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성령의 거듭남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영에서 일어나는 하늘나라의 사건이며, 혈통과 율법 지킴과 도덕과 윤리적 경건함으로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고, 이내 거듭남의 본질에 대하여 모세 놋 뱀의 사건을 인용하여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계시하셨다. 즉 장대에 달린 놋 뱀이 바로 예수님 자신을 예표한 것이며, 그 장대에 달린 나를 바라보고 믿는 것이 바로 영생을 얻는 ‘거듭남’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근거한 복음의 핵심을 선포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복음의 선포는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충격적인 말씀이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율법과 제사와 안식일을 받은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족속이기에 구원은 자신들에게만 해당되는 편애로 믿어왔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을 이방인으로 부르고 심지어 개로 취급하였기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선포는, 즉 이방인들을 사랑하셨다는 말씀은 그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복음의 선포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독생자는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메시아가 아니라, 이 세상 땅 끝까지 모든 곳에 흩어져있는 이방인 중에 당신의 택함을 받은 당신에게 속한 자녀들이 있으며, 그들을 예수그리스도의 품에 끌어모으기 위해 오셨다는 은혜의 새 시대를 개시하는 복음의 선포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심은 이스라엘이 기대하는 다윗 왕국을 회복하기 위한 그들에게만 속한 메시아로 오신 분이 아니라, 세상 중에서 택함을 받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마 1:21) 위함이며,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어 구원과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요 17: 6-7)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요한은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다”(13절)고 확실히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하지만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세상 속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녀들이 있으며, 그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시는 하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성취되기 때문에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 세상과 인간 창조는 하늘나라의 계시와 모형이다. 그분은 하늘나라의 영원한 실상, 즉 창세전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짐(마 6:10)으로 그분의 영광과 존귀와 의와 사랑을 이 세상에 나타내시기 위해, 즉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절대로 인간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인간의 원함과 인간의 뜻을 이루어주는 목적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이 역사 속에서 오직 하나님 자신의 영광만이 영존하시며,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과 생명이심을 나타내어 증거하시며, 우리의 영원한 주가 되시어 영원한 하나로 천국을 사는 하늘나라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그 유일한 방법이 바로 자신의 생명을 죄인에게 내놓는 희생이며,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자신의 성품과 본질이신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어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십자가 구원 성취로 그분은 자신의 참 사랑을 이 세상에 완벽하게 완전하게 보여주시고 나타내셨음을 사도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복음의 핵심을 선포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땅의 티끌로 ‘없음’의 존재로 죽음을 정해 놓으시고, 잠시 죄 아래에 가두어 두심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과 영생임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 3:22). 이 세상과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의’ 와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또한 영원한 진리이신 주 예수그리스도를 설명하고 나타내어 당신의 택한 백성을 이 세상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잠시 존재하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일으키시는 모든 일들은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뜻을 담고 있으며,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으며, 그리고 십자가 구원이 이 세상에서 성취되었기에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즉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이라는 엄청난 하늘의 묵시를 이 세상이 담고 있기 때문이며,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당신의 백성이 이 세상 속에 숨겨져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라고 당신의 만백성에게 알리는 복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말씀은 모형으로 잠시 주신 허상인 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아니며, 더더욱 이 세상 모든 인류를 구원 대상으로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한은 분명이 첫 서두에서 이 세상을 '어둠'이라 부르고 '어둠'에 속한 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지도 믿지도 않았다고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지신 십자가가 아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서 모든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오직 창세전 아버지께서 택하여 놓으신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으며, 오직 당신에게 속한 자만 하늘나라로 들어올리신다.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1:21). 즉 세상 중에서 아버지께서 보낸 자들만 구원하시기로 정하셨으며, 이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진 뜻이며, 때문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으며”(행 13: 48),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마11:27), 이들이 바로 ‘창세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은’(엡1:4) 자들이라고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요 17:9).