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깊은 영적 의미

요한복음 (요14:1-3)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18. 08:30

요14:1-3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주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하는 성찬에서 친히 종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그리고 이제 곧 제자들을 떠나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셔야 하시는 힘든 심령 속에서도 항상 제자들을 먼저 배려하셔서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안위하여 주신다. 그리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제자들의 근심이란 무엇을 가리키며 왜 그들이 근심과 걱정으로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성찬에서 벌어지는 일과 도마와 빌립와의 대화에서 좀 더 상세히 알 수 있다.

첫째, 영적 무지에서 오는 근심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쫓아 3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하면서 예수님이 매일 주시는 구원과 생명에 관한 진리의 말씀을 들었고, 매일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과 표적을 보고 체험하였으며, 전도여행에서 자신들도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성찬에서 주님이 친히 종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곧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당신의 백성에게 내려진 모든 저주와 죽음을 깨뜨리고, 하나님과 화목케 하여 영화로운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 생명을 입혀주셔서 아버지의 집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됨을 계시하여 말씀하신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1-3)라고 확실한 보장으로 약속하신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이 왜 십자가를 지셔야 하며 그 십자가가 죽음이 제자들에게 계시하는 구원과 생명에 관한 진리를 전혀 알아듣거나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제자들을 대표한 의심 많은 도마가 나서서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14:5)라고 물은 것이다.

둘째는, 세속적인 욕망 때문이다. 제자들은 3년 동안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만을 쫓아다녔으며 이제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큰 자로 세워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지막 성찬에서 누가 더 큰 자로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을 것인가 하는 자기들의 서열 문제로 자리다툼하고 있었다. 그런데 큰 자이신 주님이 오히려 작은 자로 종이 되셔서 친히 무릎을 굽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마가복음 10: 32-39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아주 상세하게 말씀하여 주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께서 당하셔야 하는 십자가 고난과 고통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만을 계수하고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마10:37)라고 자신들의 영광을 구한 것이다.

주님은 그렇게 무지한 그들에게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마10:38)라고 물으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큰 자 되는 영광을 위해서는 “할 수 있나이다”(10:39)라고 대답한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유월절을 맞이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왕으로 외치며 환호한 것을 보았기에 주님을 쫓는 것이 큰 보람이었고 자랑이었고 장차 큰 자가 될 것이라는 욕망과 희망에 차 있어 마지막 성찬 자리에서 누가 큰 자 되는가를 놓고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가룟 유다가 정치적 군사적 민속 메시아로 주님을 믿었던 것과 같이 제자들도 또한 강력한 힘과 능력을 소유한 주님이 로마제국을 뒤엎고 다윗 왕국을 재건할 것이라는 민족 해방을 갈망하고 있었다. 즉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메시아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제자들은 모든 것이 수표로 돌아간다는 허무함과 고독감과 실망으로 근심하였던 것이다. 주님이 자신들을 부르신 것은 큰 자로 등급 시켜 주어 이 세상 힘과 권력을 손에 쥐는 것으로 생각하여 왔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주님을 3년 동안 쫓아다녔으며, 이제 그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또다시 자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자신들의 꿈과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허무함과 이제 곧 고와와 같이 버려지는 불안과 두려움에 잠겨 있었다. 탐심과 욕망으로부터 오는 근심이었다. 인간은 욕심 때문에 근심과 불안과 두려움으로 매일을 살고 있으며 스스로 불행과 고통을 자초하고 있다. 미래 되고 싶은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상상하며 아직 닥치지 않는 일들을 근심하며 불안해하며 쟁취하기 위해 고심 분투하고 있다. 즉 물질적 욕망, 다른 이를 지배하려는 큰 자 되기 위한 세속적인 욕망과 자기중심적인 탐심으로 끝없는 근심과 불안, 두려움과 고통, 죄악과 죽음을 스스로 자초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미래 되고 싶은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좇았던 것이며 이제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을 말씀하시자 자신들이 기대한 모든 욕망과 꿈이 사라지게 됨으로 이내 근심과 불안과 두려움에 잠기게 된 것이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 상태를 읽고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라고 그들의 불안해하는 마음을 진정시켜 주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며 이 세상에서 큰 자 되는 욕망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하늘나라에 속한 자로 너희 소망은 하늘나라임을 확실하게 정하여 주셔서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3)라고 말씀하신다. 즉 내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닌 것같이 너희도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며, 내가 너희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내 신부로 영접하여 영원히 함께 하는 처소를 마련하기 위해 잠시 떠났다가 다시 너희에게로 올 것이며, 때문에 내가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죽는 일은 근심과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가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나라로 들림을 받게 되는 영광의 성취임을 제시하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십자가 죽으심이 주님에게는 영광이 되는 일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천하에 나타내는 하나님의 뜻과 모든 소망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영광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버려진다는 외로움과 고독감에서 오는 근심이다. 그동안 주님께서 스승이 되심과 동시에 종이 되셔서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주님이 주도가 되어 이끌어주시고 섬겨주심으로 이제 곧 주님과 함께 세상을 지배하는 큰 자로 호화로운 인생을 즐기게 됨에 부풀어 있어 주님 앞에서 서로 주님의 우편 좌편의 등급으로 다투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이 도리어 종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자신이 이제 곧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셔야 함을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이내 자신들의 꿈이 산산이 깨지고 허무하게 버려진다는 고독감에 근심과 불안과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제자들의 그 고독감을 위로하시기 위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여 나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갈 것이며, 절대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4:18)라고 거듭 강조하여 약속하신다. 즉 내가 너희와 육신적으로 있는 것은 제한이 있지만, 이제 성령으로 너희 안에 뚫고 들어와 하나가 되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는 보장된 약속이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14:16)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

