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깊은 영적 의미

요한복음 (1:1-8)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23. 21:41

요 1: 1-4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사도 요한은 첫 서두를 창세기 첫 서두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와 동일한 구조로 시작하고 있다. 태초부터, 즉 천지가 창조되기 전,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만물은 그분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음을 선포한다.

창세기 ‘태초’는,

직 천지가 창조되기 전 우주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 무의 상태였으며, 예수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임재 하시자 만물의 창조와 구원 역사가 개시됨을 선포하는 ‘태초’이다. 그분은 이제부터 빛으로 임재 하셔서 ‘혼돈’된 곳에 질서를, ‘공허’한 곳에 생명체를 채우시며, ‘흑암’의 죽음을 생명의 빛으로 충만케하시는 구원사역을 시작하실 것이며, 이는 태초부터 정하신 하나님의 뜻임을 계시한다. 하나님께서는 ‘빛’과 '생명'을 설명하시기 위해 먼저 ‘혼돈과 공허와 어둠’을 있게 하셨다. 즉 ‘은혜’의 충만을 설명하시기 위해 먼저 ‘공허’를 주셨으며, ‘영원한 생명’을 설명하시기 위해 먼저 ‘흑암’이라는 죽음의 상태를 있게 하셨으며, 하나님은 공의과 정의의 하나님이심을 설명하시기 위해 먼저 '혼돈'을 주셨다. 그리고, 빛이 임하자 틀과 질서가 세워지는 구별과 분리가 일어난 것이다. 하늘과 땅을 분리하심으로 끝없는 위의 하늘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고, 끝이 닿는 아래의 땅을 인간의 거처로 정하심으로 처음부터 하늘나라와 이 세상을 분리하셨다. 그리고 낮과 밤을 분리하여 빛과 어둠의 세계를 정하심으로, 장차 빛의 자녀는 하늘나라로 들림을 받게 되고, 어둠에 속한 자들은 이 어둠의 지옥에 남겨지게 될것임을 첫 창조에서 계시하셨다.

이와 같이 천지 창조전, 먼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있게 하신 것은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은 본래 혼돈 속에서 공허에 시달리며 캄캄한 어둠에서 헤매는 죽음에 속한 땅의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인간을 창조하시자 곧바로 인간에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총칭인 ‘선악과나무’를 죄와 죽음의 상징으로 먼저 주셨다. 인간은 선악과를 통하여 죄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과 거룩하심과 영광되심을 알게 되었으며, 그분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오래 참으심의 성품을 알게 되었으며, 죽음을 통하여 비로소 생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됨으로, 구원과 영생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은혜를 입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필수적으로 주신 것들이며, 진리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믿음으로 구원과 생명을 입혀 주시기 위해 모형으로, 몽학선생으로 주신 것이다. 즉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내용으로 담아서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설명하시기 위해 이 세상을 주셨으며, 때문에 하나님은 하늘나라에서 이룬 뜻대로 역사를 주관하신다.

요한복음의 ‘태초’는,

창세기에서 빛으로 임재 하셔서 만물을 창조하신 그 빛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예수그리스도이시며, 이제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이 어둠의 세상에 빛과 말씀으로 내려오셔서 죄와 허물로, 즉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죽음에 빠져있는 당신의 백성을 살려 내시는 새 생명의 창조를 일으킬 것임을 선포하는 복음의 ‘태초’이다. 즉 그분이 빛과 생명의 말씀으로 이 세상에 직접 내려오셔서 아버지에게 속한 자들을 이 세상 죄와 죽음에서 살려내어 아버지 나라로 복귀시키는 은혜의 시대가 도래 되었음을 선포하는 ‘태초’이다. 그 구원의 ‘태초’는 영원 전부터 창세전 하늘나라에서 이미 이루어진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하늘의 묵시를 이 땅에 펼쳐 놓은 것이 바로 천지창조와 역사이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정확하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선언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함으로 이 세상에서 가시적으로 전개되는 모든 일은 태초부터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진 뜻이며, 때문에 역사는 예수그리스도만을 나타내기 위해 창조된 것이며, 그분을 위해 존재하고 움직이며, 그분이 친히 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며 심판하시는 주권자임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 그리하여 요한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라고 만물의 근원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이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으며, 우리와 함께 계심을 선포한다.

