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영적 계시

로마서 (1: 5-6) 믿음과 순종 /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24. 09:47

롬 1: 5-6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바울의 인생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정하여주신 인생이었으며 예수님이 친히 주관하시는 삶을 살아낸 인생이었다. 그렇게 그의 인생 전체가 바로 은혜의 덮음으로 은혜 안에서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려가는 인생이었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릇으로 택함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때에 따라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일들을 하나하나 겪어내고 체험하게 됨으로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자였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신을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르고,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자로 사도의 직분을 받았으며, 그 사도의 직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에게, 즉 십자가 복음을 세상 땅 끝까지 전파하는 사명임을 확실하게 밝힌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과 생명인 진리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이 사단의 흑암 권세로부터 벗어나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진리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방인 가운데 높임을 받기를 원하는 바울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1:5)라고 선언한 것이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도 다른 이방인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참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인정한 것이다. 모두가 만세 전에 하나님의 긍휼로 택함을 입은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해진 무리들이며 그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그리스도인들임을 자랑스럽게 선포한 것이다.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롬 1: 5-6).

바울은 왜 믿음에 ‘순종’이라는 단어를 붙여 복음을 믿음과 순종으로 말한 것일까?

5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한마디로 요약하면,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절대로 분리될 수가 없는 하나이다. 순종 없이 믿음을 논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 보이지 않는 믿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 바로 순종이기 때문에 믿음은 곧 순종이다.

인간의 죄와 죽음은 불순종으로부터 온 것이다. 첫 인간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세상에 임하고, 하나님과의 평화로운 관계가 깨지고, 축복이 저주가 되고, 죽음이라는 심판이 임하고, 평화로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불순종이 인류 전체에 죽음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기에 바울은 특별하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말미암을 강조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향한 온전한 순종을 통해 모든 믿는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라고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 인류가 한 분 예수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구원과 생명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 이름을 전하여 모든 민족이 믿고 순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1:5 공동번역)라고 믿음은 곧 순종임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사도바울은 이와 같이 권면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5-12).

아담의 불순종

하나님께서는 오직 아담만을 위한 에덴을 따로 창설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라는 복을 내려주셨다. 에덴동산은 이름 그대로 “기쁨의 동산”으로 슬픔과 고통이 없는 천국의 모형이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만을 들여보내는 하나님 품 안에 있는 하늘나라를 상징한다. 즉 우리에게 향한 당신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에덴동산으로 계시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한 계명을 주시면서 그 계명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셨다. 아직 사단의 존재와 죄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첫 인간이 대면한 것은 죄를 상징하는 ‘선악과’ 나무였고, ‘먹지 말라, 먹으면 죽는다’는 계명이었으며, 인간은 그 첫 계명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죄에 빠지게 되었고 이내 죽음과 함께 땅에 저주가 임한 것이다.

선악과’는 글자 그대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 나무이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선이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와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긍휼을 알게 되었고, 스스로 계시는 유일한 분이시며 영이시며 전지전능하시며 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주권자이시며 구원자이시며 빛과 생명이신 그분의 속성과 본질과 성품을 알게 되었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게 되었다. 동시에 이 땅에는 인간을 괴롭히고 파괴하며 멸망시키는 살인자 사단이라는 악과 지옥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고, 인간 자신의 티끌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곧 죽음임을 처절하게 깨닫게 된다. 즉 ‘선악과’는 죄를 깨닫고 구원을 얻게 하는 율법의 모형이다.

선악과를 주신 것은, 흙을 입은 인간의 원래 모습, 비천과 허무와 ‘없음’이라는 티끌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함이며, 영원한 구원과 생명이 오직 예수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고 나셔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 가치가 티끌과 같이 연약하고 무가치하며 없음의 존재이며, 육신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하나님을 알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하나님의 생명력을 떠나서는 죽음과 지옥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선악과는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내려진 저주와 죽음의 원인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살리는 분이시며, 흙으로 만들어진 허사인 육신을 벗고 영의 영원한 생명을 입혀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동시에 선악과 바로 옆에 영생을 상징하는 생명나무를 함께 주셨다. 그리고 죄로 죽음의 저주가 내려진 하와를 ‘산자의 어미’, 즉 첫 인간 ‘여자의 후손’을 다시 살리시겠다는 구원과 생명을 언약하여 양을 죽여서 그 피의 가죽을 아담에게 입히셨다.

