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4:13-16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할 뿐 아니라 또한 이보다 큰일도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큰일이 바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의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이다.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14:13)라고 말씀하심으로 너희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 이름으로” 구하며, 구하는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여야 하며, 그 기도는 ‘무엇이든지 내가 시행한다’고 말씀하심으로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심을 확실하게 정의하여 주신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일은 예수님이 하실 것이며 그 일에 우리를 동참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그 일을 시행하시는 분은 예수님 자신이기에 반드시 “아들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영광을 얻는” 일로 바꾸어 내시겠다는 약속이다.
기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도는 육신이 호흡해야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호흡으로 생명을 유지하게 됨으로 기도를 ‘영적 호흡’ 혹은 ‘생명줄’이라고 부른다.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단절된 상태이기에 생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는 영적 호흡이기에 오직 택함을 받은 당신의 백성에게만 주시는 하늘나라의 특권이기에 반드시 예수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증거를 낳는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반드시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사귐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되며, 우리에게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며,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게 되며,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의 숨결을 매일 체험하면서 매일 그분의 생명력으로 살아가게 됨을 확신하게 된다. 때문에 기도는 말씀과 같이 성도의 존재 양식이며 살아가는 생명력이다.
우리 주님은 모든 질고와 아픔과 고난과 멸시와 고통과 죽음을 우리를 위하여 겪으셨다. 무시당하고, 핍박당하고, 맞고 찢기고,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으시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체휼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치른 대가는, 우리의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심으로 영원한 지옥 의 혈별에 합당한 우리를 사망의 권세에서 끌어내어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올리기 위함이었으며, 죄인으로 살던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 생명으로 거듭나 이제 아버지와 하나이고 아들과 하나인 영원한 연합을 이루어주시기 위함이었다. 이 놀라운 은혜와 특권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통해 우리에게 오직 사랑으로 선물로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깨닫게 하며 증거하는 역할이 바로 기도와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적 호흡을 통하여 매일 그분의 은혜와 사랑과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마음에 되새기며 매일 매순간마다 체험함으로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없는 영원한 하나임을 확신하게 된다. 또한 이 세상 권세 마귀의 유혹과 시험과 박해와 멸시와 같은 모든 악의 세력 속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시며 믿음을 잃지 않고 굳세게 서서 하나님의 아들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자랑할 수 있도록 기도로 붙들어 주시며, 그 어떠한 고난과 시련과 절망과 실패와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와의 영적 사귐으로 지탱할 수 있고 이길 수 있고 감사와 기쁨으로 화답하는 사랑의 힘으로 넉넉히 이기게 하여 주신다. 그리하여 기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기도의 위력으로 기쁨과 성령 충만으로 순교를 자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능력과 위대함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14:13)라고 “내 이름으로 구하는” 제한성과 “무엇이든지”이루어주시는 무제한 능력을 동시에 약속 하셨다.
지금까지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아니 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뜻과 생각에 일치한 기도를 하게 되며 그 기도를 인도하시는 분은 곧 성령님이심을 뜻한다. 즉 기도는 내 자의로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계시하여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6:24)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주님이 육신으로 있을 때는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기에 성령님이 아직 오지 않은 상태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고 하여도 그 기도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음으로 “구하지 아니 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즉 육신적 욕망과 탐심에서 나오는 기도는 ’내 이름‘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예수님의 뜻과 일치할 수가 없기 때문에, 너희가 구한 것은 ”내(예수) 이름으로“ 구한 것이 아니기에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비록 육신으로는 예수님과 함께 3년을 동고동락하였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기에 온통 자신들의 유익만 계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지막 성찬에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셔야하는 그 힘든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서로 누가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이 되는 가를 놓고 다툼을 벌인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로마군에게 잡혀가는 주님을 보고 두려움으로 배신하고 뿔뿔이 도망하여 숨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성령의 인도 없이 자의로 구하는 기도는 이 세상 것을 구하는 육신을 위한 기도이기에 들어줄 수가 없음으로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육신의 기도를 부정하시고, 이내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16:24),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14:12-13)라고 확실하게 명하신다. 이제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면 그때 비로소 성령님의 인도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뜻과 일치된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기도는 “무엇이든지” 예수님이 친히 시행하실 것이며 그로 인하여 아버지에게는 영광이 되고, 제자들에게는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확실하게 말씀하여 주신다.
