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영적 계시

로마서 (3:1-8) [2] 질문: 인간의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페하겠는가? /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는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23. 22:17

로마서 [3:1-8] (2)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특권을 내세우며 율법 지킴과 할례의식으로 구원받은 선민이라고 자칭하는 유대인의 자부심에 대하여, ‘율법을 자랑하는 너희가 바로 율법을 범한 자들이며, 할레 당이라 자칭하는 너희가 바로 무할레 당이며, 유대인이라 자랑하는 너희는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으로 행하는 육신의 할례는 할례가 아니다’(롬 2:23-25)라고 못을 박는다. 이와 같은 폭격에, 유대인들이 반드시 반격적 질문들을 던질 것임을 바울은 간파하고, 먼저 그들의 질문들을 종합하여 내 놓고 논쟁한 것이다.

(1). 그러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3:1)

(2).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겠습니까?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어디 가겠습니까? (3:2)

(3).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겠습니까? (3:5)

(4).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3:7)

(5).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습니까? (3:8)

첫 번째 질문: “그렇다면 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이며 할례의 가치가 무엇입니까?”(3:1현대인 성경)

충분한 이해를 돕기 위해 로마서 (3:1-8)―[1] 번부터 읽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두 번째 질문: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3:3)

대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이 다 거짓되어도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

성경에도 '주의 말씀은 옳고 주의 심판은 정당합니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4 현대인 성경)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율법과 할례를 주셨고 조상 때부터 지키고 믿어 왔는데 어찌 믿지 않았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일부 사람들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취소된다면 어찌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유대인들이 믿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된 것이 되지 않느냐? 라는 질문들이다. 즉 자신들은 율법을 지키고 행하였기에 구원을 얻은 것이며, 믿지 아니한 이방인들은 율법을 받지 못하였기에 구원이 없는 것이 분명하며, 구원은 오직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된다는 주장이며, 그렇게 조상 때부터 목숨으로 율법을 준수하고 할례를 행하여 왔기 때문에 자신들의 공로와 업적을 무시해서는 안 되며 유대인이라는 특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항의와 같은 궤변이다.

바울의 반박

첫째, 설마 너희들이 믿어주지 않는다하여, 진실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멈춘다고 생각하느냐? 4천년 동안 너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언약을 깨고 불신하고 우상을 섬기며 불순종하고 대적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실하심으로 너희가 갈망하고 소망하는 언약의 메시아를 보내주시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 너희들의 불신으로 하나님의 미쁘심이 페하여 질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너희가 하나님의 언약을 짓밟고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을 박았어도 하나님은 너희의 실패를 선으로 성취하여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셨으니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승리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즉 하나님은 영원부터 신실하시기에 약속하신 메시아를 보내주셨으며, 구원의 언약을 십자가에서 성취하여 주셨으며, 부활하셔서 당신의 백성에게 구원과 영생을 입혀주셨으니 어찌 인간의 거짓된 불신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할 수가 있겠는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못을 박는다. 오히려 인간들의 거짓됨과 불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본체이신 영광과 사랑과 구원과 생명이심이 온 천하에 드러나고 전파되었으니 “당신의 말씀에는 언제나 정의가 드러나고 재판을 받으시면 반드시 이기십니다”(공동번역) 함을 증명하셨다고 다윗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바울은 그들의 궤변에 대하여 한마디로 ‘모든 인간은 다 거짓되어도 하나님만은 신실하시다’ 라는 결론적 선언으로, 인간 자체가 거짓된 존재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미련하고 무지한 이성과 논리로 하나님의 진리를 판단할 수 없다는 일갈이다. 하나님의 구원 언약은 인간이 믿어주지 않는다하여 끊임없이 불순종하고 배신하고 대적한다고 하여 중도에서 멈추거나 지체되거나 페하는 일이 절대 없음을 증거하여 "하나님만은 신실하시다"라고 그분의 변치않는 본질과 속성을 제시한 것이다. 죄인을 구원하여 당신의 영화로운 자녀로 만드시는 구원의 언약은 창세전에 하늘나라에서 묵시로 정해져 있었으며, 뜻이 하늘나라에서 이미 이뤄졌기 때문에 그 이루신 뜻이 이 세상에 펼쳐지는 것이 바로 역사이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성취되었고 성취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즉 하나님의 구원사는 인간의 노력과 열심으로 또는 인간이 신실하여 또는 인간이 믿어 주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며, 오직 창세전 하늘나라에서 이루신 언약에 따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서 성취되고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너희는 똑똑히 보고 체험하지 않았는가! 너희가 죽인 예수그리스도가 부활하셨고, 너희가 거절한 복음이 지금 온 세상 이방인에게 전파되고 있지 않는가! 그 어떤 것으로도 신실하신 구원 언약을 결코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이 바울의 강력한 주장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3:4).

