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으로 읽는 예수님의 비유

세상과 함께 춤추지 말고 울지도 말라 (눅 7:31-35)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14. 23:49

누가복음 7:31-35

7:31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이 세상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인생을 살다가 한 줌의 흙으로 되돌림을 받게 되는데 그 결국은 영원한 죽음과 지옥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택함과 은혜를 입은 자들은 반드시 자기중심의 삶으로부터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옮겨져 세상을 향해 죽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을 추구하게 되며, 오직 하나님의 선한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목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들의 결국은 영원히 사는 영생과 천국이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은 절대로 함께 어울릴 수가 없음을 주님은 이 비유에서 확실히 말씀하여 주시고 있다. 이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 14-15). 이는 하늘나라 삶의 원리와 이 세상 삶의 원리는 절대로 일치될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자기 주체의식으로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사는 육신에 속한 사람과 예수가 나의 삶의 주체가 되어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성도의 삶이 어떻게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있겠느냐는 말씀이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성도를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잠시 거처서 지나가는 광야의 나그네요 이방인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행복과 유익을 추구하며 이름과 인기를 얻어 이 세상에서 영광을 챙기기 위한 목적으로 사는 자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이한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한 자들과 절대로 어울릴 수가 없음을 장터 아이들의 놀이를 비유하여 설명하신 것이다. 장터 아이들이 피리를 불며 혼인잔치 놀이를 하는데 어떤 아이들은 그 피리 장단에 춤을 추지도 않고 함께 놀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피리를 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 전파를 의미하며, ‘춤을 추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이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의 기쁨소식에 동참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는 은유의 말씀이다. 즉 신랑이 차려주신 구원과 영생으로 초청하는 그 기쁜 혼인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금식하며, 그렇게 신부와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님을 가리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눅 7:34)라고 비방하며 극구 대적하더라는 것이다. 다시 애곡을 하며 장례식 놀이로 바꾸었는데도 그 놀이에도 참여를 하지 못하더란 것이다. 바로 '회개의 촉구' 앞에서 애통으로 반응할 줄 모르는 영적 무감각을 지적하신 것이다. 세례 요한은 그들의 외식적인 악한 종교 행위를 폭로하며 광야에서 연신 ‘회개하라’라고 다가올 심판을 외쳤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눅 3:7-9).

그들은 세례 요한이 외치는 눈물의 애곡과 마음을 찢는 회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제사장의 옷을 입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떡과 포도주를 마시며 그들이 정한 규례들을 지켜 행하는 종교 놀이에 참여하지 않고, 반대로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만 먹으면서 그들과 어울리지 않고 그들과 정 반대인 광야의 삶으로 그들의 그릇된 외식적인 종교행위를 폭로하며, "회개하라!"고 외치며, "독사의 새끼"라고 욕설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구미에 전혀 맞지 않게 사역하는 세례 요한을 귀신들린 자라고 비난한 것이다 (눅 7:33). 그이들이 바로 내 자아가 죽는, 즉 옛 죄인이 죽는 ‘회개’의 장례식에 참여할 것을 거부하는 목이 굳은 패역한 자들이다. 세례요한은 마지막 구약 선지자의 역할로 율법과 유전에 묶여 주에 두 번씩 금식을 늘이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물로 씻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진짜 죄를 씻는 영원한 죄 사함을 얻게 되는 ’회개’와 ‘세례’를 전파했다. 즉 죄와 죽음에 처해있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깨닫는 자기 부인의 자리로 내려가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나를 영원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실 메시아임을 알아보고 그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라는 절박한 은혜의 필연성에 대한 항복 선언을 세례요한이 외친 것이다.

그러나 유대 율법주의 자들은 그 세례마저 자신들의 의를 쌓는 외식의 도구로, 자신들의 업적과 공로를 세우는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례요한이 세례를 받겠다고 찾아오는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안 그러면 도끼에 찍혀 불에 던지우게 된다’ (눅 3: 9).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눅 3: 7) 라고 욕설을 퍼 부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사역을 하시며 오히려 자신들을 향해 독사의 새끼라고 욕설을 퍼붓는 세례요한을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한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거부하며 밀어냄을 지적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애초부터 자신들의 종교 놀이에 도취되어 있었기에 마음을 찢고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는 ‘회개’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아니었으며, 또한 영생으로 초청하는 혼인잔치에 참여하여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자들도 아니었음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주님은 은혜로 초청하는 신랑의 혼인잔치를 거부하는 비유를 그들에게 던진 것이다.

