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9:1-11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 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되었노라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날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소경은 말 그대로 어둠이기에 먼저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일은 없다. 하지만 주님은 이미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계셨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9:3) 찾아와 주셨다. 주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통하여 주님이 오시기전 우리의 원 상태가 바로 날 때부터 어둠에 갇힌 죄인의 실존이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많은 치유 중에 유독 어둠에 갇힌 죄인을 상징하는 소경이 고침을 받아 빛을 보는 기적들이 5번씩이나 기록 되어 있다. 요한은 창세기 1장에서 창세전 우주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묘사와 동일하게 이 세상을 한마디로 ‘어둠’이라고 부르고 예수그리스도를 ‘빛’과 ‘말씀’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죄인들 마음에 “각자에게 비추는 빛으로”(요 1:10) 직접 뚫고 들어오셔서 혼돈에 질서를, 공허에 은혜를, 흑암의 죽음에 생명으로 새 창조를 일으키게 될 것임을 계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특별하게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등장시킴으로, 이제 그분이 빛으로 이 어둠의 세상에 뚫고 들어오셔서 어둠에 속한 자들에게 빛과 자유를 주실 것이며, 빛의 자녀로 빛의 나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임을 계시하여 말씀하시기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9:3).
주님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세상에 나타내시기 위해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만나주셨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굳이 예수님이 ‘길 가실 때’라고 밝힘으로 예수님이 지나가는 길가에는 많은 소경들이 앉아 구걸하고 있었음을 힌트 한다. 그리고 소경은 “앉아서 구걸하는”거지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9:8). 그런데 주님은 유독 택함을 받은 한 소경만 주목하시고 그를 통하여 아버지의 일을 나타내신 것이다. 요한복음 5장에서도, 베데스다 연못 주위에 모여든 그 많은 병자 중에서 오직 38년 동안 앉음뱅이로 살았던 자에게만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고치셔서 걷게 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지금 날 때부터 소경된 한사람만 주목하시고 그를 안식일에 눈을 떠서 빛을 보는 은혜를 입혀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모든 일을 그 때와 그 장소와 그 상황에서 그에 맞는 택한 자를 등장시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로 역사를 이끌어 가심을 확실히 보여주시고 있다.
그러므로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뜨고 빛을 본 기적은 우연히 발생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기 위한 계획대로 택한 그를 들어 쓰신 것이다. 천대와 멸시와 고통 속에 시달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주와 같은 상황에 있을 때 아버지의 때에 맞춰 주님이 먼저 그를 찾아와 주셨고,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지옥 같은 어둠에서 벗어나 빛을 보게 한 것이다. 육신의 눈만 떠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을 뜨게 하신 이가 바로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게 되었고, 영접하여 믿게 됨으로(9:35-38) 영원한 빛의 나라로 들어가는 하늘의 복을 받은 것이고, 복음전파에 쓰임을 받은 것이다. 눈을 뜬 소경에게 있어서, ‘거지 소경’과 어둠은 지나간 과거이며, 어둠이 다시는 그를 주장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영원한 빛의 자녀로 빛의 나라로 입성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미래가 현실이고 사실이며 이제 하나님의 당당한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자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현실 속에서는 그 어떠한 죄도, 운명도 실패도 고통도, 잘못된 과거도 상처투성인 과거도 다 도말된 것이며,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빛이 된 그의 자유를 빼앗아 갈수가 없게 된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 눈뜬 그 순간부터 그에게 있었던 모든 어둠의 과거는 즉시로 물러가고 그는 이제 자유한 몸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새 사람으로 탄생된 것이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뜬 표적은, 바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세상에서 죄와 죽음의 고통에서 구원받아 자유를 얻게 되며, 빛의 자녀로 새롭게 창조되는 새 생명의 잉태를 제시하고 있다. 그분이 친히 흑암 속에 빠져있는 우리 죄인을 찾아오셔서 영의 눈을 뜨게 하셔서 생명과 빛으로 새롭게 창조해 내시는 구원의 복음을 제시한다. 이는 이사야를 통하여 이미 예언하여 주셨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사9:2-7). 흑암의 죄와 사망에 갇힌 백성들을 건져 내시는 참 빛이 오시는데 그 빛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이는 인간의 행위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희생양으로 죽으시는 십자가 공로를 근거한 “하나님의 열심이 이를 이루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즉 인간의 공로나 자격이나 열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열심’으로만 완성이 된다는 이사야의 말씀이, 지금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눈 뜨게 하여 큰 빛을 보는 표적에서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던 제자들도 날 때부터 소경이 되어 구걸하는 자를 주목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소경을 보는 관점은 예수님과 완전히 달랐다. 이들은 이내 소경을 가리켜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9:2)라고 율법적으로 인과응보(원인과 결과)의 관점에서 질문한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의 권위자인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받아 고난과 불행과 질병을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결과로 해석하고, 그렇게 각종 질병으로 고통에 빠져있는 연약한 자들을 ‘죄인’이라 판단하고 정죄하고 배척하고 멸시한 것이다.
