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깊은 영적 의미

요한복음 (요 12:36-50)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18. 08:56

요 12:36-50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2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44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장차 일어날 하나님의 놀라운 일, 즉 은혜의 복음이 온 천하에 전파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되는 새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셨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어야만이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됨을 알지 못함으로 "율법에서 그리스도는 영원히 계신다고 하였는데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12:34)라고 반발하며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불신에 가득차서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 갇혀 있는 그들에게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36절)라고 빛이신 예수님 앞으로 나오도록 권면하시고는 이내 그들을 떠나서 숨으신 것이다(36). 즉 예수님 자신이 곧 빛이시니 빛이신 예수님 앞에 나아와 빛을 영접하여 빛 안에 거하라고 권면하시고는 빛이신 예수님이 그들에게는 빛을 숨겨 버리심으로 빛을 못 보게 눈을 가린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렇게 많은 표적을 행하셨음에도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며’(37), 그 이유는 바로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40)라고 사도 요한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빛과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이 자신을 숨기시는 이유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참 생명을 주시는 빛이시니 빛을 믿으라고 선포하시고는 이내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신 것이다”(36). 그리고 요한은 왜 예수님이 그들에게 빛을 숨기셨는지를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하신다. 즉 그들에게는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지 아니하심으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39)는 말씀이다.

사 6: 9-1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11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12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이스라엘에게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전하라고 하시고는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도록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여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지 못하게’(사 6:10) 하시겠다는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즉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제거하시고 장차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성취하실 것임을 계시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는” 완전한 죄와 사망에 치닫게 될 때 하나님께서 “거룩한 씨”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구원을 이루신다는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여 “그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6:13)라고 은혜의 복음을 제시하신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있는 패역한 죄인의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고, 티끌로 조성된 ‘없음’의 존재이며,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없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존재이며,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임이 드러나고 인정될 때까지 기다리시고 숨기신다는 말씀이다. 구약의 역사가 바로 인간의 온갖 패역함과 죄악들이 낱낱이 폭로되고 인간의 불가능함과 무능함이 완전히 드러나는 역사이며,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철저히 기각되는 역사이며, 그때, 하나님께서 준비하여 놓으신 거룩한 씨가 그루터기가 되어 다시 새로운 생명의 창조를 일으킬 것임을 계시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요한은 이사야의 말씀을 성취하시고자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믿지 못하게 그 눈과 귀를 막으셨으며 예수님도 그들에게는 자신을 숨기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36-38).

하나님께서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사람들로부터 숨겨 버리신 사건은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타락하자 생명나무를 숨기시는 데서부터이다. 에덴동산에서 첫 인간 아담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시도한 일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스스로 영생의 하나님을 떠나 죄와 죽음을 상징하는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온 세상에 죄와 사망이 이르게 한 사건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그리하여 하나님은 범죄 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좇아내시고 생명나무를 숨기시는 일을 먼저 하셨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즉 하나님께서 범죄 한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나무를 화염검으로 막고 그룹들을 두어 생명나무 실과를 숨겨 버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 의존적 존재인 인간이 이제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기가 자기를 주장하는 주인이 되어 스스로 타락한 마귀의 본성을 따라 사물을 판단하며, ‘자아’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사는 존재로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그 영이 죽고, 세상을 향하여서는 탐심과 욕망과 정욕으로 사는 육체가 되었으므로 죄인의 상태에서 생명나무 실과를 먹게 되면 영원한 죽음으로 다시는 살 가망이 없기 때문에 생명나무를 숨기신 것이다.