너희는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예수님은 근심과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에 잡혀 있는 제자들에게 그 근심에 대한 해답을 ‘믿음’으로 주신다. 즉 하나님을 믿으며 주님을 믿으면 마음의 근심이 해결된다는 말씀이다. 근심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믿음뿐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말씀 그대로 하나님을 믿는 그 마음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으라는 보장된 확신으로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라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곧 당신 자신임을 제시하신다. 제자들은 비록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라는 신앙고백은 하였지만 제자들 스스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믿고 영접하는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마 16:17). 하지만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후 다시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제자들의 마음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그 고백대로 그들을 믿음으로 세워주실 것이며 주를 믿는 굳건한 믿음으로 주님의 증인이 되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선구자로 만들어내실 것임을 계시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는 말씀은 곧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임을 제시하신다.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을 입혀서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십자가의 삶으로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나타내셨으며,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말씀으로 설명하여 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하신다. 즉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를 이 죄악된 세상에 보내주셨고, 우리를 섬기라고 종의 삶을 살게 하셨으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영광의 하나님이심을 수많은 기적과 능력으로 그 권능을 보여주셨다. 그렇게 만물 만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그분은 우리를 지배하는 군주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주시는 절대적 사랑과 헌신과 희생으로 사랑하셔서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이심을 보여주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14:8) 라고 말하는 빌립에게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4:9-10)라고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는 하나이기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동일시하게 말씀하신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절대적 의존자로 살아야 만이 완전한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생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이 자신을 주관하는 고달픈 인생으로 알 수 없는 미래를 꿈꾸며 스스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 육신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과 같은 필요를 채우기 위해 근심 걱정하며, 불행과 죽음이 닥칠까 두려워하며, 결핍과 공허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지키려고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보장된 미래는 없다. 이 세상에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근심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사는 자는 하나도 없다. 인간은 미래의 일을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나타내시기 위해 하나님은 처음부터 ‘없음’의 흙으로 만드셨다. 즉 흙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이 땅에서 먼지같이 허무한 인생을 살다가 결국 먼지로 없어지는 연약하고 비천하며 무익한 존재임을 계시하여 인간의 결국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로 정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은 이미 저주와 죽음을 안고 죽은 시체와 다름이 없는 존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과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또한 인간의 본색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하나로 온 인류가 무력한 속수무책으로 근심과 불안과 혼란과 두려움으로 죽음에 노출되어 있음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다. 인간은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위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극히 미약한 존재임이 증명된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오직 믿음만이 해결 방책임을 제시하여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믿음을 제시하셨으며, 항상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7:50, 17:19/막 5:34, 10:52)라고 믿음만이 구원임을 수시로 제시하셨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라고 말씀하고 있다. 인간의 가장 큰 근심은 바로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다. 그 미래는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영역이며 그 미래를 설계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로 근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즉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오늘에 충실하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곧 근심을 이겨내는 믿음이라는 말씀이다.