첫째,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죗값: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에 저주받은 사람은 다음 생인 자손에게로 이어져서 불행과 질병의 고통 속에 던져지게 된다는 원리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 바로 이러한 구절들을 근거로 저주의 유전으로 이해하고 “소경으로 난 것이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질병의 원인이 부모의 죄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다고 천명하셨다.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겔 18: 2-3).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다”(렘 31:29; 사3:15). 그러므로 제자들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둘째, 자신이 범한 죗값: 유대인들은 또한 태아가 어머니 뱃속에서도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 하는도다”(시58:3). 이러한 구약 성경을 근거로 하여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죄를 지으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고 믿고 있었기에 제자들도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다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대와 정 반대되는 대답을 하신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9:3). 제자들은 나면서 소경이 되어 천대와 멸시를 받는 불행한 그를 놓고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그가 소경이 된 것은 과거에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원인을 규명하고 있었다. 즉 소경이 된 것이 ‘부모의 죄 때문이며 혹은 자기 죄 때문이다’라는 판단이다.
반면에 주님은 과거의 원인으로 현재를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현재의 일로 미래 일어나게 되는 지향성으로 제자들에게 긍정적인 해답을 주신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9:3). 모든 일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며 그분의 주권으로 일으키시는 일이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한 의도이시기에 너희는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라는 경고이다. 즉 하나님의 독립적 주권으로 이루시는 일이기에 인간은 그분이 하시는 일을 예측할 수도, 인식할 수도, 또한 토를 달 수도 없다는 아주 명백한 해답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부모의 죄 때문에 아들이 그 죄를 담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또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그 아버지가 행한 모든 죄를 보고 두려워하여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내 규례를 지키며 내 율례를 행할진대 이 사람은 그의 아버지의 죄악으로 죽지 아니하고 반드시 살겠고….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겔 18:14-20).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렘 31:29). 때문에 부모의 죄 때문에 아들이 저주를 받는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이 주님이 주신 명백한 해답이다.
만약에 제자들처럼 율법의 자대로 사람을 판단한다면, 질병과 불행에 걸린 자는 죄 때문이며,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잘 사는 자는 죄가 없다는 완전히 잘못된 괴론이 나오게 된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열심히 지킨 의인이요 청결한 자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지만, 율법적 기준으로 다른 연약한 자들을 향하여서는 ‘죄인’으로 ‘저주’로 판단하고 정죄하여 돌을 쳐 죽이는 악행을 일삼고 있었다. 이들은 율법을 들고 간음한 여인을 ‘죄인’이라 판단하고 돌을 들어 쳐 죽이려고 하였고, 그 간음한 여인을 미끼로 예수님을 율법을 범한 ‘죄인’이라는 죄를 뒤집어 씌워 공개적으로 죽이려고 한 살인 악마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들의 사무치는 죄악이 과연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죄보다 덜하다고 볼 수가 있겠는가! 주님은 이들이 ‘죄인’이라 정죄하는 소경에게는 긍휼과 은혜를 입혀 정결한 자로 구원과 생명을 입혀 주셨지만, 반대로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서는 ‘마귀의 자식’ ‘독사의 새끼’ ‘회칠한 무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라고 부르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들의 죄악을 폭로하는 십계명을 주어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이며, 하나님마저 대적하고 죽이려고 하는 ‘살인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도덕질하는’ 좀 먹는 벌레와 같은 거짓말쟁이며, 이 세상에서 으뜸이 되고자 ‘세상과 간음하는’ 자들임을 폭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율법적 판단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과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날 때부터 소경 되게 하셨는가?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 때가 아직 낮 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주님은 바리새인들처럼 율법과 인과응보의 원리로 자신들보다 연약한 자를 놓고 ‘자신의 죄 때문이냐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이냐’ 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비난하는 제자들의 잘못된 사고방식을 교정하여 단호하게 ‘자신의 죄 때문에도 아니며 부모의 죄 때문에도 아니다’라고 천명하신다. 