이와 같이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의 삶을 근원적으로 바꾸어 놓게 되는 성령강림과 기도, 이 두 가지를 약속하신다. 즉 주님이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승천하신 후, 보혜사 성령으로 제자들 마음에 뚫고 들어오셔서 매일 그들과 동행함을 기도를 통하여 현실로 실감하게 됨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제 제자들은 매일 기도로 주님과 교통하게 됨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없으며, 그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아무런 방해가 없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수시로 주님과 영적으로 만나고 교제하는 현실을 체험하게 됨으로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16:24). 동시에 성령의 권능으로 땅 끝까지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됨으로 ‘너희는 나의 하는 일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14:12)라고 확신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반드시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부터 출발하여 내 마음에 영접하여 그분을 믿게 됨으로 나의 모든 것을 그분에게 내려놓고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그 믿음은 나의 의지와 나의 원함에서 발동되어 내가 먼저 그분을 알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이 나를 찾아와 주셔서 나를 부르시고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 눈을 뜨게 해 주심으로 나의 티끌 같은 존재 가치를 인식함으로 그분 앞에 내 자신을 내려놓는 항복으로 그분의 도움을 청하는 애통이 터져 나오게 된다. 즉 기도는 바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깨달음이며, 그 자아인식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라는 애통이 터져 나오게 된다. 자신이 바로 티끌과 같은 ‘없음’이었으며, 죄로 인하여 한없이 부패한 존재이며, ‘죄와 허물로 죽은 자’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철저히 깨닫게 되는 가난한 심령에서 외치는 애통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은혜는 오직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애통함의 기도로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을 내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으며, 이제 그 무엇으로도 떨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되었으며, 그분의 믿음으로 매일 교제하는 사귐을 통하여 그분의 마음에 합당한 자녀로 지어져가고 있다.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믿는 예수는 고난과 수모와 죽임을 당한 십자가 예수이지,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영광을 취하려 오신 세상 왕으로 오신 분이 아니시며, 또한 인간에게 이 세상 부귀영화를 주어 이 세상의 삶을 형통케하여 주는 인간이 원하는 세상 임금으로 오신 분도 아니시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무엇이든지”는 육신의 욕망과 탐심과 정욕으로 이 세상의 것들을 구하는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내용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은 “무엇이든지”라는 무제한을 “아버지께서 영광을 얻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내용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말씀하신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25-34). 이와 같이 주님은 기도의 진의를 상세히 가르쳐 주시고 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즉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육신이 필요로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구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우리의 필요대로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있기 때문에, 육신을 위한 세속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초월하여 먼저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다. 즉 우리가 마땅히 구하여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잠깐 살다가 없어지는 육신의 원함이 아니라,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 하늘나라 백성의 의무라는 말씀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인 하늘나라에 돌아가기 위한 발판으로 주신 곧 없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에 허무한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영원한 하늘나라와 영생을 위한 하나님의 의를 소망하는 그 기도를 원하시며 그 기도만이 기쁨이 충만하게 됨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리면 우리가 구하여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주님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하늘나라의 왕이시며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도 이루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그리하여 그분은 굳이 이 죄악 된 세상에 종의 형체를 입고 어린 아기로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잉태하시고, 굳이 이 세상의 더러움과 추악함과 죄로 가득 찬 죄인들이 사는 곳을 상징하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으며, 굳이 구유에 눕히심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먹게 하셨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굳이 세상 죄인들로부터 온갖 수모와 매를 맞는 고난과 조롱과 수치를 다 당하셔야 하셨으며, 저주의 사형들인 십자가에 못을 박아 피를 흘리는 죽임을 당하셨다. 이사야의 말씀대로, “그가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며 그가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고 그가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사 53:5).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 안에 뿌리박고 있는 모든 죄의 유전을 송두리째 뽑아서 자신에게 전가시키고 죄를 짊어진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의 뿌리를 깡그리 철저히 도말하여 주셨다. 동시에 영으로는 자신의 본체이신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히 함께 사는 영생을 주실 수가 있었다.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 피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시기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삶이었다.
