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0:18-23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0 이가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일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한 몸을 보여주셨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숨어서 문들을(마음의 문) 닫아걸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때 주님은 부활의 몸으로 굳게 닫혀있는 문을 뚫고 들어오신 것이다. 그리고 첫 마디에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입혀주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과 옆구리에 뚫어진 창 자국을 알아보고 기뻐하기 시작 한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당신의 백성들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사망의 두려움을 쫓아내고 평강을 선물하여 평강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을 현실로 보여주시는 장면이다. 이제 주님은 육신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우리 마음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하나로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며, 두려움이 삭제되고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에 채워질 것이며,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성령시대가 도래되었음을 제시하셨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굳건히 닫쳐있는 문을 뚫고 홀연히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은 구하여서 노력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 은혜로 그분이 친히 우리 마음 안으로 직접 뚫고 들어오셔서 평강을 심어주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두려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적 의존자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으로 채워진 생태가 바로 평강이다. 하지만 죄가 들어오자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8-10). 하나님을 떠난 그때부터 인간은 내가 나를 주장하고 나를 지키고 나의 가치를 챙기는 삶이 시작되었고, 사망이 선고됨으로 두려움과 불안과 근심과 걱정으로 스스로 고생과 고통의 길에 들어섬으로 ‘평강’을 잃게 된다. 즉 죄 때문에 인간에게 저주와 사망이 던져지고 모든 인간은 그 사망과 동반하는 지옥의 삶 속에서 두려움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삶을 주관하는 목표와 가치를 설정하는 그 순간부터 두려움과 불안과 근심과 걱정으로 고생과 고통의 삶이 시작되었고 그 결국은 사망과 영원한 지옥이다. 성경은 두려워하는 자는 둘째 사망 영원한 유황불에 던져지는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첫째 사망은 이 세상 모든 인간이 죄와 허물로 사망을 안고 태어나는 모든 인간에게 닥치는 피할 수 없는 사망이다. 그리고 둘째 사망은 영원한 지옥불인데 그 첫 번째 해당되는 순위가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적 의존자로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존재하는 아무런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 없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지음을 받았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25). 수치와 부끄러움이 없는 평강으로 자연과의 평화로운 조화로 가장 이상적은 삶을 살고 있었음을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묘사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죄가 들어가자 이내 자신들의 순전하고 평화로운 모습을 수치로 여기게 되고 스스로 하나님 보기를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떠나 숨어 사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선하신 창조와 의도를 부끄러움으로 ‘악’으로 판단하고 스스로 이 세상의 것으로 옷을 만들어 챙겨 입는 세상 사람이 된 것이다. 즉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하여 자신의 뜻을 내세우는 ‘자아’가 작동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순전한 ‘벌거벗음’을 수치로 여겨 이 세상의 것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 세상과 하나가 된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으셨다. 똑같은 원리로, 주님은 혼인잔치에서 주님이 주시는 예복을 입지 않고 자기 옷을 챙겨 입은 자를 밖에 내쳐 버린다는 말씀을 하신다. “임금이 손을 보러들어 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 이어 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 22:11). 이 세상 것으로 옷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는 말씀이다. 인간은 타락한 이후, 이 세상의 것으로 각자 자기의 가치를 챙기는 형형색색의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하였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죄악으로 엮은 누더기 옷일 뿐이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절대적 의존자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복을 향유하며 하나님과 함께 평강을 누리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하지만 타락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이 세상의 것으로 자신에게 맞는 누더기 옷을 지어서 입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 더러운 누더기 옷을 입고 이 세상과 하나가 되어버린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살려내어 '의의 횐옷'을 입혀주시기 위해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매달린 것이다. 이 세상 더러운 누더기 옷을 벗겨버리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태어나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채워진 은혜의 옷, '의의 횐옷'을 입혀주신 것이다. 그렇게 흰옷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 순종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자로 회복됨으로 “평강”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오직 하나님으로 채워져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사는 존재로 회복되었음을 확증하여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찌어다”라고 ‘평강’을 선포하셨다.
