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5:3-5) [1]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 과연 성화란 가능한 것인가?
롬 5:3-5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바울이 말하는 ‘환난’이란? 과연 성화란 가능한 것인가?
바울이 말하는 환난은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겪는 이 세상 인생살이와 같은 고생과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임한 성도에게만 소망이 이루어지는 환난임을 제시한다. 즉 성도의 삶이 환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성도는 이 세상에서 날마다 도살당하는 양과 같은 환난을 겪게 되지만 그 환난은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사는 소망을 이루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하나님의 믿음이 하늘나라 소망을 이루도록 굳게 붙들어 주시며, 그 믿음이 우리를 인내와 연단으로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에 비록 육체로는 환난을 당하지만 영으로는 하늘나라 소망이 이루어짐으로 그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우리에게 향하신 사랑으로 인내하며 기쁨과 즐거움과 평강을 잃지 않게 된다는 역설을 하신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5:3-5).
바울이 말하는 ‘환난’은 참고 견디어 내어 훌륭한 의인의 모습으로 성숙하고 성화하라는 뜻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조상으로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민족으로 4000여년의 환난과 시련을 겪어왔다. 그들처럼 많은 환난을 겪어낸 민족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환난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하고 하나님을 떠나 줄기차게 이방신을 섬김으로 수시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자들이었다. 그렇게도 많은 환난과 시련을 겪어 왔음에도 더욱 성숙하고 발전하여 성화에 도달하는 민족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마음이 더욱 강퍅하고 목이 굳은 독사와 같은 패역한 자들로 드러난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도 소망하고 기다리든 메시아를 영접하지도 않았고, 오리려 멸시하고 천대하고 대적하고 핍박하였으며, 결국은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 더욱 사악한 죄인으로 끝나는 것이지 ‘성화’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있을 수가 없는 현실임을 우리 자신들의 삶속에서 너무나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지 않는가! 환난을 통과한다고 하여 성화에 이른 자로 의로운 자로 변화 된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해석되고 해부됨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고집하게 된다.
환난을 인내로 견디어 참고 이긴다하여 성화로 발전하고 성숙하여 의인이 되는 일은 육체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에 육체로 성화가 가능하고 의인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면, 육신을 죽음으로 정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발전하고 성숙하는 성화로 의인이 되는 행위와 업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시작부터 분명하게 반복하여 이 세상 육체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시 53:1-3)라고 확실하게 선고하고 있다. 이 땅에서 티끌로 지음을 받은 육체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늘나라의 의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달으라고 율법을 주셨으며, 율법으로 죄인이라 정죄하시고,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내려주시지 않으셨는가! 그럼에도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육적 행위로 성숙하고 발전하고 죄를 다스려서 성화에 이르라고 인간의 거짓된 의를 강요하고 있다면 그 자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망령되게 하는 생명을 죽이는 독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오늘날 유명한 교회 목회자들이 두려움 없이 그러한 망령된 설교를 하고 있다. 처음부터 인간에게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선포하셨다는 것은 육으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우리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셨으며, 인간의 육을 입고 오셔서 인간의 모든 죄를 십자가 ‘죽음’으로 도말하시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이 임하는 은혜를 입혀주셨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의 진정한 의미는, 이 세상의 실존과 자신의 실체를 환난을 통하여 철저히 깨닫고 인정하며,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며 그분의 통치에 항복하고 순종하는 자기 부인과 죽음으로 내려가는 것이며, 곧 환난이 빚어내는 연단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상 애급에서 끄집어내자마자 세상 애급에서 먹던 양식을 완전히 끊는 광야로 몰아붙이고 옛사람이 굶주려 죽는 환난으로 끌고 가셨다. 그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신령한 만나만 먹게 하셨다. 그리고 율법을 내려주셔서 죄인들의 정체성을 완전히 폭로하시고 죄인으로 정죄하여 결국은 세상 애급 인으로 살던 옛 죄인은 광야에서 죽은 시체로 ‘없음’의 티끌로 되돌림을 받게 하셨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시는 만나만 먹고 태어난 새 사람만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40년 광야의 환난과 시험을 주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은혜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리라는 진리를 알게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명기 8:3).
