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영적 계시

로마서 (8:31-39)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 / 누가 우리를 송사하며 정죄하리요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 넉넉히 이기느니라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4. 10. 16. 22:55

롬 8:31-39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바울은 8장에서 성도가 현재 누리고 있는 영적 축복과 특권과 또한 장차 나타날 영광의 소망을 확실히 제시해 주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당신의 영화로운 아들들로 완성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으며, 십자가 희생으로 구원을 성취하여 주셨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모든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려 주신”(엡 1:3), 그 은혜의 사랑을 인간이 어찌 알 수가 있으며, 어찌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라고 감개무량하게 외치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다른 모든 것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지 않겠습니까?”(현대인 성경).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당신의 독생자를 내어 주신 그 위대한 사랑 앞에서 인간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어찌 다 쓸 수가 있으며,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측량 못하는 영원히 변치 않는 그 위대한 사랑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바울은 31절로부터 마지막 39절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향한 그 위대한 사랑에 확신과 믿음으로 외쳐주고 있다.

(1)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탄생하여 의롭다 칭함을 받은 성도들이다. 죄의 세력이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를 무너뜨리고, 사단이 아무리 율법으로 정죄한다 하여도, 또는 우리 육신이 연약하여 죄와의 싸움에서 좌절과 패배와 절망에 있다 하더라도,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롬 8:2)는 십자가 복음을 당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잠시 악의 존재를 허락하셨기 때문에 이들은 하나님의 통치와 허락하신 시간과 영역 안에서만 움직이는 제한된 세력이므로, 절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영적 생명에는 조금도 해를 끼칠 수 없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성도를 대적하고 괴롭히는 사단의 세력과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악한 것들과 거짓된 것들의 종말은, 유황불에 던지지는 심판으로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계 19:19-20; 20:7-10). 잠시 그들의 역할을 허락하신 의도는, 택함을 받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시기 위함이며, 죄를 통하여 나의 정체성을 확실히 알아가며, 왜 나는 죄에서 구원을 받아야만 살수 있으며,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무궁하시고 위대하시고 깊으신지를 알기를 원하신다.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심으로 우리에게 향한 거룩하시며 압도적인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렇게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희생적 사랑으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신부로 하나로 묶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당신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당신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자녀로 신부로 완성하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사단과 그에게 속한 악한 것들을 잠시 소품으로 들어 쓰시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 3:22).

둘째, 육신을 지배하던 죄가 거듭난 성도를 가만히 놔 둘리가 없으며, 오히려 더욱 맹렬하게 더욱 교활하게 죄에 굴복시켜 죄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온갖 수단과 유혹으로 발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바울은 우리 성도가 육신의 연약함으로 수시로 넘어지고 실수하고 패배하는 것은 내 육신 속에는 여전히 내 육을 지배하려는 죄가 내 영을 공격하기 때문임을 말해준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 (롬 7:21)는 것이다. 내 속사람 영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7:22). 반대로 내 육신은 죄의 종으로 살던 악한 습성과 죄가 항상 기회를 잡아 죄에 굴복하도록 생포하여 끌어내리려고 한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7:23). 이것이 현실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죄가 아무리 성도를 괴롭히고 삼키려고 하여도, 결과적으로 우리 주님이 마귀의 시험을 몽땅 이겨주셨기 때문에 반드시 영적 승리로 이끌어주신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다만 우리의 영적 성장과 믿음과 순종의 시련을 주시기 위해,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임을 내 영이 깨닫는 것이다. 악한 세력들은 하나님의 허락하에서 움직이는 이용물이며,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지혜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4-5).

셋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엡 1:4), 영원부터 예정하신 뜻이시며(엡 3:11), 반드시 이 땅에서 성취되는 언약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즉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당신의 아들로, 신부로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시고,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을 내려 주신(엡 1:3) 그 위대하신 십자가 능력과 사랑에, 이 세상 그 누가, 그 무엇이, 그 어떤 영적 세력이 감히 예수님의 피 값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우리를 대적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있겠는가! 절대로 없다는 강력한 신념이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롬 6:14). “하나님의 아들이 그를 지켜 주시기 때문에 악한 마귀도 그를 건드리지 못합니다”(요일 5:18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8:33-34)함과 같이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친해 간구하여 주시기 때문에, 그 어떤 권세도 우리를 당할 수 없다는 확고부동한 믿음을 제시한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18:2). 그러므로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며 굳게 서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히 12:2)라고 권면한다.

