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영적 계시

로마서 (1:1) 사울,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충실한 종의 삶을 살아낸 바울 / 성도가 지향하게 되는 종의 삶이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25. 10:29

롬 1:1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예수그리스도의 종 바울의 신앙

바울은 첫 서두에서 자신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아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세워진 '사도'라고 신분을 확실히 밝힌다. 그 의도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이며, 자신이 하는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이며, 자신은 다만 종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뿐임을 제시한다. 즉 자신을 택하시고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바울의 모든 삶을 주관하여 그분께서 뜻하신 모든 일을 그분이 친히 이루어가시기에 그분이 바로 자신의 인생을 주도하시는 주인임을 받아들이는 진실한 마음과 소명을 표현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부른다.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른 서신은 로마서, 빌립보서, 디도서 세편이다.

첫째, 바울이 로마서 서두에서 자신을 특별히 "종"이라고 부른것은, 그 당시 로마 교회는 그 누구도 종이 되고 싶어하지 않았고, 교회 주도권과 예배와 친교와 할례와 같은 문제에서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자기 주장 때문에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도교인들 사에에 분쟁과 분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둘째, 당대 최고의 학문을 가진 바리새인이며 '율법의 의로는 흡이 없다'고 자랑한 바울이 굳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랑스럽게 부른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사단의 괴수인 옛사람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죽었고, 현재의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아 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새사람으로 거듭나 예수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사는 예수에게 속하여 온전히 자신의 모든 의지를 굽히고, 하나님의 절대적 의존자로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는 종의 삶을 살겠다는 진실되 신앙을 고백한다. 그리하여 그는 "내가 너희 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전 2:2)라고 집요하게 붙든 것은 오직 십자가였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당당하게 고백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종 바울"이 계시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 자기 부인이며, “나의 약함이 곧 하나님의 강함이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고백이다.

그리면, 바울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종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는가?

회심 전 ‘사울’의 모습

예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향하여 로마식 이름 ‘바울’을 쓰시지 않으시고, 유대식 이름인 ‘사울’로 두 번씩이나 부르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 예수님은 성도와 교회를 핍박하는 바울을 ‘사울’이라 부르시고 바울도 그때를 회상할 때에만 자신을 ‘사울’로 표기한다. 그리면 예수님께서 왜 바울을 굳이 ‘사울’이라고 부르셨을까?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초로 왕으로 등극한 사람은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 ‘사울’이라 불리는 자였다. 사울은 남다른 외모와 키, 성품이나 능력에 있어서 보통 사람들보다 월등한 인간들의 취향에 걸맞은 왕의 자질과 부를 갖춘 자였다(삼상 9:1-2). 힘의 원리로 작동하는 인간들은 외부로 나타나는 자신들보다 월등한 힘과 능력과 부를 겸비한 자를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 ‘사울’이라는 왕은, 사사 시대를 지내면서 이스라엘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왕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자기들 중에서 왕을 뽑아 달라고 하여 세워진 왕이다. 때문에 사울은 처음부터 인간들이 원하는 기준에 따라 사람들의 취미에 걸맞는 왕이었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순종자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아말렉 왕 아각과 살진 짐승들을 살려서 잡아 오면서 자신이 그렇게 한 이유는 인간의 도의에 의해서 왕을 살려 주었고, 살진 짐승들은 하나님께 제사드리려고 가져왔다고 즉 자신이 맞고 하나님이 틀린 것으로 말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잔인한 분으로, 자신은 현명한 자비로운 왕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이에 선지자 사무엘은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삼상 15:19).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라고 지적함으로, ‘사울’은 바로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오로지 자신의 유익과 영광만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대표 인물임을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거듭나기 전, 신약 ‘사울’의 본 모습은 구약 ‘사울’의 모습과 다를 봐가 없었다. 신약의 사울 역시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집안에서 출생하였고,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그 시대 최고의 율법 스승에게 율법을 공부한 최고의 학자였고, 스스로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라 자부했던 바리새파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예수님과 교회를 광적으로 핍박하는 하나님의 대적자였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임을에 넘기니라”(행 8:3). 사울은 교회를 박해하며 많은 교인들을 감옥에 처넣고 죽이는 일에 열심이었으며, 이방 성까지 가서 예수 믿는 자들을 다 없애 버리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행 26:11). 자신의 고백과 같이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딤전 1:13)는 것이다. 사울은 자신의 말대로 세상적으로 볼 때 내세울 것이 너무 많았다.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5-6). 그러나 완전히 잘못된 교리로 오히려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어 종교적 열심분자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면서 자신은 100% 옳다는 교만에 빠져 있었다. 열심에 특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6)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것이 회심 전 사울로 살던 바울의 본 모습이었다.