이와 같이 성도는 이 세상 땅에서 육신의 환난을 통하여, 일용할 양식으로 주신 성경 말씀을 받아먹음으로, 먼저 우리를 죄인으로 티끌의 존재로 없음으로 분석하시고 폭로하셔서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는 십자가 죽음을 통과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탄생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리의 말씀은 검으로 우리를 죄인으로 해부한다. 그 말씀의 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히 4:12) 투명한 해부를 겪게 하신다. 이때껏 자신의 수치와 죄를 덮어 감추기 위해 마음속 깊이 감추어 두었던 수많은 위장과 가면들을 벗겨내시며 벌거벗은 수치스러운 죄인으로 사망에 놓여 있음을 처절하게 깨닫게 하시기 위해 환난과 시험을 허락하신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철저히 인식하고 깨달은 자에게 터져 나오는 것이 바로 상한 심령으로 애통으로 필사적으로 구하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은혜뿐이다. 성도는 환난의 삶 속에서 ‘나는 모태 중에 태어난 죄인이다’는 다윗의 애통으로 자신의 실존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며, ‘나는 선한 자로 변해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매 순간의 생각마저 온통 나의 유익만을 챙기는 뼛속까지 패역한 죄인이며, 도저히 깨끗한 것이 나올 수 없는 ‘더러운 걸레와 같은 존재이구나!’ 라는 자신의 실체를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의 말년의 고백과 같이, “내가 바로 죄인중의 괴수구나”; “오호라 나는 공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15-24)라는 처절한 애통이 터져 나오는 것이지 ‘더디어 성화에 도달 했구나’를 외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환난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애통으로 믿음의 연단과 하늘나라가 내 안에 임하는 소망이 이루어짐으로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소망이란? 환난을 즐거움이라고 역설을 하는 바울의 진정한 의도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평강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어 나타나는 것이 ‘환난’이라고 역설을 하고 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5:2-3). 왜냐하면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로운 생명의 창조를 일으키기 위하여 우리 주님이 성령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오로지 나만을 위해 살던 내 자아를 깨고 부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길로 끌고 가시며, 그 길은 주님이 나와 동행하셔서 믿음을 잃지 않도록 끝까지 붙들어 주심으로 아무리 험하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벼락 끝에 섰다 할지라도 전능하신 주님 안에서 함께 겪는 일이기에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도록 굳게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결코 소망을 이룬다는 확신을 제시한다. 즉 이 모든 것을 다 겪고 난후 우리에게는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는 소망이 있고 아버지가 우리를 맞이하여 주시는 품이 있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5: 3-5)라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결코 하늘나라 소망을 이루신다는 확신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현실이 아니라, 내가 돌아갈 영원한 집,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끝나면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는 소망이 현실임을 제시한다.
소망이란?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사는 것이 소망이 되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품을 따라 창세전부터 반드시 성취되는 구원을 묵시로 묶어 놓으시고 그 묵시대로 이 땅에서 성취하여 주셨기에 중도에서 포기되거나 미래에 변경되거나 과거에 후회하는 일이 절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완료된 나라이기에 변화와 성숙과 발전과 보태거나 빼는 것 같은 것이 없는 “영원” 그 자체이다. 즉 후회라는 과거가 없고, 근심 걱정으로 사는 현재가 없고, 불안과 두려움으로 맞이하는 미래라는 것이 없는 영원이다.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며”(약 1:17). 때문에 하늘나라는 시간에 묶여 사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영원한 나라이며, 영으로 사는 나라이기에 육신으로 겪는 환난과 고통의 눈물과 아픔이 없는 오직 한결같은 그리스도의 빛과 하나님의 영광뿐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예를 들면, 타락하기 전,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 안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에 아무런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과 같은 것들이 없는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었음을 ‘그들이 벌거벗은 몸이었으나 부끄러움을 몰랐다’(창 2:25)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이제 역사 속에 던져져 사간에 묶여 고생과 썩어짐의 죽음을 향해 달리는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그 현실을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만)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곧 불살라지고 없음이 되는 것이 바로 역사의 실체라는 말씀이다. 