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 6, 9-10) [2]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 세상에는 평안이 없는 이유 / 성도가 추구하는 평안의 삶 / 바울이 살아낸 평강의 삶
롬 8: 6, 9-10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평안은 평강, 평화, 화평과 동일한 의미로, 헬라어 한 단어 ‘에이레네’ 와 히브리어 한 단어 ‘샬롬’에서 번역된 여러 가지 표현이며 그 뜻은 ‘결합하다’, ‘온전하다, 완전하다’이다. 바울은 ‘평안’은 이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입혀진다고 말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빌 1:2). 평안은 오직 평화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아서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진 연합의 상태를 말한다(롬 5:1-11; 웹 2:14-17; 골 1:20). 즉 ‘평안’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늘나라의 평안이며,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만 누리게 되는 영원을 사는 생명이므로 바울은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6절)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죄가 사하여지고, 자신의 본체인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 마음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비로소 “평안”을 누리게 됨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이내 문을 닫아걸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요 20:19). 주님은 부활의 몸으로 굳게 닫혀있는 문을 뚫고 들어오셔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입혀주신 것이 바로 평강이다. 예수님은 이제 영으로 당신의 백성들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사망의 두려움을 쫓아내고 생명의 평강을 선물하여 평강과 은혜를 충만히 채우주실 것임을 제시하셨다. 이제 주님은 육신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우리 마음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비로소 평강을 누리게 되며, 그 평강은 예수님 자신이기에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주 예수 사랑과 평강에서 끊어낼 수 없음을 제시하여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라고 그분과 하나로 연합된 상태가 바로 ‘평강’임을 제시하여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라고 말씀하셨다. 그 평안은 예수님이 피의 대가를 지불하여 아버지와 화목을 이루어 주심으로 영원을 누리는 생명이며, 이제 그분이 평강의 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영원히 하나로 동행하는 그 상태가 바로 평강임을 제시하셨다. 그리하여 바울은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며”(8:6),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8:15)고 말한 것이다.
평강은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시다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님은 우리 죄인의 모든 죄를 사하시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으며,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영화로운 아버지의 아들로 새 창조를 일으키기 위해 부활하셨으며, 아버지와 화평을 이루신 그 영원한 평강을 입혀주시기 위해 두려움으로 굳게 닫은 문을 뚫고 제자들 안으로 들어오셔서 자신의 못 자국을 보여주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 20:19-20). 주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을 부어주시는데 그 평강이 바로 십자가임을 계시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손자국과 창으로 찔림을 받은 옆구리를 내밀어 보여주셨다. 이는 하늘나라의 평강은 오직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믿고 영접하며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성도만이 하늘의 평강을 소유할 수 있음을 제시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부활하신 평강의 주를 영접하자 이내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하는 평강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요 20:20).
평강은 예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서 화평을 이루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평강을 입혀주셨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은혜의 덮음과 빛의 임재가 없이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그 자체이며, 가시와 엉겅퀴와 같은 죄로 뒤덮인 죽음의 상태이며 참 평안이 없다. 그리하여 만물을 소생하시는 생명과 평강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생명으로 빛으로 평강으로 오셨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화평의 소유자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화평을 이루어 주셨다.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해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 하나님께서는 속죄,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에 대한 값을 치르시고 자신과 화목을 이루심으로, 예수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 여겨주시는 새 생명으로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이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8:10).
예수그리스도는 본체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며 평강의 왕이시다.” 자신의 피로 영원한 화목을 이루어 주셨기에, 이제는 육신으로 가 아니라, 자신의 본체이신 영으로, 즉 성령으로 우리 안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하나로 동행함으로 성도의 삶 자체가 바로 ‘평강’임을 제시하셨다. 그 평강은 육체의 얽매임이 아니라 내 영혼이 하늘나라 평강을 누리는 자유함이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을 입은 자는 이제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니라”(8:14).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된 것과 같이 그분 또한 우리의 소유가 되는 연합이 바로 화평과 평강임을 제시하셨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 20). 그러므로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우리 영혼에 부어진 그리스도 안에 함몰되어 하나로 살아가는 사랑의 연합이며 모든 지각에서 뛰어난 평강이기에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져 나갈 수 없다고 우리 성도를 위해 바울은 외쳐주고 있다(8:35-39). 그분이 친히 내 안에 ‘평강의 왕’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사망을 삼켜버림으로 내 영혼이 누리는 평강에는 두려움이나 걱정, 근심, 불안과 같은 육신으로 겪는 것들이 있을 수가 없음으로 바울과 같이 그 어떠한 환경과 상황과 조건에서도 하늘의 평강을 누리는 성도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는 사람이 감당치 못하는 고백들이 터져 나오게 된다.
