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깊은 영적 의미

요한복음 (요 14:27-31)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세상 임금이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18. 07:55

요 14:27-31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사랑의 절정은 만물을 창조하신 신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모든 죄의 고통과 수치를 당하시고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희생이며, 영원히 사는 생명을 전가시켜 주심으로 오직 은혜 안에서 영원한 자유와 평안을 입혀주신데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곧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라고 위로하여 주신 것이다. 주님은 그 약속대로 부활 후 근심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회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첫 번째로 ‘평강’을 선물로 주셨다. 이제부터 자신의 생명으로 성취하신, 즉 피의 대가로 지불하신 십자가 구원으로 아버지와 화목케 된 영원한 평안을 누릴 것이며, 이제 그분이 평강의 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영원히 하나로 동행하는 그 상태가 바로 평강임을 제시하신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안’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늘나라의 평안, 즉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만 누리게 되는 영원한 평안을 가리키며 영원을 사는 영생을 가리킨다. 이 세상의 토대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창 1:2)이었기에, 평강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도 또한 인간이 만들어 낼 수도 없음을 처음부터 제시하셨다. 즉 빛과 생명과 평강이신 당신의 속성과 정 반대되는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죽음을 이 세상의 기반으로 정하시고, 그것으로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평강과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고 설명하시는 역사를 창설하시고 주관하시고 통치하시고 계신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은혜의 덮음과 빛의 임재가 없이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죽음과 멸망의 상태이며 참 평안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생명의 근원이 오직 평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해 빛이 임재하시기 전에 먼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있게 하셨다. 이와 같이 어둠과 멸망으로 정해진 이 세상 속에는 처음부터 빛과 생명과 참 평안이 없다는 것을 창세기 시작부터 계시하시고 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체휼하시는 평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

