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영적 계시

로마서 (5:6-11)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3. 9. 30. 04:00

롬 5:6-11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반복하여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복음의 핵심을 제시하고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인간의 그 어떤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 즉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믿음으로 은혜를 입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좀 더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사랑스러운 자 혹은 의로운 자를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죄인을 살려내어 사랑하는 자로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시는 아가페 사랑을 제시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불가항력적으로 일방적으로 “죄와 허물로 죽은”(엡 2:1-3) 죄인을 자신의 생명으로 구원하셔서 의롭다 칭하여 주시고 영원한 사랑의 대상으로 새로운 생명을 입혀주신 그 사랑을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의 실체를 점층적인 방법으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경건치 않을 때,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 구원하심으로 우리 죄인에게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바울은 이 땅의 티끌로 만들어진 육신의 연약함으로 죄에 빠질 수밖에 없는 첫 인간 아담으로부터 타락한 경건치 못한 인간의 실존을 제시함과 동시에 그러한 경건치 않는 자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음을 제시한다. “연약하다” 는 말은, 아무런 가치도, 아무런 쓸모도 없는 무능하고 비천한 존재들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이다. “경건치 않은 자”는, 이 땅에 속한 육신의 탐심과 욕망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자들로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불경한 자들이다. 그렇게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난 연약하고 불경건한 존재이며, 죄를 짓을 수밖에 없는 전적으로 타락한 패역한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이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아래 놓여 있는 완전히 가망이 없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임을 제시한다. 그렇게 전적으로 타락한 패역한 죄인들을 살려 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에게 향한 아가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바울은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5:9).

하나님께서는 인간 창조에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심으로 흙의 속성을 따라 연약하고 비천하며 무익한 존재로 흙속에서 먼지같이 허무한 인생을 살다가 결국 먼지로 없어지는 ‘없음의 존재’라는 것을 미리 계시하여 주셨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완전해 지거나 보존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며 또한 그러한 기능을 주지 않으셨다. 즉 인간의 결국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로 정하셨다. 그러므로 흙을 입은 육체는 이 땅의 것만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탐심으로 영이 죽고 육체로 사는 불경건한 자들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라고 육체로는 경건함이 없기에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가 없으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악을 행하는 철저한 죄인이며, 하나님의 아들마저 멸시하고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철두철미한 원수임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죄인, 원수가 사랑의 대상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인내와 용서와 온유로 은혜를 입혀주셨기 때문이며,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일방적으로 죄인을 사랑하셔서 희생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서 그 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사랑의 대상으로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 라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고집한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연약함과 불경건함과 허무함에 대하여 확실히 제시하고 있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전 3:18-20). 흙을 입은 육신은 짐승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흙으로 돌아가는 헛된 인생임을 증명하고 경험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생은 은혜로 덮어지지 않으면 헛된 것이며 죽음으로 사라지는 ‘없음’이며, 이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역사와 인생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증명하며,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됨을 증거하는 것이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이 세상은 나에 대하여서는 죽은 세상이며, 나 또한 세상을 향하여서는 죽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오직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다.

 

