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 21:1-14) 사람을 낚는 갈릴리 어부의 삶 / 숯불 위의 물고기와 떡 / 물고기 153의 의미
요 21:1-14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을 내려 주셨으며,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심으로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이 이제 성령으로 성도의 마음 안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새 창조를 일으키는 성령의 거듭남을 제시하셨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음으로 죽은 흙이 ‘생령’ 즉 ‘살아있는 존재’가 된 것과 같이, 예수님은 십자가로 구원을 성취하시고 죄와 사망에 처해있는 당신의 백성에게 자신의 영 즉 ‘성령’을 넣어주심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즉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탄생시켜 주신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은 자이며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 영적 존재가 되어야 만이 하늘나라 백성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그렇게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이제 성령의 권능을 받아 땅 끝까지 성령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됨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제자들은 혼자가 아니라 주님이 세상 끝까지 그들과 함께 하셔서 주님이 인도하시고 주관하시는 사역으로 시작됨으로 도마를 통하여 신앙고백을 하게 하셨다. “주는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 즉 나의 모든 삶을 당신에게 맡기고 당신이 나의 주가 되어 나의 삶을 주관하여 주심을 인정하는 주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고백이다. 주님은 도마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믿음의 본질을 가르쳐 주셨다. 즉 믿음이란 눈으로 보고 확인되거나 기적과 능력을 경험하거나 노력하는 주관적 의지가 아니라,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마음 안으로 영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믿음을 심어주심으로 그분의 십자가 공로를 은혜로 수여받는 불가항력적 은혜임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이 이제부터 영으로 우리 마음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새 생명의 창조를 일으켜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듭나게 되는 그 상태가 바로 “평강”이며, 복이라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3번씩이나 반복하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마지막 3번째로 제자들을 갈릴리 호숫가에서 만나주셔서 어떻게 제자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 십자가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가를 한 폭의 그림으로 보여주신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르셨을까?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예수님은 마지막 3번째는 갈릴리 디베랴 호수에 찾아오셔서 제자들을 만나 주신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자신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신다고 말씀하셨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 26:31).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여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르시고 ‘갈릴리로 가라’고 명하신다.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마 28:10). 그런데 주님은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난 것이 아니라 마가의 다락방에서 먼저 제자들을 만나 주시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리시고 사명을 주신다. 예수님이 특별히 ‘갈릴리’라는 지역을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은 어떤 지역적인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의미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수 있다.
갈릴리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 땅으로 취급받은 곳이며, 가난한 어부들이 사는 천대 받고 멸시받는 곳이었다. 나다나엘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고 초라하고 경멸받는 갈릴리 시골 동네에서 메시아가 나타날 일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바리새인들도 갈릴리에서는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고 경멸하였다.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요 7:41).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편견과 고정관념과 오만으로 예수님을 마구 판단하며 갈릴리를 멸시하고 홀대한 것이다. 갈릴리에 대하여 마태는 이사야(9:1-2)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5-16). 갈릴리는 ‘이방의 갈릴리, 흑암, 사망의 땅과 그늘의 앉은 자들’의 상징으로 불리었다. 즉 갈릴리는 천대와 멸시 받은, 흑암과 사망에 갇혀있는 죄인들이 사는 이 세상의 상징이었으며, 그곳에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유대 지역인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이방 땅으로 홀대받은 멸시와 흑암의 상징인 갈릴리에 가셔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부리시고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으며, 이는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막 1:15-17).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음에도 굳이 갈릴리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 나사렛에 가셔서 거기서 자라시고 ‘나사렛 예수’라는 호칭을 가지게 된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에서 복음 사역을 시작하셨으며 대부분의 공생애 기간을 갈릴리에서 보내셨다. 예수님의 삶이 곧 갈릴리 나사렛 사람의 삶으로 시작될 것임을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 이러라”(마 2:23). 바로 그렇게 천대와 멸시를 받는 흑암과 사망의 그늘로 상징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주님의 삶이 시작되었기에 “나사렛 예수”로 불린 것이다. 예수님은 천대받고 멸시와 조롱을 당하는 갈릴리를 택하셔서 나사렛 사람의 삶으로 이 세상에서 멸시와 조롱과 천대를 받으셨으며, 갈릴리 나사렛 예수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나사렛 예수로 부활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본체가 하나님이시지만 하늘 보좌의 존귀한 자리를 기꺼이 버리고, ‘비천한 종’의 신분으로 홀대와 경멸을 받는 ‘갈릴리 나사렛 사람’으로 우리를 섬겨주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앙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즉 메시아는 가난한 자, 세상에서 버림받고 멸시와 천대받는 흑암과 사망에 놓여 있은 자들에게 빛으로 생명으로 천국으로 오실 것임을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언하여 주셨고 실현된 것이다.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5-16, 사 9:1-2).
