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영적 계시

로마서 (8:14-15) 종의 영과 양자의 영 / 바울은 왜 하나님께로 난 자를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일까?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4. 6. 8. 03:38

롬 8: 14-15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영’ : 바울은 성령을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 부른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진리의 영’, ‘보혜사’라 부르시면서 그분이 다시 우리에게로 오실 것이며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요 14: 18).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 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6-17). 이와 같이 그분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 속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성취하셨다. 즉 예수님은 육신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자신의 영으로 부활하셨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그분에게 속하여 하나가 되는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아들로 탄생시켜 주셨으며, 하나님의 아들에 합당한 자로 빚어 가신다. 매일 나와 하나로 동행하시면서 나의 모든 것을 주장하시고 간섭하시며,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거룩한 아들로 다듬어 가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24). 이를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증거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들 / 말씀이 곧 하나님의 영이시다

첫째,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로 함몰된 자이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은혜의 특권을 누리는 영적 존재이다. 이 세상 육신으로 살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 아들로 탄생한 그리스도에게 속한 하나로 함몰되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됨으로,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며’(고전 12:27), ‘그리스도는 교회와 성도의 머리이시다’(엡 1:22, 5:22-23). 지체는 머리가 명령을 내리는 대로 움직이는 전폭적인 순종으로만이 생명이 유지된다. 그러므로 성도와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절대적 의존적 존재이며, 지체는 머리가 내리시는 주권과 명령을 침범하거나 거부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영의 인도를 받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나간 죽은 시체와 다름이 없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성도와 예수그리스도의 하나 됨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5).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자이며, 그들만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8:14).

두 번째로, 하나님의 영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 말씀이 곧 예수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은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고, 말씀(성령)으로 잉태하심으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이다”고 선포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그분은 이 세상에서 말씀으로 기적과 능력을 행하셨고, 말씀으로 죽은 자를 살리셨고, 말씀으로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라고 예수님 자신이 곧 말씀임을 제시하셨다. 말씀이 곧 생명이시기에 말씀에 대한 거역은 곧바로 생명력에서 끊어져나가는 죽음임을 첫 인간 아담의 불순종으로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말씀을 주셔서 말씀으로 역사하신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결혼언약을 맺은 증거가 바로 시내 산에서 받은 십계명 말씀이다. 하나님은 율법 말씀으로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시며 알리시며,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아내로 아들로 살아가는 기준과 원리를 제시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하시며 거룩하시며 의로우신 말씀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며 자신을 아는 일에 힘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와 반대로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지켜 행하는 일에 열심을 부렸으며, 지킬 수 없게 되자 하나님을 배신하고 대적하며 이방신을 줄기차게 숭배하는 악을 행하며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렘 2:13). 이스라엘은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심을 영으로 읽어내지도 깨닫지도 못하여 전적으로 타락함으로 율법 말씀이 그들에게는 오히려 심판의 근거가 된 것이다.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