첫 인간 아담의 타락으로 이 땅의 존재는 죄인으로 태어나 죄만을 생산하여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됨을 선포하셨다(창 2:17).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죄의 삯은 사망이라”( 롬 6:23). 죄는 곧 멸망과 죽음이며,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과 생명임을 제시하고 있다. 오직 영만이 영원한 실상임을 드러내시기 위해 흙으로 인간의 육을 만드시고 죄를 상징하는 선악과를 주시고 ‘먹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후 사단의 유혹을 허락하셨다. 즉 육의 죽음을 거쳐 영원한 생명이 잉태되는 하늘에서 이룬 구원의 뜻을 이 땅에서 성취하시는데 목적을 두셨다. 그리하여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자신이 입고 있는 육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깨닫게 되었고, 인간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며 그 순종이 바로 인간이 살아 움직이는 유일한 근거임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본체가 생명이시기에 그분의 말씀이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순종으로 얻어지며, 생명의 말씀을 떠나서는 죽은 흙, 티끌에 불과한 ‘없음’의 존재라는 것을 처음부터 정해 놓으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12:48),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이와 같이 우리에게 향한 구원사역은 에덴동산 안에서 일어나는 타락으로부터 펼쳐진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나타내고 이루시기 위해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죄와 사망을 상징하는 선악과나무를 주셨다. 선악과나무의 실과를 먹어야 흙으로 빚어진 육신을 벗고 영원히 사는 영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흙으로 빚어진 육이 죽어야 영이 살기 때문에 육을 정죄하는 법을 주셔서 그 법으로 옛사람 죄인을 죽게 하시고, 영원히 사는 생명의 법, 즉 성령으로 새사람으로 잉태되는 영생의 은혜를 입혀주시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천지창조 전에 먼저 ‘어둠과 공허와 흑암’을 있게 하시고, 인간을 가장 비천한 나약한 흙으로 만드시고, 허상인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죄와 죽음을 상징하는 선악과나무를 먼저 주시고, 지킬 수 없는 계명을 주심으로 타락을 허락하셨다.

처음부터 비천한 흙으로 지음을 받은 나약한 육이 실상이 아니며, 이 땅에서 태어난 육은 이 세상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인생으로 주어진 육의 본능을 따라 어쩔 수 없이 육신이 원하는 욕망과 탐욕, 야망과 정욕과 같은 헛되고 헛된 공허한 삶을 살게 됨을 알게 하기 위해 선악과를 주신 것이며, 육을 입은 인간의 연약한 모습과 허무함을 드러내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계명을 주신 것이며, 영원한 구원과 생명이 오직 예수그리스도에게만 있음을 나타내어 알게 하기 위해 인간의 타락을 허락하신 것이다. 그리고 육체의 탐욕으로 ‘자아’에 집착하는 집요함과 도저히 끊어낼 수 없는 끈질긴 거머리 같은 패역한 죄성을 완전히 드러내어 알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여 4000년이란 구약의 역사를 주셨으며, 조상의 죄악된 혈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고 멸시하고 살해하는 바리새인들의 유대주의가 신약에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국은 ‘나’라는 우상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을 죽여 버리는 살인으로 폭로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여 주신 육적 한계를 초월할 수가 없다. 처음부터 노력과 힘으로 공로와 업적들을 쌓아서 행위의 의로움으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육신을 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육신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육체의 모든 저주와 죄를 짊어지시고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는 방법으로 구원의 의를 성취하셨다. 말씀하시기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 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 3-7).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열심히 제사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 지킴으로 의로운 자로 자처하며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족속이라는 선민사상과 우월성으로 자신들의 영광과 힘을 과시하며 구원받은 민족으로 자만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눈앞에 빛으로 나타나자 이들의 내면에 숨겨진 마귀적 본색이 여지없이 드러난 것이다. 그 기나긴 역사 동안 하나님을 섬기며 제사와 율법을 지킨다는 구실로 자신들의 거짓된 의와 썩은 영광을 추구하는 자신들에게만 속한 집단적 종교 놀이에 도취되어 있었음이 메시아의 등장으로 완전하게 폭로된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음에도 오히려 증오하는 광적인 기세로 예수님을 배척하고 멸시하였으며, 의로운 구원사역을 극구 대적하며, 자신들의 선악구조로 하나님의 아들을 ‘죄인’이라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악들로 스스로 심판의 근거를 쌓고 있었으며, 야심과 질투로 하나님의 아들을 적대시하는 원수가 된 것이다.

