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영적 계시

로마서 (4:21-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3. 8. 6. 01:16

롬 4:21-25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울은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고 사라의 태도 끊어져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죽은 상태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믿음이 발휘하여 아브라함의 죽은 몸에서 이삭이 탄생됨으로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약속을 의심치 않고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견고한 자리에 서게 되었음을 제시한다. 이는 하나님의 믿음으로 시작하시고 완성하신 결과이기에 ‘의(義)’라고 말하는 것이며, 그 구원의 의가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입혀짐으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겨주셨다고 말한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4:21-22). 그리하여 바울은 아브라함이 입은 ‘하나님의 의’를 정확하게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결론을 내림으로, 아브라함이 받은 ‘의’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의임을 제시하며, 이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탄생하게 되는 복음을 제시한 것이다. 이르기를,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4:24-25).

아브라함이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이 세상을 신으로 삼고 사는 완전히 불가능한 상태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와 주셔서 일방적으로 먼저 ‘의롭다’는 인을 쳐 주시고 복의 근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세워주시는 언약을 일방적으로 맺어주신 것이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1-3). 아직 아브라함이 아무것도 행한 것 없는 또한 할 수도 없는 죄인의 상태에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영적 축복을 먼저 받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든 안 믿든 이는 창세전 하늘나라에서 완료된 묵시이며, 반드시 이 땅에서 성취되는 의로운 구원이기에 아브라함이 죄인의 상태에서 의로운 자로 선택받은 것이며, 의로운 길로 인도 받은 것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진 것이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7).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 예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아 의롭게 되고 영화롭게 되는 인생으로 정해져있음을 제시한다. 아직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인간 역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우리의 죄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도말되고 구원 받아 의롭게 되는 복음이 먼저 예정되어 있었다는 말씀이다. 그 은혜의 복음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셨고,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주셨음을 제시한다. 아브라함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믿는 믿음에 견고하게 세워주시기 위해, 그를 먼저 죽은 자와 방불한 자로, ‘없음’으로 내려가게 하시고, 믿음이 홀로 일을 하셔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4:17)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생명을 주관하시는 창조의 하나님이심을 믿게 하여주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믿음이 아브라함의 겨자씨와 같은 믿음에서 싹이 나게 하시고 성장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조상으로 만들어 내신 것이다. 그 믿음의 절정이 바로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장면이다. 독자 이삭을 희생 제물로 드리면 후손이 끊어지는 죽음이며 별처럼 후손을 주시겠다는 언약이 페하여 지고 하나님은 약속을 어기는 하나님이 된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능력의 소유자이시며 “바랄 수 없는” 불가능함을 “있음”으로 만드시는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4:17)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자신의 인생에서 확실히 체험하였기에,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친히 준비하셨음을 (창 22: 9-14)믿고, 이삭의 심장에 칼을 꽂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르기를,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4:21-24). 믿음이란 바로 자신의 ‘없음’의 정체성을 깨닫는 것이며, 때문에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나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현실에서 바랄 수 없는 사실을 믿게 되는 것이고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것의 실체를 믿는 영적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고전4:18),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보이지 않지만 실상이요 영적 현실로 체험됨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재림과 심판을 믿고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믿음이란 바로 한줌의 흙에 불과한 ‘없음’임을 알고 인정하는 깨달음이며, 그러므로 더는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죄와 허물로 죽은 나는 살리신 예수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믿는 것임을 확실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전체 인생에서, 인간으로서는 바랄 수 없는 일이고,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만은 하실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이심을 현실로 보아 왔고, 체험하였고, 그 능력의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주관하심을 확신하고 자신의 삶을 맡기고 그분의 모든 인도에 순종하는 자기부인과 자기 죽음이 곧 하나님이 받으시는 믿음임을 깨달은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무지하고 어리석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맡기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기 부인의 자리로 내려간 그 상태가 바로 ‘믿음’이라는 뜻이다. 자신이 믿고 바라는 소망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4:17) 하나님이심을 알고 믿는 믿음으로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사는 소망을 이룸으로 의롭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존재, 피조물, 죄와 허물로 죽은 자, 그것이 나의 실존이지만, 그런 나를 찾아와 주셨고, 이 세상 죽음에서 불러내셨으며, 동행하는 삶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셨으며, 그분만이 구원과 생명이심을 믿고 바라고 소유하는 견고한 믿음에 세워 주심을 아브라함의 인생으로 후손들인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이르기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4:18),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죽음에서 생명을 창조하시는 전능하신 창조의 하나님이시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이다

