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깊은 영적 의미

요한복음 (요 7:25-53)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19. 10:06

요 7: 25-53

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26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 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 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31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 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32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 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행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칭하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영광과 종교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점차적으로 마귀의 본성을 따라 예수님을 죽이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였다. 이들은 율법과 안식일까지 악용하여 예수님을 ‘안식일 범한 자’로 ‘신성모독 죄’로 ‘귀신들린 자’로 ‘저주받은 자’로 정죄하며 예수님을 잡으려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본문에서도 역시 율법을 지킨다는 구실로 오로지 자기 영광과 자기 자랑에만 집착되어 있는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며 죽이려고 하는지를 여러 가지 일화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본문에 보면, 예수살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예수님과 당국자들을 조롱하여 ‘우리가 저 사람이 어디서 온 사람인 줄을 아는데 당국자들은 저 사람을 진짜 그리스도인 줄 아는 것 아니냐?’ (7:26)라고 비냥거렸던 것이다. 즉 이들은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에 가난한 목수의 아들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7:28-29)라고 반박하신다.

사실 이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과 각종 질병에 걸린 자를 즉시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수많은 기적과 표적들을 보았고 들었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탄하였고 예수님을 쫓아다니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출신과 배경으로 인하여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도 인식하지도 못한 것이다. 이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만 판단하고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7:27)라고 자신들은 예수님을 안다고 우겼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나님을 알아보는 일은 인간이 원해서 또는 육적 지성으로 또는 이적과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주시는 영적 계시로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들에게 자신의 출신을 확실히 밝혀 주신다.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가 있으니 그분은 참 하나님이시라.’ 하지만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7:28-29). 즉 당신은 스스로 온 자가 아니라 ‘참이신’ 하나님이 보내 주셔서 온 자이며, 그에게서 난 ‘참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선언이다. 유대인들은 ‘참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들에게 나는 참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이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난 아들이며, 그러나 너희는 지금 나를 믿지 않고 도리어 죽이려고 하고 있으니 너희는 참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엄청난 내용의 선언을 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선민사상으로 열심히 섬겨드리는 종교행위로 하나님을 자신들에게만 속한 소유로 만들어 놓고 우월감과 특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의 이와 같은 선언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으며, 특히 ‘너희는 참하나님을 모른다’라는 선고는 그야말로 이들의 자존심을 뭉개버리는, 즉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까지 부인당하게 됨으로 더욱더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항상 자신은 하나님이 보내셔서 오셨으며 “하나님과 나는 하나다” 라고 반복적으로 말씀하심으로 이들은 예수님을 더욱 미워하였고 예수님을 잡고자 하였지만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 때가 이르지 아니하여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7:30). 비록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그 십자가의 때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이며,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진행되고 있었기에 이들 마음대로 예수님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31절에 보면, 무리 중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믿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믿은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표적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7:31)라고 메시아가 오시더라도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보다 더 많은 표적을 행하실 수 없다는 것이 믿음의 근거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기적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문둥병자,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표적들이 너무나 많기에 메시아가 온다 해도 예수님만큼은 행하실 수 없다고 말함으로 여전히 다른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 역시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그가 행하신 표적들을 보고 선지자로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 예수님은 여인에게 아무 기적도 행하지 않으시고 오직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알아보는 영의 계시를 주심으로,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믿고 영접하여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이시다’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그리스도”라고 외치고 그리스도를 전도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일은 표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있으며 그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주심으로 구원과 생명이 임하게 됨을 사마리아 여인을 통하여 보여주셨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게 되자 기득권을 행사하던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지위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아랫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잡고자 한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이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7:33-34)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곧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여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가게 됨을 계시하는 말씀이었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야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메시이었음이 천하가 알게 되며, 그럼에도 이들은 여전히 믿지 않게 됨으로 하나님 나라에 올수 없다는 계시적 말씀이다. 이들은 실제로 예수님 승천 이후에야 비로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다고 질책하였다. 유대인들은 끝끝내 완악한 고집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에게로 승천하셨다. 그리고 그의 제자 베드로는 성전에서 담대하게 ‘너희들이 죽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생명의 주’라고 증언한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행 3:14-15). 너희가 대적하고 핍박하여 십자가에 죽인 예수는, 너희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서 영화롭게 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이 조상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과 맺은 언약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오신 분이시며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음을 증언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 언약이 바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창 22:18)이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메시아가 오신다는 약속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대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소개함으로써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임을 강력하게 증거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지 약 2천년 만에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보내주셨고 그를 통해 언약을 성취하셨다.