왜 이 세상에는 평안이 없다고 말하는가? 육신이 추구하는 평안이란?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본체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창 1:2), 즉 어둠과 죽음의 상태이며 처음부터 빛과 생명과 참 평안이 없다는 것을 창세기 시작부터 제시하셨다. 참 평안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며, 오직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평강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입혀지는 생명임을 제시하셨다. 이 세상은 잠시 사단이 공중 권세를 잡고 있음으로, 첫 인간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은 죄의 종이 되어 죄의 지배를 받고 있음으로, 인간 삶 자체가 바로 지옥 같은 고생과 파멸의 연속이고 지속이며, 모든 인간은 자신들이 토해내는 가시와 엉겅퀴와 같은 죄악 때문에 근심, 걱정, 염려, 불안, 두려움의 속수무책으로 허무한 인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모든 인간은 악인이며 평강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48:22). "패망이 이르리니 그들이 평강을 구하여도 없을 것이라"(겔 7:25).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은혜의 덮음과 빛의 임재가 없이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 그 자체이다.
평안은 이 세상 육신이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상황과 조건과 풍유함과 부유함과 힘과 노력으로 얻어지거나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일시적으로 육체의 평안을 누린다고 하여도, 그 평안은 조건과 상황과 환경이 변경되면 즉시 안개처럼 사라지며, 나보다 강한 자가 오면 즉시 빼앗기는 전쟁을 겪게 됨으로 다시 더 큰 파멸과 고통으로 죽음의 공포에 떨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평안은 내 손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죽은 영이 살아나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으로 입혀지기 때문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8:9), 그러므로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절대로 빼앗기거나 변경되거나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입혀지는 영적 평안이다. 질병과 가난과 극한 상황과 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내 영혼이 누리는 평안이기에 빼앗기는 일은 절대 없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라고 환난 속에서도 주님 안에서 평강을 누리게 하시며, 바울은 그 평안은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빌 1:2) “생명이며 평안이며”, "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8:6,9)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안은 내 영혼에 부어주시는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로 동행하는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내 영혼이 누리는 하늘나라 평안이며, 그 어떠한 상황과 조건에서도 막힘이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으로 누리는 평강이다. 그 평안은 힘으로 능력으로 돈으로 대가를 지불하여 얻어지는 육체의 평안이 아니다. 그러한 평안은 온갖 거짓과 더러움과 기만과 권력과 힘과 폭력으로 얻었거나 빼앗아 가진, 죄로 물든 거짓과 타락과 패역으로 멸망을 자초하는 헛된 평안이기에 불안과 근심과 두려움으로 누릴 수가 없다. 그런데 슬프게도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평안을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원하는 재물이 채워지고, 가난에서 벗어나고, 질병이 없고, 고난이 없고, 문제가 없어야 하고,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평안’이라고 인식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 상태는 심히 부패하고 더럽고 사악하기에, 참 평강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함으로 찾는 자가 없으며, 이 세상에는 아예 평강이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8). "패망이 이르리니 그들이 평강을 구하여도 없을 것이라"(겔 7:25).
이 세상에 평안이 없는 이유는?
이 세상은 인간 자신들이 끊임없이 토해내는 욕망의 배설물 같은 역사이며, 얼마나 추악하고 더럽고 허무한 것이며,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지를 인간은 알지 못한다. 오로지 자신들의 야망과 욕구를 채우는데 혈안 되어 있기 때문에 참 평안을 아는 자도 구하는 자도 없다(사 59:8, 겔 7:25). 왜냐하면, 인간이 생명과 평화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며, 스스로 멸망의 웅덩이를 팠기 때문이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 즉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고 웅덩이를 팠는데 그 웅덩이는 밑이 터졌기에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헛되고 헛된 고생으로 쉼과 평안을 누릴 수 없다는 말씀이다. 분명히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 세상의 기반을 ‘혼돈과 공허와 흑암’(창 1:2)으로 정하셨으며, 인간의 타락과 함께 가시와 엉겅퀴로 이 땅을 저주하셨으며, 타락한 인간을 죽음으로 정하셨다(창 3:17-19). 즉 이 세상 토대가 바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며, ’가시와 엉겅퀴’로 넘치게 차 있으며, 진노의 심판을 자초하고 있다. 인간은 그 마음이 사악하여 자신의 부모 자식마저도,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오직 자기 존재 확장과 가치 향상과 성공과 욕망을 실현하는 힘과 세력으로 인식하고 자기중심으로 끌어들이는 울타리를 쌓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가 최초로 행한 일이 바로 흩어진 것을 하나로 모아 바벨탑을 쌓아서 평화의 나라를 세워 하나님과 동등함을 시도한 일이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분쟁이라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분쟁이며... 검을 주려 왔노라”
온갖 죄악으로 차고 넘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 있는 이 세상에는 평화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오셨음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2:49-51).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로 뭉치는 세계 평화를 이루려 오신 분이 아니시며, 오히려 분쟁케 하려고 ‘불을 땅에 던지려 오셨음’을 자신이 받을 십자가 죽음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이 세상에는 평화가 없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이 세상은 인간이 토해내는 죄악으로 끊임없는 분쟁과 분열과 전쟁의 연속으로 심판을 자초하고 있으며, 오직 당신에게 속한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만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끄집어내는 분리로 새로운 창조를 일으켜 당신 안에서만 생명과 평화를 입혀주실 것임을 제시하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부활하신 후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보여주시지 않으셨으며, 모든 사람에게 평안을 주시지 않으셨다. 오직 당신의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셔서 자신의 평안을 입혀주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라고 세상이 추구하는 거짓 평안과 주님이 선물로 제자들에게 주시는 참 평안을 구별하여 말씀하셨다.