그러므로 기도는 “무엇을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만물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 피조물의 육신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게 하신 그 위대한 사실을 마음으로 깨닫게 됨으로 그분의 한없는 아가페 사랑에 나의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의탁하는 내려놓음과 항복과 신뢰이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자기를 낮추어 우리의 육신을 입고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이 세상 원리와 가치관과 완전히 대립되는 방법으로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살려 내시는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빌 2:6-8)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임하여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는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육신의 원함이 아니라, 반대로 나의 과거 현재 미래까지도 계획하신 하나님께 나의 인생 전체를 맡기고 그분의 의로운 인도에 나를 쳐서 복종할 수 있도록 내 ‘자아’가 죽음으로 내 안에서 그분의 의가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항복과 순종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에 ‘시행하시는’ 그 이유는 바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밝히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4:13). 즉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우리에게 주시는 그 응답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기에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합당한 기도를 하게 하시며, 그 기도는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말씀이다. 우리 주님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렸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함과 같이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 수난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수시로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이 들어주시는 기도는 바로 우리 주님이 살아내신 그 십자가 자기부인과 자기죽음의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여야 함을 계시하고 있다.
거듭난 성도는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야 하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성도는 이제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예수그리스도의 신부이기에 더는 육신이 원하는 이 세상의 것을 구할 수가 없다. 신랑의 뜻을 헤아리게 됨으로 신랑의 뜻과 일치하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를 하게끔 내안에서 성령님이 인도하여 주신다. 그리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이제는 너 자신의 이름으로 네가 원하는 육신의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그 기도는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실 것이며, 반드시 “시행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살아내신 자기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이 똑 같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기도이다. 육신이 살기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철저히 죽어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를 소망하며, 내 뜻이 포기되고 기각되는 항복이며, 오직 아버지의 뜻이 내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기도이다. 내가 죽어야 만이 영생으로 거듭나며, 또 다른 생명이 잉태되는 복음의 통로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 때문에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 그리하여 바울은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 4:12)라고 한 알의 밀이 죽음으로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는 복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 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라는 당당한 바울의 고백을 우리도 외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듭나 또 다른 이의 생명을 태동시켜 생명의 열매를 맺는 복음에 관한 기도는 “무엇이든지” 다 들어 주실 것이며, 반드시 “내 이름으로 구하라”는 조건을 붙이고 있다. ‘우리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육신을 위한 탐심에서 출발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는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기도이기에 무엇이든지 몽땅 이루어짐으로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즉 예수 이름으로 구하는 제한 하에서 그분의 의와 그분의 뜻을 구하는 기도는 무제한으로 시행하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 나의 요구 사항을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포기하는 항복으로 전적으로 그분의 뜻에 맡기는 순종이다. 기도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깨달음에서 시작한다. 자신이 바로 죄와 허물로 패역한 죄인으로 죽어있는 실체임을 투명하게 깨닫는데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은혜만을 구하게 되는 철저한 자기 부인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게 나의 영적 가난함을 인지하는 가난한 심령과 자신을 부인하는 애통으로, 진리를 갈망하는 굶주림과 의에 대한 목마름을 호소하는 그 기도는 반드시 시행하신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구원받은 성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정복되지 못한 내 옛사람의 성품들이 남아 있다. 미움, 시기, 질투, 욕심, 정욕, 교만, 이기심, 거짓과 위선 등등 수많은 세상 것들이 우리 육신 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죄들을 여전히 우리 안에 남기게 하신 이유는, 그렇게 끈질기게 뿌리박고 있는 내 속 마음의 탐심과 야망들을 경험하면서, 여전히 기회만 있으면 자신의 의와 가치를 챙기기 위해 열심을 부리는 외식적인 악행들을 경험하면서, ‘나는 어쩔 수 없는 도저히 깨끗한 것이 나올 수 없는 패역한 죄인이 맞구나’, ‘죄인중의 괴수가 바로 나’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만을 꼭 붙들라고 우리에게 항상 쉬지 말고 오직 기도로 숨 쉬는 순간마다 아버지만을 의지하며 신랑의 사랑으로 악에서 벗어나는 도움을 요청하게 하신다. 세상을 향하여서는 굶어서 목말라 죽게 하심으로 필사적으로 먹을 것과 마실 물을 찾는 그 절박한 갈증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로 인도하신다. 오직 하나님의 의만이 구원과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님과의 영적 사귐과 교제를 통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로 내려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각으로 애통하며, 주리고 목마름으로 진리를 간구하며, 내 안에서 당신이 거할 처소를 만들고 계시는 주님의 열심에 항복하여 이 세상의 것들이 잘려나가고 부서지고 삭제되어 내 ‘자아’가 죽기를 소원하게 되며, 그 기도가 바로 주님의 뜻과 일치되는 기도이기에 주님이 시행하여 주신다.