왜냐하면 메시아가 오셔서 이들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패역함과 사악함을 여지없이 지적하고 폭로하며, 이들의 자존심과 선민사상과 우월성을 깨고 부수고 이들의 율법적 행위와 공로를 완전히 부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내 메시아를 대적하고 죽이려는 악독한 궤계를 꾸몄으며 결국 십자가에 못을 박은 것이다. 이들이 목숨 걸고 지킨다는 그 율법으로 스스로 심판을 자초한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자신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 숭배자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영광과 이름을 취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자들이며; 안식일을 지킨다는 구실로 생명을 죽이는 외식하는 자들이며; 기득권을 행사하여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세상과 간음하는 자들이며; 진리의 말씀을 도용하여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고 약한 자를 억압하는 절도와 강도이며; 약한 자와 가난한 자와 병자들을 업신여기고 죄인이라 정죄하고 배척하는 난폭한 폭군이며; 자신들의 영광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살인하는 살인강도라는 죄악이 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적 인본주의적 패역함이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라고 하는 교회 안에서도 판을 치고 있다. 교회의 주인이 머리 되신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패역한 죄인이 주인이 되어버린 것이며,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들의 도우미로 전락되어 인간이 원하는 이 세상의 것을 채워주는 세상이 섬기는 맘몬의 신으로 개조한 것이며, 구원과 생명의 말씀이 인간들의 ‘자아’와 영광을 쌓는데 악용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며 바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다. 하나님 앞에서 티끌에 불과하며 진토와 거름 더미와 같은 존재들이 추구하는 의와 영광이란 바로 썩은 시체에 썩은 면류관을 씌우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러한 자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27-28)라고 폭로하신 것이다. 주님은 바로 그러한 자들로부터 자신을 숨기시며,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12:40)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기에”(12:43), 아무리 많은 증거를 보여주어도 아무리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여도 그들은 절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12:37).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는 구원

요한복음 첫 시작에서 사도 요한은, 참 빛이시며 참 생명이신 예수님이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되어 이 세상 어둠에 오셨음에도, 이 세상뿐만 아니라 그렇게 목숨을 걸고 율법과 제사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메시아를 손꼽아 기다리던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고 자고 한 유대인들마저 메시아이신 예수를 알아보지도 영접하지도 아니하였으며 오히려 극구 배척하고 대적하며 결국 죽이는 데까지 가게 된다. 구원은 하늘나라에서 이룬 뜻이 이 세상에서 성취되는,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목숨으로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고 아무 대가 없이 오직 당신의 택하신 자녀에게만 영생을 입혀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다. 그리하여 요한은 구원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3)라는 결론으로 혈통적 유대인의 선민사상을 부시는 선포를 한 것이다. 즉 구원은 혈통으로나 인간의 의지나 행위나 노력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절대로 불가능한,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주권이다. 구원은 오직 택함을 받은 당신의 백성에게만 비추어주는 생명의 빛이기에 세상 사람들에게는 숨겨져 있음으로 세상이 빛을 알아보지도 영접하지도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신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 지 아니하였으나” (요1:5, 9-11).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나의 주관적 믿음으로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영접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즉 나의 믿음의 행위로, 내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나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 순식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나의 믿음의 행위에 따라 구원을 받기도 하고 중간에 타락으로 취소되는 나의 주관적 믿음과 행위에 따라 변경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구원은, 창세전에 하늘나라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정하여 놓으시고 이루신 뜻이기에 중도에 변경할 수가 없는 묵시가 이 땅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즉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의 죽음을 통하여 영의 구원을 이루어주신 영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백성들을 생명책에 기록을 해 놓으셨으며 이를 요한은 “하나님께로 난 자들”(요 1:13)이라고 부르고, 바울은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사”(엡 1:4)라고 창세전에 이미 택함을 받은 자라고 하며, 예수님은 우리 성도를 ‘아버지께서 주신 자, 아버지에게 속한 자’(요 17:9)였다고 말씀하신다. 처음부터 하나님에게 속하여 있었던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엡 1:4) 이 땅에서 육을 입고 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존재해야 하며, 그 은혜에 의해서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우고 깨닫고 육신을 벗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영의 새사람으로 잉태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하나가 되어 다시 하늘나라로 복귀하는 것임을 이 세상 역사를 통하여 배우고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당신의 신부를 가리켜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나라에 속한 자로 말씀하셨으며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켜 이방인이요 나그네이며, 이 세상은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잠시 육으로 사는 타향이며, 우리의 본향은 하늘나라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온 인류를 위함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마 1:21). 그리하여 요한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혈통적 유대인들이 빛과 생명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빛을 배척하고 대적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알아보는 눈을 감기시고 은혜의 복음을 듣고 깨닫는 귀와 마음 문을 닫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12:40).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하늘나라의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인간의 육을 입고 우리를 찾아와 주셔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데 있다. 이는 창세전 하늘나라에서 계획하신 일이기에 인간의 동참이 없이 전적으로 그분 홀로 성취하신 구원의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그 어떤 노력도, 행위도, 의로움도, 조건도, 대가도 원치 않으신다. 그분은 죄인을 구원하려 오실 때 마구간을 택하여 태어나셨다. 마구간은 타락된 이 세상과 우리 자신의 죄 냄새와 누추한 모습을 상징한다. 그분은 우리 죄인 가운데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우리의 누추함과 더러운 죄 냄새, 환경의 지저분함을 개의치 않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추한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기 위해 마구간을 택하여 태어나셨다. 그분이 구유에 눕혀 있었다는 것은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 우리는 그분의 살과 피로 새로운 피조물인 그분의 신부로 태어난 존재임을 제시한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와 주셨고, 불러내시어 자신의 빛과 생명 안에 끌어당겨주심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죄가 용서되고, 아무 공로 없이 그분이 주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의로운 자녀로 인정하여 주신 것이다. 은혜는 오직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무 대가 없이 거저 받아주시는 죄 사함의 용서이다. 죄인을 ‘죄인’이라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사랑의 기적으로 베푸시는 구원의 능력이시다. 즉 구원은 나의 노력과 의지, 패역한 죄인의 모습과 상관없이 택함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분이 먼저 나를 찾아와 주셔서 이끌어 주심에 호응하는 믿음을 주셔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이시다. 그리하여 주님은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 12:47)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42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하나님께서 감추어 놓으신 생명의 빛을 하나님이 주신 영의 계시 없이 본다고 자고하고, 아직 십자가의 때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구원받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을 아예 영원히 보지 못하는 소경으로 만들어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39).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41). 하나님의 생명나무가 죄인들에게 공개가 되는 시점이 바로 십자가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도 전에 율법으로 눈을 떴다고 본다고 하고, 생명나무 실과를 먹었다고 구원받은 자로 자고하는 이들이 바로 죄와 어둠에 갇혀 있는 소경이며 죄인 그대로 심판에 이르게 됨을 지적하신다. 그리하여 주님은 너희가 소경이기에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 9:21)라고 너희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죄 속에서 죽는다고 선포하셨다.

