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9:18-24
18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쌔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눅 23:39-42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오른편 강도와 왼편 강도
예수님의 십자가 기준으로 좌우로 강도 둘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무리들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 둘이 모두 다 예수님을 조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막15:32). 십자가 아래 모인 무리나 십자가에 달린 자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조롱하며 욕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죄인이 되어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은 이사야에서 이미 예언된 일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하나님께서 아무런 죄가 없으신 의인이신 독생자 예수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뒤집어 씌어 범죄자로 만드셔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로 정하셨다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하늘나라 구원의 뜻이 성취되는 그 위대한 순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하여 구원을 받아 하늘나라로 이끌려 가는 오른편 강도와 멸망으로 지옥에 떨어지는 왼편 강도가 서로 분리가 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일이 당연히 일어나게 될 것임을 예수님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미리 밝히 말씀하여 주셨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영생에 들어갈 오른편 양과, 영원한 형벌을 받아 지옥 불에 떨어질 왼편 염소를 구별하시고, 오른편 양을 향하여는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라고 창세로부터 성도를 위한 천국이 예비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왼편 염소를 향하여서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2)라고 그들을 위한 지옥불이 예비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이 현실로 나타나 최후 죽음을 앞둔 순간에 십자가를 중심으로 오른편 양과 왼편 염소가 서로 분리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예수님은 이사야가 묘사한 대로 연약하고 흠모할 풍채도 없었으며,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는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그러한 삶을 살아 내셨다. 그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로마 군들로부터 매 맞음과 춤 뱉음과 수치와 조롱을 다 당하시고, 실호라기 하나 없이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 위에 매달려 계셨다. 그 모습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엄도 풍채도 능력도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약하고 아무 능력 없이 도살당하는 초라한 모습을 본 십자가 왼편에 달린 강도는, 이 세상 믿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믿는다는 열성파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을 대표하여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하고 욕 한 것이다. 왼편에 매달린 강도와 십자가 밑에 둘러선 무리들에게는 그 구원의 십자가가 무능한 십자가로 보였고, 그렇게 벌거벗은 채로 나약하게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수치스러운 조롱거리로 보였던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그들이 기대하고 상상하는 백마를 탄 왕자로 이 세상 힘의 권세자로 능력과 기적을 행하는 인간들의 탐심과 욕망을 채워주는 인간들이 소원하는 강력한 군주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과 완전히 반대되는 원리로 내려오셔서 세상과 대치되는 삶을 살아 내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으로 세상 권세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시는 어린 양의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렇게 보잘것없이 연약해 보이는 초라한 예수가 자신들의 왕이 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을 비방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요 19:6)라고 외치며 자신들을 구원하려 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반대로, 그렇게 채찍에 맞아 터져서 피범벅이 된 모습으로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시고 무력하게 조롱과 수치와 비방 거리로 취급받는 그 나약한 예수에게 자신의 구원을 의탁하는 우리 성도를 대표하는 오른편 강도가 있었다. 오직 오른편 강도에게만 비방 거리로 처참하게 당하는 예수님이 바로 자신을 구원하여 주실 메시아로 보인 것이다. 그 벌거벗은 ‘없음’으로 보이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구원을 의탁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기로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일어나는 구원의 능력과 기적이다. 그들에게만 예수가 지신 저주의 십자가가 구원의 십자가로 생명의 십자가로 영광의 십자가로 알아보는 눈과 믿음을 주신다는 증거이다. 오른편 양은 아무런 공로 없이 죄 투성이인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공로로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게 됨을 십자가 현장에서 약속받은 것이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오른편 강도는 창세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로 잠시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역할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어떻게 강도와 같은 죄인에게 임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모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우편에 달린 것이다.
