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깊은 영적 의미

요한복음 (요 3:22-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성도의 쇠함과 흥함의 삶이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22. 09:20

요 3:22-30

3:22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 나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 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세례요한의 일부 제자들이 예수에게로 모여들자 염려되어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 가더이다”(요 3:26) 라고 세례요한에게 고하였다. 그러자 세례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앞서 보내심을 받은 자이며, 신랑 되신 예수님이 자신의 신부를 취하는 기쁜 잔치에 신랑의 친구로 기쁨이 충만하다(3:29)고 예수님과 자신을 구별하여 말한 것이다. 세례요한은 예수님 앞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며, 그분이 바로 자기 백성의 죄를 지고가는 어린 양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증거하는 ‘소리’의 역할로 보내진 자이다. 하나님이 세례요한을 앞서 보내신 것은,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에서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전으로부터 광야로 불러내어 죄를 자복하는 회개의 물세례를 주어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를 시키기 위함이었다. 즉 회개와 천국을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징검다리의 역할로 자신을 예수님 앞서 보내주심을 세례요한은 잘 알고 있었다.

세례요한은 자신은 누구이며, 왜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으며,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자신의 사역과 신앙 여정에 대하여 한마디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 라고 말한 것이다. 즉 세례요한의 간절한 소망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히 이루어짐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일이며, 그 일을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는 혼인잔치로 표현하고 자신은 신랑과 신부를 중매하고 잔치를 준비하는 신랑의 친구로 말한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따를 것이 아니라, 너희를 구원하여 신부로 맞아주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따라야 함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증거할 자가 너희니라”(3:28)라고 그가 바로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 메시아임을 증거하라고 말한 것이다.

신부를 취하는 신랑 예수그리스도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신부를 취하려 오신 가장 기쁜 혼인잔치로 묘사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을 따라 자기 백성을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새로운 신부로 취하기 위해 오셨으며, 자신은 중매자의 역할과 신랑 친구로서의 역할로 기쁨이 충만하다고 말한 것이다. 세례요한이 말하는 혼인잔치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성취로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을 이루게 되는 신약 은혜의 개시를 가리킨다. 즉 율법에 따라 반복하여 제사를 드리는 구약 시대를 마감하고, 이제 그분이 영원한 신랑으로 오셔서 십자가 보혈로 당신의 백성을 정결한 신부로 맞이하여 천국 혼인잔치로 인도하실 것임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12제자를 신부로 취하고 곧바로 가나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첫 표적을 행하셨다. 가나 혼인잔치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그리스도는 신부를 맞이하여 혼인을 이루시기 위해 은혜로 오신 신랑이심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라고 복음의 개시를 선언한 것이다.

가나 혼인 잔치는 이 세상과 율법을 남편으로 삼아 포도주에 도취되어 있는 당신의 백성에게 자신이 바로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포도주로 신부를 맞이하려 오신 진정한 신랑임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율법과 세상을 남편으로 시작한 첫 번째 가나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게 함으로 옛 남편을 상징하는 구약 율법의 시대가 끝났음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참 신랑으로 등장하여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심으로 어린 양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가 그 잔치에 부어짐으로 참 기쁨과 희락이 끊어지지 않는 영원한 하늘의 잔치로 회복됨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가나 혼인 잔치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영원한 안식의 천국 잔치가 치려짐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바로 천국 잔치를 위한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음을 세례요한은 가장 기쁘고 즐거운 혼인 잔치로 묘사하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흥함이라고 말한 것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로 영원한 기쁨을 채우게 됨을 계시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세례요한은 당신의 백성들이 영원한 신랑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정결한 신부로 거듭나 혼인하게 됨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은 신랑이 아니라 신랑이 신부를 잘 맞이하여 기쁜 혼인을 치르도록 준비의 역할을 하는 신랑의 친구라고 밝힌 것이다. 신랑이 신부를 만나 기뻐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함께 기뻐하는 친구의 기쁨으로 충만하다고 말한 것이다. 즉 신부를 신랑에게 연결시켜 혼인이 성립되면 중매자는 빠져야 하므로 “나는 쇠하여야 하고 저는 흥하리라” 라고 말한 것이다. 신랑과 신부의 중간에 껴 있으면 둘이 한 몸을 이루는 혼인이 성립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역할이 바로 세례요한과 같이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 신부를 만나도록 중매한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 신부를 신랑에게 연결시켜주는 중매자는 그 중매가 성공되면 기쁨과 즐거움으로 빠져주는 것임을 세례요한은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세례요한의 쇠함