그리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베드로는 자신의 의지와 결단으로 주님을 믿고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 믿음이라 생각하였고 우리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가 내어놓은 믿음을 완전히 부인하게 만들며 그러한 믿음은 오히려 주님을 배신하는 패역함으로 드러나게 하셨다. 즉 믿음은 너의 의지적 결단으로 네가 나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해 죽고 너를 구원해 내었고 현재 너희와 함께 하고 있음을 사실로 믿는 것임을 제시하신 것이다. 비록 지금은 너희가 나의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이제 내가 십자가에서 너희를 위해 구원을 성취하고 다시 성령으로 너희 안에 뚫고 들어와 성령의 가르침과 인도로 너희를 확실한 믿음으로 세울 것이며, 그때 너희는 근심에서 벗어나 평강으로 채워질 것이며, 너희는 내가 있는 곳으로 영접되어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여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14:2-4)라는 확신을 주신 것이다.

그렇게 그분을 믿는 자는 당연히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믿음은 내 의지와 노력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역사를 실상으로 증거로 믿는 것이다(히 11:1).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될 것이라고 믿는 희망 사항이 아니며, 의지와 열심을 동원하는 능력으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일이며, 구원과 생명이 은혜로 입혀지는 실상을 믿는 일이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깨달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지 않아도 이해하지 못하여도 다만 나를 진리와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그분을 신뢰하며 이끌어주심에 순종으로 나아갈 때 증거로 나타남으로 비로소 납득이 되고 우리에게 향한 한없는 사랑을 깨닫게 되며 믿어지는 것이다. 제자들이 믿음의 핵심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믿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였다. 제자들은 먼저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깨닫고 영접하는 데는 많은 시련과 고초를 겪은 것이다. 그리고 그 고백대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광야의 생활 속에서 하나하나의 사건과 상황으로 그분에게 향한 믿음을 쌓아올리는 것이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믿음과 열심에 의해 믿음의 작품들이 된 것이다. 그들이 믿음을 발휘하여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에 이끌려서 자기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그들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들의 삶을 친히 주관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은혜를 입은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가 된 것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알고 믿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적인 이끄심과 열심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아직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때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불러내심으로 아브라함의 인생은 하나님의 ‘믿음’으로 출발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본토를 떠났다’고 말씀하고 있다. 믿음으로 시작한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며, 아브라함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떠밀려서 하나님의 주권으로 고향을 떠나 떠돌이 하는 고생길에 들어선 것이다. 하나님은 안락하게 사는 아브라함에게 먼저 부모와 형제, 친척과 친구라는 모든 인간적 관계를 끊게 하여 외로운 떠돌이 삶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만드셨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복된 환경을 주신 것도 아니고,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하는 일로 고민을 주거나 부담을 주는 일도 없었다. 다만 세상 사람과 똑같이 일상생활에서 평범한 인생에 평범한 사람으로 벅찬 일상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크고 작은 하나하나의 사건과 환경과 상황 속에서 점차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루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알아가게 되고,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하여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수 없음을 깨닫게 됨으로 비로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아브라함은 실수도 하고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시련도 겪고 고생도 하며 험난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뜻을 깨닫는데 백 살이 넘는 세월이 흐르게 된다. 하지만 그 지극히 평범한 생활과 풍파 속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자신도 모르는 창세전 뜻하신 구원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반복하여 약속하신 별과 같이 모래알같이 자손을 주시겠다는 언약이 너무나 추상적이었고 전혀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더디어 백 살이 되어서야 이삭을 가지게 됨으로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한 하나님을 굳게 믿게 된다. 그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야 하나님의 마음을 읽게 되었고,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시는 분으로 신뢰하게 됨으로 자신에게 아들을 받치라는 그분의 뜻을 헤아리게 되는 믿음의 절정까지 도달하게 된다. 아브라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열심과 열정으로 만들어지고 빚어진 믿음의 작품이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전 15:10).

