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영적 계시

로마서 (5:1-2)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3. 9. 12. 23:25

롬 5:1-2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죄의 담을 무너뜨리고 하나님과 분리된 관계를 화목케 하시는 화평을 이루어주셨기에(골 1:20), 그 십자가 피의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화평을 누리는 아들의 신분으로 아버지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음으로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라고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 본래 우리는 죄인이었기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아래 놓여 있었던 자들이었다(롬1:18; 2:5). 그런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를 의지하고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일컴을 받은 자’가 되었은즉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을 누리자는 선포이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1-22). 바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하심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고 3장에서 이미 확실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롬 3:23-26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 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게 된 화평

 

바울이 말하는 ‘화평’은 바로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가 도말되어 죄인이 하나님과 화평이 이루어진(골 1:20-22)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누리게 되는 하늘나라의 평화이다. 주님은 곧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라고 예수님 자신이 바로 평강이시며, 그 평강은 이 세상이 원하는 육신적 평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밝히셨다. 그리고 부활의 몸으로 첫 번째로 제자들에게 주신 선물이 바로 ‘평강’이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이제부터 자신의 생명으로 성취하신, 즉 피의 대가로 지불하신 십자가 구원으로 아버지와 화목케 된 영원한 평강을 누릴 것이며, 그분이 평강의 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성령으로 영원히 하나로 동행하는 그 상태가 바로 평강임을 제시하셨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적 의존자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으로 채워진 생태가 바로 평강이며, 그 평강은 불가항력적 은혜로 그분이 친히 우리 마음 안에 성령으로 직접 뚫고 들어오셔야 만이 채워짐을 알게 하시기 위해 굳이 굳건히 닫쳐 있는 문을 뚫고 홀연히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평강을 부어주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화평치 못하는 근본 원인은 바로 죄 때문이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 본래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마귀의 종이 되어 오로지 육체의 탐심과 욕망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원수였으며, 받아야 할 징벌은 저주와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며(마 25:41,46), 때문에 바울은 인간을 죄와 허물로 죽었다(엡 2:1)라고 표현한다. 이 땅의 티끌로 육을 입은 인간은 육체적 본능으로 오로지 땅의 것만을 생각하고 추구하고 쟁취하며 자신을 이 땅의 주체로 삼고자 한다. 저주와 멸망으로 정해진 이 땅에 갇혀 사는 인간은 영이 죽어있음으로 하나님을 알아볼 수도, 하나님을 마음에 둘 수도, 또한 하늘나라의 영생을 알 수도 관심도 없다. 또한 자신을 구원할 그 어떤 힘도 능력도 기능도 전무(全無)이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 하나님의 생명력에서 벗어나 고생과 파멸을 자초하는 죄인의 실체이다. 그리하여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인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인자’로 내려오셔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허물어 버리고 화평을 이루시는 화목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죄인을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받아내셨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사 9: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사 53:5-6).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죄의 대가를 자신의 의로운 생명으로 지불하셔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하여짐으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짐을 묵시에서 정하셨고, 구약에서 미리 예언하여 주셨다. 화평의 소유자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화평을 이루어 주셨음을 바울은 정확하게 선포하고 있다.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 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속죄,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에 대한 값을 치르시고 자신과 화목을 이루심으로, 예수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간과하여 주시며, 우리를 의롭다 칭하여 주심과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의로우심을 천하에 나타내셨다고 바울은 선언하고 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창세전부터 예수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세워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죄인들이 어린양 예수의 피로 모든 죄가 도말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화평을 묵시로 정해 놓으셨다. 때문에 일방적으로 그분이 먼저 구원의 대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언약을 세우시고, 친히 희생제물이 되어 죄인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오직 십자가 피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는 영적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탄생되는 연합으로 화평을 이루셨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5:1-2), 즉 우리의 소망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화평을 누리는 영생임을 제시한다.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된 것과 같이 그분 또한 우리의 신랑이 되시는 연합이 바로 화평이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 20)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분이 지성, 감성, 의지를 가지고 우리 인간과 같은 인격체로 우리 안에 성령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하나가 되는 화평으로 동행하여 주실 것임을 약속하셨다.

