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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10

예수께서 저희에게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일백 마리가 있는데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5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없는 의인 아흔 아홉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느 여자가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 찾았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15: 11-32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있는데  12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낭비하더니  13 며칠이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모아 가지고 나라에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14 없앤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나라 백성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종을 불러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것이 것이로되  32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탕자 비유의 핵심은, “죄인이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이 받아주신다라는 인본주의적 회개론으로 해석되는 비유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회개의 본질은, 인간의 결단이나 양심적 뉘우침이나 도덕적 각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소유를 되찾으시는 구속 제시한다. 하나님의 열심과 불가항력적 은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필연성을 제시한다. 이를 분명히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가지 비유를 하나의 주제로 단계적으로 설명하신다. 가지 비유에서 반복하여 강조하는 공통된 핵심구절은: 잃어버림”과 "죄인 하나의 회개"이다:  잃어버린 ,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아들이다. ‘잃어버림 새로 얻는 대상이 아니라, 반드시 되찾아야 소유이다. 

첫째 비유: 잃어버린 마리 ( 15:3–7)

마리의 (죄인 하나):  어떤 사람이 마리 있는데”(15:4), 100 마리 , 마리가 길을 잃었고, 주인은 “99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하나를 찾아 다닌다’( 15:4) 말씀하신다. 양은 아무것도 없는  무능한 자체이다. 양은 목자를 떠나 길을 잃을 정도로 어리석고 또한 자신이 잃어버려졌는지도 모르고, 스스로 목자를 찾아올 수도 없는 잃어버려짐의 상태이다. 이사야는 상태를 우리는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길로 갔거늘”( 53:6)라고 표현한다. 잃어버려진 양이 목자의 품에 안기게 것은, 전적으로 목자가 찾아 나섰고, 찾아냈고, 다시 목자의 품에 안기게 것이다. 택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와 주시고, 그들을 반드시 찾아내어 하나님의 소유로 되찾는 은혜를 부어 주시며, 하나님은 죄인 사람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되찾아지는 것을 기뻐하시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회개”로 말씀하신다(15:7). 찾아내어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행사이며, 예수님이 바로 일을 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복음을 제시한다.  

회개 없는 의인 99 마리의 (15:7):  100마리 99 마리는 주인을 따라 길을 잃지 않는 , 회개할 없는 의인 아흔 아홉”( 15:7)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주인이 진정 원하는 양은 99 마리 의인이 아니라, 길을 잃은 마리였다고 말씀하신다. “회개할 없는 의인 99” 스스로 의롭다고 자칭하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킴으로, 예수님은 비유로 인본적 회개관 정면으로 부수시고 있다. 너희의 존재 가치는 다만 양이나 드라크마와 다름이 없는 미련하고 어리석음이며, 완전히 죽음에 처해있는 죽은 자와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 회개의 영을 부어주지 않으시면, 누구도 메시아인 나를 알아보고 나에게로 자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회개란:  주인은 잃어버린 하나를 찾은 , 어깨에 메고 돌아와 기쁨으로 이웃을 불러 잔치를 치르며, 이를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 15:10)라고 '회개' 결론을 내린다여기서 말하는 회개 주체는 양이 아니라 목자다. 양은 아무것도 없다. 양의회개, 자기 인식이나 결단이나 방향 전환이 아니라, 목자에게 발견되고, 어깨에 메어져, 다시 목자의 품에 안기는 되찾아짐이다. 그러므로 회개는돌아옴 아니라되찾아짐이다. 회개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기 소유를 끝까지 찾아내어 품에 안으시는 구속 행위이다.