하지만 왼편 강도에게는 눈을 가림으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저주함으로 그 저주와 함께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됨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영생에 들어갈 양과 영원한 형벌을 받아 지옥 불에 떨어질 염소는 창세전 하나님의 선택으로 이미 정해져 있고 구별되어 있음을 확실히 알게 하셨다. 그리하여 왼편 강도는 십자가 아래 사람들, 즉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친 그 무리의 대표자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그 순간까지도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대적하여 욕하고 조롱함으로 그런 자들의 결국이 바로 저주의 십자가에 매달려 구원을 얻지 못하는 진노의 심판이 임할 것임을 똑똑히 보여주신 것이다. 여전히 이 세상과 자기에게 가치관을 두고 “네가 그리스도이면 우리를 구원하라”라고 외침으로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는 오로지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신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내가 왕이기에 내가 원하는 것을 도와주고 이루어주는 언제든지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나를 도우는” 메시아를 원한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을 신과 같은 대단한 존재로 가치를 두고 있었기에 “나를 도우는” 종같이 부릴 수 있는 능력과 힘을 가진 거대한 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원하는 대로 들어주지 않거나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이내 그 신을 멸시하고 조롱하고 가착 없이 죽이는 독사의 정체가 십자가 현장에서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원함을 들어주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끝까지 조롱하고 욕하고 비방하는 추악하고 잔인한 괴물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반대로 오른편 강도는 이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영이 열리는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1-42). 그는 처음에는 왼편 강도와 함께 예수님을 욕하였지만 이내 눈이 열려 자신은 죄인이며 자신이 짓은 죄로 십자가에 죽어 마땅하다고 회개한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알아보고 현세를 구한 것이 아니라 내세의 영생을 구한 것이다. “당신이 나라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오른편 강도는 우리 성도의 대표로 우리의 마지막 지점에 이르는 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주님 저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하지만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당신의 나라에 나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 고백이 바로 구원의 목표지점이며 성화의 절정이다. 성도는 예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면, 오른편 강도처럼 죽음의 상태에 놓여 있는 자신의 본 모습을 자각하게 되며, 사도바울이 말년에 고백한 것과 같이 내가 바로 죄인 중의 괴수임을 뼈저리게 자각하고 “그런 나를 당신의 나라에 허락하여 주옵소서!”라고 자신을 주님의 손에 의탁하게 된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절정이다.
베드로가 우리 성도를 대표하여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막 16:16)라고 위대한 신앙을 고백할 때, 주님은 이 진리를 알게 하신 분은 네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고 말씀하셨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는 복을 내려 주셨다는 말씀이다. 반면 왼편 강도와 십자가 밑에 모인 무리들에게는 영의 눈을 막아버림으로 끝까지 예수님을 욕하고 조롱하였다. 그들은 이 세상의 현실에 목숨을 건 자들이기에 내세의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함으로 욕하고 조롱하고 저주하며 그 저주와 함께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눈과 귀를 막으셨다고 미리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 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 29:4).
오른편 강도와 같은 진실 된 신앙 고백
오른편 강도는 채찍에 맞아 온몸이 피범벅이 되어 조롱당하고, 멸시당하고, 벌거벗은 ‘없음’으로 보이는 예수에게 자신의 구원과 내세를 부탁한 것이다. 성도는 백마를 타고 철장을 든 강력한 왕의 모습으로 인간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기 위해 오신 나를 위해 존재하는 허위를 믿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인간들이 자신들의 탐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허구의 산물이다. 인간의 탐심과 욕망을 채워주는 신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으며, 이 세상 신은 마귀적 본능에서 발상하는 욕망과 탐심을 채워서 멸망으로 끌고 가는 거짓의 왕이며 살인 악마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들이 하는 일은 “살리는 것이 아니라 멸망시키기 위함이며”(요 10: ), 저들은 살인하는 자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요 8:44)라고 저주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마귀에게 속고 있다.
