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영적 계시

로마서 (9: 22-25) [1] 멸하기로 준비된 그릇에 대한 관용 / 영광 받기로 예비된 긍휼의 그릇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4. 12. 31. 09:29

롬 9:19-25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바울은 9장 22-25절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22절: 어떤 이는 비록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으로 정하여져 있다 할지라도, 속히 멸망하시지 않으시고 인내로 오래동안 참아 주시며, 그 진노의 그릇을 통하여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시며, 당신의 이름을 천하에 알리는 목적을 이루신다.

23절: 어떤 이는 귀하게 은총을 담을 그릇으로 긍휼의 대상으로 만드셔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과 은혜를 천하에 알리는 목적을 이루신다.

24-25절: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은 자기 백성이라고 부르신 유대인들에게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심을 호세아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사람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고 내가 사랑하지 않은 자를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부를 것이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할 바로 그곳에서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현대인의 성경)라고 바울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율성과 절대적 주권을 구약을 인용하여 증명하고 강조한다.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에 대한 관용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하나님께서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그 죄악이 목구멍까지 찰 때까지 심판을 늦추시고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는 것은:

첫째: 멸망할 그릇으로 정하셨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인애의 하나님이시며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해, 회개할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시고 기다려 주시며, 또한 회개한 자를 기꺼이 용납하시는 사랑이심을 인간이 알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이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요엘 2:13).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예를 들면,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요나서에서, 선지자 요나는 이스라엘을 괴롭힌 철천지 원수인 아수르 니네웨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니너웨이 반대 방향으로 도망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나를 물고기 배에 넣어서 회개시킨 후 다시 니너웨로 보내셔서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인’ 아수르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관용을 베푸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괴롭힌 악한 아수르의 마음에 긍휼을 부어주심으로, 왕에서부터 심지어는 가축에 이르기까지 물도 마시지 않는 금식과 함께 회개와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켜서 니느웨를 향한 진노를 멈추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명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라 할지라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며 회개할 기회 주시기를 원하시는 긍휼과 자비를 보여주셨다. 니네웨의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처럼 악하기로 소문난 이방 민족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회개로 나왔건만, 너희 이스라엘은 어찌 여호와를 두려워하지도, 아무리 말해줘도 듣지도 않고,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하고 대적하는 패역한 자가 되었느냐? 그러니 니네웨의 회개를 보고,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이스라엘이 알기를 원하셔서 요나 선지자를 니네웨에 보내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또한 바로 왕과 같은 악한 자를 세워 그 마음이 완악하도록 내버려 두심으로, 그 완악함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출 7:3-4). 애굽 바로 왕들은 400년 동안 이스라엘을 노예로 묶어놓고 끔찍한 학대와 억압으로 괴롭힌 잔인한 독재자였다. 하나님은 그들이 끝까지 완악하여 심판을 자초함에 내버려 두심으로, 그들의 완악함과 악함의 결국이 바로 심판과 멸망이며, 하나님은 모든 민족들을 통찰하시며,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시며, 하나님만이 유일신이심을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내리신 10가지 재앙들을 이스라엘을 괴롭힘으로 심판을 받아 마땅한 애급인과 애굽 땅에만 내려지고, 이스라엘이 사는 고센 땅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그 어떤 재앙들도 일어나지 않게 하셨다(출 8:22-23, 9:26,10:23). 애굽 땅에 내린 10가지 재앙은: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어 보여주심으로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그들이 섬기게 되는 하나님은 전저전능하신 창조주이시며, 통치자이시며, 심판주이심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원하셨다.
