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죽으심은 육신에 속한 죄의 사망이요, 예수 부활은 영에 속한 영원한 생명이다
하나님의 비밀 중 가장 중요한 비밀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를 찾아와 주신 비밀이요, 십자가 죽으심의 비밀이요, 비밀 중의 핵심은 예수 부활이다. 예수 십자가의 죽으심은 육신에 속한 죄의 사망이요, 예수 부활은 영에 속한 새 생명, 성령의 법을 세우려 하심이다.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히 10:9) 즉 “육체로는 사람 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벧전 4:6),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0-11)함과 같다.
십자가 예수는 기독교 핵심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십자가 예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예수 부활의 사건만은 잊어져 있으며 십자가에 가려져 있다. 예수부활의 사건은 “하나님께로서 난자”, “위로부터 난자”가 되는 영의 사건이다. 즉 영으로 깨닫고 영으로 체험하는 사건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수차례 자신의 부활을 예고하셨고, 나사로 부활의 실례로 예수님 자신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시기까지 하셨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였다. 실체로 그들은 부활체로 오신 예수를 만나고도 반신반의하여 다시 고기잡이로 흩어졌다. 예수님 자신도 부활하신 후 오직 제자들과 여인들, 그리고 그를 사모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보여주셨으며 많은 무리들에게는 감추셨다.
오늘도 부활의 예수는 십자가에 가려져 있다. 왜냐하면 부활은 영의 사건이기 때문에 육의 지성으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는 실체로 보고 기록된 역사의 증거가 있지만, 부활하여 영으로 오신 성령의 예수는 육감으로 보이지도 이해되지도 믿겨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즉 부활하신 예수는 영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신다. 우리가 구하여서 주관적 의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먼저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여야 하며, 그분이 먼저 내 심령 안에 들어오셔야 만이 비로소 새 생명으로 잉태시키는 중생을 체험하게 된다. 즉 예수부활은 죄로 죽은 나를 다시 살리는 영으로 새 생명이 잉태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늘나라로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이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나는 죄인으로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은 상태에 있을 뿐 (갈 3:13) 영생하는 생명을 얻을 수가 없다.
바울은 부활한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새 생명으로 중생한 기쁨으로 부활의 예수생명을 전하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십자가를 져야하는 예수님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두려움으로 뿔뿔이 도망하고 흩어졌지만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 안에서 역사하자 새롭게 거듭난 그들은 비로소 담대함으로 예수부활을 전하는 참 제자들이 된 것이다. 예수부활 안에 있는 자는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며, 영의 차원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영적 삶을 추구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로 더는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요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삶으로 부활의 예수생명을 전하는 자로 서게 된다.
십자가 본질이 바로 부활이다
십자가에서 벗어나 부활의 예수 안에 거하지 못하면, 나는 십자가에 달린 ‘죄인’과 같이 죄의 쇠사슬에서 자유를 얻을 수가 없으며 죽음의 상태이며생명을 얻을 수가 없다. 십자가는 하나의 장식품이 아니다. 교회에서나 집에서나 십자가를 높이 달아놓는 형식은 보편화되어 있지만, 십자가 본질이 바로 예수 부활임을 목회자들은 가르치지 않고 있으며, 교인들을 십자가 저주 아래에 묶어놓고 율법으로 정죄하며 죄인으로 다스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십자가는 저주와 죽음의 사형 틀이다. 반드시 저주와 죽음의 사형틀에서 벗어나서 부활하여야 살수 있다. 십자가로 구원을 이룬 것이 아니라 창세전 하늘나라에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십자가란 사형 틀을 사용하여 완성한 수단이다. 부활하신 예수가 구원의 본질이다.