이 역사와 인생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창조 전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계시하여 주셨으며, 이 땅은 “가시와 엉겅퀴”와 같은 죄악들을 쌓아서 죽음과 멸망으로 향하고 있음을 제시하셨다.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은,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종말을 향해 달리고 있으며 반드시 부패와 썩어짐으로 끝나고,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을 사는 하늘나라에만 소망이 있음을 계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한 후, 어린 아기로 잉태하여 자라남과 성숙과 늙음과 썩어짐의 죽음으로 종말을 고하는 ‘시간’이라는 한계를 주셨다. 하지만 첫 인간 아담은 아기로 태어나 자라가고 성장하는 과정이 없이 처음부터 완료로 창조된 성인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완료된 나라이며 완료된 백성들이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영원을 사는 것임을 계시하셨다. 에덴동산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며 그래서 에덴동산 안에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생명나무가 있었던 것이고, 인간이 타락하자 이내 에덴동산 밖으로 던져진 자가 되었으며 그때부터 에덴동산 밖의 세상에서 시간에 묶여 사는 노예의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성도는 이 허사인 역사 속에서 시간으로 사는 육체의 공허함과 허무함과 무능함과 썩어짐의 정체성을 알아가고 깨닫는 것이며, 육체가 만들어낸 이 역사의 종말이 어떠한 것인지를 인식하고,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영생을 사는 하늘나라를 소망하도록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 하늘나라를 사는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나라는 육적 자아가 점차적으로 삭제되고 이마에 적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어 그리스도와 하나로 함몰되어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소망하며, 그 과정이 바로 성도가 겪게 되는 환난이다. 즉 새로운 피조물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아버지의 아들로 잉태하고 탄생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가 부정당하는 죽음의 환난을 반드시 통과하게 된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육신으로는 환난과 곤고와 시련을 겪으면서 영으로는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그 현실을 동시에 살고 있음으로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2-3). 육의 환난과 영의 소망이 공존하는 삶을 살게 됨을 제시하고 있다(롬 7장). 다른 차원의 삶이지만 공존하면서 서로 배척하는 치열한 갈등과 싸움과 전쟁을 겪게 되며 거기에서 믿음이 발휘하여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나가지 않도록 굳게 붙들어 주시며 반석 같은 믿음으로 세워주시며, 하늘나라 소망이 이루어짐으로 평강과 기쁨으로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한다고 역설로 말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이 땅에서 짓은 육신의 이름으로 역사 속 시간에 묶여 잠시 살다가 한줌의 흙으로 되돌림을 받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이 땅의 삶의 법칙이다. 그 중에서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자들만 없음에서 있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올라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하나로 사는 하늘나라의 아들들이 되는 소망을 이루어 주셨다.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흙으로 지음을 받은 육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과 결국이 ‘죽음’이라는 것을 확인받는 환난을 겪어내는 것이다. 나는 없음이고 죽음이며, 오직 나를 죄와 사망에서 살려내신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주인 되시며 나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창조주이시며 그분에게 속하여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으로 그분의 통치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된다. 성도는 이 세상 지옥에서 사는 삶 자체가 바로 환난이고 곤고이다. 그 환난과 곤고를 겪으면서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악하고 추악한지를 폭로당하고 인정하게 되며, 이 역사와 인생의 결국이 멸망임을 깨닫고 그 배설물 같은 역사가 나에게는 죽은 세상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올라오는 것이 바로 환난이 낳는 연단이고 소망이기에 바울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한다고 역설로 성도의 지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반드시 ‘없음’으로 내려가는 죽음의 환난을 통과하게 된다