평강의 왕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강의 왕으로 오셨다. 그분은 모든 죄를 미워하시며 모든 악들을 제거하시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을 박게 하심으로 모든 죄를 도말하시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주셨다. 그리고 자신의 의로운 영으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하게 하심으로 우리 안에 있는 당신의 영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 안에 당신의 영원한 평강을 심어주신 것이다. 즉 당신의 ‘의로운 영의 형상’에 합당한 자로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기 위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 나라의 원리로 주관하시며 그 상태가 바로 “평강”임을 제시하여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신 첫 마디가 바로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찌어다”였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자는 자신의 모든 것이 다 비워지고 ‘자아’가 점차적으로 삭제되어 오직 진리와 의와 선과 사랑이신 하나님으로 채워져 하나님의 아들로 완성되는 하늘나라의 평강을 소유한 존재가 되었다는 선언이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라고 위로하셨다. 주님은 그 약속대로 부활 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첫 번째로 ‘평강’을 선물하여 주셨다. 이제부터 자신의 생명으로 성취하신, 즉 피의 대가로 지불하신 십자가 구원으로 아버지와 화목케 된 영원한 평안을 누릴 것이며, 이제 그분이 평강의 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영원히 하나로 동행하는 그 상태가 바로 평강임을 제시하셨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강’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늘나라의 평강, 즉 평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만 누리게 되는 영원한 평안을 가리키며 영원을 사는 영생을 가리킨다.
이 세상의 토대는 본래 “혼돈과 공허와 흑암”(창 1:2)이며 처음부터 이 땅에 ‘평강’이 없음을 창세기 시작에서 계시하셨다. 즉 빛과 생명과 진리이시며 평강이신 당신의 속성과 정 반대되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통하여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평강과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시며 나타내시며 설명하시는 역사를 창설하셨으며, 당신의 뜻대로 역사를 주관하신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은혜의 덮음과 빛의 임재가 없이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죽음과 멸망의 상태이며, 참 평강이 없다는 것을 역사를 통하여 보여주시고 설명하여 주시고 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생명의 근원은 오직 평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해 빛이 임재하시기 전에 먼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있게 하셨으며, 그 상태가 바로 모든 인간의 마음 상태임을 계시하셨다. 그렇게 이 세상 사망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첫 번째로 주신 선물이 바로 ‘평강’이다. 하나님의 평강이 제자들의 두려움을 삼켜 버림으로 평강을 선물받은 제자들은 이내 기뻐하였다(20:20). 주님이 주신 평강은 내 마음 상태의 ‘평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두려움과 지옥의 유황불에서 영원한 벗어나 하늘나라의 영원한 평화로 옮겨지는 새 생명의 창조를 뜻한다.
주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인간의 마음 상태를 돌밭, 가시떨기 밭, 길가로 묘사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죄에 빠진 모든 죄인들의 마음 상태를 이사야는 “온 땅에 질려와 형극”(사 7:24)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일찍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는데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 3:18)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 하라”(창 3:19)라고 선고하셨다. 모든 인간은 흙에서 나와 다시 흙으로 되돌림을 받게 되는데 그 되돌림을 받은 땅 전체가 바로 ‘엉겅퀴와 가시’로 채워진 저주의 상태라는 계시이다. 이제 그 저주받은 땅에서 태어나는 인간은 끊임없이 가시와 엉겅퀴를 생산해 냄으로 결국 인간 자신들이 생산해낸 그 가시와 엉겅퀴에 숨이 막혀 멸망과 죽음으로 끝나게 됨을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미리 계시하여 주셨고, 세상은 지금 그렇게 종말을 향하여 달리고 있다. 타락한 인간이 저주받은 땅과 한 몸이 된 상태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같은 저주와 죄악뿐이라는 계시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티끌’, ‘진토’, 거름 더미’(상 2:8)로 묘사하신 것이고, 바울도 이 세상에서 최고의 행복과 성공이라고 인간들이 추구하고 열심으로 쌓아놓은 이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을 ‘배설물’(빌 3: 7-9)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저주와 죽음으로 선포된 이 땅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을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엡 2:1-3)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게 가시와 엉겅퀴로 황폐되고 전폐된 죄로 얼룩진 더러운 땅에 우리 주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이 땅에 심겨지고 죽으심으로, 가시와 엉겅퀴와 돌짝과 같은 완악함이 깨지고 부서지고 바다에 던져짐으로 옥토가 되어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에서 주님이 한 알의 밀이 되어 당신의 백성 안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도 그와 함께 내 옛사람이 죽고, 그분의 부활과 함께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하늘의 평강을 누리는 자가 된 것이다. 주님은 자신이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당신의 백성들이 썩어짐의 사망에서 구원받아 영생을 얻게 됨으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생명의 근원이시며 평강의 왕이시며, 나의 모든 삶을 평강으로 주관하심을 제시하셨다.
