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깊은 영적 의미

요한복음 (요18:1-11) 기드론 시내와 동산의 의미/ 베드로의 마귀적 역할/ 스스로 잡히시는 예수님/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16. 09:33

요 18:1-11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2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3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한은 왜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생략 하였을까?

사도 요한은 다른 공관 복음서들과는 달리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특히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기도드리는 장면이든가,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두실 때 외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예수님의 그 애절한 외침이 모두 생략되어 있다. 요한은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 전체를 생략하여 동산에서 바로 잡혀가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바로 아래와 같은 부분들이 생략되어 있다.

마 26:36-47 (막 14:32-36, 눅 22:39-46)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눅 22: 38-39: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이와 같은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고민하시는 예수님의 그 아픔과 고통, 아버지에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는 장면 전체가 생략되어 있다. 다른 공관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기록함으로 이제 당신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시고 죄인이 되어 육신으로 당하셔야 할 십자가 수난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는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절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오셨음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하지만 창조주이신 그분이 모든 권세와 권능을 지니고 계셨음에도 온전히 내려 놓으시고 이제 피조물인 인간에게 도살당하는 양으로 매 맞음의 찢김과 춤 뱉음의 멸시와 조롱과 온갖 수모를 견디어 내셔야 하시기에 그 마음의 번민을 숨긴 없이 그대로 표현하신 것이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26:38),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눅22:39). 이와 같이 그 마음의 번민을 표출하신 것은 장차 성도도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그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며, 그때 그 마음의 번민을 가지고 아버지께로 나가서 순종의 기도로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여야 함을 본보기로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과 초점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요한은 예수님의 위대하심과 그 전능하신 하나님 되심을 부각시키며, 오직 예수만이 빛이요,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시며, 참으로 우리의 구주이시며, 오직 그분에게만 구원과 생명이 있음을 증거하는 데에 초점을 둠으로 나약하게 보이는 부분들을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6:35); ‘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의 강이라’(7:38); “나는 세상의 빛이라”(8:12); “나는 양의 문이라”(10:7); “나는 선한 목자라”(10:11).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14:6). 이와 같이 요한은 예수님의 선언으로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절대적 진리이시며 구원과 생명이심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증거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이제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말씀을 생명의 떡으로 먹이실 것이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주어 당신의 신부로 거듭나게 하실 것이며, 우리의 빛과 길이 되셔서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실 것이며,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영생으로 하나로 살 것임을 강력하게 증거하기 위하여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는 부분을 과감하게 생략한 것이다. 요한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에게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는 제자로서 예수님은 진정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사랑이심을 한마디로 복음의 진수로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기드론 시내와 동산의 의미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2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17장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의 뜻을 성취하시는 대제사장적 기도를 마치신 후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 감람산에 오르셨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이제 자신이 로마군에게 잡혀가야 하는 그때를 위하여 감람산으로 오르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애절한 마음으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순종의 기도를 하시고 자신을 잡으려고 군대를 이끌고 온 세상 권력 앞에 서신 것이다. 요한만 다른 공관복음과 다르게 예수님이 감람산에 오르신 것을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동산”으로 오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굳이 예수님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 동산으로 오르셨다고 기록함으로, 예수님이 비록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지만 곧 부활하심으로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는 확신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요한은 감람산으로 가신 것을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가셨다'라고 기록하고, 이 사건을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배신과 아히도벨의 배반으로 ‘기드론 시내’를 건넌 사건과 연관시켜 무엇인가를 계시해 주고 있다. “다윗이 잇대에게 이르되 앞서 건너가라 하매 가드 사람 잇대와 그 종자들과 그와 함께 한 아이들이 다 건너가고 온 땅 사람이 대성통곡하며 모든 인민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삼하 15:22-23).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어 온 백성의 대성통곡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 온갖 고난을 당하게 된다. ‘기드론 시내’는 다윗에게 있어서 아들에게 배신당하여 쫓기는 배신의 강이요 슬픔과 고난의 강이었다. 결국 압살롬은 나무가지에 머리가 꽂혀서 요압에게 살해당하고 아히도벨은 목매달아 죽는 패배로 다윗이 승리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슬픔과 고난을 상징하는 기드론 시내를 건너 유다에게 팔려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게 되지만 다시 부활하여 승리하심으로 이 세상 사단의 권세는 패배를 당하게 됨을 계시하고 있다. 요한은 지금 다윗의 상황을 의도적으로 주입하여 예수님이 제자 유다에게 배신당하고, 유대인들이 로마군과 결탁하여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온 슬픔과 수난의 강이었음을 계시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을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고난의 길에 들어섰음을 “기드론 시내”를 건너셨다고 표현한 것이며, 반드시 예수님의 승리로 실패의 에덴동산이 구원이 이루어지는 은혜의 동산으로 회복됨을 증거하기 위한 의도로 감람산을 ‘동산’으로 표현한 것이다.

