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으라"의 영적 의미 (눅 12:35-40)
눅12:35-40
12: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깨어있음’ 이란?
주인이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각각 사무를 맡기며 ‘깨어 있으라’라고 명하신다. 즉 집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에 항상 깨어 있는 상태로 주인의 돌아오심을 맞이하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깨어 있어라’ 라고 말씀한 주인의 의도는 육신의 깨어있음과 행위의 열심을 요구하시는 뜻이 아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기 위한 육신의 깨어있음은 생리적으로도 의지적 노력으로도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며, 그런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주님은 이 비유에서 굳이 “깨어 있으라”라는 어구를 네 번씩이나 반복하여 쓰심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깨어있음’의 진의는, 우리의 모든 관심, 모든 삶의 초점을 내 안에서 선한 뜻을 이루어 가시는 주님에게 맞추라는 뜻이다. 그 ‘깨어있음’ 의 삶은 나의 노력과 열심에 관한 주관적 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동행하는 영적 연합 상태를 말씀하고 있다.
하지만 내 안에서 그분이 자신의 소원을 두고 일하심을 가로막고, 앞질러서 내가 무엇인가를 해서 ‘깨어있는자’가 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의 의지와 주관적 열심에서 나온 육신의 일이기에 세상을 향하여서는 공로와 업적들을 쌓는 ‘깨어있는’ 상태이지만,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그 영이 죽은 상태임을 제시한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깨어있는 자와 졸고 있는 자를 확실히 구분하여 주셨다. 그 분명한 구별이 바로 신랑을 맞이하려 나선 열 처녀의 비유이다. 열 처녀는 모두가 육신의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을 자고 있었다 (마 25:5). 그런데 그중 오직 은혜를 입은 성령의 기름이 부어진 다섯 처녀만 혼인 잔치에 끌어들인 것이다. 그 다섯 처녀의 ‘깨어있음’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신랑을 맞이할 기름을 미리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며, 그 기름은 아무리 타도 없어지지 않는 성령의 기름이었기 때문에 그 영원한 기름이 다섯 처녀를 ‘깨어있는 자’로 만든 것이다.
반대로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자신의 노력과 열심으로 기름을 준비하여 나와서 신랑을 맞이하는 대열에 서 있었지만 그 기름은 이 세상 육신에 속한 인간이 준비한 기름이었기에 금방 타서 없어짐으로 그들의 깨어있음이 허사가 되고 졸고 있는 미련한 자로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직 택함을 받은 다섯 처녀만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영생의 기름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깨어있는 자로 슬기로운 처녀’로 인정받아 혼인잔치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깨어있음’은 인간 쪽에서 노력하는 육신적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즉 성도는 무엇인가를 하는 일에 열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와 하나로 동행하시는 그분을 아는 일에 열심을 부리는 것이며, 매일 나에게 일용할 양식으로 먹이시는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깨닫는데 열심을 부리며,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는 자기부인의 삶을 추구하며, 그분의 선한 인도에 순종으로 받아들이기를 기뻐하며, 내 안에서 그분의 뜻하신 의로운 일과 그분의 나라가 속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간구하는 그 상태가 바로 “깨어 있음”의 상태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절대적 의존자이며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생명을 보존하게 되는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이다. 생명의 뿌리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 붙어있음으로, 농부 되신 아버지가 열심히 가꾸어 주심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지 가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가지가 떨어져서 말라서 죽지 않고 나무에 꼭 붙어있는 것은, 생명을 공급하여 주는 뿌리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뿌리가 없이 가지가 존재할 수 없고, 밭을 가꾸어 생명의 씨를 심어주시는 농부 없이 열매는 맺힐 수가 없는 일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 나무에 붙었기에 생명이 유지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열심과 노력을 다하여 공로와 업적을 내 놓으라’ 또는 ‘율법을 지키고 행하여 의인이 되라’라는 육신적 ‘깨어있음’의 의도로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다. 반대로 ‘너희는 처음부터 흙으로 만들어진 이 땅에 속한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육신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법을 지킬 수도 행할 수도 없는 무익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으라고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실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떻게 이 땅에서 나에게 이루어졌는지를 배우고 그분의 생명 안에 거하는 믿음으로 그분에게 꼭 붙어있어라는 의도였다.