성도는 오른편 강도와 같이, 이 세상에서 조롱당하고 멸시당하고 수치당하고 핍박당하는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게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좀 기억해 주세요"라는 고백으로 내세에 대한 소망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보이는 그 연약하고 초라한 예수에게 자신을 맡기고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의탁하는 것이 진실된 신앙고백이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없으면 단 한순간도 존재할 수가 없는 죄인임을 자각하고 인정하여 자신을 전적으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게 맡기는 믿음이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는 나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온갖 멸시와 조롱과 수치와 핍박을 당하시고 마지막 끝까지 도살당하는 양으로 자신의 피를 몽땅 쏟으시는 자신의 전부를 내어 주시는 사랑의 십자가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죄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어 십자가에 못 박은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쏟아주시는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위대한 사랑이다. 찬송하기를,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이와 같은 진실된 고백과 같이 성도는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고, 십자가만 의지하고, 십자가만 믿으며, 십자가만 자랑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 온갖 수모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우리를 품으시는 그 사랑을 아는 것이 바로 성화의 절정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그렇게 우리를 이 죄악된 세상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벌거벗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는 예수에게 이 세상 화려한 왕의 옷을 입히고 철장을 들게 하고 백마를 탄 왕으로 둔갑시키고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고 자신들의 만족과 행복을 열심히 구하고 있다. 그들은 유대인들과 똑같이 절대로 연약하고 초라하게, 세상적 힘과 능력을 상실한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십자가에 매달린 벌거벗은 예수를 자신들의 왕으로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힘없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예수가 자신들의 죄를 짊어진 메시아이시며, 자신들을 이 세상 저주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도살당하는 희생양임을 알 수도 또한 믿을 수도 없었기에 회개와 구원을 외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롱하고 욕하고 끝까지 예수님의 대적자로 나온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오직 나만을 위한 신을 마음에 그리고 있기에 그 신은 곧 ‘나’를 가리킨다. 인간이 원하는 신은 이 세상의 힘과 능력과 부귀와 영화들을 안겨주는 어떤 강력한 신의 힘을 빌려 내가 왕이 되어 세상을 군립 하고 싶은 나 자신이다. 바로 인간 자신들의 원하는 모든 것을 투입한 자신의 형상이며 그것이 우상숭배이다. 반면에 참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는 멸시와 천대와 핍박과 십자가 죽음으로 내가 삭제되고 하늘나라의 생명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영생을 사는 내세를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바로 십자가 오른 편에 달린 강도와 같이 예수와 함께 이 세상에 대하여서는 죽음으로 하나님에 대하여서는 산 자가 되기를 구하는 것이다. 이 세상 현실에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 이 이 세상의 것을 부탁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의탁하는 것이다. 이 세상 부귀영화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며, 그분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를 구하며, 죄에서의 자유를 구하며,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분의 나라는 눈에 보이게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분의 나라는 보이지 않게 임하며, 보이지 않게 십자가 죽음으로 성취되며, 보이지 않게 내 마음에 임하는 것이다. 오른편 강도가 예수님에게 ‘당신의 나라에 나도 함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할 때 즉시 십자가에서 풀려나와 사형 언도에서 살아나오는 눈에 보이는 기적적 변화가 아니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매달린 그 모습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도는 예수님이 주신 약속,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이 말씀을 붙들고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여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는 은혜를 입은 것이다. 육신적 현실은 전혀 바뀐 것이 없지만 영의 현실은 천국으로 올라가는 기적적 축복이 임한 것이다. 성도는 바로 그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헐벗고 굶주리고 조롱과 멸시와 천대이지만 그 나라는 눈물과 고통도 아픔도 없는 오로지 영원한 빛과 생명으로 충만한 비교할 수 없는 내 고향집이며 내 아버지의 집이며 나를 그토록 사랑하는 신랑과 영생을 사는 집이다. 그 나라는 이 세상에서는 당하는 모습으로 임한다.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역설로 나타난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 현실에 목숨을 걸지만 성도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에 목숨을 건다. 성도에게는 이 세상이 현실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현실이기 때문이다.
