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깊은 영적 의미

요한복음 (요 21:15-17) 인간은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15. 10:00

요 21: 15-17

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한복음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바로 사랑과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덮음과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이 제자들을 끝까지 품어주시는 사랑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인간의 열심과 노력과 행위를 배제하여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되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복음의 핵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6-17)라고 성경 전체를 사랑과 은혜로 제시하고 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이며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선물로 우리에게 입혀진 은혜와 사랑임을 강조하고 있다.

베드로의 연약함과 불가능함

모든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님을 실망시키는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된다. 그럼에도 주님은 끝까지의 사랑으로 베드로를 쫓아가 생명의 말씀과 사람을 낚는 어부를 상징하는 떡과 물고기를 먹이시면서 어둠에 있는 베드로를 빛으로 이끌어내어 사랑을 입혀 결국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 버리시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일거일동을 지켜보면서 항상 앞장서서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맹세한 수제자였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눅 22: 33).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5). 이와 같이 베드로는 주님에 대한 충성심을 고백하였고, 주님이 잡혀가는 현장에서 검을 뽑아 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는 담대함으로 주님을 지키려고 한 자였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11:27)라는 믿음으로 신앙고백까지 한 수제자였다. 그런 베드로가 결국 주님을 저주하면서 배신하고 다시 옛사람 어부로 돌아간 것이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성함과 전지전능하심에 압도되어 그 능력을 힘입어 대업을 이루고자 하는 야망에서 출발하여 “주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겠다”라고 맹세한 것이지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격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여실히 폭로된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의 기적과 능력을 빌어 높은 자로 승진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이 로마제국을 뒤엎고 다윗 왕국을 회복하면 누가 예수님의 우의정과 좌우정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다투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자신의 기대와 완전히 어긋나게 예수님은 이태까지 행하셨던 능력과 기적들을 전혀 행하지 아니하시고, 순순히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꿈이 무너지자 이에 분노하여 검을 휘둘러 제사장의 하인의 귀를 잘라버리는 폭력으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부터 심문을 받는 현장에서 주먹으로 맞고, 침 뱉음을 받는 조롱과 수모를 당하시면서 아무런 대항을 하지 않은 그 나약하고 무력한 모습에 크게 실망한 것이다. 베드로는 3년을 투자하여 쌓아온 모든 공로와 기대와 꿈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허탈함과 실망과 원망과 같은 복잡한 마음으로 더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며, 자신의 마음에서 미련 없이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는 자라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는 자로 돌변한 것이다. 세 번 부인했다는 것은 완전히 자신의 마음에서 지워버렸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내가 믿는 대상이 나보다 더 큰 능력의 소유자여야 하며, 인간은 그 능력을 빌어 자신의 유익을 챙기려는 도구로 삼아 버리게 되며, 그 대상이 나의 유익을 챙겨주지 않을 때에는 완강한 부인으로 이어지며, 나에게 불필요한 존재로 인식될 때에는 가착 없이 버리게 되는 인간의 사악함과 추함이 베드로에게 나타난 것이다.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은 실수가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는 분노와 실망에서 나오는, 자신의 마음에서 지워버리려는 강력한 부정이었다. 베드로는 그렇게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는 우리 죄인의 모습이다.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탐심과 욕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생각하는 모든 것이 오로지 나를 위한 유익에서 출발함으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추악한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막 7:22-23).