육신적 '깨어있음'
오늘날 교회는 온통 육신으로 행하여지는 ‘깨여있음’으로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사람들의 칭찬과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육으로 행하여지는 업적과 공로들은 하늘나라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주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열심을 부려 행한 기적과 공로들을 마귀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마귀의 행사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요 8:44) 부르셨다. 주님은 그들이 자랑하는 능력과 기적들을 모두 부정하시면서 “너희가 어디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이 악한 자들아, 모두 내게서 떠나가거라”(눅 13:27) 라고 질책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으로 행하여 쌓아놓은 업적들은 멸망으로 정해진 이 땅에 속한 것들이며, 죄인에게서 나온 배설물과 같은 것들은 거룩한 하나님에게 드려질 수도 또한 용납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육신에서 나온 것들을 받을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요 6:63),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6) 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은 오직 영으로 거듭난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새 사람만 받으시기에 우리 육신의 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는 방법으로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다.
이 세상에서 행하여지는 업적과 공로들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기에 세상적 가치로는 의로운 것으로 또는 의인으로 인정받을지 모르지만, 그 행함의 근원이 바로 마귀의 탐심과 욕심이기 때문에 스스로 멸망과 지옥을 자초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지옥의 자식’ ‘독사의 새끼’라고 부르시고 그 들안에는 ‘탐욕과 방탕과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지적하셨다.
요 8: 44 -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마 23:26-28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 23:33 -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인간은 처음부터 의로운 행위와 노력과 열심히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서 누리는 목적으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든 인간을 죄 아래 죄인으로 가두어 두셨다 (갈 3:22). 죄인이 죄인으로 살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입혀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의가 나타나며, 하나님의 생명의 진리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천지가 아직 창조 되기 전에 먼저 “어둠과 공허와 흑암”을 두심으로 이 세상의 “어둠과 공허와 흑암”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는 역사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고 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의 의와 선과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먼저 ‘어둠과 공허와 흑암’들을 있게 하시고, 모든 인간을 죄 아래 죄인으로 가두어 두시고 당신의 뜻대로 역사를 주관하신다.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어 두셨다는 것은, 인간은 처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 죄악의 세상에서 죄인으로 사는 존재로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즉 생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태어나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어야만 이 구원과 생명이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와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이 땅의 먼지로 만드시고 다시 땅의 먼지로 되돌림을 받는 죽음이라는 것을 정하셨다. 그리고 그 죄와 죽음에서 당신이 선택한 자만 생명을 주어 하늘나라로 끌어올리는 구원을 성취하셨다.바울이 이 오묘한 진리를 깨닫고 이르기를,
갈 3:22 -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롬 11:32 -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네 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그럼에도 율법적 행위로 의롭게 할 수 있다고 또한 성화할 수 있다고 열심을 부리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치욕적인 모독이며,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거역하는 일이며, 값없이 죄인에게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적극 대적하는 망령된 짓이다. 왜냐하면 죄인의 몸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다 더러운 걸레이며 거름 더미이기에 절대로 하나님에게 용납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이사야 64:6). 그러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12) 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들의 행위를 스스로 의롭다고 너스레를 떠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 독사의 새끼, 배나 더 되는 지옥의 자식이라고 부르시고, 그렇게 영의 하나님을 육의 신으로 끌어 내리려는 그들을 향하여 영원히 사함을 얻지 못하는 ‘성령 훼방죄’로 심판을 선고하신 것이다.