하늘나라에서 계획하신 인류에 대한 구원 비밀이 빛과 생명으로 개시된 것이다. 창세기 1: 3 에서 주신 빛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어 보여주고 설명하시기 위한 창조의 빛이었고; 요한복음에서 오신 빛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즉 죄와 사망에 빠진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영생의 빛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사역은 빛으로 천지창조가 시작되고(창 1:3), 빛으로 임재 하셨으며(요 1:4-9), 영광으로 재림하신다고 약속하셨다(마 24:30; 26:64). 즉 그 ‘빛’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 빛과 생명은 하나님의 본체이며 속성이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예수그리스도를 ‘빛’이라고 선언하시고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라고 선포한다. 이제 빛이신 그분이 육신을 입고 직접 우리에게 내려오셔서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며, 말씀으로 그분이 바로 생명이시며, 천국이시며, 영원한 진리이심을 나타내어 설명하여 주실 것이며, 말씀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당신의 영으로 새 창조를 일으킬 것임을 제시하여 사도 요한은 한마디로 요약하여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라고 복음의 핵심을 선포한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1). 사도 요한은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말씀’이라고 선포함으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되는 유일한 길이 바로 말씀임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 내셨느니라”(요 1:18). 이 땅의 티끌로 피조된 육신으로는 절대로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볼 수 있거나, 알거나, 인식하거나,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거나 구하는 자가 없다(롬 3:11).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말씀으로 보내주심으로, 말씀으로 그분을 보게 되며, 말씀으로 그분을 알아가게 되며, 말씀으로 진리를 깨닫게 되며, 말씀으로 그분을 나의 구원자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생명에 이르게 됨을 제시한다. 즉 그분은 이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시는 방법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신다는 말씀이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무한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다 설명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분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진리의 말씀으로 오셔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전달하시며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24:35).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말이 그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8). 이와 같이 말씀이 곧 예수그리스도 자신이시며 심판의 권세가 말씀에 있다고 하신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성경으로 기록하여 매일 일용할 양식으로 주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마 4:4).

말씀은 곧 생명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첫 인간 아담에게 말씀을 계명으로 주셔서 당신의 말씀이 곧 생명임을 가르쳐 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말씀대로, 아담이 하나님께서 “명하여 이르신 말씀”을 거역하자 곧바로 ‘죽음’이 임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절대로 살수 없다는 진리를 선악과나무를 통하여 알게 하셨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면 곧 죽음이라는 것을 첫 인간 아담을 통하여 알게 하셨다. 죽음이란, 곧 하나님의 말씀과 단절되는, 즉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말씀을 거역하여 당신의 말씀과 단절된 상태를 '죽음'으로 선포하셨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육신의 소욕을 좇아 죽음으로 달리고 있기에 이 세상을 죽은 자들의 세상, 멸망의 세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죽음이라는 저주 속에서 태어나는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어 죽음을 피할 수 없음으로, 모든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었다"(엡 2:1)고 말한다. 성경은 잠시 사는 육체의 목숨을 생명이라 하지 않고 죽음이라고 하고(엡 2:5), 하나님의 말씀으로 잉태된 자를 생명이 있다고 한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 : 63).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죄와 죽음에 빠져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는 선악과를 따 먹지 않는 자로 영원히 함께 사는 자로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셨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그리스도의 임재를 ‘말씀’이라고 선언한다. 만물은 바로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기에’ 생명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말씀하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3). 때문에 그분은 말씀으로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며, 말씀으로 교통하시며,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며, 말씀으로 그분을 믿게 하시며, 말씀으로 영접하여 구원과 생명을 얻게 하신다. 우리가 그분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소통의 매개체는 바로 성경 말씀이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그분을 알아가며, 말씀으로 그분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져감을 깨닫게 되며, 말씀으로 인도를 받게 되며, 말씀으로 그분이 나와 동행함을 체험하게 되며, 말씀을 붙들고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간다.

그리하여 주님은 성경 말씀에서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시고 그 성경 말씀이 바로 예수님 자신에 대한 증언이라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9).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 17:3). 즉 하늘나라에서 완성된 묵시가 바로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에 관한 글이며, 이 세상에서 말씀으로 펼쳐졌으며, 말씀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새 생명의 창조를 일으키고 있음을 제시하여 ‘예수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4)라고 확고한 믿음으로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4-8: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되고 존재함으로 오직 그분 안에서만 생명이 있다는 증거이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선언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 11: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 14:6);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요 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 8:12).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빛으로 임재 하셔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그 ‘말씀'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며,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이제 그분이 우리 인간의 육신을 입고 실체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 앞에 나타나셨다고 선포한다. 그럼에도 이 세상 어둠은 그가 바로 메시아임을 알아보지 못함으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 세상을 한 마디로 “어둠”이라 부른다.