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바울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받은 믿음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결론을 내린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언급한 진정한 의도는 바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구원의 언약이 곧 예수그리스도이시며, 십자가 희생 제물로 성취되었음으로 이제부터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과 생명을 얻는다는 복음의 핵심을 끄집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결론을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4:25)라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내어 주심으로 십자가 구원의 의를 믿는 자는 모든 죄가 사하여져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복음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 범죄함”과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라고 특별히 죄와 의를 대조하여 말씀하신 것은 우리 죄인의 현실과 그러한 죄인을 위해 자신을 내 놓으신 하나님의 의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의롭다 여겨주시는 은혜의 복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이 세상을 다스리는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생기로 살아가는 의존적 존재이며 하나님을 떠나서는 한줌의 흙에 불과한 ‘없음’, 즉 죽음임을 알게 하시는 의도로 선악과라는 금단의 열매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주시기 전에 먼저 다스리고 정복하는 복음을 주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흙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 자체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그 어떤 기능도 능력도 부어지지 않은 티끌에 불과한 ‘없음’이다. 생명의 창조와 다스리고 정복하고 장악하시는 능력의 소유자는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시며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만 생명의 번성과 다스림이 있음을 제시한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 땅 끝까지 당신의 자녀들이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며, 그들과 함께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선과 악을 판단하는 심판주로 이 세상을 통치하실 것임을 미리 계시하여 주셨다. 인간은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죄를 쌓아서 죽음으로 끝나는 ‘없음’의 먼지이다. 반드시 이 세상을 향하여서는 죽은 자로 없음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며, 새 생명의 창조가 일어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입게 된다.

성경에서 이 땅의 것에 의해 규정된 나를 ‘육’이라 하고, 그 육은 썩어서 흙으로 되돌림을 받는 ‘없음’으로 정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에 의해 규정된 나는 ‘영’이라 하며, 이는 성령으로 거듭난 영생을 사는 생명이며 하늘나라 백성으로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짐을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 바울도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왕 노릇 할 것임을(딤후 2:12) 말하고 있다. 때문에 주님은 “육으로 난 건 육이요. 영으로 난 것 영이다”(요 3:6) 라고 영과 육을 하늘과 땅의 차이로 분리하셨으며, 영으로 거듭난 자는 영생을 사는 자이며, 육으로 사는 자는 죄와 죽음에 속한 자로, 이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세상을 사는 존재임을 제시하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육은 역사 속 인생에서 죽음으로 점철되기 때문에 성도가 추구할 것은 육을 위한 이 땅의 썩은 것들이 아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검으로 이 땅과 관계 맺고 있는 육적인 것들을 끊어내는 일들을 하시며, 그것이 바로 날마다 살아내는 자기부인과 자기죽음의 십자가 삶임을 주님은 제시하여 주셨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성경은 역사와 인생이 시작되기도 전에, 죄라는 개념을 거론하고 있다. 창세기 1: 2절에서 우주의 원시 상태를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이 세상 원적 상태가 바로 ‘혼돈(무질서)과 공허(없음)와 흑암(죽음)’이며, 때문에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 자체가 바로 이 땅의 속성을 따라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혼돈된 상태이며 잠시 살다가 티끌의 없음으로 죽음을 맞게 됨을 알고 깨닫고, 그 옆에 주신 생명나무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지라고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동시에 주셨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탄생의 원리를 가장 먼저 원시적으로 보여준 곳이 바로 창세기 2: 7절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땅에 속한 티끌로 만드셨다는 것은 인간의 본체가 티끌과 같은 ‘없음’이며, 그 죽은 흙에 생기를 부어주셨기에 ‘산 자’가 된 것이며 그 생명은 하나님의 것임을 나타내셨다. 인간은 이 땅에 속한 ‘없음’이며, 그 ‘없음’에 그리스도의 피가 얹어져야 만이 하늘나라 존재가 된다는 것을 첫 인간 창조에서 이미 계시하여 주셨다. 즉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그 부활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와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탄생하여 영원을 살게 되는 복음을 먼저 계시하여 주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영생이시며, 진리이시며,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제시함으로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됨을 선포하셨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그러므로 죄라는 것은 인간이 이 역사 속에서 살아가면서 육체로 범하는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을 어기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교만, 간음, … (롬 1:29-30) 이와 같은 매일 육체에서 뿜어 나오는 것들을 말하는 것 보다는 피조물의 자리 이탈을 말씀하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처럼의 행세를 하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대적하고 죽이는데 까지 간 그 사악한 자기 자리 이탈이다. 없음에서 창조된 인간이 있음의 흉내를 내면서 자신의 존재됨에 스스로 가치를 매기며 신처럼 군립하려는 무지한 교만을 말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진리이시며, 생명이시며, 하늘나라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 실상임을 설명하기 위해 세상과 죄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이고 마귀라는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피조물은 반드시 창조주에 의해 존재가 되고 생명이 되어 하늘나라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로 영원을 살게 되는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가식적이고 허사인 것들이 개념으로 도구로 모형으로 등장한 것이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25)