이와 같이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자라시면서 세상으로부터 온갖 멸시와 조롱과 천대를 받으셨다. 이어서 제자들도 갈릴리 사람으로 갈릴리 삶을 살아가게 됨으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첫 번째로 내가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며 너희도 갈릴리로 오라고 말씀하셨으며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주님의 의지를 밝힌 것이다. 제자들과 사도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갈릴리 나사렛 사람이 되어 유대인들로부터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경멸과 핍박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행 24:5).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이와 같은 ‘염병, 나사렛 이단‘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착한 행실과 선한 일로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세상으로부터 칭찬과 칭송을 받는 유명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의 썩어 들어가는 “염병”같은 죄악들을 폭로하며 예수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임을 선포하며 그 복음의 전파는 걷잡을 수 없이 땅 끝까지 퍼져나감으로 세상은 성도를 ”염병“이라고 모욕하고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유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조소와 경멸을 당하게 되어 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셨으며, 마지막으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부르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세워주신다. 즉 내가 먼저 갈릴리 삶을 살았고, 내가 너희 목자가 되어서 너희를 갈릴리 삶으로 이끌고 가시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명백하게 제시하셨다. “내가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 26:31)라는 말씀은 갈릴리에 먼저 가셔서 제자들을 기다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먼저 갈릴리 사람으로 갈릴리 삶을 살아낸 것과 같이 너희도 반드시 갈릴리 사람의 삶, 즉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을 살아가게 됨을 제시하신 것이다. 즉 ‘갈릴리’는 예수님이 가신 골고다 십자가의 길이며, 그 십자가 삶을 실제로 살아가게 되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을 뜻하며, 그렇게 한 알의 밀이 썩어서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십자가 복음 전파를 계시한다.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당하게 되는 갈릴리 사람의 삶으로 제자들을 이끌고 가시겠다는 뜻으로 주님은 반복하여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날 것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십자가 삶으로 끌고 가시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마지막으로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물고기와 떡을 떼는 그림으로 펼쳐진 것이다. 이제 당신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선포함으로 당신의 백성들이 죄에서 사하심을 받아 사망에서 건져지는 성령의 사역에 제자들이 동참하게 되는 그 출발점이 바로 예수님이 출발하신 갈릴리부터이며, 그들의 삶이 바로 갈릴리 나사렛 사람의 삶이며, 멸시와 천대와 가난과 조롱의 대상으로 이 세상에서 핍박과 고난을 받는 삶을 살게 됨으로 ‘갈릴리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라고 불릴 것임을(행 24:5) 계시하셨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한 알의 밀로 모두가 갈릴리 사람으로 순교로 십자가의 길을 간 것이다.