요한은 감람산을 ‘동산’이라 부름으로 창세기 에덴동산과 연결하여 우리에게 의미 깊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에덴동산’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사단의 유혹에 빠져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 빠뜨린 저주가 임한 동산이었다. 하지만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이 땅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버지가 주시는 십자가의 희생 잔을 마시기로 정하심으로 예수님의 기도대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않는”(18:9) 구원이 이루어지는 은혜의 동산으로 회복된 곳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고난의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18:11)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에덴동산은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사단의 노예가 된 곳이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아버지가 주시는 희생의 잔을 마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이 사단의 결박에서 풀려나와 아버지의 품에 안기게 되는 회복의 동산이며, 사단이 예수님 앞에 꺼꾸러지는 예수님의 승리를 선포하는 동산이었다. 그리하여 어둠의 세력들이 예수님이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라고 선포하자 그 거룩한 발아래 모두가 쓰러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18:6).

이와 같이 요한은 이제 어두움이 곧 지나가고 동산에서 새 창조가 일어나게 될 것임을 증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어둠을 상징하는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새 생명의 창조가 일어나는 “동산”으로 갔다고 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기드론'은 히브리어로 ‘흑암’ '어두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어두움 밤에 '어두움의 강'을 건너셨다. 빛으로 오신 주님이 이제 자기 백성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사망의 어둠으로 들어가 십자가 고난을 겪어내어 통과하셔야 하므로 어두움의 칡흑 속에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신 것이다.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18:1).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어둠의 죄악에 빠져 죽어가는 신부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이 스스로 흑암의 죽음으로 들어가셨으며, 하지만 다시 부활하셔서 당신의 신부들을 새 생명으로 살려내는 회복과 화목이 동산에서 이뤄질 것이며, 그렇게 온통 어둠으로 가시와 찔레로 뒤덮인 저주의 동산이 영원한 빛으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회복되고 완성됨을 계시하여 “기드론 시내”와 “동산”을 의미 깊게 기록한 것이다.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간구하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18:9)함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주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18:8)라고 명하심으로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이 살아올라오는 구원을 제시하신 것이다.

참 빛이시며 하나님이신 예수님 발아래 엎드러지는 자들

6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 로라(2) 하실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 로라(3)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예수님은 어둠의 죄와 사망에 늪에 빠져있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어둠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 어둠은 빛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오히려 자신들이 빛이라 우기고 손에 “등과 해와 병기”를 들고 참 빛을 꺼버리려고 찾아온 것이다. 요한은 그 ‘기드론(어둠)’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를 들어서 지금 그 어두움이 어떻게 빛을 대적하는가를 그려내고 있다.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18:3). 어두움이 자신들을 빛으로 가장하고 ‘등과 횃불’을 들고, 이 세상 힘을 상징하는 “군대”를 이끌고 손에 병기를 들고 참 빛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잡으러 온 것이다. 여기서 “군대”는 약 600명가량의 로마군 보병 병력을 가리킨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가 로마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하속들을 데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잡으러 온 것이다. 여기서 가룟유다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대적한 타락한 마귀를 상징한다. 예수님은 가룟유다를 마귀라고 부르셨다(요 6:70-71). 로마군대는 세상 권력을 대표하며,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패역한 종교적 권력자들을 대표한다. 역사상 이 세 세력이 합심하여 줄곧 기독교를 핍박하였으며(중세 암흑시대), 말세인 지금도 이런 일이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다.