모든 일은 주님이 이루시는 사역임에도 왜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시는가?
신앙생활은 이 세상의 것을 얻어 높아지기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한 알의 밀이 되어 이 땅에서 썩어서 죽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지향하는 일이다. 즉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 종의 삶으로 다른 이를 섬기는 희생으로 생명이 잉태되고 열매가 맺히는 복음 전파에 동참하는 일이다. 그 사역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우리 주님이 하시는 일이기에 “내가 시행하리라”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신다. “내 이름으로 구하라”는 주어도 예수님이시고, 구하는 내용도 예수님의 것이며, 시행하시는 분도 예수님이라는 말씀이다. 다만 당신의 십자가 복음 사역에 우리를 동참시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구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고후 6:1), “하나님의 동역자”(고전 3:9)라고 즐겨 브른다. ‘동역’이란 같은 목적을 향하여 같은 일을 함께 하는 사역을 의미한다. 바울은 복음사역의 동역자 역할을 씨를 심는 것과 물주는 것에 비유하여, 고린도라는 밭에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라는 복음의 씨앗을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지만, 싹을 틔우고 자라나게 하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음으로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라고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다. 즉 모든 일은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며, 다만 우리의 유익을 위해 ‘동역자’로 세워주셨다는 것이다. 사역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리하여 바울은 ‘우리는 주님이 시키신 대로 여러분을 믿게 한 종들에 지나지 않는다’(고전 3:5)라고 확실하게 밝힌 것이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0:17-20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사역을 하게 하셨다. 그들은 전도하고 돌아와 하나님이 일으키신 기적들에 대한 놀라움과 신비스러운 체험으로 인해 몹시 흥분하여 정신없이 예수님께 보고를 하고 있었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주 의미 심중한 말씀을 주신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즉 내가 너희를 전도사역에 동역자로 보낸 것은 너희 이름을 어린양 생명책에 기록하여 영생을 주시는데 목적을 두셨다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도 주의 일을 위해 함께 고난과 수고와 충성에 동참한 성도들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빌 4:3). 그리고 고난과 시험가운데서도 끝까지 인내하고 이겨내는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들의 이름을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시인해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그 생명책은 ‘어린양의 생명책’이라는 이름 그대로 어린양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이름이 기록된 생명책이다. 하지만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5)라고 영원한 심판을 선고하고 있다. 주님은 바로 그 영원한 생명책에 우리 성도의 이름을 기록하여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사역에 동참시켜 주심으로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를 그 영원한 생명책에 기록하여 영생을 주시기 위해 주님이 친히 우리의 기도를 시행하여 주실 것이며, 그 ‘시행’은 주님이 이 세상에서 살아내신 십자가 삶을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낼 수 있도록 역사하시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담고 있다. 즉 자기부인과 자기죽음의 십자가 삶을 충실히 살아낼 수 있도록 그분이 친히 우리 안에서 시행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겠다는 의지적 약속이다.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14:13).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일이 바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수시로 강조하셨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성취였다면 우리 성도에게 받으시는 영광도 동일하게 자기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으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이다. 그 십자가 죽음의 삶은, 오로지 나만을 사랑하던 내 옛 사람이 죽고,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죄와 사망에서 살려내어 영생을 입혀주신 ‘주님의 사랑으로’ 바뀌는 것이 최종 목표이기에 주님은 한마디로 총괄하여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보터 더 큰 일을 하게 된다고 말씀하시고, 그 큰일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으로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행 1:8). 그리고 그 큰일, 즉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하도록 그분이 친히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의 삶속에서 이제 영적으로 수시로 그분과의 만남과 사귐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게 하시며, 나의 뜻을 접는 자기부인으로 내려가 오로지 아버지의 뜻이 내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하게 될 것이며, 그 기도는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나만을 사랑하던 옛 사람이 죽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새 사람으로 거듭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자로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며, 그것이 또한 신앙생활의 최종목적지이기에 주님은 한마디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4:15)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계명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성취와 성령의 거듭남으로 성령의 내주로 완성하게 됨으로 그 다음 구절에 주님은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 안에서 거처를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14:16).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14:23).