약속을 지키시는 주님 /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2 시몬 베드로와 뒤 두 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비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눅 5: 3-12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비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11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2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베드로와 다른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그들은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지 못하였다. 주님은 먼저 그들을 찾아와 주셔서 그물을 오른 편에 던지라고 명하시고, 베드로는 마지못해 주님의 명을 받아들이고 그물을 던지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가 잡힌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말하였지만 주님은 도리어 베드로를 향하여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5:11), 즉 사람을 낚는 어부로 세워주실 것임을 첫 부름에서 약속하셨다. 베드로와 다른 어부들은 이내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 제자가 된 것이다. 예수님이 먼저 제자들을 찾아와 주셨고, 그들을 부르시자 그들의 정체성이 드러난 것이며, 이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으로 자신이 죄인이며 도저히 구원받을 자격 없는 자로 예수님 앞에 서 있은 것이다. 그런 죄인을 제자로 불러주셨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결국은 “주는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확실한 믿음의 고백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세워주신 것이다. 나의 뜻과 의지가 아닌 주님이 정하신 뜻대로 그들을 찾아와 주셨고, 부르셨고, 그분을 따르는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3년 전에 갈릴리에서 베드로와 다른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하신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다시 제자들을 갈릴리 호숫가로 부르시고, 똑같은 방법과 말씀으로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선언하신다. 주님의 약속과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시는 장면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 점 일회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짐을 보여주신 것이다. “비 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0-11). 현재 우리 성도들이 겪고 있는 일들, 상황과 사건들과 환경과 붙여준 인간관계, 즉 현재 살고 있는 모든 현실은 우연히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기 위한 필수이며, 허락하신 일이며,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들임을 깨닫게 된다. 비록 나의 뜻과 상반되는 일들로 인하여 때로는 낙심하게 되고 실망하게 되고 의심하게 되고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세심한 음성과 인도와 뜻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며, 그러한 과정에서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되며, 그분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인내와 온유를 경험하게 됨으로, 욥이 고난을 겪고 난 후에 깨달은 고백과 같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즉 하나님을 실제로 인격적으로 보고 교제하는 믿음으로 굳게 세게 된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첫 부름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라는 사명까지 받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수시로 주님 앞에서 실수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을 배신하게 된다. 그는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막으려고 하여 주님으로부터 “사단아 물러가라”라는 책망을 받기도 하고, 물 위를 걷다가 물에 빠지기도 하고, 주님이 로마군에게 잡혀갈 때 주님을 저주하면서 3번씩이나 부인한 배신자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여전히 갈릴리로 돌아가 물고기를 잡는 선동자였다. 그런 베드로를 주님이 친히 갈릴리 호수로 찾아와 주신 것이다. 밤새 고기를 잡아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를 잡는 기적을 행하여 주셔서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신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끝까지 나약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포기하는 모습이었지만 주님은 한시도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먼저 그들을 찾아와 주시고 믿음을 세워주신다. 그렇게 우리의 연약함과 허물이 폭로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자로, 주님이 아니면 살수 없는 자임을 깨닫게 하시며, 주님과 함께하는 주님이 나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그 삶만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하신다. 그리하여 주님은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다시 던지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가 잡히는 기적을 보여주신 것이다.
숯불을 피우시고 물고기와 떡을 준비하시는 주님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믿는 그런 믿음을 수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자들을 통하여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주님은 베드로의 제일 연약한 수치스러운 부분을 들추어내어 완전히 폭로하심으로 그 실수를 딛고 믿음의 사도로 세우시는 일을 하신다. 주님은 굳이 숯불을 피우시고 베드로와 제자들을 부르신다. 바로 베드로가 숯불을 쬐면서 주님을 3번씩이나 부인한 그 장면을 무대로 설치하시고 다시 베드로를 부르신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의지와 결심으로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라고 맹세하였지만 그 숯불 앞에서 주님을 3번씩이나 부인하는 불가능한 자로 폭로된 것이다. 그런 베드로를 주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숯불을 피워놓고 물고기와 떡을 준비하시고 다시 베드로를 숯불로 부르시고 함께 물고기와 떡을 떼면서 주님과의 관계를 사랑으로 회복시켜 결국 사람을 낚는 갈릴리 사람으로 만들어버리시는 것이다. 너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자이며 불가능한 자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시켜 주시기 위해 밤새 고기를 잡아도 한 마리도 낚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말씀을 주셔서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낚게 하심으로 이제부터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성령의 띠로 묶어서 네가 원치 않는 곳으로 갈릴리 사람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주님의 주권을 나타내신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여 주시는 장면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자신의 열심과 의지적 노력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돕는 파트너가 아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힘입어 내가 부인되고 죽음으로 내 안에 주님의 평강과 사랑이 넘치게 부어져서 다른 이들에게 흘려 들어가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것뿐이다. 그분이 내 안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넘치게 흘려서 다른 이들에게 흘려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며, 내게는 그 영원한 생명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친히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계획대로 사역하시는 일에 다만 우리를 동참시키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숯불을 피우시고 그 숯불 위에 물고기와 떡을 올려놓으시고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등장한 것이다. 이사야 6: 5-7에서 이사야는 환상으로 자신의 부정한 입술이 숯불로 지져질 때 회개가 일어나고 자신의 죄가 사하여지는 불 체험을 경험하게 된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사야는 지존하신 하나님을 보는 순간 자신의 실체가 폭로됨으로 자신이 바로 입술이 더러운 부정한 죄인이며 화를 받아서 망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자신을 부인하는 회개를 한 것이다. 하나님은 숯불을 그의 입에 닿게 하시고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라고 숯불로 그를 정결케 하시고 위대한 선지자로 세워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제자들도 이제 불세례를 통하여 정결한 자로 성령의 권능을 받아 위대한 사도로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낚는 사역에 동참하게 될 것임을 제시하여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다.