이와 같이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이 세상 죄와 사망에 빠져 두려워 떨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불가항력적 은혜로 그분이 먼저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노력과 공로 없이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어 주신 그 하늘나라의 영원한 평강과 은혜를 뜻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평강을 입혀주신 주님을 “평강의 왕”이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서 각자 자기 자신으로 채우는 ‘자아’로 작동하는 원리와 완전히 반대로,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원리로 ‘평강’이 임하게 됨을 주님은 말씀하여 주셨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3-24). 생명과 평강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원리에 근거함을 제시하셨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 십자가 구원 성취로 세상 끝까지 택함을 받은 당신의 백성들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평강의 영생을 얻게 됨을 제시하여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평강’을 선물하여 주셨다.
하나님의 영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참 “평강”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비슷한 어떤 외형적 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영적 형상을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그분의 영의 특성을 따라 인간이 창조되었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그 영의 형상이 상실된 것이며, 그 영의 형상을 회복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육신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 주셨다. 그분은 비록 인간의 육신을 입고 태어나셨지만 자신의 본체이신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성령으로 탄생하셨다. 점도 흠도 없는 거룩하신 자신의 영으로 탄생하셨기에 우리에게 자신의 영으로 죄도 흠도 없는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당신의 신부로 하나가 되어 영생을 누리는 평강을 선물하여 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거듭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찌어다”라고 3번씩이나 반복하여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시기 위해 아버지의 형상으로 오셨다. 그리하여 사도바울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골 1:15);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후 4:4). 이는 또한 당신이 택함 백성을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영화롭게 하시기로 미리 정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의존자로 하나님의 생명력으로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뜻한다. 즉 하나님은 당신이 누리는 모든 복과 평강을 함께 누리는 선한 의도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바로 이와 같은 의도로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인간은 생명이시며 빛이시며 진리이시며 영생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자로, 그분이 나의 모든 삶을 주관하여 주시는 하나가 된 평화로운 삶을 사는 존재로 창조된 것이며, 그 선하신 의도대로 새로운 창조를 일으킬 것이며, 그 상태가 바로 평강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로 영생을 사는 영원한 평강을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시고,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영화로운 아버지의 아들로 새 창조를 일으키기 위해 부활하셨으며, 아버지와 화평을 이루신 그 영원한 평강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두려움으로 굳게 닫은 문을 뚫고 들어오셔서 평강을 제자들의 마음 안에 심어버린 것이다. 이제 그분이 내 안에 성령으로 뚫고 들어오심으로 그분의 생명력으로 평강을 사는 하나가 되었음을 “평강이 있을찌어다”로 선언하셨다. 그분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이 뜻과 목적과 소망이 일치가 됨으로 하나님의 참 형상이 회복되고,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하나님에게 향한 절대적 순종과 절대적 의존적 존재로 살아가게 되었음을 제시하신 것이다. 즉 이제는 다시는 선악과를 따 먹지 않는 하나님의 절대적 순종자로 거듭난 것임을 뜻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는 각자가 자신을 비우고 상대방이 나의 존재양식으로 채워지는 내가 부인되고 죽음으로 다른 이가 살아나는 한 알 밀알의 썩어짐을 뜻한다. 뜻이 하나이며 목적과 의도가 동일한 그 일체로 ‘평강’이 이루어지는 참 형상을 말한다.
