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약 2: 14-20,26) 야고보는 왜 유대인들에게 “행함”을 특별하게 강조하는가?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란?
약 2: 14-26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를 문자 그대로 읽고 해석한다면, 야고보가 강조하는 ‘행함’이, 바울이 제시하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 ;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복음의 핵심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야고보서의 본질적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사도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하는 ‘믿음과 은혜’에 대하여, 즉 구원은 율법적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값없이 입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선물’임을 강조한다.
- 야고보는 믿음의 실재 없이 율법적 행위, 종교적 형식과 의식만 추구하는 외식 된 허탄한 행위를 믿음으로 간주하는 유대 율법주의 자들의 잘못된 신앙을 지적한다. 즉 참된 믿음은 믿음의 주 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인데, 예수그리스도가 빠진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2:17). 아무리 의로운 행위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탄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2:26)라고 말함으로, 행함은 율법에서 나오는 죽은 행함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한 구원과 생명의 열매를 맺는 산 믿음임을 제시한다.
야고보 서신의 목적과 수신자
-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흩어진 열두 지파 유대인들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약 1:1). 사도행전에서 보면, 스데반의 순교 이후로부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유대교의 박해(행 8:1)가 시작되었고, 이를 피하여 로마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 가운데 복음을 받아들인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비록 그들은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율법적 행위로 구원에 이르고 의롭게 된다’는 율법적 유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 야고보는 유대 율법주의 자들이 은혜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자신들의 율법 지킴의 행위로 구원을 얻은 민족이라는 특권을 내 세우는 교만을 지적하여 너희가 자랑하는 “행위”는 죽은 행위이며, 외식 된 행위이며, 생명을 잉태하지 못함으로 실상은 “행위 없음"이며, 때문에 너희에게는 믿음 그 자체가 죽었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2:17).
유대인들의 교만한 특권:
선민의식이 고조되어 있는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율법과 제사와 성전과 할례를 받은 특권으로 자신들은 구원받은 민족이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율법으로 다른 이들의 죄의 문제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심판관 노릇하면서 이방인들과 다름이 없이 온갖 불의와 거짓과 외식을 행함으로(롬 2:16-25), 바울은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라고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예수님도 율법의 자대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외식에 대하여 책망하셨다. “너희는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고 너희 자신은 손끝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눅 11: 46), 즉 남에게는 율법을 행하라는 짐을 지우면서 자신들은 율법대로 살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된 행함과 거짓된 의에 대하여: "마귀의 행사", “회칠한 무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는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4)라고 저주하시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온통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세우기 위해 온갖 불의를 행하였음을 일곱 가지 화로 선언하셨다(마 23:13-33).
야고보의 관점: 야고보도 그들의 거짓된 행함에 대하여, 예수님의 책망과 동일하게 외식 되고 뒤틀어진 율법주의적 행함은 영혼이 없는 죽은 행함이기에 믿음도 죽었다고 책망한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2:26).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 행위가 아니기에 죽은 행실이며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행함’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데, 예수그리스도가 빠진,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행위는 죽은 행위이며, 너희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바울은 율법은 “죄와 사망”(롬 8:2)임을 확실히 제시한다. 그 죄와 사망의 법을 지키고 행하면 열리는 열매도 죽음이다. 하지만 그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 받는 “행함”은, 오직 하나님이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구원과 생명을 낳는다. 그런데 너희는 너희 죽은 행실로 구원에 이른다고 믿고 있는데, 그 죽은 행실로 너희 스스로 “행함이 없다"라는 것을 증거한 것이며, 때문에 “그 믿음 자체가 죽었다”(2:17)라고 정확하게 지적한다.
왜 야고보는 유대인들에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라고 믿음보다 “행함”을 특별하게 강조하였는가?
약 2:15-17 (새번역)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15절: 헐벗었고, 그 날 먹을 것 없는데… Naked and destitute of daily food
이 구절은 문자대로 헐벗고 굶주린 가난한 사람들에게 호의와 선을 베풀어 옷과 양식을 공급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Good Samaritan)의 행실이 믿음이다는 뜻이 아니다. 구제와 선행은 모든 종교에서도 강조하는 행함이다. 하지만 그들이 선호하는 선한 행위는 구원과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배제한 자신들의 의지로 행하는 자발적인 선행이며 그 행함에는 구원과 생명이 없다. 만약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 온전한 행함이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된다고 한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헛된 죽음이 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도 필요 없게 된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몸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행함을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1). 벌거벗은 (naked) 자에게 필요한 옷은 어떤 옷인가?
