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으로 읽는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이 곧 믿음과 생명이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30. 11:46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 우리가 감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는 창조주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은, 우리가 그분을 택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분이 먼저 우리를 택하여(요 15:16) 당신의 자녀로 잉태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위해 창세전부터 우리를 계획하시고 복중에 지으셨다.

엡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렘 1:4-5: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고, 역사를 통하여 어떻게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는가를 상세하게 구체적으로 나타내어 보여주시며, 설명하여 깨닫게 하신다. 그리하여 그분은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일으켜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서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하나의 사건들을 일으켜서 당신을 알리시며, 보여주시며, 들려주시며, 율법을 주셔서 가르치시며, 양육하시며, 징계하시며, 불과 구름기둥으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일을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언약의 성취자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는 영생을 주시기 위해 친히 육신을 입으시고 ‘인자’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갇혀있는 ‘나’ 를 찾아와 주셨고 ‘나’를 이 저주의 죽음에서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 우리는 그분의 의로운 생명으로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았고, 그분의 생명으로 의로운 아들로 잉태되어 그분이 바로 나의 영원한 ‘아바 아버지’가 되심을 실제로 체험하고 소유하는 은혜를 입게 된 것이다.

갈 4: 6-7: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이와 같이 나를 낳아주신 ‘아바 아버지’는, 창세전에 나를 계획하셨고 나를 복중에 지으셨으며 나의 이름까지도 부르시며, 나의 모든 것을 눈동자같이 관찰하시며, 당신의 나라, 즉 우리의 영원한 집으로 이끌고 가시는 영원히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나아가서 당신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그 한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시기에, 그분은 나에게 두렵고 무서운 심판주가 아니라,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한없는 사랑의 열정으로 나를 사랑하시며, 용서하여 주시며, 오직 긍휼과 자비로 나를 ‘사랑하는 아들’ 이라 칭하시고 하늘나라의 모든 유업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분은 영원히 나와 함께 하는 생명이시며 사랑이시다.

그리면 구약에서 율법으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심판주로 섬겨왔던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 께서 어떻게 나를 잉태하여 주셨으며 나의 영원한 ‘아바 아버지’ 가 되어주셨을까? 이는 오직 진리의 말씀과 영으로만이 체험되는 영역이다. 육신의 아버지는 육신으로 인식하지만, 영의 아버지는 반드시 영으로 잉태되어야만이 하나님이 바로 나의 ‘아바 아버지’이심을 깨닫게 된다. 이 오묘한 영의 비밀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나에게 육신의 아버지를 주셨다. 육신의 아버지를 인식하는 차원에서 반드시 성령으로 잉태 되여 영의 아버지를 인식하는 체계로 온전히 전환되어야 나에게 향한 그분의 사랑이 읽어지며 느껴지며 체험을 통하여 하나로 연합되는 사랑의 절정에 이르게 된다.

영적 계시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그 거룩하신 창조주가 어찌 ‘나의 아바 아버지’가 되시며, 어떻게 천한 ‘나’ 가 그분의 자녀가 되는가는 참으로 신비스러운 비밀이다. 비밀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세속적인 사건이 아니라, 저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진 영의 사건이기에 영의 계시로만이 이해된다. 영의 계시는 인간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과 영의 계시 속에서 그분이 친히 눈과 귀를 열어주심으로 그분을 인지하게 되며, 알아가게 되며 동시에 ‘나’ 의 실체와 가치를 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영적 계시란 간략하여 말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계시로 인간에게 향한 사랑과 의, 구원과 생명의 진리, 즉 하늘나라의 실체를 나타내어 보여주고 체험을 통하여 알려주고 소유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시는 영역이다. 그분은 오직 창세전 당신이 택하여 놓으신 당신의 자녀에게만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을 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6).

영의 계시는 완전히 하나님 자신의 계시와 임재, 구원의 능력과 생명을 잉태시켜 주시는 독립적인 주권이다. 이는 우리가 노력하는 의지도 아니고, 배워서 취득하는 지성도 아니고, 인생 경험으로 얻어지는 지혜도 아니며, 행위의 의로움과 업적으로 취득되는 일도 아니다. 전적으로 나의 그 어떤 인간적인 요소가 포함되지 않는, 나의 뜻과 의지와 상관없이 오직 그분 홀로 계획하시고 자신의 뜻을 홀로 성취하시고 오직 당신의 자녀에게만 은혜를 입혀주셔서 소유하게 하시는 영에서 일어나는 하늘나라의 사건이다. 즉 구원과 생명은 오직 그분이 먼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사랑의 열정과 열심히 이루어 놓으시고 입혀주시는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로 입혀주신 선물이다.