첫 번째로 말씀하신 평강: 십자가로 이루어주신 ‘평강’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을 주시면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0:19-20). 주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을 선물하시는데 그 평강이 바로 십자가임을 계시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손자국과 창으로 찔림을 받은 옆구리를 내밀어 보여주셨다. 이는 하늘나라의 평강은 오직 십자가 보혈의 피로 성취된다는 증거이다.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과 창으로 찔린 옆구리는 우리의 죄를 도말하여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를 모형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하늘나라의 평강은 오직 십자가에 근거함을 확실히 제시하여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오직 십자가 예수를 믿고 영접함으로 하늘의 평강을 소유할 수 있음을 확실하게 제시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평강의 주를 영접하자 이내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한 것이다(20:20).
평강은 예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서 화평을 이루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평강을 입혀주셨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예수그리스도는 본체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평강의 왕이시다. 그럼에도 스스로 ‘인자’로 오셔서 종의 삶으로 우리를 섬겨 주셨으며, 십자가에 죽으시는 희생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다. 그리고 평강의 왕으로 성령으로 아예 우리 안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를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잉태시켜 영원히 하나가 되는 평강으로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여 주신다. 즉 그분이 친히 내 안에 ‘평강의 왕’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사망을 삼켜버림으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한 몸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신부로 거듭난 것이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즉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롭게 태어난 그 새사람을 입은 상태가 바로 평강임을 계시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20:22)라고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평강은 내가 이루어가는 나의 노력과 나의 열심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노력과 열심에는 수많은 고생과 고통과 두려움과 근심 걱정이 따르기 때문에 ‘평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강은 어떤 존재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시고 아무런 대가도 조건도 노력도 없이 선물로 주심으로 누리는 것을 말하며, 그 어떤 악한 것이나 걱정근심이나 고통이나 사망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서 누리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평강의 왕이 다스리는 죄와 사망이 없는 하늘나라에서만 누리는 그 영원한 평강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라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부활하신 후 즉시 제자들에게 주님의 ‘평강’을 선물하여 주셨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라는 선포로 시작하여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 이는 구원받은 성도에게 반드시 임하게 되는 것이 바로 평강이며 은혜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은 내가 아직 태어도 나기 전에 십자가로 성취하신 모든 사실을 믿음으로 선물로 입혀지는 진실이다. 이는 구약에서부터 약속하신 선물이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타락한 인간에게는 처음부터 ‘평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48:22). 평강은 오직 점도 흠도 없는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것이기에 오직 그분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직 주님에게만 있는 그 영원한 평강이기에 주님은 “나의 평안”이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신다. 그 평강은 십자가 죽음으로 생명의 대가를 지불하여 다 이루어주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평강이다. 때문에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이 세상에 속한 평안이 아니라 점도 흠도 없는, 고생이나 고통이 없는 영원을 누리는 평강이기에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여 주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평강은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이나 노력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내 안에 평강이 임한 것이다. 우리 안에 평강이 임하였다는 것은, 주님이 ‘평강의 왕’으로 우리 마음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하나로 영원을 사는 영생으로 거듭난 증거이며, 이제 그분이 평강으로 나의 삶을 다스리시며 평강으로 채워 가심을 뜻한다. 즉 시작과 과정과 완료를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안에서 완성하시기에 나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그분을 의지하는 믿음이다. 그분이 내 안에서 선을 이루어 가심을 믿는 확고한 믿음과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내 “아바 아버지”가 된 것이며, 그 영원한 관계를 확실하게 알고 믿는 성도에게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이 부러우며,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을 사는 평강을 선물로 주셨다.