분명히 이 세상 속에서는 평안이 없음으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분쟁과 검으로 오셨다고 선언하셨음에도, 존재하지 않는 무슨 평화와 평안을 찾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로 뭉치자고 종교 통일을 주장하며, 평화를 위하여 빛과 소금의 역할로 충성과 봉사와 구제와 헌금으로 기여하라고 양들을 미혹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양은 자신들의 가치와 위상과 이름을 높이는 상업용 양일뿐이다. 무조건 많이 끌어모아 정크푸드(Junk food)를 많이 먹여 뇌의 기능을 상실하게 하고 살만 찌워서 자신들의 존재 확장과 성공의 자본으로 사욕을 채워주는 ‘돈’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르기를,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렘 8:11).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렘 23:17).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시리라 하나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거짓 선지자들을 보내지 아니 하였다’(렘 14:13-14)라고 말씀하시며, 백성들의 마음을 허탄하게 만드는 거짓 선지자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치실 것이며, 아예 돌로 쳐 죽이라고까지 말씀하신다 (신 13:5,10, 렘 23:30-32).
오늘날도 똑같이 교회 강단에서 이 세상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와 십자가 보혈과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은혜의 복음을 들을 수가 없다. 반대로 인간들의 탐심과 욕망을 채워주고 존재가치를 향상시켜 주는 인간들의 구미에 맞춘 재물의 번영과 명예와 육신의 안일함과 형통을 축복과 평강으로 둔갑하며, 거짓 계시와 복술과 이적들과 같은 허탄한 것으로 은혜와 평강을 왜곡하며, 율법을 지켜 행하여 축복과 평안을 쟁취하라고 망령된 설교를 하고 있다.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향하여 양을 늑탈하고 해치는 삭군, 절도, 강도이며, 그들의 목적은 바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 요 10:1-12)라고 질책하셨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인 머리수 하나하나가 자신들의 성공과 이름과 영광을 쟁취하는 힘과 세력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평안의 가치를 만사형통, 권력, 명예, 이름, 힘, 재물, 건강, 향락에 둔다. 왜냐하면 인간은 절대로 자신이 부인되고 삭제되는 십자가 원리로 생명과 평안을 누리는 참 진리를 알 수도 인식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인간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고생이며’,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6-18)라고 지적한 것이다. 이 세상은 하늘의 평화로 오신 평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였고, 이 세상 어둠을 더욱 좋아하여 평강의 빛으로 오신 메시아 그리스도를 죽도록 배척하고 대적하고 멸시하고 핍박하여 죽여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과 하나님의 영이 없는 자들에게는 절대로 생명과 평안이 없다는 것이 바울의 결론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8:6),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9).