그러므로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 진의는 예수님이 결코 제자들을 믿음의 반석으로 만들어 내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순교의 길로 인도하시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담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라고 말씀하심으로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요 21:18-19)라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베드로가 한 신앙고백을 인간으로는 지켜내지 못하였지만, 주님은 결코 그 신앙고백대로 믿음의 반석으로 만들어서 그 위에 예수님의 몸 되신 교회를 세울 것을 말씀하시고 그렇게 믿음의 반석으로 베드로를 세운 것이다(마 16:18).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전 생애를 광야로 인도하셔서 굳건한 믿음으로 세우신다.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분리시켜 광야로 이끌어 내셔서 시험과 고난과 시련을 주셔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를 지게 하신다. 즉 세상인으로 살던 옛사람 죄인은 완전히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믿음을 키워 가신다. 우리는 내 열심과 내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칭찬받기를 추구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에 모든 일에 내가 주도권이 되어 내가 이루려고 하는 본성으로 우리의 각본으로 하나님을 끌고 가려고 한다. 성급하게 내가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큰 자로 쓰임 받기를 열망하며,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드리려는 육적 야망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믿음은 나의 주도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포기하고 내려놓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를 등에 업게 하시며, 그분이 내 삶의 주도권이 되어 나의 삶을 간섭하시고 강권적으로 그분의 뜻대로 끌고 가신다.

나는 그분이 누구이시며, 왜 나를 택하여 부르셨으며, 무엇을 하시며, 어떻게 하시며, 어디로 인도하실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분이 먼저 나를 택하여 부르셨기에 그분을 알아보는 눈과 귀를 열어주심으로 그분이 바로 나의 구원과 생명이심을 알아보게 하시며, 그분만을 신뢰하는 믿음을 주시며, 그때 비로소 그분의 손을 잡고 영원한 지팡이와 안식처가 되어주시기를 요청하게 된다. 왜냐하면 내 중심의 삶은 이기적이고 야심과 거짓으로 정욕과 탐욕이 이끄는 대로 악을 좇는 자가 되어 결국은 저주와 죽음의 멸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이 나를 이끄시는 길은 구원과 생명이요 선과 진리이요 진실과 사랑이다. 그분은 나에 대한 사랑과 관심, 간섭과 이루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가게 하시며 동시에 그분에 대한 믿음과 사랑, 감사과 평강을 마음에 채워주신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제부터 내가 너희를 반석 같은 믿음으로 끌고 가시기 때문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명하신 것이다.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나라’ 혹은 ‘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국’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주 특별하게 “내 아버지 집”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을 이루어 주심으로 하나님과 막혀 있었던 죄의 담을 무너뜨리고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 사이에 화평을 이루심으로 우리가 이제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잉태하게 됨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시며, 아버지의 집이 곧 우리가 살게 될 영원한 집이라는 것을 인식시켜 주신다. “내 아버지의 집”이 곧 “너희 집”이며, 이미 너희를 위하여 충만하게 예비되어 있기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14:2)라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지금은 내 말을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지만 너희가 곧 내가 가는 그 길을 알게 될 것이며 소망하게 될 것이며 곧 아버지의 집에 오게 된다는 말씀이다.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14:4),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30)라고 보장된 약속을 하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3)라는 기도를 주셨다. 창세전 하나님의 나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이미 완성되었다는 말씀이다. 그 구원의 ‘태초’는 영원 전부터 창세전 하늘나라에서 이미 이루어진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하늘의 묵시를 이 땅에 펼쳐 놓은 것이 바로 천지창조와 구속사이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정확하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선언으로 이 세상에서 가시적으로 전개되는 모든 일은 태초부터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진 묵시임을 계시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하늘의 묵시대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으며, 말씀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계시하시며, 말씀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사도 요한은 예수그리스도를 가리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 말씀이 곧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이며 과거와 현실과 미래에 대한 설명이며 해석이다. 즉 그분은 이제 말씀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말씀으로 그분을 알게 하시며, 말씀으로 진리를 깨닫게 하시며, 말씀으로 그분을 믿고 영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라고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내 아버지 집”은 창세전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를 위해 완성하신 하늘의 묵시를 의미한다. 즉 성도는 자신이 거처하게 될 영원한 집을 이미 상속받은 자로 잠시 육을 입고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목적으로 아버지의 영광 성취를 위해 잠시 나그네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요17:18)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본향은 손으로 만들어지지 아니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신 그 영원한 나라임을 사도바울은 영성으로 말씀해 주고 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 아버지의 집”은, 첫째는 장차 우리가 영원히 거하게 되는 종말론적 또한 미래적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지칭하고 있으며; 둘째는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를 거처로 삼으시는 그 상태가 바로 아버지의 집에서 살고 있는 상태임을 계시하신다. 그리하여 주님은 간단명료하게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14:2),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0)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그곳이 곳 천국이며 하늘나라이며 ‘아버지의 집’이다.