  • 바로와 애급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유일신이시며, 심판자이시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능력과 영광과 이름을 전하에 알리는 목적을 이루셨다.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인간은 알 수도 예측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단 4:35)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악한 자에게 회개의 마음을 주시기도 하시며, 또한 악한 마음이 강퍅하도록 내 벼려 두셔서 그 완악함으로 당신의 일들을 이루어가심을 바로 왕에게 임한 10가지 재앙으로 보여주셨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협력하여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시는데 목적을 두셨기에(롬 8:28), 비록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라 할지라도 오래 참으심으로 악에서 돌이킬 기회를 허락하시며, 어떤 민족이라도 악에서 돌아서면 내리기로 하셨던 재앙을 멈추시는 관용을 베푸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어떤 민족이나 나라의 뿌리를 뽑아내거나, 그들을 부수거나 멸망시키겠다고 말을 하였더라도, 그 민족이 내가 경고한 죄악에서 돌이키기만 하면 나는 그들에게 내리려고 생각한 재앙을 거둔다”(렘 18:7-8 새 번역). 그뿐만 아니라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어진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악한 행실에서 돌이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아들로 받아들이겠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25-26).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함과 같이,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기를 그치지 않으시며, 오래 참으시며, 관용하시며,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신다. 이르기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마찬가지로, 비록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비된 영광의 그릇이라 할지라도,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절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뽑으시고, 부수시고, 멸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내가 어떤 민족이나 나라를 세우고 심겠다고 말을 하였더라도, 그 백성이 나의 말을 순종하지 않고, 내가 보기에 악한 일을 하기만 하면, 나는 그들에게 내리기로 약속한 복을 거둔다”(렘 18:9-10). “내가 그들을 뽑아서, 멀리 던져 버리겠다 하더라고 전하여라.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그들의 조상에게 준 이 도성도 함께 뽑아서, 멀리 던져 버리겠다 하더라고 전하여라. 내가 이와 같이 하여, 그들이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수치와 영원한 치욕들을 당하게 하겠다 말했다고 전하여라"(렘 23: 39-40). 이것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은 패역한 목이 굳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선포이다. 하지만, 그들 중에 하나님께서 남겨놓은 씨가 있으니 그 남은 자는 반드시 구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9:27). 이처럼 모든 것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자율성과 권한과 주권을 확실히 제시하고 있다. 때문에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약 4:4)와 같은 티끌이 자기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무지로 어찌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에 토를 달 수가 있으며, 어찌 하나님의 계획에 영향을 주거나 그 뜻을 돌이킬 수가 있겠는가! 절대 없다!는 결론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분은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인내의 성품으로 죄인들이 악에서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며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신다. 동시에 그분에게는 악이란 있을 수 없으신 거룩이시며 영광 그 자체이시기에, 죄를 반드시 심판하시는 공의를 행하심으로, 절대로 고의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완악하도록 인도하시거나 심판을 받도록 악을 조성하시지 않으신다. 다만 인간의 타고난 본성으로 그 마음이 심히 부패하고 강퍅함으로 스스로 멸망의 진노를 자초하는 것을 내버려두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롬 1:24-25).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영이 죽어 있는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매일 매 순간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 숨을 쉬고, 하나님이 주신 하늘 아래에서 하나님이 주신 땅을 딛고 매일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을 보고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며, 오히려 짐승과 버러지들을 신으로 숭배하며,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을 멸시하며, 진리를 역으로 불의를 행하여 스스로 자신들이 끊임없이 토해내는 죄악들로 멸망을 자초하며, 스스로 자신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어 구원의 은혜를 뿌리치고 심판을 자초한다.

그리하여 바울은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롬 2:4)라고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과 긍휼과 인자하심과 용납하심을 멸시하고, 도리어 목이 굳은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강퍅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스스로 진노를 쌓고 있다고 지적한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인간들은 극악무도한 악행으로 구원자로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멸시하고 핍박하여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는 씻을 수 없는 죄로 하나님의 진노를 스스로 자초하였다. 하지만, 인간의 이와 같은 추악한 만행을 미리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언약대로 메시아 예수그리스도를 죄인에게 희생 제물로 보내주셔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여 주셨다(마 1: 21).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멸망의 웅덩이를 팠다고 하나님은 예레미아를 통하여 한탄하셨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그렇게 모두가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명망의 웅덩이를 파서 죄와 사망에 빠져있을 때, 일부에게 긍휼과 은혜를 입혀주셔서 구원하셨다면, 그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며 하나님의 절대적 권리이므로 멸망에서 구원받은 자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으며, 또한 유기된 자도 불평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9:20-21).