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자들이다(사 43:7). 다윗은 우리가 창조되고 존재하는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될 뿐 아니라 그분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시 104: 30-31). 우리의 기쁨과 생명의 원천은 바로 하나님이시다는 인식이다. 그분이 먼저 자신의 영광과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며’ (엡 1: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엡 2:10) 들이다. 즉 우리는 그분의 영광과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구속의 목적과 대상으로 지우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를 이 세상에서 구원하여 은혜를 입혀주는 일이 그분의 행사이며, 영광의 성취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요 12:28 / 17:1). ‘영광’은 그분이 스스로 지니고 있는 인격과 성품이다. 그분은 선하시며 의로우시며, 거룩하시며, 용서와 사랑이시며, 생명과 진리이신 만유의 영광을 지니고 계시는 영광이시다. 때문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 드림으로 믿어드림으로 영광스러워지는 분이 아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영광은 바로 십자가 구원 성취로 우리에게 생명을 입혀주어 당신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 하나로 사랑의 연합을 이루는 일이다(골 1:27).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이 입혀주시는 일이 그분의 행사이며, 당신의 사랑으로 낳은 아들들을 통하여 만민이 그분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함이다(골 1:27).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 내신 그 원대한 뜻과 구원과 생명과 사랑에 대하여 한마디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라고 복음의 진수를 세상에 선포한 것이다.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한다. 죄인을 살리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시는 그 사랑이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 6-8). 사도 요한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로 이루어주신 구원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인지 알고 깨달으라고 ‘이처럼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고 선언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 9~11).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이 세상에 나타내시기 위해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다.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은 아무 대가도 조건도 행위의 노력도 없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에게 임하는 사랑의 선물이다. 그분께서는 오직 사랑 하나로 죄인의 희생제물이 되어 피 값으로 우리를 이 세상과 율법의 저주에서 영원히 속량하셨다(갈 3:13). 즉 우리의 모든 죄를 독생자 예수에게 전가 시키시고, 그를 저주와 죽음의 사형틀인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는 방법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죄를 범한 자는 나무에 매달라고 하였고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 22-23) 라고 말씀하고 있다. 죄를 범한 자는 하나님 앞에 부정함으로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려 죽게 함으로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시며, 그 죄의 대가는 죽음이며, 우리가 바로 그 형벌을 받아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철저한 죄인이다. 죄 없고 흠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인들의 모든 죄가 그 치욕적인 십자가상에서 영원히 죽어 없어지는 권능과 지혜와 사랑의 절정에 도달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그분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이 천하에 나타내어 그분에게는 영광이 되고, 만백성에게는 더디어 구원이 성취되는 사랑의 기적이다.
인간의 본성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사랑과 영의 영원한 실상을 나타내시기 위해 처음부터 가장 비천한 흙을 택하셔서 육체를 만드시고, 역사를 통하여 인간의 본성이 바로 먼지와 같은 '없음'이며 연약하고 비천하며 무익한 존재임을 보여주고 깨닫게 하셨다. 인간은 육적 ‘자아’를 추구하는 본능으로 타락과 죽음이라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게 하셨다: 욕심, 탐욕, 정욕, 시기, 질투, 분쟁, 거짓, 폭력, 살인... 등과 같은 악한 죄의 본능에서 벗어 날수가 없는 것이 인간의 실체이다.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육의 본능으로 죄만을 생산해내는 패역한 자들이다. 무지하고 이기적이며, 바른길을 벗어난 열린 무덤과 같이 악취만 뿜어내는 회칠한 무덤이라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하여 바울은 아주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간의 탐심과 욕망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롬3: 13-18),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 7). 인간은 오직 육신의 ‘자아’를 위해 마귀의 본능으로 자신의 욕망, 야심, 목적을 성취하는데 오히려 하나님마저 이용하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왜곡하고 도덕질하여 자기의 유익을 챙기는 패역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패역함으로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이라고 저주하셨다.
죄인으로 타고난 본능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죄일 뿐 무슨 의가 나올 수 있겠는가? 인간이 선이라고 행하는 그 선에는 이미 죄가 섞여있음을 어찌할 수가 없다. 회개한다 하여 죄를 씻을 수가 있으며 하나님 앞에 흠이 없다고 자고 할 수 있겠는가? 선행을 하였다 하여 하나님 앞에 선한 자라고 자랑할 수 있겠는가? 의롭게 산다고 하여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맹세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 지적하셨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처음부터 하나님은 인간을 ‘없음’의 흙으로 만드시고, 인간에게 자신의 노력으로 완전해 지거나 보존할 수 있는 그 어떤 기능도 능력도 주지 않으셨다. 즉 인간의 결국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로 정하셨다. 그러므로 흙을 입은 육체는 다시 흙으로 되돌림을 받는 ‘없음’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육은 무익하다(요 6:63). 우리가 그분의 사랑의 대상으로 귀한 존재가 된 것은 그분이 우리 안에 자신의 생기를 부어 주셨기 때문이다. 천한 흙으로 지음을 받은 내가 살아있는 것도, 죄에서 구원받아 영생을 얻게 된 것도, 모두가 그분이 나에게 무상으로 입혀주시는 은혜이다.