주님은 베드로를 온전한 제자로 세우기 위해 먼저 그의 내면에 숨겨져 있었던 세속적인 야망과 유대주의를 부수기 위해 예수님을 3번 부인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과연 네가 나를 위해 네 목숨을 버릴 수 있겠느냐? 내가 분명히 너에게 말하지만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하게 될 것이다”(요13:38)라고 말씀하심으로 베드로의 내면에 숨겨진 인간의 추악함을 수면으로 확 드러내신 것이다. 요한복음 전체는 인간의 행위를 추구하는 유대주의 율법주의 인본주의 패역함과 추악함과 독사와 같은 포악함을 철저히 폭로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이 선물로 입혀지는 은혜를 집요하게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열심과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인간의 열심과 행위가 부정당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만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가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믿는 것이며, 나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열심히 배우고 깨닫는 신앙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기독교는 인간의 가능성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일을 도와드리며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는 내 의지와 내 열심과 내 노력을 하나님께 보여드리고 보상과 칭찬을 얻어내는 종교가 아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일에 힘쓰는 것이며 온전히 믿는 믿음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교회는 반대로 인간의 가능성과 열심과 의를 부추겨 세우고, 모델로 세워놓고,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자”라는 표어를 들고 인간의 행위와 공로를 추구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자 열심히 하나님을 알자”라고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데, 교회는 정 반대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겨드리자”라는 표어를 들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동원하여 눈에 보이는 업적들을 이루어내고 있다. 기독교는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영생을 얻는 일이다’(17:3)라고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주셨다.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나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티끌의 존재임을 인식하고 티끌로 내려가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추구하는 신앙이며, 하나님의 열심과 역사하심에 순종하며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며 오직 그분에게 속한 자로 거듭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행위와 의를 내 세우는 율법주의와 인본주의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완전히 깨지고 부서지고 공격당하고 죽음으로 하나님의 의와 선과 은혜와 사랑과 열심만이 오롯이 나타나는 것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베드로와 제자들이 주님을 떠나 흩어지게 됨을 미리 말씀하여 주셨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 26:31). 이 세상이 예수님을 끌고 가 십자가에 목 박을 때 제자들은 두려움에 모두 흩어져 있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도 여전히 예수님을 포기하고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 옛사람 어부의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한시도 포기하시지 않으셨으며, 그들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셨다. 주님은 다시 어부로 돌아간 베드로의 옛사람을 향하여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본 이름을 부르셨다. 예수님은 처음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때 그의 본 이름 ‘시몬’을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바꾸어주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베드로)라고 부르겠다"(요1:42). 그런데 주님은 다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셨던 처음 자리인 갈릴리로 찾아와 베드로를 향하여 다시 본 이름 “시몬”이라고 부르셨다. 그리면 주님은 왜 베드로를 굳이 “시몬”이라고 부르셨으며, 그 뜻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시몬’이라는 이름의 뜻

창세기에서 야곱이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마지막으로 열두 아들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시므온(시몬)과 레위에게는 축복이 아닌 저주를 내린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7). 즉 시므온과 레위를 이스라엘에서 흩으시겠다는 말씀이다. 시몬과 레위는 그들의 누이 디나의 강간 사건에 보복하여 세겜 추장과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시키고 세겜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가장 힘들어하는 삼 일째 되는 날에 칼을 가지고 세겜 마을을 기습하여 누워있는 모든 남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양과 소와 나귀, 귀중품들을 다 약탈한 것이다. 그 일로 인하여 시몬과 레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된다. 시몬과 레위는 자신들의 유익에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면 모조리 없애버리려는 인간의 잔인함과 다른 이들에게 아무 때나 칼을 휘두르는 모든 인간의 포악함의 모습이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지키겠다는 이유로, 사실은 자신의 꿈과 야망을 지키기 위해 검을 휘둘어 다른 이의 귀를 잘라버리는 잔인함을 드러낸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오른팔이 되어 세상을 지배하려는 야망이 사라지자 이내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완전히 부인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을 완전히 버리고 갈릴리 옛 어부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런 베드로를 주님이 찾아와 주셔서 다시 “시몬”이라고 부르심으로 베드로의 처음 자리 실체를 돌이키게 한 것이다. 즉 네가 어디에서 구원받았는지를 돌아보게 하셨다.