주님이 갈릴리 호숫가에서 숯불을 피워놓고 그 위에 물고기와 떡을 구워 놓으시고 제자들과 함께 나누시는 장면은 또한 마지막 만찬에서 주님이 포도주와 떡을 떼어주시면서 이는 나의 피요 살이라고 말씀하신 그 장면과 유사한 장면이다. 예수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라고 영적으로 그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그분의 생명 안에 함몰됨으로 영생을 가졌다고 선언하셨다. 이 세상 죄와 사망에 빠진 당신의 백성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심으로 자신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먹게 하심으로 예수님의 생명력으로 영원을 사는 자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그 살과 피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며, 우리가 먹어야 살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이며, 그러므로 오늘을 위한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그 일용할 양식이 바로 말씀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마지막으로 갈릴리 호숫가에서 숯불로 물고기와 떡을 구우시고 함께 제자들과 나누심으로 그 생명의 떡을 받아먹은 제자들이 이제 말씀을 들고 세상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을 낚는 어부로 보내심을 받을 것임을 제시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물고기와 떡을 제자들에게 먹이시는 장면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예수님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즉 생명의 떡으로 오신 그분을 먹는 방법으로 죄와 사망에서 살아나게 되는 십자가 복음을 제시한 것과 유사한 장면이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로 오천 명 넘는 자들에게 먹이시고,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8)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생명의 떡, 즉 말씀으로 오셨고,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여 당신의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살려내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그 위대한 사역에 제자들을 동참시켜 갈릴리 사람으로 땅 끝까지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세워주시기 위해 갈릴리 호숫가에서 물고기와 떡을 준비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나눈 것이다. 제자들은 이제 생명의 떡이시며 말씀이신 예수님을 먹음으로 주님과 연합한 자가 되어 십자가 복음의 증인으로 서게 될 것임을 제시하신다. 그리하여 그 현장에서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가 잡히게 하심으로 제자들의 전도의 열매 수확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성령의 권능을 입혀 바다를 건너서 땅 끝까지 나의 백성을 낚는 어부로 보낼 것이며, 너희는 이제 생명의 떡, 즉 말씀을 들고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게 될 것이며, 그물이 찢어지도록 당신의 백성들이 아버지 품으로 돌아올 것임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떠나 뿔뿔이 도망하고 배신하고 어부로 돌아간 면목 없는 제자들을 갈릴리 호숫가로 찾아가 주셔서 숯불로 그들이 모든 부정함을 태워 정결한 자로 만드셔서 이제 진짜 믿음 있는 교회 반석이 되어서 주님을 당당하게 증거하는 증인의 삶으로 주님이 친히 주도하시는 복음 사역에 동참하게 됨을 보여주신 것이다. 사람을 낚는 그 주도권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기 위해 주님은 그들이 밤새 그물을 바다에 던졌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낚지 못하였음을 체험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개입하여 그들에게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라”라고 말씀을 주시지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가 잡히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제자들은 오직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오른 편에 던진 것뿐이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가 그물 안으로 모여들게 하신 기적은 주님이 하신 일이며, 제자들은 다만 기쁨으로 물고기가 가득 찬 그물을 끌어올리는 수확을 거두는 일로 흥이 난 것이다. 주님은 당신이 성취하신 구원의 열매를 거두어들이기 위해 제자들을 추수 꾼으로 보내신다고 미리 말씀하셨다(요 4:34-38). 당신께서 뿌려놓은 생명의 열매를 제자들을 보내어 거두게 하시는 동참으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4:36),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요 4:37-38)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으심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며(요 12:24), 그 열매를 추수하는 사역에 제자들을 추수 꾼으로 세상에 보내시며, 그 사역은 오직 성령의 사역으로만 이루어짐으로 “성령을 받으라”라고 성령을 입혀주신 것이다. 똑같은 원리로 주님은 포도나무 비유에서 자신을 생명의 씨앗과 포두 나무로, 가꾸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농부이신 아버지로, 성도는 생명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로 표현하셨다.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일은 농부이신 아버지와 예수님의 일이지만 열매는 가지에 달리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즉 우리를 세상에 보내어 열매를 거두는 추수에 동참시키는 그림이다.