기약대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창세전 묵시에서 정하신 그 뜻대로 예수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는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는 뜻이다. 즉 우리에게 향하신 의로운 구원은 창세전 묵시 속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이며, 절대로 변경되는 일이 없음을 “기약대로”라고 명시하고 있다. 바울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며’(엡 1: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우심을 받은 자”(엡 2:10)라고 묵시의 기약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구속의 목적으로 짓으심을 받은 존재이다(사 43:7). 그분이 먼저 자신의 영광과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창세전부터 우리를 택하셨으며, 때문에 우리를 이 세상에서 구원하여 은혜를 입혀주는 일이 그분의 행사이며, 영광의 성취임을 바울은 한마디로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라고 창세전에 묵시로 이루어진 뜻과 구약의 언약과 예언대로 성취되었음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전개되는 모든 일은 이미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진 묵시대로 펼쳐지는 섭리이며, 이와 같은 예정론을 성경에서 주장하는 근본 원인과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본체가 영광과 사랑이시며, 선과 진리이시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셨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이 세상은 자신들이 정한 가치관으로 판단하여 의인 혹은 선인이라는 이름을 달아주고 숭배하며, 그러한 선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희생적 행위로 자신의 의인됨을 증명하려 한다. 즉 죽어서도 의인으로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는 미련하고 헛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간혹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재물과 권세와 권력을 가진 자의 노예가 되어 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 놓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있다. 이 세상은 자기들의 선악구조로 의를 행하거나 선을 행한 자에게는 칭송과 숭배와 상을 주고, 죄를 짓은 자에게는 멸시와 학대와 폭력과 사형이라는 벌을 주는 법칙을 행하며, 선을 선으로 갚고 악을 악으로 갚는, 즉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법칙이 공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신을 멸시하고 대적하고 죽이려는 원수, 행악하는 패역한 죄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예 없다. 하나님은 이 세상 법칙과 반대로 ‘악을 선으로 갚아주시는’ 의로운 일을 성취하셔서 죄인에게 향한 위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음을 바울은 증거한다. 그분은 자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선을 선으로 갚고 악을 악으로 갚은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과 은혜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아들을 죽이는 원수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주시는 의를 행하셨다.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늘나라 사랑이시며, 그 사랑은 기약대로 창세전부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기로 정하신 변경할 수도 포기할 수도 취소될 수도 없는 영원한 사랑임을 증거하여,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으며”(5:6), 이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5:7-8)라고 증거함으로, 조건도 대가도 한계도 없는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나오는 위대한 아가페 사랑이 죄인에게 무상으로 오직 불가항력적 은혜로 덮어지는 은혜의 복음을 제시하고 있다.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경건치 않는 죄인들이 구원받아 의롭다함을 얻은 그 은혜로운 복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인을 그토록 사랑하셨다는 증거임을 제시한다. 즉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를 죄와 사망에서 살려내시기 위해 희생제물이 되어 도살당하는 어린 양이 되신 십자가 사건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셨다는 증거임을 제시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전적으로 타락하여 진노의 심판아래 놓여있는 그 상태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강조하여 “아직 죄인 되었을 때”(8절)라고 말한 것이며,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9절) 라고 그런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피를 흘리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극명하게 대조하여 죄인에게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제시한 것이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갈 1:4),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엡 5:2),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줄수 있는 생명을 잉태하는 사랑임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요 3:16). 우리에게 향한 구원은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며, 죄인을 살리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신 극지에 도달한 사랑이시며, 그 사랑은 영생을 얻게 하는 사랑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 9~11).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바울은 ‘사랑’이란 오직 하나님에게만 국한 된 것이며, 그 사랑은 사랑스러운 사람 혹은 의인을 사랑하는 세속적인 사랑이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원수를 사랑하는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나오는 사랑이기에 바울은 특별하게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라고 명시한 것이며, 그 사랑은 영생을 주시는 영원한 사랑임을 강조하여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5:10)라고 예수님의 부활을 제시한다. 즉 우리 죄인을 위해 죽으셨으며,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 죄인에게 새 생명을 주어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을 사는 화목을 이루어 주셨음으로 그분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 됨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5:11).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말함으로 (5:8-9), 죄인이었기 때문에, 죄인의 상태에서 구원받은 것이며, 인간이 의를 행한 행위, 자격, 대가, 공력에 의해 구원받은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강력히 피력하고 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8장에서, 율법의 대표자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율법으로 참소한다. 율법의 기능이 바로 정죄와 심판이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율법으로 죄를 범한 자를 정죄하여 죽이는 심판이 아니라 반대로 율법의 정죄와 심판에서 살려내는 구원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죄인을 대신하여 율법의 정죄와 심판을 받아내어 율법의 심판에서 영원히 속량하여 주실 것임을 제시하셨다. 그 구원이 그 자리에서 이루어짐으로 그를 정죄하던 무리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도망가 버림으로 여인은 ‘주여 나를 정죄하던 자가 없나이다’라는 고백과 같이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하지만 율법으로 참소하던 자들이 도리어 율법의 정죄로 죄인으로 폭로되자 죄인 그대로 구원의 주를 떠남으로 죄인 그대로 율법의 심판아래 있음을 보여주셨으며, 오직 죄인이라 정죄 받은 여인만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었음을 보여주셨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죄인에게 향한 당신의 조건 없는 사랑과 긍휼한 마음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그렇게 더럽고 패역한 불가능한 도저히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에게 임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굳이 음란한 창녀 고멜을 더는 내려갈 수 없는 시궁창의 가장 더러운 밑바닥에 버려진 고깃덩어리로 묘사하고, 그럼에도 호세아를 세워 하나님 당신 자신으로 표현하여 값을 지불하고 고멜을 데리고 와서 아내로 삼아주게 하셨다.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11:8). 우리는 바로 창녀 고멜과 같이 세상과 끊임없이 간음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뿌리치고 육신의 욕망으로 사는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들이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에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서기에는 너무나 더럽고 버림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다. 그럼에도 그분은 끊임없이 용서하여 주시고 인내해 주시며,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며, 오직 사랑으로 우리의 그 더러운 죄를 깨끗하게 제거하여 주시고 자신의 의의 옷을 입혀서 아들로, 신부로 맞아주셨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하나가 되는 사랑이기에, 창세전에 구원하기로 정하셨기에, 우리를 구원함에 있어서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행위로 측정되는 공로나 업적으로도 아닌 오직 택함을 받은 “아버지의 것”(요17:9,10),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자들”(요17:7)이라는 특권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요17:12)라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여 보전하고 지켰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바로 우리 죄인에게 향한 한없는 사랑과 긍휼과 은혜뿐이다.

