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깊은 영적 의미

요한복음 (요 20:24-31) 도마는 과연 ‘의심 많은, 믿음 없는 도마’인가? / 도마의 믿음과 참된 신앙고백 / 믿음이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15. 10:13

요 20: 24-31

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뒤 두 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 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돼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도마는 과연 ‘의심 많은 도마, 믿음 없는 도마’인가?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의 몸을 보이셨지만, 유독 도마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어 보여주지 않으셨다. 이는 도마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또한 우리에게 나타내고자 하시는 중요한 의도가 있으셨기 때문이다. 도마는 다른 모든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라고 말할 때,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자신은 두 눈으로 보고 손으로 예수님의 못 자국과 옆구리 상처를 만져보고야 믿겠다고 다짐한다. 우리는 도마의 이러한 진지함에 대하여 너무 섣불리 ‘의심 많은 도마’, ‘믿음 없는 도마’라고 부르는데, 그 의심 많은 믿음 없이 보이는 도마 입에서 가장 확고한 신앙고백이 나오게 된다. 주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20:28).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보았음에도 부활을 믿고 기뻐하며 다시 부활하신 주님 뵙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들을(각자의 마음 문) 닫아걸고 숨어서 두려워 떨고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하셨지만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지속적으로 함께 계신 것이 아니라 나타나셨다가 금방 사라짐으로 제자들을 방치하는 것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도마는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봤음에도 여전히 숨어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다른 제자들의 연약함과, 부활하신 예수님도 다시 나타나지 않으며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기에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0:25)라고 말한 것이다. 도마가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의심이 많아서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았음에도 여전히 믿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다른 제자들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은 손으로 주님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를 만져보고 확실하게 믿는 자가 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즉 너희 모두가 부활한 예수를 봤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믿어지지 않아 두려워하는데 나는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직접 만져보아 확실하게 믿는 자가 되겠다는 신념의 표현이며, 주님은 도마의 그 마음을 읽었기에 도마에게 믿음을 주어 확실하게 ‘믿는 자가 되는’ 신앙고백을 하게 하신 것이다.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이 없이 다른 이들의 체험을 내 것으로 믿고 무조건 따르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도마에게 의심 많고 믿음이 없다는 꼬리표를 달기보다는 도마의 진지한 태도와 확실한 체험으로 주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겠다는 열망을 추구하는 것이 더욱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만약 도마에게 그렇게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확실하게 믿는 자가 되겠다는 열망과 확고한 의지가 없었더라면,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다른 제자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하지 못한 최고의 신앙고백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도마는 확실하게 믿고 싶은 진지함과 간절함이 있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자마자 만져볼 필요가 없이 영의 눈이 열려 이내 부활한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가 진정 ‘나의 주이시며 하나님이심’을 읽어낸 것이다. 다른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님을 보고도 예수님이심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도마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조금도 의심이 없이 확고한 믿음으로 당신은 진심으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진실한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즉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고백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나와 하나가 되어 나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현재 우리 성도를 대표하는 참된 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우리는 이태까지 도마에 관하여, ‘의심 많은 도마’ ‘믿음 없는 도마’로 인식하여 왔고 또 그러한 설교를 많이 들어왔다. 