바울이 살아낸 평강의 삶
바울은 자신을 항상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 불렀다. 즉 예수에게 속한 자로 살아가는 이유와 근거와 존재가치를 오직 예수에게 두었기에 자신을 ‘예수께 잡힌 자’(빌 3:12)로 오직 그리스도의 종으로 존재가 됨을 자랑한 것이다(고전 15:10). 바울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와 존재 목적과 모든 소망이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이심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기에, 육신이 만신창이 되고 쓰레기 취급 당하고 조롱거리가 되고 육체에 가시를 안고 올바른 정신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었지만, 그 어떠한 고문과 환난 속에서도 영혼이 누리는 참 평안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기뻐하며 감사의 삶으로 “나를 본 받으라”(빌 3:17)라고 우리의 본이 되어준 것이다. 그는 복음을 위해, 40에 한번 감한 매를 5번, 세 번 태장, 돌 맞고, 배가 파손하고, 강도와 동족의 위협, 헐벗고 굶주리고 뼈가 부러지고, 피투성이로 죽은 시체로 버려지는, 인생에 한번 겪어도 평생 트라우마로 시달리는 그러한 끔찍한 고난을 쉼이 없이 10년 넘게 견디어 낸 것이다(고후 11: 24-28). 그럼에도 성경 전체에서 환난을 가장 많이 겪어낸 바울이 감사를 가장 많이 한 것이다. 신약에서 “감사” 하는 구절이 64번 나오는데 48번이나 바울의 서신에서 나오고 있으며, 바울의 삶 자체가 바로 찬송과 기쁨과 감사와 평안이었다. 그는 자신의 13 서신에서 단 한편도 빠짐이 없이 찬송과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평강을 제시하고 있다. 특별히 자신을 헐뜯고 천대하고 무시하고 배척하고, 문제와 분열이 가장 많은 에베소 교회, 고린도 교회, 로마교회의 성도에게는 책망과 원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찬송과 평강을 빌며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권한 것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3-4, 웹 1:2-3, 롬 1:7-8, 빌 1:2-4, 골 1:2-3).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어주시는 그 하늘나라 평강과 은혜를 감사하며 기쁨으로 누리기를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한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과 찬양과 감사와 기쁨을 누리게 되는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다. 첫째,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모든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려 주셨습니다”(엡 1:3 현대인 성경).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이미 하늘의 모든 영적인 복을 받았다. 그 받은 복을 믿음으로 누리는 자는 바울의 삶과 고백과 같이 그 어떠한 역경과 환난 속에서도 영혼의 평안을 누림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며 기뻐함이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성도에게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현실이 아니라, 내가 돌아갈 영원한 집,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끝나면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는 소망이 현실이기에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8:5)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 “그러므로 너회가 그리스도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영적인 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영원한 나의 주로 받아 그 안에 생명의 뿌리를 박았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이제도 전에도 내일도 나와 동행하여 나를 강하게 붙들어주시는 그 사랑의 손길을 믿는 믿음으로, 내 영혼이 누리는 평강이며, 기쁨이며, 감사임을 제시한다. 때문에 평안은 믿음의 열매이며, 환경과 상황과 조건이 아니다.
바울과 같이 평생을 온갖 수고와 환난으로, 감옥과 매 맞음과 굶주림과 멸시와 조롱과 수치로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은’ (8:36) 취급을 당하면서도 한길같이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은, 하늘나라 모든 신령한 복을 이미 받은 아들의 신분으로,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내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이며, 천지가 없어져도, 사망이 나를 삼킨다 할지라도,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 하나로 동행함을 믿는 믿음으로 곧 이루어지는 하늘나라 소망에 사로잡혀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윗의 고백과 같이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다”(시 23)는 사실을 믿으면, 그 어떠한 사망의 골짜기도 푸른 초장으로 물가로 쉼을 얻는 평안을 누릴 것이며, 나를 잡아 삼키려고 하는 원수 앞에 밥상을 차려줘도 그 맹수 앞에서 오히려 하나님이 차려주신 은혜의 밥상으로 보이게 됨으로 내 잔이 충만하게 넘침으로 두려움 없이 여호와로 인하여 마음의 평안과 기쁨이 넘친다는 고백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푸른 초장에 누워있고, 쉴만한 물가에 있고, 내 주위에 내 생명을 해하려고 달려드는 맹수나 원수가 없다 하여도, 경제적으로 풍유하고 육체가 강건하고 형통한 삶을 누린다고 하여도, 나는 늘 불안하고 두렵고 평안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끝없는 수고와 대가를 내가 지불하여야 하고 그로 인한 근심과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이 나를 삼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바울의 고백과 같이 비록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동행하는 그 위대한 사랑이 나를 강하게 붙들고 계심을 믿는 그 믿음이 마음의 평강과 감사와 기쁨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롬 14:7). 거듭난 성도의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잉태된 그리스도에게 속한 생명이며, 때문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라는 사실이 믿어지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시 23:1)라는 그 사실이 믿어지면, 내 영혼은 평온하다는 고백이 터져 나옴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성도가 추구하는 영적 ‘평안’이다.
성도가 추구하는 참 평안이란?