하나님의 사랑
구원은 죄인을 ‘죄인’이라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사랑의 기적으로 은혜를 입혀주시는 긍휼과 자비와 용서이시다. 오직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무 대가와 조건없이 거저 받아주시는 죄사함과 사랑이시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은 은혜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이라”(갈 1:1)라고 말한 것이다. 즉 경건치 아니한 자가 의롭게 된 것은 오직 아버지의 의로운 속성과 십자가 사랑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분은 우리 육의 이 모습 이대로, 죄 투승이 된 모습, 문둥병 환자처럼 썩어져 있는 모습, 만물 중의 찌꺼기 같은 더러운 모습, 창녀와 세리의 모습,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의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자신이 뒤집어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아 죽으셔서 당신의 의로운 보혈로 우리를 깨끗케 하여 주셨다. 하나님의 위대한 기적적 사랑은 바로 본능적으로 경건치 아니한 우리를 십자가의 희생과 능력으로 의롭게 하여주신데 있다.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 5). 경건치 않는 자가 의롭게 된 것은 오직 사랑으로 우리의 죄의 대가를 지불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의 피의 공로로 의롭게 된 자들이다.
이와같이 아버지의 기적적인 사랑과 은혜는 경건한 자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치 아니한” 죄인에게 임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구원은 나의 노력과 의지, 패역한 죄인의 모습과 상관없이 그분이 먼저 나를 찾아와 주셔서 이끌어 주심에 호응하는 믿음을 주셔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열심과 능력이다.우리는 우리의 죄 된 행위와 노력으로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설 수도 더더욱 그분을 사랑할 수가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한 의가 나타나서 구원의 의를 이루심으로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신 것이다. 그 은혜를 아는 자는 그분의 생명으로 존재하는 자이기에 반드시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는 자로 이끄심을 받게 된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천국을 함께 살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며, 그 고귀한 사랑이 하나님에게 향한 믿음과 사랑을 격발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저를 믿는 자마다 : 창세로부터 구별하신 믿는자와 믿지않는 자
사도 요한은 첫 서두에서 빛에 속한 하나님께로 난자와 이 세상 어둠에 속한 육에 속한 자를 확실하게 구별하고 있다. 만물을 창조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어둠에 속한 자들은 그를 알지도 영접하지도 믿지도 아니하였다고 제시한 다. 그럼에도 이 세상 중에 그 빛을 알아보고 영접하고 믿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택함을 받아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며” 그들에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선포하고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예수님도 분명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영생에 들어갈 오른편 양과 영원한 형벌을 받아 지옥 불에 떨어질 왼편 염소는 창세전 하나님의 선택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고 구별되어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오른편 양으로 불리는 성도를 향하여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마 25:34)라고 창세로부터 성도를 위해 예비된 나라가 있다고 말씀하시고, 왼편 염소를 향하여서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2)라고 확실히 분리하신다. 이미 하늘의 묵시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고 완성된 뜻대로 이땅에서 루어진다는 말씀이다.
때문에 요한이 말씀하시는 “저를 믿는 자마다"라는 진의는, 창세전 택함을 받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며”, 그들이 누구이든, 어디에 있든, 무엇을 했든, 악하게 살았던 선하게 살았던, 창녀로 살았던 세리로 살았던 강도로 살았던, 전혀 상관없이 처음부터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기에” 저마다 하나님을 믿게 되는 운명을 가지고 있음을 제시한 것이지, 모든 사람을 가리켜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라는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서두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아 아버지께로서 난 자들’임을 확실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요 1:112-13).