베드로는 명백한 증언으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첫째, 예수님은 약속과 언약을 따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이시며 언약의 성취 자이시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백과 같이 스스로 오신 분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내주셔서 오셨으며, 아버지가 시키시는 일만 하시고 아버지가 주신 말씀만 전하시며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철저한 순종으로 아버지의 종이 된 삶을 살아내셨다 (사 53:3-6). 셋째, 예수님은 참으로 거룩하시고 참으로 의로우신 분이시다. 그에게는 궤사가 없으시며 점도 흠도 없는 오직 사랑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의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가장 의로운 사랑의 본체로 우리의 의가 되셔서 우리를 ‘의인’이라 칭하여 주셨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셨다. 그분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라고 말씀하시고 그 말씀대로 십자가 구원을 성취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입성하여 주시는 길이 되셨고, 생명의 떡이 되셔 매일 신령한 진리의 말씀을 일용할 양식으로 먹이시며, 자신과 영원히 함께하는 성령의 거듭남으로 연합을 이루어 주셨다. 때문에 그 누구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선포하신 것이다.

베드로의 성령 충만한 설교에 많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고 자신들의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바로 메시아임을 알게 되자 양심에 가책을 받아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탄식으로 후회하기 시작하였다 (행 2:37-41). 베드로는 깨닫는 이들에게 회개를 시킴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한 것이다. 그러나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같은 유대인들은 여전히 완악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 예수님에게 행한 악행으로 제자들을 대적하고 감옥에 가두고 때리는 핍박으로 죽이려고 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의 악행이 계속될 것임을 미리 알고 계셨기에 이들에게 향하여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7:34)라고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미리 선포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7:35-36)라고 엉뚱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죽이는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셔서 승천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잘 알고 있는 성경에서도 또한 선지자 중에서도 스스로 무덤 속에서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유대인 초막절 행사에 제사장들이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예루살렘 성전 앞에 붓는 의식으로 하나님께서 사막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을 마시게 하심을 기념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막에서 물이 없어 갈증이 나서 모세를 원망하며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여 지팡이로 반석을 치게 하여 반석에서 물을 폭포같이 쏟아부어 주셨다. 그 물은 강물을 이루어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든 가축들이 강물에서 풍족하게 물을 마시게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초막절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실로암 못에서 물을 퍼다 성전에 붙는 의식으로 하나님이 물을 쏟아주신 그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 마지막 날 8일째 되는 날에 초막절 완성자로 영원한 생수가 되어 당신의 백성들에게 쏟아부어 주실 것임을 계시하여 물을 붓는 그 성전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친 것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솟아나리라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7:38-39). 예수님은 성전을 자신의 몸으로 비유하시고 그 성전에서 강처럼 흘러나가는 생수를 성령님으로 비유하신 것이다.

물은 만물이 태어나고 자라고 활동하는 생명의 원천이다. 물이 없다면 곧 생명도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을 생수로, 생명의 원천으로 말씀하신다. 만물을 소생케 하고 기갈로 죽어가는 자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공급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그리하여 주님은 초막절에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떠다가 성전 제단에 뿌리고 있는 그 앞에 서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7:37-39) 라고 자신이 바로 그 초막절 완성자이시며, 이제 십자가 구원 성취로 그분이 직접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남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며 영원히 그분과 하나로 살 것임을 계시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4:14) 라고 자신을 ‘영생의 샘물’로 말씀하신다.