사람이 하나님과 화평치 못하는 근본 원인은 바로 죄 때문이다. 죄악의 담이 가로막혀 있는 한 죄인은 절대로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으며 평안을 누릴 수가 없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 그리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서 화평을 이루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평안을 끼쳐주셨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예수그리스도는 본체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평강의 왕이시다. 그럼에도 스스로 ‘인자’로 오셔서 종의 삶으로 우리를 섬겨 주셨으며, 십자가에 죽으시는 희생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 주셨다. 신이신 그분이 성령으로 아예 죄인의 몸 안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당신의 거룩한 영으로 우리를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잉태시켜 주심으로 ‘영존하신 아버지’,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여 주시는 남편’이 되어 주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평안의 안식을 주시기 위해, 인간이 상상 할 수 없는 일들을 몸소 겪어내셨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하늘의 보좌에서 내려오셔서 이 죄악된 어둠 속에 들어오셨으며, 스스로 죄인의 육신 속에까지 뚫고 들어오셔서 아기로 잉태하는 과정을 겪으셨다. 그분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으로부터 배척받아 태어날 곳조차 없이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으며, 태어나자마자 세상 임금이 죽이려 하는 강력한 핍박으로 애급으로 피신하는 쫓기는 삶에서 인생을 시작하신 것이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로부터 배척당하며 온갖 멸시와 조롱과 박해와 죽음에 쫓기는 머리 둘 곳 없는 나그네 삶을 홀로 살아내셨다. 그분은 피조물 인간에게 온갖 학대와 멸시와 조롱과 죽음의 핍박을 받으시면서도 끝까지 인간을 사랑하셨다. 그분은 우리 인간이 죄로 인하여 겪는 모든 고난과 슬픔과 시험과 고통을 아기의 잉태로부터 모두 경험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체휼하시는 참 평강의 왕이 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평안을 주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울부짖는 주님의 기도 속에서 그 십자가 고통이 얼마나 심하였는지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누가는 예수님의 이 기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더라"(눅 22:42,44). 예수님은 인류의 죄와 저주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여야 하는 그 부끄러움과 모욕과 수치, 멸시와 천대, 고통과 비참한 죽음을 홀로 당하셔야 하셨다. 인간의 죄를 뒤집어쓰신 죄인이 되어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았고, 육적으로는 세상으로부터 버림과 온갖 고난을 당하셔야 하셨으며, 아버지가 쏟아내시는 죄에 대한 참혹한 심판을 십자가에서 홀로 받아내셔야 하셨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권능과 권세를 몽땅 내려놓으시고, 죄인이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죄인 앞에서 가장 치욕적인 모욕과 수치와 멸시와 고난을 당하셔야만 하셨다. 이르기를,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찌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마 27:29-30).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죄인으로부터 받으신 그 극심한 고통과 멸시와 조롱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너무나 심오한 고통이었다. 그리하여 주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한마디에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당하신 버림과 고난과 멸시와 조롱과 도살당하는 그 극심한 고통이 몽땅 깃들어 있다.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짓은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죄인이 되어 완전히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으며, 이 세상 인간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완전히 홀로 모든 죄를 담당하셔야 하는 그분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7-9).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와 십자가에서 울부짖는 그 통곡과 인생 전체의 고난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독생자 예수에게 전가 시키시고, 그를 저주와 죽음의 사형 틀인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는 방법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신명기에서 죄를 범한 자는 나무에 매달라고 하였고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 22-23) 라고 말하고 있다. 죄를 범한 자는 하나님 앞에 부정함으로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려 죽게 함으로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시며, 그 죄의 대가는 죽음이며, 우리가 바로 그 형벌을 받아 그 무시한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보여주시고 알게 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즉 죄에 대한 심판을 독생자 예수에게 내리시는 가장 참혹한 방법으로 죄인을 구원하셔서 우리에게 향한 피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해 스스로 비천의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신적 아가페 사랑이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붙으시고 통치하시고 심판하시고 생명을 주관하시는 권능과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시다. 신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죄를 온통 뒤집어쓰시고, 자신이 창조한 인간으로부터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수치를 다 당하셨으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아무런 권능도 행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도살당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은 실재였고 사실이었고 현실적인 경험이었기에 그분은 우리를 낳아주신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며” “평강의 왕이시며” “영원히 나를 사랑하시는 남편”이 되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체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분이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을 경험하시고 체휼하셨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그 죄의 고통과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가 있었으며, 우리의 입장이 되셔서 그 죄 때문에 버림받는 저주와 고난과 고통을 당하시고 경험하셨기에 우리의 평강의 왕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안은 그분이 우리의 혈육을 입은 인간이 되셔서 친히 인간이 겪는 죄의 수치와,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멸시와 조롱과, 육신이 겪는 모든 고난과 시험과 고통과 죽음을 몸소 겪으셔서 사랑으로 입혀주시는 생명의 대가를 지불하신 하늘나라의 평안이며 영원을 사는 평안이다. 이는 조금도 거짓이 없는, 조금도 흠이 없는 사실이며, 현실이며, 실재이다. 이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며, 능력 중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뜻깊은 배려와 사랑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평안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성취로만 이루어지는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함몰되는 연합이다.

거짓 선지자들이 외치는 거짓 평안

타락한 인간에게는 처음부터 ‘평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48:22). 평강은 오직 점도 흠도 없는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것이기에 오직 그분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14:27)라고 말씀하신다. 오직 하늘나라에서만 누리게 되는 영원한 평안이며, 그 “평안”은 죄와 사망이 없는, 즉 아버지께서 친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계 21:4) 영원을 사는 평안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 상태는 심히 부패하고 더럽고 사악하기에, 참 평강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함으로 찾는 자가 없으며, 이 세상에는 아예 평강이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8). "패망이 이르리니 그들이 평강을 구하여도 없을 것이라"(겔 7:25). 그럼에도 거짓 선지자들은 거짓 평안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고 있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8:11). 거짓 선지자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를 외치는 대신 죄를 어루만지면서 '평강하다 평강하다' 라고 거짓 평강을 외친다고 말씀하신다. ​

