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 5:1-16) 38년 된 병자가 바로 율법에 갇혀있는 유대인들이다
요한복음 5:1-16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사도 요한은 처음부터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을 나타내는 주제로 예수님의 표적과 사건들을 나열하여 십자가 구원의 필연성을 차근차근 설명하여 주고 있다.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의 사건을 통해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서만 완성되는 은혜의 복음을 보여주었고, 사마리아 여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이 땅 끝까지 이방인에게 전파됨을 개시하셨고, 갈릴리에서 예수님 십자가 구원성취로 죽은 자가 살아나는 생명을 왕의 신하의 이야기로 보여주셨다. 모두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과 영생에 관한 은혜의 복음 이야기다.
이제 5장부터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유대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는 안식일과 상충되는, 즉 율법은 저주와 사망을 불러오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구원과 생명임을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시는 사건으로 보여주고 있다. 율법과 은혜를 극명하게 대조하여 구원과 은혜를 설명하고 있다. 즉 구원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진행되는 규례와 절기와 의식 같은 지킴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사랑으로 무상으로 주시는 선물이라는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
베데스다 연 못의 전설과 진실
요5: 1-4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 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라는 구절과 “예루살렘에 있는 양 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5:1-2)라는 배경장치로 38년 된 병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양 문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여러 문중의 한 문을 말하는데 이름이 ‘양문’이다. 이름 그대로 양들이 들어오던 문이었는데 일반 양이 아니라 성전에서 희생 제물로 드려질 희생양들이 들어오는 문이다. 양 문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구원과 생명의 은혜를 상징하는 소중한 문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죽음을 넘어서 살아서 나온 구원을 상징하는 문이다. 만약 어린양 희생의 피가 아니었으면 애급과 똑같이 죽음의 재앙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베데스다 연못, 뜻은 ’은혜의 집, 긍휼의 집, 자비의 집‘이다.
사도요한은 첫 시작에서, 어린양의 희생과 구원을 상징하는 양이 들어오는 ‘양문’, 그리고 은혜와 긍휼의 집을 상징하는 ‘베데스다 연못’으로 배경을 장치한 후, 그 다음 구절에는 온갖 질병을 가진 병자들이 우글거리는 모습을 등장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하는 성전 양문과 자비와 은혜의 집이라 불리는 곳에 온갖 질병으로 고통 받으며 죽기를 기다리는 버림받은 자들만 모여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5:3). 지금 성전 안에서는 절기를 따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축제가 이어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온갖 질병에 걸린 버림받은 병자들이 자신들의 질병에서 벗어나기 위한 한 가닥의 희망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병에 시달리고 있는 자들이 베데스다 연못에 모여든 것은 어떤 전설을 믿고 행운을 얻어 병 낫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주님의 천사가 때때로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라”(5: 4). 그런데 그 병자들이 거의가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며, ‘누워있다’고 표현한다. 소경은 앞을 볼 수 없고, 절름발이는 빨리 뛸 수가 없고, 혈기 마른 자는 손발이 마비된 상태이기에 빨리 움직일 수가 없는, 모두가 절박한 상황에 있음을 “누워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들 모두가 제일 빨려 뛰어서 연못에 들어간 그 한 사람만 낫는다는 전설을 믿고 행운을 얻는 그 한사람이 되기 위해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 몸 하나 추수리지 못해 ‘누워있는’ 상황에서도 병마와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병자들이 베데스다 못에 행운을 얻어 병 낫기를 소원하며 연못가에 뛰어 들어갈 준비로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병을 잘 알고 아무리 노력하여도 제일 빨리 뛸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치열한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으로 증거 없는 막연한 전설을 사실로 믿고 있었고, 천사가 병을 고쳐 주리라고 유일한 희망으로 믿고 있었다. 인간은 사실 아닌 전설에도 병이 낫겠다는 희망으로 자신의 몸을 연못에 의탁하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이 전설 속에 더 큰 문제는 누구나 다 고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물이 요동할 때 먼저 1등으로 들어가야만 기회가 찾아온다는 희박한 성공이다. 즉 생존방식은 치열한 경쟁으로 정해져 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모습은 바로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치열한 모습이다. 전설을 사실로 믿고 연 못의 물이 언제 움직일지 알 수 없고, 물이 움직인다고 해도 고쳐질지 알수 없으며, 죽을힘을 다해 달려간다고 해도 1등이 되는 보장도 없는 일을 기대하고 열심을 부리는 모습이다. 게다가 전설이기에 기적이 일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바로 죄인들이 정해진 죽음을 앞두고 더 나은 만족스러운 삶을 살겠다고 벌이는 치열한 싸움의 모습이다.