요한은 특별히 어두운 밤에 그들이 손에 “등과 해와 병기”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다고 강조함으로 그들이 바로 어둠에 속한, 즉 죄와 사망의 늪에 빠져있는 자들임을 드러낸 것이다. 하늘의 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음에도 그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곧 꺼져 없어지는 등과 횃불을 손에 들고 빛이라 우기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참 빛 앞에 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로 어둠이며 그 어둠을 지키기 위해 참 빛을 꺼버리는 진리를 대적하는 악한 자들이라는 정체를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세력과 권력 앞에 추호의 망설임이 없이 먼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묻는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예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기에 능동적으로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어 제물로 잡혀가기를 원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그 당할 일이 곧 창세전 아버지께서 정하신 뜻이기에 “그 당할 일을 아시고”(18:4), “내가 그니라”(18:5),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 영어로는 “I am who I am”,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반복하여 선포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며,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구원자 이심을 확실히 드러내시는 선포이다. 그 위대한 하나님 되심의 권위 앞에 이 세상 마귀와 그에게 속한 세력과 패역한 종교 권력들이 모두가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8:6).

예수님의 이와 같은 자기 드러내심, 즉 “내가 바로 그로다”라고 세번씩이나 반복하시는 하나님 되심의 주도적 선언은, 예수님은 참으로 우리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오신 메시아 이심을 확증해 주고 있다. 그들이 참 빛이신 예수님 앞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곧 꺼져 없어지는 등과 횃불을 들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운명이 곧 그 등과 횃불과 같은 멸망임을 스스로 폭로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의 거룩한 빛에 압도되어 모두가 쓰러진 것이다. 하나님의 권세와 참 빛 앞에 그들의 어두운 죄악들이 낱낱이 드러남으로 그 심판의 빛 앞에 스스로 꺼꾸러진 것이다. 장차 이 세상 어둠의 권세가 예수님 발 아래 무릎 굽고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됨을 확실히 보여주는 그림이다. 예수님은 이미 선포하셨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5:22).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예수님은 내가 곧 빛이다고 선언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그럼에도 세상은 빛을 붙잡아 죽이려고 하였으니 스스로 자신들의 파멸과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요한은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이시며, 오직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복음서 시작부터 끝까지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다. 똑같은 맥락으로 오직 요한복음에서만 예수님이 로마 법정에서 세상 권세를 상징하는 빌라도 앞에서 당당하게 “내가 왕이다”라고 선포하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 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18:37). 요한은 특별하게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먼저 그들을 향해 반복하여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어보신 것과 “내노라”를 세 번씩이나 강조하여 기록함으로, 즉 ‘너희가 잡고자 하는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를 세 번씩이나 선포하심으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의 완전성을 나타내시며, 그럼에도 메시아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불가능한 자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세 번 반복되는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의 선포는, 내가 이 세상에 내려와 인간이 되어 너희 앞에 나타난 것은 내 아버지의 뜻대로 나에게 속한 내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며, 그 뜻을 이루는 때가 되었기에 내가 스스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내 자신을 너희에게 스스로 내어주는 것이라는 선포이다. 이는 창세전에 하늘나라에서 묵시로 완성된 뜻이며, 구약 성경에서 이미 예언된(사 53장) 반드시 성취되는 언약의 성취임을 나타내셔서 세 번 반복하여 “내가 바로 그로다”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절대로 어둠의 세력에 압도되어 힘과 권세가 없어서 잡혀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천명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도 넘는 천사를 보내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마 26:53 공동번역).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예수님은 자신을 스스로 내어주시고, 자신에게 속한 제자들은 티끌 하나 건들지 못하게 풀어줄 것을 명령하신다. 예수님의 기도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지 않고 다 구원하시는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기에 그 누구도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제자들을 건들 수가 없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현한 명령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라고 명하신 것이며,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18:8-9)라고 바로 설명하여 주고 있다. 즉 예수님은 당신에게 속한 백성들을 이 세상 어둠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 어둠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다. 이를 위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으며, 이제 때가 되어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풀려나게 됨을 제시하신 것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이시며, 그분만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며, 그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를 건드릴 수가 없다는 예수님의 권능을 계시하는 선언이다.