물고기 153 마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사도 요한이 굳이 물고기를 153이라는 숫자로 명시한 것은 모든 물고기 종류의 숫자를 뜻하며, 이는 당신의 백성은 어느 특정하게 새운 유대교도 아니고 어느 나라 별도, 어느 민족도 아니라, 모든 나라, 모든 족속, 모든 곳에 흩어져 있으며 이제 복음이 이 세상 땅 끝까지 전파되어 하나님의 나라로 모여들게 됨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즉 구원은 혈통과 민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물고기 153 마리가 그물안에 잡혔다는 것은 이제 제자들이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아 성령의 권능을 받아 십자가 복음을 전파할 것이며, 제자들을 통하여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에 의해서 세상 끝까지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모여드는 그 그림을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천국 열쇠라는 권위를 약속하신 것이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8-19). 주님은 제자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마 4:19),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으로(행 1:8),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로(마 10:6-42),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사도로(마 28:18-20)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물고기 153이라는 숫자에 관하여서는 구약 에스겔에서 이미 기록되어 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손 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 게디에서부터 에네 글 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같이 심히 많으려니와”(겔 47:6-10). 이는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와 모든 것을 소생케하는 생명을 뜻한다. 거기에 어부가 강가에 등장하여 물고기를 낚는데 “엔 게디에서부터 에네 글 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같이 심히 많으려니와”라고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엔 게디와 에네 글 라임은 히브리어 문자지만 숫자를 의미한다. 엔 게디는 17숫자를 의미하고, 에네 글 라임은 153의 숫자를 의미하며, 1에서 17까지 모두 합하면 153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에서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의 숫자가 153 마리이다. 즉 “153”의 숫자는 모든 물고기 종류의 숫자를 뜻함으로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라고 명시되어 있다. 한마디로 그물에 의해 걸려 올라오는 하나님의 수많은 백성을 의미하는 숫자이며, ‘각기 종류에 따라’라는 의미는 이 세상 끝까지 모든 나라, 모든 족속에 흩어져 있는 당신의 백성을 뜻한다. 즉 153은 모든 물고기 종류의 숫자를 뜻함으로, 요한이 굳이 153 숫자로 그물 안에 있는 물고기를 명시한 것은 생명수이신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소생될, 세상 끝까지 각 나라와 민족과 종족으로 흩어져 있는 구원 받게 될 당신의 백성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장차 제자들을 통하여 세상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이며 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끝까지 확장됨을 제시하신 것이다. 구원은 어떤 민족이나 혈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종족에게 세상 끝까지 당신의 백성이 흩어져 있으며, 하나님은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당신의 품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이 내게 주신 모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그것이다”(요 6:39). 그러므로 153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들어 올리시자 하나님의 백성들이 저주와 죽음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끌러 올리는 구원의 복음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마가 다락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뵀고도 여전히 방황하여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은 것이다. 그들은 어부로 살아왔었기에 자신들의 경험과 있는 재주를 다 동원하였지만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는 것을 먼저 체험하게 된다. 즉 제자들이 과거 옛사람으로 돌아갈 수가 없도록 하나님께서 그 길을 막으시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간 후 다시 애급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홍해를 닫아버린 것과 같다. 이제부터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며 주님이 주관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과거와 완전히 단절시켜 버린 것이다. 주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주님의 간섭과 주관하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즉 이제부터 너희는 너희가 원하는 삶을 사는 자가 아니라 내가 너희를 끌고 가는 내가 너희의 주가 되어 너희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뜻한다. 