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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은혜 위에 다시 율법을 세우지 말자
구약에서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의 한 규례였다(레 27:30; 민 18:21-24; 신 14:22-29). 그러나 이 모든 제도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셨다(히 10:10-14).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 규례를 다시 구원의 조건이나 축복을 얻는 기준으로 또는 지켜야 하는 의무로 세우는 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을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아주 심각한 복음을 배척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에서 이에 대하여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엡 2:15)
-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히브리서 역시 그리스도의 희생이 단번에 완전한 제사를 이루셨음을 선포한다.
-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 "그가 한 번의 제사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 “...하나님의아들을다시십자가에못박아드러내놓고욕되게함이라"(히 6:6).
십일조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구약 율법의 목적을 자신의 단번의 제사로 완전하게 성취하셨다(마 5:17; 롬 10:4; 히 10:10–14). 그러므로 새 언약의 성도는 더 이상 십일조와 같은 율법의 규례를 구원의 조건이나 하나님의 복을 얻기 위한 조건, 저주를 피하기 위한 의무, 또는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한 의와 공로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 우리의 구원과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에 기초한다. 사도 바울은 은혜로 시작한 신앙을 다시 율법의 행위로 완성하려는 시도를 엄중히 경고하며(갈 3:3; 5:4),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단번의 제사가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를 이루었음을 선언한다(히 10:10–14). 따라서 옛 언약의 제도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 사역을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여기는 위험한 일이며, 히브리서는 이러한 배교의 위험을 매우 엄중하게 경고한다(히 6:4–6).
-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9).
실체이신 예수그리스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이미 허락하셨다(엡 1:3).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여시고 자신의 아들을 생명의 떡으로 주셨으며(요 6:35), 성령의 생수를 부어 주셨고(요 7:37–39),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다(요 11:25–2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율법과 선지자를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죄와 사망 아래 있는 백성을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제도와 규례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였으며, 그 실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나니” (고후 1:20)
-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히 10:1)
-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 2:17)
구약의 성전도, 제사도, 제사장도, 절기와 제물도, 십일조도 모두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미리 보여 주는 예표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완전하고 충만하게 성취되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부르셨고, 마침내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죄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열어 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인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고 초청하시며, 참된 안식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율법이 요구하던 모든 것을 완전히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나님 앞에서는 완전한 공의를 이루셨고, 우리를 향해서는 변함없는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그러므로 바울은 선언한다:
-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0:4)
-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엡 2:15)
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고후 5:17)는 더 이상 "얼마를 드려야 하는가?", "십분의 일을 반드시 드려야 하는가?"를 신앙의 중심 질문으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참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인가?", "나는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나는 내 삶 전체를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드리고 있는가?"를 묻는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그 영원한 사랑을 깨달은 성도는 자신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기를 기뻐한다. 주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계산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믿음이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8). 즉,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믿음이다. 헌금은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대가가 아니라, 이미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응답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도의 가장 큰 헌신은 십분의 일을 드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데 있다.
-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롬 12:1).
새 언약의 성도는 율법의 두려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감사와 사랑으로 순종하는 사람이다. 신약의 헌신은 정해진 비율을 채우는 데 있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속하였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삶에 있다. 언약의 성도는 더 이상 그림자를 붙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 그림자가 가리키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붙드는 사람이다. 신약의 신앙은 율법의 규례를 완성하려는 삶이 아니라, 이미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신약의 헌금 원리와 참된 헌신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의 소산 가운데 십분의 일을 드리도록 명령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율법을 완성하시고 새 언약을 세우심으로, 신약의 성도는 더 이상 율법의 규례를 통하여 구원을 유지하거나 하나님의 복을 얻기 위해 열심을 부리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며,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다.
첫째: 신약의 성도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따라서 헌금은 의무 규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헌금 액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우리의 존재 전체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과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으므로, 성도 또한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부르심을 받았다.
