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영적 계시

로마서 (1: 7) 바울이 말하는 “은혜와 평강”의 참 의미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24. 05:14

롬 1:7

7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은혜와 평강은 하나이며 무상으로 입혀지는 선물이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입어 평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평강으로 임하셨음을 확신하여 준다. 바울은 서신마다 (롬 1:7, 갈 1:3, 엡1:2, 빌 1:2…) 은혜와 평강이 성도 안에 이미 임재하고 있음을 반복하여 확인시켜 준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그 어떠한 환경과 조건과 상황 속에서도, 고난과 핍박과 순교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주신 평강을 느낄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는 이 세상에 없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만 누리게 되는 하늘나라 평강을 말한다. 그리하여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라고 위로하신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첫 번째로 주신 선물이 바로 ‘평강’이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이제부터 십자가 피의 대가로 아버지와 화목케 된 영원한 평강을 누릴 것이며, 이제 그분이 평강의 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영원히 하나로 동행함으로 성도의 삶 자체가 평강의 삶임을 제시하시고 선포하셨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 6:25-26).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무상으로 입혀지는 선물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이미 영생의 평강을 소유한 자이기에 바울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는 확신으로 선포하고 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희생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대가로 우리에게 선물로 입혀진 은혜이며 평강이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6). 그분은 본체가 평강의 왕이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3-26). 하나님은 죄인과 하나가 되는 화목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세웠으며, 십자가로 성취하셨다. 그리고 십자가 피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는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탄생되는 연합으로 평강이 내 안에 임하였다.

이사야에서 좀 더 선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예수그리스도는 바로 그 구원과 영생의 평강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며,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신 분이시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영원한 평강이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던 당신의 백성들의 모든 죄가 사하여 지고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온 하나님과의 연합을 평강이라 하고, 성도는 그 평강을 누리고 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없었던 죄인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하나가 된 것이며 그 하나로 연합된 상태가 바로 평강이다. 그분이 자신의 생명으로 입혀주신 은혜와 평강이기에 그분의 속성을 따라 영원을 사는 하늘나라의 평강이 우리 안에 임한 것이다.

은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은혜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정하신 자들을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입혀주시는 무조건적이고도 자발적인 사랑의 열정이시다. 은혜의 핵심은, 내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나를 당신의 자녀로 택하셨다는 그 이유 하나로 나를 이 세상 죄와 죽음의 멸망에서 건져내어 당신의 품에 넣어서 새로운 생명으로 잉태시켜 영원히 당신과 하나로 연합을 이루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권과 사랑의 열정으로부터 비롯됨을 말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티끌로 만들어진 연약한 육을 입은 무력한 존재이며, 죄인으로 타고난 본능으로 자아에만 굶주린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없으며 오히려 끝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며 배척하고 반항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인내와 용서와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멈추지 않으시며, 오로지 당신의 자녀에게만 구원과 영생을 입혀주시는 편애와 은총임을 나타내신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 145:8).

죄인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죽음에 처해 있을 때 그분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주셔서 우리의 손을 잡고 구원으로 이끌어 주셨기에 죽음에서 살아난 것이다. 때문에 그분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오직 아가페 사랑으로 우리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주시는 일이 그분의 행사이며, 이는 창세전에 하늘나라에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선한 뜻이다. 때문에 그분은 인간의 그 어떤 죄도, 반항도 대적도 전혀 개의치 아니하시고 끝까지 당신의 선한 뜻대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며 당신의 은혜를 입혀 당신의 자녀로 잉태시키시는 완성으로 강권적으로 끌고 가신다. 때문에 인간의 그 어떤 요소도 끼어들 수 없는,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공로도 섞이지 않는, 완전한 은혜이시며 온전한 사랑이시다. 만약 인간의 노력과 행위로 얻어진다면 그것은 은혜라고 말할 수 없으며, 만약 구원이 인간의 자발적인 의지와 행위와 공력으로 이루어지는 합작품이라 한다면, 그 구원에는 죄인의 악이 섞어있기에 영생하는 생명을 잉태할 수가 없다. 이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엡 2:5).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옙 2:8-9). 이것이 바로 무상으로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값없이 입혀지는 은혜라는 선물이다.

