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깊은 영적 의미

요한복음 (요 2:1-11) 포도주 와 표적 그리고 십자가의 때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22. 09:48

요 2:1-11

2: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12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포도주 와 표적 그리고 십자가의 때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럼에도 첫 번째로 행한 기적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가나 혼인잔치이다. 예수님은 가나 혼인잔치 집에 초대를 받아 제자들과 모친 마리아와 동행한 것이다. 그런데 기쁨과 환희에 찬 잔치집에 술이 떨어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잔칫날에 술이 떨어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기쁨과 환희가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위기에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술이 떨어졌으니 네가 좀 어떻게 해 주어야겠다’는 뜻으로 부탁을 했고, 예수님은 이에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2:4) 라고 거절하였지만 이내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시는 능력을 행하셨다. 사도요한은 이 기적을 예수님의 “첫 표적”이라고 제시하고 이는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표적이며, 제자들을 믿게 하려고 행한 ‘표적’이라고 설명한다.

먼저 가나 혼인잔치의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들어온것과 같이, 마리아의 간절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때를 앞당겨 능력을 행하여 잔치 집에 기쁨과 희락을 잃지 않게 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즉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게 되면 하나님의 때를 앞당겨 우리의 때와 우리의 뜻대로 일이 이루어진다는 인본주의적 해석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금만 깊이 상고하여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몇 개의 단어에만 주목하여도 그러한 인간의 탐심을 자극하는 설교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 가나 혼인잔치는, 율법에 규정된 희생 제사를 반복하여 드리는 구약 시대를 마감하고, 이제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며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천국의 잔치가 이루어짐을 계시하는 신약 시대의 막을 여는 분기점을 상징하며 그래서 ‘표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요한이 외친 ‘회개하라 천국이 왔다’는 선언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신 메시아이시며, 이제 세상과 혼인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혈의 피를 상징하는 새 포도주를 마심으로 모든 죄에서 깨끗함을 받아 정결한 신부로 거듭나 그리스도와 혼인을 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됨을 나타내어 보여주는 표적이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을 함으로 ‘이제 네가 이 혼인 잔치에서 기적을 일으킴으로 너의 메시아 됨을 사람들 앞에서 증명해 보라‘는 의미였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의도를 파악하고 이내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냉정하게 거절하신다.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메시아임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예수님의 때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십자가의 때를 가리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라고 마리아가 원하는 때는 예수님 자신의 때가 아니라고 거절한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라고 거절하셨음에도,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 시키는 대로 하라'라 고 명령함으로 예수님의 거절을 무시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의 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고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다만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만 해결하는데 급구하였고, 아들로서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주리라 확신하고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준비하라고 명한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기적을 행하여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들로만 바라보고 기적을 구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예수님을 우리의 원함을 충족시켜주는 분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이 가나 혼인잔치의 포도주 사건을 마리아의 믿음을 본받아 무엇이든지 간구하면 예수님이 자신의 때를 앞당겨서 기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고 마리아의 믿음에 초점을 두고 있다. 영에 관한 진리의 말씀을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떡으로 해석하는 왜곡된 설교가 보편화되고 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잔치는 예수님과 상관없는, 즉 신랑으로 오신 예수를 영접하는 잔치가 아니라, 이 세상을 남편으로 또는 율법을 남편으로 혼인하는 잔치이며, 당연히 그 잔치는 이제 막을 내리는 구약을 상징하기에 포도주가 떨어져 슬픔으로 끝나게 됨을 계시한다. 때문에 예수님은 이 세상과 율법을 남편으로 삼아 엣 구약의 포도주에 도취되어 있는 잔치에 포도주를 만들어 줄 것을 거절하신 것이다. 모친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바로 이러한 세상 혼인잔치에 기쁨을 주는 육신의 포도주를 구한 것이며, 때문에 예수님은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세상 잔치에 기쁨과 필요를 채워주는 자로 온 것이 아니기에 당신이 구하는 것은 나와 상관없다고 확실하게 선 긋은 것이며, 육신의 것을 구하는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여자'라고 부른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모친을 ‘여자’라고 부른 것은, 마리아는 비록 육신의 어머니 역할로 예수를 난 자이지만 영적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자로 보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에 마리아를 ‘어머니’로 부르지 않고 ‘여자’로 부르셨으며, 그 이유를 마가복음 3:35절에서 밝혀 주신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즉 예수님은 혈육적 관계를 부인하시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한 가족이 이루어짐을 말씀하신 것이다. 한마디로 예수님과의 혈육적 관계는 구원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구원을 이루는 마지막 순간에 요한에게 마리아를 맡기면서 “어머니”라고 부르셔서 새로운 영적 가족관계를 맺어주셨다.