다윗의 고백과 같이 예수 안에 있는 성도의 삶은 예수님의 삶과 같이 이 세상에서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시 22:6-8) 함과 같으며, 이것이 성도의 현실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음에도 그가 이 세상에서 살아낸 현실은 바로 자신이 고백한 조롱과 멸시를 받는 고난의 삶이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구원은 이 세상에서 얻어지는 형통이 아니라 이 세상 죄에서 사함을 받는 영적 구원이다. 이 세상 전체가 바로 “어둠과 공허와 흑암”이며, 인간들이 끊임없이 토해내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스스로 얽히고설키어 멸망을 자초하는 파멸과 지옥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빠져나오는 구원을 이루어주신 것이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이 세상이 바로 그러한 흑암의 권세이며 멸망으로 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이 세상에 남겨둘 수가 없음으로 이 세상에서 뽑아내어 당신의 나라로 들어 올리시는 구원을 성취하셨다. 그런데 성도가 이 죄악 덩어리로 멸망에 치닫고 있는 세상에 미련을 가지고 아름답게 보고 잘 살게 해달라고 구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이 진리를 깨달은 바울은 ‘내가 이 세상의 것을 배설물로 여겼노라’ 라고 리얼하게 말해주고 있다. 목구멍까지 차고 넘치는 죄인들이 쏟아놓은 배설물로 뒤덮인 이 음침한 세상에 무슨 하나님 앞에 내세울 자존심과 가치와 인기와 명예와 자랑과 업적이 있겠는가. 모두가 배설물에서 나오는 산물임을 어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생명을 잉태하는 영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될 것이라고 믿는 희망 사항이 아니다. 그리고 믿음의 출발점은 나의 유익을 추구하는 육신의 욕망이 아니라, 반대로 오직 나만을 위해 살던 ‘자아’라는 존재가 바로 티끌과 같은 ‘없음’의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깨달음이다. 자신이 바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없음’의 존재라는 실체를 투명하게 깨닫게 됨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은혜만을 구하게 되는 철저한 자기 부인과 십자가 죽음으로 이끌려가는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이다. 즉 나의 영적 가난함을 감지하고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만을 갈망하게 되는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소경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였고, 여인은 자신이 개와 같은 이방인임을 인정한 것이며, 세리는 자신의 죄가 너무나 악하기에 구원받을 자격이 없음을 인정한 것이며, 창녀는 자신이 바로 세상과 간음한 더러운 죄인임을 인정한 것이며, 강도는 자신이 짓은 죄가 십자가의 처형에 합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각이었다. 그래서 이들 모두가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를 구한 것이다.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하는 애통을 ‘믿음’이라고 불려주시고, 그 믿음이 너희를 구원하였다고 의로운 믿음으로 여겨주신 것이다. 그래서 믿음을 선물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성도의 십자가 삶
하나님의 역사는 당신의 백성을 이 세상 죄에서 끄집어내어 당신의 나라로 들어 올리는 역사로 이 세상의 죄악들을 폭로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먼저 갈대아 우르에서 나오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의 여정은 자신이 정착하여 잘 살고 있는 고향을 떠나는데서 시작하여 떠돌이 나그네의 삶을 살아간 인생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세상 애급에서 끄집어내어 광야로 인도하셨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완전히 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먹고 마시는 그 광야를 40년이나 걷게 하신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이 세상 바벨론에서 당신의 백성을 끄집어내고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한 광야를 원하지 않는다. 광야에는 즐겨먹는 고기와 부추가 없고 즐기는 오락 생활이 없고 즐겨 마시는 술도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세상 것들을 달라고 요구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과 불평들을 쏟아 놓는다. 반면 하나님은 세상의 것들을 돌아보지 못하게 끊임없이 경고의 사건들을 일으키신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붙들고 사는 인간에게 이 세상의 실체를 확실하게 보여주시기 위해, 이 세상 사람들의 결국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 오직 당신의 마음에 합한 노아와 노아에게 속한 식구 8명만 구원하시고 나머지 모든 인류는 홍수로 쓸어버리는 심판을 내리셨다. 