이들은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 이심을 수많은 증거와 기적과 표적들로 보여주어도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고; 스스로 하나님을 안다고 열심히 제사로 섬기며 율법을 행하였지만, 사실은 자신들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였으며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진리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법으로 악용한 독사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차라리 맹인 됨을 인정하면 그래도 구원의 가망이 있으련만’, 맹인이면서도 본다고 고집하고 여전히 죄를 행하고 있으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으며”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4), 즉 죄 사함이 없는 영원한 죽음을 선언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과 메시아 대한 올바른 인식이 수립되지 않았으며 영적 구원에 대하여서는 완전 무지의 상태에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적하며, 자신들의 육적 탐심을 채우기 위해 이 세상 물질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바알신과 같은 이방 신들을 줄기차게 섬기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 수시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왔다. 그로 인하여 주변국의 침략을 받아 왔고, 노예로 끌려갔으며,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어갔고, 나라가 망할 때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적하며 우상숭배 행위를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조상들의 패역한 뿌리에서 유대인들이 갈망하는 메시아는 여전히 이 세상 것으로 육적 욕망을 채워주는 세상 임금과 같은 형상이었다. 그리하여 유대인 무리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부르자 이내 예수님을 육적 배를 채워주는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이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표적을 보자 민족 독립을 위한 정치적 메시아로 세우려고 한 것이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그러한 무리의 열광을 피하여 도망하셨으며 자신을 숨기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는 세상을 호령하며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는 왕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의 모습으로 무력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비참하게 죽는 당신의 목숨을 버리는 희생이었다.