사도 요한은 ‘하늘나라’를 생명으로 영생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른 복음서인 마태복음에서는 34번이나 "하늘나라"라고 기록하고,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30번, 마가복음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16번이나 나온다. 하지만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2번 표현)를 가리켜 영생과 생명으로 표현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하여 영원부터 계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을 가리키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신 영생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공간적이고 영토적이고 시간적인 의미보다 모든 것을 초월하여 태초부터 계시는 영적인 생명을 가리키며, 장차 우리 안에서 우리를 처소로 삼고 영원히 하나로 영생을 사는 그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준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시고 다시 와서 영접하신다고 말씀하시며 이내 “내가 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14:6) 라고 예수님 자신이 바로 우리가 거할 영원한 생명의 처소임을 계시하신 것이다. 즉 장차 하나가 되어 영생을 살게 되는 처소는 창세전 우리를 위하여 예수 생명 안에서 예비하셨다고 사도바울이 영적 계시로 말씀해 주고 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의 집’은 영원을 사는 영적 생명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요한은 ‘하늘나라’를 예수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사는 영생으로 생명으로 묘사한 것이다. 즉 이 세상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영으로 사는 영생을 가리킨다. 반대로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 이 ‘세상 육신의 집’은 곧 늙어서 낡아지고 썩어서 없어지는 한 줌의 먼지로 끝나는 ‘없음’이다. 이사야는 인간의 장막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함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옷이 해어지고 더러워지고 썩어서 없어지는 것처럼 우리 육신의 장막도 죄악으로 말미암아 썩어서 한 줌의 먼지로 돌아가게 하셨다. 솔로몬의 고백과 같이 이 세상 육신의 장막은 허무하며 헛된 것이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 1:1-3).

아무리 육신의 장막을 위하여 수고하고 땀을 흘리며 전력투구하여도 육신의 장막은 결국 헛된 것으로 거두어 가신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8) 함과 같다. 이 진리를 깨닫는 성도는 옛사람 육신의 장막을 벗기를 소원하며 썩어짐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영으로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잉태하여 영원히 함께 사는 처소가 되기를 소망한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 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고전 15: 42-45).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아버지의 집’은 육신이 사는 장막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영의 아버지와 영으로 사는 영적 생명을 말씀하신 것이다. 영생의 장막을 입혀주시기 위해 우리 주님이 육신의 장막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으며, 이 땅에서 오래오래 사신 것이 아니라 30여 년밖에 살지 않으셨으며, 그 육신의 장막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육신의 장막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함으로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하게 하신다. 예수님의 육신의 장막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2-5).