주님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킨 자라고 여러번 반복하여 말씀하심과 동시에 보혜사 성령님의 임재로만 가능함을 강조하신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1)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14:23).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킨 자이며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에게로 오셔서 거처를 삼으심으로 영원히 떨어질 수없는 ‘하나’를 이루심으로 계명을 지킨 자로 인정하여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14:23).
육신으로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사실 우리는 모태로부터 오로지 나 자신만을 사랑하는 자로 태어난 이기적인 존재이다. 때문에 나 자신보다 다른 이를 사랑할 수가 없으며 더더욱 나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태생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으로 태어난 본심으로는 절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가 없다. 인간은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사 48:8),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시 51:5)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이 땅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육으로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가 신이 되어 하나님처럼 행세하려는 망상에 빠진 '첫 인간 아담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그 영이 죽고, 세상을 향하여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자아'가 살아난 '마귀의 후손'들이다. 인간의 이러한 마귀적 본능을 뼈저리게 파악한 사도바울은 모든 인간은 한 가지로 무익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3-18)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즉 육은 마귀의 본능을 따라 자아 욕망과 탐심으로 악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욕심, 탐욕, 정욕, 시기 질투, 거짓, 무절제, 분쟁, 전쟁과 약탈, 폭행과 살인 등 육을 입은 인간은 이러한 본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자기만을 사랑하는’ 인간의 타고난 본능이다.
그리하여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인간은 오직 육신의 쾌락과 물질적 향유와 자기를 나타내고 자랑하는 명예와 인기에 목숨을 거는 자들이다. 모든 죄인을 대표하는 바리새인들은 마귀의 본능을 따라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겨 드렸지만 마음으로는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추구하며 하나님이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는 욕망과 야심을 채우는데 전혀 도움이 되어주지 않자 이내 발꿈치를 들어 하나님마저 밟으려고 하였고, 독사의 이빨을 드러내어 대적하고 물어뜯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마귀의 자식’ ‘독사의 새끼’ ‘훼칠한 무덤’이라고 저주하신 것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5-27). 이와 같이 인간은 철저한 악인으로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으며, 또한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항복으로 내려갈 수가 없으며, 더더욱 하나님을 사랑할 수없는 자들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대적하고 멸시하며 하나님을 죽이려는 자들임을 성경 전체가 반복하여 폭로하고 증거하고 있다.