주님은 멸시와 천대와 가난과 흑암의 상징인 갈릴리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부르심으로 그들의 본래 실체를 상기시켜 주시고, 당신의 끝까지의 사랑으로 그들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어떤 자격이나 공로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택함을 받았다는 그 이유 하나로 끝까지 도망 다니는 제자들을 끝까지의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것이며, 이것이 구원이이며 은혜이다. ‘시몬’은 우리 모든 죄인들의 상징이다. 모든 인간의 패역함과 포악함과 잔인함과 야망, 즉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죄인들의 대표이다. 그런 시몬 지파가 유다 지파에 의해 기업을 받게 된다. 이는 장차 유대 지파에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제물로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되는 은혜를 제시한 것이다. “시므온 곧 시므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여 49:1). “시므온 자손의 이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취하였으니 이는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시므온 자손이 자기의 기업을 그들의 기업 중에서 얻음이었더라”(여 49:9). 이와 같이 장차 유다 지파로부터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성취로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기업을 얻은 그 “시몬”이 바로 우리라는 것을 계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굳이 베드로를 “시몬”이라고 불러주신 것이다. 즉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존재임을 깨달으라고 베드로를 숯불 앞에 이끌어내어 “시몬”이라고 불러주신 것이다. 너는 내가 ‘베드로’라는 반석으로 세워주지 않으면 흩어져 먼지같이 없어지는 무가치한 존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시몬’ 그 자체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숯불 앞으로 베드로를 이끌어내어 ‘시몬’이라고 부르셨다. 그렇게 불가능한 흩어져 없어질 수밖에 없는 시몬에게 십자가의 완전한 사랑을 입혀주시기 위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야만이 살 수 있는 존재이다

예수님은 숯불 앞에서 3번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시몬’이라 부르시면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라고 물으신다. 베드로는 항상 앞장서서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제일 사랑하는 자로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맹세한 수제자였다. 그리하여 주님은 ‘과연 네가 말한 그대로 그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물은 것이다. 네 마음으로는 나를 사랑하기를 원하였고 그렇게 하려고 열심을 부렸지만 사랑은 야망이 아니라 희생이며, 의지적 노력과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인이며,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로 나오는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사랑임을 깨닫게 하는 질문이었다. 오직 주님만이 사랑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질문이다. 베드로는 시험이 오고, 고난이 닥치면, 언제든지 주님을 배신하게 되는 인간의 비겁함과 연약함을 깨닫게 됨으로 자신은 주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오히려 주님이 끝까지 베드로를 찾아와 사랑으로 덮어주시고 품어주심을 깨닫게 된다. 즉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자임을 처절하게 깨닫게 됨으로 “주여 모든 것을 이미 아시오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간은 다만 그분의 사랑을 받아야 만이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해 베드로에게 3번씩이나 똑같은 질문으로 사랑을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의 질문에서 도저히 주님을 사랑할 수 없는 자로 폭로되면서 자신을 완전히 부인하는 자리로 내려가게 된다. 베드로는 주님의 기적과 능력을 빌려 자신의 꿈과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맹세한 자신의 추하고 비겁하고 부끄러운 속마음이 완전히 드러나자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지는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라고 그 확인의 대답을 주님에게 떠넘긴 것이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제 주님을 사랑할 용기와 확신이 서지 않았기에 주님이 물으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에 대하여 대답하기가 고통스러워진 것이며 그 대답을 회피하여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간의 힘과 노력과 열심과 의지에서 격발되어 나오는 감정적 ‘사랑’은 나의 유익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오직 나를 위한 '자기사랑'이다. ‘자아’에서 격발되어 나오는 그 사랑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신의 꿈과 야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사랑한 것이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베드로를 통하여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이다. 인간은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절대로 나 외에 다른 이를 사랑할 수가 없으며 더더욱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희생하는 아가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심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사랑이시며,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야만 이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나타내어 보여주신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오직 죄일 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하늘나라의 ‘사랑’이란 처음부터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사랑하셔서 사랑으로 구원의 언약을 세우시고, 사랑으로 구원의 뜻을 자신을 희생하시는 십자가로 완성하시고, 그 사랑을 우리에게 입혀주시기 위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당신의 영으로 우리를 새사람, 즉 당신에게 영원히 속하는 자녀로 신부로 거듭나서 하나가 되는 방법을 택하셨다. 그러므로 목숨을 걸고 사랑을 고백하는 이는 인간 베드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맹세하여 주신 ‘언약’이며, 그 언약을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는 희생 제물로 성취하셨으며,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하나가 되는 연합으로 사랑을 확증하시고 영생을 입혀주신 것이다.