바울은 4장 전체에서 집요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십자가 복음을 제시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십자가 구원의 의가 범죄한 죄인들에게 입혀짐으로 오직 십자가 피를 믿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다는 불가항력적 은혜의 현실을 아브라함을 예를 들어 설명하여 준 것이다. 바울은 우리의 죄가 하나님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죄의 심각성을 제시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살해하는 극악무도한 죄인이며,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죄인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희생 제물로 오셔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을 박으셨으며, 하늘나라 의인으로 다시 살려내시기 위해 부활하셨으며, 현재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하나로 동행하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로 인정된 영적 현실을 제시하고 있다.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늘나라 의로운 백성으로 세워주시기 위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의 인생에 깊이 개입하셔서 자신을 신앙하던 ‘자아’를 부수고 깨고 죽이는 작업을 하신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는 한, 계속해서 육신에서 뿜어 나오는 추악하고 더러운 죄악들을 경험하면서 ‘나는 불가능한 존재이며 죽어 마땅한 자이며, 예수가 아니면 썩어 없어지는 흙의 존재이다’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인정하는 자기 부인과 자기죽음을 매일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여 의로운 자로 성화의 자리로 올라가 예수님처럼 되자로 가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와 은혜와 믿음은 무효가 되는 것이다. 그 피는 우리의 현재, 과거, 미래의 모든 죄를 도말하신 능력의 보혈이며, 그 피를 의지하여 매일 은혜를 입으면서 긍휼을 구하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이다. 우리의 열심이 하나님의 일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은혜를 입어야만이 사는 것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열심이 어떻게 나를 의롭게 만들어가는 지를 지켜보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6).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열왕기 19:31). 구원 받는 이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데 하나님의 열심이 구원을 이루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로운 열심이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에 인간의 그 어떤 것도 가입될 수가 없기에 구원과 믿음은 은혜로 말미암아 입혀지는 선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8-10).

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일천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총애를 받았고, 세상을 다스리는 왕의 지혜가 주어졌다 (열왕상 3:8-10). 솔로몬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지혜로 하나님의 나라를 모형하는 성전을 짓고, 선과 악을 재판하는 세상 왕으로 세워진 것이다. 그런 그가 죽기 전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 안에 세상 온갖 잡신들을 다 갖다 놓고 거기에다 절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솔로몬이 비록 나라를 말아먹은 망령된 왕이라 할지라도 그 죄가 아무리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행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죄악들을 도말하시는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희생 제물로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오직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아 구원 받게 되는 은혜의 복음을 나타내시기 위해 솔로몬을 왕으로 택하셨고 그의 타락을 허락하심으로, 솔로몬의 인생을 극과 극으로 살게 하심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인하여 그렇게도 타락하고 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당신의 백성들이 죄와 사망의 구덩이에서 살아 올라오게 되는 은혜의 복음을 그러내신 것이다.

솔로몬이 아직 타락하기 전에 먼저 그에게 일천 번 제물을 드리게 하심으로, 그가 드린 제물 즉 예수그리스도의 희생 제물로 모든 죄가 도말되고 그 타락한 죄악에서 구원받게 됨을 계시하셨다. 절대로 일천 번 제사로 소원이 성취되었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로 드려질 예수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제사로 영원한 구원이 이루어짐을 드러내기 위해 솔로몬의 인생이 일천번제로 시작된 것이다. 이르기를,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히 9:12 새번역).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셨고”(히 9:28) 함과 같이 이제는 매번 드리는 일천 번 제사가 아니며 짐승을 잡아 드리는 제사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됨으로’(4:25) 단번에 완전한 제물로 예수의 피가 죄인에게 부어져서 죄인이 저의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의롭게 됨을 솔로몬의 일천번제와 극도로 타락한 우상숭배의 이야기가 등장한 것이다. 그 일천번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린 완전한 십자가 제물을 상징하며 그 제물로 인하여 그토록 타락한 솔로몬의 구원이 대조적으로 그려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림으로 죽어 마땅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제물로 말미암아 이삭으로 부활함을 보여주신 것이다.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계시하고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4:25)라는 깊은 의미이다.