-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고전 6:19–20)
-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 14:8)
이것이 로마서 12장 1절이 말하는‘거룩한 산 제사’이며, 성령께 순종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다. 신약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은 십일조를 새 언약의 의무 규례로 명령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마 22:37–40; 요 13:34). 그러므로 신약의 헌금은 율법적 의무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을 따라 하나님께 감사와 사랑을 드리는 자원하는 헌신이다. 어떤 사람은 많이 드릴 수 있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적게 드릴 수도 있다. 헌금은 누구에게도 강요될 수 없으며, 중요한 것은 액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자원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신약의 헌금 원리를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 9:7). ▶ 신약의 헌금은 율법이 요구하는 정해진 비율을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은혜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드리는 믿음의 열매임을 제시한다.
둘째: 10 %가 아니라, 삶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다. 신약의 초점은 하나님께 헌금을 얼마나 드리는가, 곧 돈의 비율로 신앙을 측정하는 데 있지 않다. 참된 신앙은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육신의 탐심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복하여 자신의 삶 전체를 그분께 온전히 내어 드리는 데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시고, 우리는 그 은혜에 순종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기꺼이 맡기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십분의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우리의 존재 전체이다. 하나님께서는 재물의 일부보다 먼저 우리의 마음과 삶 전체를 다스리시는 주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는 10 %의 헌금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 100 %를 하나님께 드리는 전적 신뢰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삶이고(마 16:24), 사도 바울이 권면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는 말씀의 참된 의미이다.
셋째: 살아도 죽어도 주의 것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맡겨 드리는 성령의 사람은 더는 자신이 자신을 주관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 의무나 조건에서 비롯되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순종과 믿음의 삶을 지향하게 된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말씀 앞에 “예, 주님.”라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의 삶이다. 성도는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뜻보다 그리스도의 뜻을 앞세우고, 자신의 영광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구하며, 자신의 힘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지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라는 고백처럼 삶의 전부를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맡겨 드리며,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는 말씀처럼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도록 살아간다.
이러한 믿음의 삶을 보여준 것이 바로 초대교회 성도들이다. 그들은 십일조라는 비율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모든 소유가 그리스도께 속한 것임을 믿는 믿음을 따라 자신의 재산을 기꺼이 나누며 서로를 섬겼다(행 2:44–45; 4:32–35). 신약의 헌금은 율법의 의무가 아니라 복음이 맺는 열매이며, 정해진 비율을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진 삶에서 흘러나오는 사랑과 감사의 표현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셨기에, 성도 또한 자신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존재의 헌신으로 응답한다. 즉, 존재의 헌신, 곧 자신의 생명과 시간과 재능과 소유를 포함한 삶 전체를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드리는 삶이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보여 준 새 언약의 헌신이며, 오늘날 모든 성도가 본받아야 할 복음의 삶이다.
초대교회의 본질
초대교회는 더 이상 민족적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새 언약을 완성하시고, 자신의 피로 새로운 언약 백성을 세우셨다.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생명의 공동체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27).
그러므로 성도는 혈통으로 난 자도 아니요, 육정으로 난 자도 아니요, 사람의 뜻으로 난 자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요 1:13)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께서 강림하셨고, 성도 안에 내주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사람 가운데 거하시는 새 언약의 교회가 세워졌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참 성전이 되셨고(요 2:21), 성령께서 성도 안에 거하심으로 성도 각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고전 3:16). 구약의 십일조 제도를 그대로 반복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십일조가 담고 있던 하나님의 주권과 감사, 나눔과 공동체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된 공동체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업이 되시며, 자신과 자신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믿었기에, 받은 것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필요를 따라 서로 나누며 섬겼다. 이는 단순한 재산 공유가 아니라, "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믿음의 고백이 삶으로 나타난 참 교회의 모습이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다음과 같은 본질을 가진다.
-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의 공동체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다.
-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되었다(요 4:24). 그러므로 베드로는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벧전 2:9)고 선언한다.
- 교회는 성령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더 이상 제사와 율법으로 유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세워지고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생명의 공동체이다(고전 3:16).