이와 같이 그분은 우리의 죄악된 육신의 장막을 벗겨버리고 새로운 영의 장막을 입혀주시기 위해 죄로 인한 육체의 고난과 고통과 죽임을 담당하여 주셨다. 그렇게 죄인으로 살던 육신의 장막을 거두어 가심으로 당신의 점도 흠도 없는 의로운 영으로 다시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리하여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라고 반복하여 보장된 약속을 주신 것이다. 장차 우리가 영의 장막으로 살게 되는 우리 ‘아버지의 집’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함과 같은 그 영원한 아버지의 집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라고 말씀하시고 이내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라고 되풀이하는 것 같이 말씀하신다. 주님은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이미 많다고 말씀하시면서 또 처소를 마련하려 간다고 말씀하심으로 ‘아버지의 집’과 주님이 제자들을 위하여 예비하려 가시는 그 처소는 뭔가 다른 처소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즉 아버지께서 이미 당신의 백성이 거할 집을 많이 마련하셨는데 또 다른 처소를 예비한다면 그 처소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게 된다.

이 세상에서 전개되는 모든 일들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아버지의 집을 설명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필수적으로 주신 것들이다. 즉 진리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내용으로 담아서 인류 구원 사역을 설명하시기 위해 이 세상을 주셨으며, 때문에 하나님은 하늘나라에서 이룬 뜻대로 역사를 주관하신다. 하나님은 그 영원한 하늘나라를 설명하여 보여주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여 적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가나안 땅은 장차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사는 하늘나라를 모형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약에서 천국의 실체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직접 이 땅에 내려오심으로 긴 역사 동안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여 온 그 가나안 땅의 실체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심을 밝히 드려내어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나안과 같은 어떤 정해진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즉 예수님 자신이 바로 구약에서 약속하여온 하늘나라이시며, 그 하늘의 천국이신 예수님이 바로 언약의 성취자이시며, 약속하신 그대로 오셨으며, 십자가로 구원을 성취하여 주셨으며, 현재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계심으로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1).

그러므로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은 시와 공간을 초월하여 곧바로 우리 마음 안에 성령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누리는 처소를 우리 안에서 짓고 계신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즉 예수님 자신이 바로 당신의 백성을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삼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천국이시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을 “천국이 임하였다”라고 선포한 것이고, 예수님도 자신이 바로 천국임을 계시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 라고 말씀하심으로 장차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다시 살려내어 영원히 함께 거하는 연합된 상태가 바로 영생을 사는 천국임을 미리 계시하여 주신 것이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이와 같이 주님이 말씀하신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다는 그 처소는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신 예수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 즉 예수님 자신이 바로 구약에서 약속하여 온 하늘나라이시며, 그 하늘의 천국이신 예수님이 바로 언약의 성취자이시며, 약속하신 그대로 현재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눅 17:21).

예수님은 당신이 택한 백성들과 함께 거할 처소를 마련하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다. 즉 그분이 우리를 천국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는 그분이 다시 육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 안에 직접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를 거처로 삼아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연합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17:23)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하사“(17:21)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 이와 같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처소는 장차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영생으로 살려내어 영원히 함께 거하는 그 연합의 상태가 바로 영생을 사는 처소임을 말씀하신다. 그분이 성령으로 다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를 처소로 삼고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처소는 바로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로 영원히 함께 영생을 누리는 ‘연합’의 상태를 말씀하신 것이다.