그리고 이 세상에 미련을 두고 세상과 하나가 되어 사는 당신의 백성을 끄집어내기 위해 소돔과 고모라에 불을 지어놓음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의 실체가 바로 한순간에 타서 재가 되는 허상과 허무임을 불심판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는 롯과 같이 불에 타서 곧 없어지는 것에 마음을 둔 자들이며, 강제로 손을 잡고 끄집어 내 주심으로 그 불타는 곳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타서 재가 되는 곳에 미련을 두고 되돌아서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뒤를 돌아보는 롯의 아내를 소금 기둥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우리 안에 쌓여있는 이 세상의 것들을 끊어내기 위해 그분은 좌우로 낱선 검으로 우리 안에까지 뚫고 들어오셔서 말씀으로 하나하나씩 끊어내고 부시는 일들을 하신다. 그 전쟁은 밖에 있는 마귀의 존재와의 싸움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나라는 우상과의 싸움이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본능이기에 우리 스스로 끊을 수 없음으로 그분이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그 마귀적 속성들을 제거하시는 전쟁을 하고 계신다. 그렇게 나의 영광과 나의 탐심과 나의 욕망으로 살던 자들이 구레네 사람 시몬과 같이 십자가를 등에 업고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으로 끌러가는 것이다. 내가 노력하여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그렇게 이끌고 가시기 때문에 은혜이며 복음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구하는 것은 이 세상 육신을 위한 것들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원하는 것들이 삭제되고 내 ‘자아’가 죽음으로 오로지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나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때문에 성도는 이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세상에서 박수와 갈채를 얻어내는 위인으로 존경과 영광을 받는 자가 절대 아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역설로 우리에게 겨자씨와 같은 믿음을 원하신 것이다. 바로 나는 겨자씨처럼 너무나 작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없음’으로 내려갈 때 산을 옮기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에게 임하게 된다는 십자가 자기 부인의 믿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사는 성도의 모습은 육신이 죽어가는 없음의 자리에 내려가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내 안에 계시는 완전한 비움과 부인과 죽음으로 가는 십자가 모습이다. 그래서 애급에서 나온 60만 명이 광야에서 다 죽고 새롭게 태어난 60만 명이 은혜로 말미암아 여호수아, 즉 예수의 인도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성경은 계속 반복하여 똑같은 주제로 여러 면으로 상세하게 설명하여 주고 있다. 우리의 광야 인생은 계속 죽어서 이 세상에 흙으로 묻고 새롭게 태어난 영으로 하늘나라 내 고향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얼마나 사악하며 그 죄가 얼마나 추악하고 저주스러우며 예수그리스도 없는 그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고 헛된 고생인지를 체험시키기 위해, 우리 옛사람이 죽는 십자가 삶으로 이끌고 가신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육신으로는 수시로 얻어터지는 고난의 삶과 추락할 수밖에 없는 육적인 실패의 삶을 경험하면서 내가 얼마나 추악한 죄인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흙에 불과한 연약한 존재임을 수시로 폭로 당하고 깨닫게 됨으로, “나는 예수가 아니면 한시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썩은 육체를 가진 존재”임을 깨닫고 오로지 예수 십자가만을 붙들고 의지하는 자로 정착되는 것이다.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삶을 몸으로 경험하면서 오로지 그분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자로 운명 되어 있기에 반드시 그 삶을 이 세상에서 살아내야 한다. 그 삶을 마다하는 자는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왜냐하면 철저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에서 나의 모든 죄가 보혈의 피로 사하여지는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드러나며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가 쏟아져 내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추악함과 불가능함과 무력함에서 더욱더 밝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말하기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0-21).