세례요한의 사역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지속된 400년간의 침묵을 깨뜨리는 구약의 마침과 신약의 시작을 의미한다. 자신의 고백대로 이 세상에서 먼저 쇠함의 삶을 살아낸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기에 자신의 사역이 바로 구약 율법과 제사의 종결을 상징함으로 자신을 ‘쇠함’으로 선포하고, 동시에 자신보다 더 큰 자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저희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실 것이며 성령으로 세례를 주어 신부로 맞이할것이며,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 것임을 제시하여 “그는 흥하리라"라고 신약의 개시를 선포한 것이다. 바로 구약 율법의 종결과 신약 복음의 개시를 쇠함과 흥함으로 선포하고, 그 흠함을 신랑이 신부를 취하는 혼인잔치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 혼인잔치에서 신부를 신랑에게로 안내하고 준비시키는 역할로 기쁨이 충만한 것으로 자신의 사역이 끝났음을 "나는 쇠하리라"로 표현한 것이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말대로 쇠함의 삶을 살아 냈으며, 그 삶을 기쁘게 받아들인 충실한 선지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자기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빛이 아니지만 예수님은 빛이시며, 자신은 메시아를 위해 길을 준비하는 소리이지만 예수님은 참으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려 오신 메시아이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흥함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고, 자신의 쇠함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눅 7:28)라고 말씀하셨다.

세례요한의 삶 자체가 바로 쇠함의 삶이었다. 그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원치 않는 또한 감당할 수 없는 세상과 대립되는 삶을 사는 자로 태어난 것이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높임을 받는 제사장으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사명은, 광야의 모래바람을 맞으면서 광야에서 자고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낙타 가죽을 몸에 걸치는 험악한 삶으로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을 증거하며 그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로 철저한 순종과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낸 것이다.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평탄케 하는 자로 보내심을 받았기에 험한 산을 깎아 평지가 되게 하고, 골짜기를 메워 평평한 도로를 만들 듯이 사람들의 울퉁불퉁한 마음을 깎아 내려 신랑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때문에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마음 내면에 숨겨져 있는 죄악들을 폭로해야 했고, 율법과 제사만을 고집하는 목이 굳은 그들에게 죄를 자백하는 회개를 외쳐야만 했고, 그들에게 다가올 심판을 외쳐야 했다. 그는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회개와 심판을 외치며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며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평탄케하는 사명에 충실하였다. 역사상 그 누구도 세례 요한처럼 메시아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면서 증거한 선지자는 없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구약 선지자들의 운명과 같이 감옥에서 목이 잘리는 순교로 쇠하여진 것이다. 이와같이 세례 요한은 그 어떤 면에서도 하나님의 뜻만을 추구하는 자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종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쇠함이란 바로 내 뜻과 내 의지와 나의 모든 생각을 다 죽이고, 오직 나를 보내신 그분의 뜻만을 추구하는 자기 부인의 순종임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셨다.

우리의 흥함을 위해 쇠함의 삶을 살아낸 우리 주 예수님

우리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죄와 죽음의 고통에서 다시 살려내어 아버지의 품에 안기게 하는 화평을 이루시기 위해, 즉 자기 백성의 흥함을 위해 이 세상에서 쇠하여지는 십자가 삶을 살아내셨다. 그분은 부유한 자리에서 가난한 심령으로 내려오셔서 우리의 죄로 인하여 애통하셨으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온갖 조롱과 핍박을 당하셨으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이사야 53장의 묘사대로, “사람들에게 미움과 멸시를 받았으며, 아픔과 고통을 많이 겪었으며”(사 53:3),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으며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양으로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사 53:7).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아”(사 53:5)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백성의 흥함을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쇠함으로 성취하신 하나님의 의로운 구원이다.

예수님은 당신 신부들의 흥함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쇠함의 삶을 살아내시고 우리에게도 그 삶으로 인도하신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 38-39). 그분은 죄인의 육신을 입고 자신을 완전히 부인하는 마음의 비우심으로 쇠한 자리로 내려오셔서, 그 마음에 오직 아버지의 뜻만을 담으시고 아버지가 하라는 일만 하시고 하라는 말씀만 하시는 아버지 주체의 삶과 철저한 순종으로 쇠하여지는 삶을 살아내셨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이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어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이 먼저 자기 부인의 순종과 십자가 죽음의 쇠함을 살아내심으로 성도가 지향하게 되는 쇠함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세상을 향하여서는 육신이 죽는 쇠함과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영이 살아나는 흥이 바로 성도가 추구하게 되는 신앙임을 가르쳐 주셨다. 이를 가리켜 사도 바울은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후 4:16)라고 말씀하신다. 즉 육은 세상을 향하여 쇠하여지지만, 영은 하나님을 향해 살아나는 흥함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라고 정확하게 무엇이 흥이며 무엇이 쇠하는 삶인지를 말씀하여 주셨다.