 

주님은 그 약속대로 부활하셔서 우리 안에 성령으로 임재 하셔서 우리 마음속에 성전을 삼고 계심으로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 하나로 동행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환난과 고통과 질병과 좌절감과 절망과 눈물겨운 인생살이를 이해하시고 공감하시며 함께 경험하시는 동행이기에 그분 안에서 겪는 환난이 하늘나라 소망으로 이어짐으로 바울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5:2)라고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신실하시며, 의로우시며, 선하시며, 자비로우시며, 길이 참으시는 인내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처음 시작부터 완성의 지점까지 그분이 내 안에서 화평으로 이루어 내시는 일이기에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5:1)라고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화평은 오직 평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제물로 이루어 졌음을 활실히 제시하고 있다. 그분은 죄와 사망에 빠져있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화평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화평을 이루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회복시켜 주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장차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어 주심으로 제자들을 향하여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 9)라고 그분 안에서 십자가 피의 공로를 믿어서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기 때문에 우리를 ‘화평케 하는 자’, ‘복 받은 자’, ‘의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려주신 것이다. 즉 ‘화평’은 창세전 복 받기로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 천국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듭나는 새 생명의 연합 관계를 말하며,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제물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5:1)라고 선포한 것이다.

 

거짓 평화, 이 세상에는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천지창조 전 이 우주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뒤덮여 있었다. 처음부터 이 세상에는 ‘평화’란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덮어지지 않으면 혼돈과 없음과 죽음의 상태라는 것을 먼저 보여주셨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빛이 오시기 전 이 세상을 ‘어둠’이라 부름으로, 흑암으로 죽은 상태이며 평화가 없다는 것을 제시한다. 어둠에 갇힌 이 세상은 빛과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지도, 영접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어둠을 더욱 좋아함으로, 빛을 미워하고 대적하고 핍박하여 죽여 버림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자초한 것이다. 이 땅의 흙으로 육체를 입은 인간은 타락으로 끊임없이 평강의 길을 가로막는 가시와 엉겅퀴와 같은 죄를 생산하여 스스로 파멸과 고생을 자초하고 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나니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3:15-17). 모든 인간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죄를 쌓아서 스스로 환난과 고통과 고생과 파멸의 지옥 형벌을 자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땅의 티끌로 지음을 받은 육체는 타락하여 그 본성이 밑바닥이며, 더럽고 부패하고 강퍅하며, 자아에 굶주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반항하고 진리를 대적하며, 자신의 가치를 세우며, 이 땅의 썩은 영광을 추구하며 스스로 죄를 쌓아서 멸망을 자초하고 있다. 그리하여 바울은 인간을 “죄의 범을 섬기는”(롬 7: 25) 죄의 노예라고 지적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이 땅에 꽂혀 있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평강을 바라볼 수가 없으며, 죄인들이 쏟아내는 죄악으로 이 세상에는 평강을 구하여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8). "패망이 이르리니 그들이 평강을 구하여도 없을 것이라"(겔 7:25).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가 최초로 행한 일이 바로 하나로 힘을 모아 바벨탑을 쌓아서 자신을 지키며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하나님처럼 살겠다는 시도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어 인간들의 뭉치는 것을 산산이 흩어버리신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지키는 바벨탑을 쌓고 있지만, 하나님은 끊임없이 무너뜨리고 부시는 일을 하신다. 그러므로 이 죄악 된 세상에는 참 평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48:22).

 

그럼에도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세상 평화를 외치며 거짓된 평안으로 백성들을 미혹하더라는 것이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렘 8:11).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렘 23:17). 이 세상 육신에 속한 인간들은 자신들이 끊임없이 토해내는 욕망의 배설물 같은 이 역사가 얼마나 추악하고 사악하고 더럽고 허황된 것이며,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지 알지 못하며, 전하는 자도 없으며, 또한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육신의 탐심과 욕망과 영화를 누리는 거짓된 평안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이 원하고 즐겨먹는 거짓 평화를 먹이로 던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르기를, “이에 내가 가로되 슬프로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시리라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렘 14:13-14).