앞서 17장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에게 기도하셨다.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여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17:12).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8-39). 즉 나에게 속한 내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내가 십자가를 지기 위해 너희들에게 잡혀갈 테니 어두움의 사망아 너희는 절대로 내 백성을 건드리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절대적 주권을 뜻하여 “내 백성을 가게 하라”라고 명하신 것이다. 모세가 바로 왕 앞에서 하나님의 권위로 담대하게 서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출 5:1)라고 이스라엘이 세상 애급의 종에서 완전히 해방됨을 선포한 것과 같이,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이 세상 권세자 마귀의 종에서 영원히 풀려나는 자유를 선포하신 것이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보전하실 것임을 미리 선포하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8:11)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해 오셨으며 이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세상에 내어주셨음을 증거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베드로의 사단의 역할

주님은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자신의 십자가 죽으심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특히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막으려다가 주님으로부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는 호통까지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주님의 십자가 지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또다시 주님의 십자가 길을 가로막는 사단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화를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버린 것이다. 베드로는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검으로 어둠의 세력에 응전한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대단한 용기이며 스승의 안위를 지켜주기 위한 충성스러운 행위같이 보인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베드로를 책망하시고 검을 휘두르면 검으로 망한다고 말씀하신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 검은 이 세상 힘을 상징하며, 세상이 너희를 검으로 대할 때 너희가 세상과 똑같이 검으로 응전하게 되면 그것이 곧 멸망이라는 무서운 충고이다. 즉 내가 양으로 세상 이리에게 나 자신을 내어준 것과 같이, 너희도 앞으로 나처럼 세상과 맞서 힘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내어주어 묵묵히 잡혀 죽는 것으로 너희 양의 자리를 끝까지 고수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승리라는 십자가 원리를 친히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죄악을 드러내고, 인간의 그 죄악을 없애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죄악들이 깨끗이 도말되는 구원으로 생명을 얻는 일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십자가 죽음의 잔을 마시기로 정하시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발적으로 체포당하기 위해 사단의 세력에게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십자가 죽으심이 진정 자신들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저희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원대한 뜻임을 알 수가 없었으며 또한 받아들이고 십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온통 자신들의 유익에만 초점을 두고 있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성찬 자리에서도 그들은 누가 큰 자가 되는가를 다투고 있었다. 베드로는 자신의 말대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3년 동안 예수님을 좇아 이제 곧 높은 자로 승진하리라는 꿈을 꾸고 있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19:27)라고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물어본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예수님의 능력을 빌어 대업을 이룸으로 큰 자가 되는 일에 마음을 쏟은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 정 반대로 예수님이 아무 능력도 행하지 아니하시고, 자신들을 버려두고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어 잡혀가게 하시는 무력함에 베드로는 참을 수가 없어 먼저 검을 뽑아들어 싸움을 요청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3년 넘게 예수님을 쫓아다녔던 그 수고와 노력, 꿈과 희망이 물거품으로 되는 허무함을 참을 수가 없었기에 검을 뽑아 내면의 화를 그대로 표출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주님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정의롭게 보였지만, 사실 베드로는 자신의 내면에 품고 있었던 욕망을 그대로 표출한 것이며, 또한 자신의 그러한 행위가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베드로의 행동은 자신을 포함한 하나님의 온 백성들의 죄를 도말하시고 새 생명을 주시는 그 위대한 구원의 뜻을 가로막는 마귀의 행위였다. 예수님은 수차례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며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할 것임을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런 주님을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라고 십자가 길을 막아 나선 것이다.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라고 온통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베드로의 인간적 마음 상태를 폭로하여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하신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전혀 이해할 수도 또한 이해하려는 의도도 전혀 없었기에 예수님의 심한 책망을 들었음에도 또다시 반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가로막는 사단의 일을 하게 된다. 주님은 지금 당신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죽기로 작정하시고 잡히시는 것인데,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주님의 구원사역에 맞서 반대로 사람을 죽이려고 검을 뽑은 것이다. 예수님의 의로운 구원 사역에 오점을 남기게 되는 그야말로 사단의 일을 돕는 마귀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 고난과 십자가 죽음으로 당신의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인데 베드로가 그 위대한 십자가 구원을 막아 나선 것이다.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