(1). 창세기 첫 창조에서 계시하신 환난
창세기 1: 2절에서 우주의 원시적 상태가 바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었다. 역사는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빛이 임하자 하늘과 땅, 낮과 밤, 바다와 육지가 찢어지는 분리가 먼저 일어났고, ‘공허’라는 없음에 생명의 채워짐이 일어났고, ‘흑암’과 같은 죽음에서 생명의 창조가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창 1:3). 역사를 분리로 시작하셨다는 것은, 이 세상은 분리되는 해체와 쪼개짐과 삭제되는 환난으로 운용될 것임을 계시하며, 이 세상 어둠에 속한 자와 하늘나라 빛에 속한 자를 구별하시고 분리하시는 환난이 일어날 것임을 계시하셨다. 즉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빛에 속한 자는 이 세상 어둠에서 쪼개져 나가는 환난을 당할 것이며, 어둠이 삭제되고 빛으로 채워져서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되는 연단을 통하여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사는 소망이 이루어짐을 이미 첫 창조에서 여섯째 날에 모든 일을 다 미치신 후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는 그림으로 보여주셨다. 즉 장차 이 땅에서 완성될 하늘나라 안식의 소망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그 완성될 하늘의 ‘안식’이 성경에서 어떻게 점진적이며 점층적으로 전개되어지고 설명되어지고 있는지를 출 애급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 애급에서 탈출하여 안식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그림으로 선명하게 보여 주신 것이다.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참 안식으로 소망이 이루어짐을 더욱 뚜렷하고 명확하게 확실하게 예수그리스도의 임재와 십자가로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세상 애급 땅에 집어넣으시고 400년 동안 종살이라는 환난을 겪게 하셨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모형하는 모세를 들여보내셔서 애급의 환난에서 끄집어내어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거처도 없는 광야로 몰아넣은 것이다. 이스라엘은 40년이라는 긴 광야의 환난 속에서 육신의 양식과 물과 거처를 끊어버리시고 오직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와 반석에서 나오는 샘물과 구름기동과 불기둥을 거처로 삼고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인내로 연단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소망을 이루어 주셨다. 하나님은 40년이라는 광야에서 결국 세상 애급에서 탄생한 옛사람은 환난 속에서 죽음으로 삭제되고, 오직 광야에서 탄생하여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신령한 만나만 먹은 새 시대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여보내신 것이다.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분리되는 찢어짐과 쪼개지는 환난으로 옛 사람이 삭제되는 죽음을 겪어내야 만이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여 하늘의 백성이 되는 소망이 이루어짐을 명확하게 그려주신 것이다.
(2). 인간 창조에서 계시하신 환난
천지 창조에서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에 찢어짐의 분리가 일어난 것과 같이, 첫 인간에게도 똑 같은 찢어짐의 분리가 일어난 것이다. 창세기 2장에서 한 몸으로 신랑 안에 있었던 여자가 남자로부터 분리되어 객체가 되자 그 객체가 된 여자가 먼저 사단 뱀의 유혹을 받아 죄라는 것이 등장하고, 그 여자의 죄가 남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장면이 등장한다. 남자는 여자가 주는 죄를 먹음으로 여자 때문에 죄인이 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바로 우리 신랑 되신 예수님이 타락한 여자를 살리기 위해 여자가 준 죄를 받아먹음으로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 환난을 당하게 됨을 계시하셨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 세상을 상징하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죄가 없으신 그분이 바로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세상 임금으로부터 고난을 당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사야 53장 5절에서 예수님이 당하셔야 할 고난을 미리 예언하여 주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고 핍박당하고 수모를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는 환난을 겪어내시고, 부활하셔서 이 세상 모든 악을 제거하시는 심판주가 되셨다.