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먼저 뛰어서 연 못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 많은 병자들 중에 오직 제일 빠른 한 사람만 고침을 받기에 그 나머지는 불행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불평과 불만과 경쟁심과 질투와 싸움과 같은 것들이 일어나게 된다. 사실은 모두가 죄와 사망으로 달리고 있는 그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 똑 같은 죄인들이 벌이는 싸움이다. 육체의 질병이 좀 나아졌다고 하여 죽음을 피할 수 있겠는가. 이세상의 죄인들은 모두가 소경이요, 절뚝발이요, 혈기 마른 자들이기 때문에 만족과 행복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먼저 뛰어가 행복을 찾겠다고 헛된 고생을 스스로 찾아하며, 서로를 죽이는 경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지막 죽음마저도 무한경쟁으로 몸살을 앓다가 죽어야 하는 비참한 현실 가운데 전혀 경쟁력이 없는 38년 된 병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현장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살려고 발버둥치는 죄와 사망에서 허덕이는 자들을 구원하여 죄와 사망이 없는 영생을 주시기 위해 인간을 찾아오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아무런 조건이나 경쟁이나 대가나 공로나 노력이 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그럼에도 이 세상 어둠의 존재들은 그 영원한 생명의 빛을 알아보지도 찾지도 구하지도 않고, 오히려 허탕한 전설과 천사에 자신의 운명을 의탁하는 헛된 꿈을 꾸고 있는 우매하고 무지하고 무력한 상태로 있더라는 것이 바로 베데스다 연못의 현장이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요 5:1-8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예수님은 지금 희생양이 들어가는 ‘양문’으로 들어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야하는 은혜의 집 베데스다 연 못가에 오셔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이 38 년간 걷지 못한 앉음뱅이를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38년 동안 질병에 묶여있어 안식을 하지 못한 자를 안식일에 고쳐서 자유하게 함으로 진정한 안식을 얻게 하셨다. 이는 우리 주님이 안식일의 주인으로(마 12:8), 천국으로 오셨기에 저주 속에서 죽어가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여 살리심으로 영원한 하늘나라의 안식으로 인도하는 안식의 완성자로 오셨음을 선고하는 표적이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 중에 한 사람만, 38년 동안 걷지 못한 자만 주목하셨다. 자신의 힘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페인과 같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5:7) 함과 같이 베데스다 연 못만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누군가가 불쌍히 여겨 자신을 들어서 옮겨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전혀 가망이 없이 누워있는 그 병자를 주님이 찾아와 주신 것이다. 은혜의 집, 베데스다에 진정한 참 안식을 은혜로 주실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그런데 무지한 병자들은 병을 고쳐줄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베데스다 연 못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주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다가가셔서 먼저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신다. 38년 된 병자에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파격적인 질문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질문하신 의도는 그의 안에 믿음을 일으켜주시기 위함이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질문하셨다는 것은 예수님만이 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임을 알고 믿게 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질문을 알아듣지 못하고 여전히 연못에 들어갈 가능성만 찾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5:7) 라고 말함으로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으니 예수님이 자신을 도와서 연 못에 넣어달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네가 낫고자 하느냐?”를 예수님이 자신을 도와서 연못에 넣어주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알아보지 못했다.
주님은 자신을 연 못에 넣어주기를 원하는 병자에게 단 한마디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5:8)였다. 그 한마디에 병자는 즉시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5:9) 였다. 주님은 그에게 말씀만 던졌고, 말씀이 38년 된 병을 고친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서도 말씀으로 여인이 성령을 받았고, 왕의 신하의 아들도 말씀으로 살아났고, 지금 병자도 말씀 한마디에 38년이나 걷지 못한 그가 일어나 걷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한마디는 지극히 간단하지만 그 말씀은 구원자 입에서 나온 권세와 권능이었기에 즉시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단 한 마디 말씀으로 38년이라는 긴 병마의 사슬에서 병자는 곧 자유한 몸이 되었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오직 말씀만 의지하는 믿음만이 생명임을 나타내셨다. 신하의 아들의 사건에서도 신하는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와서 기적으로 아들을 살려주시기를 두 번이나 간청 하였지만, 그의 방법을 무시하고 다만 ‘네 아들이 살았다’ 라고 말씀만 주셨고 그 말씀대로 아들이 살아난 것이다.