분명히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셨다.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우리 모든 죄를 철저히 사하셨기에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다” (히 10; 18)라고 성경은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미 자신의 피로 완전히 해방시켜 의인으로 만드신 양들을 다시 죄의 사슬로 십자가에 묶어놓고 율법으로 죄인으로 다스리고 있으며 율법의 행위로 의를 쌓아서 성화의 삶으로 의인이 되어라는 망령된 도덕과 윤리의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죄를 완전히 철저히 끝낸 사실을 율법의 자대로 정죄하는 다시 되풀이하는 자는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이중 범죄를 자행하는 자요, 예수의 피를 욕되게 하는 자요, 예수의 희생을 모독하는 자며 (히 6: 4-6), 은혜를 망령되게 하는 자요, 예수부활을 부인하는 지옥의 자식들이다. 히브리서 10: 10-18 에서 단 한 번의 제사로 내 과거, 현재, 미래까지 모든 죄를 영원히 도말하시고,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 십자가는 저주와 죽음의 사형 틀이다(신 21:22-23). 십자가에서 나의 옛 죄인이 영원히 죽었음을 깨닫고, 십자가 저주 아래 머물러 있지 말고, 부활한 예수생명 안에 들어와야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있다.
이미 구원받은 자의 회개는 예수생명 안에서 자유하며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사하여져 “의롭다 하고 순전하다” (시 51:4)고 하시는 복된 복음을 의지하는 의인의 회개이다. 하나님께 범죄하고도 (다윗의 간음죄와 살인죄)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롬 4:6) 다윗은 자신을 죄인이라 정죄하는 율법에서 벗어나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가 용서되고 사하여진 기쁨으로 복음을 찬양하고 있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을 복이 있도다” (시 32:1,2; 롬 4:7,8). 얼마나 복된 복음을 찬미하는 자유인의 고백인가. 이와 같이 경건치 않는 우리는 오직 그분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은” (딛 3:7) 자들이다. 누구든지 그의 죽음을 나 죄인의 죽음으로, 그의 부활을 나 의인의 부활로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요 3:16)고 말씀하셨다. 십자가 저주 아래 멈추어 자신을 죄인이라 정죄하는 율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윗과 같이 이미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로 모든 죄가 사하여졌고, 의롭다 하시는 복음을 의지하는 믿음만이 영생을 얻을수 있다.
생명은 예수부활에 있다
믿음의 최고 절정은 예수부활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십자가에만 초점을 두고 십자가에 묶인 죄인의 신분으로 율법의 행위와 의를 추구하고 있다. 십자가 구원의 목적이 부활에 있다는 진리는 잊고 있다. 만일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그 구원은 생명과 소망이 없는 죽은 구원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 (고전 15:17)고 정확하게 정의해주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구원이라는 진리가 있을 수도, 생명이라는 영생이 있을 수도 없는 사실이 되고 만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에서 끝나셨다면, 구원받은 증거가 없기에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며’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 3,5).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눅 20:38)라고 예수님께서는 생명이 부활에 있음을 가르쳐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 라고 부르지 아니하시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 11;25)라고 부활의 진리를 선포하셨다. 죄로 죽은 인간을 다시 살리는 부활의 영이 내 안에서 새 생명을 잉태 시켜야 만이 나는 영생을 소유할 수 있으며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율법을 주신 것은 이 놀라운 은혜를 깨닫고 복음을 붙들라는 것이며, 십자가를 주신 것은 구원을 깨닫고 부활의 영으로 거듭나라는 뜻이다. 복음이 왔으면 율법의 수건을 벗어던져야 하고, 부활의 예수를 만나면 십자가에 묶어있는 죄인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 부활한 예수와 함께 의인으로 태어난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는 은혜 속에 거하여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사실
십자가 부활의 의미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먼저 아래와 같은 예를 들어보자.