이와 같이 은혜는 오직 그분이 원해서 자발적으로 베풀어주시는 선물이기에 그 은혜를 받는 대상이 의가 있든 없든, 일을 하든 안 하든, 경건하든 안 하든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나를 구원하여 주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는 의로우시며 선이시며 진리이시며 영생이시기에 그분 안에 하나로 함몰된 나도 그분의 속성을 따라 의롭다고 칭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창세전부터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구원을 선물로 주시기로 정하셨고 성취하셨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웹 2:8). 선물은 내 의지와 뜻과 행위의 노력과 상관없이 무상으로 얻어지는 기쁜 일이다. 이르기를,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5-8).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전 15:10). 그분이 먼저 나를 찾아와 주셔서 나의 손을 이끌어 당신의 품에 안겨 주셨기에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받은 것임을 바울은 외친 것이다. 주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수 없으니” (요 6:44)함과 같이, 구원과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입혀지는 창세전 하나님께서 정하신 선한 뜻이다.

사도 바울은 회심 전 자신을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의로운 자라고 말한다.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6). 그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자로 자칭하면서 실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생명이신 예수를 핍박하는 원수요, 외식하는 거짓이요, 자신의 말대로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딤전 1:13). 그런 바울을 어떻게 의롭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런 괴수를 어떻게 복음의 선구자로 쓰실 수가 있단 말인가. 바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정체성마저 깨닫지 못하였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여 오히려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께 대적하여 진리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사신 교회를 박해하는 원수가 된 것이다. 그런 무지한 바울에게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 불러주시고 은혜를 입혀주셨기에 그의 범죄가 용서되고, 옛 죄인을 벗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 복음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바울 자신의 고백처럼 사울이 바울이 되어 완전히 예수에게 잡힌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와 믿음이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전 15:10).

예를 들면, 문둥병 환자가 온몸이 다 썩어서 눈도 코도 빠지고 손가락도 떨어지고 몸에서는 고름과 썩은 냄새로 도저히 인간으로 알아볼 수가 없는 죽음에 처해 있는 그에게 무슨 의가 있으며 행위가 나오겠는가? 우리가 바로 문둥병 환자처럼 죄로 곪아 터지고 썩어 들어가고 있음에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죽은 자와 방불한 자들이다. 겉모습은 멀쩡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열린 무덤”과 같이 목구멍까지 죄가 차 있는 썩은 송장과 같다. 그렇게 더럽고 악취가 나는 우리를 찾아 주시고 끌어안고 자신의 의로운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게 하시고, 자신의 찬란한 의의 옷을 입혀서 아들이라 칭하시고 하늘나라로 인도하신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썩은 냄새가 나는 죄뿐이다.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더러운 죄가 제거되고, 의의 옷을 입혀주심으로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분이 입혀주시는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롬 3:24) 들이다. 이것이 바로 조건 없이,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이며, 경건치 아니한 죄인을 사랑하시는 증표이다. 오직 그분만 완벽하고 거룩하시면, 우리가 그 어떤 죄를 졌던 상관없이 다만 그분의 거룩한 빛 안에 들어가 그분과 하나로 함몰되면, 우리는 그분의 의로운 속성을 따라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며 아들이 되며 영화로운 신부가 된다. 그리하여 바울은 서신마다 주안에서 은혜와 평강을 매일 누리기를 원하고 또 원한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입혀주신 은혜와 평강