죄의 종이란 ? 인간이 원하는 자유란 존재하는가?

인간은 자유의 의미를 나의 탐심과 욕망을 이루는 ‘자아’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근본 원인이 바로 탐심과 욕망이며, 상대방을 내 자유를 빼앗는 적으로 오인하게 되며, 시기, 질투, 미움으로 저항하게 됨으로 갈등과 분쟁과 싸움과 폭력의 연속으로 인간은 더욱 악한 변태를 낳게 될 뿐 절대로 자유할 수가 없다. 죄가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여 죄에게 종속된 '종'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첫 인간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하게 된 이유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을 '자유'로 착각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속박으로 오인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마귀가 지배하는 죄의 종이 되어 저주와 죽음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참 자유에서 떨어져 나간 인간의 첫 후손이 자유를 얻기 위하여 저지른 일이 바로 질투와 미움이었으며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자기 형제를 죽이는 살인이으로 나간 것이다. 나의 유익과 나의 위상과 나의 존재가치를 지키기 위해 다른 존재를 죽이는 마귀가 된 것이다.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본 적이 없다"(요 8:44).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는, 자신이 신처럼 되어 다른 이들을 군립하고 지배하려는 탐심과 욕망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통제하여 종으로 만들려고 한다. 때문에 역사 속에서는 끝없는 다툼과 전쟁과 분열과 살해로 이어지며, 그것이 바로 마귀에게 속하여 죄를 행사하는 죄의 종이 된 실존이다. 마귀에게 종속된 이 세상 모든 인간은 마귀의 자식으로 태어나 마귀의 본능으로 마귀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며, 그 죄가 지향하는 삶이 바로 신처럼 되어 다른 이들을 통제하려는 높은 자리 쟁탈전이다. 죄란 하나님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창조된 피조물이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통치와 은혜를 거부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 힘으로 인생을 주관하려는 어리석음이며, 그러한 시도와 노력이 오히려 죄가 죄를 낳는 멸망과 사망이 된 것임을 성경은 반복하여 설명하고 증거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마귀에게 종속되어 가시와 엉겅퀴와 같은 죄의 사슬에 묶여서 얽히고 설켜져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고 있다. 모든 인간의 결국은 죄에서 태어나 죄 속에서 죽는 멸망이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그러므로 죄의 종이란, 하나님의 절대적 의존자로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나’라는 '자아'에 사로잡혀 집요하게 자기 사랑과 자기 유익만을 추구하는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나’라는 우상의 종이 됨을 말한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오로지 자신들의 의와 영광에만 집착하여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바로 죄의 종이다고 말씀하셨다(요 8:33-36). 인간의 육은 날 때부터 죄의 노예가 되어 “죄의 법을 섬기며”(롬 7: 25), 오로지 내 육의 편리와 유익과 탐욕을 채우는 ‘자아’를 세우는데 출발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육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배설물’ 과 같은 죄덩어리 뿐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배설물’ 과 같은 공로와 업적들을 열심히 쌓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마귀의 행사’ ‘회칠한 무덤’, 군대 귀신 들린 광인, 더러운 돼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개, 독사의 새끼라고 심하게 꾸짖은 것이다. 육에서 나온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와는 전혀 무가치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며, 심판의 근거를 쌓는 일이다. 우리는 죄의 종이 되어 마귀 행사를 하는 유대인들의 끈질긴 죄의 근성과 독사와 같은 죄의 잔인성을 보면서 죄의 종에서 해방 받은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 많은 패역한 죄인 중에서 자신을 사도로 택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나 감격하여 스스로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활의 예수를 만나 ‘작은 자’로 다시 태어난 바울

