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5: 7-17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 이로라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끝없는 패역함과 범죄함을 보면서 그들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이며,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음으로 불사름에 마땅한 가지임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그 불사름의 멸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시고 회생 제물이 되시어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았기 때문이다. 그 십자가 구원은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들을 배제하여 전적으로 하나님 홀로 성취하여 아무 조건과 대가 없이 오직 사랑과 은혜로 입혀주시는 죄에서의 구원이며 하늘나라를 사는 영생이다. 우리의 자격이나 열심과 노력의 정도에 따라 얻어지거나 취소되거나 중도에서 탈락하는 그런 조건적인 구원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을 따라 우리에게 임한 구원은 영원한 것이며 영원한 생명임을 성경 전체가 반복하여 설명하여 주고 증거하여 주고 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15:3-4)라고 말씀하신다. 즉 주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찾아와 주셨으며, 부르셨으며, 주님 안에 거하는 동행의 삶으로 이끄셨으며,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어 깨끗하게 하셨기에 과실을 맺는 자들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15:16). 주님이 제자들을 택하셔서 참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로 세워 주셨기에 과실을 맺게 하시며, 그 과실은 참 포도나무의 생명력으로 맺은 영생의 과실이며, 그 영생의 과실을 맺게 하시기 위해 농부이신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이루시며, 그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시더라도 결코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주님의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다. 한마디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에게 접붙여져 있는 가지들은 포도나무의 피의 공로로 깨끗하게 된 자들이며 포도나무의 생명력으로 반드시 아버지가 원하는 열매를 맺게 됨을 강조하신다.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어떤 열매인지를 주님은 상세히 제시하여 주고 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인간은 모든 사물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받아들이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에 본능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오로지 육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탐심과 욕심에 이끌려 모든 것을 자신의 유익에 따라 선택하고 해석하고 믿고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말씀도 오로지 나에게 유익한 관점에서 생각하고 해석하여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물질적 축복과 명예와 이름과 영광을 실현하는 기적의 힘으로 이용하려고 한다. 특히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4),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이와 같은 진리의 말씀들을 접할 때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 손에 신기한 ‘요술램프’를 들려주는 것처럼 해석하고 받아들이며 육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힘과 에너지로 변조시킨다. 예수를 믿으면, 무엇이든지 열심히 기도하고 간청으로 구하면, 육신이 원하는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잘못된 해석으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교회마다 나의 소원을 이루는 새벽기도, 철야기도, 작정기도, 금식기도, 작전 헌금과 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정성과 열심을 다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반드시 얻어내고 말겠다는 어리석은 거만과 오용이 난무하고 있다. 과연 목숨 걸고 간청한 기도로 그 ‘무엇이든지’가 다 이루어졌는가? 과연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이루리라’는 말씀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상에 진짜로 적용이 되고 실현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기도가 부족해서 믿음이 약해져서 정성이 부족하여 원하는 대로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실현될 수 없는 약속을 주신 것인가? 그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룬다’는 그 약속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받아들이는 우리가 잘못 해석하고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 오용하거나 잘못 적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기도와 이루어짐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본문에서 알아보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7)
주님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라는 말씀 앞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라는 하나의 전제를 붙여 주신다. 똑같은 말씀으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라고 기도의 결과나 열매는 반드시 예수에게 붙어있는 예수 안에 거하는 ‘하나’가 되는 조건하에서만 이루어지고 열리게 됨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즉 기도와 열매는 너희의 노력과 열심으로 간청으로 구하여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기만 하면 저절로 열매가 맺어지는 것과 같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즉 예수 생명 안에 거하는 자는 생명에 관한 진리를 구할 것이기에 그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내가 이루어주겠다’는 약속이다. 한마디로, 너희가 구하는 영생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주시는 선물이기에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없이 원하는 대로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여기서 “내 말”은 바로 하늘나라에 속한 영생에 관한 진리의 말씀이며 그 생명의 말씀은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에게서만 나오는 영적 양식이기에 ‘내 이름으로’ ‘내 안에서’ ‘원하는 대로 구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때문에 주님이 말씀하시는 “무엇이든지”는 이 세상에 속한 육적 탐욕을 채우는 재물의 형통이나 부귀영화와 같은 썩어서 없어질 ‘배설물’같은 것들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속한 영생에 관한 진리의 말씀이며 구원과 생명이다. 이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구하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선물이기에 그 어떤 조건도 대가도 공력도 없이 원하는 대로 구하기만 하면 이루어 주신다는 약속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라는 확실한 전제 조건을 제시하신다. 즉 진리의 말씀으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영생을 구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약속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과 생명을 선물로 주시기로 정하셨기 때문이다. “너회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그리하여 주님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라고 구원과 영생은 선물로 입혀지는 은혜이기에 구하고 믿으면 반드시 이루어짐을 약속하고 있다. 예수 안에서 구하는 “무엇이든지”는 당연히 진리를 추구하는 말씀이며, 구원과 생명이며, 영원히 하나가 되는 성령의 거듭남이며, 영원을 사는 영생이며, 하늘에서 이룬 이 모든 선한 뜻이 속이 이 땅에서도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영에 관한 구함임을 확실하게 제시하여 주신다.