오늘날 똑같이 거짓 목회자들이 교인들의 죄를 지적하는 책망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와 오직 은혜로 구원이 임하는 복음을 외치는 대신, 반대로 거짓 계시와 복술과 기적들과 같은 허탄한 것들을 ‘평안’이라고 외치고 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켜 행하는 행위와 노력으로 이 세상에서 평안과 축복을 쟁취하라고 은혜를 망령되게 하는 설교를 하고 있으며, 이 세상에서 누리는 재물의 번영과 명예와 육신의 안일함과 형통을 ‘평안’으로 포장하여 그것들을 획득하는 비법과 기교들을 열광적으로 외치고 가르치고 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나님이 축복하여 주고 보호해 주고 있으니 모든 것이 잘되고 복받을 것이다’라는 거짓되고 사기 치는 설교를 강단에서 노골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백성들이 죄로 곪아서 썩어 들어가는 상처를 파헤쳐서 수술하여 고치는 죄에 대한 심판과 회개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덮어 감추며 대충 어루만지면서 ‘괜찮아, 안 아파, 금방 다 나아질 거야, 하나님이 고쳐 줄 거야, 재앙이 없을 거야, 평안할 거야’라고 가짜 위로와 평안으로 죽어가도록 내 벼려두더라는 것이다.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렘 23:17). 오늘날 거짓 목회자들의 속임술을 그대로 말씀해 주고 있다.

​이 세상은 인간 자신들이 끊임없이 토해내는 욕망의 배설물 같은 역사이며, 얼마나 추악하고 더럽고 허황된 것이며,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지를 전하지도 않으며 또한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야망과 욕구를 채우는데 혈안 되어 있으며, 육신의 탐심과 성공과 평안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은 이들이 원하고 즐겨먹는 먹이를 던지게 되어 있다. 그들은 십자가 보혈, 예수그리스도의 은혜, 죄와 의와 심판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화목을 원하지도 은혜를 구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인간들의 탐심과 욕망을 채워주고 존재가치를 향상시켜주고 자존심을 세워주는, 인간들의 기분에 따라 장단을 맞추어 주는, 설교들이 강단에서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성공주의, 인본주의, 기복주의, 신비주의와 같은 비 진리가 교회 안에서 판을 치고 있다. 한 마디로, ‘너희들이 갈망하는 복에 대한 비법을 가르쳐 줄 테니 너희들은 나의 꿈과 야망을 성취하는데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돈과 힘을 보태라’라는 노골적인 약탈이다.

그래서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양을 늑탈하고 해치는 삯군, 절도, 강도, 이리들이며, 그 목적은 바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데 있다’( 요 10:1-12)라고 정확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인 머리수 하나하나가 자신들의 성공과 이름과 영광을 쟁취하는 힘과 세력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구약 때부터 있은 흔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르기를, “이에 내가 가로되 슬프로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시리라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렘 14:13-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하나님은 분명 그들을 보낸 적도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라고도 하지 않으셨다(렘 23:30-32)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을 허탄하게 만드는 거짓 선지자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까지 말씀하신다(신 13: 1-5,10). 인간은 자신의 가족과 인맥과 사회관계 등 주위 모든 사람, 즉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오직 자기 존재 확장과 가치 향상과 자존심 높이기와 성공과 욕망을 실현하는 힘과 세력으로 인식하고 자기중심으로 끌어들이는 울타리를 쌓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가 최초로 행한 일이 바로 흩어진 것을 하나로 힘을 모아 바벨탑을 쌓아서 하늘에 닿는 하나님과 동등함을 시도한 일이다. 즉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자신들의 힘을 모아서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왕이 되는 나라를 세우겠다는 야망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둠의 세력들은 거짓 평화와 하나가 되는 세계 통일을 외치면서 인류를 자신의 뜻대로 지배하려고 창궐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나로 뭉치기 위해 애써 만든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인간을 산산이 흩어버리신 것과 같이, 어둠의 세력들을 조각으로 산산이 부숴 버리실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은 태초부터 이 세상의 기반을 ‘혼돈과 공허와 흑암’(창 1:2)으로 정하셨으며, 인간의 타락과 함께 가시와 엉겅퀴로 이 땅을 저주하셨으며, 타락한 인간을 죽음으로 정하셨다(창 3:17-19). 즉 이 세상 토대가 바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며, ’가시와 엉겅퀴’로 차 있으며, ‘죄와 죽음’의 파멸로 향하고 있다. 분명히 세상 속에서는 평안이 없다고 선언하셨음에도, 존재하지 않는 무슨 평화와 평안을 찾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세상 평화를 외치며 구하고 쟁취하기 위해 분투하고 싸우라고 사기를 치고 있단 말인가! 교회마다 열심히 세계 평화를 외치며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하나로 뭉치자고 통일을 주장하며, 세계 평화를 위하여 빛과 소금의 역할로 열심히 충성과 봉사와 구제와 헌금으로 공로를 쌓으라고 양들을 미혹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양은 자신들의 가치와 위상과 이름을 높이는 상업용 양일뿐이다. 무조건 많이 끌어모아 쓰레기 같은 정크푸드(Junk food)를 많이 먹여 뇌의 기능을 상실하게 하고 살만 찌워서 자신의 존재 확장과 성공의 자본으로 삼으며 자신들의 사욕을 채워주는 집단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10:10),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10:12) 라고 우리에게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를 확실하게 주셨다.