사도바울은 집요하게 모든 서신의 서두와 끝말을 한결같이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은혜와 평강을 하나로 묶어서 복음의 핵심을 선언하고 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의 전체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와 ‘예수그리스도의 평강’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여 아들로 태어나는 화평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성도에게 그리스도의 평강이 임하게 되는 근원이며, 그 영생의 평강이 바로 평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시다. 그리하여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안에 있다'고 선포하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세 번씩이나 반복하여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찌어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십자가로 이루어주신 ‘평강’(요 20:19-20)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평강’을 선물하실 때, 십자가에 못 박힌 손자국과 창으로 찔림을 받은 옆구리를 내밀어 보여주셨다. 이는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성취되었음을 증거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과 창으로 찔린 옆구리에서 흘린 보혈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하여 짐으로 하나님과 화평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평강’이다. 바울이 영성으로 이르기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4-16). 십자가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허시고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만드신 것과 같이 그분 또한 우리의 소유가 되는 하나의 연합으로 화평을 이루어 주셨다.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평강’ (요 20:21-23)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선포하실 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라고 성령을 부어주셨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제자들에게 평강을 입혀주셔서 땅 끝까지 복음 전파에 보내실 것이며, 혼자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함께 하셔서 성령님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또한 죄와 사망으로 죽어있는 당신의 백성에게 자신의 영을 넣어주심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살려내는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심을 나타내셨다. 죄로 죽은 너희에게 나의 생명의 숨을 여주지 않으면 너희는 사망에서 살아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이다. 즉 너희는 내가 살려낸 존재이며, 이제부터 성령으로 너희 안에 뚫고 들어와 너희를 통하여 십자가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실 것임을 제시한 것이다. 성도는 이제 우리 안에서 선을 이루시는 성령님의 절대적 주권과 사역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드리는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으로 복음이 전파될 것이며, 이는 성령님의 권능과 사역으로 이루어짐으로 성도는 그분의 열심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됨으로 “평강”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계획하시고 완성하시는 그분의 사역이기에 나의 그 어떤 생각이나 판단이나 견해나 의도가 들어갈 수 없음으로 나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잠잠히 동참하며, 그분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심에 동참하여 기쁨과 감사로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이다.

믿음과 참된 신앙고백에 이르는 평강 (요 20:26-28)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분을 '나의 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평강을 내려주셨다. 주님이 제자들의 굳게 닫힌 마음 문을 뚫고 들어오시자 이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기쁨과 “평강”이 임하였고, 주님이 자신의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라고 성령이 임하자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던 도마가 제자들과 우리 성도들을 대표하여 “주는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위대한 신앙고백으로 믿는 자가 된 것이다. 주님의 못 자국과 옆구리 창 자국을 만져보고 확인하여야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마음속으로 뚫고 들어오심으로 그분이 “나의 주가 되시고 나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이는 평강의 왕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심으로 우리 안에 믿음이 심어진 것이며, 이제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여도 확고한 믿음으로 ”나의 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게 될 것이며, 나는 너희를 떠나지 않고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하나로 함께 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나의 증인으로 세우시겠다는 주님의 견고한 의지를 나타내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그분은 이와 같이 지성, 감성, 의지를 가지고 우리 인간과 같은 인격체로 우리 안에 성령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평강으로 우리를 주관하고 계신다. 즉 자신의 형상을 우리 마음속에 심으셨기 때문에 내 생각 속에 계시며, 내 마음속에 계시며,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 하나로 연합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과 질병과 좌절감과 절망과 눈물겨운 인생살이를 이해하시고 공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안위와 피난처가 되어 주시며, 우리를 모든 악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이시며,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시는 평강을 입혀 주셨다. 그분은 신실하시며, 의로우시며, 선하시며, 자비로우시며, 인내하시며, 궁휼과 사랑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평강의 왕’이시다. 처음 시작부터 완성의 지점까지 그분이 이루어 주신 화평으로 하나님에게 함몰되어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은 복된 자’가 된 것이다. 자신의 생명으로 성취하신, 즉 피의 대가로 지불하신 그 영원한 구원으로 우리를 아버지와 화목케 하여 아들로 거듭나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이 평강의 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영원히 하나로 동행하는 그 상태가 바로 평강이다.

거짓 평강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서신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입혀지는 은혜와 평강을 반복하여 선포하고 있다. 그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외치는 거짓 복음이 난무하고 있었으며, 이 세상에서 편안함과 안락함과 재물의 풍성함과 성공과 번영들을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복으로 둔갑하여 교인들을 미혹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구약에서부터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평강을 이 세상 ‘육신의 편안’으로 바꾸어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였음을 성경에서 말씀해 주고 있다.