두번째 비유: 드라크마 하나를 잃으면 (15:8)

양의 비유에서, 비록 살아 있으나 무력한 존재였다면, 드라크마의 비유에서는,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무생물 예를 들어 인간의 죽어 있는 영적 상태를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드라크마는 가치는 있으나, 말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물체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비록 살아있는 생명체이지만, 실상은 가운데 죽어 있는 물체와 다름이 없다. 바울은 인간의 영적 상태를 허물과 죄로 죽은자”( 2:1)로서, 스스로 하나님을 찾거나 하나님께 나아갈 없으며 치우쳐 함께 무익하다( 3:11-12) 선언한다 드라크마는 주인에게 가치 있는 소유이지만, 스스로 회개할 없는 무생물이다.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주인이 일은:

  •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아낸 것(눅 15:8)
  • 찾은 후,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고 기뻐한 것(15:9).  

주인의 “되찾으심”으로 이루어지는 전적인 은혜의 회개

예수님은 회개가 인간의 결단이나 노력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드러내시기 위해, 누가복음 15장에서 ‘되찾으심’이라는 동일한 구조를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1)  첫째 비유에서, 주님은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15:5)라고 표현하신다양은 스스로 주인을 따라 걷는 어떤 행동도 없이, 다만 목자의 어깨에 메어짐으로 쉼을 얻게 되고 다시 주인의 품에 안기는 소유로 회복된 것이다. 주인의 전적인 되찾으심과 짊어지심이 목자의 기쁨이며, 이를 가리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기쁨이 되느니라”( 15:7)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회개는 양의 행위가 아니라, 목자의 사역에서 발생한 결과이다.

(2)  둘째 비유에서, 드라크마는 말 할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물체이지만, 주인의 열심으로 다시 소유로 회복된 것이다. 인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먼지와 더러움을 기꺼이 감수한 것이다. 이는 주님이 우리를 아버지의 자녀로, 당신의 신부로 되찾아  화목을 이루시기 위해, 더러움과 수치를 기꺼이 감수하시는, 사랑으로 기꺼이 감당하시는 모습이다( 53:3-5). 그리고 찾아낸 즉시 기뻐하며 이웃을 불러 함께 즐거워한다. 주님은 장면 역시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15:10)라고 동일하게 "죄인의 회개"로 결론을 내린.

비유에 등장하는잃어버린 양과 드라크마는 죄와 사망 아래 갇힌 인간의 실존 의미한. 인간은 가치는 있으나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능력이 없으며, 모두가 주인의 포기하지 않는 은혜와 열심으로 다시 품에 안기게 된 것이다. 이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죄인을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회복시키실 구원의 복음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는 회개란 인간의 주도나 결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행위나 의로 성취되는 조건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열심과 십자가의 의로 이루어지는 결과이다. 이 진리를 예수님은 분명히 선언하신다.

  • 요 6:37 -39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서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  선택과 구원의 출발은 인간이 아니라 전적으로 아버지의 주권임을 확실히 밝힌다. 선택을 받은 자는 필연적으로 내게로 것이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함과 같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와 열심으로 완성됨을 확증한다. 이것이 바로 잃은 , 드라크마, 그리고 탕자의 비유가 함께 증언하는 복음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인간의 가능성이나 의지에서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다. 회개는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을 되찾으신 결과이다. 양도, 드라크마도 회개할 능력이나 개념 자체가 없었듯이, 주님은 주인의 포기하지 않는 은혜와 적극적인 열심으로 되찾아진 사건 자체를 가리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5:10)라고 선언하신다.  

셋째 비유: 잃어버린 아들 회개의 본질  ( 15:11–32)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요구하여 쾌락을 좇아 세상으로 나아간다. 이는 단순한 방탕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고 스스로  자초한 죽음의 길이다. 그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 세상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창녀와 방탕으로 탕진하고, 마침내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돼지를 치는 된다. 예수님은 그가 완전히 추락한 상태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어디까지 떨어질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신다. 그는 살기 위해 돼지와 함께 쥐엄열매를 다투는 존재, 이상 인간의 존엄을 말할 없는 부정한 삶의 자리 놓이게 된다.