-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내는 공동체이다.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며, 받은 은사로 서로를 섬기고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세상 가운데 나타낸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는 단순한 공동체 운영 방식이나 이상적인 사회·경제 제도를 제시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 교회의 본질을 드러낸 것이며, 자신과 자신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속하였음을 믿음으로 나타낸 복음의 열매였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업이 되심을 믿었기에 받은 것을 자신의 소유로 주장하지 않고, 필요를 따라 서로 나누며 섬겼다. 이것은 단순한 재산 공유가 아니라, "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믿음의 고백이 삶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구약의 성전은 돌로 지어진 건물이었지만, 신약에서는 성도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 구약의 제사장은 짐승의 피를 드렸지만, 신약의 성도는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었다(롬 12:1). 구약의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이루어진 언약 공동체였다면, 신약의 교회는 땅 끝 모든 민족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새 언약의 공동체이다. 그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며(엡 1:22–23), 성령께서는 그분의 몸 된 교회를 친히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를 지탱한 원리는 "나는 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다"라는 복음의 고백이다. 성도들은 자신의 삶과 소유를 자원하여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드림으로써 새 언약 교회의 본질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었다. 신약의 성도는 더 이상 구약의 성전과 레위 제사장 제도 아래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고,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벧전 2:9). 이제 신약의 성도는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헌신은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다"가 아니라, "내 삶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믿음의 고백으로 나타난다.
바울의 헌금 원리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바울은 헌금을 율법이 요구하는 의무나 강제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기쁘게 드리는 자원하는 헌신으로 가르친다. 신약의 헌금은 새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마 22:37–40)에서 흘러나오는 믿음의 열매이며, 정해진 비율을 채우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1.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마음에 정한 대로'는, 신중히 생각하고 마음을 따라 결단한 대로 드리라는 뜻이다. 이는 사람의 강요나 감정에 이끌려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먼저 마음을 드리고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헌신을 의미한다.
(1)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리는 헌금이다: 헌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과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시선이나 교회의 압력, 자신의 의를 나타내려는 동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기쁨으로 드리는 헌신이다.
(2)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믿음의 표현이다: 헌금은 믿음의 분량에 따라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공급자이시며, 나와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돌보신다는 신뢰 가운데 자원하여 드리는 것이다.
(3)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헌금이다: 헌금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와 날마다 함께하시는 성령의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사랑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억지나 의무감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으로 즐겨 드리는 헌신이 된다.
바울은 헌금을 율법이 요구하는 의무나 강제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은혜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드리는 자원하는 헌신으로 가르친다. 신약의 헌금은 새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마 22:37–40)에서 흘러나오는 믿음의 열매이지, 정해진 비율을 채우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2. "인색함으로"
'인색함'은, 슬픔이나 아까워하는 마음으로, 손해를 본다고 여기며 계산적으로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보다 자신의 손실에 대한 염려가 앞서고, 믿음보다 계산이, 기쁨보다 아쉬움이 마음을 지배한다. 그 이유는 아직도 ‘나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보다 자신의 손실을 더 크게 여기기 때문이며, 여전히"내 것은 내 것이다"라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복음은 "내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나의 전부가 되신다"는 믿음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이시며, 반석이시며, 피난처이시며, 방패이시고 산성이시다(시 18:1–2). 이러한 믿음이 있을 때 헌금은 손해가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응답하는 감사와 신뢰의 고백이 된다.