계명의 완성과 페기
그럼에도 주님은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킨다”(14:15)고 말씀하신다. 그 계명의 지킴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생명의 희생으로 완성하실 것이며,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예수님의 계명지킴이 우리 것이 될 것이며,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될 것임을 약속하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사랑하셔서 친히 인간을 찾아와 주셔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희생으로 구원을 성취하여 주셨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즉 인간에게 생명과 사랑을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 12). 십자가 구원은 창세전에 하늘나라에서 이루어 놓으신 선한 뜻이며 사랑의 섭리이시다(엡 1:4 –11). 이 세상의 토대를 벗어나 하늘나라에서 먼저 성취된 뜻이 이 땅에서 ‘사랑’을 토대로 전개되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과 능력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심으로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모든 계명을 완성하여 주셨다.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는 말씀 그대로 하나님 자신이 친히 율법의 일점일획도 빠짐없이 십자가에서 모두 이루심으로 우리에게는 율법을 폐기하여 주셨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자기 육체로 페하셨으니”(엡 2:15), 이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함과 같다. 즉 자신의 의로운 죽음으로 율법을 완성시킴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어 저주 아래에 있는 죄인을 율법의 심판에서 속량하여 주셨다. 즉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함이라”(갈 2:19)함과 같이, 옛 죄인은 율법의 정죄로 십자가에서 예수의 육체와 함께 죽었고, 예수의 부활과 함께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 사람으로 부활하여 성령의 법으로 영원히 사는 생명을 얻은 것이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과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희생적 사랑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의’ 와 영광과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셨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셨다. 그 선포는 모든 것이 완전히 성취됨을 알리는 복음의 선포이다. 이는 창세전 하늘나라에서 완성된 구원의 뜻이 이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선포이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수천 년 동안 계시하신 십자가의 비밀과 모든 예언과 언약과 약속들을 다 이루셨다는 선포이며(눅 18:31),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문의 계명을 다 이루셨다는 선포였다.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페하셨으니”(엡 2:15). 즉 인간이 육신이 연약하여 지킬 수 없는 법을 이루시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 하사”(롬 8:3), 죄로 정한 몸이 율법에 대해 완전히 죽으므로(롬 7:4),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서는 율법의 모든 계명을 완전히 이루시는 공의를 나타내심과 동시에 우리에게는 율법이 페하시어,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완성과 폐함’이다. 그렇게 우리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그분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림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 주심으로 그분의 온전한 사랑 안에서 신부로 태어나 신랑과 한 몸이 된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여 그분 안에 하나로 함몰된 신부이기에 그분을 사랑하는 자로, 계명을 지킨 자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것이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5-8).
오직 십자가 사랑으로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 계명을 지킨 자가 되었다
십자가의 사랑은 바로 아버지께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온갖 고난과 수치와 수모를 모두 당하시고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가장 쓰디쓴 대가를 지불하신 희생이다. 이 사랑의 절정은 우리의 죄를 자신에게 전가시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죄의 고통과 죽음을 당하시고, 우리에게는 영원히 사는 생명을 전가시켜 주심으로 우리에게 향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8-9). 우리는 그분께서 지불한 극심한 고통과 죽음의 대가로 인하여 죄에서 영원히 구원받아 의롭다함을 받은 사랑하는 신부로 잉태된 자들이다 (롬 5:7). 십자가의 사랑이 성취되는 순간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은혜를 입은 아들이 되었고, 신부가 되어 영원히 하나가 된 것이며 그 상태가 바로 생명이며 사랑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14:23)라고 말씀하심으로, 그 ‘사랑’은 육신으로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사랑의 본체이신 그리스도 안에 하나로 함몰됨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기에 그분은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신 것이다. 즉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14:20) 하나로 연합된 그 상태가 바로 사랑의 성취이며 그렇게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만이 생명이 태동됨으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붙어있는 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사랑으로 또 다른 이의 생명이 태동되고 생명을 낳게 되어 오직 사랑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생명의 열매를 사랑과 계명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십자가 죽으심을 앞두고 마지막 세족예식에서 제자들에게 사랑의 계명을 ‘새 계명’으로 다시 주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사실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미 구약에서 율법으로 주셨다(레19:18). 그럼에도 예수님은 "새 계명"이라고 구약의 계명과 구분하여 말씀하신다. 율법으로 주신 사랑의 계명은 처음부터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도달할 수 없는, 즉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이었다. 인간은 본체가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존재이기에 신적 아가페 사랑이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이 세상에 있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사랑은 곧 생명이며 계명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즉 사랑의 본질은 멸망하지 않는 영생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육신적 선행, 자선, 희생 등 도덕성과 같은 이 세상을 토대로 한 인간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늘나라에서 영원을 사는 사랑이며 점도 흠도 없는 영에 속한 사랑이다. 