신앙생활이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서 열심히 섬기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며, 그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얼마나 우리를 위하여 열심히 일을 이루어 가시는가를 알아가며 깨닫는 영적 계시 속으로 들어가 그분이 우리에게 향한 마음을 깨닫는 일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영생은 참되신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것에서 온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신앙의 목표는:

첫째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알기 위하여 성령의 계시로 진리의 말씀 속에서 깨닫기를 구하는 일이다. 둘째로, 인간의 차원에서 인식하는 주관적 의식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말씀 속에서 그분의 마음괴 뜻을 깨닫는 동시에 나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식하는 일이다. 셋째로, 그분의 영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그분의 자녀로 잉태되는 체험을 거쳐,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일이다. 이와 같이 어떻게 창세전에 ‘나’를 택정하셨으며, 친히 나를 찾아와 주셔서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자신의 생명을 주셨으며, 어떻게 그분의 영으로 거듭나서 영의 자녀로 전환되었는가를 성경 말씀 속에서 계시하는 진리를 읽고 깨닫고 그분의 영의 주권 안에 들어가 그분이 ‘나’를 주관하시는 모든 일에 나 자신을 내려놓는 순종이며,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을 지향하는 일에 열심을 부리는 일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의 일을 이루신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또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은 그분은 영이시기에 인간에 의해 계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면서도 자신의 그 존귀한 영의 성을 감추시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자, 만물을 독립적으로 창조하시고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는 창조주의 권위성과 신비성을 말한다. 동시에 그분은 또한 인간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의 마음을 알고 체험할 수 있도록 성경 말씀을 주셨으며 성령의 계시를 우리 마음에 두셨다. 말씀하기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사람의 지혜로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 하느니라"(고전 2:11,13).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을 알아보는 마음을 주셨다. 마음은 본래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뜻을 깨닫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셨다 (신 29:4). 진정으로 성령의 계시로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될때 비로소 그분 안에 있는 나 자신의 정체와 가치성을 발견하게 되며, 그분의 마음이 내 마음에 전달될 때만이 비로소 그분의 영으로 그분의 자녀가 되는 현실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먼저 그분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 바로 구원과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주님은 말씀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영생은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내 육의 아버지로 인식하고 자식 된 의무와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열심히 섬겨드려야 한다고 인식하여 왔다. 동시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심판과 벌을 피면하기 위하여 섬겨드려야 했고, 행위의 열심으로 그분 앞에 잘 보이려고 무척이나 애써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인간의 차원에서 그분을 육적으로 섬기는 신으로 인식하고 우리가 만들어놓은 체계 속에 그분을 집어넣고 우리가 그분의 일을 계획하고,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 행위의 열심으로 그분의 일을 우리가 이루어가는 ‘인간 교회’를 만들어 놓고 규칙을 정해놓고 열심을 자극하여 왔다.

인간은 본성이 사악하며, 육신의 탐심과 욕망과 정욕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섬겨드린다는 구실로 자신들의 영광과 의를 나타내는 전통적인 구례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접목시켜놓고 자신들의 편리에 따라 지키고 행하는 종교 체계를 만들어 놓고 인간 자신들의 유익을 위한 종교 놀이를 벌이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며, 때문에 신령과 진정으로 마음을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육신의 복과 유익과 편리를 얻기 위한 인간 중심의 예배, 십일조 강요, 벌을 피면하기 위한 회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금식 기도, 철야 기도, 내 의와 공로를 나타내기 위한 교회 건축 헌금, 칭찬과 자랑을 얻기 위한 봉사와 선행, 등 각종 육신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동원하여 하나님의 일로 포장하여 열심에 특심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상한 종교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밖으로 나타나 보이는 육신의 섬김이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인간들이 열심히 하는 일에 하나님은 크게 감동하시며 기뻐하실 것으로 의심 없이 믿고, 그 대가로 육의 축복을 간절히 구하고 기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외식적 행위에 대하여 예수님은 심히 꾸짖셨다.