셋째, 하지만 말씀을 영으로 받아들이고 생명으로 간직하고 생명으로 먹은 자가 있으니 그들이 바로 말씀으로 거듭난 천국의 아들들이며(마 13:38), 그 말씀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는 생명이 된 것이다(시 19:10-11, 겔 33:15, 요 6:63). 사도 요한은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요 1:1)고 선포하였다. 그분은 이제 말씀으로 성도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말씀으로 전체 삶을 주관하신다. 다윗의 고백과 같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다”(시 119:105) 함과 같이 주의 말씀은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양식이며 생명이 됨으로, 시편 1:1-6의 말씀으로 인도를 받는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 말씀으로 사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신앙고백이다. 성경 말씀은 곧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우리의 본향 하늘나라에 관한 영생의 말씀이다. 오직 성경말씀만이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미래를 약속하신다. 창세기 시작에서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역사가 펼쳐지지만, 계시록에 가서는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이 완전히 삭제되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의 빛과 생명으로 충만한 영원한 나라가 펼쳐진다.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구원과, 이 세상 시작과 종말, 죽음과 생명, 지옥과 영원한 하늘나라를 영적 실상과 역사적 현실로 정확하게 점진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서 끝내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은혜와 열심을 기록함으로 말씀을 떠나서는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흙을 입은 육신은 이 세상에서 몸이 사는 동안 연약함과 타락한 본성으로 수시로 넘어지며, 실수하며, 죄의 유혹에 빠지며 법죄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는 성도는 성령님의 가르침과 깨우침과 책망과 생명의 말씀이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기 때문에 이내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서는 은혜의 특권을 행사하게 된다. 다윗의 고백과 같이 우리는 모태에서부터 잉태된 죄인이기에 나오는 것은 오로지 죄일 뿐, 자신을 정결케 하는 능력도 기능도 없다. 본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이 부패”(렘 17:9) 함으로 “열린 무덤”과 “거름 더미” 그 자체이기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 (8:6-7)라고 마음 자체가 악으로 말미암아 “사망이다”고 선고한다. ‘거름 더미’에서 건지심을 받은(삼상 2:8) 우리는 오직 그분이 입혀주시는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며’(롬 3:24) 오직 은혜로 사는 자들이다. 성도는 매일 육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과 무지와 어리석음과 한시라도 죄의 생각을 떨쳐버릴 수없는 처절한 실패와 좌절과 절망을 경험하면서 더는 자신의 육신을 의지하지 않게 되며, 그럼에도 내 안에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들고 계시며, 당신의 자녀로 다듬어 가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인내와 온유의 사랑과 내 안에서 일하시는 열심을 지켜보며, 믿으며,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는 순종으로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자들이다.

예를 들면, 수천에 달하는 군대 귀신이 들린 자가 어찌 자신의 힘으로 그 많은 귀신들을 쫓아낼 수가 있겠는가! 눈먼 자, 귀머거리, 38년 된 앉음뱅이, 살이 썩어서 눈코가 떨어지고 손발이 떨어져 나가는 흉측한 문둥병에 걸린 자, 완전히 숨이 끊어진 죽은 자가 어찌 자신의 힘으로 깨끗케 할 수가 있으며 살아날 수가 있겠는가! 그들에게 어찌 율법의 행위가 필요하며 어찌 자신을 의롭게 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바로 그런 죄의 증상들을 가진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들이 아니었는가!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같은 은혜가 입혀졌기 때문이며, 우리의 영을 굳게 붙들어 주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 한없는 은혜를 아는 성도이기에 더는 육신이 원하는 탐심과 욕망과 정욕을 채우는 자로 살아갈 수 없도록 하나님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강권적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나의 모든 삶을 간섭하셔서 오직 나만을 위해 살던 육신의 끈질긴 습성과 못된 행실들을 죽이는 일들을 차곡차곡 일으키신다. 내 영이 살기 위해 육의 행실이 죽는 죽음을 매일 겪게 됨으로 바울은 우리 성도를 위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외쳐준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는 영적 존재로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아들로 다듬어가는 것이며,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정하신 뜻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선포한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종이란? 바울은 인간 자체를 ‘종’이라 부른다(롬 6:17).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라고 죄와 종을 동일한 하나로 말씀하셨다. 죄가 육신을 주관하는 한 덩어리이기에 육신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곧 죄이기 때문이다.

첫째, 죄의 종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그 영이 죽고, 육신으로는 죄인으로 태어나 죄만을 행하는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아래 있는 상태이며, 이를 바울은 ‘무서워하는 종’이라고 말한다. 첫 인간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이 땅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이 죄의 종이 되어 즉 죄와 한 몸이 되어 죄만을 쏟아내어 스스로 사망에 이르는 심판을 이미 받았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죄와 사망이 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할 그 어떤 능력과 기능도 방법도 전혀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종’ 그 자체이며. 그 결국은 영원한 사망이다. 이르기를,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6:16). ‘전에는 죄의 종이 되어 사망에 이르렀으나’(6:20-21), “허물과 죄로 죽었다”(엡 2:1)라고 죄의 종이 곧 사망이다고 바울은 확실하게 선고한다.