(2)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며 정죄하겠는가? 결코 없다! 왜냐하면, 첫째,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철저히 도말하여 주시고, 모든 정죄에서 해방시켜 의롭다고 인 치셨기 때문이다. 죄를 향해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어 두려워 떨고 있을때, '중보자'(딤전 2:5)이신 예수, '대어 자'이시며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요일 2:1)께서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주셔서’(히 9:12),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므로’(엡 1:7),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소망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둘째,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며,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의 삶 전제를 주관하여 주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성도를 송사하거나 정죄할 수 없다. 요한은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시라”(요일 2:1)라고 우리 주님은 당신의 피의 대가로 우리를 구원하셔서 사랑의 띠로 하나로 연합을 이루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친히 우리를 중보하여 주심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육신이 연약하여 죄를 뿌리치지 못할 때, 죄에 빠지게 될 때, 실수하거나 실망과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중보하시고 변호하여 주심을 바울은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라고 위로와 소망을 준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8장 1-11절에서, 율법의 대명사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세워 놓고, 돌을 들고 간음한 여인을 치려는 기세로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8:5)라고 율법으로 고소한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시험하려는 그들의 사악한 마음을 알고 계셨기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8:7), 즉 돌을 던지기 전에, 율법으로 너희가 죄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를 내놓으라는 것이었고, 율법으로 판단하면 너희 모두가 죄인이며 먼저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제시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율법적 가르침에 마음이 찔려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못하고 심판주 앞에서 도망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내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라고 물으셨다. 여자는 “주여 없나이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유죄’로 끌러 온 여인이 ‘무죄’로 선고받는 구원이 임한 것이다. 간음한 여인이 율법의 송사와 정죄에서 해방 받은 것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죄인을 대신하여 율법의 정죄와 심판을 몽땅 받아내심으로, 모든 죄가 도말되었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주님은 이와 같은 죄인들을 저희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 오셨으며, 피의 대가를 지불하셨기에, 그 어떠한 세력도 빼앗지 못하는 영원히 보장된 약속을 선포하셨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10:28-29). 이보다 더 확실한 구원의 보장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가 구원받아 의롭다 칭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다”(벧전 1:18-19). 그리하여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라고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죗값을 몽땅 치러 주셨기에 오직 은혜로 된 것임을 확실히 제시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즉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죗값을 치르시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셨으므로,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8:33),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하나가 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고 바울은 우리를 위해 당당하게 확신에 찬 믿음으로 외쳐주고 있다.

(3)-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뜻을 정하시고, 천지만물을 우리 인간을 위해 창조하셨다. 그리고, 타락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내 놓으신 십자가 피의 사랑을 보여주셨으며, 우리와 영원한 하나로 영생을 살기 위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듭나는 새 창조를 일으켜 주셨다. 이와 같은 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 하늘나라 존재가 된 자에게, 도대체 이 세상 그 무엇이 우리를 아버지의 사랑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성령님의 지키심에서 끊어낼 수가 있단 말인가!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 118:6). 누가 하나님의 이 위대한 아가페 사랑을 당할 자가 있겠는가! 결코 없다! 이 세상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위험과 칼과 권세자들이 주는 모든 것들을 몸으로 겪어낸 바울이기 때문에(고후 11: 23-30, 고전 4:11-13), 우리 성도에게 “넉넉히 이긴다"라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강력하고 장엄하게 그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외쳐주고 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도대체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믿음의 성도들을 무너뜨리기커녕 오히려 하나님에게 향한 불같은 뜨거운 사랑을 불러일으켜 담대하게 자랑스럽게 내리치는 칼 앞에서 영광스러운 천사의 얼굴로 죽음을 맞아하더라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눈앞에서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 7:55), 자신에게 돌을 내리치는 자를 향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외치며 천사의 얼굴로 죽음을 맞이하는 스데반의 순교를 직접 본 사람이다. 이와 같이 믿음의 선지들과 제자들이 하나같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위해 그 위대한 영광스러운 순교의 길을 갔기 때문에, 바울은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 어떤 모양의 피조물이라도, 도대체 믿는 자에게 무슨 두려움의 대상이 된단 말인가! 그리스도의 피와 사랑으로 하나로 묶어놓은 믿음의 사람을 누가 끊어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들은 믿음을 연단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성도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엡 5:27)를 위한 관념과 소재와 도구와 이용물들일 뿐이며, 절대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고 우리를 위해 외쳐주고 있다.