예수님의 때와 십자가

예수님은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능력으로 포도주를 만들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라는 마리아의 뜻을 거절하여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예수님 자신의 때를 거론하신다. 아직 이르지 아니한 예수님의 때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세상 죄를 짊어지시고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때를 말씀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외친 소리와 같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구원을 성취하시는 아버지의 구원의 때를 이루시기 위해 오셨으며 그 일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때를 무시하고 나의 때에 초점을 맞추어 나의 때를 이루어달라고 강청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절망과 어떤 위기에 처했을 때, 내가 필요한 때에 예수님이 나서서 나의 상황을 해결해 주실 것을 강청으로 요구할 때가 참 많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기적들을 행하여 인간의 탐심과 욕망과 만족을 채워주시기 위해 이 세상 임금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탐심과 욕심을 팔 다리 눈을 잘라낼 뜻이 잘라내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즉 옛사람 죄인이 죽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그리스도의 참 신부로 거듭나 영원한 혼인을 치르기 위하여 오신 분이시다. 우리를 당신의 진정한 신부로 새롭게 창조하여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서 잠시 고난과 시험과 시련과 고통과 절망과 같은 육신이 원치 않는 것들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훈련하신다. 우리는 연단과 시련속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헤아리고 나 자신을 부인하고 순종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원하는 것들이 아니기에 치워달라고 아우성치며,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것으로 채워달라고 강청하며, 또는 금식으로, 철야로, 새벽마다, 쉬지 말고 구하라는 것이 기독교 설교 핵심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유익을 채우는 때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까지 협박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패역한 목이 굳은 바리새인이 바로 우리 자심임을 고백하게 된다.

하나님의 때에 순종하는 신앙

예수님은 인간이 원하는 때를 부인하셨음에도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다. 바로 이 대목 때문에 진의가 왜곡되어 있다. 많은 설교자들은 거절을 당하여도 마리아의 믿음처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면, 예수님도 자신의 때를 앞당겨서 우리의 원함을 들어주시기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구하라고 선동하고 있다. 과연 인간들의 탐심을 채워주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의 때를 앞당길 수 있단 말인가! 성경 말씀을 조금만 상고하여도 육적 탐욕을 추구하는 설교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성경 그 어떤 곳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의 때를 미루고 인간이 원하는 때에 따라 인간이 원하는 일을 성취하여 주셨다는 이야기는 없다.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이삭과 야곱과 요셉,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겪어낸 40년 광야생활,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신 선지자들 모두가 하나님의 때를 이루시기 위해 강권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끌러가 자신의 육신을 거슬러 하나님의 뜻에 무조건 따르고 순종하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을 살아낸 것이다. 이들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시는 삶으로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강권적으로 끌려가는 삶을 살아낸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잘 아는 예레미야는 별명이 ‘눈물의 선지자’이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참혹한 멸망과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는 선지자로 선택받아 나라와 민족의 죄로 인하여 산산이 찢어진 마음으로 평생 눈물로 하나님께 애통한 선지자였다. 가족들로부터도 자기 백성들로부터 배척받고, 그의 예언은 조롱거리가 되고, 그가 쓴 글은 불에 소각되고, 매를 맞고 진창 구덩이에 던져지고, 옥에 갇히고, 돌에 맞아 죽는 위협에 고독과 절망의 삶을 살게 하셨다. 그는 견디어 내기에 너무나 힘들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 다니면서 제발 나를 그들에게 보내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한 자였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비록 그가 살아있는 동안 절망적이었고 아무것도 거두지 못한 눈물바다였지만 그의 사후에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때에 그대로 이루어졌다.