이 세상은 처음부터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었으며, 이 땅의 티끌로 지음을 받은 모든 인간은 타락하여 죄의 종으로 사망에 놓여 있기에 ‘평강’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사 48:22).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 상태는 심히 부패하고 더럽고 사악하기 때문에 참 평강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또한 찾지도 아니하며 그들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사 59:8). "패망이 이르리니 그들이 평강을 구하여도 없을 것이라"(겔 7:25). 이 세상에 평화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구하여도 없다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거짓 선지자들은 거짓 평안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더라는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르기를, “이에 내가 가로되 슬프로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시리라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 (렘 14:13-14). 이와 같이 거짓 선지자들은 ‘거짓된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예언으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전쟁도 기금도 주지 않고 확실한 평강을 주시리라’라고 거짓된 평강으로 위로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들은 회중들의 죄를 지적하거나 그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그 죄에 대한 회개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덮어 감추면서 ‘평강하다‘고 거짓으로 위로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죄가 심히 썩어서 곪아 터져도 회개로 용서와 긍휼과 자비를 구하도록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덮어 감추면서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가짜 평안으로 백성들을 죽음으로 미혹하더라는 것이다.

현대 거짓 평강을 외치는 목회자들

오늘날 똑같이 거짓 목회자들이 교인들의 죄를 지적하는 책망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십자가 복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들이 원하고 듣기 좋아하는 거짓 계시와 예언들과 기적들과 같은 허탄한 것으로 평강을 왜곡하고 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축복을 누리는 재물의 번영과 명예와 육신의 안일함과 형통을 획득하는 비법과 기교들을 열심히 가르치며,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님이 축복하여 주니 복받을 것이다’라고 인간들이 추구하는 이 세상 평안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강단에서 노골적으로 설교하고 있다.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렘 23:17). 오늘도 똑같이 거짓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된 평강으로 교인들을 미혹하고 있다. 하나님은 분명 그들을 보낸 적도,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한 적도 없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도둑질하였다고 말씀하신다 (렘 14:13-14; 23: 30-32).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자신들이 끊임없이 토해내는 욕망의 배설물 같은 이 역사가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우며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며,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지를 전하지도 않으며,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 세상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탐심과 욕구를 채우는 물질과 명예와 성공과 평안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은 이들이 원하고 즐겨먹는 먹이를 던지게 되어 있다. 한 마디로, ‘너희들이 갈망하는 복에 대한 비법을 가르쳐 줄 테니 너희들은 나의 꿈과 야망을 쟁취하는데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돈과 힘을 보태라’라는 노골적인 약탈을 일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양의 가죽을 쓴 이리이며, 늑탈하고 해치는 삭군, 절도, 강도들이며, 이들의 목적은 자신들을 살찌우기 위해 양들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 요 10:1-12)라고 적나라하게 지적하신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인 머리수 하나하나가 자신들의 성공과 이름과 영광을 쟁취하는 재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오직 양의 가죽과 털과 고기에만 관심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거짓 선지자들을 ‘따르지도 듣지도 말며, 용서 없이 죽이되 돌로 쳐 죽이라’고 명하셨다 (신 13: 8-10). 그럼에도 무지한 교인들은 그들을 신처럼 모시고 섬기며 숭배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가족과 인맥과 사회관계 등 주위 모든 사람, 즉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오직 자기 존재 확장과 가치 향상과 자존심 높이기와 욕망의 꿈을 실현하는 힘과 세력으로 인식하고 자신을 위한 울타리를 쌓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가 최초로 행한 일이 바로 흩어진 자들을 하나로 힘을 모아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바벨탑을 쌓아서 하늘에 닿아 하나님과 동등함을 시도한 일이다. 즉 자신들의 힘을 모아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왕이 되는 나라를 세우겠다는 욕망으로 힘을 합하여 바벨탑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와 같은 패역함과 욕망을 부숴버리시기 위해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인간을 산산이 흩어 버리셨다. 인간은 자신을 지키기 위행 끊임없이 탑을 쌓고 있지만, 하나님은 끊임없이 무너뜨리고 부시는 일을 하신다. 진정한 평화는 평강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시기에 오직 그분 안에서만 평강을 누리게 하신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기반을 ‘혼돈과 공허와 흑암’ (창 1:2)으로 정하셨으며, 인간의 타락과 함께 가시와 엉겅퀴로 이 땅을 저주하셨으며, 타락한 인간을 죽음으로 정하셨다 (창 3:17-19). 죽어가는 시체에서 무슨 의가 나오고 평화가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진토’ ‘거름 더미’ (삼상 2:8)로 부르신 것이며, 그 거름 더미와 같은 죄와 사망에서 빼내어 당신의 나라로 끌어올리는 구원을 성취하셨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올리자” (삼상 2:8). 분명히 이 죄악된 세상과 이 땅의 티끌로 만들어진 인간에게는 평안이 없다고 선언하셨다 (사 48:22, 59:8; 겔 7:25). 그럼에도 오늘날 거짓 목화자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세상 평화를 외치며 쟁취하기 위해 분투하고 싸우자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수많은 교회마다 세계 평화를 위해 하나로 뭉치자고 종교 통일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이 평화와 통일을 외치는 것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여 세계를 지배하려는 마귀의 탐심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거짓 선지자들을 반드시 치시고 벌하실 것이며, “영원한 치욕과 잊지 못할 영구한 수치를 당하게 하리라”(렘 23:40)라고 말씀하신다. 신명기 13장에서, 거짓 선지자들은 능력을 행하고 기적들을 일으켜 자신들을 섬기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갈취하는데,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허탄하게 만들고, 말씀을 도둑질하여 미혹시키고, 자신들의 욕망을 섬기도록 유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따르지 말며, 듣지 말며, 용서 없이 죽이며, 돌로 쳐 죽이라’고 하나님은 명하신다 (신 13: 8-10).