두 번째로, 너희는 율법과 제사와 할례를 받아 구원을 받은 민족이라고 자부하고 자랑하는데 정작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거역하고 대적하여 하나님을 죽인 자들이 너희가 아니냐! 실패한 자는 너희이며 그 실패는 너희 자신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말씀을 맡은 너희가 실패하였다하여 하나님의 미쁘심이 폐하여 지겠느냐! 하나님의 구원사가 지체되었느냐!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너희들이 저지른 실패를 선으로 신실하심으로 구원을 성취하여 주셨으니 어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할 수가 있겠는가! 너희는 다윗의 말을 알지 못하느냐? 이르되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3:4).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악된 존재로 거짓과 어리석음과 무지함과 미련함으로 인하여 절대로 하나님을 일수도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도 또한 하나님을 이실 수도 없는 먼지에 불과한 ‘없음’이다. 그런데 어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할 수가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감히 율법을 지켜 행하여 구원을 얻었다고 자고할 수가 있겠는가! 너희는 선한 율법을 악용하여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그리스도를 ‘죄인’이라 정죄하고 죽여 버렸으니 율법과 할례를 받았다는 유대인의 유익이 어디에 있으며 할례가 너희에게 무슨 유익이 되느냐! 라는 뜻에서 바울은 한마디로 “인간은 다 거짓된 존재”라고 못을 박은 것이다.

세 번째로, 비록 너희는 거짓되고 어리석고 패역하고 악독한 민족으로 실패하였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신 참 진리이시기에 결코 자신의 언약과 뜻에 실패하실 수 없으신 분이심을 십자가 구원 성취로 증명하여 보여주지 않았는가! 오직 하나님만이 진리이심이 너희에게 밝히 드러나 보여주었으니 너희는 핑계할 수 없다는 질책이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더라도 하느님만은 언제나 진실하십니다” (3:4 공동번역).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 진리를 대적하며 불의를 행하는 거짓된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참 진리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불신과 불의와 패역함 때문에 하늘에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뜻이 지체되거나 불변성이 상실되는 일은 절대 없으며, 반대로 인간들의 패역함과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만이 신실하시며 참 진리이심이 드러나고, 하나님만이 구윈이시며 생명임이 증명되고, 하나님의 의와 영광이 온 세상에 온전히 드러났다는 주장이다. 즉 하나님의 미쁘심은 인간의 불신과 배신과 대적으로 인하여 없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분명해지고 더 충만해졌다는 것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비록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오직 그분이 자발적으로 입혀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이 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기에 그분의 의로운 피의 공로로 나의 모든 죄가 사하여 져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바울은 주장하고 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러므로 유대인이 아무리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하고 짓밟았다 할지라도, 그분의 언약은 계속 그 효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능력을 발휘하여 신실함으로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셨으며, 그 십자가 구원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와 죽음에서 살아올라오는 필연적인 귀결을 “오직 하나님만은 신실하시다”라고 논증한 것이다. 즉 인간의 거짓됨과 믿음 없음이 하나님의 영광과 진리에 손상이 되기는커녕 그것을 더 분명하게 돋보이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간의 거짓됨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지만, 하나님은 참되십니다”(3: 4새 번역). 여기서 말하는 “거짓말쟁이다”라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로 이해하고 행하는 진리를 거스리는 모든 불의를 가리키며, 진리의 말씀을 주어도 생명으로 읽어내지 못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어도 구원자로 알아보지 못하는 무지와 어리석음과 미련함과 불가능함을 가리킨다. 즉 이 세상 자체가 본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거짓된 상태이기에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은 참이 아닌 헛되고 허탄한 것들이며 곧 썩어서 없어질 육신의 탐심을 채우는 허망한 것들이기에 바울은 ‘거짓’이라고 말한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8:44-45에서, 마귀는 처음부터 진리를 대적하는 거짓말쟁이며 진리를 죽이는 ‘살인자’라고 지적하셨다. 그리고 진리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죽이려고 마귀 행사를 하는 유대인들을 가리켜 너희는 거짓말쟁이며 살인자인 마귀의 자식이라고 부른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마 8:44-45). 모든 인간은 불의한 죄인이며 진리를 거역하고 진리를 죽이는 거짓된 존재들이며 살인자들이라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대적하여 진리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죽인 거짓된 존재들임을 폭로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롬 1:18)고 정당한 심판을 선고한 것이다.