사도바울도 자신의 사명에 대하여 예레미야와 같은 고백을 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고전 4:9-13). 이와 같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모두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철저한 순종으로 견디어 내어 말씀이 하나님의 때에 성취됨을 보여주신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우리 주님도 아버지 뜻에 순종하여 아버지의 때를 이루시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으시고 죄인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분은 30년 동안 평범한 가정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기적과 능력을 행하여 메시아임을 세상에 알리고 증명하는 일을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아버지의 때를 30년이란 세월로 기다리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때가 이르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고난과 멸시와 조롱과 핍박을 당하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아버지의 때와 아버지의 구원의 뜻을 이루셨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그분은 이 세상에서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3-8).

이와 같이 예수님은 아버지가 주신 십자가 구원의 때를 이루시기 위해 온갖 멸시와 조롱과 수치와 핍박을 당하셨으며 끝까지 견디어 내셨으며 아버지가 주신 때에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말씀대로 ‘아버지가 시키는 일만, 아버지가 하라는 말만 하신’ 아버지의 때에 따라 움직이는 순종의 아들이셨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요 6:38).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살아낸 십자가 삶으로 나의 때를 이루기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이루시는 도구로 쓰임을 받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다.

예수님은 왜 마리아의 요청을 거절하시면서 이내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을까?

분명 예수님은 마리아가 원하는 때와 예수님의 때를 구별하셔서 마리아가 원하는 때는 “나의 때와 상관없다’고 말씀하셨다. 때문에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은 마리아가 원하는 때, 즉 이 세상과 율법을 남편으로 맞이한 옛 혼인잔치를 위한 때가 아니다. 세상 혼인잔치는 포도주가 떨어져 끝난 것이기에 예수님과 상관없는 잔치이다. 이는 예수님의 때가 왔으므로 모세 율법에 의한 구약의 때는 끝났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 포도주를 떨어지게 만드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이하는 천국 잔치의 개시를 상징하는, 즉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이 성취되어 우리의 영원한 신랑이 되어주시는 천국 혼인잔치를 나타내시기 위해 예수님은 마리의 때는 거절하고 예수님의 때를 맞이하여 예수님의 혼인잔치를 계시하는 기적으로 새로운 방법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 결례대로 포도주를 율법의 가죽 부대에 담으셔서 연회 식장에 가져다주신 것이 아니라, 포도주를 담는 그릇이 아닌 돌 항아리에 물을 채워서 그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다. 낡은 부대에 담는 포도주가 아니라, 성령의 생수를 상징하는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이며, 때문에 이 포도주는 영원히 목마르지도 떨어지지도 않는 생명수이시며, 그 생명수를 마시는 자는 새 생명으로 잉태되어 예수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이하게 된다는 복음을 담고 있다. 그리하여 낡은 가죽 부대가 아니라, 6개 돌 항아리에 채운 물이 포도주로 변하여 7의 완전한 숫자를 채우는 기적으로 장차 영원한 천국 잔치가 성취되는 십자가의 때를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과 생명이 임하게 되는 신약의 개시를 상징하기에 사도 요한은 이 기적을 “첫 표적”이라 부르고 예수님의 십자가 영광을 나타내어 제자들을 믿게 하시기 위해 행한 표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라는 의도는, 나는 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또한 세상이 원사는 욕심을 채워주기 위해 능력을 행하려 온 자가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내 생명을 죄인에게 내어 주어 다시 살리기 위해 오신 인자이며, 때문에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은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여지는 일이라는 것을 계시한 것이다. 즉 예수님의 때란 바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신의 살과 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예수그리스도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하나를 이루게 되는 천국 잔치의 때를 가리킨다. 때문에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결과는 마리아의 요청을 들어서 잔치의 즐거움에 흥을 돋우어 주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잔치에 참여하신 의도는 바로 사도 요한의 기록대로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2:11)라는 목적이었다.