 

오늘날도 똑같이 거짓 목회자들이 이 세상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와 십자가 보혈,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은혜의 복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들의 탐심과 욕망을 채워주고 존재가치를 향상시켜 주는 인간들의 구미에 맞춘 기복주의, 물질주의, 인본주의, 율법주의와 같은 것들을 먹이로 던져주고 있다. 이 세상 재물의 번영과 명예와 육신의 안일함과 형통을 축복과 평강으로 둔갑하며, 거짓 계시와 복술과 이적들과 같은 허탄한 것으로 은혜와 평강을 왜곡하며, 율법을 지켜 행하는 선한 행위로 이 세상의 평화와 축복을 쟁취하라고 망령된 설교를 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너희들이 그렇게 갈망하는 복에 대한 비법을 가르쳐 줄 테니 너희들은 돈과 힘을 보태라’라는 노골적인 약탈이다. 그래서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양을 늑탈하고 해치는 삯군, 절도, 강도이며, 그들의 목적은 바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 요 10:1-12)라고 정확하게 질책하셨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인 머리 수 하나하나가 자신들의 성공과 이름과 영광을 쟁취하는 힘과 세력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분명 이와 같은 거짓 선지자들을 보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허탄하게 만드는 거짓 선지자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치실 것이며, 아예 돌로 쳐 죽이라고까지 말씀 하신다 (신 13:5,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그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23: 30-32). 인간들은 자기 건설과 확장과 실현으로 왕이 되어 다른 이를 자신들의 노예로 소유로 통제하기 위해, ‘평화’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끊임없이 폭력과 침범과 약탈과 살인과 같은 전쟁으로 역사를 죄악과 피로 채워 스스로 분쟁과 멸망을 재촉하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평화란 없다고 선고하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사 48:22). 성경은 반복하여 예수그리스도만이 평화의 왕이시며, 영생의 진리이시며, 빛이시며 구원자이심을 선언하고 있다.

 

성도가 추구하게 되는 하늘나라의 참 평강

진정한 평화는 내가 부인되는 죽음을 거쳐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잉태되어 평화이신 예수 안에 거하는 연합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회를 쉬게 하리라”(마 11:28)라고 말씀하셨다. 오직 그분 안에서만 참 평화가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평강은 이 세상과 완전히 반대로 하늘나라의 원리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하늘나라의 영원한 평화를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화목제라는 제사에 근거하셨다. 때문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케 된 자는 예수를 본 받아 반드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통과하게 된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으로 화평을 이루어 주셨기 때문이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우리는 화목 제물로 드려진 예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요 6:54-57) 하나님과 화평케 된 자들이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성찬에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의 살과 피를 마신다는 것은 이제부터 나라는 존재는 삭제되고, 예수의 살과 피로 예수에게 속한 신부로 다시 태어나는 새 사람으로 그분과 한 몸으로 함몰되는 연합을 의미한다. 그분 안에 함몰되어 한 몸으로 사는 신부는 이제 더는 자신의 주체성이나 자신의 존재가치를 챙길 수가 없다. 신부는 신랑의 살과 피를 먹고 사는 자이기에 그분이 주관하시고 장악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며, 모든 일은 그분이 내 안에서 선한 뜻을 이루시는 일이며, 내가 수고하고 져야 하는 짐이 아니기에 나에게는 쉼이 되고 마음에는 ‘평강’으로 채워짐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바로 내 안에서 천국이 이루어지는 참 평화임을 제시하셨다. 그리하여 걱정과 불안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몸으로 첫 번째로 내려주신 선물이 바로 “평강”이다. “평강이 있을 찌어다.” 굳게 닫혀있는 문을 뚫고 들어오셔서 평강을 입혀주신 것은 이제 우리 주님이 성령으로 당신의 백성들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사망의 두려움을 쫓아내고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하나로 연합을 이룰 것이며 그 연합의 상태가 바로 ‘평강’임을 제시하셨다.

 