신약에서, 5섯 남편을 갈아치운 창녀와 같은 ‘죄인’이라 정죄 받은 사마리아 여인을 우리 주님이 친히 찾아가 주셔서 당신의 신부로 취하셨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죄인이라 판단하고 정죄하는 세리와 창녀들과 어울려 함께 먹고 마심으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눅 7:34)라는 비방과 경멸을 받으셨다. 사도바울이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원수라도 다시 돌이켜 복음을 전파하는 위대한 사도로 오직 십자가 예수만을 사랑하고 자랑하며 예수를 위해 죽는 사랑의 대상으로 만들어 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아무리 주홍같이 붉은 죄를 졌다하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품에 안기는 사랑의 대상으로 만들어내신다. 그분의 속성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택함을 받은 자가 행위가 아무리 의롭지 않아도 아무리 큰 죄를 범하였다 할지라도, 그 어떤 상황과 경우에라도 절대로 버려짐이 없이 끝까지 사랑받기에 합당한 신부로 아들로 만드신다는 절대적인 구원을 보증하여 주신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10:28-29).

우리의 실체는 원수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기 전에, 우리는 흙으로 육체를 입은 연약한 자들이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어 타락한 죄인이 되었으며, 죄인이었기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가 되어 진노의 심판아래 사망으로 던져진 자들이 된 것이다. 이를 바울은 ‘진노의 자녀’ ‘죄와 허물로 죽었다’라고 표현하고 그런 원수를 사랑으로 구원하셨다고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1-5).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을 흙으로 만드심으로 인간의 육은 먼지, 티끌과 같은 허무한 존재임을 나타내셨다. 때문에 육신의 본성은 밑바닥이며, 더럽고 부패하고 강퍅하며, 탐심에 굶주려 있음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가 없으며 오히려 은혜로운 부르심에 반항하고 대적하며 구원자로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원수가 되어 진노의 심판 아래 놓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은 세상 법으로도 하나님의 법으로도 철저한 죄인이며 지옥 불에 떨어지는 것이 지당한 일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생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의 본체가 바로 흙으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없음'이며, 연약하고 비천하며, 무익하고 무능한 존재임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며, 인간은 육적 ‘자아’를 추구하는 본능으로 죄만을 생산해내는 패역한 자들임을 증명하여 인정하게 하신다. 즉 무지하고 이기적이며, 바른길을 벗어난 열린 무덤과 같이 악취만 뿜어내는 열린 무덤임을 바울은 아주 현실적으로 인간의 정체성을 폭로하고 있다. 인간의 탐심과 욕망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롬3: 13-18),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 할뿐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 7). 인간은 오직 육신의 ‘자아’를 위해 마귀의 본능으로 자신의 욕망, 야심, 목적을 달성하는데 오히려 하나님마저 이용하며, 진리의 말씀을 왜곡하고 도독 질하여 자기의 유익을 챙기는 패역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패역함으로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 회칠한 무덤, 독사의 새끼, 마귀의 자식”이라고 저주하신 것이다.

