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영적 계시

[2] (약 2:14-26)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란? 귀신들이 믿는 믿음이란? 참 믿음의 행함이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4. 06:26

약 2: 14-26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는 행함을 자랑하는 너희들이 왜 벗은 자에게 옷을,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평강이 없는 자에게 평강을 줄 수 없는지를 묻는다. 이스라엘아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는데 어찌 벌거벗은 자에게 은혜의 옷을 줄 수 있으며, 너희 안에 생명의 말씀이 없는데 어찌 굶주린 자에게 영혼을 살리는 복음의 말씀을 줄 수 있겠는가? 그러니 행함으로 의롭다고 자랑하는 그 율법적 행함은 구원과 상관없는 죽은 행위인데 너희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너희에게 없는 것을 어찌 줄 수 있겠는가! 그러니 너희는 말만 하니 그것이 너희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지적한다.

왜 “이익이 없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1), 더웁게 하라(2), 배부르게 하라(3)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 평안히 가라: 평안, 평강은 오직 평강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만이 줄 수 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야고보는 그들 안에 평안이 없기 때문에 평안이 필요한 자에게 참 평안을 줄 수 없음을 지적한다.

(2). 더웁게 하라: 벌거벗은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그 죄의 수치를 가려주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물든 구원의 옷이다. 그런데 그들 자신도 벌거벗었기에 다른 이들의 수치를 가리는 은혜의 옷을 줄 수 없음을 지적한다. 이스라엘은 복음의 옷 입기를 거절함으로 자신들도 구원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을 줄 수 없었다.

(3). 배부르게 하라 : 예수님은 내가 바로 영원히 굶주리지 아니하는 양식이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이다(요 6:35)라고 말씀하셨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을 주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받은 말씀은 “죄의 사망”의 법밖에 없으니, 어찌 굶어 죽어가는 자를 살려내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를 묻는다.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행위”란?

바울은 부활의 예수를 만나기 전에, 자신의 율법적 행위에 대하여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 6)라고 자고 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고백대로 그가 자랑한 행위는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하여 구원의 길을 차단하는 망령된 짓이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딤전 1:13)로 복음을 말살하는 철천지원수였다.

  • 눅 18:11-13: 바리새인들은 기도와 금식, 십일조, 구제, 도덕과 윤리 등에 언제나 모범적인 행위를 보였으며 의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그 행함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지 못한다고 그들의 행함을 부인하셨다.
  • 마 19:16-22: 한 부자 청년이 율법을 다 지켜 행하였다고 예수님 앞에서 자랑하였다. 예수님은 그의 외식된 행함을 폭로하고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제시하셨다.

야고보의 관점:

첫째, 야고보는 그들이 자랑하는 율법적 행함을 부정하여 “행함 없음”, “이익이 없음”, “죽은 믿음”이다고 역으로 말한다. 그 행함은 자신들의 거짓된 의를 세우기 위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를 죽이는 은혜를 망령되게 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 행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복음을 말살하는 마귀의 행사였기 때문이다.

둘째, 너희 자신도 벌거벗었는데, 어찌 벗은 자에게 옷을 줄 수가 있으며, 너희 자신도 “말씀의 기갈”로 굶주려 죽어 있는데, 어찌 굶주린 자에게 끼니를 줄 수가 있겠는가를 묻는다. 그리하여 그 다음 구절 16-17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너희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없기 때문에 입술만 놀릴 뿐 그 영혼을 살리는 일에는 “아무런 이익이 없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오늘날 똑 같이 현대 이스라엘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행함과 믿음을 논하고 있다:

  • ‘말씀을 지켜 행하라, 죄를 짓지 말라, 의롭게 살아라’라고 말만 하면서, 그 죄의 본질과 그 죄를 사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은 가르치지 않으며, 영혼을 살리는 성경 말씀을 진리로 먹지 못하는 기갈이다. 인간들의 배를 즐겁게 하는 세상 것들을 희석한 정크푸드를 말씀으로 오인하고 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라, 구제하라, 봉사하라’ 라고 허탄한 사랑을 외칠 뿐, 진정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라고 하신 사랑의 본질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일과 예수그리스도를 주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인간들의 열심과 구제로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는 것이 ‘이웃 사랑’으로 왜곡되어 있다. 사랑은 영생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주는 것이지,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구제가 아니다.​
  • 많은 교회인들은 의로운 행위로 믿음에 이르고 의지적 노력과 선행으로 구원이 유지되고 보존된다고 인식함으로, 구원은 완전한 은혜의 선물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의 의지와 노력과 행위도 필요한 합작품으로 인식한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의 “행함”만 받으신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완성하신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일”, 즉 예수님의 행함이란?

요 17: 4 :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work)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I have finished the work which you gave me to do.