왕이 영원한 생명이 임하는 은혜로운 혼인잔치에 먼저 그들을 초청했지만 모두가 자신들의 일상을 챙기는 변명으로 거절하는데 그 일상이 바로 율법 지킴과 제사와 선행으로 자신들의 가치와 의를 세워 사람들의 인기와 칭찬을 얻으려는 탐심에 도취된 종교 놀이임을 암시한다 (마 22: 1-14). 그들은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지는 세상일에 목숨을 건 자들이기 때문에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없이 은혜로 초청하는 혼인 잔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신랑으로 오셔서 신부를 맞이하는 기쁜 혼인잔치를 베풀고 있을 때, 그들은 주님을 보고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 11:19) 라고 비방하며, 반대로 철저한 금식과 금욕의 삶으로 율법 지킴의 행위 놀이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종교 놀이, 즉 자신들의 인기와 영광을 높이는데 집착하여 일 년에 한 번만 하면 되는 금식을 일주일에 두 번으로 늘이기도 하고, 정결 예식 때만 씻는 행위를 밥 먹을 때에도 외출을 하고 돌아와서도 시시때때로 씻는 결벽증 같은 놀이를 하며, 율법 이외에 숨 막히는 장로 유전, 규칙들을 법으로 만들어 놓고 스스로 자신들을 법의 쇠사슬로 묶어놓고 자해하는 이상한 종교 놀이들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들이 목숨같이 지키고 있는 성전 마당을 뒤엎으시면서 ‘성전을 헐어라 삼일 만에 일으키겠다'는 치명적인 말씀을 던지셨으며, 목숨처럼 지키는 안식일을 수시로 범하시고, 손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시며, 그들의 말과 같이 자신들이 금식하는 날에 먹고 마시며,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세리와 창녀들을 친구로 삼아 자주 어울리신 것이며, 그들이 열심히 지키고 행하는 규례들을 수시로 깨고 비판하시면서 조금도 양보 없이 그들의 종교행위를 마귀의 행위, 외식, 회칠한 무덤, 독사라고 저주의 욕설을 퍼부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각종 질병에 묶여있는 자들을 안식 날에 고치셔서 깨끗한 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자신들과 어긋나게 사역을 하시면서 자신들이 평생 쌓아놓은 공로와 업적들을 전면 부정하시고 자존심을 짓밟는 욕설을 퍼붓는 예수님과 당연히 어울릴 수도 더더욱 그분이 초청하시는 은혜의 잔치에 참여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와 자존심을 짓밟고 꺾어 버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극구 대적하고 핍박하며 죽이려는 음모까지 꾸미고 있었고 또 그렇게 하나님을 살인하는 살인죄까지 범하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모시고 사는 성도는 그들이 노는 세상 놀이와 종교 놀이에는 아무런 흥미도 관심도 없다. 아무리 인기와 칭찬으로 이름을 높여주는 피리를 불고 춤을 추어주어도,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예수 보화를 마음에 품고 사는 성도에게는 바울의 고백과 같이 이 세상 것들이 모두 ‘배설물’로 여겨지게 된다. 솔로몬의 고백과 같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3) 함과 같다. 하늘나라 삶의 원리를 추구하는 성도는 스스로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는 십자가 삶을 추구하게 되며, 바울의 고백과 같이 간절한 소망은 오직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21) 하는 고백으로 살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외친 것이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그러므로 세상이 아무리 즐겁다고 피리 불고 춤을 추어도 또한 세상이 아무리 전쟁과 난리를 부려도 그들과 함께 동참하는 춤이나 애곡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당연히 자신들과 함께 놀지 않는 성도를 미워하게 되며, 비난하고 조롱하게 되며, 핍박하여 죽이기도 하지만 주안에서 주와 함께 사는 증거 하나로 이 모든 것을 넉넉히 감당하게 하여 주시더라는 것이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먼저 그 길을 가시고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다. 세상과 같이 춤을 추지 않은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 36-38) 함과 같은 환난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존귀하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그 증거 하나로 바울과 같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라는 담대한 고백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피리 소리에 춤을 추지 않고, 세상의 애곡에 따라 울지 않는 천국을 사는 성도의 삶이다. 오히려 성도는 세상의 호화로운 쾌락 속에서 외로움과 외면과 고독함을 느끼게 되며, 세상의 애곡과 같은 난리 속에서도 마음의 평강과 담대함을 체험하는 반대의 삶을 살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마지막 결론을 "하나님의 지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의해서 옳다는 것이 입증된다"(눅 7:35 현대인 성경)라고 하나님의 지혜는 신령한 영역이기에 이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 즉 성령에 속한 자만이 그 지혜의 말씀을 생명의 진리로 깨닫게 되어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즉 지혜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구원의 의를 믿어 생명에 이르는 것이 지혜이며, 그 지혜는 택함을 받은 자녀들에게만 영을 열어주어 알아보고 깨닫게 하여 ‘옳다’는 믿음을 주어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시다(요 14:6). 예수그리스도를 지혜라고 표현한 것은, 그 ‘지혜’는 감추어진 보배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서 보여지고 알려지고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은유의 말씀이다. 지혜는 오직 창세전 택함을 받은 복된 자들에게만 보여주고 알려주심으로 “옳다 함으로” 깨닫게 되고 믿게되며 생명을 얻게됨을 계시하셨다. 오직 성도에게만 그 저주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나를 죄와 죽음의 저주에서 살려주신 구원자 이심을 알아보고 믿게 하시며, 그 저주의 십자가가 바로 구원과 영생의 십자가임을 깨닫게 하시며, 그 존귀한 지혜가 바로 자신의 생명임을 알아보는 눈과 귀를 열어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지혜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기에 그들은 그 십자가가 가리키는 생명의 진리를 지혜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련한 것으로 저주로 보인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 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18-24).

그러므로 지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생명의 근원 되신 예수그리스도이시며, 하늘나라에 관한 지혜이기에 이 세상 지혜로는 절대로 알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영역임을 제시한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계시로 하늘의 지혜를 소유한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깨닫게 되며,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내 인생에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며 (갈 6:13), 십자가의 삶을 지향하게 된다. 그러므로 복음에 관항 영생의 진리는 이 세상에 속한 자들에게는 거부되고 배척되지만, 진리를 좇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인하여 옳다고 믿음으로 진리 안에 함께 거하게 된다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