농부가 원하는 열매와 성도가 구하는 가지의 삶이란?
주님은 당신 자신을 생명을 공급하는 포도나무로 묘사하고, 우리를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가지로 묘사하며, 아버지 하나님을 농부로 묘사하신다.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가지인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오직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닮은 영적 자녀라는 열매이다. 또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에게 붙어있는 가지가 원하는 열매도 역시 예수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사는 영생이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포도라는 열매밖에 맺을 수가 없다.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에 엉뚱한 들포도나 무화과 열매가 절대로 맺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포도나무 가지가 어찌 포도나무 열매가 아닌 이 세상 들포도나 엉뚱한 열매를 맺게 해달라고 열심히 구할 수가 있겠는가. 만약 포도나무 가지에 이 세상 보물을 주렁주렁 달아 달라고 구하면 농부가 어찌 용납할 수가 있겠는가. 만약 포도나무에 인간의 행위에서 나온 업적과 공로와 같은 금메달을 주렁주렁 달아놓고 열매라고 자랑한다면, 포도나무가 어찌 그것들을 열매로 취급할 수가 있으며 농부가 어찌 그러한 배설물들을 참을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포도나무와 농부에 대한 모욕이 아니겠는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에게 붙어있는 가지의 소원은 오로지 예수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예수를 닮은 진리와 사랑의 열매이며, 이는 농부의 소원이며 또한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의 소원이다. 그 삶을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먼저 살아내어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고, 제자들과 사도들과 믿음의 선배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삶을 이 땅에서 살아 내셨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의 순종의 삶을 본받아 예수님을 닮은 자로 살았으니 자신을 본받아 십자가 삶을 살아내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 삶이 바로 성도의 유일한 신앙 목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예수를 본받아 예수의 삶을 살아낸 바울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11: 24-27).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6-37).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고난과 핍박을 오히려 자랑으로 간주하였고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이기는 참으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종’의 삶을 충실히 살아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낸 자신의 모습을 본 받아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는 오로지 하늘나라에 소망을 품고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는 주님 안에서 하늘나라의 삶을 이 땅에서 먼저 살아내라고 권고할 수가 있었다.