성도는 베드로와 같은 실수와 실패를 통하여 “나는 당신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존재이며 오로지 당신의 사랑을 입어야만 이 살아갈 수 있는 당신에게 속한 자입니다”를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내가 바로 시몬과 같이 나의 유익과 야망을 위하여 언제든지 칼을 뽑아 야비한 방법으로 다른 이들을 해치고 죽이는 잔인한 죄인이며, 나의 유익을 위해 언제든지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버릴 수 있는 사악한 죄인임을 처절하게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다. 성도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임을 인정하고, 내 안에 깊이 숨겨진 추악하고 더러운 죄악들이 폭로당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꼭 붙드는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먼지에 불과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어쩌면 더 가시적이고 더 위선적인 유대주의와 같은 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끝까지의 사랑이 나를 붙들고 계심을 깨닫는 것이며,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 여정에 있는 성도의 실존이다. 주님은 그렇게 자신만을 사랑한 ‘시몬’을 새롭게 거듭난 ‘베드로’로 온전히 세우시기 위해 시몬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의 탐심과 야망, 자아를 추구하는 모든 가능성을 철저히 깨고 부수는 작업을 먼저 하신 것이다. 욥처럼 조금의 여지도 없이 완전히 묵사발 되게 부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옛사람을 부인하는 십자가 죽음이다. 그렇게 주님의 사랑이 강하게 붙들어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이 세상 밑바닥 시궁창에서 허우적거리는 죽은 존재라는 자신의 살체를 완전히 깨닫게 하신다. 그리하여 주님은 숯불 앞에서 3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시몬“이라고 부르시면서 시몬의 옛사람을 부수는 작업을 먼저 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새사람 다시는 주님을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순교로 주님을 사랑하는 ‘베드로’ 사도로 거듭나게 하신 것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을 세 번 배신한 베드로는 주님이 물으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세 번 질문에 똑같은 대답으로 자신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한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신 사랑은 인간 베드로에게서 나올 수 있는 사랑이 아니며, 주님 또한 인간적인 사랑을 원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십자가에서 가장 쓰디쓴 피의 대가를 지불하신 그 한없는 사랑을 입혀주시기 위한 간절함으로 사랑을 물으신 것이며, 그 사랑만이 주님과 하나가 되어 생명을 잉태하는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나를 사랑하느냐?”를 물으시고 그 사랑의 내용이 바로 “내 양을 치고 내 양을 먹이며” 주님과 똑같이 십자가 순교로 정착됨을 미리 제시하여 주신 것이다. 주님이 먼저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하늘나라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지옥 땅에 내려오셨으며, 우리를 대신하여 온갖 고통과 수치와 수모를 모두 당하시고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가장 쓰디쓴 대가를 저주의 십자가에서 지불하신 것이다. 그 사랑의 절정은 우리의 죄를 자신에게 전가시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죄의 고통과 죽음을 당하시고, 우리에게는 영원히 사는 생명을 전가시켜 주시고 오직 그분의 사랑으로 자유와 평강을 누리게 하신데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첫 마디로 “너회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평강을 내려주셨다. 이제부터 자신의 생명으로 성취하신 즉 피의 대가로 지불하신 그 영원한 구원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다시 살려내어 영원한 은혜의 평강과 사랑을 입혀주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즉 그분이 사랑과 평강의 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영원히 우리와 동행하는 그 상태가 바로 사랑이다. 십자가로 완성하신 영생을 사는 완전한 사랑을 입혀주시기 위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반복하여 세 번씩이나 물으신 것이다.