현재 하늘나라의 평강을 사는 성도의 십자가 삶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의 시간과 이 땅의 공간적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잉태된 생명으로 이 땅에서도 영적으로 마음으로 천국의 삶을 살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도 전에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저기 있다가 아니라 바로 너희 안에 지금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즉 예수님과 함께하는 그 관계 자체가 바로 천국이라는 말씀이다. 천국은 죽고 나서 가는 곳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이 땅에서 경험하고 누리고 살아갈 수 있다는 말씀이다. 주님과 함께라면 그 어디나 천국이라는 찬양이 나오게 된다.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는 영으로 연합된 그 관계성으로 성도는 현재 천국을 살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한다’는 말씀은, 내가 이제 너희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질 것이며, 또한 너희를 영원히 사는 생명으로 잉태시켜 내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 부활하실 것이며,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영원히 함께하는 처소로 정할 것이며,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에 내가 다시 와서 내 아버지 집으로 너희를 영접하여 영원히 함께 안식을 누리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신명기 33:27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라고 우리의 영원한 처소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말씀해 주고 있으며, 다윗은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시91:9)라고 영적 고백을 한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나라의 영원한 처소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설명하여 주시기 위해 율법을 주시어 당신의 장막을 당신의 백성 마음에 세워 당신의 백성을 처소로 삼으실 것을 미리 모세를 통하여 계시하여 주셨다.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레 26:11-12).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백성과 함께 거할 하늘나라에 있는 성막을 보여주시면서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어 너희를 반드시 내 백성으로 만들어 내고야 말 것이라는 언약을 세우신다.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겔37:26-27).

하지만 구약의 성전은 이스라엘의 패역한 죄악으로 수시로 파괴되는 것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오직 점도 흠도 없는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희생 제물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어린양 예수의 보혈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화목을 이루실 것임을 계시하여 주셨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짐으로 죄인이 이제 하나님이 임하시는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 품 안에 거하게 됨으로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연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겔37:26-27)는 연합의 성취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원한 처소는 어떤 정해진 장소가 아니라 영원부터 계시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주님이 우리에게 처소를 예비하여 주신다는 말씀은, 십자가 구원 성취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있는 죄의 담을 허시고 화평을 이루어 주심으로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로 함몰되는 연합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라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그리스도의 피로써 화평을 이루셨다고 확실히 선포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여 아들이 되는 화평이 이루어짐으로 주님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이제 제자들은 근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영원한 평강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영생의 평강이 바로 평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심을 제시하셨다.

​이제 성도들은 하나님의 처소가 되었고 하나님은 성도들의 처소가 되는 영원한 하나로 연합된 것이다. 하나님과 백성들의 상호 내주가 실현이 된 것이다. 그러한 상호 내주의 관계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십자가 삶으로 맞추어지는 것이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철저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으로 육이 죽고 영으로 다시 태어남으로 영으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는 양육의 훈련 과정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즉 영적으로 이미 우리를 하나님의 처소로 만들어 놓으시고 이 역사 속에서 가시적으로 내 옛 사림이 날로 날로 죽어지고 새사람으로 하나님의 백성에 합당한 자로 지어져가는 것이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눅9:23). 하나님께서 우리를 청결한 당신의 처소로 만드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이미 운명적으로, 신분적으로 결정적으로 완성이 되었기에 절대 중도에 포기되거나 실패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지는 그 길에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수많은 자기 부인의 사건들과 상황들을 거부할 수가 없으며 오직 순종으로 가쁨과 감사로 감당하게끔 마음에 평강을 부어주신다. 내가 내 힘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길로 그분이 나를 끌고 가시는 것이다. 그렇게 그분이 지불하신 극심한 고통과 죽음의 대가로 하나님과 화평케 된 자는 죄에서 영원히 해방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의인으로 거듭난 것이다. 새사람을 입은 자는 이제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사는 하늘나라의 존재로 영원을 살게 됨으로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천국이 되신 것이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는 항상 미래 지향적인 동시에 종말론적 신앙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성도로서 우리의 본향은 정해져 있고,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미래 준비된 혼인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신랑의 재림을 소망하며 잠시 이 세상을 사는 나그네이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심으로, 또한 주님은 이 죄악된 세상을 심판으로 종결짓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로 정하신 이 세상과 사단과 그에게 종속된 믿지 않는 자들을 영원한 심판으로 종결짓기 위한 마지막 때를 가리킨다. 하지만 신랑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성도에게는 하늘나라 소망이 영원히 이루어지는 영광스러운 신부 단장으로 신랑을 맞이하는 천국 혼인 잔치로 들어가는 영광의 축복이다. 성도는 창세전부터 택함을 받은 하나님에게 속한 자녀이기에 당연히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은 신부 단장으로 신랑을 맞이하여 천국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의 순간이다.