즉 너희는 바리새인들과 같이 율법적 사고방식으로 연약한 자를 비난하고 정죄하지 말고 그를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능력을 바라 보아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로 말씀하시기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즉 그가 소경으로 태어나 보지 못하는 그 자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긍휼과 은혜를 입혀 빛을 보게 하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실 것이며, 너희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은 어떠한 자에게 임하게 되며 그 구원의 은혜가 어떻게 임하는지를 나타내어 보여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즉 너희도 소경과 똑같은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어 구원받은 자들임을 보여주시기 위한 의도임을 계시하신다. 그리하여 주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나타내어 보여주신다고 말씀하시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9:4)라고 제자들을 주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시키고 있다.
예를 들면, 제자들은 전도 여행의 현장에서 병자가 고쳐지고 귀신이 쫓겨나가는 기적들로 너무나 흥분하여 주님에게 돌아와 자랑스럽게 보고하고 있었다. 그 때 주님은 일어난 기적들로 기뻐하지 말고, 그 기적들을 통하여 너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전지전능하심을 믿음으로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이 이들을 전도에 내 보내시고 기적을 행하도록 능력을 입혀주신 목적이 바로 제자들에게 믿음을 주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됨을 알게 하려는데 있었다는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눈 뜨게 하는 표적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한 데 있음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그를 일부러 소경으로 태어나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그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으로 그들의 믿음을 끌어올리기 위함임을 제시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위해 아프지 않아도 될 사람을 아프게 만 드시거나 불행하지 않아도 불행하게 만 드시는 그런 분이 절대 아니다. 이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3-15). 인간이 시험을 받는 것은 죄인으로 태어난 육신의 탐심과 욕망에 사로잡히는 마귀의 본능 때문이다.
하나님은 의와 선이 시기에 인간을 악으로 고통으로 밀어 넣고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자신의 욕심에 끌려 죄와 사망의 어두운 지옥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는 자기 백성을 빼내어 빛 안에 거하는 일을 하시며, “하나님의 열심이 이를 이루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분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희생양으로 죽으신 분이시다. 때문에 택함을 받은 성도는 시험을 당하거나 죄의 고통에 빠지게 될 때 그것이 자신의 욕심에 끌려 미혹된 죄악임을 알게 되며, 그 욕심이 결국은 죄를 낳아 죽음에 이르게 됨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성도는 가난한 심령과 애통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뼈저리게 자백하며 필사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만을 의지하며 그분의 긍휼과 은혜만을 꼭 붙들 게 된다. 죄와의 싸움은 성도의 인생에 동반됨으로 우리에게 다윗의 실수와 사도바울의 진실한 고백과 같은 경험을 주심으로 깨닫게 하신 것이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의 남편을 죽이는 살인죄까지 짓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잘 살고 있었다. 나단 선지자가 그의 죄를 지적할 때 다윗은 이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였음을 깨닫고 자신의 실체를 올바로 직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 것이다. 다윗은 재를 뒤집어쓰고 통곡의 회개 대신, 자신의 죄를 영원히 도말하여 죄와 사망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십자가의 구원을 구한 것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시 51:7~8). 우슬초는 어린 양의 피를 바르는 솔을 상징함으로 다윗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나를 정결케 해달라고 구한 것이다.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즉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십자가 피의 공로로 영원한 죄의 사하심과 영생이 주어짐으로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라는 복음을 찬양한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모태 중에 죄인으로 출생하여(시51:5) 죄만을 생산해내는 자신의 실체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인식하고 자신 안에 뿌리박고 있는 근본적인 죄의 본질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어린양 피로만이 완전히 제거되고 도말되는 복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죄를 영원히 없애주시는 어린 양의 십자가 구원을 구한 것이다.