예수님은 자신들만이 택함을 받은 족속이며 자신들만이 율법과 제사와 안식일과 약속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음으로 구원받은 월등한 민족으로 자만하는 그들의 종교행위를 전면 부정하셨다. 그들은 율법이 계시하는 진리는 저버리고 율법을 악용하여 사람들로부터 의인이라 칭함을 받아 존경과 높아지기를 추구하며, 자신들의 공로와 업적들을 쌓아서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는 일에 목숨 걸고 매진하고 있었다. 즉 율법의 진리를 왜곡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위엄과 영광을 얻는 방패로 삼게 됨으로 그 마음이 더욱 교만하고 완악하고 패역함으로 하나님마저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자리까지 가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들의 율법 지킴을 ‘마귀의 행사’라고 지적하시며 ‘마귀의 자식’이라고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에서 배제시키신 것이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12:39). 주님은 이들이 원하는 육적 욕구와 정치적 욕망과 오직 자신들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패역한 탐심과 거짓되고 외식된 종교행위를 여지없이 폭로하시고 선민사상을 부수며 율법적 의를 완전히 부정하시며 추호의 양보 없이 맞서서 비판하시고 저주하신 것이다. 더욱더 나아가서, 그들이 목숨같이 지키는 안식일을 의도적으로 범하시며, 그들이 제사를 드리고 있는 ‘성전을 헐라’고 외치시며, 성전에서 상을 뒤엎고 상인들을 좇아내시며 ‘너희가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분노하시며 너회가 바로 마귀의 자식이며 독사의 새끼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선언하신 것이다(요 8:44, 마 23:33).

이와 같이 오로지 자신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자는 절대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지도 믿을 수도 없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고 드러내어 믿지 못하는 유대 관원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자들을 가리켜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12:42-43) 라고 외식된 가증한 믿음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눅12:8-9)라고 밝히 말씀하신다. 자신의 안일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떳떳하게 시인하지 못하고 두려워 떠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러한 자들은 분명히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진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세상 권세자들을 두려워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초개처럼 버리는 자들에게 합당한 곳은 바로 불지옥이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4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 이로라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리시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며, 내가 하는 일이 곧 아버지의 일이라고 하시며, 아버지와 자신을 동등한 하나로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당신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당신을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며, 당신이 곧 “빛과 생명과 진리”이시기에 당신을 믿는 자들은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 이로라”(46).

‘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나를 보는 자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44-45)라고 말씀하신 진정한 의미를 우리는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살아내신 삶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육체를 입은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하나로 계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육체를 입으시고 육체의 삶으로 영의 아버지를 우리에게 계시하는 것이었다. 독생자 예수님의 성품과 속성과 능력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게 된다.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 아버지와 동격체를 지니고 계신다. 오직 그분만이 아버지를 대표하며, 아버지와 모든 것을 공유하시는 한 본질, 한 성품, 한 인격을 가진 아버지 품속에 하나로 계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말씀하심으로 영원 속에서 아버지와 하나로 계셨음을 말씀하신다(요 10: 30). 즉 본질상 아버지 품 안에 하나로 계시는 분이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함과 같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 없이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계셨느니라”(골 1:15-17). 만물은 그리스도로 인해 창조되었으며 아버지의 섭리대로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고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역사임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실제적으로 인간의 형상을 입고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탄생부터 시작된다. 영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에 대하여, 즉 그분의 전능하심과 사랑과 영생에 대하여, 흙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제한적 지식과 육적인 인식 속에서는 이해될 수도 또한 알 수도 없다. 그리하여 그분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여 죄인의 육신을 입으시고 죄인 속으로 들어오셔서 당신을 계시하심으로 오직 당신만이 구원이시며 생명이시며 진리 이심을 십자가에 죽으시는 방법으로 알게 하시고 믿게 하셨다. 그렇게 인간으로 오시게 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 하셨다. 즉 ‘인자’로 오신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와 이 세상을 초월하여 영생으로 이어지는 그 영원한 하늘나라를 알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만물의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아기로부터 태어나셨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예수’는 이 세상의 풍유를 가져다주는 이 세상의 물질과 힘과 권세를 과시하는 세상 임금이 아니며, 유대인들이 갈망하고 기대하는 화려한 다윗 왕국을 다시 건립하는 유대주의 왕도 아니시다. 그분은 분명 창세전 택하심을 받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는”(마 1:21)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라고 말씀하셨으며; 잃어버린 양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가 자기 이름을 부를 때 그분의 인도를 따른다고 하셨으며; 그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셨다(요10:3). 그분은 분명 ‘자기 백성’을 이 세상 죄에서 구원하여 당신의 나라로 이끌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처음부터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이 죄악된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분이 한 알의 밀이 되어 십자가에서 저주받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냄으로 우리에게는 구원과 생명과 영생이 임하게 되는 은혜가 된 것이다. 즉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우리의 영원한 주, 신랑이 되셔서 영원히 하나로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생을 살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3).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저주와 죄와 사망을 몽땅 짊어지시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영원한 주가 되셨다.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보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믿게 되었으며,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천국의 백성으로 영원을 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성취를 통하여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 즉 자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내 버릴 만큼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분임을 깨닫게 그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이해시키고 깨닫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택하셔서 4000년 넘는 동안 역사를 이끄셔서 설명하여 주시는 그렇게도 자상하시며 오래 참으시며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시며, 자비와 긍휼과 용서가 충만한 분이심을 알게 된 것이며,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는 위대하심과 능력과 생명의 근원이심을 깨닫고 믿게 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보는 자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12:44-45)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예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죄인에게 내어줌이 되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칭함을 받은 것이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지 않아도 심판을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씀은, 한마디로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행위의 의로움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즉 구원은 오직 한 알의 밀로 오신 예수님이 죄인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는 희생 밖에 다른 길이 없음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이 선물로 주어지게 됨을 강조하기 위해 주님은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첫 인간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여 타락하였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들인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 죄만을 생산하는 죄의 조성자, 죄의 종으로 살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주님이 한 알의 밀이 되어 죄인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아버지의 심판을 받아 내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속량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12:47)라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과 생명임을 확실히 제시하신다.