모든 인간은 사망과 동반하는 삶을 살고 있기에 사망을 두려워하며 사망에 매여 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5). 그 사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며,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며 절대 의존적 존재로 오직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내 안에 채워지는 것이며, 그 상태가 바로 두려움이 없는 자유함의 “평강”이다. 그분이 내 삶을 주관하시기에 나의 삶에서 참된 성숙과 변화가 일어나고 그분의 성품이 하나하나씩 나를 통하여 터져 나오는 것이다. 포도나무이신 그분이 합당한 열매를 맺어 가시며, 나는 그냥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일 뿐이다. 그분에게 붙어있음으로 평강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평강은 주님의 절대적 주권하에서 주님이 이루어주신 것을 누리는 선물이다. 그 선물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의 죄인 됨을 자각하고 가난한 심령으로 내려가 애통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것이며, 그분의 은혜를 입어 영생으로 거듭남으로 평강이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두 번째로 주시는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평강’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이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은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이루어 주셨음을 제시한다. 그리고 거듭하여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두 번째로 말씀하실 때에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는 근거를 대시고, 이내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라고 성령을 부어주신다. 즉 주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제자들에게 평강을 입혀주셔서 땅 끝까지 십자가 복음 전파에 보낼 것이며, 혼자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며, 성령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것임을 제시하여 두 번째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성도는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셨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8-39). 주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내려온 목적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이며, 아버지의 뜻은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영생을 입혀주시는 일이며,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이 세상 끝까지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복음 전파의 사역에 제자들을 동참시키심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21)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이는 반드시 성령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짐으로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십자가 구원 성취를 위해 보내심과 같이, 제자들을 구원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어들이기 위해 추수 꾼으로 보내신다고 미리 말씀하셨다(요 4:34-38). 당신께서 뿌려놓은 생명의 열매를 당신의 백성들을 보내어 거두게 하시는 동참으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4:36). 주님은 포도나무 비유에서 자신을 생명의 씨앗으로, 가꾸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농부이신 아버지로, 성도는 생명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로 표현하셨다.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일은 농부이신 아버지와 예수님의 일이지만 열매는 가지에 달리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즉 우리를 세상에 보내어 열매를 거두는 추수에 동참시키는 그림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요 4:37-38)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으심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며(요 12:24), 그 열매를 추수하는 사역에 제자들을 추수 꾼으로 세상에 보내시면서 성령을 내려 주심으로 오직 성령의 사역으로만 이루어짐을 계시하여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보내심을 받은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말씀으로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3-4).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말씀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 즉 말씀을 담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으며, 십자가로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셨으며, 말씀으로 복음을 전파하시며, 말씀으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을 주시며, 말씀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상에 확장됨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라고 예수님이 곧 ‘말씀’이시며 예수님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예수께서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아버지의 뜻을 담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오로지 아버지께서 시키는 대로 하심으로 우리에게 향한 구원의 뜻을 성취하셨다. 그렇게 완전히 비워지고 버려짐으로 주님은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외침으로 자신이 철저히 버려져야 만이 아버지의 뜻이 성취됨을 순종으로 받아들이셨으며, 마지막 승리의 선포가 “다 이루었다”였다. 예수님이 그렇게 철저히 비워지고 버려짐으로 아버지께서 다 이루어주심을 “다 이루었다”로 선언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화평과 평강이며, 하나님 나라 존재 양식이며, 하늘나라 삶의 원리임을 나타내셨다. 우리 주님이 먼저 자신을 비우시고 아버지의 말씀을 담고 말씀이 되어서 말씀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하늘나라 원리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내어 보여주시고 당신의 백성들이 그 원리로 살아가게 됨을 나타내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21)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의 뜻, 말씀을 담은 그릇으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하늘나라 원리의 삶으로 성령님이 친히 이끌고 가심을 계시하여 “성령을 받으라”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먼저 그 삶을 사셨고, 우리 성도에게 그 삶을 요구하시며, 성령님이 내 안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어가심을 제시하셨다. 