하나님은 오직 당신에게 속한 자들만 찾아가 주셔서 그분을 알아보는 눈과 귀를 열어주심으로 그분이 바로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임을 알아보게 하시며,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영접하게 하시며, 그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로 그분 안에 하나로 함몰되는 연합을 이루신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오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이니라”(요. 15:16),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복음 19:10) 라고 이 세상중에 그분이 택한 자가 있으며, 잠시 잃어버린 당신의 백성을 찾아서 구원하려 오셨다고 확실히 밝히고 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바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심이라”(마 1:21)이다. 즉 이 세상 중에서 아버지께 속한 “자기 백성”만 구원하시기로 정하셨으며, 이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진 뜻이기에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려” 오셨음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 17:9). 때문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게 되어 있으며, 그들이 바로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며” 그들에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13)고 말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사야가 묘사한 대로 연약하고 흠모할 풍채도 없었으며,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리는 정도로 멸시를 당하는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로마 군들로부터 매 맞음과 춤 뱉음과 수치와 조롱을 다 당하시고, 실호라기 하나 없이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 위에 매달려 계셨다. 그 모습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엄도 풍채도 능력도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약하고 아무 능력 없이 도살당하는 양의 모습을 본 십자가 왼편에 달린 강도는 이 세상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표하며, 그리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자들과 인본주의 자들을 대표하며, 그들 모두는 하나같이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하며 자신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실 메시아로 보지도 믿지도 않았다. 결국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을 비방하고 욕설을 퍼 부으며,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못 박으소서"(요 19:6)라고 외치며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벌거벗은 나약한 모습으로, 무력하게 조롱과 수치와 비방 거리로 취급받는 예수에게 자신의 구원을 의탁하는 믿는 강도가 있었다. 오직 오른편 강도만 연약한 어린양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십자가 예수님이 바로 자신을 구원하여 주실 메시아로 보여지는 영적 눈이 떠진 것이고, 그 벌거벗은 ‘없음’으로 보이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구원을 의탁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기로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일어나는 구원의 능력과 기적이다. 그들에게만 예수가 지신 저주의 십자가가 구원의 십자가로 생명의 십자가로 알아보는 눈과 믿음을 주신다는 증거이다. 반면 왼편에 매달린 강도와 십자가 밑에 둘러선 무리들에게는 그 구원의 십자가가 무능한 십자가로 보였고, 그렇게 벌거벗은 채로 나약하게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수치스러운 조롱거리로 보였던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백마를 탄 왕자로 이 세상 힘의 권세자로 능력과 기적을 행하는 인간들의 탐심과 욕망을 채워주는 인간들이 소원하는 강력한 군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 세상과 완전히 반대되는 원리로 내려오셔서 세상과 대치되는 삶을 살아 내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으로 세상 권세자에게 죽임을 당하시는 희생으로 구원을 성취하셨다. 오른편 강도나 왼편 강도나 똑같이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로 십자가에 처형당하여야 하는 죄인들이다. 그럼에도 오른편 강도만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게 자신을 의탁했고, 그 애통함에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라고 놀라운 구원을 입혀주신 것이다. 이처럼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갈라내어 분리시키는 능력으로 선포되고 성취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생명을 잉태하는 영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될 것이라고 믿는 희망 사항이 아니다. 그리고 믿음의 출발점은 나의 유익을 추구하는 육신의 욕망이 아니라, 반대로 오직 나만을 위해 살던 ‘자아’라는 존재가 바로 티끌과 같은 ‘없음’의 존재였음을 알게 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깨달음이다. 자신이 바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없음’의 존재라는 실체를 투명하게 깨닫게 됨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은혜만을 구하게 되는 철저한 자기 부인과 십자가 죽음으로 이끌려가는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이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소경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였고, 여인은 자신이 개와 같은 이방인임을 인정한 것이며, 세리는 자신의 죄가 너무나 악하기에 구원받을 자격이 없음을 인정한 것이며, 창녀는 자신이 바로 세상과 간음한 더러운 죄인임을 인정한 것이며, 강도는 자신이 짓은 죄가 십자가의 처형에 합당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이들 모두가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를 구한 것이다.