51:4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사도 바울이 인용한 시편 51: 4절의 원적 의미는: 모태에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나 죄만을 생산해 내는 인간의 실존을 깨닫고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그분의 공정한 판단에 순종하는 항복의 고백이며, 자신의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도말되어 의롭다함을 얻었음을 깨닫는 복음의 찬양이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여 임신을 시키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살해한 후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이 지내다가 나단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의 저주를 전해 듣고, 인간은 모태에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만을 생산해내는 악한 죄인이라는 실존을 깨닫게 되었고, 그 죄의 뿌리를 제거하여 주시는 십자가 구원의 의를 구한 것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4-5)라는 고백과 같이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꿰뚫어 보고 죄인의 실존을 깨닫고 십자가 구원의 의를 구한 것이다.

다윗은 앞에서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신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쫓고 있는 원수인 사울 왕을 두 번씩이나 살려준 의로운 자 같이 보여진 자이다. 그런데 그는 더욱 성숙한 믿음으로 성화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더욱 악한 진짜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부하의 아내를 범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아무 죄가 없는 충신을 살인한 자로 추락한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실존을 들여다보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간음죄와 살인죄로 죽어 마땅한 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아무리 회개하고 아무리 의로워지려고 열심을 부려도 죄가 자신의 마음을 도사리고 있기에 죄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을 드려다 본 것이다. 모든 인간은 심히 거짓되고 부패하고 추악하기에 아무리 하나님 앞에 열심을 부리고 경건하게 살려고 몸부림 쳐도, 죄의 뿌리를 제거할 수 없으며, “악인들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잘못되었으며 태어날 때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말을 하는”(시 58:3) 인간의 실존을 올바로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모형하고 있었던 모든 이스라엘의 대표인 다윗의 거짓을 그 자리에서 발가벗겨 폭로함으로 인간 다윗의 왕위가 삭제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과 나의 주 되심을 인정하며 오직 십자가 보혈의 피를 믿고 의지함으로 죄에서 구원받게 되는 복음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모든 인간은 다 거짓된 존재로 의로운 것이 하나도 없으며, 오직 ‘주만이 옳고 의로우시고 순전하신 진리이심을’ 인정하고, 자신을 주 앞에 온전히 내려놓는 항복을 고백하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자신의 모든 죄가 씻기어 의롭게 되는 은혜의 복음을 구한 것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시 51:7-8).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다윗은 영적으로 자신의 그 엄청난 죄가 십자가에서 꺾어지신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깨끗하게 도말되었음을 미리 보고 감사와 찬양을 드린 것이다(시51:7-8). 그는 인간의 실존과 은혜의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이기심과 공의로운 심판