사도 바울,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과 사도들과 믿음의 선배들은 주님이 앞서 가신 그 십자가의 권능을 이어받아 자신을 비우는 십자가 순교의 삶으로 복음의 열매를 풍성히 맺은 것이다. 바울은 옥중에서 모든 고통과 시달림과 핍박을 받는 최악의 환경과 조건에서도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라고 권고하였고,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역경 속에서 터져 나온 고백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권능으로 그 어떤 고난도 핍박도 죽음도 감당할 수 있다는 외침이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느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바울은 옥중에서 원망과 불평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라는 희열과 역설의 외침이었다. 감옥에서의 탈출도 아니요 핍박과 수모와 고난에서 벗어나는 간구도 아니었다. 반대로 그러한 역경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능력으로 사랑으로 붙들어 주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그 자체였다. 그 어떠한 시험과 고난과 핍박 속에서 목숨이 끊어질지언정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주님의 손을 꼭 잡고 진리에 굳게 서게 해달라는 간구 외에 성도가 무엇을 더 구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바울이 우리에게 권하기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2-4)라고 격려하여 주고 있다. 내 삶에서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며, 자진하여 그 십자가의 길을 가기를 소망하게 되는 자가 바로 현세에서 천국의 삶을 살고 있는 가지가 지향하게 되는 향기로운 삶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의 뜻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을 그대로 답습하여 사랑과 진리와 생명의 열매를 맺기를 구하는 소원과 소망을 말한다. 그리하여 주님은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 즉 예수 안에서 예수에게 붙어있는 가지는 농부께서 친히 가지가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아시기에 모든 필요를 채워서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공중의 새를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공중의 새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구하여서 먹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 역시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으로(마6:7) 구하여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다. 즉 기도는 이 땅의 것으로 먹고사는 필요와 형통을 구하는 수단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누리는 은혜의 풍성함을 감지하며, 이미 받은 구원에 감사하며, 그 구원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셨으며,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으며, 왜 나는 오로지 예수에게만 붙어 있어야 만이 살 수가 있는가를 기도를 통하여 깨닫는 것이다. 나를 그토록 사랑하여 주신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그 은혜를 깨닫고 감사와 기쁨으로 그분을 찬양하며, 그분과의 사귐을 통하여 하나로 연합되어 또 다른 생명이 잉태되는 더 많은 열매 맺기를 소원하는 간구이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말씀으로 진리가 된 자는 이미 하늘의 비밀을 맞보고 내 안에서 천국이 임하여 천국의 삶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거듭난 성도이다. 그들에게 이 세상은 바울의 고백과 같이 죽은 세상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영화롭게 여기던 그 모든 것들이 배설물로 보이게 되며,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성도에게 이 세상의 “무엇이든지”는 나에게 해가 되고 나를 유혹하여 무너뜨리는 시험으로 보이게 됨으로 그러한 장애물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치워달라는 간구이다. 성도에게 있어서 오로지 한 가지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원히 함께 거하는 영생이며, 속히 오실 주님만을 기다리며,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이 속히 이루어짐을 구하는 것 외에 무엇이 또 있겠는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보다 더 귀한 것은 없음을 정확하게 아는 성도에게 예수 사랑 외에 구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 사랑 안에 있는 성도에게 무엇이 부족하여 금식으로 목숨을 걸고 간청하는 기도를 할 수가 있겠는가! 성도가 구하게 되는 것은,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이 세상 그 “무엇이든지,”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는 진실 된 신앙 고백이며 주님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해달라는 간구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7-39).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라
9 아버지께서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 안에 하나로 함몰되어 서로 사랑하는 ‘하나’로 완성되는 지향성을 가리킨다. 오직 나만을 사랑하던 ‘나’라는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서 예수의 사랑 안에 거하여 이웃 사랑으로 완성됨을 계시하여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를 계명으로 주셨다. 즉 나만을 사랑하던 그 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롬6:6, 갈2:20).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자”(벧전 2:24)가 된 것이다. 그렇게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자에게서 나오는 열매는 사랑의 근원인 예수에게서 열리는 사랑의 열매이며 농부 아버지가 원하시는 열매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반복하여 사랑의 계명을 강조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랑의 열매는 오직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연합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렇게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성도에게서 나오는 열매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15:12) 사랑의 열매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곧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이시기에 그분 안에 거하면 반드시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거듭하여 “내 안에 거하라”, ‘내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기쁨이 충만하게 되며 서로 사랑하게 되는’ 참된 열매를 맺게 됨을 강조하신다. 사랑의 열매는 아버지가 원하시는 열매이며 동시에 성도가 소망하는 열매이며, 그 열매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15:8). 