둘째, 율법의 종이다. 바울은 율법을 무서운 남편으로 묘사하고, 우리를 그 남편에게 묶여있는 ‘종’으로 표현한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롬 7:2).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7:4) 라고 율법의 종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남편이 죽거나 아니면 여인이 죽는 ‘죽음’임을 제시한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6-7). “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율법에 묶여 종으로 살던 옛 죄인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흠도 점도 없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으로 부활하였기 때문에 죄가 더는 성도를 주관치 못하며, 그러므로 법과 종에서 벗어났다고 선포한다(롬6:14). (8:1-2)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란? 성도는 종의 영에서 영원히 벗어났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종의 영” 과 “양자의 영”은 상반되는 악한 영과 성령의 대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기 전 우리 옛 사람의 상태를 말한다. 즉 우리의 육신은 죄와 법에 묶어서 종으로 살던 자들이었으며, 죄로 인한 형벌의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무서운 심판주로 섬겼으며, 율법 말씀이 지켜야하는 의무로, 무거운 짐으로 속박이 되었고 정죄와 심판의 근거가 된 것이다. 첫 인간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하나님과 함께 에덴동산을 거닐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사단의 거짓말에 유혹을 받아 사단이 주관하는 죄의 종이 되자 이내 자비하신 하나님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후손인 우리도 우리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엄중한 심판과 진노 아래에서 “무서워하는 종의 영으로” 살고 있었다. 이를 바울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았다”라고 말한다. “종의 영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잠시 인간을 율법아래 가두어 두셔서 종의 삶을 먼저 살아내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 때에 이스라엘이 아직 형성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세상 애급에 갇혀 430년 종살이를 먼저 겪어야함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430년 후 출애굽으로 이스라엘을 세상 죄를 상징하는 애급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다시 율법아래 가두어 두셨다. 이를 바울이 이르기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 23-26).

 

이와 같이 율법 아래 가두어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게 하신 것은, 죄를 깨닫고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함이다고 확실히 제시한다. 먼저 율법을 주셔서 종의 영을 받게 하셨으며, 목적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함이라고 밝힌다.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7).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죄로 인한 형벌의 두려움에서 벗어났으며, 종의 영에서 영원히 벗어났다. 이르기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 19-20). 나의 모든 죄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완전히 끝났다. 그러므로 지금의 나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잉태된 의인이요, 아버지의 영화로운 아들이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자”(벧전 2:24)로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하나로 함몰되었음으로, 다시는 율법으로 정죄 받거나 심판받는 일은 없다고 선포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8:14).

 

그러므로 성도는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여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법적조치가 이루어짐으로 아들로서의 권세와 권리를 행사하는 아들의 영을 받았음으로,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다시는 “죄와 사망의 법”아래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즉 두렵고 속박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율법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강력하게 외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이 위대한 사실과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자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루어주신 그리스도 은혜 안에 있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자이며, 자신을 종으로 꽁꽁 묶어놓고 자유를 구하며, 율법을 지켜 행하는 종으로 자해하면서 은혜와 평강을 구하는 자이며, 여전히 “무서워하는 종의 영”으로 사는 자이다. 나아가서 죄에 빠질 수밖에 또한 실수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육을 한탄하고 정죄하면서 행위의 열심을 강요함으로 율법이라는 사슬에 묶여 종으로 살기를 자초하는 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는 것이다. 그분은 단 한 번의 제사로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도말하시고,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하심으로(히 10: 8-14) 종에서 해방 받았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가 그분을 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끝까지 사랑하시며 인내하시고 매를 들어가면서도 반드시 당신의 성품을 닮은 영광스러운 아들로 완성하신다.