한 사람이 물에 빠져 죽게 된 것을 다른 사람이 살려냈다고 하자.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 사람을 구하느라 지쳐서 죽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은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만 열심히 믿는다. 나도 그와 함께 죽어야 하는 신앙까지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구해준 덕분으로 생명은 좀 더 길게 연장 되었지만, 나를 구해준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이 나도 결국은 죽음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그 다음은 물에 빠진 사람이나 구해 주려는 사람이나 함께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하자. 이것이 함께 십자가에 죽었음을 깨닫는 제2 단계이다. 사도바울은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롬 6: 4), 즉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자” (롬 6: 2)이다. 즉 나 옛 죄인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영원히 못을 박았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인들은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예수님은 믿지만, 그와 함께 죄인인 나도 반드시 죽어야 하는 신앙까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내 죄를 대신하여 죽으셔야 되지만, 나는 죽으면 안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니 어찌 내 죄가 죽을수 있으며, 죽지 않은 죄인의 상태에서 어찌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는 성령 거듭남을 체험할 수 있겠는가. 죄인이 죽어야 의인으로 다시 살 수가 있지 않겠는가. 죽음으로 끝난 십자가만 붙들고 있기에 부활의 생명을 잉태 시킬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반드시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는 데까지 가야만이 그분 안에서 영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나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야 만이 내 죄가 영원히 죽음으로 죄가 다시는 나를 주관치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롬 6:14).
마지막으로 물에 빠진 사람이나 구해주려는 사람이나 둘 다 함께 죽었다가 함께 살아났다고 하자. 이것이 최고 절정인 부활신앙이다. 첫째, 죄인인 나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을 박아야 나의 모든 죄가 영원히 죽어 죄인의 굴레에서 사단의 노예에서 영원히 벗어나 자유인이 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둘째, 반드시 예수님과 함께 부활해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고, 그분의 영원한 신부가 되어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6-17).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은 고백하는데, 그와 함께 부활하여 ‘의인’이 된 영광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7) 함과 같이,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의인으로 살아났다(롬 6:11). 부활의 영으로 태어난 자는 의인이 되어 본향 하늘나라에서 아버지와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영광을 입었다. 부활의 예수, 성령이 실상이다. 부활예수 안에 영생하는 생명이 감추어져 있다. 이 부활의 생명 씨를 보혜사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태동시키고 잉태시켜 주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라고 부활의 본질을 말씀하셨다.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영원히 사는 영생을 누리게 된다.
십자가 구원은 선물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은 아무 대가도 조건도 행위의 노력도 없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에게 임하는 선물이다. 그분께서는 오직 사랑 하나로 죄인의 희생제물이 되어 피 값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영원히 속량하셨다 (갈 3:13). 우리는 이제 율법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자가 되었다(갈 2:19).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나를 죽도록 사랑하사 자신의 생명으로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주신 그분과 하나가 된 신부를 누가 ‘죄인’이라 정죄할 수가 있으랴! 우리는 아버지의 의로운 영으로 다시 태어난 당당한 ‘의인’이다. 말씀하시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요일 1:7)하셨다는 것은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몽땅 없애주셨다는 사실이며,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 생명으로 태어난 자는 죄없는 의인이 되었다는 선포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럼에도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자신을 '죄인'이라 정죄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되며 구원의 은혜를 망령되게 하는 악한 행실이며 생명이 없는 죽은 시체와 다름이 없다.
도덕과 윤리적 범함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 주신 구원을 깨닫지 못하는 미련과 무지와 믿음 없음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다. 영광스러운 의인의 옷을 입혀줘도 다시 더러운 죄수의 옷으로 갈아입는 미련한 자에게 어찌 은혜가 임하겠는가. 죄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영원히 죽었다. 다시는 나를 “죄인”이라고 정죄할수가 없다. 죄인은 죽음으로 완전히 철저히 끝난 사실이다. 이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자신을 ‘죄인’이라고 정죄하면, 죄가 없으신 그분이 어찌 죄인 안에 들어갈 수가 있단 말인가! 그분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하나로 연합되는 사랑의 절정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깨끗게 하시고, 자신의 영으로 우리를 의인으로 잉태시켜 주셨다. 어찌 예수의 피 값으로 모든 죄를 도말하시고 의인이라 인 처주신 자를 죄인이라 정죄할 수 있겠는가! 예를들면, 요 8:3-11에서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와 죄인이라 정죄하고 돌로 쳐 죽이라는 무리에서 예수님은 미리 당신의 피로 깨끗케 하여 주셨기에,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8:10-11)라고 그 여인을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하지만 율법으로 여인을 참소하여 죽음으로 판결한 무리들은 오히려 구원과 생명이신 예수를 떠나 율법의 저주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예를 들면, 한 거지가 흙탕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데 지나가던 한 의인이 그 냄새 나고 더러운 흙탕물에서 그 거지를 살려주었다고 하자. 그리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깨끗이 목욕 시키고 왕자의 옷을 입혀 왕의 옆에 앉히면서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으니 너는 이제는 거지가 아니라 영원히 내 아들 왕자다”라고 새로운 사람으로 신분을 바꿔주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 거지가 기뻐하며 감사하여 영광을 왕에게 돌리는 대신, 나는 죄인이어서 주시는 은혜를 감당 못하겠다고 거절하여 다시 더러운 거지 옷을 주워 입고, 또 흙탕물에 뛰어들어 구해달라고 손을 내민다면, 그 사람은 다시는 구원할 필요가 없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건져준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기 때문이다.