'깨어있음' 삶을 보여주신 주님
택함을 받은 성도는 오히려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으로 이 세상 것들이 다 털려 나가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짐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거지 나사로’와 같이 아무것도 할 수도 또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이지만, 그 마음에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보화만을 담은 예수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절대적 의존 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 자가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깨어있는 복 받은 종이다. 주님은 그렇게 오직 주인만을 믿고 오직 주인만을 바라보며 주인이 원하는 삶에 순종하는 충실한 종들을 높여주신다는 의미에서, 주인이 종들을 앉힌 후 친히 “띠를 띠고 종의 수종을 들어주시기에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눅 12:37)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 말씀에서 자신이 바로 그 주인이며, 우리가 바로 그렇게 주님 안에 있어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이 주시는 생명력으로 살아 있는 자이기에 "깨어있다"고 말씀하시며, 그렇게 오직 주님만을 마음에 담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충실한 종들을 섬기려 오셨음을 제시하신 것이다. 주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그대로, 잡히시던 날 마지막 성찬에서 허리에 띠를 띠고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으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복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참 주인이시며 영원한 주인이심을 증명하셨다.
예수님이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은, 예수님의 일방적 희생으로 장차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그 보혈의 피의 씻기심에 의해 죄인들의 모든 죄가 깨끗하게 도말됨을 미리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우리의 모든 부정함을 완전히 씻어주시기 위해 그분은 하나님의 보좌의 자리에서 이 천한 세상에 내려오셔서 일방적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겨주라’ 라고 명하시면서 주님이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그 은혜의 복음을 깨닫고 증인의 삶으로 땅 끝까지 복된 소식을 전파하시기를 원하셨다(행 1:8).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복음은 주님의 본을 따라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자기부인의 십자가 삶으로 전파되고 확장됨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렇게 주인 되신 예수님이 오히려 죽으려 내려오셔서 우리의 발을 씻겨 주신 것 같이 나도 종의 자리에 내려가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으로 내 안에 있는 예수 생명의 보화가 다른 이에게 전달되는 그 증인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화를 들어내기 위해,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이와 같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증거하는 자가 ‘깨어있는’ 자들임을 제시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깨여있음의 삶은 우리의 자체에서 나오는 의지적 열심과 행위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권능과 사역에 의해 이루어짐을 확실히 말씀해 주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오실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지 너희가 하는 일이 아니며, 또한 성령의 권능과 인도가 없이는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확실하게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증인의 삶, 깨어있음의 삶은 우리의 열심과 노력에서 격발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지게 됨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그분이 성령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이기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내가 온전히 부인되고 죽어야 하는 십자가 삶임을 제시하여 주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 2:20).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라는 신앙으로 수렴이 되는 것이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키고 깨어 있어라
눅 12: 36-37 -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이 비유의 두 번째 핵심은, 주인이 지금 혼인잔치를 치르고 돌아온다는 말씀이다. 즉 혼인잔치는 이미 완료된 잔치라는 것이다.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12:36). 주인은 혼인잔치를 치르려고 우리를 데리려 오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료된 혼인을 종결하시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주인은 종들에게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키고 ‘깨어있으라’라고 명령을 하신다. 그 깨어있음의 상태는 결코 우리의 의지와 행실에서 나오는 육신의 깨어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나로 동행하시며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그 연합의 상태가 바로 성령의 띠를 허리에 띠고 말씀의 등불을 키고 말씀으로 진리가 되어 있는 상태를 말씀하신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성령의 띠가 묶여저 있기 때문에 육체가 원하는 삶을 사는 자가 아니라, 반대로 원치 않는 길로 이끌려 가게 되며, ‘등불’이신 진리의 말씀이 성도를 양육하고 연단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에 합당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가신다는 은유의 말씀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8) 라고 말씀하여 주심으로 이제 베드로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자가 아니라, 성령님이 강권적으로 하나님의 뜻하신 이미 정해 놓으신 길로 끌고 가기에 육신은 그 성령의 인도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이 주관하시는 성도의 삶이 바로 내가 부인되고 내 ‘자아’가 죽는 죽임을 당하게 됨으로 ‘매일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게 된다’ (롬 8:36) 라고 성도의 십자가 삶을 제시하고 있다. 주님도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자기를 부인하는 그 십자가의 삶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게 되는 성도의 신앙 여정이며 그렇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바로 주님과 동행하는 성령의 띠가 묶여 있는 ’깨어있는’ 자임을 제시한다.