죄인들이 끊임없이 토해내는 죄악으로 저주받은 이 세상 속에는 참 평안이 없으며, 얼마나 사악하고 더럽고 추악한 배설물로 차 있는지를 인식하고,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고, 자신의 무능한 티끌의 존재가치를 자각하고, 이 죄악된 세상에서 빠져나와 진정한 평안을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하라는 진리의 복음은 교회 강단에서 들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절대로 자신이 부인되고 삭제되는 것을 용납할 수도 또한 그 진리를 화평과 평강으로 인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인간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이요’,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6-18)라고 지적한 것이다. 이 세상은 하늘의 평화로 오신 평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였으며, 또한 알면서도 어둠을 더욱 좋아하여 평강의 빛으로 오신 메시아 그리스도를 죽도록 배척하고 대적하고 멸시하고 핍박하여 죽여 버린 것이다.

진정한 하늘나라의 평안

인간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하늘의 평안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 그 평안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입어야만 누리게 되는 하늘나라의 평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하여 예수그리스도만이 평강의 왕이시며, 영생의 진리 이심을 선언하고 있다. 진정한 평안은 내가 부인되고 삭제되는 죽음을 거쳐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잉태되어 평화이신 예수 안에 거하는 평안이다. 바울은 모든 편지의 서두와 끝말을 한결같이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은혜와 평강을 하나로 묶어서 복음의 핵심을 선언하고 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의 전체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와 ‘예수그리스도의 평강’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여 아들이 되는 화평이 이루어짐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로 요약하여 강조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성도에게 그리스도의 평강이 임하게 되는 근원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이미 영생의 평안을 소유한 자이기에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선포한 것이다. 그 영생의 평강이 바로 평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시다.

하늘 나라의 참 평안은 이 세상 속에서는 끝없는 고난과 시험과 애통과 핍박과 조롱과 공고한 시련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내려오셨다. 그러나 이 역사 속에서는 끊임없는 배척과 대적과 멸시와 천대와 핍박을 받으셨으며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는 희생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평을 이루어 내시고 하늘의 평안을 우리에게 입혀 주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오셨음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2:49-51).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로 뭉치는 세계 평화를 이루려 오신 분이 아니시며, 오히려 분쟁케 하려고 ‘불을 땅에 던지려 오셨음’을 자신이 받을 십자가 죽음으로 말씀하시며, 또한 '세상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이 세상에 속한 마귀의 자식 간에 서로 원수가 되는 분쟁과 분리가 일어나게 될 것임을 제시하셨으며, 역사는 끊임없이 예수님이 주신 말씀대로 분쟁과 분열과 전쟁의 연속으로 치닫고 있다.