그러므로 “먹지 말라"라는 계명을 먼저 주신 것은, 그 법을 통하여 죄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죄가 되는 것은: 첫째는, 하나님이 내신 계명은 그분의 거룩하신 속성과 성품을 따라 선하시며 의로우시며 절대적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대한 거역이 곧바로 그분의 인격과 권위와 거룩한 속성과 성품에 대한 침해와 손상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분 자신이 바로 말씀이시며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만물을 다스리고 죄를 심판하시며, 말씀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에 그분은 자신에 대하여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분의 말씀에 대한 거역은 곧바로 그분의 생명력에서 끊어져나가는 죽음임을 제시하셨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영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에게 천하고 천한 흙으로 육을 입혀 주셨다. 그리고 그 육의 나약함과 무익함을 드러내기 위해 선악과나무를 주셨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곧 죄와 죽음임을 알게 하기 위해 “먹지 말라"라는 계명을 주셨다. 즉 창세전 정하신 영의 영원한 구원을 이 땅에서 이루시기 위해 육의 타락을 허락하셨다. 바울이 깨닫고 말하기를,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갈 3:22).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의 의로운 순종으로 구원을 이루시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생명을 선물로 주시기로 미리 정하셨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8-9). 바울은 하나님의 원대한 비밀의 경륜과 십자가 구원의 복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로마 성도들에게 의미심장하게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라고 복음을 말한 것이다.

바울이 말한 ‘순종’은 생명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뜻한다

하나님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말씀으로 보내주셨다. 사도 요한은 그 말씀이 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1-4).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예수그리스도이시며,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구원의 의를 성취하여 당신의 백성들에게 생명을 입혀주심으로 그분이 곧 생명이시며 빛이라고 증거하고 선포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는 유일한 길이 바로 말씀에 대한 순종임을 제시하고 있다. 이 땅의 티끌로 피조된 육신으로는 절대로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볼 수 있거나, 알거나, 인식하거나,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거나 구하는 자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말씀으로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말씀으로 그분을 보게 되며, 말씀으로 그분을 알아가게 되며, 말씀으로 진리를 깨닫게 되며, 말씀으로 그분을 나의 구원자로 영접하여 믿음으로 생명에 이르게 됨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을 믿음으로, 믿음을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제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무한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다 설명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분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말씀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신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24:35).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말이 그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8).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이와 같이 말씀이 곧 예수그리스도 자신이시기에 심판의 권세가 말씀에 있으며 그분의 말씀이 곧 생명이며 진리임을 제시하셨다. 하나님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첫 인간 아담에게 말씀을 계명으로 주셔서 당신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곧 생명임을 제시하셨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이내 ‘죽음’이 임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곧 생명임이 증명된 것이다. 즉 우리에게 “이른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요 6:63) 이기에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곧 죽음이라는 진리를 첫 인간에게 선악과를 통하여 보여주어 깨닫게 하셨다.

죽음이란,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며,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끊어지는 하나님의 생명력에서 끊어져 나가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게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이 세상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거역하여 육신의 소욕을 좇아 죽음으로 달리고 있기에 이 세상을 죽은 자들의 세상, 멸망의 세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성경은 잠시 사는 육체의 목숨을 생명이라 하지 않고 죽음이라고 하고 (엡 2:5), 하나님의 말씀으로 잉태된 자를 생명이라 하시며 그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 영의 생명이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약 1:18). 우리가 진리의 말씀으로 잉태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라고 말씀하시고, 그 영의 계시를 받은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라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은 의인 한 분의 순종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당신의 말씀이 곧 생명임을 나타내시기 위해 선악과를 주시고 “먹으면 죽으리라"라는 계명을 붙여주셨다. 이 땅의 티끌로 육을 입은 첫 인간 아담은 육이 연약함으로 “먹지 말라"라는 말씀에 불순종하여 이내 흙으로 다시 되돌림을 받는 죽음이 선포되고(창 3:19), 땅도 함께 저주를 받아 ‘엉겅퀴와 가시’를 내게 된다 (창 3:18). 모든 인간은 흙에서 나와 다시 흙으로 되돌림을 받게 되는데 그 되돌림을 받은 땅 전체가 바로 ‘엉겅퀴와 가시’로 채워진 저주의 상태임을 제시한다. 때문에 이 땅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엮어진 온갖 저주스러운 죄악들로 목구멍까지 차 있음으로 스스로 토해내는 가시와 엉겅퀴로 멸망을 자초하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는 ‘물 한 방울, 작은 티끌, 메뚜기, 짐승, 초개, 진토, 거름 무더기’와 방불한 그 존재 자체를 죽어있는 상태로 표현한 것이다(사 40:15-17; 22-24 / 말 4:1 / 시 49:20 / 시 113: 7).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패역한 죄인들을 마귀의 자식, 독사의 새끼, 회칠한 무덤, 이리,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개, 배설물과 뒹구는 돼지, 귀신들린 자, 썩은 송장, 회칠한 무덤으로 표현하셨다.