그렇게 성령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주님의 신부로 탄생하여 혼인잔치에 복귀하는 자는 창세전 예수그리스도 생명 안에서 이미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창세전 신부로 예정된 자는 그 안에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겨자씨 한 알의 믿음으로 잠재하고 있기에 주님은 이 세상에서 오직 그들만을 깨우셔서 당신의 혼인잔치에 복귀하여 주심을 계시하신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4-5). 그러므로 ‘깨어있음’의 주체는 인간의 의지나 노력이나 행위에서 결발되는 것이 아니다. 창세전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는 성령님이 그 안에 내주하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깨어있는 자로 들림을 받게 된다는 불가항력적 은혜를 제시하신다.
'깨어 있어라'의 진의 : 자기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
주님은 막 13: 35-37에서, 집 주인이 언제 오실지 그 시간은 누구도 모르기에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시며 깨어 있는 자만 들림을 받게 됨을 제시하신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두 사람은 똑같이 밭에서 일하거나 또는 맷돌질을 하는 일상으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마 24:40-41). 그 중 한 사람은 그 마음에 예수그리스도 보화를 담고 하늘에 소망을 둔 깨어있는 자로 처음부터 택함을 받은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였기에 그가 무엇을 하든 상관없이 일상생활에서 '깨어 있는 자로' 들림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 남겨진 사람은 이 땅에 소망을 둔 이 땅의 것을 추구하는 졸고 있는 육신의 사람이기에 이 땅에 버려둠을 당하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오직 창세전 택함을 받은 자기 백성만을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에게 속한 자들만 들어 올리는 것이다 (마 1:21).
성도는 처음부터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며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의와 영광만을 드러내는 목적으로 창세전부터 예정되어 있었기에 모든 삶은 그분의 뜻과 섭리대로 이끌려가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당신의 아들로 신부로 새 창조를 입게 되는 존재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도는 피조물의 자리, 즉 없음의 존재에서 오직 은혜를 입어 생명을 얻었음을 깨닫고, 그분의 모든 선한 일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성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자기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지향하게 되며, 그 삶이 성령의 띠를 띠고, 말씀의 등불을 키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는 “깨여있음”의 믿음 생활임을 제시한다.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과 같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 6:14),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 14:8)이다. 이와 같은 철저한 자기부인의 십자가 삶을 지향하게 되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목적으로 피조된 존재임을 깨닫게 되며, ‘깨어있어’ 오직 신랑 되신 주님만을 바라보게 된다.
예를 들면, 옥함을 깨는 사건에서 여인이 한 것은 평생 열심히 모아놓은 재물로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한 헌신이 아니라, 값비싼 향유를 구입하여 옥함을 깨서 귀중한 향유를 몽땅 예수님의 발에 쏟아붓는 낭비였다. 그렇게 자신의 전부를 다 깨서 예수님에게 쏟아붓는 그 여인을 주님은 복음을 소유한 자로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 14:9)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은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이 여인의 이야기가 함께 전하여 진다는 말씀이 아니라, 이 여인이 행한 일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에 관한 복음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말씀이다. 자신의 평생 모은 재산을 전부 허비한 향유를 담은 옥함이 깨지고 그 향유가 예수에게 부어진다는 것은, 세상 사람으로 살던 내 옛사람이 깨져서 나도 예수와 함께 장사 지내는 죽음에 함께 동참하게 되는 성도의 모형이 이 여인의 행함에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도는 자신의 모든 것이 다 깨지고 버려지는 자기 부인의 자리로 내려가 예수와 함께 내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예수에게 속한 새 신부로 부활하게 된다는 복음을 이 여인의 행한 일로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이 바로 성도가 지향하게 되는 ‘깨어있음’의 신앙생활이라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