흙탕물에 빠져 죽어가는 상태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선택하셨기에 그분이 원해서 사랑과 기쁨으로 입혀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그분은 사랑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주시고 의인의 옷을 입혀주시고 의인의 신분으로 그분과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다시 흙탕물에 뛰어 들어가는 자와 같이 죄인으로 돌아가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매일 눈물로 회개하며, 자신을 학대하거나. 금식하거나, 등 육을 괴롭히는 방법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의 의로운 죽음으로 의인의 옷을 입혀주신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다시 죄인의 옷을 입고 자신을 죄인이라 정죄하는 자는 망령된 자이며 구제 불가능한 지옥의 자식으로 자초하는 일이다.
내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공로이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 3:9). 만약 우리가 아직도 “죄인”이라 정죄하며 스스로 십자가 저주 아래에자신을 묶어 놓으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헛되게 하는 악한 행위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을 배척하며 은혜를 망령되게 하는 가장 악한 죄다.
그럼에도 우리는 도덕과 윤리적인 죄에 자신의 믿음 생활을 묶어놓고 매일 철저한 율법 준수, 매일 반복되는 죄를 회개로 해결하려고 한다. '죄를 짓고 회개하고, 또 죄를 짓고 또 회개하고', 마치 롤러코스터(rollercoaster)처럼 올라갔다 내려왔다를 매일 반복하는 것이 청결한 믿음생활이라고 착각한다. 또는 자신의 죄를 억제하기 위해 스스로 율법의 자대로 자신을 판단하며, 의를 쫓기 위해 금식, 선행과 봉사, 헌금과 구제와 같은 행함으로 열심을 부린다. 회개한 만큼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요, 노력한 대가로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다. 내가 회개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분을 알기 전에 그분이 먼저 나를 택하여 주셨기 때문에 나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고 사하여 졌음을 깨닫는 믿음 안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나를 의롭게 하여 주셨기에 의로워진 것이다. 이 복된 복음을 깨달은 바울은,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 (갈 1:15)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엡 2:5),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라고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만약 행위의 의로움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내가 노력하여 얻는 대가이다. 그래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빗으로 여긴다” (롬 4: 4)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아무 공로도 대가도 조건도 일을 한 것도 없이, 다만 그분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녀의 신분을 따라서 값없이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고 바울은 거듭 강조한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5).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아 무상으로 임하는 선물이다. 때문에 죄와 죽음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는 이 은혜에 감격하여 오직 감사와 기쁨으로 그분의 은혜와 영광을 찬송하며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생활이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살려주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왕자의 옷을 입혀주면서 왕의 아들로 입양까지 받았다면, 인생에서 이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이 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으랴. 우리가 바로 이렇게 엄청난 복된 은혜를 받은 ‘의인’이기에 오직 그분의 영광과 사랑과 능력을 찬송하는 것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다시 태어난 영광스러운 아버지의 자녀이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죽음으로 우리 죄의 값을 몽땅 지불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영원히 해방을 받은 자유인으로 되게 하심과 동시에 자신의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심으로 피의 자녀가 되어 ‘의인’이라 선포하셨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롬 8:21)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인이 되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 행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 되었기에 한없는 기쁨으로 당당한 의인의 신분으로 찬송과 감사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엡 1:3) 자의 삶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본체는 부활과 생명이시기에 믿는 자에게는 새롭게 태어나는 부활의 능력을 부여해 주신다. 이 생명은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요 부활로 잉태된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 시작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 20). 하늘에 속한 아버지의 영으로 부활한 자는 땅에서 난자가 아니요 하늘에서 난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요 17: 14)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그분은 죄가 없으신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그분의 영으로 난 자는 ‘의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의 피 값으로 ‘의인’이라 인처주신 성도들을 다시 ‘죄인’으로 다스리며 이미 페해진 율법으로 철저한 행위의 의로 구원이 임하고 의인이 된다고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망령되게 하는 불법을 행하는 ‘독사의 새끼’들이다.