성도는 십자가 삶으로 이 세상의 추악한 죄악들을 폭로하고, 인간의 무능함과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함을 지적하고, 인간의 자존심을 부수고 회개를 촉구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공격을 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예레미야는 이렇게 외친 것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렘 20:7-8). 예레미야는 자신의 무력함과 인간의 무력함을 폭로하는 것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인간의 강포와 멸망을 외침으로 조롱과 치욕과 박해를 받았음을 고백한다. 예레미야는 그 박해와 치욕과 조롱이 너무나 심하여 견디기가 힘들어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렘20:9)라고 까지 맹세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던 자였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자신에게 떨어진 사명을 외면할 수가 없었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세상에 전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그 고통이 오히려 더 심하여 참을 수 없음을 이내 고백한 것이다.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성도는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자로 정해 놓으셨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여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는 자로 세상에서 조롱과 비웃음과 핍박과 돌에 맞아 죽는 삶을 살아낸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순교의 삶을 끝까지 살아내도록 인내심과 담대함을 주셨지 편안한 삶과 고난과 조롱과 매 맞음에서 피할 길을 열어주거나 덜어주지 않으셨다.
우리는 예레미야 시대보다 더 혹독한 마지막 때를 살고 있다. 성도가 구할 것은 선한 싸움을 다 싸우도록 견디어 내도록, 어떠한 고난과 핍박이 목숨을 아사가도 우리 주님만은 부인하지 않고 그 귀한 순교의 삶을 허락하여 주심을 감사하도록 인도해달라는 간구뿐이다. 성도는 나를 위하여 손발이 못에 뚫리고 뼈마디가 갈라지는 번제물이 되신 우리 주님을 마음에 새기고 그 삶을 나도 살아갈 수 있도록 십자가 삶을 구하는 것이다. 성도가 구하는 것은 이 세상의 썩어짐의 배설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저 하늘나라의 신령한 말씀을 구하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잠시 사는 동안 주님이 살아내신 십자가 삶을 잘 살아낼 수 있도록 인내와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구하며, 자신을 완전히 주님의 인도에 의탁하는 순종이다. 우리는 자기의 영광과 자랑과 유익을 위해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을 박은 자리에서 새사람으로 거듭나 오직 십자가 복음의 증인의 삶으로 실제로 이 세상에서 십자가 삶을 살아내는 자리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며 믿음 생활이며 성화의 절정이다. 그렇게 나 자신이 부인되고 죽는 그 자리에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다. 성도는 그렇게 그의 인생 속에서 죄인으로 폭로되고, 새롭게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나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을 이룬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하나를 강조하신 것이다. 이 진리를 깨닫고 바울은,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19-20)라고 우리 성도의 믿음의 절정을 제시해 주고 있다.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있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강도’로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 없으신 의인이시며, 우리의 죄를 뒤집어쓰셔서 죄인이 되고 강도가 된 것이지, 그분은 본체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왕 중의 왕이시다. 이를 증거하여 세상에 나타내시기 위해 빌라도의 손을 빌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히브리어와 로마와 헬라 3개국 말로 기록하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만유의 왕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공포하신 것이다.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로마(라틴어)어는 그 당시 유럽과 소아시아 지역 사람들 전체가 사용하는 만국의 언어였다. 즉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지만 만국의 왕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였다. 상징적으로 말하면, 히브리어는 종교와 율법을 상징하고, 로마어(라틴어)는 그 당시 세상 힘과 권세 권력을 상징하며, 헬라어는 지식과 지혜와 문화를 상징하고 있었다. 즉 이 세상 그 어떤 신도 구원을 줄 수가 없으며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생명을 주관하시는 왕이시며, 그분은 이 세상 모든 곳, 모든 시대, 모든 백성을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권세와 능력과 지혜의 왕이심을 선포하는 팻말이었다. 