38년 된 병자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다만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믿는 순종뿐이다. 그는 병이 낫기 위해 무슨 선한 행위를 했거나 예수님에게 병을 낫게 해달라는 요청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음만을 기다리는 ‘누워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이 먼저 그를 찾아와 주셨고,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그의 병을 낫게 해주신 무조건적인 은혜의 선물이었다. 그는 고침은 받았으나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몰랐던 사람이다 (5:13). 주님의 불가항력적 은혜가 그에게 입혀진 것이다. 이것이 은혜이며 구원이다.
오직 예수만이 참 구원이며 진리와 생명임을 사도행전 3장에서 또 한 번 제자들을 통하여 나타내셨다. 똑같이 하나님의 성전이라 불리는 문 앞에 나면서 걸지 못하는 오래 된 앉음뱅이가 구걸하고 있었다. 열심히 제사와 안식일을 지키는 제사장과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에게 치유와 생명을 주지 못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를 향하여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라고 예수이름으로 말씀을 주었을 때 (행 3:6) 그 앉음뱅이는 즉시 일어나 자유함으로 뛰면서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은과 금에 눈이 멀어있는 종교행위를 하는 유대인들이 병든 자를 저주와 죄인이라 정죄하고 멸시하고 배척함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요 5:10-16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 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아무것도 행하지 아니하시고, 단 한마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예수님은 그냥 ‘일어나 걸어라’라고 명하지 않고, 구지 “자리를 들고 걸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의도적으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규칙들의 허상을 폭로하고 깨뜨림으로 너희가 지키고 행하는 것들은 사람을 살리는 법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는 규칙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자리를 드는것’은 일이기에 안식일을 범한 것이 된다. 이들은 안식일에 손수건을 드는 것도 일이라 규정하고 안식일에는 옷에다 달고 다닐 정도였다. 그럼으로 그들의 규칙에 따르면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도, 자리를 들고 걸어간 병자도 모두가 안식일을 범한 것이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환자를 고침으로 안식일의 참된 정신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병든 자를 고쳐서 자유케하는 일이며,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7-28)함을 실제로 증거로 보여주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38년된 병자를 고치자 이내 안식일을 범했다는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5:10),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5:16) 참으로 유대인들만 할 수있는 해괴망측한 트집이다. 병이 나아서 병자가 자리를 들고 일어났는데,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일어난 것이 안식일을 범한 일이라고 황당한 트집을 잡은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규칙을 깨고 부수고 들어오는 예수가 자기들의 자존심과 가치를 부정하며 이들의 행위를 마귀의 행사로 취급함으로 어떻게 하나 트집을 잡아서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리하여 38년 된 병자를 일으키자 이내 독사처럼 달려든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일어날 수가 없는 이 놀라운 기적에 이들은 전혀 기뻐하지 않았고 시비를 걸고 예수님을 비난하고 대적하고 죽이려고 한 것이다. 종교적으로 지키는 신앙생활이 얼마나 악독한지를 너무나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와 같이 율법 틀에 갇혀 안식일을 신으로 모시고 섬기는 이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 까지 죽이려는 그야말로 이리이며 독사들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율법을 굳게 지키는 이들의 행위를 ‘마귀의 행사’라고 정죄하고, 이들을 ‘회칠한 무덤’, 군대 귀신 들린 광인, 더러운 돼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개, ‘독사의 새끼’라고 부른 것이다. 분명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롬 8:2) 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음에도 그 죄와 사망의 법들을 지켜 행하여 자신들의 죄 된 의를 세우는데 목숨을 걸어 결국은 죄와 사망의 심판을 자초하더라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 집단을 유지하여 자신들만이 누리는 우월성과 선민적 월등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비난하고 막아 나서며, 자신들의 규례를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이는 살해까지 저지른 배은망덕한 패역한 자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의 마음이 얼마나 악하고 부패한지를 깨닫고,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의로운 구원만을 의지하라고 십계명을 주셨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선한 법을 이용하여 배나 더 되는 악행으로 나간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으로 스스로 자신들의 악랄한 죄를 드러내고 심판의 근거를 스스로 쌓은 것이다. 즉 너희들이 바로 너희 자신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자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희 자신들의 영광과 이름을 높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자들이며; 안식일을 지킨다는 이유로 생명을 죽이는 안식일을 범하는 자들이며; 너희들은 종교행위로 돈과 권력을 행사하는 세상과 간음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도용하여 너희들의 탐욕을 채우고 약한 자를 억압하는 도둑이며; 약한 자와 가난한 자와 병자들을 업신여기고 죄인이라 정죄하고 배척하는 난폭한 폭군이며; 너희들의 영광자리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살인하는 살인강도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바로 이와 같이 자신의 의를 세우며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자아를 고집하는 교만으로 회개치 아니하는 자들이며, 진리의 말씀을 거역하고 대적하며, 구원자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마저 죽이는 패역한 자들에게 임하는 것이며, 이들이 바로 영원한 심판에 합당한 독사의 새끼들이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모든 사람들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나니”(롬 1:18) 라고 말씀하하셨고, 세례 요한은 이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회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히라 하더냐”(마 3:7)라고 하나님의 진노를 외친 것이다.