하나님께로 난 자를 바울은 왜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일까?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령으로 “하나님께로 난 자”(요 1:13)를 굳이 “양자의 영”을 받은 자라고 말하는 것은 율법과 은혜의 복음을 구별하기 위함이다. 무서워하는 율법에 묶여서 종으로 살던 자가 완전히 해방 받아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아버지가 입혀주신 권리와 특권과 지위를 누리게 된 은혜와 신분을 강조하기 위해 특별이 “양자의 영”이라 부른 것이다. 우리 옛 사람은 죄와 율법에 꽁꽁 매어 종으로 살던 자들이며,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며. 아무런 살 가망이 없는 하나님과 단절된 생명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런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와 부활의 살을 먹음으로(요 6:53-57)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 생명을 얻어 아들의 신분으로 모든 특권과 권리를 누리게 되었음으로, 종에서 아들이 된 신분의 전환, 죄의 종에서 속량하여 주신 그 구원의 은혜를 강조하여 “양자의 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양자됨은 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거듭나야함으로 ‘양자’ 뒤에 “”을 붙여 “양자의 영”이라고 확실히 밝힌다. 율법에 묶여서 종으로 살던 구약시대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아 영생을 살게 된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시대를 구별하여,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15절)라고 말한 것이다. 사도 요한도 율법과 은혜를 구별하여,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 라고 선언한다.

우리의 육신은 타락하여 죄와 법에 묶인 종으로 즉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었기에 바울은 “불순종과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들이다”(엡 2:1 현대성경)라고 선언한다. 첫째,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으며,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신 생명의 피값을 지불하셔서 죄에 종으로 묶여 있는 나를 사셨다는 그 “속량”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말은 곧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다’는 동일한 말이다. 그리하여 그 다음 구절에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16절)라고 말하고, 동일하게 에베소서에서 “그 안에서(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입양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어질 때 성령님이 내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시켜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인을 쳐 주셔야만이 비로소 참 아들이 됨을 제시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6).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참 아들이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권세가 있다고 바울은 동일한 말씀을 하고 있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8:16). 한마디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 당신의 전부를 희생하신 보혈의 피값으로 노예에서 속량하는 모든 법적조치를 치루셔서 입양된 아들의 신분을 가지고 있지만, 반드시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성령의 인치심을 받아야만이 비로소 참 아들임을 바울의 전체 문맥에서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다.

오직 영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하나님의 참 아들이다

첫째: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와 권리와 특권은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자에게만 주어짐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권세가 주어짐을 확실하게 말씀하셨다(요 3:5-6). 영으로 다시 나지 아니하면 아무리 양자로 입양하여 아버지가 가진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리를 몽땅 물려준다하여도 그것은 다만 육으로 행사하는 권세일 뿐 육이 죽으면 모든 것이 허사이며 무익하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육에서 난 것은 육의 죽음과 모든 것이 끝나기에 ‘육은 무익하며’ 오직 영으로, 성령으로 난 자만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양자의 ”은 육의 입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 유업을 이어받은 상속자로 모든 법적 조치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즉 우리의 옛 사람이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진노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와 같은 대조적인 신분과 지위를 설명하기 위해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 양자의 영이 곧 성령임을 그 다음 구절에서 확실히 제시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8:16). 양자 교리는 법적인 행위이다. 양자는 법적 조치가 없이는 아무것도 상속받을 수가 없다. 하지만 친 아들은 아무런 법적 조치 없이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수 있는 아들의 특권을 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양자로 입양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께로 났기 때문이다. 바울은 앞에서 하나님의 영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고 확실히 밝힌다.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9). 그러나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8:16), 즉 너희 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영이 거함으로 성령이 친히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참 아들이다고 인을 쳐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증거하여 주신다는 말씀이다.

둘째: 우리는 입양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있었던 자들이다. 우리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 1:4-5). 이를 나타내어 알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와 닮은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남자 안에 있는 여자를 취하여 내신후 “이는 뼈 중의 뼈여 살중의 살이다”(창 2:23)라고 예수와 성도는 본래 한 몸이었음을 제시하셨다. 아담은 예수의 모형이며, 하와는 우리 성도의 모형이다. 하와가 있기 전에 아담이 먼저 있었고, 하와는 아담의 분신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부터 예수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하나로 있었던 “한 영이며”(고전 6:17),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사랑에서 끊어낼 수도 변경할 수도 없음을 바울은 외치고 있다(8:35-39). 다만 잠시 육신의 타락으로 죄의 지배를 받아 죄의 종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께로 난 참 아들이며, 우리의 영원한 신랑은 예수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본향은 하늘나라이다. 양자는 어디까지나 양자이며 비록 양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다 누린다고 하여도 모양새는 아들이지만 아버지께로 난 참 씨가 아니기에 한 몸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요 1:13)라고 확실히 밝힌다. 혈통으로도, 육적으로도, 의지와 노력으로도, 입양으로도, 모든 것을 배제하여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그분이 나를 낳아 주셔야 만이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입혀진다고 선언한다.