우리는 솔로몬의 이야기에서 인간이란 흙 그 자체로 무가치하고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들이며, 바울이 지적한 봐와 같이,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 3:14-15)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3:10),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라고 정확하게 인간의 실체를 지적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을 가장 비천하고 모든 오물들을 흡수하는 흙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이 땅을 저주하심으로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하셨으며, 가시와 엉겅퀴에서 잉태된 육의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게 하셨다(창 3:17-19). 이 현실을 깨달은 솔로몬이 이르기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 1:2-3), 이 세상에서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리는 호화로운 삶을 살아낸 솔로몬의 마지막 고백은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헛되고 헛된 ‘없음’으로 귀결된다는 깨달음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의 육을 흙으로 만드시고, 다시 흙의 자리로 ‘없음’으로 되돌아가는 ‘죽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그 죽음에서 오직 당신에게 속한 자만 새로운 피조물로 살려내시며, 그 살리시는 방법이 바로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내어주시는 것임을 첫 인간 아담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먼저 양을 죽여서 피를 흘리게 하신 사건(창 3:20-21)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원래의 자리, 흙의 자리로 ‘없음’으로 되돌려 놓으신 후, 거기에서 살려내시며, 그것을 구원이라 하시며, 그 구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저주의 십자가에 못을 박는 방법으로 성취하시며,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옷을 입혀서 의롭게 하여 주시는 복음을 첫 인간 아담을 통하여 미리 계시하여 주셨다. 바울은 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4:1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1-3).

그러므로 기독교는 흙으로 빗어진 육을 의롭게 치장하기 위해 율법적 행위로 인격을 다스리고 선행을 실천하며 도덕과 윤리를 지켜 세상이 인정하는 의로운 자로 ‘자아’를 세우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성도는 세상에 대하여서는 죽은 자이기에 세상의 것을 추구하고 붙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것을 다 잃은 거지 나사로와 같이 오로지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그리스도의 의만을 붙들고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십자가와 이 세상은 함께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이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며, 그 옛 사람도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에 이 세상은 나에 대하여 죽은 세상이라고 바울이 정확하게 정의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서 인정받는 으뜸이 되고자 세상과 함께 춤을 추고 있다면 그는 이 세상에 속한 자이며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그러나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이 나에 대하여 죽었고 나도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갈 6:14 현대인 성경).

바울은 성도의 실체가 바로 깨져야 하는 질그릇이며 그것이 믿음생활임을 확실히 제시해 주고 있다(고후 4: 7-10). 즉 우리의 존재가치가 바로 처음자리인 죽은 흙이며, 예수라는 보배를 담기 위해 그릇으로 만들어 주셨으며, 그 질그릇은 안에 들어있는 보배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깨져야 하며, 흙의 자리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기부인의 살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성도의 역할임을 제시한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존귀한 보배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완전히 깨지고 부셔져야 하며, 그것이 순종이고 믿음임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깨지지 않기 위해 도포하고, 예쁘게 보이려고 이 세상의 오물과 같은 것들을 덕지덕지 붙여서 치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력과 영광을 갈취하는 망령된 짓이며, 십자가 은혜에 대한 모독이며, 복음을 가로막는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렇게도 인간이 자랑으로 의로 내놓는 율법적 행위를 때려 부수며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끊어진 자들의 행위”라고 질책한 것이며, ‘자기가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 올리고 있다’(롬 2:5 새번역)라고 말한 것이다. 예수님도 인간의 죄 된 행위로 사람의 거짓 의를 내놓는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독사의 새끼, 희칠한 무덤, 마귀의 자식이다”라고 저주하신 것이다. 성도의 인생은 끊임없이 육적 자아가 하나님으로부터 폭격을 당하여 깨어지고, 부수짐으로 질그릇 안에 담겨있는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자기부인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때문에 성도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유익하며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평강을 지키라고 바울은 권면하고 있다. 바울의 진실한 고백과 같이 그 어떤 일이든 오로지 예수만을 나타내기를 힘쓰며 감사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순종을 배우는 것이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