이 세상 인간들이 똘똘 뭉쳐서 힘과 세력을 쌓아서 하나님께 도전하겠다는 바벨탑 쌓기를 하나님께서 흩으셨던 것과 같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로 인하여 분쟁케 되는 영적 싸움이 시작됨을 미리 제시하여 주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4-36 / 12: 52-53), 즉 진짜와 가짜를 자기 집안 식구에서 갈라내시겠다는 의지적 말씀이다. 즉 믿는 자와 안 믿는 자와의 분쟁뿐만 아니라, 믿는다고 하는 한 가족, 한 교회 안에서의 영적 분쟁을 말씀하시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기독교 역사에서 그 분쟁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그래서 주님은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 13:49-50)라고 말씀하신다. 바로 의인의 탈을 쓴 악인, 양의 탈을 쓴 이리, 선지자 탈을 쓴 삯꾼 강도 목회자를 가리킨다. 그들은 광명의 천사로, 하나님의 종으로, 의인으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타나 세계 평화와 통일을 외치며, 이 세상이 주는 물질적 탐욕과 타락적 쾌락을 평안으로 외치는 독사, 마귀들이다. 주님은 이들에게 불을 던질 것이며, 서로 대적하여 싸우는 분쟁을 일으킬 것이며, 반드시 검으로 악인을 갈라내어 지옥 불에 던질 것이라고(마 13:49-50)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주님은 하나님에게 속하지 아니한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자들을 가리켜 ‘마귀의 자식’ ‘독사의 새끼’라고 부르신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요 8:44).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33).

하늘나라의 평강을 사는 성도의 십자가 삶

성도의 평강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믿음과 그분 안에 거하는 연합으로 임하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라고 ‘평안’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이 주셔야 만이 평안을 누릴수 있으며, 그 평안은 이 세상에 속한 일시적인 평안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의 평안이시기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약속대로 십자가로 구원을 성취하시고, 부활 후 첫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선언하셨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생의 평안을 주시기 위해 먼저 화평케 하는 삶을 이 세상에서 살아내셔서 우리에게 화평의 진의를 보여주시고 화평케 하는 삶으로 끌고 가신다. 그분이 이 세상에서 살아내신 화평케 하는 삶은 바로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셔서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은 희생이었다. 즉 자기 부인과 십자가 죽음으로 화평을 이루어 우리에게 평안을 입혀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평안을 사는 자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만을 의지함으로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을 추구하게 되며, 절대로 자신의 주체성이든가 가치를 내 세울 수가 없게 된다. 하나님 대척점에 있는 ‘나’라는 자아 존재가 반드시 죽어야 만이 화평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주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라고 십자가 자기 부인의 삶을 제시하여 주셨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살아내신 화평의 삶은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시고 한 알의 밀이 되어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은 희생이었다.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행사하실 수 있는 모든 능력과 권능과 권세를 다 내려놓으시고, “종의 형체”로 오셔서 종의 삶을 살아내셨으며, 인간으로서 모든 시험과 고난과 고통을 당하셨으며, 실제로 자신을 저주의 십자가에 매달게 하여 아버지가 쏟아내시는 죄에 대한 심판을 친히 받아내심으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막혀있던 죄의 담을 허물어 버리고 화평을 이루어 주심으로 “평강의 왕”이 되신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라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그리스도의 피로써 화평을 이루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평안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신다. 즉 하나님과의 화평은 오직 평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제물로만 이루어짐을 말한다. 그러므로 화평은 나의 삶과 나의 존재가치가 부정되는 자기부인이다. 바울이 말한 봐와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즉 나라는 존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에 이제 더는 나를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내 안에 뚫고 들어오신 그분의 영으로 태어난 새사람 그리스도의 신부로 그분이 이끄시는 십자가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가게 됨을 제시하고 있다. 내가 삭제당하고 그분의 영으로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그 새사람의 부활을 화평과 평안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때문에 하늘나라로 인도받는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육적 자아의 죽음을 십자가의 삶으로 실제로 살아내게 되며, 그 십자가의 삶을 통하여 내가 부인되고 삭제됨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신부로 연합을 이루게 되며, 그 상태가 바로 평안이라는 말씀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평안을 주시기 위해 먼저 화평과 평강의 삶을 살아내셨다. 그 삶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향한 철저한 순종과 철저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이었다.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이끌고 가시는 평강의 삶이란 바로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을 나타내는 순종의 삶이다. 고백하기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십자가로 구원받아 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사는 성도는 세상에서는 죽은 자이며, 또한 이 세상도 성도에게는 죽은 세상이기에 더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성취로 하나님과 화평케 된 자는 이제 더는 자신을 위해 사는 세상 사람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삶으로 예수그리스도만을 나타내는 영적 존재로 평안을 살게 된다.