이와 같이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면 곧 죽음이라는 것이 첫 인간 아담에게 선포되었고 그 선포대로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죄와 사망의 늪에 빠져 있다. 그렇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뒤섞인 죄와 죽음의 늪에 빠져있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하늘나라 왕의 권위를 내려놓으시고, 영광의 자리에서 이 천한 땅에 종의 형체를 입고 우리를 구원하려 오셨다 (빌 2:5-8). 그분은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온전한 ‘순종’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세상 권세자에게 자신을 내어주어 연약한 양으로 죽임을 당하셨다. 그분이 이 세상에서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아내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이며 땅 끝까지 확장된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신이 아버지께 철저히 순종하여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으심으로 많은 열매를 맺은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점도 흠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순종을 원하셨고, 의인 한 분의 순종으로 당신을 믿는 모든 백성들에게 구원과 생명을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선물로 주신 것이다. 의인 한 분의 순종이 우리를 이 세상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것이다. 이르기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5:8-9).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는 완전히 대립되어 자신이 철저히 부인되는 ‘순종’의 삶으로 나타난다. 이 세상은 자신의 꿈과 야심과 욕망과 온갖 탐심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성취되는 내가 왕이 되는 삶을 추구하지만, 하늘나라의 왕 노릇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라는 존재가 해체되고 부인되고 죽어야만이 하늘나라 백성으로 태어날 수가 있으며, 내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채워지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이 먼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하늘나라 왕의 권세와 영광을 몽땅 내려놓으시고 희생 제물이 되어 아버지께 온전히 받쳐짐으로 그분 안에 있는 성도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자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과 생명에 함몰되는 순종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완전히 내려놓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지향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처음부터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분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분이 인도하시는 길을 가게 됨으로 바울은 우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며, 그렇게 예수의 것으로 소유가 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롬 1:7 )라고 선포한 것이다.

믿음과 순종의 관계? 순종의 삶으로 믿음을 입증한 선진들

믿음과 순종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이 둘은 절대로 분리되어 논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이다. 설령 믿음이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며 생명을 잉태할 수가 없다. 믿음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 열심을 동원하여 능력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에 자신의 불가능함과 티끌의 존재임을 인정하는 자기를 부인하는 자리로 내려가는 항복과 순종이며, 그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는 순종에 의해 하나님의 믿음만이 발휘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의 주, 온전하신 예수’(히 12:2)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는 자기 부인으로 내려가 오직 아버지의 뜻과 의만을 담고 그분이 하시라는 말만 하시고 하시라는 일만 하시는 순종으로 내려가 아버지의 믿음을 따라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렸기 때문이다. 즉 믿음은 능력을 얻어서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의 믿음에 이끌려 온전한 순종으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살아냄으로 생명의 열매를 맺는 것이며 한 알의 밀로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천하에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순종만이 믿음을 입증할 수 있으며 믿음과 순종은 하나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이것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하느님을 믿고 복종할 것을 가르침으로써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1:5 공동번역)라고 믿음에는 반드시 순종이 요구됨을 제시한다.