율법적 행위로 구원받고 의인이 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말이다. 율법은 한마디로 ‘죄와 사망의 법’(롬 8:2)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요 (갈 3: 10),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 5:4)고 말씀하고 있다. 율법으로는 구원이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방법으로 율법을 페하셨다(엡 2:15).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은 이미 완성하시고 폐하여주신 율법으로 성도들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불법을 행하는 자에 대한 심판일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 암이라” (갈 2:16)고 거듭 강조하고 있지 않는가!
이와 같이 복음의 은혜 속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도 없고, 율법의 정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는 율법과 복음을 평행하면서, 때로는 율법으로 때로는 은혜로 이 두 가지를 얼버무려놓고 분별을 못하는 갈등 속에서는 분쟁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눅 12:51)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분쟁은 율법과 복음의 분쟁이다. 그래서 한집에서 율법과 복음은 함께 거할 수 없음으로 율법을 내어 쫓으라고 말씀하셨다 (갈 4: 29-30). 왜냐하면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기” (갈 4:30)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속한 자에게는 ‘평화의 왕,’ 빛과 생명으로,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복음으로 오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분쟁이었다. 그들은 메시아의 복음을 대적하여 끝까지 율법을 고수하며, 율법으로 메시아를 ‘죄인’이라 정죄하여 십자가에 못 박게까지 복음을 거역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율법과 복음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관계이며, 필연적으로 분쟁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요(갈 3:10),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 5:4)고 말한다.
내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죄인이었던 내가 의인이 된 것은 그분께서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선한 뜻이다. 그분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나는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날 수가 있었다. 그분의 의로운 죽음이 나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그분의 영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의인의 신분으로 그분의 자녀가 되었으며, 그분이 나를 성전 삼고 내 안에 계심으로 나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하나로 연합되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였다. 그런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 24). 얼마나 정확한 말씀인가. 이는 내 행위와 노력과 상관없이 내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하늘나라에서 이룬 뜻이기에 값없이 내려주시는 은혜와 영광의 구속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가 영원히 죽었음을 깨닫고, 십자가에서 벗어나 나에게 영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축제가 바로 교회마다 추구하여야 하는 영적 예배이다. 예배의 본질은 죄에서 자유한 의인들이 신랑 되신 예수와 함께 연합하여 아버지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혼인잔치를 의미한다. 우리는 구약의 죽은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 기쁨으로 새 생명으로 의인이 드리는 예배이다. 살아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축제를 드리는 영적 예배가 신령한 예배다. 부활한 예수와 하나의 연합체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예배이며 의인이 드리는 예배이다. 다윗이 고백한 것과 같이 우리는 그분이 입혀주신 의의 옷을 입고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드리며 예배드릴뿐이다 (시 29:2).
이와 같이 영의 진리는 영으로 깨닫지 못하면, 나의 옛사람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처리된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에 죄와 법 아래 매인 종에서 자유 할 수가 없다. 의인의 신분으로 사는 자는 오직 찬송이며, 평강과 기쁨과 감사와 자유한 삶으로 이어진다. 믿음과 생명은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영의 계시에서 온다. 그 계시가 없이 믿음도 생명도 불가능 한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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