이 역사 속에서 첫 인간이 타락함으로 사람이 사단 마귀의 먹거리가 되는 환난을 당할 것임을 창세기 3장에서 미리 선포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창 3:14). 그리고 사람에게는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라고 사람이 뱀에게 먹거리로 던져져 흙으로 되돌림을 받는 죽음이 선포된 것이다. 이제부터 사단 뱀은 인간을 삼켜 먹는, 잠시 이 세상 신으로 인간의 육을 지배할 것이며, 그것이 여자인 성도가 이 세상에서 당하게 되는 환난이다. 즉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어뜯는 환난과 곤고를 겪게 됨을 미리 선포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말씀 그대로 타락한 아담과 하와의 첫 번 째 동침에서 이 세상 마귀를 상징하는 가인과 하늘나라 성도를 상징하는 아벨이 탄생한 것이며, 악인 가인이 의인 아벨을 핍박하여 죽이는 첫 살인이 등장한 것이다. 이는 역사 속에서 성도는 끊임없이 마귀의 공격과 핍박과 환난으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며, 이 세상에 속한 육신이 죽어야 만이 새 사람으로 탄생됨을 계시하여 아벨을 잃은 여자가 남자에게로 다시 돌아가 동침하자 새 생명인 ‘셋’이 탄생한 것이다. 남자에게서 나와서 객체가 된 여자가 먼저 타락하여 죄를 짓고, 그 죄를 남편에게 전가시켜 죽음에 빠뜨리게 하였지만, 다시 남편에게로 돌아가 한 몸이 되자(창 4:1) 새로운 생명이 탄생된 것이다. 이는 장차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예수에게로 돌아가는 연합의 동침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예수에게 속한 진정한 신부로 잉태됨을 계시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악을 상징하는 가인에게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 4:7 새번역)라고 미리 말씀하셨다. 그 선포대로 악인 가인이 의인 아벨을 죽이는 살인자로 죄를 지배하는 마귀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마귀의 후손들인 이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을 박은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마귀의 본성이 바로 “살인과 거짓말쟁”(요 8:44)임을 말씀하신 것이며, 바울은 인간 자체가 바로 죄에서 나온 산물이기에 ‘죄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 마귀의 종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죄를 다스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을 죄의 노예 또는 죄의 종이라고 말하는 것은, 죄가 인간을 다스림으로 죄인으로 정죄 받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도, 더더욱 죄를 다스릴 수가 없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엡 2:1)이다. 이르기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러 왕노릇 하였나니”(롬 5:12, 14). 죄와 사망이 사람에게 왕노릇 한다는 것은, 아담의 후손인 세상 사람들 모두가 죄악 가운데 잉태되어, 죄의 종으로 태어나(시 51:5) 죄의 사슬에 묶여 죄가 이끄는 대로 다스림을 받는 죄인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성도는 이 역사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마귀의 종으로 살던 내 옛 사람이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을 박는 죽음으로 죄의 종에서 벗어난다고 바울은 확실히 말해 주고 있다.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6-7). 죄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죄인이 죽는 죽음뿐이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도말됨으로 우리를 사단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권세를 완전히 멸하시는 심판주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로 잉태하는 새 창조를 위하여 이 역사 속에서는 옛 죄인이 죽는 환난과 해산의 고통을 겪게 된다. 내가 삭제되고 내가 죽어야만 이 새로운 생명, 하늘에 속한 죄를 짓지 않는 영원한 생명으로 잉태하여 하늘나라에 사는 소망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백성에게 환난을 주시는 의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은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죄인으로서의 자신의 실체를 폭로 당하며 그 실체를 자각하고 인정하는 분리와 쪼개짐의 할례와 아픔과 고통을 건너뛸 수가 없다. 그 환난과 고통을 통하여 자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되고, 자신의 무지와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처절히 깨닫게 되며,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을 박은 예수의 피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현실을 체휼하게 된다. 하지만 육신으로는 매일 죄를 짓고 사는 현실과 그 죄를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현실에 부딪치게 됨으로 매일 도살당하는 양같이 죽임을 당하는 환난을 겪는다고 바울이 말한 것이다. 내 안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던 육체의 정욕, 탐욕, 욕망과 같은 이 땅의 것들이 위로 올라와 폭로되고, 쪼개짐으로 분리가 일어나고, 내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처음자리 ‘없음’으로 삭제되는 죽음이라는 환난을 처절하게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성도에게 ‘있음’으로 채워지는 인내와 연단이고, 새로운 생명으로 잉태하여 하늘나라가 내안에 임하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이는 매일 도살당하는 환난으로 이루어지기에 인내로 연단을 낳는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 연단이 하늘나라 소망을 이루기에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온갖 멸시와 조롱과 매 맞는 찢어짐과 벌거벗는 수치와 못으로 십자가에 매달리는 피를 흘리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예수님이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셨다는 것은, 모든 사고능력과 의지와 뜻이 완전히 하나님 아버지에게 차압되어 오로지 그분이 하라는 일만 하시는 순종과 자기 부인으로 자신이 완전히 삭제 당함을 보여주신 것이다. 손에 못을 박았다는 것은, 나의 행위가 차압당함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발에 못을 박았다는 것은, 피조물의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그 어떠한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순종으로 처음 자리를 지키는 믿음을 의미한다. 성도는 그렇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을 박힐 때 머리, 손, 발 모두가 십자가에 고정되어 못을 박음으로 세상 사람으로 살던 옛 죄인이 완전히 죽는 죽음을 통과하게 됨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게 나를 위해 살던 옛 죄인이 예수와 함께 완전히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 영원을 사는 하늘나라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여자가 이 땅에서 해산하는 고통으로 내가 해체가 되고 죽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5).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회생제물이 되신 그 사랑을 알고 그 십자가 의를 믿는 믿음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잉태됨을 말한다. 이 역사 속에서 옛 사람 죄인이 죽어야만 이 하늘나라로 옮겨짐으로 그 소망은 죽기를 원함과 하늘나라로 들림을 받기를 원하는 믿음을 말한다. 그리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가 이 세상 악과 맞서 싸우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고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죽임을 당하는 것이 소망을 이루는 믿음이라고 말한다.