말씀을 조금만 진지하게 상고하고 참뜻을 추구하는 자세로 읽는다면 왜곡된 설교에 “믿습니다” “아멘”으로 맹종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구약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포하였지만 그들도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연구하고 상고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이 신라와 함께 베뢰아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데 베뢰아 사람들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 말씀이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옳은 말씀인가를 상고하는 분별력을 추구하였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맹목적으로 무조건 아멘으로 받아서 믿으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탐구하는 열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하며 깊이 공부하며 분별력을 가지고 복음을 확인하고 확신하는 참된 신앙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성도는 목회자의 설교나 전하는 자의 말씀을 듣고 무조건 ”믿습니다“ ”아멘“의 맹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과 베뢰아 성도와 같이 진지하게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확인하며 탐구하는 열망으로 말씀을 대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으려고 한다면 도마와 같은 확고한 믿음의 신앙고백이 나올 수가 없다. 진리를 탐구하는 진지한 열망에서 나오는 의심과 분별력 없는 의심은 구별되어 있다. 많은 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하여서는 궁금해하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으며 그분의 뜻과 말씀에 별로 관심이 없다. 나보다 능력 높은 자,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기적으로 이루어 주는 자, 내가 원하는 것을 언제든지 채워 주리라는 망연한 기대로 무조건 받아들이고 나를 위해 존재하는 신으로 둔갑하여 열심히 섬기는 맹종을 선호한다. 오직 나만을 위한 ‘자아’에서 출발한 인간의 탐심으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육신의 욕구를 채우는 신으로 둔갑하여 섬기며, 탐심에서 나오는 거짓된 열정과 맹종을 믿음으로 유도하거나 강요하는 이상한 종교 놀이를 벌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믿음과 생명은 하나님을 아는 것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그분이 나를 낳으신 아버지가 되시는지를 진정으로 깨닫고 그분의 참 사랑을 체험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즉 그분이 주신 성경 말씀 속에서 성령님이 주시는 영의 계시로 그분에 대한 생명의 지식을 배우고 깨닫고 소유하게 되는 체험이다. 그리하여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라고 외친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즉 영생은 참되신 하나님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참으로 아는 것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그 열심에는 의심도 있을 수가 있으며, 그 의심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열망에서 나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불신에서 나오는 의심은 믿을 수 없다는 의지에서 출발한 믿지 않겠다는 개념이다. 즉 믿지 않기로 선택하고 믿지 않게 되는 의심들을 추구하는 것이며 성경은 그런 의심을 품은 자들을 ‘믿지 않는 자’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맹종은 옳은지 그릇된 것인지를 구별하지 않고 대다수 사람들의 물결, 또는 권위자의 압도적인 설교와 호소력 또는 신학 박사의 학위적 교리에 분별력 없이 무조건 따르는 무지를 말한다. 긍정적 의심은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궁금함과 알고 싶은 열정과 진리를 추구하는 열망을 가리킨다.

모든 인간은 ‘죽음’이라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잠시 고생과 고통으로 사는 이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탐구하고 연구하며 자신의 직업과 소명을 이루기 위해 지속적으로 평생을 이 세상 지식을 얻는데 투자한다. 잠시 동안 죽음으로 정해진 운명을 살면서도 지속적인 지식과 배움은 필수적이다. 하물며 나에게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얼마나 무궁무진하며 절대적이며 필수적인 것이겠는가!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에게 지성을 주시고 그분에 대하여 진지하게 공부하여 깨닫고 믿어서 생명을 얻으라고 진리와 은혜가 충만한 생명의 책인 성경을 주셨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가장 완전한 계시자로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 동시에 그분은 성령으로 우리 마음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그분에 대한 모든 구원과 영생의 진리를 끊임없이 깨우쳐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시며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여 주시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너회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선언하셨다. 즉 그분을 아는 지식이 곧바로 믿음과 생명을 얻는 길이며, 모든 성도들의 최고의 사명이다.

도마의 믿음과 참된 신앙고백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는 아직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지 못하였고 다만 다른 제자들로부터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들었기에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0:25) 라고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을 직접 만져보고야 믿겠다고 다짐한다. 예수님은 다시 11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도마가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하시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비록 육신으로는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셨지만 영적으로는 제자들과 함께 계셨으며 제자들의 일거일동을 관찰하고 계셨기에 도마가 한 말 그대로 인용하셔서 도마에게 “믿는 자가 되라”는 믿음을 선물하여 주신다.