바울은 수시로 감옥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직 서신으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그가 쓴 ‘말씀’이 살아서 성령이 역사하심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외친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말씀이 살아서 성령의 권능으로 역사하시기에 그분의 전지전능하심에 감탄과 기쁨으로 내 안에서 ‘평강’이 넘침으로 주 안에서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감격으로 외친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거나 율법을 지켜 도덕과 윤리로 깨끗한 의인이 되는 그 어떤 규칙들을 정하여 주시거나 행위를 강조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종의 형체로 오셔서 우리를 섬기는 낮은 자리로 내려오셔서 오직 겸손과 한없는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사랑으로 품어 주셨으며, 철저하게 자신을 부인하시고 오로지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시며 철저한 순종으로 아버지의 말씀을 성취하셨다. 예수님이 완전히 비워지고 버려짐으로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었기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아들이 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완전히 비워지고 상대방을 나의 존재양식으로 받아들이는 하늘나라 삶의 원리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완전히 비워져서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성취됨으로 아버지께서는 만물이 아들에게서 비롯되고, 아들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아들에게로 돌아간다고 아들의 주권을 세워주셨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롬 11:36). 마찬가지로 성도에게서 하늘나라 원리의 삶이 터져 나오는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주님이 하신 일임이 분명한 증거로 드러남에도, 주님은 우리 성도가 한 것으로 인정하여 주신다. 그리하여 주님은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0:23)라고 성도를 성령님의 사역에 동참시켜 주시는 것이다.
성도는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며 성령님이 주장하는 삶을 살게 됨을 주님은 확실하게 제시하여 주셨다. 즉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과 같이, 주님도 성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과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함을 얻게 하신다고 미리 기도하여 주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택함을 받은 성도는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주님이 이 세상에서 살아내신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목적이 뚜렷한 운명적 삶을 살게 될 것임을 제시하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롭게 거듭난 성도는 이제 주 예수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존재로 지향하는 가치와 인생의 목적과 소망이 일치되어 오직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으로 땅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됨을 확실하게 제시하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과 생명과 진리로 받아먹으며, 알아듣고 이해하며, 믿음으로 진리가 되어 진리를 외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17:20)라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을 통하여 십자가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끝까지 확장됨을 미리 제시하여 주셨다.
그렇게 동역자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자에게 일차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자아’가 완전히 비워지는 자기 부인이다. 성령님은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일차적으로 내 ‘자아’를 잘라내시며 내 안에 가득 차있는 이 세상의 오물들을 하나하나 비워내는 일들을 하신다. 그리고 비워진 내 마음에 구원의 평강을 채워주시며, 그 은혜의 평강을 마음으로 입으로 몸으로 삶으로 다른 이들에게 전하여 주고 보여주는 참 제자로 양육하신다. 성령님이 내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시며 전파하시는 사역으로 구원이 선포되는 십자가 복음이 땅 끝까지 이르러 열매를 맺게 하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함과 같이 성령의 권능을 입혀주시며 예수님의 증인의 삶으로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이와 같이 그분이 우리를 택하여 세우셨기에 시작부터 완성의 지점까지 열매를 맺는 일은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며 그 일을 위해 우리 주님이 아버지의 뜻을 담고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과 같이 주님이 또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어 주님의 증인의 삶으로 열매를 맺는 일에 동참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분이 자발적으로 원하셔서 우리를 택하셨기에 은혜를 입혀주셔서 믿음의 걸작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나타내신다.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당신의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는 장면과 똑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숨으로 성령을 주신 것이다. 창세기에서는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감으로 생령이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에스겔 37장에서도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겔 37:3)라고 물어보시고,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리라”(겔 37:5)라고 말씀하시자 죽어서 말라비틀어진 마른 뼈가 살아나서 큰 군대가 된 것이다. 똑같은 원리로, 예수님은 십자가로 구원을 성취하시고 부활하셔서 죄와 사망으로 죽어있는 당신의 백성에게 자신의 숨, 즉 자신의 영을 넣어주심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살려내는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신 것이다. 죄로 죽은 너희에게 나의 생명의 숨을 여주지 않으면 너희는 사망에서 살아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시는 장면이다. 너희는 내가 살려낸 존재이며, 내가 이제부터 성령으로 너희 안에 뚫고 들어와 너희의 삶을 주관하여 아버지의 나라로 너희를 인도할 것이기에 너희는 내가 이루어 놓은 구원을 선물로 받아서 누리게 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제시하여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주셨기에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기에 “평강”이다.