성도는 이 세상 광야에서 끝없는 타락, 유혹, 실패, 절망, 고통, 시련과 고난을 겪으면서 도저히 죄와 사망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의 실체를 들여다보고 깨닫게 됨으로 바울의 고백과 같이 ‘오호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죄옥에서 구원하리오’ 라고 필사적으로 구원을 외치는 마음이 찍기는 상함과 애통이 터져 나오게 된다. ‘나는 하나님이 구원하여 주시지 않으면 인간쓰레기로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질 존재'라는 실체를 깨닫고 자신을 부인하는 자리로 내려가게 된다. 성도의 삶은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필사적인 쟁취가 아니라, 반대로 내려놓는 것이며 버리는 것이며 포기하는 것이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인하는 붕괴이다. 자신이 바로 죄인으로 잉태된 철저한 죄의 조성자이며, 패역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다. 즉 우리의 마음 상태는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 3:12-18)함과 같다.
사도바울은 진리의 말씀이 그의 심령에 점점 깊이 파고 들어와 그를 해부하고 분석한 결과 ‘의인의 성화’가 아니라, 반대로 ‘죄인 중의 괴수’로 폭로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자신의 지체 속에 선과 악이 서로 대적하여 속사람, 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지만 육신은 이 세상의 것을 원하는 그 욕망이 끝없이 그를 괴롭히고 있기에 바울은 자신의 육적 욕망을 ‘사망의 몸’이라고 부르고, 그 죽은 시체에서 나오는 행위가 너무나 악함을 깨닫고, 말년에 철저한 자아인식으로 자신에게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라는 타이틀을 붙이게 된다. 자신은 본래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죄인 중의 괴수’ 즉 마귀와 방불한 자이며, 죽어 마땅한 자임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외치기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
인간은 스스로 타락한 죄의 결과로, ‘가시와 엉겅퀴’와 같은 저주 속에서 죄에 얽매어 얽히고설켜 여러 가지 형태로 사망으로 치닫고 있다. 모든 인간은 본래 죄인으로 저주 속에서 태어났기에 본능적으로 심히 부패하고 위선적이고 패역하기에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날 때부터 어둠에 속한 죄와 사망에 던져진 똑 같은 죄인이기에 죄인을 구원함에 있어서 그 어떤 것도 보지 않으신다. 즉 그것이 부모의 죄이든 자신의 죄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똑 같은 죄인이라는 말씀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때문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단정을 내리고 있다.
모든 인간은 자신들의 죄로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 육신이 병신으로 태어났다고 하여 혹은 멀쩡하다고 하여, 율법을 잘 지켜 도덕과 윤리로 청결한 삶을 살았다 하여, ‘죄인’으로 ‘의인’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타락으로 마귀의 후손으로 태어났기에 마귀적 욕망과 탐심으로 본능적으로 더럽고 패역하며 잔인하고 이기적이며 ‘자아’에 굶주린 이리와 독사와 같은 자들이다. 때문에 처음 시작부터 인간에게 행위의 의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은 얼마나 연약하고 이기적이고 악하고 패역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나타내시는 스토리로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4000여 년 동안 하나님과 교제하여온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무능하고, 무지하고, 어리석으며 악하고 패역한 완전한 죄인인지를 역력히 읽을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어떤 의롭고 선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대적하고, 반항하고, 불순종하며 결국은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시체가 되었던 백성들이다. 그들의 후손 유대인들도 똑같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사사건건 하나님이 보내주신 아들을 멸시하고 거역하고 극구 대적하여 결국 언약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하나님마저 살해한 최악으로 나간 백성들이었다. 바로 우리 인간의 죄의 본성을 보여주시기 위해 모든 민족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4000여 년이라는 기나긴 역사를 이끌어 오신 것이며, 계속하여 그들의 후손 유대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죄라는 것이 얼마나 패역하고 잔인하며 죄인은 절대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음을 거울과 같은 교훈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므로 태어나면서 소경된 자를 놓고 "자신의 죄 혹은 부모의 죄”라는 공식은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죄만을 생산하는 죄인이며, 이미 저주와 죽음의 심판을 받고 어둠의 존재로 사는 자에게 무슨 의가 있으며 좀 나은 자가 있겠는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물 한 방울, 티끌, 먼지, 짐승, 거름 더미와 같이 존재 자체가 죽어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인간은 죄와 허물로 이미 죽어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엡 2:1). 그 ‘진토와 거름 더미’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있으니 그들이 바로 창세전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도 빠짐없이 보존하신다고 약속하신다 (요 17:12).