도마는 자신이 다짐한 것과 같이 주님의 부활의 몸을 직접 만져보고 확인한 후에 ‘주는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확고한 신앙을 고백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도마의 마음 안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평강을 내려주심으로 예수님의 믿음이 그의 신앙고백을 격발하여 내신 것이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영으로 친히 제자들 마음 안으로 뚫고 들어오시는 만남이 이루어지자 성령의 계시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주가 되시고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연합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장면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3번째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그분을 '나의 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평강을 내려주신 것이다. 즉 주님이 제자들의 굳게 닫힌 마음 문을 뚫고 들어오시자 이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강”이 임하였고, 주님이 자신의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라고 성령이 임하자 부활을 의심하던 도마가 먼저 제자들을 대표하여 ‘주는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놀라운 신앙고백으로 믿는 자가 된 것이다. 주님의 못 자국과 옆구리 창 자국을 만져보고 확인하여야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마음속으로 뚫고 들어오시자 그분이 “나의 주가 되시고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는 놀라운 성령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즉 당신이야말로 나의 참 주이시며 하나님이시며 이제부터 나의 모든 삶을 주님께 내어 드리는 주님이 주관하시는 순종의 삶을 살겠다는 믿음의 고백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육신으로 매일 함께 3년을 같이 있으면서 수많은 이적들과 능력과 표적들을 체험하였고 생명의 말씀을 매일 듣고 있었다. 요한의 말과 같이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낱낱이 기록하려면 이 세상이라도 기록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도마와 같은 완전한 신앙고백은 하지 못하였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고백하였지만 그 믿음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고백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동일하게 주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구원의 뜻을 성취하시고 부활하셔서 부활의 몸으로 제자들 안으로 뚫고 들어오심으로 이제 성령으로 그분과 하나로 계셔서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게 됨으로 주님은 도마를 통하여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제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믿음의 절정에 이르는 고백을 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0:27)라는 말씀은 단순히 믿음 없는 도마와 제자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이제부터 내가 너희 안에 뚫고 들어와 너희 주가 될 것이며 너희 하나님이 되어 영원히 하나로 영생을 살게 될 것임을 계시하는 말씀이다. 즉 내가 성령으로 너희 안에 뚫고 들어와 너희를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하나로 함께하기 때문에 너희는 이제 더는 두려워 떨지 않을 것이며, 또한 나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확고한 믿음으로 나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세워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뜻한다. 즉 믿음은 내가 무엇인가를 보고 확인하여 의지적으로 믿는 나의 주관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우리의 믿음을 격발하여 주실 것임으로 그 믿음의 주권자는 예수님이시며 그분의 믿음으로 우리를 믿음의 걸작으로 세우시겠다는 주님의 견고한 의지를 표현하신 것이다.

믿음은 그 어떤 과정이나 증거들을 통하여 확인되거나 기적과 능력으로 증명되어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믿음이 주인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그분을 믿는 믿음을 심어주시는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믿음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믿음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믿음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성취로 믿음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와 우리의 믿음을 격발시켜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여 주심으로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다. 바로 도마가 말한 “주는 나의 주이시며 하나님이시다”는 확고한 믿음이다. 도마는 “보고 확인하여 믿겠다"라고 다짐하였지만,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이 도마의 마음 안에 뚫고 들어오시자 이내 조금도 주저함과 의심 없는 확고한 신앙을 고백하게 된다. 그렇게 부활의 예수가 도마의 마음 안에 뚫고 들어오시자 곧 바로 믿는 자가 된 것이다. 믿음은 오감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이해되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내 영이 즉각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이요 생명임을 내 영이 알게 됨으로 나의 모든 삶을 내어 드리며, 그분이 나의 삶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영원한 주가 되심을 고백하게 되는 하나님의 믿음이다. 즉 믿음의 주가 우리 안에 들어오셔야 만이 온전한 믿음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의 신앙 고백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함과 같이 우리는 이제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자가 된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을 사랑하사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사랑으로 시작하셔서 사랑으로 성취하시고 내 안에 사랑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와 하나로 영생을 살게 됨을 믿는 그 확고한 신앙고백이 바로 ‘주는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는 확신이다. 