 하나님을 육의 신으로 끌어내리려는 망령된 행위이기에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마귀에서 난 자식’이라고 부르심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 됨을 부정하셨다.
육적 지성과 의지로는 영의 일을 알지 못함으로 보여주고 들려주어도 깨닫지 못하며, 오직 당신의 자녀에게만 주시는 계시이기에 택함을 받은 자만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구원과 생명에 이르는 은혜를 입혀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 11-16). 즉 육적 의지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감추심으로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마 13:15) 함과 같이 구원과 생명이 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육적 지성과 자아에서 나오는 의지적 열심으로 하나님을 육적으로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을 심판주로 혹은 육신의 떡을 주는 이 세상 이방신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오직 은혜로 입혀주시는 참 사랑과 십자가 공로로 자녀가 되는 영적 진리를 알 수도 또한 체험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6:65)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영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무리들은 떡을 얻어먹으려고 왔다가 떡이 주어지지 않자 주님을 떠나게 된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6). 주님의 말씀이 즉시 현실로 나타나 육을 위해 떡을 구하는 자에게는 아무런 효력이 없음을 증거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말씀”은 곧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사도 요한은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말씀’이라고 하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선포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유일한 길이 바로 말씀임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말씀으로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말씀으로 그분을 보게 되며, 말씀으로 그분을 알아가게 되며, 말씀으로 진리를 깨닫게 되며, 말씀으로 그분을 나의 구원자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셨다. 그러므로 말씀을 떠나서는 그분을 알 수도 인식할 수도 없다. 그리하여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63) 라고 말씀하신다. 이 생명의 진리를 하나님으로부터 깨달은 베드로는 제자들과 우리 성도를 대표하여 유명한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68).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무한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다 설명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분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진리의 말씀으로 영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전달하시며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영, 즉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이며,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며, 다가올 일들을 알려 주실 것이며(16:13),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16:8)라고 말씀하여 주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24:35).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말이 그 마지막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8). 이와 같이 말씀이 곧 영이요 예수그리스도 자신이시기에 생명과 심판의 권세가 말씀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성경으로 기록하여 매일 일용할 양식으로 주신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 4:4).
하나님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며, 즉 말씀을 생명으로 주셨다. 첫 인간 아담에게 말씀을 계명으로 주셔서 당신의 말씀이 곧 생명임을 계시하셨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이것이 인간에게 내려진 첫 말씀이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께서 “명하여 이르신 말씀”을 거역하자 곧 ‘죽음’이 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곧 생명임을 제시하셨다. 즉 우리에게 “이른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이기에 말씀을 떠나서는 곧 죽음이라는 진리를 첫 인간에게 주신 선악과나무를 통하여 제시하시고 선포하신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자 곧바로 임한 것이 ‘죽음’이라는 저주였다. 죽음이란, 곧 하나님의 말씀과 단절되는, 즉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끊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게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이 세상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영의 말씀을 거역하여 육신의 소욕을 좇아 죽음으로 달리고 있기에 이 세상을 죽은 자들의 세상, 멸망의 세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성경은 잠시 사는 육체의 목숨을 생명이라 하지 않고 죽음이라고 하고 (엡 2:5), 하나님의 말씀으로 잉태된 자를 생명이라 하시며 그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 영의 생명이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우리가 진리의 말씀으로 잉태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라고 말씀하시고, 그 영의 계시를 받은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68) 라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거역하여 죄와 죽음에 빠져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는 선악과를 따 먹지 않는 자로 영원히 함께 사는 자로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으며 그 말씀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며 그분 안에 생명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1:1-4). 그분은 말씀으로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말씀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 나라와 자신을 계시하시며, 말씀으로 교통하시며, 가르치시며, 깨닫게 하시며, 그분을 믿게 하심으로 구원과 생명을 얻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소통의 매개체는 바로 성경 말씀이다. 즉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그분을 알아가며, 말씀으로 그분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져감을 깨닫게 되며, 말씀으로 인도를 받게 되며, 말씀으로 그분이 나와 동행함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은 성경 말씀에서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시고 그 성경 말씀이 바로 예수님 자신에 대한 증언이라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 (요 17:3).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른 말이 곧 영이며 생명이라’고 말씀하심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영이시기에 오직 성령의 계시로만이 깨닫게 되며,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만 보여 주시고 믿는 믿음을 주시며 영생을 소유하게 하심을 의미한다. 오직 당신이 창세전 택하여 놓으신 자녀에게만 당신의 마음을 성령을 통하여 계시하여 주시며 보여주시며 은혜를 입혀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경 말씀이 지켜서 행하는 법이 되어 그 법으로 심판과 사망에 이르게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과 생명이 선물로 입혀지는 복음으로 받아들임으로 영생의 진리를 소유하게 된다. 오직 성령의 계시로만이 아버지의 마음과 천국의 비밀을 알 수 있도록 다른 이들에게는 덮어놓으셨다는 말씀이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성령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자만이 그분의 마음이 내 마음에 전달되며, 생명이 잉태되는 구원에 이르게 되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 그 증거를 받은 자가 바로 베드로이다.