6개 물 항아리 와 7번째 포도주 항아리

주님은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 먼저 택함을 받은 당신의 백성을 이 세상 속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제자로 세우는 일부터 시작하신다. 주님은 이스라엘 12자파를 상징하여 12를 불러 모으시고 첫 기적을 가나 혼인 잔치로 정하시고 그 표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자신이 바로 메시아임을 제자들이게 나타내어 자신이 하시는 일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율법에 따라 유대인의 결례대로 진행되는 혼인잔치에 참여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잔치에 참여하는 자는 율법의 정결 의식에 따라 항아리에 채워져 있는 깨끗한 물로 손을 깨끗이 씻고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임에도 불구하고 그 항아리에는 물이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항아리들이 모두 비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거행하는 잔치는 처음부터 율법의 정결 의식대로 행하지 않은 잘못된 잔치였음을 힌트하여 주고 있다. 텅 빈 형식만 갖춘 생명력이 없는 잔치이며, 정작 자신들의 죄를 자각하고 회개하는 통회가 없는 종교 열광에 빠져있는 패역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들은 비록 혼인잔치를 위해 포도주를 준비하였지만 그들이 준비한 포도주는 이내 바닥이 나고 기쁨의 잔치가 슬픔으로 흩어지는 형국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열심과 행위로 공로와 업적으로 구원에 도달하였다고 기쁨의 잔치를 벌이고 있었지만 결국은 그들의 열심과 노력이 허사가 됨으로 그들의 율법 지킴과 제사 열심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에 도달할 수 없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리하여 잔치 이야기에 굳이 7에 미달하는 불완전한 6개 돌 항아리가 먼저 등장한 것이다. 가나 혼인 잔치집 앞에 놓여있는 7에 미달한 6개 텅 비어있는 돌 항아리는 바로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들을 위한 종교 놀이에 도취되어 있는 패역한 옛 이스라엘과 율법의 구약을 상징한다. 그들이 벌이는 혼인잔치는 참 신랑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배제하여 율법과 이 세상을 남편으로 맞이한 종교 잔치이기에 예수님은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 10:8).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가 바로 율법과 율법주의자들이며, 그들이 금식과 금욕으로 제사 놀이를 하든, 피리를 불며 잔치 놀이를 하든, 애곡하며 장례식 놀이를 하든, 모두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종교 놀이, 즉 자신들의 인기와 영광을 높이는데 도취된 종교 놀이이기에 주님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며, 그들의 결국은 멸망임을 암시하여 중도에서 포도주가 떨어지게 만드신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속한 혼인잔치는 하늘나라 천국 잔치와 완전히 구별되어 있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가나 혼인잔치를 전과 후로 구별하여 진술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7에 미달한 6개 항아리를 등정시킴으로 율법을 남편으로 시작한 가나 혼인 잔치는 포도주가 떨어짐으로 끝나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참 신랑으로 등장하심으로 참 기쁨과 희락이 끊어지지 않는 영원한 하늘의 잔치로 회복됨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어린 양의 피를 상징하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오직 영적으로만 감지되는 마지막 항아리의 포도주가 그 잔치에 부어짐으로 완전한 하늘의 혼인이 완성됨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물이 포도주로 변하여 7 로 채워지는 안식의 혼인잔치를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표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마지만 일곱 번째 항아리는 예수님 자신임을 계시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일곱 번째 포도주 항아리가 되어 구원이 성취됨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심과 신 포도주를 마심은 ‘성경의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일곱번째 포도주 항아리가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신부인 우리와 하나로 함몰되는 혼인을 완성하여 주시기 위해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전에 신 포도주를 마신 것이다(요 19: 28). 그렇게 일곱번째 포도주 항아리가 되셔서 십자가에서 구원의 피를 흘리심으로 그 포도주가 바로 어린양의 피를 상징하며 그 피를 마신자는 영원한 안식의 혼인잔치에 신부로 참여하는 영광을 입게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마지막 성찬에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건너주시면서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여 주셨다.