3. "억지로 하지 말라"
'억지로'는 자원하는 마음이 아니라, 강요나 압박, 의무감이나 외적인 강제 때문에 원하지 않으면서도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직분 때문에, 체면 때문에, 교회의 분위기 때문에, 또는 헌금하지 않으면 복을 잃거나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드리는 헌금이다. 이러한 헌금에는 자유함과 기쁨, 감사가 없고, 불안과 두려움이 마음을 지배한다. 결국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의무를 수행하는 율법적인 행위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강요로 드려지는 돈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먼저 우리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셨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이미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다. 그러므로 헌금은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자원함으로 드리는 믿음의 응답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가르치는 헌금의 원리는, 율법적 의무감과 두려움, 계산과 거래 의식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드리는 자원하는 헌신이다. 신약의 헌금은 정해진 비율이나 외적인 강요, 억지나 두려움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고린도후서 8장 5절에서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에 대하여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고후 8:5)라고 말한 후, 이어서 9장에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고후 9:7) 드리라고 권면한다. 이는 헌금이 먼저가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 먼저임을 보여 준다. 헌금은 그 헌신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열매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믿음의 표현이다.
헌금의 헌신은 교회의 연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섬기고, 가난한 자를 돌보며, 복음 사역을 후원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모든 섬김은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열매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를 드리는가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드리는가이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감사와 사랑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믿음의 헌신을 기뻐 받으신다.
4.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복음 안에서 성도는 돈의 짐으로부터 해방받았다. 더 많이 드리지 못해서 정죄받을 필요도 없고, 어떤 비율을 채우지 못했다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으며, 더더욱 헌금으로 정죄받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일조를 포함한 모든 율법을 폐하여 주셨기 때문이다(엡 2: 14-15). 우리는 우리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이미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임을 믿음과 감사의 마음으로 헌금을 하는 자들이다.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하나님께서 가장 기쁘게 받으시는 위대한 헌금은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헌금은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버지에게 받쳐진 그리스도의 제물이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 3:16).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이 먼저 가장 존귀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희생제물로 주셨으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헌신과 나눔은 그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뿐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헌금은 의무의 짐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거래가 아니라 사랑의 응답이고, 강요가 아니라 자유이며, 율법이 아니라 복음의 열매이다. 즉 신약의 성도는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가 이미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기쁨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신뢰와 믿음으로 마음을 드리는 사람이다. 얼마를 드리는 십일조가 아니라,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는 믿음을 받으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헌금 원리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2:41–44에서 많은 부자들이 많은 헌금을 드리는 가운데,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 모습을 보시고 말씀하신다: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막 12:43–44). 부자들은 풍족한 가운데 일부를 드렸지만, 이 과부는 자신의 생계를 의지할 마지막 것까지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보였다. 예수님께서는 헌금의 액수를 비교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전적인 신뢰를 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얼마를 드렸는가?"가 아니라, "어떤 믿음과 마음으로 드렸는가?"이다. 하나님은 금액의 크기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시며, 하나님께 나아오는 마음의 자세와 믿음을 기뻐하신다. 이는 바울이 말하는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는 헌금의 원리와도 일치한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표현이며, 그분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손해를 본다는 마음이나 계산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나 제도에 떠밀려 억지로 드리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자원하여 기쁨으로 드리는 것이 복음 안에서의 참된 헌금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헌금은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도 아니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행위도 아니며,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자랑도 아니다. 또한 세상의 복을 얻기 위한 거래도 아니고, 저주를 두려워하여 억지로 드리는 의무도 아니다. 신약의 헌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믿음의 열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아낌없이 내어주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허락하셨다(엡 1:3).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는 더 많은 복을 얻기 위해 헌금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자유함으로 드리는 사람이다.
마음을 드리는 헌금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숨은 헌신이기에 자유롭고 자원하는 일이므로 기쁨과 감사가 따른다. 이러한 헌신은 교회의 연보에만 머물지 않는다. 자녀를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며, 가난한 자에게 한 끼를 나누고, 낯선 나그네를 섬기며, 선교를 후원하고, 자원봉사로 이웃을 섬기는 모든 사랑의 실천 속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또한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따라 필요한 곳에, 필요한 사람에게 흘러가는 모든 나눔은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봉헌의 삶이다. 이러한 헌신은 의무가 아니라 은혜에 대한 감사에서 비롯되기에, 드리는 사람에게 기쁨과 자유를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후 9:7)고 말한다. 결국 헌금은, 제도나 강요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와 사랑의 헌신이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믿음의 열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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