히 11:35-38
35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않았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은 이 세상과 맞서 싸워서 영웅으로 자신의 의를 세우는 자가 아니라, 그냥 무력한 연약한 자로 이리 속에 보내진 도살당하는 양같이 멸시와 조롱과, 결박과, 궁핍과, 학대와 핍박과 고통을 받으면서 유리하다가 세상에게 맞아 죽는 환난을 겪게 됨을 믿음의 선배들의 순교로 말하고 있다. 성도의 세상 속 이김은, 세상에서 외롭게 고립되고, 멸시와 핍박을 당하다가, 결국 맞아 죽는 환난을 통과하는 것이다. 그 싸워야 할 대상이 이 세상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삭제되는 죽음이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여 주셨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주님은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는 삶임을 제시하셨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목이 곧은 패역한 백성’이라고 부르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은 목이 죽어서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믿음인데 이스라엘이 오리려 목이 살아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더라는 것이다. 목이 꺾어지는 죽음으로만이 예수 생명 안에 함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역사를 살아가는 하늘의 성도들은 신랑이신 예수님께 완전히 의존되고 복종되는 자로 죽어야 되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임을 제시한다. 성도의 신앙생활이란 바로 한마디로 축약하여 내가 죽는 길로 가는 환난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실체는 본래 “진토와 거름더미” (시 113: 7 / 삼상 2:8)이며, 거기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주셨고, 죄와 죽음의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주셨으며, 그분을 믿는 믿음을 주셨으며, 죽음의 환난을 통과하게 하셨으며, 그분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케 하여 주심으로 비로소 하늘의 유업을 이어받은 아들들이 된 것이다. 온 세상에서 그 많은 족속 중에서 하나님은 오직 창세전 선택받은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만 은혜를 입혀 구원하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 내셨다. 오직 선택받은 자만 그분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마음을 주시며, 그분이 먼저 우리 마음에 겨자씨로 시작하시는 믿음을 주셔서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시며, 결코 그분이 바로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이심을 고백하는 장성한 믿음으로 세워주시기 위해 이 역사 속에서는 환난과 시험을 통과하게 하신다. 그 환난 속에서 창조의 주체이신 예수만 오롯이 드러나고 예수가 전파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도는 이 세상 환난 속에서 왜 예수만이 구원과 진리와 생명이시며, 왜 예수의 십자가 피로만 모든 죄가 도말되어 하나님나라가 완성이 되는 지를 깨닫고 나타내는 역할로 사는 것이다. 이 역사와 인생의 존재 목적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빛이요 생명이요 진리로 구원임을’ 증거하며 만물이 예수를 위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로 비롯되고, 예수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을 드러내고 증거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그러한 성도의 실존을 반드시 자각하는 자는 그 환난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며 그 환난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연단을 받아 하늘나라의 소망을 이룬 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르기를,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 7:14-15).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들이 이 세상 환난을 걸쳐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의 옷을 입고 신부가 된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