포도원 일꾼 품삯 비유:

예수님은 마태복음 20:1-16절에서, 포도원 일꾼 품삯을 비유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권리를 제시하신다.

포도원 주인은 품꾼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기 위해, 일이 끝나갈 무렵까지 품꾼들을 찾아 나서 포도원에 들여보낸다. 그리고, 아침 일찍 9시에 일을 시작한 품꾼이나, 오후 12시, 3시에 들어온 품꾼이나, 저녁 5시에 포기하고 있었던 자들이 한 시간 밖에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시간 차별이 없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이다. 그러자 일찍 들어온 자들이 집 주인을 원망하여 “나중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마 20:12)라고 따진 것이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대답하여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마 20:15)라고 주인은 자기의 것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고 반박한다. 여기서 “내 것은” 주인의 긍휼을 의미한다. 주인은 일꾼이 필요하여 품꾼들을 찾아서 포도원으로 들여보낸 것이 아니라, 하루 한 데나리온이 없어서 온 식구가 굶을 수 있는 품꾼들의 사정을 알기 때문에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기 위해 한 시간도 남지 않았음에도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기 위해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음을 말씀하신다.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즉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준 나의 선을 네가 악하게 보느냐?라고 의론의 여지가 없는 주인의 권리임을 주장한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주권적 영역에 간섭하거나 의문을 제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그분의 영광을 드려내는 목적과 의도로 쓰시고자 하시는 그릇으로 태어났으며, 어떻게, 언제, 어디에서, 어떤 모양으로, 어떤 운명으로, 어떤 도구로 쓰실지는 창조주의 마음이고 섭리이며,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다는 말씀이다. 피조물은 단지 자기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을 다 한 후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중 긍휼과 자비와 은혜로 선택받은 자가 있으니, 내 뜻이 아니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며, 오직 나를 불러주셨다는 사실에 감사와 찬양이며,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영광 받기로 예비된 긍휼의 그릇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이 그릇은 우리니

바울은 22절에서, 진노의 그릇들을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나님의 이름을 전파하기 위한 의도이다고 말씀하시고, 23절에서는,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시는데 목적을 두셨으며, 이 그릇은 유대인 중에서뿐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여 부르신 ‘우리’라고 지칭한다. 동일하게 바울은 엡 1: 4-7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를 “우리”라고 부르고 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4-7).

이와 같이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아 영광 받기로 예비된 ‘우리’라는 성도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을 입어 하나님의 영광을 풍성히 나타내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씀이다(23절). 그 택하심과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며, 이는 행위나 혈통으로나 조건이나 대가로 된 것이 아니라, 진노의 그릇과 다름이 없는 멸망에서 선택을 받아 구원을 받은 그릇임을 제시한다.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9:29). 바울은 우리의 본 상태는 “허물과 죄로 죽었다”이며,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엡2:1~3). 즉 단 0.1%의 가망조차 없는 멸망의 자식이었음을 확실히 제시한다. 그렇게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이 세상 중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갈 4: 6). 그리하여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요 17:6),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요 18:9)이며, 때문에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시지만, 멸망의 자식은 따로 있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요 17:12).

그러므로 택함을 받은 백성은 그 행위가 아무리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품에 안기는 사랑의 대상으로 빚어가시며, 다만 택함을 받았다는 그 이유 하나로 행위가 아무리 의롭지 않아도, 아무리 큰 죄를 범하였다 할지라도, 그 어떤 상황과 경우에라도, 절대로 버려짐이 없이 끝까지 사랑받기에 합당한 신부로 아들로 만들어 내신다는 절대적인 구원을 보증하여 주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우리 죄인의 모형으로 들어 쓰신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0:28-2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요 6: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