최초로 벗은 자로 나타난 사람은 첫 인간 아담이다. 죄가 마음에 들어가자 첫 번째로 발견한 것이 바로 벌거벗음이었고, 그 벌거벗었음을 수치, 즉 죄로 여겼다. 진정한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임에도, 아담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벌거벗음을 자신의 판단으로 ‘수치’로 인정하고 나뭇잎으로 벌거벗음을 가렸다. 아담은 자신이 지은 옷을 입고 있었음에도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9-10)라고 말함으로 죄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임을 깨닫지 못하고, 선악과를 입에 물고 자기 기준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자기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 버렸다.
-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스스로 지어 입은 누더기 옷을 벗겨버리고, 친히 양을 잡아서 피가 묻은 양의 가죽으로 옷을 입혀 주셨다. 장차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린 피의 옷으로 인간이 입고 있는 죄를 도말하고 사망에서 구원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는 새 창조를 일으켜 주시는 은혜의 복음을 제시하셨다.
- 사 47:3-4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범죄를 ‘벌거벗음’으로 묘사한다. 그 죄를 반드시 징계하시며 (바벨론에게 멸망 당함을 지적), 그 멸망에서 구원하실 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눅 10:25-37), 예수님은 율법을 열심히 지켜 영생을 얻은 것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의 확인을 얻고자 하는 율법 교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어, 네가 열심히 지켜 행한 그 율법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는 그 율법이라는 강도를 만나 벌거벗은 상태로 죽은 시체와 다름이 없는 상태에 놓여 있음을 지적하신다.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눅 10:30). 이어서 율법 지킴으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율법의 권위자인 제사장과 레위인을 등장시켜 그들이 강도 만나 죽어가는 자를 보면서도 구하지 못하고, 피하여 지나가는 자로 묘사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목숨으로 지키고 행한 그 율법에는 죽은 자를 살려내는 기능도 역할도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보다 먼저 온자는 다 강도요 절도이며"(요 10:8)라고 지적하셨다. 오직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만이 죽은 자를 살려내는 “기름과 포도주”(성령님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눅 10:34)의 소유자이심을 제시하셨다.
이 비유의 핵심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자’는 행함을 요구하는 도덕적인 교훈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구원과 영생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와 성령님의 거듭남으로 은혜로 입혀지는 선물임을 제시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줄 수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도 또한 그러한 능력도 없는 ‘죄와 허물로 죽은’(엡 2:1) 자들이다. 그것이 우리의 실체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죄악에 차 있는 강도 굴에 친히 뚫고 들어오셔서 그렇게 죽어 있는 우리에게 은혜의 옷을 입혀주시고, “기름과 포도주”로 살려 내시고, 다시 우리를 데리려 오신다고 약속하시는 참 복음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명쾌하게 설명하여 주셨다. 즉 우리는 벌거벗은 수치로 죽어 있는 상태이며, 오직 우리 주님께서 찾아와 주셔서 이 강도 굴에서 끄집어내어 주심으로 그분의 “의로운 행함”으로,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아 아무런 조건도 자격도 없는 벌거벗은 죄인에게 무상으로 입혀주시는 구원과 생명의 복음을 제시하셨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말하는 “벌거벗은 자들”은, 바로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하나님을 떠나 죽음에 처해 있는 자들이며, 육신의 탐심과 욕망으로 온갖 죄악들을 도모하고 행악하는 죄인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묘사하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영혼을 구원하시는 십자가 피로 물든 예수그리스도의 옷이지, 절대로 영혼 구원과 상관없는 인간이 만들어낸 걸레 같은 옷이 아니다. 즉 은혜로 감싸주시는 복음의 옷을 입혀주는 행함이 바로 사람을 살리는 산 믿음의 행함임을 제시한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추구하고 자랑하는 율법적 행위에 대하여, 거짓과 외식, 온갖 탐욕과 방탕과 불법으로 가득하며(마 23:25-28,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니”(마 23: 4),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한다”(마 23:3)라고 책망하셨다. 그리하여 야고보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말만 하는 외식적인 행위를 부정하여 “행함이 없다"라고 말하며, 그 죽은 행위에서 어찌 ‘믿음’이 나올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내세우는 신앙 그 자체가 죽었다고 말한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26).