4000여 년의 이스라엘 역사는 인간의 온갖 패역함과 추악한 죄악들이 낱낱이 드러나고, 인간의 불가능함과 무능함과 우매함과 무지함이 완전히 드러나는 역사이며,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철저히 기각되는 역사이다. 이스라엘은 긴 역사동안 끊임없이 하나님께 반항하고 배신하고 대적하며, 이방 신을 혼합하여 섬기는 음란한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으며, 자신들의 육적 탐심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이방 악한 신들을 줄기차게 섬겨왔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불순종하고 대적하고 거역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우리 인간의 끈질기고 고집스럽고 멈출 줄 모르는 포악하고 사악한 죄의 본성과 추악한 부패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거울이다. 그럼에도 독사와 같은 패역한 죄인들을 심판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당신의 독생자를 희생 제물로 내어주셔서 죄인을 살려내어 사랑하는 자녀로 신부로 새 생명을 입혀주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렇게 패역한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며, 어떻게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대적하고 거역하는 불가능한 죄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으며, 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보여주어 깨닫게 하는 역사이다. 즉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이시며, 인내와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시며, 긍휼과 온유이시며, 죄가 없으신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경건하심과 선하심과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심을 나타내어 보여주셨다.

화목을 얻은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자들이다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죄인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놓여 있을 때,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심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5:11)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는 반드시 기쁨으로 화답함을 제시한다. 바울은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거듭난 성도는 이제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영광에 참여한 자이기에 항상 기뻐하며 은혜의 복음을 누리고 전하며 그것이 곧 성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권면하고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전 5:16-18). 다윗은 시편 104: 30-31에서, 우리가 창조되고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 될 뿐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우리의 즐거움과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말씀이다. 그분이 먼저 자신의 영광과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며’(엡 1: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우심을 받은자”(엡 2:10)들이다. 때문에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감사와 찬양과 기쁨과 평강의 은혜를 누리는 것뿐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5:2).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5:11).

우리에게 향한 구원과 생명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이미 묵시로 정해 놓으셨다. 역사는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진 묵시가 이 땅에 펼쳐져 그 묵시대로 변경 없이 빼거나 보탬이 없는 완전한 묵시 그대로 진행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주님이 주신 말씀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하늘나라에서 이루신 뜻이 그대로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역사이며 인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 입성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배제하여 오직 은혜의 덮음으로 이루어짐을 첫 창조에서 아주 명백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와 영광을 나타내어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구원의 대상인 인간을 첫 날에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마지막 여섯째 날에 성장 과정이 없는 완전한 성인으로 만드시고, 그 다음 날인 일곱째 안식 날에 하나님과 함께 안식을 맞이하게 하셨다. 즉 첫 인간 아담이 여섯째 날에 빚어지고 그 다음 안식 날에 눈을 뜨자 하나님께서 첫째 날과 여섯째 날까지 완성하신 만물이 그림처럼 한눈에 펼쳐진 것이고 아담은 하나님과 함께 일곱째 날 안식 속에서 모든 것을 누리고 즐거워하는 복된 자로 있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해 놓으시고, 인간은 다만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는 혼인잔치에 참여하여 즐기는 은혜의 복음을 창조에서 미리 계시하여 주셨다. 이 세상과 역사는 예수를 위해 창조되었고, 예수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예수께로 돌아가는 것으로 태초부터 정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나 자신의 실체를 인식하고 나를 이 역사 속에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그리스도를 열심히 아는 것이며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며, 그 구원을 얻은 기쁨으로 주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분이 내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는 하나의 동행으로 매일을 감사하며 그분의 한없는 사랑을 체험하면서 즐거워하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임을 바울은 제시하고 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만이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인생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와 하늘나라의 복을 누리는 복된 자가 되었기에, 아무리 힘든 환난 속에서도 여호와로 인하여, 예수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며 내가 그분 안에 있는 사랑의 속삭임과 동행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평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다. 나 같은 죄인의 괴수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그 한없는 은혜를 매일의 삶에서 체험하며,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인내하여 주시고, 긍휼과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 주시며, 그렇게도 부족하고 실수하고 못난 나를 끝까지 참아주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깨우쳐 주시며, 그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하나로 동행하여 주시며, 하늘의 평강을 내려주시는 그 위대한 사랑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며, 예수가 곧 나의 즐거움이 됨을 고백하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향한 사랑을 여려가지 명칭으로 표현하여 주신 것이다. 그분은 나의 ‘아바 아버지’이시며,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남편’ ‘신랑’이시며, 나를 기르시는 목자이시며, 나의 빛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임을 날마다 순간마다 느끼고 체험함으로 “즐거워하느니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르기를,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시 32:11).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시35:9).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삼상 2:1-2).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영혼을 주셨으며, 바울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그 즐거움을 누리라고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