​그렇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성취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갈 5:24) 때문에 실제로 육적 자아가 죽는 십자가 삶으로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다.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후 5:17),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라는 탄식으로 내 자아의 죽음을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옛사람은 나 자신만을 사랑하는 애착과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집착을 나의 존재가치로 붙들고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죽어도 이러한 집착과 애착들을 스스로 내려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 옛사람이 죽는 십자가 삶으로 우리를 이끌고 가신다. 자기 부인, 자아 죽음만이 진정한 평안이 되기 때문이다. 즉 하늘의 평안을 누리는 자는 자신의 주체성이 완전히 삭제되는 육적 자아의 죽음을 통과하게 된다. 내가 죽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그분과 하나가 되는 그분이 나의 주체가 되는 삶이 바로 ‘평안’이기 때문이다. 즉 나라는 존재가치가 몽땅 부정당하는 십자가 죽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내 옛사람은 죄와 마귀의 종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였기 때문에 반드시 옛 죄인의 죽음을 통과하여야 만이 하나님과 화평이 이루어지며 새사람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평안을 사는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는 공고한 고난과 시련과 시험과 고통과 절망과 죽음을 겪게 된다. 내가 부인되는 십자가의 삶을 실제화하여 사는 삶이 바로 내면에 평강이 채워지는 삶이며, 그 속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안과 사랑과 용서의 열매가 열리게 된다. ‘나’라는 존재의 실체가 낱낱이 폭로되고 기각되고 부인되고 죽어가는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참 된 평강이 내 마음에 날로 채워지는 참 자유와 평안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믿음의 선지들이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충실히 살아 내셨으며, 그들에게 십자가 고난의 삶은 오히려 평강으로 감사로 영광으로 여겨지더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이 세상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기게 되더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고난을 즐겨 받으며 그 어떠한 조롱도 채찍도 옥에 갇히는 것도 돌로 치고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극심한 고통과 절망과 시험 속에 집어넣더라도 세상이 하늘의 평화를 사는 성도를 감당치 못하더라고 증거하고 있다(히 11:35-38). 이와 같이 세상적으로 인식되는 ‘평안’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평안이기에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자신의 소원과 야망이 성취되는 형통과 육신의 편안함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사랑으로 사는 연합의 관계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롬 5:1) 하늘나라의 평안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주님은 반복하여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갔다가 다시 제자들에게 오신다고 약속하시면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라고 모두가 하나가 되는 연합을 제시하셨다. 즉 예수님이 이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실 때 혼자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우리를 거처로 삼고 계시는 하나가 되는 믿음의 최종 목적이 달성됨으로 이는 더없이 기쁜 일이기에 주님은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14:28),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1-22)라고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는 영적 연합을 제시하셨다.