그렇게 십자가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될 때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는 그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이 임하게 되지만, 믿지 않는 이 세상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됨을 가리켜 그다음 구절에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0:23)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입혀 세상에 보내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불러내어 구별하시는 일을 하실 것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택함을 받은 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예수님은 자신에게 속한 양들을 알고 그들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요 10:3,27), 그들에게는 영원히 멸망치 아니하는 영생을 주시며 그 누구도 예수님의 손에서 당신의 양을 빼앗을 수 없다고(10:28-29) 천명하셨다. 즉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양은 절대적으로 보증된 생명의 대가를 지불하여 구원한 양들이기에 끝까지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시며, 또한 중도에 탈락하거나 실패할 수 없는 영원히 멸망치 않는 영생을 주실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 세상에 속한 자는 그 죄가 그대로 남아있기에 그들이 바로 ‘멸망의 자식뿐이며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다’(요 17:12)라고 이미 예정된 주권적 선택임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이는 내가 정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영혼 구원이 아니라 내 안에서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나를 통하여 나타남으로, 주님은 우리를 그 일에 동참시켜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20:23), 즉 우리를 통하여 나타남으로 주님은 우리가 한 것으로 인정하여 주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25:34-40에서, 주님은 오른 편에 있는 양들을 향하여 주님이 배고프고 목마르고 벌거벗고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 친히 와서 돌봐 주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러한 질병과 사망의 증상들을 가진 자는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우리가 굶주리고 목마르고 병들고 어둠에 갇혀 저주와 죽음에 처해 있을 때, 그분이 친히 찾아와 구원하여 주셔서 생명의 양식을 먹여주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마시게 하시고, 각종 질병들을 고쳐 자유를 주시고, 한없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은혜를 입혀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이 하신 일들을 양들에게 전기시켜 주셔서 양들이 한 일로 말씀하신 것이다. 성도는 자신들이 바로 주님이 나열한 그 질병의 증상들을 가진 사망에 던져져 있었던 자들임을 아는 자들이며, 그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주신 이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심을 정확하게 아는 자들이다.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자격도 조건도 대가도 없이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와 은혜로 구원받은 그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너무나 잘 아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제일 먼저 자각되어 나오는 것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이며, 그럼에도 그 죄인을 불러주셔서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시는 당신의 사역에 동참시켜주심에 오직 순종과 기쁨과 감사로 화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하늘나라 원리로 제자들을 부르시고 주님이 살아내신 하늘나라의 원리의 삶으로 세상 끝까지 보내시며, 제자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기에 제자들에게 먼저 성령을 내려주시면서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0:23)라고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입혀서 세워주신 것이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이제부터 성령님의 사역으로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됨을 명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0:23). 이는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사람으로 거듭나 하나님과 하나가 된 영적 존재로 뜻과 목적과 사역이 일치됨으로 성령 안에서 하나로 역사하심을 뜻한다. 주님은 항상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며, 아버지 안에 아들 예수님이 계시며,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는 한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셨다. 주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라고 부르시고 함께 성도 안에 들어오셔서 거처를 함께 하신다(요 14:23)고 확실하게 말씀하신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라고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이 한 하나님으로 우리 안에 영원히 함께 계심을 제시하셨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하나 됨이며, 그 하나 됨에서 십자가 복음이 땅 끝까지 흩어져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전파되어 죄가 사하여지는 구원과 생명이 임하게 됨을 제시하신다.