그런데 48절을 보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지 않아도 심판을 하지 않지만, 예수그리스도를 저버리고 당신의 말을 받지 아니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이가 있으니 곧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마지막 날에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예수그리스도를 저버리는 자는 바로 자신이 자신을 주장하는 주인이 되어 자기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적 행위로 의와 가치를 쌓아서 자신의 의와 영광을 과시하는 자들이며, 이들은 자신만을 사랑하며,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육체적 본능으로 그 마음에 탐심과 욕망과 정욕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을 ‘주’라 시인할 수도 또한 나의 삶을 주장하는 주인으로 영접하지도 믿지도 않는 자들이다. 이들은 오히려 자기 명예와 이름과 영광을 지키고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고 살해하는 독사로 나오게 된다. 이러한 자들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저버리고 말씀을 받지 않는” 완악한 독사들이다.

육체의 일을 도모하는 자들은 절대로 영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이며 또한 하나님께서도 이들에게는 영의 눈과 듣고 깨닫는 귀를 닫아버림으로 예수님이 이들에게 선포하신 생명의 말씀이 오히려 함정이 되고 올무가 되고 거치는 돌이 되어 넘어지고 부러질 것이라고 이미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사 8:14-15). 이스라엘의 두 집은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하나님께서 장차 보내주실 예수그리스도가 그들에게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시며, 함정과 올무가 된다고 말씀하셨으며, 그 말씀대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여 죽임으로 스스로 멸망의 심판을 자초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는 듣지만 마음으로 들은 적은 없었다. 그들이 망한 이유가 바로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며(암 8:11),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패역함으로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고 대적하는 대척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렘 7:13).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 나의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사 65:12). 하나님은 수시로 선지자들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지 않았고 거역하여 마른 뼈가 된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다시 말씀을 듣게 하여 말씀으로 살려 내심으로 오직 말씀에 대한 순종만이 생명임을 제시하신 사건이 바로 에스겔 37장에서 나오는 마른 뼈가 살아나는 사건이다.