생수와 연관된 구약의 언약적 의미

우리는 왜 예수님 자신을 생수로, 성령님으로 표현하셨으며 어떠한 깊은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구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경에서 물이 처음으로 생수의 강으로 등장한 곳이 바로 에덴동산이다. 하나님은 하늘나라를 상징하는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인간을 그 동산에 옮겨 놓으시고 그 동산에 생수의 강을 첫 인간 아담에게 선물로 주셨다. 그리고 생수의 강을 밖으로 네 강으로 흘러나가게 하시고 당신의 은혜를 상징하는 이름을 붙여주셨다. 그 이름의 뜻이 바로 ‘풍성하다’; ‘달콤하다’; ‘터져 나가다’; ‘화살처럼 빠르다’ 이다. 바로 풍성하고, 달콤한 것이 온 세상을 향해 화살처럼, 터져 나가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는 장차 생명을 소생케 하는 생수가 예수그리스도로부터 터져 나와(십자가 예수 옆구리에서 나온 물과 피) 온 세상 사방으로 화살처럼 흘러나가 풍성하고 달콤한 새 생명을 입혀주시는 성령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신 것이다. 사도 요한이 증언하기를,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 22:1-2). 그리하여 주님은 그 샘물이 바로 자신임을 제시하신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4:13‐14).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7:38‐39). 그러므로 에덴동산에서 발원한 네 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옆구리에 피와 물을 쏟아내심으로 생수의 강이 되어 온 세상 사면팔방으로 흘러나가 생명을 소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 즉 복음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아의 시대에 와서 그 물이 어떠한 물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주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 (창 6:5), 물로 죄악된 인류를 진멸하시기로 정하신다.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창 6:7). 하지만 그 온 인류 중 오직 노아만 은혜를 입혀 노아에게 속한 8식구만 예비한 방주에 들여보내셔서 물 심판에서 구원하셨다. 여기서 물은 모든 죄악된 것들을 철저히 소멸하시는 세상 심판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물로 모든 죄악을 쓸어버리고, 오직 노아에게 은혜를 입혀 구원하신 후 새 하늘과 새 땅을 펼쳐주셨다. 노아의 홍수 사건은 타락한 인간들이 내어놓은 그 죄의 삯으로 자신들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게 됨을 보여준 심판이며, 인간의 죄악된 행실로 땅도 함께 물로 심판을 받게 됨을 보여주셨다. 이와 같이 물은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영원한 생수로 영생을 얻게 되지만, 믿지 않는 이 세상과 죄인들에게는 저주와 죽음으로 멸망시키시는 심판임을 확실히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홍해의 물세례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상 죄악된 애굽에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구원하시고, 홍해를 가르셔서 당신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홍해를 건너가게 하시고, 애급 군대는 홍해를 닫음으로 물로 몰살시키고 이스라엘을 세상 애급과 단절시킨 것이다. 이스라엘을 굳이 홍해를 건너가게 하신 것은, 과거 세상 애굽인으로 살던 옛사람의 수치가 물로 완전히 청산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즉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기" (겔 36:25) 때문이다. 옛 이스라엘이 물에 빠져 죽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으로 솟아 나와 약속의 가나안으로 향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사도바울은 이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고전 10:1-2).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다의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구별된 백성이며,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에게 속한 새 이스라엘로 태어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알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마지막 선지자 세례요한의 물세례이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세례 요한이 등장하기까지 약 400여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물이 없는 기갈을 겪고 있었다. 그러한 기갈에서 세례 요한의 나타남과 물세례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의 외침은 사막의 생수와 같이 유대인들의 갈급한 마음을 적셔주신 것이다. 많은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받은 것이다 (마 3:5-6). 물세례의 회개는,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 제사와 율법의 종에서 풀려나는 해방과 자유의 상징이며,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생명이 임하는 성령의 법으로 옮겨지는 은혜의 상징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하여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성령의 새 시대가 임하는 상징이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은 자신이 주는 세례는, 옛 성전과 율법에서 벗어나 광야로 이끌어내어 회개로 메시아를 영접하도록 준비를 시키기 위한 물세례임에 불과하며,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자신보다 더 크시며 진정 영생이 임하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며,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할 것이며,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 것임을 제시한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예수님은 한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의 생수를 선물로 주시기 위해 이방 땅 사마리아에 들어가셔서 우물가까지 찾아가 주셨다. 주님이 먼저 멸시받는 여인을 찾아가 주셨으며 자신이 바로 영생의 생수를 주시는 메시아임을 계시하여 주시고 생수를 선물로 주신 것이다. 즉 구원에는 혈통이나 인간의 그 어떤 조건과 자격과 노력을 배제하여 오직 불가항력적 은혜의 덮음으로 임하게 됨을 제시하여 주셨다. 주님은 하나님이 택하여 놓으신 신부는 그가 어디에 있든, 그가 무엇을 했든,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전혀 상관없이 직접 찾아가 주시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마시게 하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주시기 위해 신부를 만나는 장소를 육신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야곱의 ‘우물가’로 정하신 것이다. 우물가는 신랑이 신부를 찾아와 하나가 되는 사랑이 싹트고 생명이 잉태되는 아름다운 곳이다.