그리하여 주님은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그물을 오른 편에 던지라고 명하신 것이며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오른 편에 던지자 그물이 찢어지게 153 마리가 잡힌 것이다. 주님의 주권과 주체성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제 제자들은 새로운 현장에서 주님이 인도하시고 주님이 주관하시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됨을 제시하여 주셨다. 내기 원하는 삶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허무와 공허와 빈 껍데기에 불과하며, 오직 주님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만이 생명과 기쁨으로 충만함을 ‘바다’라는 세상 현장과 153 마리의 물고기에서 체험하게 하신 것이다. 성도는 이제 예수를 나의 주로 영접하여 주님 안에 하나가 된 존재이기에 나의 의지와 나의 원함과 나의 뜻대로 인생을 살 수가 없는 자로, 즉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제자들의 연약함과 부끄러운 모습
제자들은 예수님이 로마군에게 잡혀가실 때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뿔뿔이 도망가고 배신하였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떨고 있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음에도 두려움에 숨어서 떨고 있었으며, 생계를 위해 다시 고기 잡으려 갈릴리 어부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 그들을 주님이 친히 찾아와 주셔서 숯불에 물고기와 떡을 구워놓으시고 제자들과 함께 드심으로 주님과 하나로 연합된 자가 되어 십자가 복음사역에 동참할 것이며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됨을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를 낚게 하신 기적으로 보여주셨다. 이것이 구원이며 은혜이며, 처음부터 끝까지의 사랑이며, 그분의 주도권으로 우리가 끌려가는 것이며,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시는 장면이다. 제자들은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며 또한 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계속하여 연약하고 부끄럽고 면목 없는 도망 다니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님이 그들을 향하여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라고 명하시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낚게 된 것이다. 그물이 찢어졌다는 것은 그동안 이 세상의 것들을 낚기 위해 열심히 깁은 ‘자아’라는 그물이 찢어지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을 뜻한다. 즉 '나'라는 울타리 안에 쌓아놓은 이 세상 육신의 것들이 찢어져 나가고, 주님이 채워주시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하였으며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수제자였다. 그런 그가 주님을 3번씩이나 부인하였으며,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여전히 방황하며 선동자가 되어 다른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로 어부의 본업으로 돌아간 것이다(요 21:3-4). 하지만 주님은 끝까지의 사랑으로 베드로와 제자들을 품어주심으로 새롭게 거듭나 새 생명을 잉태시키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신 것이다.
우리는 때로는 주님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겠다고 다짐하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만을 의지하겠다고 맹세하지만 우리 주관적 의지와 열심과 노력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음을 매일같이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은 목숨을 걸고 주님께 충성하겠다고 맹세하는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막 14: 30)라고 미리 그의 배신을 폭로하여 주신 것이다. 즉 네가 아무리 맹세하고 다짐한다고 하여도 너의 의지와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넘어지지 않게 붙들어주어야 너는 비로소 나의 믿음으로 나를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는 참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주님을 믿고 따르는 믿음은 나의 주관적 의지와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믿음이 나를 붙들어주심으로 가능한 것임을 말씀해 주신다. 베드로의 속에는 우리 모든 인간들의 허물과 연약함과 불가능함과 추함이 들어있다. 우리는 나의 유익을 위하여서는 3번 아니라 수시로 주님을 의심하고 배반하며, 원망하고 불평하며,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는가!”라고 따지고 대들고 거역하는 파렴치한 자들이다. 그래서 주님은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라고 맹세하는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된다”라고 그의 의지와 상반되는 배신을 지적하신 것이다. 주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고, 그렇게 주님의 부활을 친히 보고 주님의 평강을 체험한 제자들이 또다시 주님을 버리고 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갈릴리까지 좇아오셔서 숯불을 피워놓고 물고기와 떡을 준비하시고 그들을 다시 부르신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요 13:1)는 약속대로 끝까지 제자들을 찾아와 주셔서 그들에게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다.