예수님의 일(work)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이루는 것이며 완성하셨다. 아버지가 주신 일은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여 새 생명을 주는 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의 의로운 죽음으로 모든 것을 완전히 철저히 완성하셨음을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었다”로 선포하셨다. 때문에 완성된 예수님의 피의 공로에 인간의 행위를 덧붙이는 일은 용납할 수가 없으며 스스로 심판을 자초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모든 서신에서 율법적 행위를 배제하여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그렇게도 강조하여 외친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는 구원에 이르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에 이르는 행위는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단 한 번으로 철저히 완벽하게 완성하여 주셨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우리가 하는 일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완성하여 주신 십자가 피의 공로를 (행위) 믿는 믿음뿐이다. 죄인에게서 나오는 행위와 공로는 하나님의 의로운 구원에 죄를 덧붙이는 망령된 일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오직 은혜로 구원을 ‘선물’로 주셨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요 6:28-29: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 행위를 말씀하지 않으시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고 확실히 말씀하신다. 동일하게 우리가 믿고 구하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라고 밝히 말씀하신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행위”는 오직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며,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희생 제물만 받으신다. 우리에게 원하시는 행위는 예수님이 주신 말씀대로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를 아는 것과 믿는 일이다. 그리하여 야고보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지도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배척하고 대적하고 죽여버렸으니, 너희는 진정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귀신들이 믿는 믿음을 가졌다고 직설적으로 비난한 것이다(2:19). 즉 너희가 열심을 내는 행위는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멸시하고 핍박하고 십자가에 매다는 마귀가 원하는 악한 일이니, 너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이 믿는 구원이 없는 죽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격한 표현을 한 것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귀신들이 믿는 믿음이란’ ?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는 행위는 절대로 구원에 이르는 생명을 잉태하지 못함으로, 실상은 ‘없음’과 방불한 죽은 행함이며, 당연히 믿음도 죽었다고 말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무화과나무의 저주: 마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잎사귀는 풍성하나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마 21:19)라고 저주하자 이내 나무가 마른 것이다.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그리스도가 유대인들 눈앞에 나타나셨음에도 알아보지도 또한 그에게 구원과 생명을 구하지도 않고, 여전히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챙기기 위한 율법적 행함과 제사에 목숨을 걸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패역함을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에 비유하셨고,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저주하셨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어떤 열매도 맺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대로 사람들의 칭찬과 인기를 끌어 영광을 갈취하기 위해 나뭇잎이 풍성하도록 열심과 열정을 다하여 외식된 행위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외식된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함을 예수님은 미리 알고 계셨기에 아예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저주하셔서 구원의 문을 닫으셨음을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야고보는 이와 같이 목이 굳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들의 행함은 생명을 얻고자 하는 행함이 아니라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으니 그 믿음은 “귀신들이 믿는 믿음이다"라고 정수를 찌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열심을 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대적하고 죽이고 복음을 말살하는 온갖 악을 행하고 있으니, 그 행함은 마귀의 행사요 너희가 자랑하는 믿음은 귀신들도 알고 떠드는 구원이 없는 죽은 믿음이다고 강력히 비난한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약 2: 19-20). 즉 하나님을 한 분으로 믿는 그 정도의 지식은 귀신들도 알고 두려워 떨고 있는데, 너희가 자랑하는 행위나 믿는다고 하는 신앙이나 모두가 귀신들이 떠드는 것과 방불하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허탄한 믿음이다고 못을 박는다. 이로 보아 야고보의 요점은: 만약 너희 믿음이 온전하다면, 너의 행함으로 그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참 믿음임을 증거하라는 것이며,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의 모든 것들은 귀신들이 믿는 죽은 믿음이라는 일갈이다.

‘귀신들이 믿는 믿음’이란, 자신들이 가진 특권과 우월성과 자부심만 내 세우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 합당한 행위란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가 없으며, 오히려 마귀와 한 패가 되어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대적하며, 진리의 복음을 말살하는 온갖 악을 서슴없이 행하는 그 행위가 바로 귀신, 마귀에서 나온 행사이며, “귀신들이 믿는 믿음”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묻는다. 야고보는 형식적이고 외식되고 거짓된 죽은 믿음을 비난한 것이며, 믿는 각 사람은 자신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인지를 믿음의 행함으로 증거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자기 영광만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행함이 얼마나 외식되고 거짓된 것인지를 일곱 가지 화로 선포하셨다 (마 23:13-33):

마 23: 25-28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멸26 눈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세우기 위해 얼마나 외식된 행함과 거짓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폭로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아,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강력하게 책망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 초점이 자기 영광만을 구하기 위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적인 행함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즐겨 먹는 것들이 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며”(요일 2:16), 때문에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45)라고 너희는 너희 행함으로 스스로 마귀의 자식임을 증명하였다고 지적하셨다. 즉 너희는 말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너희들이 내어놓는 행위는 거짓이요 외식이요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추구하는 탐심으로 하나님의 선한 법마저 악용하여 영혼들을 죽이는 악행을 서슴없이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살인하는 데까지 가게 됨으로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결론: 야고보는 바로 이와 같은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 너희 믿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실상은 귀신들도 믿는 귀신에게 속한 믿음이며, ‘영혼 없는 죽은 믿음’이라고 지적한다(약 2:26). 너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너희의 행실로 너희 믿음의 진실성을 증명하라는 일갈이다. 야고보는 그들이 믿는 믿음이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믿음인지 아니면 마귀의 탐심에서 나온 거짓된 믿음인자를 식별하는 유일한 기준이 바로 그들의 ‘행함’에서 나오는 열매이기에 특별히 ‘행함’을 강조한 것이다. 즉 믿음이 있노라고 말하지만 그들이 행하는 일은 오로지 자신의 유익과 자신의 의와 영광을 쟁취하는 썩은 것을 심고 썩은 것을 거두는 귀신들이 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믿은 믿음의 자손이요 구원받은 족속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었지만, 그들의 ‘행위’는 마귀의 행사였음이 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고 자고 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진리를 말살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마귀의 행사이며 귀신에게 속한 죽은 믿음임을 스스로 증면한 것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참 믿음의 행함