그분은 한시도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하나로 함께 하시기 위해 아예 우리 마음 안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하나로 동거하심으로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 즉 그분은 우리 밖에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하나로 나의 모든 삶을 끝까지 주관하시고 끝까지 사랑으로 품어주셔서 영원히 하나로 영생을 사는 자가 되었음을 우리 심장에 각인시켜 주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도마를 통하여 이제 주님은 육신으로 밖에서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하나가 되어 사랑으로 영생을 살게 됨을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바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심의 보장이다. 태초 시작부터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 우리 죄인의 육신을 입고 이 죄악 된 세상에 내려오셨으며,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겪어야 하는 그 십자가 고통과 고난을 겪으셨으며, 우리 죄를 도말하시기 위해 죄인처럼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다 당하셨으며, 우리를 죽음에서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향한 영원한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으며, 사랑으로 우리와 영원히 하나로 영생을 살기 위해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나의 주가 되시며 나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주는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믿음의 신앙을 고백한 도마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실상으로 믿는 믿음의 본질을 제시하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1:1-3). 믿음과 생명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상을 믿는 것이며, 체험을 통하여 확실한 증거를 낳으며. 우리 믿음의 선지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이제 우리 성도는 부활의 예수를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여도 성령이 실상으로 우리 마음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내 영이 주를 알아보며 “주는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되는 복된 은혜의 시대가 펼쳐질 것이며, 그러므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주님이 주시는 믿음이 없이는 ‘주는 나의 주이시며 하나님이시다’는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고백할 수가 없다. 반드시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나의 영의 눈을 열어주셔야 만이 그분을 나의 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의존하게 된다. 영의 계시는 인간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과 말씀의 계시 속에서 그분을 인지하는 것이다. 영적 계시란,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계시로 인간에게 향한 사랑과 의, 구원과 생명의 진리, 즉 하늘나라의 실체를 나타내어 보여주고 체험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며 소유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시는 영역이다. 그분은 오직 창세전 당신이 택하여 놓으신 당신의 자녀에게만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을 믿는 믿음을 주시며, 성령님의 계시와 말씀으로 우리 마음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이제부터 ‘보지 않고 믿는 복된‘ 성령의 은혜 시대가 도래되었음을 선언하신 것이다. 즉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라는 말씀은, 그분이 내 마음 안에 성령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하나로 영생을 살게 되는 하늘나라의 복이 임하였다는 증거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시며(마 4:17),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라고 우리가 소망하는 하늘나라, 천국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며, 그분은 곧바로 우리 마음 안에 성령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나와 동고동락하심을 제시하여 주셨다. 그러므로 구원과 생명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한없는 사랑의 열정과 열심으로 성취하셔서 오직 은혜로 무상으로 입혀주시는 선물이다. 이는 우리가 노력하는 의지도 아니고, 배워서 취득하는 지성도 아니며, 행위의 의와 업적으로 취득되는 일이 아니다. 전적으로 나의 그 어떤 인간적인 요소가 포함되지 않는, 나의 뜻과 의지를 배제하여 오직 그분 홀로 계획하시고 홀로 성취하시고 오직 당신의 자녀에게만 은혜를 입혀주셔서 하늘나라의 영생을 소유하게 하시는 영적 축복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성령의 시대를 사는 성도를 향하여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라고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현장에서 제자들을 포함한 그 누구도 예수님은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는 믿음에 근거한 고백을 하지 못하였다.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로마군에게 끌러가 고난을 당하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실망하여 예수님을 배신하거나 도망하여 숨어 있었다. 부활한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도 여전히 문들을 닫아걸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 누구도 부활의 예수가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는 고백을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부활의 예수가 문을 닫아걸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들 앞에 나타나셔서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라고 그들에게 평강을 내려주시자 그들은 즉시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이내 주님께서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도마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주는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처음으로 믿음에 근거한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이제부터 성령강림으로 너희 안에 믿음이 심어지게 됨으로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여도 확고한 믿음으로 ”나의 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게 될 것이며, 나는 너희를 떠나지 않고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하나로 함께 할 것이며, 그러므로 너희가 복된 은혜를 입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굳게 믿고 증인의 삶으로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참된 제자들이 된 것은 바로 오순절 날 성령강림 그때부터였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기적과 표적을 갈망하며 눈에 보이는 것을 구한다. 