그렇게 영적으로 하나가 된 성도에게서 나오는 사역은 오직 당신의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구원 사역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죄를 사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죄로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부활하셨으며, 우리와 하나로 영원을 살기 위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셨으며,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땅 끝까지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시는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사역을 하신다. 그러므로 죄를 사하는 권능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성령을 받으라"라고 먼저 제자들에게 성령을 입혀주시고, 그 성령의 권능으로 제자들이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게 됨으로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0:23)라고 제자들을 추수꾼으로 세워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죄의 증상들로 여러 가지 병을 가진 자들을 깨끗이 치유하실 때 죄를 사하는 권능으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선포하셨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고, 그 권세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 7:48)라고 질병에서 해방된 자들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그녀의 죄 사함을 선포하셨다. 그 죄 사함이 선포되자 그녀를 정죄하던 무리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도망가 버림으로 여인은 ‘주여 나를 정죄하던 자가 없나이다’라는 고백과 같이 정죄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고 확실하게 말씀해 주고 있다. 하지만 율법으로 간음한 여인을 참소하던 자들이 도리어 율법의 정죄로 죄인으로 폭로되자 죄인 그대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고 구원의 주를 떠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실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그분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정죄와 심판을 받아내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영원히 속량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 사함의 권능은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이며,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생명이 임하는 성령의 법으로 옮겨지는 은혜의 시대가 도래되었음을 제시하여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0:22-23)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즉 율법과 옛 성전, 구약에 묶여있었던 종에서 풀려나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 안에 넣어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사하여주시는 은혜의 새 시대를 열어주심을 계시하여 “죄 사함”을 선포하신 것이다. 성도는 다만 우리 안에서 선을 이루시는 성령님의 절대적 주권과 사역에 나 자신을 완전히 내어드리며, 그분의 열심에 잠잠하여 그분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심에 기쁨과 감사로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이다. 나는 다만 그분의 뜻과 말씀을 담은 그릇이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계획하시고 완성하시는 그분의 일이기에 나의 그 어떤 생각이나 판단이나 견해나 의도가 들어갈 수 없음으로 나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잠잠히 동참하며, 기쁨과 감사로 화답하는 그 상태가 바로 순종이며 평강의 상태이다. 그분이 모든 것을 하셨음에도 우리가 한 것으로 인정하여 주시기에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3)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일이시기에 성도에게는 그분의 사역으로 인하여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은혜를 입게 됨으로 “평강”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지음심을 받은 존재이며 우리에게 구원을 입혀주시는 것이 그분의 선한 뜻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라고 확실히 말씀하여 주고 있다. 즉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고, 십자가로 구원을 입혀주셨으며,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를 통하여 영광과 찬송을 받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는 항상 자신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뜻을 추측하며,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만들어서 자기모순과 자기 혼돈에 빠져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일들을 한다. 티끌의 존재가 어떻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보탬이 되겠는가! 개미가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하여도 우리 인간의 눈에는 더럽고 추잡한 빨리 치워버려야 하는 쓰레기다. 마찬가지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천지를 통치하시는 거룩하신 그분이 어찌 죄인에게서 나오는 배설물들을 받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진토’ ‘거름 더미’로 묘사하신 것이다. 죄인은 구원받기로 태어났기에 죄인의 상태에서 오직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를 구하여 그분의 은혜를 입어야만 이 살 수 있는 존재이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주셨으며,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셨으며, 은혜의 옷을 입어주심으로 성령으로 영화로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것이며, 그런 우리를 당신의 의로운 사역에 동참시켜 주신다. 시작부터 완성까지 당신의 믿음과 은혜로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 우리는 다만 포도나무이신 그분에게 붙어서 존재하며 열매를 맺게해 주시는 가지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