이와 같이 성도는 영적으로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나라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들이다’(엡 1:3-5). 그리하여 예수님은 우리는 본래 ”아버지의 것이었으며, 아버지께로소 온 자들이다”(요 17:6-7)라고 확인하여 주신다. 바울이 증거하기를,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었고, 부르심을 받아 영으로 태어났고, 의롭게 되었고, 영화롭게 되었음으로 그 영광에 합당한 하늘나라 소망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영으로 인도하신다고 말한다(8:14). 그 어떤 조건도 대가도 노력도 없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 1:4-7). 그러므로 우리의 소속지는 창세전부터 시작되며, 영원히 변경할 수 없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이를 바울은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즉 너희는 처음부터 아들이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영을 보내주셔서 그리스도에게 함몰되는 성령의 거듭남으로 하나가 되게 하심으로, 당연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셋째: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택한 족속으로 율법과 제사를 받은 백성들이며, 특히 할레 받음으로 아들의 명분으로 모든 축복과 특권과 권리를 받은 민족으로 자부하며, 하나님을 자신들만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신으로 소유하기 위해 목숨을 다하여 율법과 제사와 할례를 지키는데 열심을 부리며,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다윗의 혈통이라는 우월감과 특권을 내세운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행위를 ‘마귀의 행사’로 매도하고 그들을 ‘마귀에서 난 자식’이라 부름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부정하셨다.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율법을 지킨 자가 아니라 반대로 율법을 범함으로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는다”(롬 2:12).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스스로 쌓는다’(롬 2:5)라고 말한 것이다. 세례 요한도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 우리라”(마 3:7-10) 라고 율법 받은 이스라엘이 실상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저주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절대로 하나님의 참 아들이 될 수 없음을 증거한다.