약 2:21-24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는 유대인들의 거짓된 행함과 죽은 믿음을 지적함과 동시에 참 믿음의 행함을 아브라함의 순종과 기생 라합의 행함을 예를 든다:

(1). 기생 라합의 행함: 여호수아 2 장에서 보면, 라합은 도덕과 윤리적으로 방탕한 기생이었고, 그녀에게서 의라 인정되는 행함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녀 자신의 행함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하지만 멸망으로 정해진 여리고 성에 오직 기생 라합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한 여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전체 이스라엘을 그 성 앞에 멈추게 하시고 먼저 정탑군을 들여보내어 구원의 소식을 전해주게 하셨다. 이방 기생 라합은 은혜를 입어 히브리인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선물로 받았고, 그 믿음이 그녀로 하여금 히브리인 정탐들을 숨겨 주므로 자기 나라를 팔아먹는 반역자가 되었다. 비록 라합의 반역은 죽어 마땅한 악에 속한 행위였지만, 하나님의 믿음으로 행하였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아 멸망에서 구원을 받았으며,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족보에 오르는 은총을 입었다. 야고보는 기생 라합의 행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행하였기에, 믿음에 근거한 그의 행함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음(약 2:25)을 제시한다.

(2). 아브라함의 행함: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믿음으로 독자 이삭을 희생 제물로 드릴 수 있었으며 하나님은 당신이 주신 믿음에서 나온 행함 이었기에 의로 여기셨음을 제시한다. 더 확실히 말하면, 아브라함이 독자를 받치는 행위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살리기 위해 독자 이삭을 받치게 하셨으며, 그 희생 제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지 행위가 아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희생 제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하나님 앞에 의로워짐을 이삭의 제물로 미리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행함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신실하심과 언약에 충실하신 하나님의 믿음과 열심에서 격발되어 나왔기때문에, 하나님의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하나님의 행함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온전케 하셨다는 것이다(약 2:22). 아브라함의 전 인생은 하나님의 믿음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믿음이 그를 믿음의 아버지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행함이었다.

아브라함은 아직 아무것도 행한 것 없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우상숭배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불러내셨으며,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을 것이라는 언약을 일방적으로 선언하셨다. 그는 100세가 다 되도록 자식이 없게 되자, 하나님의 언약 성취에 도움을 주기 위해 종 하갈을 끌어들여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언약의 씨로 인정하여 자손들이 번창하기를 하나님께 구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택한 이스마엘을 부정하시고 내 쫓아버리시고, 당신이 준비한 이삭을 말씀으로 잉태시켜 그의 자손으로 정하셨다. 그리하여 바울은 행위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단언한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2).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기나긴 사귐과 실수와 험한 인생에서 하나님의 믿음이 자신을 굳게 붙잡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아브라함이 약속의 씨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씨를 보존하시며, 그 씨는 지켜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제물로 받쳐지는 희생으로 이루어짐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언약 성취는 인간이 힘을 보태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이시며 하나님의 열심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행함은 하나님의 믿음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주도권으로 행하여진 하나님의 ‘행함’이 아브라함의 행함으로 인정되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믿음과 열심과 열정으로 만들어지고 빚어진 작품이다. 아브라함이 먼저 자신의 독자 이삭을 받쳤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함을 보시고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이 아니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구원의 의를 성취하시는 뜻은 창세전 하늘나라에서 이미 이루어진 변할 수 없는 묵시이며, 그 하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주셨으며,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의 행함을 이끌어내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행하시는 의로운 행함을 우리 성도를 통하여 나타내시고 우리가 한 것으로 인정하여 주신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얼마나 우리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시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선물이며, 때문에 행함의 대가로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이루어 주신 피의 공로를 믿고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으로 소유됨을 성경은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기에 기필코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이미 택하여 놓으셨고 의롭게 하셨다고 말한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 1:4-5).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롬 8:30).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입은 자들이기에 의롭다 함을 받아 영화롭게 된 자들이다. 이것이 은혜를 입어 구원으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의 현실이다. 이는 나의 선택, 나의 의지, 나의 노력이라는 행위에 좌우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이미 완성된 옷을 입는 것과 같이 은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완성하신 구원을 믿음으로 입는 것임을 말한다. 그 은혜는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신 은혜이며,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으로 이르는 믿음을 주셨으며,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기에 의롭다 함을 받았으며, 모든 것은 은혜와 사랑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열심과 열정임을 성경은 시작부터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점진적으로 확실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