인간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맹세하였지만 이내 주님을 배신하고 다시 옛사람으로 돌아갔다. 베드로는 수시로 실수하고 무너지고 주님을 실망시키는 자였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막으려고 하다가 주님으로부터 “사단에 물러가라"라는 호된 질책을 받기도 하고, 물 위를 걷다가 바다에 빠지기도 하고, 주님이 잡혀가는 그 중요한 순간에 주님이 그에게 기도할 것을 간절히 부탁하였지만 잠만 자는 자로 주님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계집종 앞에서 주님을 저주까지 하면서 3번씩이나 완전히 부인하였으며,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직접 보고도 갈릴리로 도망가 고기 잡는 끝까지 주님을 실망시키는 실패한 자로 주님 앞에 서 있은 것이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는 주님의 질문에 자신은 “주님을 사랑한다"라고 3번씩이나 끝까지 우긴 것이며, 주님은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면서도 당신의 사랑으로 '시몬'을 '베드로'로 다시 회복시켜 사랑하는 자로 수궁하여 주신 것이다. 바로 우리 성도의 모습이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매일같이 고백하지만 동시에 매일같이 주님을 실망시키고 주님을 배신하는 모순된 삶을 반복하고 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돌아서면 주님보다 나를 위한 유익과 이익들을 먼저 생각한다. 인간은 본성이 악함으로 절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알 수도 더더욱 사랑할 수도 없다는 것을 매일 매 순간마다 깨닫고 됨으로 바울의 고백과 같이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다"( 고전 15:10)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열심과 노력과 주관적 의지로 하나님을 믿고 섬겨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1-12). 그러므로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끊임없이 실수하고 실패하고 불가능한 제자들을 집요하게 끝까지의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품어주신 것이다. ‘밤새 고기를 잡아도 아무것도 잡지 못한’ 텅 비어있는 그물과 같은 제자들의 실체를 보여주시고 그들의 모든 노력과 수고와 열심이 아무런 도움이 없이 허사로 공허로 헛된 것으로 종결짓게 됨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잡지 못한 텅 비어있는 그물과 같이 헛된 수고를 하고 있는 공허한 그들에게 말씀을 던져주셨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자 153 마리의 물고기가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혀 올라온 것이다. 제자들이 한 일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능력을 발휘하여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가가 그물 안으로 모여드는 구원의 완성으로 제자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거기에 베드로와 제자들이 한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종뿐이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시작되고 이루어지고 완성된 복음의 진리를 보여주시는 그림이다. 이것이 구원이며 불가항력적 은혜이며 집요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하여 요한복음의 마지막 결론이 베드로에게 3번 사랑을 물으심으로 십자가로 성취하신 완전한 사랑을 베드로와 제자들의 마음에 각인시켜 주시는 것과 그럼에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주여 이 사람은(요한) 어떻게 되겠삽나이까”라고 엉뚱한 질문으로 제자들이 서로 온신각신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제자들은 여전히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무능한 자로, 그들이 마음이 엉뚱한데 가 있는 불가능한 자이지만 주님의 끝까지의 사랑이 집요하게 그들을 좇아가 품어주시는 한없는 주님의 사랑으로 결론을 짓고 있다.

사랑은 언약이며 계명이다. 사랑의 계명을 완성하신 분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연거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다. 이 질문은 곧 너는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나와 하나가 되는 영원한 사랑을 입어야만 이 비로소 나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알게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즉 너 자신을 사랑하는 ‘자아’에서 벗어나 주님의 사랑으로 새롭게 거듭나야만 이 구원과 생명을 입어 사랑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진리를 제시하고 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사랑이시며 생명이시며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이는 구약에서 언약으로 율법의 강령으로 이미 제시하여 주셨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니 너는 마음을 다 하고 뜻을 다 하고 성품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신 6:4-5). 신약에서 주님은 율법의 강령을 새 계명으로 제자들에게 명하여 주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35).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근거를 계명으로 제시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14:23).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랑’을 계명으로 주셔서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로 완성하심을 제시하셨다.