베드로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임을 돌아보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힘과 권세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순종과 희생으로 이루시는 나라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 권세자에게 잡혀갈 필요가 없으신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셨지만, 아버지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시고 희생제물이 되어 잡혀가기를 원하셨다. 그렇게 그분의 자발적 순종과 희생으로 우리를 위한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베드로의 행위에 대하여 이내 “내가 아버지의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바로 우리에게 향한 질문이다. 베드로의 행위는 제자로서 예수님에 대한 충성심도 예수님을 위한 일도 아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순종의 잔과 고난의 잔을 걷어차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마귀의 행위이다. 우리는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라고 또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의로 하나님의 사역을 돕는다고 열심에 특심을 내고 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십자가 고난과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잔은 걷어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나님의 일로 둔갑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마귀의 일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순종과 희생의 잔은 뿌리치고 십자가 길을 거절하는 자가 바로 나일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 열심을 동원하여 눈에 보이는 업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며 영생이라고 주님은 확실하게 제시하여 주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9).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우리가 하나님과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깊이 알고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과 티끌의 존재임을 인식하고 인정하게 되며, 자기부인과 자기죽음으로 항복하는 순종으로 내려가게 되며, 그 없음의 자리에 하나님의 믿음만이 발휘되는 진정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역사하게 된다. 우리 주님이 먼저 순종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그분이 먼저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는 자기부인으로 내려가 오직 아버지의 뜻과 의만을 담고 그분이 하시라는 말만 하시고 하시라는 일만 하시는 순종으로 내려가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 죽음이다. 즉 하나님의 일은 나의 의지와 힘과 능력을 발휘하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의 믿음에 이끌려 자기부인과 자기죽음의 십자가 삶을 살아냄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의만을 나타내는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믿음의 본질을 ‘겨자씨 한 알’로 표현하셨다. 즉 너희에게 요구되는 것은 태산과 같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능력과 믿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겨자씨와 같은 없음의 존재로 내려가 오직 하나님의 믿음으로 이끌려 감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겨자씨와 같은 없음의 자리로 내려갈 때 하나님의 믿음으로 너희 안에 견고하게 쌓여있는 ‘자아’라는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며 그 비어있는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채워지는 것임을 말씀하셨다.

우리는 내 열심과 내 행위와 내 의지로 하나님의 일을 내가 계획하고, 내가 정해 놓고, 내가 열심히 이루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칭찬받기를 추구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일에 내가 주도권이 되어 내가 이루려고 한다. 야곱과 같이 우리의 각본으로 하나님을 끌고 가려고 한다. 그리고 성급하게 하나님께 큰 자로 쓰임 받기를 열망하며, 내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내가 드러나고 내가 높아지는 육적 야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나의 주도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포기하고 내려놓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를 등에 업게 하시며, 그분이 내 삶의 주도권이 되어 나의 삶을 간섭하시고 강권적으로 그분의 각본에 따라 내가 원치 않는 길로 끌고 가신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삶은 이기적이고 야심과 거짓으로 정욕과 탐욕이 이끄는 대로 악을 좇게 되며 결국은 죽음의 멸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이 나를 이끄시는 길은 구원과 생명이요 선과 진리이요 진실과 사랑이다. 그분은 나에 대한 사랑과 관심, 간섭과 이루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가게 하시며 동시에 그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키워 가신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러한 베드로를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그에게 십자가 길을 제시하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라”(요 21:18-19). 베드로는 결국 주님이 강권적으로 이끄시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길을 가게 됨으로 연약한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 순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자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