성경적으로 보면, 구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고,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팻말에 구약과 신약의 글로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함으로, 예수님은 바로 구약에서 약속하신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메시아이시며, 신약에서 온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만 백성의 왕이시며 구세주 이심을 나타내셨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끝까지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유대인의 왕이심을 거절하여 빌라도에게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고쳐 쓰라고 항의한 것이다. 빌라도는 이내 “나의 쓸 것을 썼다”(19:22)라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음으로, ‘너희가 바로 너희의 진정한 왕을 십자가에 못 박은 어리석은 백성이라’는 뜻으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다. 그들은 참 메시아로 참 왕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 스스로 이 세상 신, 즉 마귀를 상징하는 가이사를 자신들의 왕으로 섬기겠다고 맹세하는 엄청난 죄를 저지른 것이다. “저희가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19:15).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빼앗고 억압하고 착취하고 핍박하는 로마 황제를, 즉 영적으로는 이 세상 마귀를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한 것이다. 참으로 패역무도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기 위해 스스로 자신들의 말로 가이사를 자신들의 왕이라 인정함으로,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섬겨온 하나님의 등에 칼을 꼽는 잔인하고 추악한 모습을 스스로 세상에 드러낸 것이다. 인간의 죄의 본성이 얼마나 잔인무도하며 얼마나 부패하고 더럽기가 그지없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들이 진정 섬겨온 신는 참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 마귀의 세력과 권력이었음이 너무나 확실하게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백성들로부터 받고 있는 특권과 영광을 지키기 위해 이내 세상 권세자 가이사가 자신들의 왕이라고까지 내뱉게 된다. 그들의 마음에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철저히 드러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택함을 받은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고 하였지만, 실상은 이 세상 이방인들과 똑같이 이 세상 신을 마음에 두고 자신들의 유익을 추구한 외식하는 자들이었음이 폭로된 것이다. 육신으로는 택함을 받은 백성이었지만 실상은 세상 이방인보다 더 패역한 삶을 살아간 회칠한 무덤, 마귀의 자식들과 다름이 없었음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메시아관은 이 세상을 토대로 한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와 권력과 힘을 가진 다윗 왕국의 재건이었으며, 자신들의 소원과 탐심을 채워주는 자신들만을 위해 ‘나를 도우는’ 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 상태가 곧 회칠한 무덤이며 그들이 곧 독사의 자식이라고 저주하신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하나님은 그런 패역한 자들에게 빌라도를 통하여 너희 왕은 이 세상 신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가 너희 유대인의 왕”이라고 팻말에 크게 써서 보여주심으로 장차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다시 오셔서 그들의 사무친 죄악들을 심판하실 것임을 계시하여 주셨다.
유대인들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유대인들로부터 배척과 핍박과 살해를 당함으로 그들이 버린 ‘나사렛 예수’가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의 영적 유대인의 왕으로, 즉 우리와 같은 이방인의 영원한 왕, 영원한 주가 되신 것이다. 그리하여 십자가 팻말에 3개 국어로, 구약 히브리어와 신약 헬라어로 “유대인의 왕” 즉 만백성의 왕이시며 구세주가 되심을 기록하여 공포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으로 보내주셨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알아보지 못하였고 도리어 이 세상 마귀를 상징하는 가이사를 자신들의 왕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게 육적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 신을 왕으로 섬기게 됨으로, 이 세상 신을 섬기던 이방인들이 세상 신을 버리고 유대인의 왕을 자신들의 왕으로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엄청난 영적 개벽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이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롬 9:3-0-32). 즉 예수를 왕으로 인정하는 이면적 유대인이 바로 영적 이스라엘이며, 바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잉태된 우리 성도를 가리킨다. 즉 이 세상을 좇는 육적 이스라엘과 예수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왕으로 영접하는 영적 이스라엘을 구별하시는 사건이 바로 인류 구원이 성취되는 십자가 예수를 기준으로 하여 오른편 강도와 외편 강도가 분리되는 사건이다. 그리고 영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12제자들을 통하여 땅 끝까지 십자가 복음이 전파되어 육적 이스라엘이 버린 예수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으로 구세주로 메시아로 영접하는 영적 이스라엘이 온 땅에서 솟아 나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확장되고 있다.