성도의 삶 속에서 체험되는 평강의 삶이란?

주님은 친히 우리 안에 검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나를 신으로 삼고 오직 나만을 위해 살던 내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그 자리에 하나님 자신을 채우시는 선하 싸움을 하신다. 그리하여 주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결코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눅 12:51-52). 평강의 왕이신 우리 주님이 검으로 분쟁케 하려고 오셨기에 하나님의 평강을 선물받는 성도는 반드시 자기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선한 싸움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내 안에서 치려야 하는 영과 육의 싸움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아주 리얼하게 설명하고 있다.

롬 7:18-25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 돼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나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분쟁이다. 바울의 이 고백은 회심 후 25년간 수많은 경험으로 얻어진 진주와 같은 고백이며 이 고백이 우리 성도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어 주는가! 바울은 말년에 자신의 성화를 외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을 끝까지 집요하게 붙들고 있는 죄의 법이 그를 사로잡는 것으로 인해 곤고함을 외친 것이다. "나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솔직한 마음을 우리에게 털어놓은 것이다. 얼마나 귀중한 고백인가. 분명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평강을 누리고 있지만 내 내면에는 여전히 두 개의 법, 즉 하나님의 생명의 법과 죄의 법을 섬기는 육신의 법이 서로 분쟁으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적 평강이 내 마음에 임하게 되면 탐심과 욕망으로 내 자아를 세우던 마귀의 세력과 맞서게 됨으로 당연히 내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게 된다. 즉 하늘나라의 평강은 성도들에게 분쟁으로 임하게 됨으로 주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핍박은 밖에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율법주의자들로부터 당하는 박해뿐만 아니라, 일차적으로 성령님이 내 안에서 소원을 두고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역사하시는 선한 싸움을 말한다. 왜냐하면 말씀이 검으로 내 안에 들어와 나의 생각, 골수와 관절과 뼈까지 찔러 쪼개는 해부로(히 4:12) 내 옛사람이 반드시 부인되고 해체되고 죽어야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됨으로 나에게 분쟁으로 핍박으로 고통으로 감지되기 때문이다. 즉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말씀으로 뚫고 들어오게 되면, 성도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추악한 탐심을 바라보게 된다. 그동안 깊이 숨겨져 있었던 수치와 더러운 죄악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수많은 위장과 가면들이 벗겨짐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가치를 자각하게 되며, ‘나’라는 자아가 해체되고 부정당하는 영적 싸움을 치르게 되는 것이며, 주님은 이에 대하여 검으로 분쟁케하려 왔다고 말씀한 것이며. 바울은 두 영이 내 안에서 싸움다고 말한 것이다.