타락한 죄인의 마음에서는 자신을 희생하는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기때문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와 주셨으며, 사랑으로 십자가에 자신의 전부를 희생하는 그 생명의 사랑을 성취하셨으며, 사랑으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즉 당신의 자녀로 신부로 거듭나게 하시고 영원히 하나가 되는 연합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인간에게서 격발되어 나올 수가 없다. 사랑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며, 그 사랑은 영적으로만 감지되며, 오직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입혀지는 오직 하나님의 백성만이 받을 수 있고 감지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사랑이며, 하나님은 그 영원한 사랑을 언약으로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십자가로 성취하여 주셨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도 전에, 무슨 의를 행하고 업적과 공로를 세우지도 않았음에도,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없이 그분이 먼저 불가항력적 은혜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거처를 함께하여 주시는 침노로 사랑을 이루어 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나는 유대주의 자들과 같이 율법을 지키고 행한 의도 없고, 대가를 지불한 것도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도 못하였으며,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이란 하나도 없는 죄인 그 모습 그대로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덮침으로 “내가 바로 죄인입니이다”라는 자신의 정체를 깨닫고 죄를 회개한 것뿐이며, 그 회개를 미쁘게 봐주시고 오직 당신의 사랑으로 나를 품어주심으로 당신의 영원한 자녀로 거듭나게 하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8-9). 주님이 성령으로 먼저 우리 안으로 뚫고 들어오셨기에 나는 비로소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고, 그분이 바로 나를 낳아주신 ‘아바 아버지’임을 알아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충족시킨 존재는 우리가 아니다.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구약성경 전체가 입증하고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도 없음으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킨 자는 예수님 자신임을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십자가 죽음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이루시고 우린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와 하나로 거처를 삼으셨기에 그분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를 계명을 지킨 자로 인정하여 주신 것이다. 인간이 지킬 수 없음으로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다 지키시고 완성하시고 성취하시고 우리 안에 성령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를 거처로 삼으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자가 된 것이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신”것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셨다. 그분이 십자가 죽음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셨기에 그분 안에 있는 우리도 계명을 지킨 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페하셨으니”(엡 2:15). 즉 인간이 육신이 연약하여 지킬 수 없는 법을 이루시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 하사”(롬 8:3), 죄로 정한 몸이 율법에 대해 완전히 죽음으로(롬 7:4), 하나님의 공의의 법으로는 율법의 모든 계명을 십자가 죽음으로 완전히 이루시는 동시에 우리에게는 율법이 페하시어,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완성과 폐함’의 선포였다. 이는 율법의 일부분은 페하시고, 일부분 특히 십일조와 같은 조항들은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율법의 전체를 몽땅 완전히 “다 이루셨다"라는 완성의 선포이다. 십자가 죽음으로 “다 이루었다”는 것은, 완전히 끝났다, 완전히 철저히 온전히 이루셨다는 선언이다. 율법의 계명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영원한 해방과 자유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 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 6-7). 즉 율법 아래 있던 내 옛 죄인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갈 3:13). 그리하여 바울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1,4).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증언하고 있다(롬 6:14). 만약에 여전히 우리가 율법을 지킬 의무가 주어지고 십일조와 같은 율법의 조항들을 지켜야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헛된 죽음이 되고,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한 그 선언은 거짓이 되는 것이며, 십자가 구원 성취의 완료성을 부정하는 것이며, 그분은 아직도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미완성이 되는 것이며, 십자가의 구원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그분은 부활하셔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매일을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제사에 의미를 두고 그 제사를 기념하는 무의미한 것들을 교회의 중요한 행사로 거행하고 있다. 나와 함께 하시는 그분을 다시 십자가에 매 달라 놓고 제사를 지내는 행위는 멈추어야 할 것이다. 부활한 예수님이 내 안에 나와 함께 하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것과 그분과 매일 사랑을 고백하는 영적 교제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우리에게 사랑을 입혀주시는 일이 그분의 행사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셔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당신의 자녀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사랑으로 언약을 맺으시고, 사랑으로 구원을 성취하시고, 사랑으로 영생을 입혀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항상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라는 전제하에서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에게 향한 사랑의 계명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입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십자가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이 곧 ‘이웃 사랑’이다. 주님께서 자신의 육체로 사랑의 계명을 완성하여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셨기에 사랑의 근원은 오직 예수님 자신이심을 제시하셨다. 오직 사랑으로만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되어야만이 새 생명이 탄생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성경에서 제시하는 사랑의 개념은 뜻이 하나가 되고 존재가 하나로 연합이 되어 영원을 사는 영생을 말한다. 오직 사랑으로만이 하나가 되며 하나가 되어야 생명이 잉태되기 때문이다. 창세기 첫 인간 아담과 하와의 연합에서 사랑과 생명의 잉태를 계시하여 주셨다. 아담 안에는 이미 하와가 들어 있었다. 아담이 잠이 들 때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탄생시키시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창 2:23)라고 아담의 생명으로 하와가 지어졌음을 선포하셨다. 이는 우리 성도는 처음부터 예수 생명 안에 하나로 있었던 존재이며, 그분의 생명으로 탄생된 그분에게 속한 자이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하나로 영생을 부여받은 신부임을 첫 인간 창조에서 이미 제시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닫고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라고 아직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써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그분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아들’로 탄생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이 사랑의 원리를 제자들에게 다시 새롭게 제시하여 주신 것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하여 너희를 찾아서 이 세상 땅에 내려왔고, 죄와 사망에 빠진 너희를 구원하여 다시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을 박았으며, 이제 너희에게 향한 나의 사랑이 성취됨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이제 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 사랑하게 될 것이며, 그 사랑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는 하늘나라로 이어지는 영생을 사는 사랑임을 계명으로 제시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3번씩이나 자신을 배신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심으로 너는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 나의 완전한 사랑을 입어야만이 비로소 사랑하는 자로 완성됨을 제시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끝까지의 사랑이 부족한 자신을 품어주심으로 한없는 주님의 사랑으로 “내가 주님을 사랑 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나의 의지와 힘으로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음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럼에도 나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당신의 사랑이 나를 굳게 붙들고 있기에 나는 이제 당신의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라고 주님이 주신 사랑으로 고백한 것이다. 베드로가 “주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할 때 주님은 그 고백은 너에게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고백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주님을 배신한 베드로가 주님 앞에서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한 그 고백은 베드로의 의지에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 주님이 베드로를 사랑하는 자로 만들기 위해 주님이 주신 사랑의 고백이었다.