때가 아직 낮 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4 때가 아직 낮 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바로 그러한 패역한 죄인을 죄와 사망의 어둠에서 이끌어내어 광명의 빛으로 인도하시는, 즉 사망에서 건져내어 당신의 빛의 니라로 인도하시는 일이다. 5절에서 좀 더 명확히 말씀해 주고 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주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을 “낮으로” “세상의 빛으로” 묘사하심으로, 빛이신 그분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빛을 나타내시기 위해 하시는 모든 일이 바로 아버지의 일이며, 아버지의 일은 이 세상 어둠의 죄와 죽음에 속한 자를 빛으로 인도하여 새로운 창조로 빛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일이며,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아들을 빛으로 보내셨음을 의미하여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때가 아직 낮 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밤이 오는 그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암시하는 때이며, 낮은 주님이 지금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즉 복음을 전파하는 은혜의 때를 가리킨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셔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주님은 명확하게 제시하여 주고 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 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8-39). 하나님이 택하신 자는 한 명도 빠짐없이 주님이 보전하시지만, 멸망의 자식은 처음부터 ‘거름 더미로 땔감으로’ 정해져 있다고 성경은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창세전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만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의 신부로 탄생되는 특권을 받아 영원히 아버지와 신랑과 함께 천국의 삶을 누리게 된다. 그 일을 지금 나면서 소경된 자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겠다는 의미로 제자들에게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라고 제자들을 동참시킨 것이다. 장차 제자들이 주님의 증인이 되어 이러한 연약한 자들을 육신으로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과 은혜로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법으로 그 영혼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성령의 권능으로 사역을 하게 됨을 제시하여 제자들을 동참시켜 ‘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죄인과 하나가 되는 십자가 구원 :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요9:6) 라고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진흙을 침에 개어 눈에 발라주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다. 주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말씀으로 명하여 고치셨지만 유독 여기서만 흙에 침을 개어 눈에 발라 주시는 기이한 방법을 쓰신다. 요한복음 8장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손가락으로 땅의 흙에 글을 쓰심으로, 당신이 죄인의 육신을 입고 이 땅의 존재 안에 들어오심을 계시하셨다. 실제로 그분은 죄인의 몸에 들어와 하나가 되는 아기 잉태의 과정을 거쳤으며, 그렇게 친히 죄인의 몸에 들어오심으로 모든 죄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서 자신이 짊어지시고 죄인의 육신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방법을 택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철저히 완전히 도말하여 주신 것이다.
간음한 여인이 돌에 맞아 죽게 된 현장에서 주님은 땅에 두 번 글은 쓰심으로, 죄인이 율법의 정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생명의 법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됨을 보여주신 것이다. 주님의 손이 흙에 닿자 여인의 모든 부정함이 예수님에게 전가되고, 여인에게는 생명의 법인 성령의 법이 적용되어 다시 살아 올라와 그 누구도 다시는 그를 정죄하지 못함으로 여인을 정죄하던 모든 율법주의자들이 다 물러가고 오직 예수님과 여자 혼자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지금 주님은 똑같은 방법으로, 죄인을 상징하는 흙에 자신의 숨을 상징하는 침을 섞어서 어둠에 발라주신 것이다. 이 그림을 창세기 인간 창조에서도 볼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흙에 하나님의 숨이 들어가자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생기로 생명을 얻은 인간이 타락하게 되자 이내 죽음이라는 저주가 내려지고, 땅도 저주를 받은 것이다(창 3:17-19). 아담의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됨으로 이 땅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같은 죄에 얽매어 죄 속에서 살다가 죄 속에서 죽는(요 8:24) 운명으로 정해진 것이다. 이것이 저주받은 인간의 현실과 종국이다.