바울은 인간의 죄악된 본질을 아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질책하고 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 10-18).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탐심이며 오로지 육신의 안일과 자신만을 사랑하는 애착과 재물의 형통과 인기와 명예에 대한 집착들로 타고난 마귀의 체질로 살아간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들도 교회 안에서 큰 자 되기 위한 경쟁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도 큰 자가 되어 다른 이를 지배하는 왕으로 살기 위해 이 땅에서 열심히 공로와 업적들을 쌓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죄의 실체를 깨닫고, 악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으라고 주신 선한 율법으로 오히려 자신의 실체를 감추는 방패로 삼고, 율법을 지켜 행하여 의인으로 자칭하며 자신의 영광을 위해 거짓과 가증한 행위들을 추구하며 감행하더라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에서, 자신을 하나님처럼 군립 하려는 자아 숭배자들이며, 세상 마귀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간음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도용하여 자신들의 유익을 챙기는 도둑질하는 자들이며, 진리의 말씀을 거짓으로 말하고 행하는 거짓말 쟁이며, 당연히 그 마음에 진리가 서지 못함으로 진리로 오신 메시아를 죽이는 살인하는 자들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인간의 패역함에 대하여 회칠한 무덤이요, 마귀의 행사를 그대로 따라 하는 독사의 새끼라고 저주하신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고착된 사고방식과 탐심으로 자신에 대한 애착과 세상에 대한 집착을 자신의 존재가치로 붙들고 살아왔기 때문에 죽어도 이러한 집착과 애착과 탐심들을 스스로 놓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은 성령의 검으로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오직 나만을 위해 살던 그 옛사람이 깨지고 잘려나가고 삭제되는 죽음의 고통과 새사람이 잉태되는 해산의 고통을 겪게 하심으로 내 인생에서 분쟁으로, 불로, 검으로, 또한 고난과 시련과 핍박으로 감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핍박의 현실은 일차적으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분쟁이며 내 자아가 삭제되는 십자가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함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함과 같이, 내 옛사람 죄인이 죽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탄생되는 획기적인 전환을 겪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늘나라 평강을 사는 성도는 진리의 말씀과 성령님의 깨우침으로 오직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의 의만을 고집하게 되며, 세상인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초개로 배설물로 인식하게 됨으로 세상과 함께 춤을 추지 않게 되며, 오로지 십자가만 자랑하고 전하며,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을 지향하게 됨으로 또한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게 되며, 고립되고 분리되는, 즉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게 될 때 내 옛사람은 세상을 향하여 죽게 된다. 그렇게 ‘나’라는 존재는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어야 하는 고통을 매일 겪게 됨으로 바울은 십자가 삶으로 이끌려가는 성도의 삶에 대하여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롬 8:36)라는 처절한 고백과 함께 바울은 그렇게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으로 간주한 것이다 (고전 15:31; 고후 11:16-12:10). 왜냐하면 마귀의 종으로 죄의 종으로 살던 그 옛사람이 죽어야만이 영원히 사는 그분의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하나로 함몰되는 화평으로 영생을 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선택하시고, 당신의 백성과 하나가 되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평강을 입혀주시기 위해, 육신의 탐심과 욕망으로 살던 내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고, 점도 흠도 없는 당신의 영으로 당신에게 속한 아들로, 신부로 탄생하게 하신다. 즉 그리스도의 것으로 그분에게 하나로 함몰되는 것이 바로 평강이기에 주님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3번씩이나 반복하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그분 자신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평강이시며 이미 우리 안에 평강이 임하였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화평으로 하늘나라 평강이 이미 임한 것이다. 평강의 주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평강의 삶임을 계시하며, 때문에 그분 안에서 누리는 은혜와 평강은 이 세상 그 어떤 형태와 형편과 상황 속에서도, 그것이 분쟁이든, 싸움이든, 고난이든, 고통이든, 핍박과 죽음으로 다가오든 절대로 빼앗아갈 수 없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은혜와 평강이다. 이러한 은혜와 평강의 실체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고백한 것이며 (롬 8:35-39), 그 영원한 은혜와 평강을 모든 성도들이 더욱 풍성하게 누리기를 소원하여 바울은 자신의 서신마다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확고부동한 복음의 진수를 선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