주님은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14:28)라는 말씀을 하신다. 주님은 아버지께로 가셨다가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14: 2, 3, 12, 18-19, 21, 23).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였다면 주님의 가심을 기뻐한다고 말씀하시며,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그동안 3년 넘는 시간을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시면서 매일 구원과 생명에 관한 진리의 말씀을 가르쳤으며, 매일 기적과 표적들을 행하셔서 보고 체험하게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성찬에서 주님이 친히 종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곧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당신의 백성에게 내려진 모든 저주와 죽음을 깨뜨리고, 하나님과 화목케 하여 영화로운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 생명을 입혀주셔서 아버지의 집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됨을 약속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1-3)라고 확실한 보장으로 약속하셨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이 왜 십자가를 지셔야 하며 그 십자가가 죽음이 제자들에게 계시하는 구원과 생명에 관한 진리를 전혀 알아듣거나 이해하지 못하였다. 즉 육체로는 주님과 매일을 함께 하였지만, 마음으로는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주님을 사랑하는 진실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성찬에서 누가 더 큰 자로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을 것인가 하는 자기들의 서열 문제로 자리다툼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당하셔야 하는 십자가 고난과 고통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만을 계수하고 있었다(마 10:37). 주님은 그렇게 무지한 그들에게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마10:38) 라고 물으셨다. 즉 주님은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입혀주시기 위해 친히 희생양이 되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당하셔야 하는 그 십자가 고통, 죄인들로부터 채찍에 맞는 온갖 멸시와 수치와 조롱,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림으로 죽으셔야 하는 그 세례를 제자들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만약 제자들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깨달았더라면, 그 십자가 죽으심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에게 영광이 되며 주님이 영화를 얻으시는 영광의 성취이며, 그 영광의 성취가 바로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이 임하는 은혜에 은혜를 더한 위대한 구원이기에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오히려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그 영광의 성취를 알지 못하였으며, 주님이 이제 자신들을 떠나 아버지에게로 가신다는 말씀에 오히려 슬픔과 근심과 허무함과 고독감과 실망에 빠져 있었다. 특히 제자들은 주님이 자신들을 부르신 것은 큰 자로 등급시켜 주어 이 세상 힘과 권력을 손에 쥐는 것으로 생각하여 왔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주님을 3년 동안 쫓아다녔으며, 이제 그때가 왔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연속 자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자신들의 꿈과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허무함과 이제 곧 고와와 같이 버려지는 불안과 두려움에 잠겨 있었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들을 보고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14:28)라고 곧 십자가 진의를 깨닫고 기쁨으로 십자가 구원을 받아들이게 되며, 주님을 끝까지 사랑하게 됨을 미리 계시하여 말씀하여 주셨다.