그 사랑은 행위도 실천도 목숨도 받치는 인간적 사랑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아가페 신적 사랑이다. 때문에 주님이 말씀하신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하신 말씀은, 곧 사랑이시며 영생이신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계시하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랑의 본체이시며 그분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분을 떠나서는 곧 멸망과 죽음이기에 주님이 없는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는 영생을 주시기 위해, 즉 우리의 유익을 위해 “나를 사랑하라”를 계명으로 주신 것이다. 반드시 그분 사랑 안에 거하여야만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심으로 그 ‘계명’이 곧 말씀이며 그 말씀이 곧 영생임을 계시하신다. 즉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계명을 지킨 자이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오직 사랑의 본체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 그 사랑의 극치가 바로 죄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희생하신 십자가 사랑이다. 아무런 조건과 대가없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을 사랑하시는 완전한 아가페 사랑이시다.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사랑”이라고 부르며 성경 전체를 요약하면 바로 “사랑”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 사랑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 주셨고, 이제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예수님의 계명지킴이 우리 것이 됨으로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된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의로운 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사랑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자신의 점도 흠도 없는 영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입혀주셨다. 새 생명으로 잉태된 성도는 이제 십자가에서 이루어주신 사랑의 계명을 전가 받음으로 지키는 자가 되었으며 육신의 사랑을 초월하여 영혼을 사랑하는 자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생명의 열매를 맺는 사역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은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고, 현재 우리 안에서 함께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는 말씀은, 우리 스스로 의지를 발동하여 인간적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요구 사항이 아니다. 주님은 율법을 다 지켜 행하였다고 자랑하는 부자 청년에게 사랑을 율법의 총 강령으로 주시면서 사랑이 곧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또 다시 사랑을 ‘새 계명’으로 제시하셨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오직 십자가의 희생으로만 이루어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아가페 사랑임을 계시하여, 당신 자신이 ‘또 다른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하나가 된 전제하에서 완성됨을 제시하셨다. 즉 주님이 십자가에서 사랑의 계명을 다 이루어 주시고 이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그분의 영으로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태어나 영원히 함께 하는 하나로 완성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었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 형제에게 흘려주는 통로가 됨으로 ‘이웃 사랑의 계명’을 완성할 수가 있으며, 그 목표지점으로 정착됨을 계시하여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가야하는 목표지점이 바로 영원히 사랑하는 신랑과 하나가 되어 영원히 함께 사는 영생이기에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14:23),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라고 이미 그렇게 사랑하는 자로 운명 지어져 있음을 계시하신 것이며, 또한 우리를 사랑의 띠로 묶어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담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모든 일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다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지킴과 예수님 사랑은 성령의 오심으로 그분이 우리 안에서 이루신다는 말씀이다. 이에 대해 요한은 확실한 답을 주고 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 그 계명은 오직 우리가 주 안에 거하고 주가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의 임재로 이루어지며, 오직 사랑으로 하나로 연합을 이룰 때만이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이 지켜짐으로 생명이 잉태되며, 그렇게 사랑으로 생명의 열매가 맺힘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며, 하나님의 영광이 천하에 나타나게 됨을 제시하여 주신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오직 성령의 거듭남과 성령의 권능과 기도로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덮음으로 완성이 됨으로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주님이 부어주신 사랑을 이웃에게 흘러주는 자로 계명을 지킨 자가 된 것이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라고 이웃 사랑이 곧 율법의 완성(롬 13:10)이라고 말씀하신다.
성도는 그렇게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의 선포와 함께 모든 계명을 다 이루어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사랑의 계명을 지킨 자로 확정된 운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생명의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와 기도의 간구로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오롯이 순종하는 자로 정착된다. 이는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기에 반드시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이며, 그 기도는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서 먼저 십자가 삶을 살아내시고 우리를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으로 이끄는 기도이기에 반드시 이루어지며, 그 기도의 응답이 바로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14:13 새번역).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완성된 현실을 그대로 전가 받아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화 하여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이미 계명을 지킨 자들이 되었고, 이미 예수를 사랑하는 자가 되었고, 모든 기도의 응답을 다 받은 자가 되었음을 믿는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