주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일이 곧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한 알의 밀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 십자가 구원 성취로 모든 족속 중에 택함을 받은 당신의 백성들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영생을 얻게 되는 그 복음의 열매를 가리켜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15:8)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사랑을 인간에게 입혀주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사랑의 결정체로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 그 사랑은 하나님과 영원 전부터 함께 하신 영광이시며, 오래전 구약 때부터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하셨고 약속하셨고 언약하셨으며, 우리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인자’로 오셔서 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희생으로 성취하여 주시고,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없이 불가항력적 은혜로 입혀주신 것이다. 하지만 사랑으로 오신 그분을 세상은 알아보지도 영접하지도 아니 하였고, 오히려 그분의 사랑을 거절하며 미워하고 증오하였으며, 멸시하고 박해하여 죽이려고 한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에는 온통 아버지의 사랑으로 충만하셨으며, 그 충만한 아버지의 사랑으로 죄인을 품에 안으시고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감당하심으로 자신의 희생적 사랑을 고스란히 흘러주심으로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하나를 완성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제자들과 우리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아버지에게 향한 희생적 사랑으로 모든 계명을 이루셨기에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라고 사랑으로 주님이 아버지 안에,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하나가 됨을 제시하셨다. 그렇게 예수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된 자는 기쁨이 충만하게 됨을 제시하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5:9-11).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주님의 사랑으로 하나로 연합을 이룬 자이며 반드시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는 자로 수렴이 되기에 그 사랑의 열매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있게 하여 더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시며 이를 위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신다고 약속하신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5:16). 즉 주님에게 택함을 받은 자는 반드시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17)의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하는 ‘자아’에서 벗어나 타인을 사랑하는 ‘이타’사랑으로 완성됨이 진정 아버지가 원하는 열매이며 그 열매는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십자가 삶으로 나타나게 됨을 계시하여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라고 그 사랑이 바로 친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며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으며 우리가 바로 주님이 살려내신 '친구'라고 부르신다.
주님은 율법의 총 강령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묶어 주셨으며, 사도 바울도 계명의 정체가 바로 사랑이라고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8-10). 사랑은 타인에 대한 판단이나 정죄가 아니라 타인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모든 것을 덮어주는 것이다. 바울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준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사랑은 오래 참고, 믿어주고, 바라며, 견디며,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씀한다. 즉 주님이 우리의 모든 부족함과 실수와 잘못을 인내하시고 용서하시고 오직 긍휼과 자비와 사랑으로 참아주신 것과 같이 우리도 타인의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이해하고 기다려 주고 견디어 내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럼으로 사랑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여 주님의 사랑을 계속적으로 풍성히 받는 자들에게만 흘러나와 이웃에게 흘러 들어가는 샘물 같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우리의 소유도 아니고 우리의 자발적 의지로 노력하여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뿌리이신 참 포도나무에 굳게 붙어 있음으로 공급받는 사랑이며 이웃에게 흘러주는 사랑이다. 때문에 사랑은 이 세상 모든 자들에게 적용되는 세속적인 사랑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만 적용이 되며 반드시 많은 생명의 과실을 맺는 하신다. 때문에 사랑 역시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주시는 가장 고귀한 특별한 구별된 선물이다.
주님은 앞서 13장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라고 “사랑”을 새 계명으로 주셨다. 그리고 15장에 와서 주님은 똑같은 말씀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신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5:12).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두 번씩이나 강조하심으로 이는 성도가 지향하게 되는 실천 강령임을 뜻한다. 여기서 주님은 오직 제자들에게만 사랑을 계명으로 주셨으며, 주님이 먼저 제자들을 사랑하셨다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그분이 먼저 우리를 택하여 부르시고 당신의 품 안에 끌어당기셨으며,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하셨기에 반드시 서로 사랑하는 자로 하나가 되는 것이 하늘나라 삶의 원리임을 제시하신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이 세상 육신에 속한 자들에게 요구되는 사랑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만 국한된 “너희”라는 문구를 쓰심으로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이루어지는 하늘나라에 속한 영에 관한 사랑임을 확실하게 구분하신다. 육신에 속한 자들은 절대로 주님이 요구하시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원하지도 살아내지도 못하며 더더욱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으로 이웃에게 생명이 잉태되는 영에 관한 생명의 진리를 알 수도 소유할 수도 없다. 주님이 성도에게 주신 사랑은 자신의 목숨을 철저히 희생하여 당신의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새로운 생명을 입혀 주신 영원한 사랑이며, 그 사랑은 이 세상 모든 인간에게 임하는 사랑이 아니라 창세전 구원하기로 선택한 당신의 백성에게만 입혀주는 사랑임을 확실히 밝히신다. 그리하여 주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15:16), ‘내가 먼저 너희를 사랑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을 항상 “너희” “우리” 라고 부르시고, 그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을 향하여서는 “저희” “너희” 라고 구분하여 부르셨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0-17),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23), 그러므로 “너희는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4)라고 이 땅에 속한 자들과 주님과 주님에게 속한 자를 항상 구별하셨다. 즉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를 철저하게 구분하여 부르셨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오직 택함을 받은 제자들에게만 사랑의 계명을 주시면서 ‘내 안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4-35)라고 ’너희‘는 내가 사랑으로 택한 제자 됨을 제시하신 것이다.