그렇게 십자가 복음은 예수님의 부활이후로 유대인의 담을 넘어서 땅 끝까지 만백성에게 전파된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눈을 가리게 하심으로 이방인 우리에게 복음을 받아들이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만약 육적 이스라엘의 패역한 역사가 없었더라면, 우리도 유대인들과 똑같이 육적 욕망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모형과 그림자만 보라보고 거기에 목숨을 걸게 되어 결국 육과 함께 멸망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이르기를,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히 8:5), 그 모형과 그림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참 진리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보화를 알아보는 영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그 보화를 소유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이 귀한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잠시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이 비밀을 깨닫고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하셨으며’(롬 11:25),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롬 11:32). 즉 하나님께서 이방인 가운데 구원받기로 선택된 자들의 수를 채우시기 위해 이스라엘의 대부분을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믿지 않게 하셨다는 놀라운 말씀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하나님의 예정 섭리를 “비밀”(롬 11:25)이라 부른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 9:6-8)함과 같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전개되는 모든 일들은 하늘에서 이루어 놓으신 뜻대로 역사를 섭리하시는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드라마다. 인간이 계획하고 인간이 일으키는 일같이 보이지만, 이 역사의 주도자는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자신이 정하여 놓으신 뜻과 계획에 따라 독립적으로 역사를 운행하시고 계신다.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과 작전 순서와 시간표에 따라 일어나는 일들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여 4000여 년이라는 구약의 역사를 주시지 않았더라면,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불순종하고 대적하고 거역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끝없는 자비와 긍휼과 인내와 용서와 사랑을 알 수가 없었으며, 육의 본능적 죄악들을 뼈저리게 깨닫지 못하였을 것이다. 바로 우리 자신들의 악한 죄의 본성과 부패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거울이다. 인간의 끝없는 탐심과 욕망을 그러내는 이스라엘의 패역함, 그럼에도 끝까지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처럼 투명하게 보여준 이스라엘의 역사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패역한 정체성을 깨닫지 못하였을 것이고,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며, 어떻게 불가능한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표현되는지를 알 길이 없으며, 우리에게 향한 그 구원의 실체인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그 신적 사랑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며, 왜 그 구원이 선물이며 은혜인지를 깨닫지 못하였을 것이다. 또한 율법이 없었더라면 죄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을 것이고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명예와 부를 추구하는 욕망과 탐심으로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절대로 하나님의 의에 항복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를 이해할 수도 또한 받아들이지도 않거니와, 도리어 자신들의 거짓된 의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의를 거역하며 하나님마저 죽이려는 악한 마귀적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은 오직 열린 무덤과 같은 존재이며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하나도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 10-18). 이와 같이 인간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는 열린 무덤이며, 파멸과 고생이며, 더러운 걸레이며, 먼지이며, 배설물임을 성경은 반복하여 폭로하고 있다. 인간은 절대로 자신을 부인하는, 즉 자신의 존재가치가 부정당하는 십자가 죽음으로 내려갈 수가 없으며, 회개와 은혜의 복음을 거부하고 배척하며,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삶은 세상에 대하여서는 죽음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가 원하시는 삶을 순종으로 살아내는 자기 부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이 먼저 이 세상으로부터 거절당하고 천대받고 버려지고 핍박받고 죽임을 당하는 십자가 삶을 살아내셨다. 주님은 어린 양이 되어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하늘나라의 원리로 세상을 이기심으로 세상 권세자의 무력함을 폭로하셨다. 육신은 비록 세상 임금에게 내어주어도 그분의 본체이신 영원한 생명은 그 누구도 당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죽임을 당하나 오히려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늘나라 삶의 원리이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라고 당당하게 말씀하고 있다. 즉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무력하고 연약하고 미련한 것으로 보이지만, 성도에게는 구원의 능력이며, 부활이며, 영생이며,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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