저를 믿는 자마다: "믿음"
'믿음'은 행하는 주관 또는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에게만 주시는 선물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 8-9).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기 부인으로 내려가 가난한 심령과 애통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만을 필사적으로 구하는 자에게 선물로 주신다. 믿음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긍정의 힘으로 능력과 힘을 발휘하는 의지적 열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셔서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라는 가난한 심령으로 내려가 애통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됨으로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선물이며 하나님의 믿음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의 출발점이 나의 의지와 나의 노력과 나의 행함에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나의 믿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지고 나의 믿음으로 "내가 능치 못할 일이 없으며",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져지는'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착각하고 능력이 임하는 믿음을 달라고 열심히 구하고 있다. 사도바울이 외친 “나에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빌 4:13) 라는 말씀은, 감옥에 갇혀 온갖 고난과 매 맞음과 수모와 절망에 달하는 그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굳게 붙드시고 계시는 그 강한 능력으로 이 세상의 모든 환난을 이기게 해 주시는 능력을 말씀하신 것이며, 자신은 감옥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도 자신이 쓴 편지가 살아서 복음이 전파되는 말씀의 능력을 “능치 못할 일”로 말씀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2)라고 말씀하신 진의는 태어날 때부터 탐심과 욕심으로 이 세상 것들을 나의 존재가치로 쌓아놓은 그 ‘자아’라는 견고한 반석 같은 산이 나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바다에 던져지는 자기부인과 자기 죽음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씀하신 것이다.
육신에서 결발되어 의지와 노력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믿음은, 내 육신을 위한 주관적 믿음이기에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오로지 육신이 원하는 일을 도모하고 구하게 된다. 고통 없이 물질이 풍부한 삶을 행복의 기준으로 내 필요를 채워주는 나의 각본에 따라 움직여주는 세상맘몬을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구한다는 것이다. 질병과 고통, 가난과 고생이 없는, 사업이 번창하여 명예와 힘을 자랑하는 이 세상 쓰레기 같은 것들을 구하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구하는 것이 교회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 하여 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며, 또한 선택권이 인간에게 있어서 누구든지, 저마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하늘나라도 들으갈수 있다는 '무지'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은 내가 믿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기에, 미리 준비하거나 걱정하거나 책임을 지거나 행위의 노력으로 대가를 지불하여야 하는 부담이 없이 그분이 내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선한 일이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이 이루어주신 구원을 그분이 주시는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리켜 죽은 믿음이라 말씀한 그 ‘행함’은 바로 하나님이 시작하신 믿음에 의해 이끌려가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나라는 ‘자아’가 해체되고 기각되고 깨짐으로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셔서 나의 삶 전체를 장악하심에 온전히 맡기는 순종으로 철저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살게되는 전체를 성도의 ‘행함’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나의 주도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포기하고 내려놓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를 등에 업게 하시며, 그분이 내 삶의 주도권이 되어 나의 삶을 간섭하시고 강권적으로 그분의 뜻에 따르게하는 아브라함과 같은 순종의 믿음을 반드시 이끌어 내신다. 그러므로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라고 바울은 우리 성도를 대표하여 고백하고 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믿음으로 이끌려가는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성도의 삶 전체를 행함의 믿음으로 의로 여겨주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는 믿음이기에 의롭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전 정하신 뜻과 섭리로 당신의 백성에게만 당신을 알아보고 믿는 믿음을 주신다. 때문에 ‘저를 믿는 자마다’의 진의는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믿음과 구원이 아니며, 또한 우리 주관적 노력과 열심으로 소유되는 믿음이 아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 그 많은 열방과 그 많은 훌륭한 사람들 중에서 제일 자격 미달인 우상을 섬기는 아브라함 한 사람만 택하시고 믿음의 아버지로 만드셨으며, 이를 이루시기 위해 열방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세상 온 인류 중에서 아브라함만 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은 이 세상 중에서 오직 당신의 백성에게만 믿음을 주셔서 구원으로 이끄신다는 증거이다.