두 번째로 주님은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14:28)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육체로 있었기에 아직 십자가 구원 성취로 영광을 얻지 못하셨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며, 인간의 육신을 입고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시는 주님의 철저한 순종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며,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평을 이루시게 하시는 중보자의 역할에 충실하셨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 안에 아들이 계시고, 아들 안에 아버지가 계시는 ‘하나’됨을 강조하셨다. 즉 본질과 인격과 성품과 모든 능력과 영광에 동등하시기에 ‘하나’라는 말씀이다. 그럼으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라는 뜻은 신성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인자’로 오셔서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는 아담 종족의 대표가 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는 철저한 순종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은 본체의 형상인 하나님의 영광과 만물을 붙으시는 만왕의 왕이신 모든 권세와 위엄을 내려놓으시고 스스로 종의 형체를 가지고 오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 6-10).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죄인의 육을 입고 이 땅에 ‘종의 형체로’오신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우리의 수준으로 낮추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셔서 육신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희생을 감수하셨음을 가리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그렇게 하심으로, 첫째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며”(29), 두 번째는,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31)는 것이다. 즉 자신의 30여 년 인생을 한마디로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14:31)라고 요약함으로 아버지에게 향한 완전한 순종과 사랑을 나타내셔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은 근본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이시지만 오히려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고 아버지에게 향한 철저한 순종과 아버지에게 향한 완전한 사랑으로 십자가 구원을 성취하심으로 우리에게 향한 아가페 신적 사랑을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시고, 확신하게 하여 주시고, 믿게 하여 구원을 얻게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죄악된 세상 속에 내려오셔서 ‘예수’라는 사람 이름을 가지고 ‘인자’로 ‘종’으로 우리를 섬겨주셨으며, ‘어린 희생양’으로 십자가 고난과 멸시를 받으셨으며,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천하에 확 드러나고 땅 끝까지 구원이 임하는 복음이 전파됨으로 우리에게 향한 극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래서 인자로 오신 ‘예수’라는 이름이 바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든 가장 으뜸가는 가장 아름다운 구원자의 이름이 된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 안에 우리에게 향한 영원한 사랑과 구원과 생명의 진리가 모두 깃들여 있음으로 우리는 주님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 16). 이것이 바로 주님이 아버지를 공경하여 모든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는 아들의 진실한 마음으로 고백하는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라는 진의이며,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며”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라는 진의이다.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예수님은 마지막 결론으로 두 가지를 말씀하신다. 첫째는 이 모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은 그 일이 성취될 때에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함이며, 둘째는 이제 사단의 무리가 와서 예수님을 십자가 고난과 죽음의 고통으로 끌고 가지만,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14:30-31)는 성취이다. 이는 사단이 비록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까지 끌고 가지만, 예수님을 정죄할 아무런 근거도 찾지 못하며, 십자가 구원 성취를 절대로 막을 수가 없다는 주님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세상 임금을 상징하는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그 어떤 죄도 찾을 수 없다고 ‘무죄’를 선포하였다. 그것은 이 세상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의 세력도 비록 하나님의 대적자로 메시아의 구원을 방해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심을 인정함과 동시에 세상에 증거하는 역할로, 빌라도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눅 23:14-15; 요18:38) 라고 ‘무죄’를 선포한 것이다.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힌 강도도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23: 41) 라고 증거했고, 예수님을 판 마귀 가룟 유다도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 4) 라고 증거하였으며, 예수님을 처형하던 백부장도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 었도다”(눅23: 47) 라고 증거했다.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무죄’를 선포하게 하신 것은, 바로 그분은 아무 죄가 없으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심을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며, 그분은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니라, 세상 죄 때문에 즉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죄 없으신 하나님’이심을 천하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이 바로 나의 죄 때문에, 나의 죄를 짊어지고 고난과 수치와 저주와 죽음의 심판을 나를 대신하여 받으셨음을 알고 깨닫고 믿게 하려는 것이기에 주님은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4:29)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신이 굳이 아기 예수로 태어나 이 죄악된 세상에서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에게 온갖 수모와 멸시와 조롱과 매 맞음을 다 당하시고 저주의 사형들인 십자가에 못을 박아 피를 흘리는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이사야 53장 5절의 말씀대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함과 같이 그 수난의 십자가 길을 가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내심으로 당신의 백성을 영원한 생명으로 살려내시는 그 영원한 사랑을 확증하여 세상으로 알게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은 세상이 주는 온갖 채찍과 조롱과 수치와 핍박에 아무 대항도 말 한마디도 없이 묵묵히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 백성에 대한 극치의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분의 자녀와 신부가 된 것은 그냥 말로만이 아니다. 그분은 친히 죄인의 육신을 입고, 죄인으로 취급 셨받으셨으며, 죄인으로 정죄 당하셨으며, 죄인으로 극심한 고문을 당하시고, 죄인으로 저주의 십자가에 못을 박음으로 자신의 의로운 피로 우리를 깨끗게 하시고, 자신의 생명의 핏줄로 이어 주셔서 자신의 생명 안에 거하게 함으로 하나가 되는 화평으로 연합을 이루어 주셨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놓고 성찬식에서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한 것이며,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섬김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이다.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 몸소 자신의 몸으로 겪어내어 생명을 주신 그 사랑을 인간이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바로 예수님의 그 위대한 십자가의 공로와 사랑으로 죽음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들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마지막 승천하시면서 이 기쁜 소식을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라"라는 목적으로 땅 끝까지 이 사랑의 복음을 천하에 전파하라는 사명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