분명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말씀하셨음에도 여전히 눈으로 뭔가 기적과 표적들을 봐야 예수가 믿어진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가 가지고 있는 기적과 능력을 믿는 것이며, 그 기적과 능력을 주지 않으면 예수님을 원망하고 불만을 쏟아내며, 따지고 의심하며, 실망하여 이내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나게 된다. 그래서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어떠한 기적도 이 세대에 보여 주지 않겠다”(막 8:12)라고 거절하신 것이며, ‘악하고 음란한 자들이 표적을 구한다’(마 12:39)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나의 탐심의 배를 채우는 공급자로, 나의 편리와 나의 유익을 위한 존재로, 내가 언제든지 부릴 수 있는 ‘하인’과 같은 신으로 섬겨드리는 것이 오늘날 교회 현실이다. 그래서 표적을 구하는 이 세대를 악하고 음란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믿음은, 기적과 능력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이 평강의 왕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하나로 연합된 증거로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만 선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믿음이다. 즉 믿음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새 생명이 잉태되는 진리이다.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될 것이라고 믿는 희망 사항이 아니다. 믿음은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되는 구원과 생명이 오직 은혜로 입혀지는 실상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내가 노력한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선물로 나에게 주어짐으로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믿음은 보이고 나타나는 기적과 표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으로 불가항력적 은혜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내 영이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의 믿음으로 도마와 같은 “주는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신앙을 고백하게 되며, 그 고백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에 근거함으로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할 때 그 신앙고백이 베드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믿음으로 고백한 것이기에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6-17). 즉 베드로의 고백은 자신의 믿음에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진실한 고백이며, 이는 장차 제자들을 교회의 기초로 세워 땅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복음을 가리켜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복되도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임하여 나를 통하여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품속으로 들어가 하나로 연합을 이루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짐을 말하는 것이며, 그 복은 우리가 쟁취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친히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심어버림으로 복된 자가 되었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 자체가 완벽하게 십자가로 완성되어 우리 안에 임한 선물이다. 내가 발전시키고 성숙시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완성한 완벽한 선물이며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임하여 “주는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으로 완료되는 것이기에 “복”이라고 말하는 것이지 어떠한 성숙의 과정을 거쳐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원래 피조물의 자리로 찾아가 창조주의 다스림을 받으며 순종의 자리로 정착되는 것이지, 고지 꼭대기로 바벨탑을 쌓아서 하나님에게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의 복이 내 안에 뚫고 들어옴으로 내 옛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거듭남을 말한다. 즉 내가 부인되고 죽어가는 십자가 삶으로 ‘없음’으로 정착되어 내 안에 오직 평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로 채워지는 것이지, 나의 열심으로 구원에 이르고 기적과 능력을 체험하는 만큼 믿음이 성장되는 것이 아니다.

도마는 자신의 의지로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고 믿겠다고 다짐하였지만, 평강의 예수님이 그의 마음에 임하자 즉시 영의 눈이 열리는 믿음을 선물받아 그 어떠한 의심도 주저함도 없이 "주는 나의 주이시며 하나님이시다"라고 확실한 믿음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의심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나의 의심 속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나의 의심을 삼켜버림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확실한 믿음이 심어진 것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내 안에 영으로 뚫고 들어오심으로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는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믿음의 신앙을 고백하게 하신다. 도마의 의심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받아들이기 위한 긍정적 마음에서 뿜어 나오는 예수님에게 향한 확고한 믿음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었으며, 그 열망은 하나님이 주신 열망이었기에 주님은 도마에게만 영의 눈을 열어주심으로 다른 제자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셔서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 앞에서 담대하게 당신은 “나의 주이시며 하나님이시다”라는 참된 신앙고백을 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도마는 “의심 많은 도마” “믿음 없는 도마”가 아니라, 이제 주님은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되셔서 하나로 동행함으로 조금도 의심이나 두려움 없이 확고한 믿음으로 우리를 세워주실 것임을 계시하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과 의도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듣고, 깨달아서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요한은 성경 전체 기록의 목적과 결론과 복음의 핵심을 우리에게 요약하여 주고 있으며, 이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일치하고 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오직 예수님만이 진리와 생명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사랑이시다.