주님은 왜 사랑을 실천 강령으로 주셨는가?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인애와 오래 참으심의 성품이 죄인에게 부어져 구원과 영생이 임하게 되는 십자가 구원 성취를 가리킨다. 죄와 사망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그리스도의 임재로 이 세상에 나타나셨고, 십자가 구원 성취로 아무 조건 없이 오직 은혜로 죄인에게 부어졌으며, 오직 믿음으로 모든 죄가 사하여 지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 영생을 사는 생명을 주신 것이다. 그 사랑은 나의 소유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이들에게 흘려 내 보내는 원리로 생명의 과실이 맺혀지게 됨으로 주님은 이웃 사랑을 실천 강령으로 주신 것이다.
사랑은 이 세상 사람들이 정의하는 ‘다른 이를 불쌍히 여겨서 도와주는’ 일시적인 한계 안에서 행하여지는 구제와 같은 선행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다른 이로부터 자신의 존재가치의 인정과 칭찬과 숭배를 얻어내어 우월감과 영광을 챙기기 위해 목숨을 내놓더라도 구제와 같은 선행들을 추구한다. 구제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음으로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예를 들면, 불교의 부처든가 유교의 공자든가 힌두교 간디든가 아프리카 성자로 불리는 슈바이처와 같은 자들은 모두가 평생 사랑과 평화의 삶을 추구하고 실천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숭배와 영광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낸 구제와 같은 사랑의 실천으로는 자신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지 못하였고, 사랑을 베푼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로 천국에 들어가는 영생은 받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무리 불사르는 정신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구제와 선행을 일평생 기여하였어도 그들이 행한 사랑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과 생명이 임하는 복음을 배제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즉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구제를 하고 약자들을 위해서 자기 몸을 받치는 그런 선행과 같은 사랑을 베푼다 할지라도, 그 사랑이 사랑의 근원이신 예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이 헛된 것이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선행과 구제들은 자신을 영원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할 수 없는 ‘배설물’과 같은 것들로 자신의 의와 영광을 쌓는데는 유익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가로막는 일이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오직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서만 나오는 특권이며 선물이다.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주님의 성품을 닮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사랑의 과실을 맺게 됨으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5:12)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셔서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종’의 모습으로 한 알의 밀로 썩어서 없어지는 모습으로 오셨으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게 하셨다. 그렇게 주님의 피의 대가로 오직 사랑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주님에게 구하는 그 ‘무엇이든지’는 사랑의 근원에서 나오는 사랑과 진리와 생명의 열매이다. 포도나무 자체가 사랑이기에 가지가 맺게 되는 열매 또한 사랑이며, 그 사랑의 본질이 바로 이타(利他) 적 사랑이기에 주님은 자신에게 붙어있는 가지에게 “서로 사랑하라"라고 명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3: 37-39)라고 사랑을 가장 큰 계명으로 주셨으며, 반드시 지켜야 하는 ‘새 계명’으로 주셨으며(요 13:34), 반복하여 ‘서로 사랑하라’고 실천 강령으로 주셨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랑에서 출발하여 사랑으로 성취하셨으며 사랑으로 영생을 입혀주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사랑은 예수그리스도의 본질이며 사랑으로 모든 계명을 이루어 주셨기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라고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마침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유일하게 맺게 되는 열매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질을 따라 이웃 사랑으로 풍성하게 생명의 열매를 맺는 복음 전파이다. 그 사랑의 열매는 먼저 성도 자신 안에서 맺어지는 열매이며, 바로 예수 안에 거하여 예수에게 꼭 붙어있어야 만이 맺어지는 열매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눅10:27)라고 하나님에게 향한 사랑을 첫째 계명으로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과 근원이시기에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 바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에게 떨어지지 않게 꼭 붙어 있는 것이며, 주님 안에서 하나로 붙어있는 것이 바로 생명이기에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계명으로 주신 것이다. 바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주신 영생을 사는 사랑의 계명이다.