요한은 창세기 1장의 구조와 동일하게 이 세상을 한마디로 ‘어둠’이라고 부르고 예수그리스도를 ‘빛’ ‘말씀’이라고 선언한다. 요한은 창세기 서두에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원시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빛으로 보내셔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과 동일하게,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죄인들 마음에 “각자에게 비추는 빛으로”(요 1:10) 직접 뚫고 들어오셔서 혼돈에 질서를, 공허에 은혜를, 흑암의 죽음에 생명으로 새 창조를 일으키는 ‘복음의 창세기’가 개시됨을 선포하고 있다. 즉 창세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시작이었으며, 이제 그분이 육신을 입고 직접 이 어둠의 세상에 뚫고 들어오셔서 구약의 모든 예언과 약속과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실 것이며,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과 생명이 죄인에게 임하게 되는 예수그리스도의 새 시대가 도래 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다. 그리하여 요한은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 1:16-17)라고 구약 율법의 시대는 끝나고, 그리스도 은혜의 시대가 도래됨을 선언하고 있다.

창세전, 아직 빛이 임하기 전, 우주의 원시상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 2)라고 선포한다. 이는 하나님의 영, 곧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우주를 덮는 형국으로, 즉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천지창조가 시작됨을 계시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은혜가 덮어지지 않으면,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죽음의 상태, 없음의 상태라는 것을 먼저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빛이며 생명이며 은혜이며 영광과 진리 이심을 드러내어 설명하여 주시기 위해 먼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있게 하셨다. 이제 그 빛의 대척점에 있는 ‘어두움’은 빛에 의하여 폭로되고, ‘어둠’은 빛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대적하고 핍박하여 꺼버릴 것임을 계시하여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니” (요 1:11)라고 이 세상 어둠은 절대로 빛을 알아보지 못함을 지적한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메시아가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실체로 죄인 앞에 나타나 죄인과 함께 있음에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도 영접하지도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는 것은, 이 세상이 바로 ‘어둠과 공허와 혼돈’이며, 그러한 어둠 속에 사는 모든 인간은 눈뜬 소경이기에 하나님이 빛으로 오셨음에도 빛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더 사랑하더라는 것이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어둠에 속한 인간은 태생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에’, 생명의 빛을 찾거나 구하지도 않으며, 오리려 빛을 배척하고 꺼버릴 수밖에 없는 죄인의 실존을 말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 함과 같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창세전 당신에게 속한 자들만 이 세상 어둠에서 빼내어 빛을 알아보는 눈과 귀를 열어주시며, 빛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먼저 빛을 증언하는 한 선지자를 보내셨는데 그 선지자가 바로 세례요한이다. 세례요한은 어둠에 갇혀있는 죄인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빨리 그 죽음의 어둠에서 나와 빛으로 오신 천국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회개’를 외치는 소리로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 앞서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1:6-8).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가 참 빛임을' 증거 하는 구약 마지막 선지자였다 (요 1:7). 그는 예로부터 많은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증거한 사람으로 육신으로 오신 메시야를 직접 바라보면서 그가 바로 죄인을 이 세상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와 주신 참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이심을 증거 한 것이다. 그의 태어남에 대하여 이사야는 예언하기를,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사 40: 3-5).

이사야의 말씀대로 성도는 세례 요한의 인생처럼 오로지 빛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정해져 있음을 제시한다. 세례 요한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자인 것 같이, 성도는 이 땅에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계획속에서 태어난 자들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말씀하셨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요 17:6-7). 성도는 창세전부터 아버지에게 속한 자였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아버지께로서 온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성도는 세례 요한처럼 증인의 삶, 증거의 삶을 살아가는 목적으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너희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성도의 지향성을 제시하셨다. 성도에게 있어서 그 어떤 것도 우발적으로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없다. 성도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시기 위한 목적으로 태어나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하신 섭리대로 잠시 이 세상 광야에서 나그네의 인생을 사는 것뿐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섭리대로 이끌려가는 삶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하나님께서 홀로 계획하시고 독립적으로 이루어 내시는 완전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끌러 가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도 또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인간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한 것도 또한 할 수도 없는 ‘없음’의 존재이다. 티끌로 만들어진 인간의 그 어떤 생각도 노력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전혀 개입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절대로 인간에게 포착되어 인식되는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빛이 이 세상 어두움을 비추고 있는데도 어둠은 빛을 알 수가 없음으로 빛을 싫어하며 배척하고 대적하며 꺼버리는 형국으로 악이 드러나 심판의 근거를 스스로 쌓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 빛이 무엇을 가리키며, 왜 이 땅에 보내셨으며,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지독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알리시기 위해 세례 요한을 빛을 설명하고 증거하는 역할로 보내주셨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앞서온 자였지만 자신을 가리켜 ‘장차 오실 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하지 못 한다’고 했고,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29-30) 라고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낸 의도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자기에게 허락하신 자리에서 기쁨 충만으로 충성을 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