그런데 주님은 간음한 여인과 소경과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당신 자신을 흙과 섞어서 하나가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분이 죄인의 육신을 입고 죄인의 몸 안에 들어와 죄인의 모든 죄를 자신의 몸으로 빨아당겨 자신에게 뒤집어 씌워 죄인으로 정죄당하고 죄인으로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죽으시는 모습이다. 이는 이사야에서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53:4-5). 그러므로 주님이 자신의 침을 흙에 섞은 것은 무죄한 그분이 저주받은 죄인들과 하나가 되겠다는 의지이다. 즉 죄인 속으로 들어와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주시기 위해 인자로 우리와 하나가 되시겠다는 의로운 행동이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예수님은 자신의 춤을 흙에 이겨서 어둠의 환부에 발라주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그 죄인의 죄와 사망을 흡수함으로 소경은 이내 어둠에서 즉 죄에서 벗어나 자유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렇게 그분은 우리의 어둠을 다 가지고 가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하늘나라의 빛을 보여주심으로 우리의 영원한 빛이 되신 것이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가 되신 것이며, 말씀을 먹이시는 영원한 생명의 떡이 되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어둠에 속한 소경이며, 어둠을 더욱 사랑하여 완전히 더 깊은 어둠으로 빠져 들어가 사람들의 눈에는 욕망과 탐심의 진흙이 덕지덕지 발라져 물이 없이 굳어져 더는 뜰 수 없게 된 최악의 상태임을 계시하여 주셨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 어둠에 속한 영적 무지의 실존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어둠에 빛을 주시려고 세상의 빛으로 오신 것이다. 만물의 창조가 빛의 임재로 시작되었고, 인간 구원도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으로’ 오셨으며, 빛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나타내심으로 주님은 자신을 향하여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9:5),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빛을 보게 된 소경: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실로암’은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밝히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항상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을 “나를 보내신 이”라고 부르시는데, 거의 서른 번씩이나 쓰셨다는 것이다. 즉 우리 주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메시아로 보내심을 받으셨으며, 참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하나 이심을 증언하여 주셨다. 때문에 그분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택하신 백성을 이 세상 어둠에서 끌어내어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시며, 영원한 생명의 떡을 먹이시며, 영원한 생수를 마시게 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우리의 영원한 구세주이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내가 곧 세상의 빛이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 “내가 곧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라”라고 외침으로 이제 그렇게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영원히 하나가 됨을 나타내셨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 14:20). 이러한 진리를 심로암이라는 이름에서 계시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죄인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더러운 티끌(흙)과 이겨지셔서, 죄인과 하나가 되어 실로암 물에 빠져 죽으심으로 죄인이 구원받게 됨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소경에게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장 후반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굳이 세례요한에게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몸이 저주의 물에 빠져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물에 의해 씻겨 없어짐으로 깨끗함을 받게 되는 십자가 죽으심을 예수님 사역시작에서 물세례로 미리 계시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 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물에서 솟아오르자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예수님에게 임하고 하늘에서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음성으로 증언하여 주셨다. 이는 장차 자신의 본체이신 성령으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시키는 성령의 거듭남으로 연합을 이루실 것임을 계시하신 것이다. 말씀하시기를,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고전6:17).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롬 8: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향하신 구원은 영적인 진실과 육신적인 현실을 포함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히 영원히 이루어짐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소경에게 굳이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신다. 요한복음 8장에서 초막절 기간 동안 실로암 못에서 물을 떠다가 성전 제단에 부어 제단으로부터 물이 흘려나가게 하는 의식을 거행하심으로 만물을 소생케 하시고 기갈로 죽어가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수를 공급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초막절에 성전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7:37~39)라고 자신이 바로 그 초막절의 완성자이시며, 그 생수가 바로 성령이심을 확실히 밝히셨다(7:39). 그리고 이어지는 사건이 바로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마심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탄생되는 일이 실제로 간음죄로 참소당한 여인에게 현실로 일어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두가 소경의 어둠을 비난하며 죄인이라 정죄할 때, 주님은 오직 긍휼과 자비와 은혜로 아무 대가도 조건도 없이 육신의 눈을 뜨게 하셨으며 영적인 눈도 함께 뜨게 하심으로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