우리는 육을 가진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면 그 즉시 무너지게 되며 마귀에게 사로잡혀 육의 사람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내 육은 수시로 죄의 유혹에 빠지고, 무너지고, 실수하고, 생각으로도 마음으로도 행동으로도 죄를 짓게 됨을 매일 경험하고 있다. 그렇게 인간은 연약하고 허무하며 추악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지 않으면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라는 것을 수시로 경험하게 됨으로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꼭 붙들고 ‘나는 주님을 떠나서는 도저히 인간으로서 살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주님은 그렇게 흙으로 빚어진 존재로 비천하고 연약하고 무너지고 실수하는 우리를 미워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으로 붙들어 주신다. 우리가 주님을 떠날지라도 그분은 우리를 절대로 떠나지도 포기하지도 않으신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의 그러한 연약함과 자신을 배신하는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며,” “내가 영원히 너희와 함께 하리라”라고 미리 약속하여 주신 것이다. 그렇게 연약하고 불가능한 제자들을 다시 갈릴리 호숫가에서 부르시고 물고기와 떡을 먹이시면서 당신의 사랑을 제자들에게 각인시켜 주시기 위해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에게 3번씩이나 사랑을 물으신 것이다. 즉 너희는 나를 떠나고 배신할지라도 나는 너희를 끝까지 사랑하며 영원히 너희를 떠나지 않으신다는 주님의 강력한 의지를 표현하신 것이다. 자신의 전부를 제자들에게 내어주심을 물고기와 떡을 떼어주시면서 사랑의 주제로 표현하셨다. 그렇게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먹음으로 새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서 주님과 하나가 되어 다시는 주님을 떠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영원을 사는 존재로 탄생한 것이다. 즉 주님이 자신의 전부를 쏟아부어주심으로 오직 은혜로 제자들을 당신의 신부로 만들어 버리는 그림이다. 그래서 주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얘들아"(21:5)라는 호칭을 쓰신 것이다.
주님이 먼저 우리를 선택하셨기에 그분은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본체가 영원히 변치 않으신 사랑이시기에 제자들의 실수와 허물을 덮어주시고 끝까지 찾아와 주셔서 당신의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에 당신의 평강을 채워주신다. 비록 베드로가 “나는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라고 맹세하였지만 인간으로서는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하였다. 오히려 베드로의 그 맹세를 주님이 지키셔서 “주님이 죽을 지언정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으며”, 그 끝까지의 사랑을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3번씩이나 물으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붙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굳게 붙들고 끝까지 사랑하심을 베드로를 통하여 보여주신 것이다. 주님의 끝까지의 사랑이 나를 좇아와 당신의 사랑 안에 나를 집어넣어 하나로 완성하신 것이다. 여기서 3번 제자들을 찾아와 주시고 3번 사랑을 확인하셨다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의 희생으로 완성하신 그 사랑은 완전하고 온전한 영원한 사랑이시며, 그분의 완전한 사랑에 함몰되어 하나로 영생을 사는 생명을 뜻한다. 그리하여 주님은 끝까지 제자들을 찾아와 주셔서 3번씩이나 당신의 사랑을 마음에 각인시켜 주신 것이다. 즉 너희는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끝까지 너희를 사랑하여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시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라고 약속하신 그대로 그분은 한시도 우리를 떠나시지 않으시고 내 안에서 함께 동거하시며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신다.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주님의 온전한 사랑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18-20). 주님은 그 약속대로 부활하신 후 오직 제자들에게만 3번씩이나 나타나셔서 3번씩이나 사랑을 마음에 각인시켜 주시고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주심으로 하나로 연합을 이루셨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세상 사람 모두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오직 제자들에게만 찾아와 주셔서 자신의 부활의 몸을 보여주시고, 제자들에게만 ”평강“을 내려주셨고, 제자들에게만 성령을 불어넣어 주셨으며, 제자들에게만 물고기와 떡을 먹이셨다. 주님은 미리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7). 주님은 오직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보내주신 자만 하나도 빠짐없이 다 구원할 것이며, 그 나머지는 하나님의 선택에서 배제된 ‘멸망의 자식’뿐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17:12).