평안의 샬롬은 내 손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에 부어지는 내 영혼이 누리는 생명이며,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입혀주시는’ 하늘나라 평안이다. 때문에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어떠한 것으로도 죽음이라도 절대로 빼앗기거나 없어지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그 어떠한 환난과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원수와의 싸움과 전쟁 중에서도, 멸시와 조롱과 핍박과 죽음의 앞에서도, 가난과 질병 속에서도, 상황과 조건과 대상과 상관없이 내 영혼이 누리는 평안이며, 때문에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내 영혼에 부어주신 생명의 평안과 사랑을 빼앗아 갈 자가 없음을 바울은 자신의 삶으로 외쳐주고 있다(8:35-39).
하늘나라의 참 평안을 누리는 성도는 육신은 이 세상 속에서 끝없는 고난과 시험과 갈등과 좌절과 실패와 애통과 조롱과 멸시와 같은 곤고한 시련을 겪게 된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내려오셨다. 그러나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역사 속에서는 온갖 멸시와 조롱과 배척과 천대와 핍박과 같은 고난을 받으셨으며, 누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때리고 학대하여 십자가에 못을 박은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행사하실 수 있는 모든 능력과 권능과 권세를 다 내려놓으시고, “종의 형체”로 오셔서 종의 삶을 살아내셨으며, 인간으로서 모든 시험과 고난과 고통을 당하셔서 성도가 살아갈 참 평안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평안은 이 세상의 것으로 내 육체에 무엇인가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비워지고 나의 존재가치가 부정되는 자기 부인이다. 즉 "몸은 죄로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다"(8:1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즉 나라는 존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에 이제 더는 나를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내 안에 뚫고 들어오신 그분의 영으로 태어난 새사람 그리스도의 신부로 그분이 이끄시는 십자가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가게 됨을 제시하고 있다. 내가 삭제당하고 그분의 영으로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그 새사람의 부활이 곧 화평과 평안임을 제시하셨다(요 20:19).
그러므로 십자가 피의 대가로 평안을 누리는 성도는 이제 육체로 사는 육신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9).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8:13-14)라고 성도의 정체성을 제시한다. 하나님 대척점에 있는 ‘나’라는 자아가 반드시 죽어야 만이 화평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주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라고 날마다 살아가는 십자가 자기 부인의 삶을 제시하여 주셨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향한 철저한 순종과 철저한 자기 부인과 십자가 죽으심으로 평화를 이루어주시고 평화의 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셨다. 그러므로 그분이 우리를 이끌고 가시는 평강의 삶이란 바로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을 나타내는 순종의 삶이다. 고백하기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사는 성도는 세상에서는 죽은 자이며, 또한 이 세상도 성도에게는 죽은 세상이다. 이를 바울은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8:10), 즉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성취로 하나님과 화평케 된 자는 이제 더는 자신을 위해 사는 세상 사람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삶으로 예수그리스도만을 나타내는 영적 존재임을 제시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갈 5:24) 때문에 실제로 육적 자아가 죽는 십자가 삶으로 내 영혼이 평안을 누리게 됨을 제시한다.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후 5:17)라는 탄식으로 내 자아의 죽음을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옛사람은 나 자신만을 사랑하는 애착과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집착을 나의 존재가치로 붙들고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죽어도 이러한 집착과 애착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평강의 삶을 살 수가 없다. 하늘의 평안을 누리는 자는 자신의 주체성이 완전히 삭제되는 육적 자아의 죽음을 통과하게 된다. 내가 죽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그분과 하나가 되는 그분이 나의 주체가 되는 삶이 바로 ‘평안’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살아내신 화평의 삶은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여 한 알의 밀이 되어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은 희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로 인도받는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육적 자아의 죽음을 실제로 살아내는 환난을 겪게 된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3-5)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영광스러운 소망을 품고 환난과 인내와 연단을 즐겁게 여길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영혼에 부어주신 영적 평강을 믿음으로 누리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가졌고,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주이시며, 나의 목자 이심을 믿지 못한다면, 그 영혼은 참 평안을 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마음과 그 바라보는 눈은 하나님을 등지고 이 세상 현실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있는가?” “왜 하나님은 나를 버려두시는가?” “왜 나의 고난을 침묵하시고 일하지 않으시는가?” “내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 이와 같은 끝없는 “왜?”라는 질문들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신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눅 18:8),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6-27)라고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셨다. 그러므로 성도가 추구하게 되는 평강의 삶은 상황과 환경과 조건과 대상과 상관없이 내 영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누리게 되는 사랑의 연합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평안을 누리는 자는 “무어든지 참되며 무엇이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라고 하나님 앞에서 그 순전하고 깨끗하고 정직하고 경건한 믿음으로 사는 자임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