사도 요한은 정확하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단 한 가지 조건이다. 반드시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하나님의 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령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자들이며,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 거듭난다고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갈 5:6)라고 확실하게 못을 박음으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혈통이나, 할례이나 입양이나, 상관없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입혀짐을 확실하게 제시한다. 율법은 한마디로 ‘죄와 사망의 법’(롬 8:2)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저주아래 있는 자요(갈 3: 10),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에게 두 아내가 있었는데 사라는 자유하는 복음의 모형이요, 종 하갈은 율법의 모형이다. 둘 다 아브라함의 아내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잉태된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은 참 아들이고, 하나는 종에서 나와 종이 됨으로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지 못하고 아버지의 집에서 좇겨나간 아들이다. 율법으로 낳은 자는 종이요 복음으로 낳은 자는 유업을 이어받은 아들이다. 그러므로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참 아들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육신의 할례로 율법을 페하시고(엡 2:15), 오직 믿음으로 은혜를 입어 성령의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 암이라” (갈 2:16).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양자는 육신적 입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를 낳아주신 친 아버지이시며 나는 아버지의 친 아들이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 1:5)함과 같이 우리는 양자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양자로 입양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바울이 증거한다. 양자로 들어간 자는 양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만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가 아니기에 아무리 잘하여줘도 어디까지나 양아버지일 뿐이지 절대로 나를 낳아주신 친 아버지는 되어줄 수 없다. 우리는 창세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며,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으로 잉태된 당당한 친 아들이기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다”(요 1:13)라고 우리 생명의 출처, 나를 조성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밝힌다. 하나님은 당신이 바로 우리를 낳아주신 아버지이심을, 우리가 참으로 당신이 낳으신 아들임을 증거하여 주신다. 이르기를,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사 46:3-4).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사 43:1 새번역). 나를 낳아주시고 지으시고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 당신이시다고 확실하게 선포하신다. “그는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습니다”(약 1:18 새번역).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호 11:4).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다.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시고 지으시고 낳아주신 친 아버지이시다. 나는 어디에서 데리고 와서 키운 자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친히 나를 창조하시고 조성하시고 낳아주신 영원한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양자의 영”은 입양하여 아들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육이 타락함으로 잠시 죄의 종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아래 놓여 있었지만, 이제는 아들의 신분을 되찾았다는 “속량”을 강조하기 위해 “양자”라 부르고, 죄의 종으로 살던 옛사람은 죽었으며, 반드시 죄 없는 새로운 피조물인 아들로 다시 태어나야 함으로 “양자” 뒤에 “영”을 붙여서 “양자의 영”이라고 밝히고 그 다음 구절에서 그 ‘양자의 영’이 곧 성령이심을 확실히 밝혀준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의 잉태가 없이 입양으로는 아들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셔서 자녀로 삼아 주셨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확실하게 못을 박는다 (갈 2:16, 3:26, 엡 2:8, 롬 1:17). 예수님은 분명하게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그분은 육신으로 오실 때 성령으로 잉태하심으로 그분 안에 있는 우리도 성령으로 잉태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입혀주셨다. 양자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잉태된 자가 아니다. 양자가 하나님의 친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만이 아들로서의 권세와 권리와 특권을 영생으로 누릴 수가 있다. 이는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그 어떤 법적 절차도 필요 없이 나를 낳아주셨기 때문에 아들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양자의 영”이라고 말하는 또 다른 의도는, 비록 이 세상에서 아들의 신분을 지니고 살고 있지만, 여전히 이 썩을 몸을 지니고 장차 나타날 몸의 영원한 부활로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이 세상에서 잠시 “양자의 영”으로 사는 자들임을 계시한다. 성도의 궁극적인 소망은 우리 주님이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제자들에게 보이셔서 첫 열매가 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이 썩은 육체를 벗어버리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하여 영원히 하나님의 참 아들로 주님과 함께 영원을 사는 그 소망이다. 바로 점도 흠도 없는 온전한 부활의 몸으로 영광의 소망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예수님 재림의 날이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들도 썩어질 것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영광스런 자유를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신음하며 고통당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성령을 첫 열매로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곧 우리 몸이 구원받기를 갈망합니다”(8:19-23). 이로 보아 바울이 말하는 “양자의 영”은 이 세상에서 육신으로 잠시 사는 동안의 아들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며, 참 아들이 되는 그 순간은 예수님의 재림의 날 온전한 부활의 몸으로 영광의 아들이 되는 그 소망이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재림이 학수고대한 하늘나라 소망이 이루어지는 영광의 순간이다. 성도에게는 영광스러운 아들과 신부의 단장으로 아버지와 신랑을 맞이하는 혼인 잔치가 이루어지는 순간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영광의 순간이며(계 21:1-2), 바로 영광스러운 아들로 영원히 천국의 영생을 누리는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된 자로 몸의 부활을 소망하며 잠시 이 세상을 사는 나그네이다. 바울의 말대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 재림의 예수가 오시는 그 영광스러운 날에는 반드시 영으로 거듭난 자만이 들림을 받게 된다. 재림 전에 죽은 자도, 살아 있는 자도, 부활의 몸으로 살아나게 됨으로, 끝까지 환난을 인내하며 믿음으로 굳게 서도록 성령님이 우리의 영을 붙들어주신다. 성도는 비록 ‘종일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으로’ 온갖 환난과 곤고와 시험과 핍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혹은 거지 나사로와 같은 무소유로 천대 꾸러기로 산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거하고 있기 때문에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며, 때문에 극한 상황과 환난 속에서도 바울의 신앙과 같이 항상 하나님을 창송하며,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평강의 삶으로 인도를 받는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는 믿음의 감격이 터져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성도는 천국의 백성으로 “양자의 영”으로 잠시 이 세상을 연단과 훈련의 장소로 살아가며, 선한 싸움을 다하는 그날에 신랑 되신 우리 주님이 친히 우리를 영원한 집으로 영접하여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영원한 아들로 영생을 살게 됨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