우리 주님은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는 순종으로 구원의 의를 성취하셨다. 그분은 하늘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다 버리시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셔서 이 땅에 죄인의 육신을 입고 오셨으며,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 머리 둘 곳이 없이 가난한 삶을 사셨으며, 우리에게 영원한 평강과 생명을 입혀 주시기 위해 온갖 매와 멸시와 수모와 핍박을 당하셨으며, 존귀와 영광과 섬김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지만 오히려 종이 되셔서 죄인들을 섬겨주시는 희생과 순종의 삶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그렇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내놓는 십자가 죽으심으로 수많은 영혼들을 영원한 죄와 사망의 파멸에서 구원하여 주셨다. 주님은 믿음의 본질을 ‘겨자씨 한 알’로 표현하시고, 순종의 본질을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희생으로 표현하셨다. 즉 너회에게 요구되는 것은 태산과 같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능력과 기적을 구하는 밖으로 나타나는 믿음이 아니라, 반대로 보이지 않는 겨자씨와 같이 ‘없음’의 존재로 내려가 오직 하나님의 믿음이 발휘되는 것이며;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순종으로 생명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이다. 그렇게 겨자씨와 같은 없음의 자리로 내려갈 때 하나님의 믿음으로 너희 안에 견고하게 쌓여있는 ‘자아’라는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며; 한 알의 밀이 되어 썩어서 완전히 분해되는 순종과 희생으로 새 생명이 탄생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음으로 당신의 백성들이 죄에서 구원받아 죽음에서 살아올라 오게 되는 새 생명의 창조를 제시하신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믿음 장에서 나열된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믿음과 열심에 의해 순종과 믿음의 작품이 된 것이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하나님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생을 살아낸 자들이었다. 예를 들면, 노아는 “너를 위해 방주를 지으라”(창 6:14) 라는 하나님의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지음으로 홍수의 심판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그들은 홍수를 본적이 없던 시대에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방주를 지으라’는 말씀에 순종하였고, 장차 홍수의 심판이 온다는 사실을 믿었고, 방주를 지음으로 온 인류의 물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직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부르심과 ‘고향을 떠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주셨기에 부모 형제 친척들을 버리고 어디로 갈지를 몰랐음에도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나간 것이다. 이르기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히 11:8).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제물로 드리라고 하셨을 때 그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주셨기에 이삭을 드림으로 우리 믿음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창 22:16-18). 그러므로 노아가 ‘믿음을 쫓는 의의 후사’가 된 것도,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축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가 ‘여자의 후손’으로 택정함을 입은 구원의 언약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택정함을 입어 은혜를 받은 노아와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의 이야기가 이스라엘 민족으로 이어진다.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앞을 가로막고 뒤에는 애급 군대가 추격해오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져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라. 그러면 바다가 갈라질 것이다”(출 14:16) 라고 명하셨고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모세가 지팡이를 내밀자 말씀대로 바다가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른 땅으로 홍해를 건너간 것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이스라엘에게 전하라고 하셨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19:5).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제시하여 주셨다. 여호수아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여리고성을 칠 일째 일곱 바퀴 돌고 외치기만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리고성은 무너진 것이다. 선진들의 믿음은 모두가 순종으로 증명이 되었다. 이와 같이 믿음 안에 순종이 들어있으며 믿음과 순종은 하나이다. 바로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들로 인하여 바울은 믿어 순종케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는다고 믿음과 순종을 하나로 강조한 것이다.

사랑하심을 입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성도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규정한다. 사랑하심을 입었다는 것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말한다.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라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세상 죄와 죽음에 빠져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화목제로 보내주셨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그분이 희생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의 삶은 모두가 하나같이 이 세상에서 멸시받고 조롱받고 가난하고 병들고 연약한 고아와 과부와 같은 자들이었다. 또한 사랑받을 만한 그 어떤 외모도 조건도 공로도 업적도 없는 다만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애통과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었다. 솔로몬이 쓴 아가서에서 솔로몬의 사랑을 독차지한 여인은 저마다 재색을 겸비한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예루살렘 여인들이 아니라 포도원에서 죽도록 일만 하는 검고 못생긴 술람미 여인이었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예루살렘 여인들은 율법주의 유대주의 인본주의를 상징한 여인들이다. 반면에 술람미는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갖추지 못한 오직 신랑의 강권적인 선택과 은혜로 사랑으로 부르심을 입어 신부가 된 성도를 모형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과 열심과 업적들을 내놓는 율법적 행위를 전부 부인하고 아무런 자격이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세상에서 버림을 받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들을 신부로 정해놓고 당신의 사랑을 입혀 당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사랑을 입은 성도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1-13). 야곱이 모태에서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선택받아 사랑을 입어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해 놓으셨다는 말씀이다.

호세아서에서 호세아가 그렇게 고멜을 사랑하여도 고멜은 호세아의 사랑을 뿌리치고 계속하여 다른 남자들과 간음하는 창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외모가 흉해지자 남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노예시장에 고깃덩어리처럼 내쳐지게 된다. 그럼에도 호세아는 고멜을 끝까지 사랑하여 값을 지불하고 창녀로 버림받은 고멜을 데리고 와서 아내로 맞아준다. 이것이 구원이며 사랑이며 부르심이다. 그렇게 우리는 신랑의 은혜와 사랑에 의해 선택을 받아서, 더러운 시궁창에 버려진 창녀의 자리에서 왕의 신부로 하늘나라로 옮겨 앉은 것이다. 죽도록 포도원에서 고된 노예생활로 볼품이 없는 술람미가 왕의 초청으로 왕비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보다 더 예쁘고, 조건이 구비된 여자들이 수없이 많았음에도 나만을 사랑한 예수의 사랑, 창녀 고멜과 같이 매일 세상과 간음하는 더러운 나를 신부로 맞아주신 예수의 사랑, 참으로 감당이 안 되는 조건 없는 사랑이다. 그렇게 우리는 더럽고 추악한 자신의 실체를 폭로당하면서 그런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여 주시는 그분의 고귀한 사랑을 입어 그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아 그분의 신부로 거듭난 자들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은혜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깨달으라고 권고하고 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8-19).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은혜와 평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