주님의 초림 때는 인간의 육신을 입고 그 누구도 영접하지 않는 마구간 구유에서 비밀리에 태어나셨다. 하늘나라 왕이시며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음에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도 영접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대적하고 멸시하여 죽여버린 것이다. 그분은 종의 형체로 이 죄악된 세상에 내려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섬겼으며,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셨으며, 온갖 고난과 수모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대조적으로 마지막 재림의 날에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만왕의 왕으로 천사를 거느리고 백마를 타시고 오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그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막13:2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예수님 재림의 날에는, 주님 재림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 성도들이 먼저 부활하고 또 그때까지 살아 있는 깨어있는 성도들이 그 몸이 부활의 몸으로 변화하여 함께 신부 단장으로 공중에서 신랑을 맞이하여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는 가장 찬란한 순간이다. 이는 모든 감추어져 있었던 것들이 백일하에 만 천하에 드러나는 지상 최대의 사건이다. 이천 년 전에 죽은 자나 지금 살아있는 자나 재림의 날은 시간 공백이 없는 한날한시 순식간의 사건으로 모두에게 동시에 일어나지만, 하나는 생명의 부활로, 하나는 심판의 부활로 영원히 분리된 운명으로 갈리는 순간이다.

그 긴 역사 동안 이 땅에서 전개된 하나님의 구속사, 즉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이루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의 순간이다. 태초부터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여 주신 영원한 아버지의 집으로 단장한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순간이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거기에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는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다 지나갔음 이러라"(계 21:4 )라고 미리 그 나라를 소망으로 신랑의 재림을 손꼽아 기다리는 성도에게 확신의 계시를 주시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십자가 지심이 바로 영광의 성취로 주님에게 말할 수 없는 영광이 되며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모든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영광의 순간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요 13:31)라고 주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항상 영광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님이 말씀하신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3)라는 약속을 굳게 붙들고, 비록 이 세상 죄와 죽음의 절망 속에서 잠시 살고 있지만, 매일을 신랑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며 오직 신랑 예수에게만 집중하여 그분만 바라보며 온전한 신부 단장으로 깨어서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계시이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아 신부가 된 성도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이기에 이 세상 그 어떠한 위험도 두려움이 될 수가 없으며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고 사도바울은 확신을 주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은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영원한 주가 되시기 위해 당신의 신부를 맞이하시기 위해 오시는 최고의 기쁨과 영광의 순간이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너무나 벅찬 기쁨으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도는 이미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된 자로 잠시 이 세상을 사는 나그네이다. 그 연합은 하늘나라로 이어지는 영생이기에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죽음으로도 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사는 성도는 비록 ‘종일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으로’ 온갖 환난과 곤고와 시험과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혹은 거지 나사로와 같은 무소유로 천대 꾸러기로 산다고 할지라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겪는 일이며, 성도의 믿음과 성장에 필수적이며 유익한 일이기에 사도 바울은 범사에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성도에게 권고하고 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게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는 감격이 터져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성도는 천국의 백성으로 잠시 이 세상을 연단과 훈련의 장소로 살아가며, 선한 싸움을 다하는 그날에 신랑 되신 우리 주님이 친히 우리를 영원한 아버지 집으로 영접하여 영원한 하나로 영생을 살게 됨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