그렇게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여 영생을 살게 되는 성도는 그 사랑의 본질을 따라, 즉 우리 주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자신의 전부를 주신 것과 같이, 이웃을 내 자신 같이 사랑하는 ‘이웃사랑’으로 수렴되기 때문에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31),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5:12)라고 둘째 계명으로 주셨다. 사랑의 원리로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자는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는 이타(利他) 적인 삶을 살아가게 됨을 제시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함이로라”(15:17)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사랑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하나님의 아가페 신적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채워짐으로 이웃에게 흘러주는 새 생명이 지속적으로 잉태되는 샘물 같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이 세상에 속한 조건적 사랑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생명을 잉태시키는 사랑이며 영생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사랑이며, 그 사랑을 주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를 자신에게 종속시키기 위한 소유적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전부를 내어준 친구와 같은 사랑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15:13-15)라고 사랑은 그렇게 비밀도 없고 숨김도 없이 모든 것을 공유하는 하나의 마음으로 사귀게 됨을 친구로 묘사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 사랑으로 작동하는 영계이기에 숨기는 거짓이나 미움이나 차별이나 계급이나 시기 질투 경쟁 같은 세속적인 악함이 없는 모두를 내 자신같이 사랑하는 오직 사랑과 진실로 통하는 친구의 관계로 살아가는 나라임을 제시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원하시는 열매는 착한 일, 선한 일, 도덕적 윤리적 행위의 의로움이 아니라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그리스도 사랑 안에 하나로 붙어있는 가지 그 자체이다. 그 열매는 우리가 스스로 노력하여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분에게 꼭 붙어 있어서 그분의 구속사의 삶을 배우고 깨닫고, 나 같은 죄인을 신부로 친구로 삼아주시고 한없이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그 위대한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면서 이웃에게 흘려줌으로 기쁨이 충만한 천국의 삶을 이 땅에서 조금이나마 실천하고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오직 참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만이 살 수 있는 가지로 묘사하고 열매를 맺도록 수고하고 열심을 다하는 농부를 하나님 아버지로 묘사하셨다. 때문에 성도는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에게 붙어 있어서 농부가 하시는 그 모든 과정 하나하나를 경험하면서 겪어내고 통과하는 순종의 삶이 바로 가지의 삶임을 제시하신다. 예수 안에서 거듭난 성도는 나 자신만을 사랑하는 ‘자아’에서 벗어나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을 구하게 되며, 내 육신을 쳐서 하나님의 뜻만을 추구하는 순종의 삶을 간구하며, 나를 핍박하고 미워하고 해를 끼치는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의 마음을 구하게 되며, 내가 죽어서 저이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도록 죽음까지 감당하는 순교를 구하게 된다. 이와 같이 성도는 주님이 한량없이 내려주시는 사랑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고통과 좌절을 기쁨으로 감사로 영광으로 여기게 해달라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기도를 하게 되며 그 삶이 바로 이 세상을 초월하여 진리와 사랑을 실제 삶으로 나타내는 천국의 삶이다. 그 삶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며” “능치 못할 일이 없다"라는 진실 된 고백이 터져 나오게 됨으로 사랑의 계명을 자신의 삶으로 조금씩 나타내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