구약에서 이삭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얻은 곳이 바로 우물가이며 (창 24:13-15), 야곱도 우물가에서 아내 라헬을 만났고 (창 29:10-12), 모세도 우물가에서 아내 십보라를 만났다 (출 2:15-17). 이와 같이 우물가는 신랑이 신부를 찾아와서 만나는 사랑이 싹트는 곳이며, 갈증을 해소하는 물이 영원한 생명수로 바뀌는 장소로 등장한 것이다. 이는 장차 영원히 사랑하여 주시는 신랑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마시게 하심으로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 생명을 잉태시켜 주실 것임을 계시하여 주셨다. 그 구약의 계시대로 신약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앞에 등장한 여인들보다 비교할 수없이 하늘 위에서 오신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신랑을 영접하여 새 신부로 태어나게 됨을 계시하셨다. 즉 예수님이 우리를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 하늘나라 아버지를 떠나 이 세상에 있는 우리를 찾아와 우리와 한 몸을 이루는 혼인을 실제로 실행하여 보여주신 그림이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 21:6).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7:37-39).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물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제시하신 대로,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주시는 영원한 신랑이 되시기 위해, 약속하신 대로 십자가에 매달려 물과 피를 흘리셨다.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19: 34-37). 사도 요한은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 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요일 5:6)라고 증언하고 있다. 피와 물은 영원한 죄 사함과 생명을 잉태시키는 성령을 상징한다. 말씀하시기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 17:11). 그리하여 예수님은 마지막 성찬식에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8)라고 예수의 피가 곧 영원한 죄 사함과 생명임을 제시하여 주셨다.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 (6:53-54)라고 피를 마셔야 영생이 있다고 진실로 선언하셨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함께 흘러나온 것은,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의 허물을 씻어주시고 우리를 자신의 신부에 합당한 자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시키기 위해 피를 흘리셨으며 모든 물을 다 쏟아부어 주셨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에 “내가 목마르다”라는 외침과 함께 우리의 목마름을 전부 삼켜버리시기 위해, 즉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영원히 속량하여 주시기 위해 신 포도주를 마시고 “다 이루었다”는 선포로 숨을 거두셨다. 신 포도주는 묵은 포도주, 즉 율법을 상징한다.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페하셨으니” (엡 2:15), 즉 인간이 육신이 연약하여 지킬 수 없는 법을 이루시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 하사”(롬 8:3), 죄로 정한 몸이 율법에 대해 완전히 죽으므로(롬 7:4),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서는 율법의 모든 계명을 완전히 이루시는 동시에 우리에게는 율법이 페하시어,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완성과 폐함’을 선포하셨다.

“다 이루었다”는 선포로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쏟아져 흐름으로 우리의 죄가 사하여 지고 우리의 목마름이 영원히 해소된 것이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겔 36:25), 물이 죄와 허물을 씻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사도바울도 말씀하기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5:26-27). 그러므로 예수님이 흘리신 피와 물은, 죄를 없애기 위해 죄인으로 태어난 옛사람이 물세례를 받아 영원히 죽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마시고 살을 먹음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 즉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듭나 신랑과 혼인하여 영원히 한 몸이 되는 전체를 의미한다.

​오순절 성령 임함과 복음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쏟아 나온 물이 강물이 되어 온 세상에 폭포처럼 흘러나가는 복음의 새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7:38-39)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와 물이 곧 성령의 물결로 우리 안에 흘러들어와 배에서 생수의 강이 되어 사방으로 흘러나가게 됨을 미리 계시하여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일어난 사건이 바로 오순절 성령 임함이다. 하나님은 이제 성령의 사역으로 영적 구원과 함께 추수를 시작하실 것임을 계시하여 오순절을 성령강림의 날로 정해 놓으시고, 성령을 불로 내려주심으로 그 자리에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통하여 3,000여 명이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은혜와 성령의 사역이 도래됨을 보여주신 것이다 (행 2: 41).

