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영적 계시

로마서 (9:14-18) 하나님께는 오직 정의와 공의일 뿐, ‘불의’란 없다 /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4. 12. 10. 05:46

롬 9:14-18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과 주권에 대하여, 아브라함의 씨 중 육신이 아닌 약속의 말씀으로 난 자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며, 마찬가지로 이삭에게서 난 쌍둥이 형제 중에서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주권으로 에서는 버리고 차자 야곱을 선택하셔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하셨다’(9:12)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가 어찌 하나님께서 공평치 않으시다고 질문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9:14). 이 역사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만물이 그분의 뜻을 이루시데 쓰임을 받는 역할과 도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분은 당신의 뜻대로 선택과 주권을 행사하셔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그분의 절대적 주권에 피조물이 이렇다 저렇다 말할 권리가 없다고 출애굽기 33장 19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9:15).

하나님께는 오직 정의와 공의일 뿐, ‘불의’란 없다. 불의는 오직 죄인에게만 해당된다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주권이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선한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만물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통치하시고 주관하신다. 첫째,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초월자이시며, 창조주이시며, 하늘에서 이루신 묵시대로 독립적인 권세와 권능의 주권으로 이 땅의 역사를 장악하시고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며, 피조물의 그 어떤 간섭도 받으실 수 없으시며 허락하시지 않는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5). 둘째, 모든 인간은 이미 “죄와 허물로 죽었다”(엡 2:1). 그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은 인간에게 무슨 공로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중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권리로 사랑과 긍휼을 입혀주셨기 때문이다. 창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일부만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셨다(엡 1:4-5)고 말씀하시며,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부르셨다"(갈 1:15)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었으며”(엡 1:11), 그러므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라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심을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 (시 33: 13-15).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모든 일의 결과를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하여 주셨으며, 그 약속의 말씀을 따라 자신의 주권적 의지를 행사하심을 선포하셨다. “나는 처음부터 일의 결과를 말하였으며 오래전에 벌써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하였고 내 계획이 실패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행할 것이라고 말하였다”(사 43:11 현대인의 성경). 때문에 이 땅에서 난 피조물은 하늘나라에서 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거나 판단할 수가 없다.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 14:26-27). 즉 이 땅의 흙을 입은 이미 “죄와 허물로 죽은”(엡 2:1) 존재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9:18-20).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정확한 답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공평과 정의는 하나님의 속성이시다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의 성품이시며 속성이시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공의의 유일한 기준이시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죄를 용납하실 수 없으며, 자신의 거룩하신 성품을 따라 공의로 제재하시며, 악을 반드시 심판하셔서 선을 이루시기에 그분에게는 불의란 있을 수 없다. 그분은 본체가 사랑이시며,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인애와 인내의 은총으로 인간을 품으심과 동시에, 죄에 대하여서는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어 죽게 하심으로: 첫째는 죄에 대한 모든 심판을 몽땅 받아내심으로 완전한 공의를 이루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롬 8:15-16, 갈 4:6-7). 둘째는 죄인에게 향한 완전한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다(요 3:16).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때문에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들은 공평하시며, 선이시며, 진리이시며, 정의 그 자체이시다.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멸하셔서 공의를 이루셔야 하는 그 거룩하시며 의로운 속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자신의 신성을 초월하여 패역하고 더럽고 추악한 죄인의 “육을 입고 우리 중 한 사람이 되어” (고전 19:20), 우리의 모든 죄를 자신에게 전가시키시고, 자신을 저주의 십자가에 매다는 가장 참혹하고 수치스러운 죽음의 형벌을 받으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3-7). 예수님은 본체가 영광의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포악한 죄인을 저희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굳이 죄인의 형체를 입으시고, 극악무도한 죄인들로부터 잔인한 채찍과 춤 뱉음과 벌거벗음과 같은 조롱과 멸시와 박해를 몽땅 받아내시고 묵묵히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 6-8). 인간이 어찌 그 흉악한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지불하신 그 위대한 의와 사랑을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그분은 당신의 공의와 정의를 당신 자신을 죄인에게 희생 제물로 내어주시는 완전한 사랑에 근거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인간으로 오심에 대하여, “사람의 아들이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라고 스스로 생명을 인간에게 주시기 위해 인간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즉 십자가 구원은 죄인을 의인으로 살려내어 영생을 입혀주시는 사랑에 근거하셨기에, 그분이 일으키시는 모든 일은 선과 ‘공의’ 그 자체이시며 그분은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바울이 이 복음을 외치기를,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아니라”(롬 1:21-2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1:2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의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하였다. 이 구속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영원 전에 작정하셨다고 당신의 주권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죽는다”(눅 22:22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라고 성도의 구원이 만세 전에 예정되었음을 말해 준다.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엡 3:11).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 전부터 세워졌으며, 그 정하신 뜻대로 한치의 변함이 없이 이루어졌고,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사역이며 때문에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은 공평하시며, 선이시다.