예수님은 줄곧 영으로 생명의 말씀을 무리에게 전하셨다. 하지만 무리와 많은 제자들은 영의 말씀이 이들의 심리를 건드렸고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의 말을 주지 않자 불만을 쏟아내고 예수님을 비방하였고 결국 그 자리를 떠났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다”(6:66). 그 누구도 영의 말씀을 생명으로 알아듣고 주님 앞으로 나아와 영생을 받지 못한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6:65)는 말씀이 그대로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6:54) 라는 말씀대로 아버지가 주신 계시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제자들을 대표하여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68-69) 라고 아버지가 직접 주신 영적 계시로 영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베드로가 이와 같이 확실한 믿음을 고백하게 된 근거가 바로 하나님이 그에게 직접 내려주신 영적 계시라고 말씀하신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7-18). 주님이 말씀하신 “내 아버지가 이끌어 내게 주신 자 외에는 나에게 올 수 없다"라는 선택과 예정이 베드로에게 이루어진 것이다. 베드로가 스스로 영의 말씀을 알아듣고 자발적 의지에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영의 계시를 주심으로 남아 있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베드로를 주님에게로 인도하여 주셨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6:45) 라는 말씀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6:44) 라는 말씀이 베드로에게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은 온전히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하나님이 주신 고백이었다.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노력과 의지에서 발동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끄심과 우리 주님이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고 강하게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함을 보여주신 것이다. 베드로는 그 후에도 수시로 실수하고 “사단아 물러가라”는 책망까지 받은 자였다. 동일하게 무리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다 떠남으로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6:65)는 말씀이 그 현장에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에게 생명의 떡을 주시려고 오신 분이시기에 그분의 백성에게만 그분을 생명으로 알아보는 영의 눈을 뜨게 하시며, 그분의 음성을 듣는 귀를 열어주실 것이며, 그분을 따르고 믿는 믿음을 주실 것임을 현실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 영생의 떡을 먹고 살과 피로 한 몸이 되어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계시는 하나로 영원을 살게 됨으로 그분을 소유한 자는 그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영원한 생수로 영원한 생명의 떡으로 지속됨을 보여주시고 증거하여 주셨다.
예정된 마귀 가룟 유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예수님은 12 제자 중 자신을 팔아넘길 유다를 가리켜 “마귀”라고 부른다. 즉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마귀’로 택하셨다는 말씀이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셨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유다도 예수님이 택한 자이지만 그는 마귀의 역할을 하도록 주님 곁에 두셨다는 말씀이다. 때문에 주님은 실수 많은 제자들을 끝까지 붙들어 주셨지만, 유독 가룟 유다만은 붙들어주시지 않으시고 스스로 지옥을 택하게 내버려 두셨다고 말씀하신다 (17:12). 그리하여 주님은 유다에 대하여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 라고 말씀하심으로, 유다의 운명이 마귀로 태어나 지옥으로 떨어지는 비참한 취후를 맞게 됨으로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였다’고 저주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다. 어차피 마귀로 정해진 인생으로 영원한 지옥 고통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나지 않았으며 좋았을 것이라는 무서운 욕설이다.