율법에 갇힌 유대인들이 바로 38년 된 병자, 즉 죄의 종이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침으로 진정한 안식을 얻게 하시고,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에게는 너희 가 바로 38년 된 율법에 꽁꽁 묶여있어 안식할 수 없는 자들임을 폭로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율법의 쇠사슬에 묶어 걷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갇힘에서 풀려나오는 일은 너희 스스로 할 수있는 일이 아니라, 안식의 주인인 내가 너희를 풀어주는 권세와 심판하는 권세를 가진 안식일의 주인임을 나타내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와 권한을 주셨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5: 22,27). 하지만 너희는 스스로 자신을 38년 전 인생을 묶어놓고 그 율법의 종에서 풀려나오기를 원하지 않고 있으니 너희야말로 스스로 심판을 자초하는 독사의 새끼라는 것을 증거로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증거대로 그들은 율법의 종에서 해방시켜 살려주는 의로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자신들이 정한 규칙을 깨드렸다고 분노하고 대적하고 핍박하고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죄악으로 스스로 자신들이 지키는 율법으로 심판의 근거를 쌓고 있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이 바로 38년 된 율법에 갇힌 병자들이며 죄수들이다. 자신들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또한 다른 이들에게 규칙이라는 법으로 꽁꽁 묶어놓고 죄인이라 정죄하고 죽이는 종교놀이를 하는 악한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병자가 일어나 걷는 것을 자신들이 정해놓은 법으로 안식일을 범한 자로 정죄한 것이다. 그들이 정한 법은 38년 된 병자를 영원히 법으로 묶어놓고 법으로 죽이는 일임을 그들 스스로의 말로 폭로한 것이다. “안식일에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이 말은 ‘너는 저주를 받아 병신이 되었기에 그 병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참으로 사람을 죽이는 법이다. 예수님은 이들의 이러한 악한 행위를 역겨워 하시며 독사의 새끼라고 저주하신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 23: 13-15).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33).
이와 같이 이들은 스스로 틀을 만들어 놓고 그 틀을 벗어나면 죽음이라고 스스로 정해 놓았기에 그들 자신도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또한 그들도 나오기를 원치 않는 끝까지 죽음으로 가는 고집으로 목이 굳은 백성이라고 부른 것이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인간 스스로 쌓는다고 말씀하신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 도다”(롬 2:5). 즉 은혜의 복음을 거절하는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그 악한 마음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다는 것이다. 고집이란, 자신의 잘못된 것에 대한 뉘우침과 자신이 바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각과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회개가 없이 망할 때까지 심판의 날까지 끝까지 가는 인간의 패역함을 말한다. 바로 자신의 자존심과 의와 존재가치를 끝까지 주장하려는 교만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회개가 없는 자는 구원자가 바로 앞에 있어도, 영생을 준다고 하여도, 알아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아’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생명을 거절하며 더 나아가서는 생명을 죽이는데까지 가게 된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신들의 가치와 자존심과 의와 공로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영생의 주를 죽이는 살인자로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지 않는 유대주의 목이 굳은 독사의 고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