우리는 절대로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자임을 베드로를 통하여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 모든 인간은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며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며 이 세상 삶의 원리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는 반대로 나만을 사랑하고 나만을 위해 사는 “나”라는 속박과 집착에서 벗어나서 나를 부인하고 나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영생을 사는 자로 새롭게 거듭나게 하시며, 그것이 바로 ‘사랑’임을 제시하신다. 즉 성령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오직 나만을 사랑하던 내 옛사람을 부시고 부정하고 죽이는 일을 먼저 하신다. 나만을 사랑하던 내 옛사람이 죽어야 만이 영생의 주님과 하나로 함몰되어 새로운 생명 즉 영생을 사는 생명이 잉태되기 때문이다.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두 개로 나뉘는 일이 없는 것과 같이 반드시 내가 죽어야 만이 도마가 고백한 “주는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함과 같이 주님이 나의 인생 전체를 주관하시는 주가 되어 나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완성하신다. 우리의 육신은 하늘나라 삶의 원리와 정 반대되는 것만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 안에는 두 나라 두 영이 서로 배척하는 갈등과 싸움을 매일 체험하게 됨을 고백한 것이다. 성도는 “오호라 나는 공고하도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내 옛 사람 ‘자아’가 죽어져 가는 그 고통의 삶을 성도는 매일 경험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는 분명 타고난 마귀의 속성과 습성과 악한 성품이 있으며 나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에 우리는 마귀와 싸운다고 하는데 그 마귀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자아’를 굳게 세우는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을 마귀, 독사의 자식이라고 불렸다. 바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그 ‘자아’를 가리켜 ‘마귀’ ‘독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분명 주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한번 지고 한번 죽는 것인데 왜 주님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하셨을까? 바울은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표현한 것이다. 날마다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세상의 것들이 성령의 검으로 잘려나가는 세상을 향해 죽어가는 자기 부인을 매일 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성도는 예수와 함께 이 세상에 대하여서는 죽음으로 하나님에 대하여서는 산 자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내 소원과 비전과 야망을 긍정의 힘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부셔지고 포기되고 하나하나 비워져 나가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점령당하는 것이며, 그것이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이며, 그 삶이 사랑으로 정착됨으로 주님은 우리에게 오직 “사랑하라”는 계명만 제시하여 주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율법은 한마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임을 제시하셨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성취자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향한 사랑과 우리에게 향한 사랑을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생명의 희생으로 성취하셨다. 그분은 율법의 모든 세목들을 육신으로 하나하나 지켜서 완성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하신 것이다. 이 세상에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으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그 생명의 희생으로 아버지에게 향한 사랑과 우리에게 향한 사랑을 완성하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새 계명으로 우리에게 주셨으며 그 계명은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계명이기에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신 것이며, 이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와 하나로 연합을 이루심으로 우리를 사랑의 계명을 지킨 자로 인정하여 주신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 의 진정한 의미