30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라고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과 기적과 기사들이 너무나 많아서 이 세상이라도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하며, 요한은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적인 일들을 “기적(miracle)”이라고 부르지 않고, 표적, 즉 “싸인(sign)”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수많은 기적들은 모두가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기 위한’ 증거이며, ‘그분을 믿어 생명을 얻게 되는’ 메시아적 증거로서 목적과 의도를 지닌 절대적 진리이기에 ‘표적’인 것이다. 즉 예수님은 기적적인 사건들을 일으켜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시며 자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하여 주심으로 “표적”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 이처럼 여러 가지 표적들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를, 왜 자신을 믿어야 하며, 자신만이 영생임을 확실하게 나타내 주셨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요 6:47-48). 예수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구원이요 소망과 기쁨과 사랑이기에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와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기에 영생을 얻었고 함께 누리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것이 요한이 전해준 복음의 핵심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행하신 그 많은 표적 중 오직 일곱 가지만 기록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 오직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이 하나로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를 강조하여 증거하고 있다. 요한은 일곱 가지 표적으로 하나님 계시의 완전성을 충분 이상으로 증거하고 있으며 복음의 핵심과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과 의도를 차고 넘치게 충족해 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을 완전하게 확실하게 충분 이상으로 계시하여 주시는 성경 말씀을 주셨다. 성경은 완전하게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이며 더 이상의 계시가 추가될 필요도 또한 되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 진리이시다. 성경은 완전한 계시이며 완성된 계시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시기에 다른 그 어떤 계시도 추가되어서는 또한 빼거나 보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라고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20:31).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는 동의어이지만,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메시아’ 구원자‘라는 의미이다. 즉 예수님은 홀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하시는 하나로 계시는 분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주시고 세워주신 ‘구원자’라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라고 그분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하나로 계셨으며, 그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증거하고 있다. 요한은 이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 품속에 하나로 계신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 구원자로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이시며, 때문에 그분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며, 그분 안에만 생명이 있음으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5).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요 6:40). 그 누구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이가 없음을 선언하고 있다. 오직 그분 안에만 생명이 있기에 그분에게 속한 자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영생을 얻게 됨을 말씀하셨다. 이처럼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력하게 증거하는 복음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복음의 본질과 핵심을 제시하고 있으며, 하나 됨을 강조하는 복음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가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영에서 일어나는 영역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세상 지식과 삶의 지혜와 경험을 가지고 ‘자아’ 의식으로부터 사물을 판단하고 추리하고 이해한다. 그리하여 믿음 생활에서도 인간의 시각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헤아리고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한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육의 지성으로는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영원한 분이시며 창조주이시며 통치자이시다. 하지만 인간은 흙으로 피조 된 땅에서 사는 비천한 존재이기에 창조주의 계시가 없이는 절대로 스스로 하나님을 알아보거나 찾지도 믿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그분은 영이시고 우리 인간은 육적 존재이기에 그분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영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반드시 육의 관념에서 벗어나 영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아는 영역으로 전환하여야 한다. 즉 육체를 벗고 영의 사람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되는 영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세상에 있는 자가 하늘나라로 옮겨지는 기적적인 전환이다. 이러한 역동적인 전환이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으며, 또한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생명의 창조가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많은 기독교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목회자들도 과학적으로 신학 교리로 역사의 사건으로 어떤 외부적인 것들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성경의 사실을 증명하여 믿으려는 망령된 일들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세상 믿음이며 불신이다. 과학이 증명하여 그 증거에 동의하고 그 증거에 근거하여 현실을 믿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믿음은 과학으로 신학으로 역사로 고구학적으로 증거를 내놓음으로 그 증거를 보고 설득당하여 그 증거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과학의 증명을 받을 필요도 또한 과학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으로만 계시됨으로 영으로 그분을 아는 것이며, 영으로 그분을 믿는 것이며, 영으로 거듭나는 것이며, 영으로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인지할 수가 있으며 들어갈 수가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여 주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보이지 않지만 실체로 존재하고 실체로 받아들여지고 실체로 체험되고 실체로 일어나는 것이 믿음이며 그 믿음으로 우리 선지들이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1-2).

믿음이란?