유다 배신에 관하여서는, 하나님은 왜 유다를 마귀로 선택하였으며, 그 인생이 억울하지 않는가? 유다가 예수님을 팔게 된 것은 그의 인격과 성품 때문인가? 심지어 유다의 배신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큰 공헌을 하였다 하는데 마귀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쓰시는 이용물이며 지옥불로 정해져 있다. 마귀 유다를 동정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여 주심을 천만다행으로 감사하는 은혜에 초점을 두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의 사고와 추리로 판단하기보다는 오직 성경에서 계시되는 해답에 근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룟 유다의 배신은 구약에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
시 41: 9: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행 1:16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요 13:18: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구약에서 자신을 가리켜 기록된 모든 내용이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삼 년 반 동안 자기를 대적하는 마귀를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 두시고 다른 제자들과 차별이 없이 똑같이 ‘친구’로(시 41:9) 대하셨던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완전한 도덕성과 하나님 아버지에게 향한 완전한 순종을 말해준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셨기 때문에 모든 일을 아버지가 주시는 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십자가 지심과 자신이 친구(제자)에게 배신당하여 팔려가게 될 것임에 대하여 구약 성경에서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택하여 마귀의 역할을 하게 하심으로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한 성경을 응하셨으며, 가룟 유다는 정해진 마귀의 역할로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등장한 것이다. 때문에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기를 팔고 대적하는 마귀 유다를 제자로 옆에 놓고 삼 년 반 동안 함께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구원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 마귀 유다를 옆에 숨겨 놓으시고 그 정체를 감추심으로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원수를 곁에 두시고 그 원수에게서도 도덕적 완전성을 인정받으신 것이다. 마귀 유다는 주님의 도덕적 결점이나 흠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였고 ‘내가 무죄한 피를 팔았다’(마 27:4)는 선포로 주님의 도덕적 완전성을 입증해 주었다. 그러나 유다의 입장에서는, 그는 처음부터 마귀였기에 하나님이 정하신 십자가 때에 마귀 역할을 한 것뿐이다. 때문이 비록 예수님과 삼 년 반 동안 동고동락하였지만 영적으로는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 있었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생명의 말씀을 들었으며, 파송되어 주님께서 주신 권능으로 다른 제자들과 같이 마귀를 내어 쫓고, 병을 고치며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최후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조차 참여하였고,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실 때 태연하게 그의 발을 주님께 맡겼던 사람이다. 아무리 엄청난 이적들을 목격하고, 지극히 영적인 가르침들을 듣고, 그리스도 옆에서 삼 년이나 경건한 교제를 하였지만, 마귀였기에 영적으로는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유다의 선택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 하여 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이 택함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식, 독사의 새끼라고 마귀로 부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다도 택함은 받았지만 다른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마귀의 역할로 뽑힌 것이다. 오늘날 성도라 자처하는 이들 중에 양의 옷을 입은 늑대, 즉 거짓 선지자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선지자 노릇으로 아무리 이적과 기적을 행하였다 하여도 그는 처음부터 가짜이다. 가라지가 알곡과 같이 있다 하여 알곡으로 변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주님은 가라지 와 알곡을 함께 자라게 놔 주시며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께서 처리하신다고 말씀하신다(마 13:24-30 / 36-40). 주님은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니리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13:49-50)라고 말씀하심으로 의인 중에 숨겨진 악인이 있기에 하나님은 갈라내어 지옥에 던져였는다는 것이다.