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예정된 자들임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다 ‘자기 백성’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택한 백성과 이 세상 마귀에 속한 자를 구별하시기 위해 첫 인간의 후손에서 가인을 버리고 아벨을 택하였으며,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택함을 받은 아주 적은 구별된 자들임을 보여주시기 위해 노아 8식구만 구원하고 온 인류는 물로 심판하여 멸종하게 하셨으며, 열방 중에 아브라함만 택하셨으며, 하나님의 자녀는 예정된 자임을 나타내시기 위해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은 택하고 에서는 버리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민족이라고 자부심과 우월성으로 교만에 빠진 패역한 유대인들을 향하여서는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10:26)라고 너희가 나를 믿지 않는 것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즉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요 1:13), 처음부터 이들은 예수에게 속한 양이 아니라 이 세상에 속한 이리 이기 때문에 목자를 물어뜯어 죽이려고 하는 독사와 같은 자들이며, 양을 해치는 절도요 강도요 삯꾼으로 마귀 행사를 하고 있기에, ‘너희는 마귀의 자식’, ‘독사의 새끼’라고 저주하신 것이다.
복음은 온 세상에 전파되지만 그 온 세상 중에 택함을 받은 자만 그 복음을 알아듣도록 눈과 귀를 열어주시고 그 나머지는 비밀로 감추어 두심으로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셔서 그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막 4:12)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시고 있다. 그들은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이었기에 아무리 수많은 이적과 표적, 그들이 믿는 모세와 세례요한의 증언과 성경 말씀을 주었음에도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지 못하였고, 오히려 대적하고 멸시하고 핍박하였으며,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악행으로 끝까지 간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을 좇는 무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일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절대적 주권이며, 나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자만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여 주셨다. 즉 영생은 주시기로 작정된 자에게만 선물로 입혀짐을 말씀하신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또한 아들을 믿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데살후 3:2).
이와 같이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만 끝까지의 사랑으로 붙들어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아예 당신의 백성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하나로 함께 하심으로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있는 하나로 영생을 살고 있음으로 ‘너희가 나를 믿음으로 영생을 이미 얻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관계없는 그 삶이 바로 지옥이며 죽음임을 먼저 체험하고 있다. 죽어서 가는 지옥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벗어나서 하나님 없이 사는 이 세상과 이 세상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옥 같은 삶인지를 먼저 깨닫게 하신다. 이 세상 사람들은 돈, 명예, 지위, 쾌락을 인생의 목표와 목적으로 살고 있지만 성도의 눈에만 그것이 바로 지옥으로 향하는 멸망의 길임을 식별하고 깨닫게 된다.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이 세상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죽어서 가는 지옥보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난 단절된 관계로 사는 삶 자체가 바로 지옥임을 오직 성도만 알아보고 하루속히 이 세상을 탈출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한다. 오직 성도의 눈에만 이 세상 사람들의 삶이 지옥의 삶으로 보이는 것이다. 세상은 육의 즐거움을 추구하며 이 세상에서 즐기는 삶을 낙원으로 인식하지만 오직 성도에게만 육의 쾌락과 탐심이 지옥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성도는 육신이 사는 동안 먼저 그 지옥의 삶을 경험하게 되며, 출애굽과 같이 이 죄악된 세상에서 탈출하는 분리가 일어나게 되며, 구별된 백성으로 하늘나라 원리의 삶으로 이 세상의 죄악 과 멸망을 폭로함으로 성도에게 고난으로 고통으로 핍박으로 멸시와 천대로 다가온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지옥 같은 삶을 경험하게 됨으로 하늘나라를 소망하게 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꼭 붙들고 지옥의 삶에서 탈출하여 하루속히 본향 하늘나라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을 살기를 소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