시 51:4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인용: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주의 말씀은 옳고 주의 심판은 정당합니다”(3:4 현대인 성경)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추앙하는 다윗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바꾸어서 인용함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진리이시며 때문에 그분의 모든 심판은 정당하시며 이기신다는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와 공정하신 심판을 강조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그렇게 끊임없이 진리를 대적하는 불의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진리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며, 오직 그분의 입에서 나오시는 모든 말씀만이 진리이시며 그분은 반드시 공의로 이 세상과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임을 제시하여 “주의 말씀은 옳고 주의 심판은 정당합니다”(현대인 성경)라고 의도적으로 바꾸어서 인용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다 거짓되데 오직 하나님만이 진리이시기에 인간은 하나님을 이길 수 없으며 아무리 하나님의 진리를 막아 나선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지체되거나 변경될 수가 없으며, 죄인은 반드시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피할 수 없음에 초점을 두고 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말씀으로 진리로 구원자로 생명으로 천국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조롱하고 핍박하고 대적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죽인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세로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모든 권세와 권능을 아버지로부터 받으시고 이제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임을 선포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마 11:27),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며”(마 28:16),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 아버지께서 만물을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모든 권세와 권능을 아들에게 주셨으며, 그 권세는 영생과 심판에 관한 권세라고 말씀하신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8). ‘심판’은 진리를 거슬러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진리의 말씀을 받지 아니하는 유대주의 율법 자들임을 확실하게 지적하시고 그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드하도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회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27-33). 마찬가지로, 바울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권세와 권능을 가지신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이신데 너희가 어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고 이기려고 하느냐! 너희가 진리를 말살하려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지금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말살하려고 우리를 모함하고 박해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욱 왕성하여 세상 끝까지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으니 너희가 이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기시고 승리하셨으며, 너희는 결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일갈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던 유대인들은 그 진리의 말씀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읽어내지 못함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지도 믿지도 않았고, 오히려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핍박하여 십자가에 못을 박음으로 스스로 구원의 문을 닫아버리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이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핍박하고 죽이는 마귀의 행사를 하고 있었다 (마 23:13). 그들은 조상 때부터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대적하며, 하나님께서 부내주신 선지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마저 십자가에 못 박는 악행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자초한 실패한 민족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신실하게 성취하셨으며, 그들의 만행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과 사랑과 용서와 인내와 자비와 긍휼하심과 의로우심을 천하에 드러내심으로 세상 끝까지 흩어져 있는 당신의 참 백성을 당신의 품안으로 끌어 모으시는 은혜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셨다. 유대인들의 패역함을 드러냄으로 인간의 거짓된 어리석음과 무지와 무력함이 확인되고 오직 하나님만이 신실하시며 진리이심이 입증된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너희의 거짓됨이 천하에 드러나고 실패한 민족으로 드러났지만,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악행을 선으로 이기셔서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고 충만함이 되었으니 “주의 말씀은 옳고 주의 심판은 정당하시다”(3:4 현대인 성경)라고 선언한 것이다.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롬 11:12).

세 번째 질문: “그런데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말입니까? (나는 사람의 논리대로 말합니다) (현대인 성경 3:5)

대답: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6)