유다는 처음부터 마귀의 역할로 몸만 주님과 같이 있었지만, 그 영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 세상 맘몬을 상징하는 돈 궤를 맡게 하셨다. 세리 출신 마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굳이 유다에게 맡김으로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12:6) 라고 마귀의 탐심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공금을 착복하여 개인의 이익을 취하는 유다의 마귀 탐심을 주님은 제지하지 않으심으로 그가 이 세상 마귀의 조종 아래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는 또한 처음부터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름으로 참된 영적 제자가 아니었음을 제시해 주고 있다. 결국 그는 성경의 예언대로(슥 11:12) 은 30냥으로 예수를 팔아넘기게 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4) 라고 은을 성소에 던져 버리고 스스로 목매어 죽는 것으로 끝난다.
우리는 여기서 핑계치 못하는 진리를 읽을 수 있다. 예수님을 판 마귀 가룟 유다는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 4) 라고 예수님의 ‘무죄’를 선포하였다. 로마 황제의 대리인과 심판관인 빌라도는 이 세상 권세자의 대표인으로 예수님의 ‘무죄’를 선포하면서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18:38) 라고 선언하였으며;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힌 강도도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23: 41) 라고 증거하였고; 예수님을 처형하던 백부장도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 었도다” (눅23: 47) 라고 증거 한 것이다. 이는 이 세상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의 세력도 비록 하나님의 대적자로 메시아의 구원을 방해하는 자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아무 죄가 없으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심을 세상에 선포함으로, 그분은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니라, 세상 죄 때문에 즉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증거를 천하에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작정이다. 죄 없으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고난과 수치와 저주와 죽음의 심판을 우리를 대신하여 받았음을 나타내며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마지막으로, 사단과 마귀는 예수님의 권세 아래 있으며, 십자가 구원 성취를 위해 악역으로 쓰임을 받는 이용물임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마지막 성찬에서 떡 조각을 유다에서 떼어주어 사단을 그 안에 들여보내시고 즉시 행동하라고 명하신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13:27), 즉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게끔 사단에게 행동을 지시하신 분은 예수님이시다고. 그리하여 마귀 유다는 예수님이 주신 떡 조각을 가지고 즉시 밤으로 들어가 사단의 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주님은 그에게 육신의 떡을 상징하는 떡만 주시고, 죄 사함과 생명이 잉태되는 ‘피’는 주시지 않으셨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욥의 사건에서도 마귀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만 그 권세를 행할 수 있음을 볼 수 있고, 예수님의 사역에서 마귀와 귀신들이 예수님의 권세 아래 철저히 순복당하여 쫓겨남을 볼 수 있다. 때문에 마귀는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권한과 통치 안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이들의 결국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는 지옥의 멸망이다 (계 19:19-20; 20:7-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계 20:10). 사단의 세력과 이 세상에 모든 악한 것들과 거짓된 것들을 유황불에 던지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때문에 유다의 죽음의 고통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며 우리가 논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은 유다의 멸망이 이미 예언되어 있었음을 언급하셨다.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여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7:12).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은 끝까지 지키고 보전하여 주셨지만, 오직 유다만은 멸망의 자식으로 구약성경 (시 41:9)에 이미 예언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유다의 배신은 우발적인 것도, 그의 인격과 성품 때문에 마귀로 변한 것도 아니다. 필연적으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하나님의 계략이며 섭리이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추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전2:7-8)함과 같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만세 전에 정하신 뜻이며, 그 구원사역에 유다가 악역 마귀로 쓰인 것이다. 필연적으로 하늘의 묵시에 작정된 시나리오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었다. 유다의 악한 성품 때문에 마귀로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마귀였기에 마귀로 쓰임을 받은 것이다. 예를 들면,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에 대하여 제자들이 부모의 죄 때문인가고 물었을 때 주님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대답을 주신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소경으로 태어나게 하셨다는 말씀이다 (9:1-3).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여러 면으로 쓰시는 그분의 섭리를 읽으면서 우리가 귀한 그릇으로 택함을 받았음에 안도의 숨으로 감사하는 것뿐이다.