예를 들면, 호세아에서 묘사한 창녀 고멜은 이 세상에서 평안을 찾으려고 이 남자 저 남자를 찾아 헤맸지만, 이 세상 남편들로부터 농락당하고 결국 죽은 고깃덩어리처럼 내쳐진 신세가 되었다. 사마리안 여인도 마찬가지로 남편을 다섯 번이나 가라 채고 창녀와 같은 신세가 되어 세상으로부터 멸시를 당하는 천한 여인이었다. 탕자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로 쾌락과 행복을 찾아 누리려고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세상으로 나갔지만 결국은 돼지 굴에서 돼지와 같이 쥐엄열매를 나누어 먹는 돼지의 신세로 내쳐진 것이다. 그들 모두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남편과 안정된 평화를 찾아 헤맸지만 찾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 가시와 엉겅퀴와 같은 죄악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실존, 실체가 무엇이며, 왜 성도는 반드시 이 세상과 이별하는 죽음을 통과하여야 하며, 왜 구원이 오직 예수그리스도에게만 있으며, 왜 그분만이 ‘빛이요 생명이요 진리’인지를 깨닫고, 평화이신 예수 안에 거하여 하늘나라 참 평화를 누리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이 땅으로 육체를 입은 인간은 이 땅의 것을 채우는 것을 평안과 안정과 힘으로 간주한다.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부인하는 즉 자신의 존재 가치가 삭제당하는 십자가 죽음과 죄에 대한 심판과 회개와 십자가 보혈을 거부하며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서 이 세상 것들이 차압당하는 삶이 복된 삶이며, 가난과 굶주림과 애통과 핍박과 미움을 당하는 삶이 복된 삶이라는 복음이 불편한 것이며, 듣기 거북스럽기에 전하는 자도 없고 듣고 깨닫는 자도 없다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다.

 

하늘나라의 평강과 기쁨은 이 역사 속에서는 나라는 존재 가치가 삭제당하는 환난과 애통과 배척과 핍박과 조롱과 시련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천국의 복’은 이 세상 원리와 반대로 버려지는 가난으로, 자신을 부인하는 애통으로, 이 세상의 양식을 끊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는 핍박과 조롱으로, 죽음을 당하게 되는 철저한 자기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으로 이끌려가는 성도에게만 입혀짐을 선포하셨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이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음에도, 역사 속에서는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오셨음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2:49-51). 이 세상 인간들이 똘똘 뭉쳐서 힘과 세력을 쌓아서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즐기겠다고 바벨탑 쌓은 것을 흩으셨던 것과 같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로 인하여 분쟁케 되고 분리가 일어나는 영적 싸움이 시작됨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4-36 / 12: 52-53);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 13:49-50)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믿는 자와 안 믿는 자와의 분쟁뿐만 아니라, 믿는다고 하는 한 가족, 한 교회 안에서의 영적 분쟁을 말씀하시고 있다. “의인 중에 악인”이라는 말씀은, 바로 의인의 탈을 쓴 악인, 양의 탈을 쓴 늑대, 선지자 탈을 쓴 삯꾼 강도 목회자를 가리킨다. 그들은 광명의 천사로, 하나님의 종으로, 의인으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한 식구로 가장하여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온 독사, 마귀들이기에 주님은 그들에게 불을 던질 것이며, 서로 대적하여 싸우는 분쟁을 일으킬 것이며, 반드시 검으로 갈라내어 지옥 불에 던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또한 성도 안에서 옛 사람이 진리의 검으로 잘려나가고 부서지고 죽어 삭제되는 영적 전쟁을 치려야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에게 속한 아들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신부로 새롭게 태어나는 해산의 고통을 겪게 됨으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이 역사 속에서 분쟁으로 불로 검과 같은 환난으로 감지된다는 의미이다. 즉 진정한 하늘의 평화는 내 옛사람이 죽고, 하늘의 존재로 거듭나는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러야하기 때문에 자기 집안에서 불화가 일어난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후 5:17),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는 탄식으로 내 자아의 죽음을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옛 사람은 나 자신만을 사랑하는 애착과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집착을 나의 존재가치로 붙들고 살아왔기 때문에 죽어도 이러한 집착과 애착들을 스스로 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안에 함께 계시는 성령님이 우리를 옛 사람이 죽는 십자가 삶으로 이끌고 가신다. 바울은 성도의 십자가 삶에 대하여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롬 8:36) 라고 말씀하시면서도, 그렇게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으로 간주한 것이다(고전 15:31). 왜냐하면 오직 나만을 위해 마귀의 종으로 죄의 종으로 살던 그 옛사람이 죽어야만이 영원히 사는 그분의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듭나서 하늘나라 영생을 사는 평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울은 성도에게 주어진 ‘직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고후 5:18). 즉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림으로 그 피로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기에 그 화목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성도의 직책이라는 말씀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살아내신 화평의 삶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에게 향한 철저한 순종과 철저한 자기부인과 자기죽음의 십자가 삶이었다.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끌고 가시는 화평의 삶은 이 역사 속에서는 공고한 고난과 시련과 시험으로 나타난다. ‘나’라는 존재의 실체가 낱낱이 폭로되고 기각되고 부인되고 죽어가는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평강이 내 마음에 날로날로 채워짐을 경험하게 됨을 제시한다. 우리 믿음의 선지들이 자기부인과 자기죽음의 십자가 삶을 충실히 살아냈으며, 그들에게 십자가 고난의 삶은 오히려 평강으로 감사로 영광으로 여겨지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로(예수그리스도)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5:2)라고 감개무량하게 말한 것이다.