오순절 이후, 십자가에서 흘린 물이 성령의 생수가 되어 우리 마음속에 흘러넘침으로 강물이 되어 사방에 흘러나가는 복음 전파가 현실이 된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3:38). 그동안 육신의 배에서 더럽고 추한 탐욕과 욕망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제 성령이 임함으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목마름을 해갈시키는 샘물의 통로가 될 것임을 미리 말씀으로 제시하여 주셨다. 즉 그 생수의 강은 예수님 옆구리에서 쏟아 나와 세상 곳곳에 있는 당신의 자녀의 배에 흘러 들어감을 의미하며, 이제 성령으로 채워진 배는 진리와 생명의 말씀으로 생물의 통로가 되어 죽어가고 황폐해진 사막에 흘러들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가 다시 생명으로 살아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임을 계시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12제자로부터 시작한 복음의 물결은 오순절을 타고 즉시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흘려나간 것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그렇게 그분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생명의 씨를 태동시키고 있다. 십자가의 삶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이 우리 안에 부어져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이 우리의 배에서 흘러나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됨으로 우리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표현으로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출생으로 믿지 못하는 무지한 유대인 무리들 (40절-52절)

40-44절을 보면, 그렇게 자기의 영광과 유익만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의 외식과 악랄한 독사로 완전하게 드러남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들은 서로 자신들의 편견과 고정관념과 고집과 오만으로 예수님을 마구 판단하며 쟁론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냐? 아니냐?’ 라는 논쟁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스스로 문제로 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출생지였다. 이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날 것임을 성경을 통해 알고 있었고 예수님은 실제로 성경이 예언한 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사람으로 불렸기에 그분의 출생지를 갈릴리 나사렛으로 스스로 정하고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정의한 것이다. 무지한 이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제시하는 구원과 생명에 관한 진리의 말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예수님의 출생을 놓고 논쟁함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모욕하며 불신에 빠진 것이다.

45-49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기 위해 하속들을 보냈지만 그들이 그냥 돌아온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무리들이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식한 자들임으로 예수를 좇은 것이라고 예수님을 포함하여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악랄한 정죄까지 한 것이다. 자신들은 율법과 성경에 박식한 학자이기 때문에 절대로 초라하고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비천한 출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뜻으로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는 욕설을 퍼부은 것이다. 그러나 이들 자신들이 바로 율법으로 저주받은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율법 지킴을 자랑하며, 율법으로 예수님을 판단하며, 율법으로 예수님을 저주하며, 율법으로 정죄하고 죽이려고 하고 있다. 율법이 이들에게 오히려 하나님을 죽이는 원인 제공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 율법주의에 빠져 율법으로 생명을 죽이는 마귀의 살인 행사이다 (8:44).