율법을 다 지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하던 사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 그가 가치로 자랑하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다 헛된 것들이며 자신을 해롭게 하는 배설물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7-10). 이와 같이 극적인 대조를 보여주는 회심전 ‘사울’이라는 이름과 회심 후 ‘바울’이라는 이름은 우리 성도의 신앙 여정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오직 자신의 유익과 큰 자 되고 싶어 하는 ‘사울’과 대조하여 ‘바울’이라는 이름은 ‘작은 자’를 뜻하는 이름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율법주의와 인본주의의 총화라 할 수 있는 철저한 유대주의자로 ‘사울’에 합당한 삶을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유대식 이름으로 ‘사울아, 사울아’라고 부르셔서 그의 본 실체를 완전히 드러내시고 지극히 작은 자 '바울'로 끌어내리시는 거듭남을 다메석 도상에서 일으키신 것이다.

사울은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와 주셨고, 부르셨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에게 전하기 위하여 주님이 택하신 그릇이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5-16). 주님은 그렇게 큰 자로 교만에 차 있었던 ‘사울’을 작은 자 ‘바울’로 끌어내리시는 부르심으로 옛사람 사울은 죽고, 새사람 바울로 거듭나 오로지 복음을 위한 이방인 사도로 세워진 것이다. 작은 자 ‘바울’로 거듭난 그는 자신의 자아인식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한다. (1)-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전 15:8-9). 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한다. (2)- 그리고 그가 조금 더 성숙한 사도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을 가장 작은 성도라고 부른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엡 3:8).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진리의 말씀에 옳바로 선 바울의 자아인식이었다. (3)- 바울은 예수님이 베푸신 그 은혜와 사랑을 알면 알수록 자신의 실체가 더욱 뚜렷하게 보이는 해부를 겪으면서 말년에 가서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게 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16). 이보다 더 뚜렷한 자아인식이 또 있겠는가! 우리 모든 성도들을 대표한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해부한 신앙 고백이다.

바울은 자신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죄인 중의 괴수라 불리는 철저한 죄인이었기 때문이며, 무슨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공로나 업적으로도 아니며, 열심과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자신과 같은 죄인 중의 괴수를 부르셔서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과 사랑과 긍휼하심과 자비와 인내를 나타내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 갈수록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티끌에 불과한 ‘없음’의 존재라는 자아인식이 점점 뚜렷하게 나타남을 체험한 것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여 이 세상에서 ‘사울’과 같은 큰 자의 삶을 추구하며 자신의 힘과 노력과 지혜로 율법의 의를 쌓아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려고 광적으로 하나님을 잘못 섬긴 ‘이단의 괴수’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철저히 깨달은 것이다. 그런 사울이 부활의 예수를 만나자 오직 십자가 구원의 복음만을 자랑하고 전파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의 삶을 최고의 소망으로 최고의 행복으로 간주하여 자신을 자랑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부른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종이 된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라고 진리가 되어 진리를 외치는 자가 되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바울과 같이 큰 자 되기 위한 옛 ‘사울’이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새사람 지극히 작은 자 ‘바울’로 거듭나 진짜 큰 자이신 예수에게 함몰되어 예수에게 속하여 예수그리스도가 인도하시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살아가게 되며, 그 길만이 구원이요 생명이며 영생임을 온전히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 세상 큰 자의 삶을 추구한 옛사람 ‘사울’이 삭제되고, 티끌과 같은 작은 자 ‘바울’에게 부어져서 진짜 큰 자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 함몰되어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인간은 끊임없이 큰 자 ‘사울’과 같은 왕의 욕망을 추구하지만, 하나님은 반대로 큰 자 되기 위한 인간의 욕망과 교만을 박살 내고, 작은 자, 처음 자리인 티끌로 되 돌려놓으신다.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만일 하나님이 그의 영과 숨을 거두어 가신다면 모든 생명체는 사라질 것이며 사람은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욥 34:14-15). 인간은 처음부터 티끌로 창조된 ‘없음’의 가치에서 시작되었다. 훅 불면 없어지는 허무한 먼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이 불어 넣어주신 생기로 살아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생명력을 공급받아야 만이 비로소 존재가 되고 살아있는 가치를 발산하게 됨을 성경은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설명해 주고 있다.