만약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또는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한 불신으로 인하여, 이방인에게 구원이 임하는 의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었다면, 유대인이 불의하다고 말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유대인들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신 것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십자가 은혜의 복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무식한 억지로 내 뱉는 질문들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이 질문들이 이 세상 육신에 속한 불신자들에게서 나오는 어리석은 질문임을 명시하기 위해 괄호로 묶어서 (사람의 논리)라고 분명하게 표기를 한 것이다. 예를 들면,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수 있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유다가 어찌 불의한 죄인으로 정죄 받을 수 있겠는가? 라는 논리이다. 실제로 영지주의 자들은 유다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며 “유다복음서”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지경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무지하고 어리석고 패역한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절대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으로 항상 역으로 자신들의 유익과 편리로 풀이하거나 도적하거나 악용하며, 오만 방자한 태도로 하나님을 공격하는 말들을 함부로 내뱉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바울은 인간의 실존에 대하여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롬 3:12-14)라고 인간의 실존을 폭로한 것이며, 그들의 참란한 질문들을 한마디로 반박하여 “너희는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다”(3:8)라고 거두절미하게 그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정죄를 선포한 것이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매일 매순간마다 불의를 행하는 거짓된 존재요, 거짓의 아비 마귀의 자식이요, ‘선이 없나니 하나도 없는’ 완벽한 철저한 죄인이다. 지옥 불에 떨어져 마땅한 죄인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믿음으로 구원받은 그 사랑의 깊이를 아는 자라면 절대로 그와 같은 참란한 질문들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질문들을 던지는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가 아니라 마귀에게서 나와 마귀의 말을 하고 있으니 “너희는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단도직입으로 심판으로 귀결한 것이다.

인간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하여 불의로 사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자신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았다는 확신과 증거를 받지 못한 은혜 밖에 있는 불신자이거나, 또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택함에서 제외된 자들임을 스스로 증명함으로 ‘정죄 받아 마땅한 자들이다.’ 이 세상 육신에 속한 자들은 오로지 자기들의 유익만을 추구하며 자기의 체면과 가치와 위상에만 관심을 가진 자들이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구실로 자신들이 원하는 종교놀이를 하며, 근사하게 선행과 열심으로 자신을 의인으로 위장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방종으로 역행하

며, 그들이 즐겨 던지는 망령된 비방들이 바로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면, 우리가 어찌 정죄 받겠는가?’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신 것이 아닌가?’(3:5).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악을 행하여도 되지 않겠는가?’(롬3:8). ‘구원받았으니 이제 막 살아도 되겠네’ 이와 같은 참란한 질문들이다. 바울은 그렇게 말하는 자들은 구원받은 성도가 아니라 이 세상 거짓에 속한 자들이 내 놓은 거짓된 논리이기에 즉각적으로 “그런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3:8)고 정죄한 것이다. 만약 너희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불의한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의문들을 던진다면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말인가! 불의한 하나님이 어찌 세상을 심판하실 수가 있겠는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바울은 역으로 반박한다.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3:6). 바울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모든 주권자이시기에 절대로 불의하실 수 없다고 논증한다. 그분 자체가 선이고 진리이시기에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진리이시며 선이시며 의로우시며 공정하시기 때문이다.

네 번째 질문: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3:7)

다섯 번째 질문: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습니까? (3:8)

대답: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3:8)

유대인들은 바울이 외치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엡 2:8, 롬 1:17) 십자가 복음을 말살하기 위해 바울의 말을 왜곡하여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겠는가’ 또는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라고 바울이 말한 것으로 누명을 씌워 모함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렇게 거짓으로 복음을 모함하는 그들을 향하여 단호하게 심판을 선고한 것이다. ‘그들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을 모르는 무지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고집과, 어리석고 미련한 논리로 복음을 비방하고 대적하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 복음에 도전하여 거짓을 말하며 궤변을 늘어놓는 자들은 심판을 받아 마땅하며, 그들은 자신들이 내 뱉은 그 참란하고 모독적인 말로 스스로 자신들이 정죄 받아 마땅함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이르기를,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벧후 2:12, 1:10).