바울이 인용한 출 33: 19절의 내용:

출 33: 19: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 느니라

롬 9: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영원한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는 위대한 언약을 받는 그 거룩한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내 하나님을 배신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리는 죄악을 범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또한 있어서는 안되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배신하는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그들을 모두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모세의 필사적인 기도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지만, 하나님을 배신한 “목이 곧은”(출 33: 5) 이스라엘과는 동행하시지 않겠다고 선포하셨다. 이는 마치 남자가 여자에게 결혼을 약속하여 집을 사 주었지만 함께 살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같이 패역한 백성을 향하여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언약의 돌판을 깨뜨린 것과 같이, 이스라엘이 스스로 하나님과의 결혼 언약을 깨뜨린 것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모세는 하나님께 범죄 한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불쌍이 여겨주셔서 다시 당신의 백성으로 여겨주시는 긍휼과 은총을 구하였다(출 33:12-16).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친히 영광의 빛으로 임재하셔서 그들과 함께 가시겠다는 증거를 보여주셨다. 즉 모세에게 은혜와 긍휼을 입혀주신 하나님은 모세가 가슴에 품고 있는 이스라엘에게도 동일하게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 느니라”(출 33:19).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이 말씀을 인용함으로, 구원의 은총은, 인간이 의로워서, 또는 행위나 어떤 조건이나 환경이나 상황에 근거하거나 구애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섭리임을 제시한다. 즉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하여 그 누구도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도록, 또한 인간이 절대로 끼어들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홀로 뜻을 정하시고 계획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임을 제시한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께서 불쌍이 여겨주실 자에게 긍휼과 은총을 입혀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셨다면, 그 구원과 생명은 인간에게 무슨 공로나 자격이나 행위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오직 창세전 구원받기로 예정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로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엡 1:4)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강력히 주장한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9:16)라고 확실히 밝힌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따라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9:20)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절대 그럴 수 없다! 에서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아직 어떤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으로 에서를 버리시고 야곱을 선택하셨다면, 마찬가지로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처음부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별하시고, 믿는 자에게는 긍휼과 은총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진노의 심판을 내리신다면, 그것은 창세전에 하늘나라에서 이미 예정된 일이며, 창조주의 권세와 권능으로 행하시는 주권적 행사이므로 피조물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자신의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게, 자신의 마음조차 다스릴 수 없도록 피조 되었다. 먼지와 같이 ‘없음’의 존재로 사라지는 운명이 어찌 창세전부터 세우신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논할 수 있겠는가! 절대 그럴 수 없다! 이르기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 11-12) 함과 같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며, 인간이 원하는 의지도, 노력하는 열심도, 혈육적 관계도, 사람의 뜻으로도 아니며, 오직 선택으로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요 1:13)고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선언한다. 이 땅에서 전개되는 모든 일들은 이미 하늘의 묵시에서 결정되고 완성된 뜻대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예정하신 자를 친히 찾아와서 불러내시며, 그 인생의 전체를 간섭하시며, 주관하시기에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적 선택 주권을 “은혜” “선물”라고 부른다. 즉 나는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그분이 먼저 나를 택하셔서 낳아주시고, 부르시고, 당신의 품에 넣어서 당신과 하나로 영원을 사는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너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므로 누구든지 자랑할 수가 없는 것이라”(엡 2:8-9).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출 9:12,16

12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16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의 택함에서 제외되고, 유기된 자들에 대하여 바울은 출 9:16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바로라는 인물이 애굽 왕으로 세워진 것은 바로 자신이 원해서 달음박질로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선택에서 유기됨으로 그의 마음의 강퍅함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하나님만이 유일신이시며 창조주이시며 통지자이시다는 권능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출 9:16).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그대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출 9:12), 애굽 땅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시는 능력을 보여주심으로, 당신의 이름을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는 깊이 새겨주시고, 온 천하에는 당신의 능력과 이름을 전파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애굽 땅과 바로 왕을 당신 자신을 알리는 역할과 도구로 세웠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 어떤 긍휼도 불쌍함도 없이 10가지 재앙을 내리심으로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하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세상과 구별하여 거룩함을 지켜주시기 위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가나안 7족속을 한치의 긍휼도 불쌍함도 없이 몽땅 진멸하라고 명하셨다.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 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신 20:16-17). 왜냐하면, 그 당시 가나안은 온갖 우상숭배와 짐승과의 성행위, 자녀를 우상의 제물에 바치는 역겨운 일로 타락의 극치를 달리는 죄의 병균 덩어리로 땅이 그 거민을 토해버릴 만큼 부패하여 극악한 죄의 도가니였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극악한 아말렉 족속을 살아있는 생명은 몽땅 진멸하라고 명하셨다. “여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 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삼상 15:3 ).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이 세상 죄악에 섞여사는 것을 철저히 막기 위해 다른 이방 족속에게는 추호의 긍휼 없이 몽땅 진멸하시는 심판을 내리신다.

인간은 이 땅에 속한 피조물에 불과하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은 타락한 선악구조로 하나로 주신 진리를 둘로 쪼개서 인식하고 판단함으로,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시기 위해 일으키시는 선한 일들을 오히려 악으로 판단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하나님을 밀어내고 하나님처럼 행세하며, 자신들을 역사를 주관하는 왕으로 군립하고 있다. 사울 왕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며, 그 재앙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잔인한 일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공평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땅의 존재가 어찌 하늘의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어찌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을 돌이키거나 멈출 수가 있겠는가! 인간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 하여 그 끝없이 넓은 하늘이 가려지겠는가! 무지하고 무능하고 자신의 인생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없음”으로 끝나는 인간이 어찌 무한하시며 영원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권능과 주권을 논할 수가 있겠는가! 이르기를,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 14:26-27). “나는 처음부터 일의 결과를 말하였으며 오래전에 벌써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하였고 내 계획이 실패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행할 것이라고 말하였다”(사 43:11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묵시는 한치의 차이 없이 반드시 성취됨을 확실히 말씀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체가 사랑이시며, 선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시기에, 그분이 계획하시고 일으키시고 성취하시는 모든 일들은 선이시며, 인간이 인식하는 '악'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에게는 절대로 해당될 수가 없다. 즉 '선'은 그분의 본질이며 성품이시기에 그분이 일으키시는 모든 일들은 선이시며, 하나로 연합을 이루시기 위한 필연적인 단계이며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