역사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을 대적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끊임없이 짓는 모든 죄를 덮어주시고 용서하여 주시고 사하여 주시는 긍휼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자비와 인내의 하나님, 구원하시는 하나님,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끝임없이 나타내어 보여주신다. 즉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받아야 만이 살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 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 32: 10-12).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6:8).

인간이 태어난 이 세상의 본질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창 1:2)이었다. 그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뒤덮인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본래 죽은 존재였다. 하나님께서 죽은 흙에 자신의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심으로 산자가 된 것이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하나님의 창조에 무슨 기여를 할 수 있으며, 죽은 흙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바울의 고백과 같이 성도는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자각하고 받아들이며,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작은 자, 죽은 자로 그리스도 안에 함몰되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어 오직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 여정에서 성장하고 발전하여 성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의 말씀이 그의 ‘혼과 영과 골수와 관절을 쪼개는’ 해부로 자신이 바로 죄인 중의 괴수임을 투명하게 들여다보게 한 것이다. 즉 자신은 죄 밖에 내놓을 수 없는 완전한 죄인이며,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자신을 장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믿음도 자신의 소유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어떤 것도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존재임을 깨달았음으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라고 고백한 것이며, 스스로 "나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존재이기에 그리스도의 종이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종에 합당한 바울의 삶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에 합당한 삶을 살아냈다. 그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과 고통과 핍박과 세상으로부터 버림과 멸시와 천대를 받은 도살당하는 양의 삶이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8).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8:36) 함과 같이 바울의 삶은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도살당하는 양'의 삶이었다. 하지만 그의 고백대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함과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넘치는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그 영혼은 평강과 기쁨과 감사가 넘침으로,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전 5:16-18)라는 권면으로 격려하고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이와 같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체질로 하늘에 소망을 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실상으로 믿고 예수를 위해 당하는 고난과 핍박을 오히려 자진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거듭나게 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와 고난과 핍박을 즐겨 받으며, 그 어떠한 조롱도 채찍도 옥에 갇히는 것도 돌로 치고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극심한 고통과 절망과 시험 속에 집어넣더라도 세상이 하늘의 평화를 사는 성도를 감당치 못한다고 믿음의 선지들의 삶을 증거하고 있다(히 11:35-38). 이것이 십자가 의로 거듭난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성도가 지향하는 하늘나라의 삶이다.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종이 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전 2:2),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고 참된 진리를 고백하고 있다. 바울만큼이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많이 받은 이도 없으며, 바울만큼 복음으로 산 자도 없다. 바로 하나님의 믿음이 그를 이방인 사도로 세워 복음의 진리를 온 세상에 전파하도록 이끌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를 너무나 확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당당하게 외치며, 때문에 세상이 주는 환난과 핍박과 조롱을 오히려 자랑으로 기쁨으로 받아들인다고 외치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을 기뻐하노니”(고후 12:10).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고백을 외치고 있는 것은 그의 말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는 확고부동한 진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이시며 생명이시며 진리이시며 천국이시며 영생이시며, 그 천국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주인이시기에 자신이 겪는 모든 고난이나 핍박이나 버림이나 멸시와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시기 위한 선한 의도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내면 즉 그의 영혼은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으로 기뻐하며 감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바로 근심도 걱정도 두려움도 없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평강을 부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서신마다 첫 서두를 한결같이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디도서 1:4; 빌레몬서 1:3…) 라고 자신이 넘치게 받고 있는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모든 이들에게 함께 하기를 원하고 또 원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에게 입혀져서 평강의 주와 하나가 된 그 상태가 바로 평강이라는 말씀이다. 그 평강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내 주인으로 영접하여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하나로 거듭난 자에게만 입혀지는 하늘나라 영생을 사는 평강이다. 성도는 사도 바울과 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히 깨닫고 심령이 가난한 작로 애통하는 자로 내려가 오직 십자가 예수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영원을 사는 하늘나라 존재로 이 세상을 잠시 나그네로 사는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