(2). 끼니를 때울 양식 (Daily food) 은 어떤 양식인가?
야고보는 매일 먹어야 사는 배를 채우는 끼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굶주려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즉 죽은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의 말씀을 가리킨다.
요 6:35-3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영원히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양식임을 친히 말씀하신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생명의 양식이 바로 그들 앞에 있어서 보고, 듣고, 그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기적과 이적과 표적을 체험하였음에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았다"라는 것이며, 스스로 생명의 양식을 거절하는 금식으로 굶주리는 죽음을 자초하더라는 것이다.
- 요 6:54-56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요한의 증거: 예수그리스도는 말씀으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고 증거한다(요 1:1-3).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과의 사귐으로 하나를 이루는 유일한 길은 바로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을 일용할 양식으로 먹는 것임을 예수님은 주 기도문에서 가르쳐 주셨다. 즉 우리가 매일 먹어야 사는 영적 양식은 바로 말씀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배우고, 교제하는 사랑의 관계로 하나가 됨을 계시하여 예수님은 ‘나를 먹으라’, 즉 내가 바로 너희가 일용할 양식으로 먹어야 사는 말씀임을 제시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말하는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준다는 말은 육을 위한 썩은 양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한다. 유대인은 말씀은 받았지만 눈 뜬 소경과 같이 말씀이 가리키는, 말씀 속에 숨겨져 있는 예수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였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말씀을 짓밟고 말씀을 말살하는 데 열심을 부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야고보는 말씀을 받은 너희의 행위는 믿음에 근거하지 않았기에 그 행위는 죽은 행위요 믿음 자체도 죽었다고 역설로 말한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위는 율법에서 나온 행위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생명에 이르는 믿음에 근거한 행위인데, 너희가 의로 여기는 율법적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의를 대적하는 망령된 행위이기에 영혼 자체가 죽었다고 말한다(2:26). 결국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율법적 행위는 죽은 행실이며,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이 구원과 생명을 받는다는 믿음이다.
인간이 원하는 양식은 무엇인가?
인간은 먹기 위해, 입기 위해 살며, 좀 더 잘 먹고 좀 더 잘 살고 잘 입는 겉옷 치장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높이며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높임 받기를 추구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누리는 것에 만족하는 자가 없다. 전 1: 2-3: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해 아래의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하는 것은 오직 해 위에 있는 위의 것만이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들의 헛수고에 대하여 미리 말씀하셨다: 렘 2:13-14: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1)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2)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다”
1). 인간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터진 웅덩이를 팠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탐심은 밑 빠진 웅덩이처럼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없는 인생은 끝이 없는 지옥을 살다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인생임을 제시한다.
2).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버린 인간, 하나님을 떠난 인간,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삶 자체가 죽었다고 표현한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엡 2:1). 생명은 오직 죄인을 구원하여 주신 예수그리스도에게만 있다고 선언하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러므로, 야고보가 말하는 ‘벗은 형제에게 옷을 주고 끼니 없는 형제에게 먹을 것을 준다’는 말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 옷, 배를 채우는 끼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끊임없이 탐심과 욕망으로 지옥으로 향하는 웅덩이를 채우려고 열심을 부리는 헛되고 헛된 수고에 지쳐 있는, 아무리 입어도 가려지지 않는 벌거벗은 영혼들, 아무리 먹어도 굶주려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들에게 주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너희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도 않고, 영접하지도 않고, 오히려 열심히 배척하고 대적하고 죽이는 데까지 갔으니, 너희 자신이 바로 수치를 모르는 벌거벗은 행악자들이요, 말씀을 말살하여 굶주려 죽어가는 자들이니, 어찌 너희가 벗은 자에게 옷을 줄 수 있으며,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겠는가를 묻는다. 그러니 너희는 말만 하고 아무것도 줄 수도, 또한 할 수도 없기 때문에, 너희가 자랑하는 율법적 행함은 죽은 행함이요 믿음 그 자체가 죽었다고 책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