그리하여 노아 홍수 사건에서 오직 당신이 택한 노아 8식구만 구원하시고 온 인류를 홍수의 심판으로 쓸어버리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에서도, 롯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이제 곧 불 심판으로 타서 없어질 소돔에서 함께 떠나기를 사위들에게 권하였으나 사위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창 19:14). 아무리 구원과 생명의 진리를 들려주어도 멸망의 직전에 처해 있음에도 이 세상 육신에 속한 자들은 절대로 깨닫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이들은 구원의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이며, 다만 선택받은 하나님 자녀의 구원을 위해 악역으로 쓰임을 받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택에서 제외된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을 티끌, 먼지, 물 한 방울, 진토, 거름더미 (사 17:13 / 시 113:7 / 삼상 2:8) 라고 부르시고. 예수님은 이들을 마귀의 자식, 독사의 새끼, 이리, 개, 돼지, 배설물로 표현하신 것이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의 진의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미 영생의 복을 받을 하나님의 백성과, 심판을 받아 멸망으로 지옥 불에 던져질 이 세상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구별하셨다는 계시적 말씀이다. 즉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자는 '멸망'으로 정해져 있음을 힌트하고 있다. 창세전, 아직 빛이 임하기 전에 우주는 먼저 “혼돈과 공허와 흑암”(창 1: 2)으로 뒤섞여 있었다. 빛이 임하자 하늘과 땅이 분리되고, 낮과 밤이 분리되며, 육지와 바다가 분리되는 틀과 질서가 세워진 것이다. 즉 하늘과 땅을 분리하심으로,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를 구별하시고, 낮과 밤을 분리하심으로,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를 구별하실 것임을 계시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이 아직 후손도 태어나기 전에 먼저 여자의 후속, 즉 하나님의 자녀와, 뱀의 후손, 즉 이 세상에 속한 마귀의 자식을 분리시키시는 선언을 하신 것이다(창3:15). 그리고 신약에 와서 예수그리스도가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시자 이 세상 ‘어둠’이 빛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대적하고 핍박하여 꺼버리는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자들과 그 빛을 알아보고 영접하여 영생을 얻게 되는 하나님께로 난 자들 간의 분리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 십자가 구원 성취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기준하여, 왼편 믿지 않는 강도가 이 세상 마귀의 자식들을 대표하여 영원한 형벌로 던져지는 것과, 예수를 구원자로 알아보고 자신을 맡기는 성도를 대표한 오른편 강도가 구원받는 운명적인 분리가 일어난 것이다.
이와 같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 마귀의 자식들과 철저히 구별되어 있다. 멸망으로 정해진 이 세상 중에, 창세전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있으며, 그들은 멸망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은혜로운 복음을 선포한 것이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이 세상 죄와 죽음의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다는 기쁜 소식이다. 예수님은 오직 창세전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만 이 세상에서 구원하여 당신의 나라로 영접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요 17:6).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 17:9). 이 세상 중에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진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창세전부터 택함을 받은 하나님에게 속한 자녀이기에 당연히 우리를 데리려 오신 신랑을 알아보는 믿음이 주어지며, 영접하여 영생을 얻는 은혜를 입혀주신다. 우리가 그분의 신부가 된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오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이니라”(요. 15:16) 이다. 때문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절대로 멸망치 아니하며, 그 어떤 위험도 두려움도 죽음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사도바울은 확신을 주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이와 같이 천국복음은 오직 선택받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기쁜 소식이다. 그분은 이 세상 모든 인간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며, 오직 당신이 택한 백성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어 보여주시며, 그들의 눈과 귀를 열어 천국의 비밀을 알아듣고 믿게 하시며 당신을 진심으로 소유하게 하신다. 이것이 천국의 은밀성이다. 이 세상 중에서 오직 12 제자만을 택하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는 것은 오직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만 부르시고 믿게 하신다는 증거이다.
이와 같이 영생은 영원 전부터 선택된 백성에게만 주시기로 약속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디도서 1: 2). 그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라고 말씀하고 있다. 영생은 오직 택함을 받은 자에게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선물은 주는 분의 선택이며 받은 자는 아무것도 예상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시며, 또한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먼저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사랑에서 출발하신 것이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 4-:8). 내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다. 그분의 의로운 죽음이 나를 영화롭게 하셨으며, 그분의 영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의인의 신분으로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었으며, 그분이 나를 성전 삼고 내 안에 계심으로 나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하나로 연합되는 영생을 소유할 수가 있었다. 즉 내가 의인이 된 것은 그분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 아무 대가 없이 나에게 입혀 주신 은혜이다. 그런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 24). 성도는 창세전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이기 때문에 불가항력적 은혜로 말미암아 선택을 받았고, 생명이 임하였고, 영생을 소유한 자이기에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증인의 삶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직 순종과 사랑으로 십자가 삶을 지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