영원한 안식을 상징하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포도주가 아니라 반드시 어린양의 피가 전제됨을 보여주시기 위해 혼인 잔치에 인간들이 내 놓은 포도주를 떨어지게 한 것이다. 혼인잔치란 신랑과 신부가 하나로 연합을 이루어 한 몸으로 살게 되는 기쁨과 희락을 의미한다. 예수님 없이 그들이 스스로 신랑을 정하여 놓고 잔치를 벌이고 있었기에 그 잔치는 포도주가 끊어짐으로 중단되는 실패의 잔치였다. 즉 참 신랑이 오셨음에도 여전히 이 세상 율법을 남편으로 삼고 잔치에 도취되어 있는 패역함을 드러내신 것이다. 처음부터 그들이 벌이는 잔치는 율법과 혼인하는 잔치임을 드러내기 위해 잔치집 앞에 6개 항아리, 하나가 모자라는 즉 7에 미달하는 6개라는 수자를 등장시킨 것이다. 더더욱 율법적 행위로 깨끗하고 의롭다고 자칭하는 그들의 종교행위가 얼마나 거짓되고 외식적이며, 죄에 대한 회개가 전혀 없는 패역함을 나타내기 위해 물이 없는 텅 비여있는 항아라가 등장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한”(마 23:25) 자들이며,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마 23:27) 자들이며,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마 23:28) 자들임을 폭로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라고 진노하셨다.

참 신랑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여전히 율법을 남편으로 모시고 제사 놀이를 하는 그들이 곧 멸망에 입박하였음을 확실히 드러내기 위하여 연이어 벌어진 사건이 바로 성전 뒤엎기이다. 참 신랑이 눈앞에 나타나서 신부를 취하려 오셨음에도 여전히 율법과 제사를 남편으로 모시고 성전에서 열심히 제사 놀이를 하고 있으니 이제 내가 와서 너희들의 성전을 헐어버리시겠다고 진노하신 것이다. 즉 너희들은 성전에서 너희 자신들의 탐심과 욕망을 채우는 장사놀이를 하여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눅 19:46), “이 성전을 헐라”(요 2:29) 라고 진노하시면서 그들의 장사놀이를 뒤엎어 버린 것이다. 구약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도 예수님과 똑같은 말씀을 선포하셨다. 예레미야는 성전 문 앞에서 열심히 제사를 드리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당신들이 예배하는 이 성전은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렘 7:4-11)로 만들었다고 책망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뒤엎고 성전을 헐라고 선포하신 것은 바로 구약의 성전과 제사와 율법 시대는 끝이 났다는 선고이다. 실체이신 예수가 오셨기에 그림자인 구약과 율법은 반드시 없어지는 법이다. 참 성전이시며 참 신랑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천국이 임하는 신약시대가 도래됨을 다시 한번 가나 혼인잔치의 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구약의 잔치는 죽은 잔치임을 나타내기 위해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고, 참 신랑이 오셔서 영원히 떨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아니하는 기쁨과 희락이 넘치는 포도주를 마시게 하는 새로운 천국 잔치가 완성될 것임을 나타내시기 위해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새 창조를 일으키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 십자가의 때에 성취될 것이며, 그때 십자가 보혈로 정결함을 입게 됨을 계시하기 위해 정결 예식으로 준비된 항아리에 물을 채우게 하시고, 그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내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진정한 신부를 취하려고 혼인 자리에 오셨으며, 그분이 오심으로 텅 비어있는 항아리에 우리의 모든 죄를 씻겨주시는 물이 채워졌고, 그 물 세례를 받은 당신의 백성이 새 신부로 태어나는 포도주, 즉 성령을 마시게 하시는 영원한 천국 잔치를 계시하는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돌 항아리의 물이 포도주로 변한 표적