50-52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무리를 미혹하는 자로 몰고 가고, 예수님의 출생으로 그리스도이다 또는 아니라는 논쟁을 벌이며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율법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마음대로 정의하는 혼란 속에서 예수님을 대변하는 자로 니고데모가 등장하여 입을 연 것이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즉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보고 예수님의 행하신 표적의 의미를 파악하기 전에 율법으로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즉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행하신 표적으로는 그분이 죄인이 될 수가 없으며, 율법은 사람의 출생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그런 역할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변호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끈질게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은 니고데모를 향해서 잘 살펴보라고 말하며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오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나셔서 갈릴리를 주 활동 무대로 선택하셨을 뿐이지, 갈릴리에서 나신 분이 아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출생지마저도 정작 모르고 있었고 자기들 마음대로 넘겨짚어 진실을 왜곡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렇게 허무하게 논쟁만 불이다가 결국 영생의 주를 믿지 못함으로 스스로 영생의 주를 거절하고 자기 집으로 흩어져 버린 것이다 (7:53).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이자 율법을 가리키는 ‘이스라엘 선생’ 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을 보고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인정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분’으로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맞는지를 알고 싶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갔던 사람이다 (3:1-12).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의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들었고, 거듭남으로 고민하던 그가 더디어 거듭남을 체험함으로 영의 사람으로 전환되어 후에 예수님의 증인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그 무리 중에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는 눈과 귀를 열어주셨다. 오직 택함을 받은 자만 영의 일을 알아들으며, 예수님 자신도 오직 창세전 택함을 받은 영에 속한 자들만 자신을 알아보는 영의 계시를 주신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6:44),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6:46). 즉 영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창세전부터 택함을 받아 ‘하나님에게서 온 자’들이며, 예수님은 바로 그들을 찾아서 그들에게만 영의 눈을 열어주시며, 하늘의 일을 말씀하여 주신다. 오직 그들만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들으며, 따르며, 믿으며, 의지하며, 그분에게 속한 신부로 연합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선택에서 제외된 자는 출생부터 다르며 가는 길이 다르며 결말이 다르다. 이 땅에서 태어난 자들은 이 땅의 권세를 잡은 마귀로부터 태어난 마귀의 자식이며 이들의 결국은 지옥 불에 떨어지는 운명이다. 이 둘은 시작부터 결말까지 완전히 반대되는 상극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서로 소통할 수가 없다는 것을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을 통하여 확실히 보여주셨다. 그래서 빛이 이 땅에 임하자 즉각 어두운 땅에 속한 육적 존재들이 하늘나라에서 오신 예수를 대적하고 박해하고 죽이는 마귀 살인자로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을 ‘너회’로 구별하시고 ‘너회’는 절대로 나를 알 수도 또한 나 있는 곳에 올 수도 없다고 못을 박은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의 존재들에게 아예 구원의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4).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마 13:11).

우리는 민수기에서 불뱀과 놋뱀이 주는 교훈을 알고 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끝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하여 모세에게 돌을 던지자, 하나님은 심히 노하셔서 이들에게 가장 강력한 불뱀을 풀어 뱀의 독으로 즉사시킨 것이다 (민 21:6). 바로 이스라엘의 패역한 본성이 독뱀과 같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유대인들은 지금 자기들의 조상들의 악렬한 습성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더욱 완악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여 돌을 던지며 멸시하며 조롱하며 핍박하여 살해하게 되는 패역한 극악까지 가게 됨으로 스스로 독을 품은 목이 굳은 불뱀과 같은 독시임을 증명한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은 이들에게도 불뱀에게 물려죽는 심판을 내릴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지옥의 판결을 어떻게 피하겠느냐” (마 23:33)라고 이들의 정체가 바로 뱀이요 독사요 마귀이며 살인자임( 8:44)을 폭로하신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들의 이러한 궤사와 악랄함이 주는 교훈을 통하여, 유대인들의 마귀적 본성이 바로 우리 안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우리는 본래 마귀, 뱀의 유혹으로 타락한 존재이기에 우리 안에 있는 마귀의 악랄한 탐심과 욕망이 죄와 사망으로 끌고 감을 어찌할 수가 없다. 내 육에는 분명히 무서운 죄의 본능과 성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으며, 나의 타락된 존재를 바꿀 수도 없으며, 타고난 운명이어서 해결 방책이 없다는 뜻이다. 인간은 오직 육을 위해 살고 자신을 위해 살기에 자아의 욕망, 야심, 목적을 성취하는데 오히려 하나님마저 이용하여 자신의 유익을 챙기는 패역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유대인들의 패역한 역사를 통하여 처절하게 깨닫게 된다.

경건치 않는 우리가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분이 먼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택하셨기 때문이며, 온 인류 중 노아 한 사람만 은혜를 입혀주신 것과 같이, 열방 중 아브라함 한 사람만 불러내신 것과 같이, 이 세상 중에 우리를 택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아버지가 택하여 주신 자는 한 사람도 잃지 않는다고 약속하셨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39). 그러므로 아버지의 부르심에 선택된 자는 그 부르심에 호응하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주신다. “내 양은 내 음성을 안다” (요 10:14)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택함을 받았다는 그 이유 하나로, 똑같은 죄인으로 그분을 배신하고 거역하였음에도 우리를 끝까지 붙으시고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시며, 깨닫게 하시며, 결국 은혜를 입혀 믿음으로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이것이 선택받은 자가 누리는 특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