바울은 이와 같이 35절에서 7가지 환난의 요소들을 나열하고, 36절에서 그렇게 그 모든 환난을 겪고 나면 도살당하는 양으로 완성됨을 제시한다.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이처럼 순종과 믿음으로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되는 자가 바로 넉넉히 이기는 자임을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사람들의 순교로 증명해 주고 있다. 믿음의 선배들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과 희롱과 째찍질, 멸치와 천대, 결박과 옥에 갇히는 것과, 돌에 맞고 톱으로 키고 불로 태우고 칼을 맞이하는 순교로 자신들의 흠이 없는 순결한 믿음을 증거하더라는 것이다. 지난 이천여 년 동안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향한 순결한 사랑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임을 당했지만, 그 어떠한 환난과 죽음도 시련도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가 없었다! 주님의 사랑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너무나 압도적으로 그들을 굳세게 붙들고 계셨기 때문에, ‘더 나은 부활과 영생을 얻기 위해 고문과 처참한 죽임을 당하여도 풀려나기를 거절했다는 것이다’(히 11:31-38).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8:37)의 감개무량한 외침이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러므로, 바울의 말 하는 “넉넉히 이기느니라”의 뜻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능력과 의지와 노력으로 물리치거나,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힘을 과신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님이 살아내신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으로 세상을 무력하게 만드는 십자가 능력과 권능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과 죽음의 고통을 앞두고, 그토록 사랑하던 제자들이 곧 배신하고 홀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외로움, 한 번도 아버지와 떨어진 적이 없었음에도 우리의 죄를 뒤집어쓰셨기에 버림을 받아 아버지가 사정 없이 쏟아부으시는 심판,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멸시와 조롱과 수치를 당하시며 저주의 사형 틀인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야 하는 그 극심한 고통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심으로, 너희도 기쁨과 평강과 담대함으로 세상을 이기라고 격려하여 주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셔서 능력과 권능으로 기적과 이적을 행하셔서 세상으로부터 숭배와 섬김을 받으며 왕으로 군립 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반대로 그분은 만왕의 왕이시며 창조주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태어날 곳조차 없어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으며, 자신의 전부를 죄인에게 주시기 위해 구유에 눕히셨으며, 태어나시자마자 세상 임금의 살해를 피하여 쫓겨 다녔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에게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쁨과 평안을 주시기 위해, 당신 자신은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배척과 멸시와 조롱과 수치와 박해와 같은 온갖 고난을 다 받으셨으며, 전지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아무 능력도 행하지 아니하시고 무력하게 도살당하는 양이 되어 기꺼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셨다. 점도 흠도 없으신 평강의 왕이신 주님이 이 세상에서 죄인으로 정죄당하시고 저주의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게 하는 죽음으로 세상 권세를 이기셨다. 똑같이 우리 성도를 대표하는 사도 바울과 제자들, 믿음의 선지들도 이 세상에서 감당하기 힘든 환난과 박해와 학살을 당하였으며, 하나같이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과 고난과 시험과 핍박을 당하나 담대하라, 기뻐하라, 감사하라, 즐거워하라, 인내하라',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격려하여 주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순결한 죽음으로 그리스도에게 향한 사랑과 순종과 믿음을 보여주시고, 우리도 그들의 발 자취를 따라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기를 격려해 주고 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세상을 이기는 방법