예수님이 잔치 집에 초대되어 갔을 때 포도주는 이미 메말라 가고 있었고, 이로 인하여 잔치 집에는 기쁨과 희락이 사라지게 되는 큰일이 일어난 것이다. 형식만 갖추어져 있지만 실상은 ‘참 기쁨과 희락’을 상실한 초상집과 같은 곧 막이 내리게 되는 구약 마지막 상황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마태복음 25장 5-8절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의 비유에서, 다섯 처녀는 자신들이 준비한 기름으로 신랑을 맞이하는데 충분할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가 기름이 바닥이 나자 신랑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문밖에 던져지는 상황과 같이, 가나 혼인 잔치 역시 자신들이 준비한 포도주로 잔치에 기쁨과 희락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하리라 믿었지만, 이내 포도주가 떨어지고 기대했던 기쁨을 잃게 되어 잔치가 초상집으로 끝나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율법을 남편으로 모시고 스스로 준비한 세상 잔치는 포도주가 끝어짐으로 막이 내린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종교적 잔치는 자신과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물이 포도주가 되는 새 창조를 일으키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바로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영생하는 포도주 이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손을 씻어 정결케하는 물을 담는 돌 항아리를 술을 만드는 용도로 사용하셨다. 모세는 돌에서 물을 내었으나, 예수님은 돌 항아리의 물로 포도주를 내신 것이다. 모세가 반석에서 낸 물은 마셔도 죽었지만, 예수님이 물로 만드신 포도주는 바로 예수님 자신의 보혈을 상징함으로 그 보혈로 모든 죄가 씻겨지고 새 생명을 얻게 되는 영원히 못 마르지 않는 은혜의 포도주를 상징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라고 선포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낡은 가죽 부대에 담긴 포도주는 율법을 상징하며, 이내 떨어져 혼인은 끊어진 것이다. 하지만 돌 항아리 물로 만들어진 포도주는 영생하는 생명수, 십자가 보혈을 상징한다. 즉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신랑이 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림으로 그 보혈로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부로 새롭게 살아나는 천국 잔치의 완성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영원한 혼인잔치를 치르기 위해,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오셨다는 복음을 담고 있기에 가나 혼인잔치를 기쁨과 희락에 찬 첫 표적으로 시작하신 것이며, 이를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표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표적이란? 장차 예수님이 이루어 가실 일을 예표로 보여주고 알려주는 일이다. 예수님은 혼인잔치를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묘사하고 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마 22:1-2).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행복한 순간, 가장 기쁘고 즐거운 환희로 넘치는 혼인 잔치 집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혼인잔치는 이 세상의 포도주로 기쁨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로 영원한 기쁨을 채우게 됨을 계시하여 십자가의 때를 '나의 때'로 말씀하신 것이다.

새 포도주를 돌 항아리에 넘치게 채우시는 의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한 번도 포도주를 담아 본 적이 없는, 돌 항아리를 포도주 항아리로 쓰신 것이다. 그리고 7의 완전수에 미달하는 6개 돌 항아리에 마지막으로 예수님 십자가 보혈로 완전한 7로 충만하게 채워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것은 내가 너희들과 세우는 새 언약이기에 받아 마시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즉 ‘내가 곧 너회안에 들어가 살과 피가 되어 영원히 하나가 되겠다’는 새로운 언약을 세우기 위해 제자들에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자신의 신부로 잉태시켜 영원히 하나로 혼인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 직전에 포도주 한 모금 마시고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때는 포괄적으로 십자가에 죽으심과 성령이 임하여 영원히 하나로 혼인을 이루는 전체를 말씀하신다.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을 새 술, 즉 새 포도주에 취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의 강림을 새 포도주에 취한 것으로 묘사한 것은, 율법의 정죄와 심판의 두려움에 묶여 종으로 살던 자들이 성령이 임하자 마치 새 포도주에 취한 자와 같이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 마음껏 기뻐하고 마음껏 즐거워하는 자유함을 상징한다. 그러한 자유한 기쁨과 즐거움은 내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포도주가 내 마음에 임하여 나오는 영원한 자유와 환희가 넘치는 하늘나라의 기쁨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첫째,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항아리에서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은,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말씀의 능력이다. 바로 예수님이 명하신 말씀이 역사하신 것이다.

두 번째로,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은 본질적 바뀜이다. 물은 정결과 세례로 모든 죄가 씻기는 회개를 상징한다. 즉 죄인이 물세례를 받아 옛 죄인이 죽고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운 피조물로 신부로 거듭나게 됨을 상징한다. 말씀하시기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6-27). 세 번째는, 옛 죄인은 물 세례를 받아 죽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부활하여 그리스도 신랑과 혼인을 하게 되는 영원히 한 몸이 되는 천국 잔치를 상징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십자가의 때가 바로 예수님의 영광의 때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이 되어 세상에 무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는 일이며, 자신의 권능으로 부활하셔서 우리를 신부로 맞이하여 영원히 함께 살게 되는 천국 잔치의 완성을 가리킨다. 그 하늘나라 혼인잔치를 영광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