 

모든 지각에서 뛰어난 하늘나라의 평강

 

성도의 평강은 어떤 현실이나 상황, 특정한 사건들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믿음과 그분 안에 거하는 연합으로 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라고 주님의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며 그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이 세상에 속한 육신적 평안이 아니라 영생을 사는 영원한 하늘나라의 평강임을 제시하셨다. “하나님의 아들로 화평케 된 복 받은 자”에 대하여 바울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평강을 초월할 수가 없으며, 그분의 평강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지켜주시기에 이 세상 염려와 근심, 두려움을 뛰어넘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하늘의 평강을 사는 성도는 이 세상 그 어떤 일을 당하여도 좌절하여 포기하는 일이 절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하늘의 평강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 함몰되는 화목으로 은혜로 입혀주시는 선물이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부터 평강이 주어짐으로’ 그 평강은 영원한 것이다. 하나님과 화목하여 하나로 연합된 성도에게 임한 평강은 영생을 사는 평강이기에 없어지거나 중간에 포기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바울은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음으로 모든 지각에서 뛰어난 평강이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의 인생 현실에서 세상에 마음이 빼앗기는 곤고함과 내 속에서 싸우고 있는 유혹으로 바울과 같이 속사람은 하나님을, 겉 사람 육신은 이 세상의 것을 원하지만, 내 안에서 성령님이 주관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평강의 자녀로 은혜의 아들로 믿음의 걸작으로 수렴이 된다. 이미 내 안에 뚫고 들어오신 천국이신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로 동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 평강은 우리에게 주어진 완료된 평강이며 내 삶에서 그 평강을 체험하게 하신다. 주님은 그렇게 십자가 은혜의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 복음을 몸으로 살아 내며 입으로 전하는 자들이 바로 ‘화평케 하는 자’ 들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컴을 받은 복된 자"(마 5:9)라고 산상수훈에서 제시하셨다. 화평은 한마디로 내 옛 사람 죄인이 죽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아들로 영생을 사는 의존적 관계를 말한다. 바울이 말한 봐와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즉 나라는 존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에 나는 이제 더는 나를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내 안에 뚫고 들어오신 그분의 영으로 태어난 새 사람 그리스도의 신부로 그분이 이끄시는 십자가 자기부인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내가 삭제당하고 그분의 영으로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그 새 사람의 부활을 화평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주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제자들에게 뚫고 들어오셔서 입혀주신 첫 선물이 바로 ‘평강’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추구하게 되는 평강은 절대로 내 뜻대로 일이 잘 되는 형통한 삶, 걱정 근심 없는 평안한 삶, 고난과 고통과 가난과 육신의 아픔이 없는 상황으로 바꾸어지는 평안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매일 도살당하는 양과 같은 온갖 고난과 고통과 핍박과 절망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신랑 예수와 함께 겪는 그 놀라운 기적적 사실이 그 고난의 현장에서 체험됨으로 바울처럼 옥중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역으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는 평강의 고백이 나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어려운 현실의 핍박과 매 맞음과 절망과 고통스러운 옥중에서 마음의 안정을 위한 평강을 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안에 은혜와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와 하나로 동행하고 계시기에,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예수에게서 끊어질 수 없는 사랑의 고백을 한 것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9). 그래서 바울은 서신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즉 그리스도께서 이미 너희 안에 성령으로 함께 계시고 있기 때문에 은혜와 평강이 너희 안에 있으며 누리기를 권한 것이다. 하늘나라 평화를 사는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육적 자아의 죽음을 십자가의 삶으로 실제로 살아내게 되며, 그 십자가의 삶을 통하여 내가 부인되고 삭제됨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신부로 연합을 이루게 되며, 그 상태가 바로 화평이라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