에스겔 37: 1-10 에서,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자 진짜로 살아나서 큰 군대를 이룬 것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깊은 골짜기로 인도하시는데 그 골짜기에는 수많은 마른 뼈들이 흩어져 있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리고 모든 뼈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하신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을 살리시는데 먼저 말씀을 듣게 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을 선포하자 마른 뼈가 말씀을 듣고 생기를 받음으로 군대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오직 말씀과 성령으로만이 강력한 군대로 무장됨으로 악한 영을 제거하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으로 살아 올라오게 됨을 계시하셨다. 사람이 죽는 이유가 바로 첫 인간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불순종으로 죽음의 저주가 내려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시 말씀으로 생명을 회복시키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진리의 영이며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제 당신의 백성은 반드시 말씀을 일용할 양식으로 먹게 되며, 당신의 영인 성령으로 새사람으로 잉태하여 하늘의 백성으로 살게 됨을 계시하여 주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셨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48-51).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말씀이 곧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며,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의 말씀이심을 주님은 확실히 밝히고 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12:49-50).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슬픔에 잠겨있는 마루다에게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11:40)라고 주님이 주신 진리의 말씀을 생명으로 받아들이고 믿는다면, 곧 죽은 자가 살아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생명의 말씀을 “명령”이라고 부르신다. 이는 주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말씀 그 자체이기에 그 말씀이 창조의 능력과 죄를 사하는 주시는 것과 죄를 심판하시는 권세와 죽은 자를 살려내는 생명의 권능이며,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시켜 영생을 주시는 능력이신 절대적 진리이시기에 “명령”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명령”을 받은 자는 그 명령에 순종하게 되며 반드시 영생을 소유하게 됨으로 주님은 결론으로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요12:50)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창세기에서 그분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신약에서 말씀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으며, 말씀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라고 증거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진의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예를 든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제자들 중에 두 사람이 엠마오로 내려갈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과 동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여 슬픔에 잠겨있었다. 그때 주님은 성경 말씀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의 진의를 풀어주셨다. 그 순간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고 눈이 밝아져 주님을 알아보게 된다. 제자들은 육신의 눈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말씀이 그들의 마음의 눈을 뜨게 하자 부활체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자마자 부활체로 오신 주님이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이는 이제부터 예수그리스도는 눈에 보이게 우리에게 나타나 주시는 분이 아니라, 말씀으로 당신의 백성들의 마음속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말씀으로 당신을 계시하시며 말씀으로 동행하는 연합을 이루게 됨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이다 (눅 24:13-32).

그러므로 주님은 이제 말씀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시며,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며, 말씀으로 진리를 깨닫게 하시며, 말씀으로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을 주시며, 말씀으로 새 생명의 창조를 일으키신다. 그분의 말씀이 곧 생명을 잉태하시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목숨은 육에 속한 죽음으로 정해져 있지만, 말씀에서 나오는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 영의 생명이시기에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28)라고 주님은 당신의 말씀이 곧 영이시며, 생명이시기에 그분의 말씀에 거하면, 즉 말씀에서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첫 인간 아담에게 말씀을 계명으로 주셨다. 즉 그분의 말씀이 바로 창조이며, 생명이며, 영원히 변치 않는 반드시 성취되는 절대적 진리임을 계시하셨다. 즉 그분의 말씀 속에는 생명과 죽음, 은혜와 심판의 법칙이 함께 공존함을 알게 하기 위하여 두 가지 나무, 즉 생명나무에는 영생의 법으로, 선악과에는 죽음의 법으로 주셨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순종에는 영생으로, 반대로 그분의 말씀을 거역하는 불순종에는 심판과 죽음이라는 계명을 주심으로 이제 역사는 이 두 영역으로 두 세계가 공존하면서 서로 분리로 종말을 고할 것임을 계시하셨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법으로 받아들이고 지켜 행하는 율법에 묶여 종으로 사는 구약시대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이 임하는 빛과 말씀으로 펼쳐지는 그리스도의 신약시대를 확실히 구별하셨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인간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다는 것은, 죄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며,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거나 지킬 수 없는 완전히 불가능한 죄인임을 드러내어 깨닫게 하는 역할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그리하여 율법 아래 묶여있는 구약시대가 저주와 죽음의 심판이 선고되는 피의 역사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며, 율법이 한 번도 생명의 도구로 사용되지 못했던 것이다. 때문에 구약 전체가 율법으로 정죄당하고 심판받는 백성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티끌로 육을 입은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즉 율법이 가리키는 진리를 알아들을 수도 또한 깨달을 수도 없기 때문에 심판의 대상이며 또한 구원의 대상임을 알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율법을 주셨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율법과 제사의 완성자로 보내주셔서 자신의 의로 율법을 완성하여 공의를 이루시고, 우리에게는 지킬 수 없는 율법을 페하여 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여 주심으로’(갈 3:13)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의인으로 만들어 주셨다.

그분 자신이 영원한 희생 제물로 하나님에게 받쳐짐으로 자신의 의로운 생명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영원히 구원하여 자신의 점도 흠도 없는 의로운 생명으로 “은혜 위에 은혜가 더한” 충만으로 영생을 입혀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보혈로 모든 죄와 허물을 깨끗하게 없애주시는 십자가 구원은 예수그리스도 홀로 성취하신 구원이시기에 인간의 모든 것을 배제하여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로 입혀주시는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시다. 우리는 다만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진리의 말씀이 어떻게 이 역사와 나의 일생을 이끌고 가시는가에 대하여 이해하고 깨닫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이다. 그 말씀이 곧 진리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