성도의 흥함과 쇠함의 삶

성도가 추구하게 되는 신앙 여정은 자신의 가능성과 긍정의 힘을 극대로 발휘하여 의로운 행위들을 열심히 쌓아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사람들 앞에서 칭찬과 의로운 자로 돋보이는 흥이 아니며, 또한 이 세상에서 자신이 원하는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형통으로 흥하는 삶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다. 반대로 나라는 존재가치가 철저히 부서지고 깨지고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의 쇠함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나를 찾아와 주셔서 이 죄악된 세상에서 끄집어내어 사망의 광야로 끌고 가셔서 세상인으로 살던 옛사람은 죽음을 통과하게 하신다.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생활과 같이, 우리의 전 인생을 통하여 결코 자기 부인의 자리로 끌어 내리시며, 가난한 심령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로 인식하게 하시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를 구하게 하시며, 생명의 말씀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로 세상 육신을 위한 떡을 끊고 오직 여호와 입어서 나오는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신다. 그 죽음의 광야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인식하게 하심으로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믿고 의지함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탄생시켜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되는 천국의 혼인잔치로 완성하신다. 즉 성도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쇠함으로 인하여 천국 잔치의 흥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팔복에서, 하늘의 복으로 흥하는 자는, 세상 것이 털리는 가난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애통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온유로, 이 세상의 양식을 끊는 굶주림의 금식으로 옛사람이 죽고, 오직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듭남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복으로 흥하는 자는 이 세상과 분리된 하늘의 존재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십자가 삶을 살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배척과 핍박을 당하게 됨으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라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는 쇠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소유하는 완성의 지점에 선 자이기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의 상이 큼이라" "천국이 너희 것임이라" 라고 흥하게 됨을 선포한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추구하는 흥함은 어떠한 것일까?

오늘날 거짓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죄를 지적하는 책망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과 생명이 임하는 복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들이 원하고 듣기 좋아하는 거짓 계시와 복술과 이적들과 같은 허탄한 것으로 육신의 배를 채우는 흥을 돋우어 주고 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와 열심으로 업적을 쌓아서 자신이 원하는 소원을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내라는 망령된 거래를 가르치며, 이 세상에서 축복을 누리는 재물의 번영과 명예와 육신의 즐거움으로 흥하게 되는 비법과 기교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이 세상에서 흥하게 사는 형통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거짓 진리를 강단에서 노골적으로 설교하고 있다.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야망과 욕구가 채워지는 육신의 탐심과 성공으로 창대케 되는 욕망으로 열혈 되어 있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이 원하고 즐겨먹는 먹이를 던지게 되어 있다. 그들은 십자가 보혈, 예수그리스도의 은혜, 죄와 의와 심판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리하여 인간들의 탐심과 욕망을 채워주고 존재가치를 향상시켜주는 인간들의 흥을 붙 도아주는 율법주의, 인본주의, 기복주의, 신비주의와 같은 설교가 교회 강단에서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아닌 삯군, 거짓 선지자, 사기꾼 목회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도용하여 자신들의 유익에 따라 뜯어 고치며, 사람들이 원하는 세상 말로 바꾸어 가르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유익에 따라 편집하여 거짓 진리를 전하며, 처음부터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아니다.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 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렘 23:21-22).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자들이 아니기에 사람들이 원하는 입맛대로 거짓말을 전하며,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는 회개와 심판을 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소위 ‘주의 종’이라 불리는 목회자들은 실상은 양을 늑탈하여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는 ‘삯꾼’ ‘이리’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라고 그들의 실체가 '이리'라고 경고하여 주셨다. 이리는 죽어 썩어져가는 시체를 먹고사는 동물이다. 목자로 가장한 삯꾼 이리들은 죽은 시체들을 떡으로 포장하여 끝없이 먹으라고 유혹을 던지게 되어 있다. 그때 그것을 덥석 집어먹는 까마귀가 되지 말고 오직 목자가 주시는 생명의 말씀만 먹으라는 것이 바로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라는 비유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힘과 재물이 진리라고 외치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거짓 평안으로 바꾸어 외치며, 자기들보다 배나 더 되는 지옥 자식들을 만들어내는 (마 23:15) 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라고 심판을 선고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창대케 되는 내 행복을 위한 흥의 삶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반대로 세례요한의 쇠함의 삶, 즉 십자가 자기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으로 이끌려가는 자들이다. 내 뜻과 내 의지와 나의 모든 생각을 다 죽이는 쇠함으로, 오직 나를 보내신 그분의 뜻만을 추구하는 자기 부인의 순종이다. 그 삶은 내 옛 죄인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 쇠함과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그분에게 속한 신부로 탄생됨을 뜻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예수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나를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는 길이 바로 성도가 흥하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