요한복음에서 믿음에 관하여 ‘믿는다’라는 단어가 무려 100희 가까이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요한복음을 ‘믿음의 복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믿는다’는 뜻은 나의 의지와 노력과 열심에 근거한 주관적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객관적으로 과학이나 고구학적이나 역사적 사건의 증거에 근하하여 믿어지는 것도 아니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성령으로 뚫고 들어오심으로 나의 믿음을 격발시켜 그분을 알아보는 눈과 그분의 음성을 듣는 귀를 열어주심으로 영으로 그분을 인지하고 믿게 되는 새 생명의 창조(거듭남)를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때문에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그 선물은 오직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에게만 심어주시는 반석 같은 견고한 변함없는 믿음과 영원한 생명을 동반한다. 그리하여 바울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엡 2:8-9)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믿음은 맹목적으로 또는 의지적으로 믿는 무지도 아니며 주관적 열심도 아니다. 믿음은 내 옛사람 죄인의 죄악이 폭로되고 부인되고 죽어짐으로 하나님의 믿음이 내 안에서 공고히 자리 잡아 예수그리스도로 채워져 “나의 주가 되시며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마음으로 깨닫고 실상으로 체험하는 삶 전체를 말한다. 생명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내 안에 생명이 잉태되는 믿음을 심어버린 것이다. 그 믿음으로 주와 함께하는 실상을 내 인생에서 매일 체험하며 그분이 나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로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며, 그렇게 하나가 되어 영생을 살게 된 성도는 주님이 주시는 내적 평강으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분이 나의 주가 되시며 나의 하나님이 되셔서 내 안에 계시며 내가 그분 안에 계시는 하나가 된 복된 성도에게 그보다 더 필요하고 그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는가! 하나님이신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하나로 있다는 것이 곧 기적과 능력이며 그보다 더 큰 기적과 복은 없다. 그분은 내 안에서 말씀으로 교통하시며, 말씀으로 가르쳐주시며, 말씀으로 깨닫고 이해하게 하시며, 말씀을 붙들고 의지하게 하시며, 말씀이 이끄는 순종의 삶을 살게 하신다. 그래서 그분은 말씀이며,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말씀으로 오셨으며,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성경은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믿음은 종교적 열심과 신비로운 체험이나 기적과 표적으로 주어지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이 십자가로 성취하셨고 우리 안에 뚫고 들어와 내 마음에 겨자씨 같은 믿음을 심어주시고 성령의 권능으로 그분에게 향한 믿음을 격발시켜 주심으로 그분이 하시는 선한 사역에 우리를 동참시켜 주시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도가 추구하게 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이며, “나의 주”를 나타내고 전파하는 일이며, 무엇이 그분을 기쁘게 하여 드리는 일인지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며, 그분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일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기쁨과 감사와 평강과 한없는 사랑이 충만으로 채워짐을 체험하게 된다. 성도는 말씀으로 진리가 되어 스스로 주님의 발자취를 쫓아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을 자진하여 살게 됨을 최고의 영광으로 간주하게 되며, 자발적인 순종과 기쁨으로 그분의 말씀을 따르며, 이웃을 사랑하는 통로가 되어 주님만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갈망하게 되며, 그로 인하여 평강이 충만함을 체험하게 된다. 성령님이 내 안에서 소원을 두고 열심을 내는 것이지 내가 열심을 내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임을 성도는 알게 됨으로 그분의 열심에 동참하는 일로 영광을 받게 됨으로 주님은 성령시대를 사는 우리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믿음은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성령으로 뚫고 들어오심으로 믿게 되는 것임을 나타내어 주님은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라고 성령을 제자들 안에 불어넣어주신 것이다. 즉 너희 주관적 의지와 노력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여야만이 너희는 비로소 나를 믿게 되며, 나의 믿음으로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될 것이며 그 상태가 바로 평강이며 복이라는 말씀이다. 그 믿음은 주님이 주신 믿음이기에 의심이나 두려움이나 근심 걱정이 없는 평화로 임하는 것이기에 주님은 3번이나 반복하여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찌어다”라고 절대적 평강을 선물하여 주신 것이다. 그 ‘평강’은 주님이 십자가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신 완성된 완전한 믿음을 선물로 주신 하늘나라의 평강이다. 즉 주님이 완료하셔서 믿음으로 주시는 영생을 살게 되는 영원한 평강이다. 그렇게 성령님의 임재로 마음에 은혜의 평강으로 충만한 자에게서 나오는 믿음의 고백이 바로 도마의 고백이다. “주는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 첫째는, 나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자신의 전부를 나에게 주신 나의 생명이시며, 사랑이시며, 나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나의 영원한 주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둘째는 나를 당신에게 속한 영원한 자녀로 영원한 신부로 낳아주신 하나님이시며 영원히 나와 하나로 영생을 살게 됨을 확신하는 믿음이며 그 믿음으로 누리게 되는 내면적 평강을 말한다. 모든 것을 초월하여 아버지 안에서 신랑 예수 안에서 누리게 되는 영적 평강이며 그 평강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영원한 평강이며 오직 당신의 자녀들에게만 주시는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