바울은 이와 같은 참란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에 대하여 철두철미하게 폭로해 주고 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3: 13-14). 이것이 땅에 속한 육신의 실체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12)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은 가시와 엉겅퀴로 저주받은 땅에서 난 거짓된 존재이기에 그 입술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 차 있기에 죄인으로 정죄 받아 죄인으로 심판받는 것이 너무나 지당하다는 선언이다.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 죄만을 행하는 존재로 진노의 심판아래 놓여 있음으로 하나님의 구원 대상으로 은혜를 입어야만이 살 수 있다. 인간은 하늘나라 생명의 진리를 주어도 알아보지 못하고 이 땅의 썩은 것으로 바꾸어 육신의 탐심을 채우며 그 주신 진리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한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 땅의 존재를 구원함에 있어서 인간에게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으시며 요구하지 않으시며, 오직 은혜의 덮음으로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며, 한분 의인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 집어넣음으로 의롭다 칭하여 주신다. 인간의 모든 행위를 배제하여 독립적인 주권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희생으로 구원과 생명을 은혜로 선물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악함과 불신과 배신 때문에 창세전 하늘나라에서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 구원에 영향을 주거나 손상을 주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4000여 년 역사에서 끝임 없이 하나님께 반항하고 대적하며, 우상숭배와 끈질긴 고집으로 수시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왔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약속대로 메시아의 구원을 성취하여 주셨다. 이스라엘의 끝없는 불신으로 아브라함과 맺은 구원의 언약이 지체되거나 중단되는 일은 결코 없었음을 역사가 증거하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자신에 대하여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3)라고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자신의 본질을 선포하셨다.

예를 들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의심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하인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약속의 아들로 만들었다고 하여 아스마엘을 언약의 아들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100세에 이삭을 주셔서 이삭을 언약의 아들로 정해주셨다. 허물이 많고 믿음이 연약한 아브라함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언약을 이루시고 믿음의 아버지로 세워 주셨다.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 왕이 간음과 살인죄를 지었다고 하여,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이방신들을 끌어들여 나라를 망해 먹었다하여 다윗의 혈통으로 오시는 메시아의 약속과 언약을 끊을 수가 있겠는가?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였다고 하여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신 자기 백성의 구원을 중단할 수가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혈통이라 자랑하는 너희가 너희 조상의 역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 어찌 너희의 입술에서 ‘만약 우리가 믿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된 것이 되지 않느냐?’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면,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의로움과 참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죄를 범해도 되는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참란한 독설들이 나올 수가 있겠으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할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스스로 너희 자신을 정죄하는 일이기에 “심판 받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아버지의 사랑과 자신 전부를 주셔서 나를 죄라는 배설물과 영원한 지옥 불에서 구원하여 주신 그 크나큰 은혜와 사랑을 너무나 잘 알고 인식하고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해도 되겠네” “구원 받았으니 이제 막 살아도 되겠네”’ 이런 무식한 억지 결론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본래 흙으로 지음을 받은 생명이 없는 죽은 상태였으며 “진토와 거름더미”(시 113: 7 / 삼상 2:8) 가 우리의 본래 실체였다.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이 진정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처럼 영원히 사는 존재로 성장하고 발전하여 의로운 자로 완성의 지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저주와 죄 안에 갇혀 시간을 쌓아서 늙고 썩어져가는 죽음의 멸망과 지옥으로 종말을 고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을 “진토”, “거름 더미”(삼상 2:8) 라고 부른 것이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으며”(삼상 2:8) 함과 같이, 우리가 바로 그런 쓰레기요 거름더미와 같은 악인의 자리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주셨고, 죄와 죽음의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주셨으며, 그분을 믿는 믿음을 주셨으며, 그분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되어 하늘의 유업을 이어받은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이 복음의 진리를 아는 구원받은 성도는 그와 같은 참란한 억지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그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죄)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라고 구원 받은 성도는 절대로 그렇게 살수 없음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추구하게 되며, 죄를 멀리하게 되며, 자신의 마음을 더럽히는 일을 금하게 된다. 내 안에 있는 그분이 죄를 미워하시기에, 거룩한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바울이 말한 봐와 같이 성도는 죄 가운데 더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6-7). 악한 죄인으로 살던 내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완전히 죽고, 내 새 사람은 그분의 의로운 생명으로, 즉 그분의 신부로 부활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기 때문에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내가 나를 주관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주관하는 십자가 자기 부인의 삶으로 끌려가기 때문에 그러한 참란한 궤변들이 나올 수가 없으며, 그러한 독설을 퍼붓는 자들은 구원 받은 성도가 아니라 육신에 속한 마귀의 자식들이기에 바울은 한마디로 '그들은 심판받아 마땅하다'라고 그들의 결국을 선고한 것이다.