주님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셔서 하나로 함께 계셨기에, 똑같이 우리를 사랑하여 하나가 되게 하심이라고 말씀하신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2-23). 그런데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를 그토록 사랑하시고 우리를 더욱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는 방법으로 사랑을 나타내시고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아버지께서 주님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는 똑 같은 방법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십자가 삶으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과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느니라”, “내가 너희를 보냄은 양을 이리가운데 보냄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씀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과 같은 원리로 주님도 우리를 이 세상 이리 가운에 보냄으로 이 세상으로부터 주님이 먼저 당하신 그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핍박과 십자가 죽음으로 이끌려 가게 됨을 제시하여 주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하늘나라의 사랑의 원리이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이 세상에서 복을 받아 형통하는 평안한 삶, 안정된 삶, 질병과 고난과 고통이 없는 삶, 즐기고 누리는 삶이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사랑과 복으로 간주하고 열심히 이 세상 저주와 멸망의 복을 달라고 특심으로 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도는 절대로 그 저주의 복을 누리는 마귀의 자식이 아니다. 그 삶은 저주이며 파멸과 멸망임을 성경은 계속 반복하여 보여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식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님은 창세전부터 함께 한 그 영원한 사랑을 우리에게 입혀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며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와 나와 하나로 연합을 이루신 것이다. 그렇게 그분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인정되어 그분의 한없는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흘러주는 통로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라고 말씀하심으로 오직 주님과 하나가 된 연합의 사랑만이 생명을 잉태하는 이웃 사랑이 가능함을 제시하셨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심에 있어서 ‘사랑’을 토대로 이루셨기에 성경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바로 “사랑”이며 "은혜"이다. 그분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성도에게서 나오는 것이 오직 주님의 사랑이기에 그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한 자”라고 불러주시는 것이며, 그분의 사랑을 이웃에게 흘러주어 생명이 잉태됨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인정하여 주시는 것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