마귀는 철저한 이용물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인 선과 의와 사랑과 영광을 나타내시며 그분의 나라와 우리에게 향한 구원 성취를 이루시기 위해 상대적으로 악한 사단의 존재와 역할을 허락하셨음을 읽을 수 있다. 죄를 상징하는 사단의 존재가 하늘나라에서 천사의 타락으로 인간 전에 먼저 등장하고, 타락한 천사들이(계 12:4) 하나님의 심판으로 하늘나라에서 쫓겨나 이 세상 공중 권세를 잡은 자들로 잠시 하나님의 사역에 악역을 맡겨 된 것을 읽을 수 있다(계 12:9). 그리하여 아직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우주는 온통 “어둠과 공허와 흑암”으로 차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제 이 우주의 “어둠과 공허와 흑암”을 상징하는 사단의 존재와 악이라는 것들을 들어 쓰셔서 우리에게 그분의 선과 의와 사랑과 구원과 생명과 그분의 나라를 설명하는 드라마를 역사로 펼쳐주신 것이다. 이는 하늘나라에서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정해놓으신 묵시이며, 그 묵시의 두루마리를 이 우주에 확 펼친 것이 역사이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나니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사 45:7).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다’고 확실히 말씀하신다. 때문에 사단과 마귀는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제한된 시간과 영역에서만 활동하는 하나님께 종속된 존재임을 성경을 통하여 먼저 알아야 마귀 유다의 배신에 관한 의문들이 풀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의 섭리대로 인간의 마음을 주관하심을 읽을 수 있다. 첫 아담의 후손 가인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어 아벨을 살해함으로 아벨이 첫 희생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장차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칠 것에 대한 복음을 계시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 11:4)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아벨을 살해한 마귀의 후손 가인의 불씨로부터 죄악이 온 세상에 신속히 만연해지자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창 6:5-6) 하심과 같이, 오직 노아에게만 은혜를 입혀주셔서(창 6:8) 노아 식구 8사람만 방주 안에 집어넣으시고 온 인류는 홍수로 멸종하셨다. 이 무서운 심판에서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자녀만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실 것이며 모든 죄악된 존재는 반드시 심판하실 것임을 보여주셨다. 출애굽에서 하나님은 미리 모세에게 바로 왕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이며 이적들을 행할 것이며 애급의 장자를 죽일 것임을 예언하여 주시고 (출 4:20-23, 9:12), 그 예언을 모세를 통하여 다 이루셨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우리의 선악구조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분만이 선이고 진리이시며 창조주이시기에 그분은 당신의 계획과 섭리로 만물을 주관하신다.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악한 것들을 들어 쓰시기도 하시고, 인간의 마음을 강퍅하게도 하시며, 악의 세력을 잠시 허용하시기도 하신다. 즉 우리는 그분이 어떻게 역사를 이끌어나가시는지를 예측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알게 하신다. 우리는 다만 그분이 일으키시는 모든 일이 그분의 지배와 주권 하에서 반드시 일어나게 되며, 또한 일으키심을 통하여 그분의 주시는 계시로 그분의 구원사역을 알아가며, 주시는 믿음으로 그분의 열심에 의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과 생명이 입혀짐을 깨닫고 감사하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그분은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나니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나니라”(사 45:7)라고 분명히 “모든 일을 행하는 분은 나 여호와라’라고 밝히고 있음으로 그분께서는 마귀의 세력을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주관하고 계시며, 즉 자신의 선한 뜻을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이루시기 위해 선과 동시에 악한 것들도 쓰셔서 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데 있다(롬 8:28).
예레미야 18장 1-20에서 토기장의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 등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기록하고 있다. 즉 토기장이신 하나님은 진흙으로 피조 된 인간의 모든 생사화복을 자신의 뜻대로 주관하시며, 민족이나 국가의 흥망성쇠도 자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결정하심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일들은 절대적으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와 주권 하에서 일어남을 깨닫고 그 일어나는 일에 동참하여 선과 악의 구조로 판단하거나 같이 말려들어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악으로 판단하고 그분의 일을 가로막는 망령된 일을 하는 것보다, 그 일들을 통하여 성도에게 계시하여 주시는 참된 진리를 깨닫고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의 인도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인자’가 올 때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믿음’(눅 18:8)이라고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