주님은 마태복음 10: 5-20에서, 제자들에게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방법을 확실하게 제시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세상과 맞서서 넉넉히 이기는 어떤 능력을 입혀주거나 전신 무장으로 싸우는 자세로 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반대로 모든 것을 다 해제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홀 몸으로 연약하고 무력한 양으로 가라고 명하신다. (1)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라고 명하심으로,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에 이 세상 힘과 권력과 부를 상징하는 은과 금과 같은 물질에 의존하거나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이다. ​(2)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라고 명하신 지팡이는 기적과 이적의 능력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여 기적과 이적들을 행하여 너희 자신을 자랑하고 이름을 높여 세상으로부터 숭배를 얻어내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말라는 것이며, 또한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는 기적과 이적들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3)두벌 옷이나 신도 가지고 가지 말라”라고 명하신 것은, 하나님이 입혀주신 은혜의 옷 위에 세상 옷을 덧 입지 말라는 것이며, 오직 주님이 입혀주신 진리의 겉옷과 주님이 신겨주신 복음의 신발만 신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곳에 머물러 성령님이 주시는 복음의 말씀만을 전파하라고 명하신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마 10:20).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들여보내실 때,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을 다 빼앗아 버리고 홀몸으로 보내시면서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마 10:16)라고 말씀하신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연약하고 미련한 양으로 세상 속에 들어가게 되면, 당연히 이리에게 찢기고 뜯기고 잡아먹히게 되어 있다. 한 마디로 세상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을 이 세상에서 살아내며, 그 삶이 바로 세상 권세를 무력하게 하는 세상을 이기는 삶이며, 또한 주님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다.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마 10:17-18).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그 양의 삶으로 묵묵히 세상 이리에게 도살되었지만(사 53:7), 그들이 죽인 예수가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의 주가 되셔서 우리에게 영생을 입혀주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라고 격려해 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우리도 예수그리스도의 양의 삶을 본받아 세상 속에서 양으로 살게 됨으로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롬 8:36 / 시 44: 22)라고 양의 삶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긴다’고 외치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라디아서 6:14). 성도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믿으며, 온갖 수모와 고난을 당하신 십자가의 권능을 자랑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넉넉히 이가는’ 것은 환난과 고통의 상황을 씩씩하게 싸워서 꿋꿋하게 이기는 강인한 의지와 노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성도가 누리게 되는 기쁨과 평안은 환난이 없어지고, 근심과 두려움이 없어진 환경과 조건과 상황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여전히 두렵고, 떨리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있음에도,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믿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인내'를 말하며, 내 의지나 힘으로가 아니라 그때마다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말씀을 붙들고 말씀 속에서 진리를 깨닫는 영적 평안과 기쁨이며, 그것은 주님이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6:22). 우리 주님이 곧 닥칠 십자가 고난과 핍박과 죽음을 앞두고도 아버지에게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온전한 순종으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성취에 대한 기쁨과 소망과 평안을 누린 것과 같이, 성도의 이김과 기쁨과 평강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과 현실을 능가하여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천국이 바로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는 소망을 실상으로 믿는 믿음이다. 이 세상을 배설물로 여기고 신앙의 초점을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십자가 복음에 둔 것과 같이, 성도의 간절한 소망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이와 같은 믿음이다. 이르기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함과 같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와 같이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여 주셔서 우리에게 향한 구원을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여 주신 그 위대한 구원, 태초부터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계획하시고, 묵시로 이루신 구원의 언약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피조된 사단의 세력이 어찌 창조주의 뜻을 대적하여 막을 수가 있겠는가!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하락하신 영역 안에서만 움직이는 이용물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의 생명을 앗아갈 자가 없다는 확신을 높이 외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신 그때부터 동일하게 시종일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외쳐주신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는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창 15:1). -- 이삭에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창 26:24). --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창 28:15). -- 모세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3:12).-- 여호수아: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수 1:5-6). -- 이사야에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

-- 다윗의 고백: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시 121:1-8).

예수님의 영원한 지키심: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행 18:10).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와 사랑의 띠로 하나로 묶여있는 끊으래야 끊을 수 없는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 어떠한 상황과 역경과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실패와 죄의 유혹으로 넘어지고 좌절과 절망 속에 빠진 것 같지만,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입혀지는 체험의 자리이며 영광의 자리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1-39). 그러므로 성도가 겪는 모든 것, 그것이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상관없이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섭리이며, 하늘나라 영광의 소망이 내 안에서 성취되는 선이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혜이다. 그분의 마음을 깨닫고 믿는다면, 그가 바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복받은 자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라,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감사하라,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반복하여 권면해주고 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