마 23:13-3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요 8: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오늘날 기독교는 진리의 말씀 속에서 영의 계시로 먼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일, 그분의 나라와 생명에는 관심이 없다. 무엇이든지 열심히 행하여 공로와 업적들을 쌓아서 사람들로부터 또한 사회적으로 인정과 칭찬을 받는 유명한 이름을 추구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자신들의 행함과 공로에 따르는 보상과 복을 받기를 추구하는데 신앙생활을 두고 있으며, 그렇게 선호하며 또한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열심히 해야 만이 무엇인가 되고 무엇인가를 얻는 성공에 투신하며 공로와 업적에 따라 형통과 복이 주어지는 것으로 망령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서 나오는 행함을 원하지 않는다.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은 오직 죄일 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천하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셨으며(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확실히 말씀하신다. 롬 3:10-24: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먼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영의 계시를 구하는 일이며, 성경 말씀 속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읽는 일이다. 아버지를 진정으로 알 때만이 나 자신의 존재가치를 깨닫고 그분을 진심으로 믿게 되며, 아버지의 마음이 내 마음에 전달될 때만이 나에게 향한 아버지의 참뜻을 알게 되며, 그분의 뜻이 깨달아질 때만이 우리는 자신을 내려놓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의 삶을 지향하게 됨으로 그분이 나를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그 손길에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분을 알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일이다. 그분 안에 거할 때 나는 비로소 그분의 온전한 아들로 거듭나서 영생을 얻게 된다.

아버지를 아는 일이 곧 믿음과 생명이다

믿음과 생명은 인간의 생각과 의지와 노력에서 결발되어 무조건 믿는 미지와 무지가 아니다. 무조건 믿으면 복을 내려주고 내가 원하는 일을 이루어 주신다는 망연한 기대로 탐심의 배를 채우기 위해 맹종을 선호한다. 그 믿음은 나의 탐심에서 나오는 생명이 없는 죽은 믿음이다. 믿음은 나의 주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으로 은혜로 입혀주시는 선물이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믿음과 생명은 아는 것을 믿고 체험을 통하여 확실한 증거를 낳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출생하면서부터 세상에 대한 지식을 배우기 시작한다. 부모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학교에서 배우고 사회에서 배우고 인간관계에서 배운다. 자신의 직업과 소명을 이루기 위해 지속적으로 평생을 이 세상 지식을 얻는데 투자한다. 잠시 동안 사는 이 세상에서도 지속적인 지식과 배움이 필수적이다. 하물며 나에게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지식은 얼마나 무궁하며 필수적인 것이겠는가!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에게 지성을 주시고 그분에 대하여 공부하여 깨닫고 믿고 생명을 얻으라고 지혜로 충만한 생명의 책인 성경을 주셨다. 동시에 그분은 성령으로 우리 마음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그분에 대한 모든 구원과 영생의 진리를 끊임없이 깨우쳐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너회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 5:39) 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을 아는 지식이 바로 성도의 최고의 사명이다.

믿음과 생명은 하나님을 아는 것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그분이 나를 낳으신 아버지가 되는가를 진정으로 깨닫고 그분의 참 사랑을 체험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즉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분이 주신 성경 말씀 속에서 성령님이 주시는 영의 계시로 그분에 대한 생명의 지식을 얻고 깨닫고 소유하게 되는 체험이다. 그리고 내가 체험한 참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예수 생명을 전하려면 먼저 예수를 알고 내 마음에 예수 생명이 잉태하는 ‘내 복음’ 이 되어야 한다. 맹목적으로 ‘믿어라’ 라고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여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격이며(마 15:14), 자기보다 배나 더 되는 지옥의 자식으로 만드는 망령된 일이다(마 23:15).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전달할 수 없으며 내게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 지식적으로 전하는 예수는 인간의 혼적인 부분을 자극하여 감정으로 감격하고 육신의 의지로 믿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은 잉태되지 않는다. 반드시 영으로 거듭나야 한다. 전하는 내가 먼저 영의 사람이 되어야 내 안에 있는 예수 생명이 다른 이들에게 잉태되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내게 있는 예수를 전할 때 성령님이 받는 자의 마음에서 역사하신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킬 때 ‘내게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너에게 주노라’ 라고 선포할 때 앉은뱅이는 힘을 얻고 뛰어 걸어서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행 3:6).

​2019년 6월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