만약 초신 자라면 복음을 접할 때 “이제 나는 구원 받았으니 막 살아도 되겠네. 자유인이 되었네”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오히려 그러한 반응이 없다면 그는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율법에 속한 자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로마서 강해 (7권 275페이지)에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를 한 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기인하고 진행되고 완료된다면, 이제는 나의 그 어떤 행위도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되거나, 걸림돌이 될 수 없는 것이구나. 이제 나는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거구나. 나는 이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구원 앞에서 죄가 되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는 정확하게 복음에 반대되는 설교를 한 사람이다.” 율법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방종, 무정부주의, 무도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에서 듣는 모든 설교가 도덕과 윤리적으로 의롭게 경건하게 사는 성화에 도달하기 위한 신앙행위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일성소를 반드시 지키며, 교회 모든 예배와 행사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충성봉사에 힘쓰며, 선한 사마리아인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로 세상에 빛을 비추어 주고 세상 부패를 막는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며, 그렇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업적과 공로 쌓기를 하라” 이와 같은 것들이 교회 안에서 매일같이 반복하는 설교 내용이 아닌가?

예수님은 종교적 열심과 행위와 외식에 대하여 부자청년의 이야기에서, 여러 가지 비유에서, 특히 마태복음 23장에서 일곱까지 화로 폭로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이여 너희가 바로 우맹한 자요 불의한 자이며;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며”(마 23:25);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며”(마 23:27); ‘상좌에 앉기를 좋아하며, 사람들에게 랍비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하며’(눅23:5-7);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막 12:40) 전형적인 외식 자들이라고 비난하셨다. 왜냐하면 그 모든 외식적 행위는 악마의 사악한 행사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너희 아바 마귀에서 난 자식이며 마귀의 행사를 한다고 질책한 것이다(요 8:44).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내가 무엇을 행하였느냐’ 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 즉 나는 얼마나 악하고 불가능한 존재이며, 스스로 죄와 죽음의 심판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티끌’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과 자신에 대한 철저한 부인에 근거한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순간, 죄를 안 짓는 의인이 되기 위하여 얼마나 더 변화되고 성화되어 가는 것에 올인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터져 나오는 그 집요하고 끈질고 악질적인 죄성을 바라보고 체험하면서 나는 예수가 아니면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이며, 십자가 없이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며, 결국은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히 깨닫고 자신에 대한 철저한 부인에 열심을 두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을 굳게 붙들고 의지하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새롭게 거듭난 성도는 이 세상을 향해 살던 옛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영으로 하늘나라에서 사는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 하늘나라 원리의 삶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에 육으로 지키고 내 의지와 노력과 열심의 대가로 무엇인가를 이루고 얻어내는 삶을 추구하지 않게 된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로 성취하신 구원과 생명이 하나님 은혜의 덮음으로 내 심령 안에 뚫고 들어와 나를 장악하고 통치하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끌려가는 항복과 순종의 삶을 지향하게 된다. 그 삶은 오직 나만을 위해 살던 ‘자아’가 기각되고 부서지고, 깨지고, 빠져나가는 철저히 비워지는 자기 부인, 자기 붕괴로 나타난다. 지키고 실천하고 노력하여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를 위해 쌓아두었던 것들이 몽땅 털리고 버려지고 포기되는 자기 부인으로 내려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거지로 추락하는 완전한 비워진 마음의 상태, 즉 한마디로 쟁취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몽땅 버리는 거지 나사로와 방불한 자로 없음의 자리로 내려간 가난한 심령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