완전히 시궁창에 빠져 더는 살 가망이 없는 상태에서 나오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백을 이에 스스로 돌이켜”( 15:17)라고 표현하신다. 돌이킴은 도덕적 후회나 삶의 개선 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치가 돼지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정체성의 각성이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비참한 행실을 뉘우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삼아 살아간 자의 결말을 보여주며, 동시에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은혜와 성령님의 일하심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아들은 본래부터 아버지에게 속한 아들이었고,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던 자였기 때문에 반드시 아버지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앞선 비유와 마찬가지로, 잃은 자를 끝까지 찾아내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은혜 제시한. 

아버지는 순간도 아들을 잃은 적이 없다. 아들이 반드시 돌아올 것을 알고 계셨기에, 그가 요구하는 불의를 허락하셨고, 집을 떠난 아들을 날마다 밖에 나가 기다리셨다. 그리하여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 15:20)라고 아버지가 먼저 보고, 먼저 달려가고, 먼저 껴안고 사랑의 맞춤으로 아들에게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신. 율법에 따르면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범죄한 자이며, 돌에 맞아 죽어야 자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정죄하거나 율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서 받을 없는 유산을 먼저 주시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지 않으셨다. 세상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경험하도록 허락하셨. 그는 반드시 돌아오게 되는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먼저 달려가 그를 껴안으심으로, 율법의 돌을 대신 맞으셨다. 이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실 대속의 사랑을 예표한다.

결과, 둘째 아들에게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은혜가 임한다. 아버지는 그에게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기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푸신다.

  • 궁휼과 은혜의 옷. 방탕한 아들 탕자는 죽고, 은혜로 말미암아 아들로 신분이 회복됨.
  • 가락지: 아들의 상속권 회복이다.
  • 신발:  새로운 아들로 태어나 아들의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삶의 전환이다.
  • 살진 송아지 잔치: 화목과 혼인 잔치이다. 이는 어린 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인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상징( 53:4–6,10–11).

바울이 증언하기를: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5:10).  , 우리가 회개하여 하나님께 나아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수 되었을 하나님께서 먼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다.  

이와 같이, 둘째 아들의 방탕과 죄에 대한 뉘우침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철저한 절망과 각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무엇을 결단하거나 결심하는 행위가 아니라, 성령님의 깨우침으로 일어나는 철저한 자기부인과 내려 놓음이며,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무익한 존재임을 깨닫는 은혜이다. 그러므로스스로 돌이켜”( 15:17)라는 표현은, 인간의 회개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인본주의적 공식이 아니다. 기독교의 회개는 오직 택함 받은 자에게만 임하는 정체성의 계시이며, 회개 안에는 죄를 완전히 도말하시는 영원한 사함과 영원한 생명이 함께 주어진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구원의 은혜와 성령님의 역사로 일어나는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는(고후 5:17) “회개 진의이다. 

율법:  큰 아들

비유에서 아들 서두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동일한 율법주의자의 전형이다. 자신의 의와 행위의 열심으로 구원에 이르려 하는 율법주의자 바리새인들의 대표이다. 그는 둘째 아들과 달리, 자신이 말한 그대로 여러 동안 아버지를 섬기며 명을 어김이 없었다(15:29). 아버지에 대한 충성, 책임, 올바른 행실 면에서 맏아들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의인'이다. 그러나 방탕하던 동생이 죽음에서 돌아와 잔치가 베풀어지는 순간, 그는 몹시 분노한다. 그는 동생의 죄를 정죄하며, 아버지가 베푼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

  •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 15:28–30).

아들은 자신의 의로운 행위와 동생의 방탕한 행위를 비교하며, 동생은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자로 여긴다. 그렇기에 그는 그런 자를 기쁨의 잔치로 맞이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기에, 아버지가 베푼 잔치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잔치는 단순한 환영이 아니라,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얻은'(15:31-32), 새 아들이 되어 아버지와 화목을 이루는 구원의 기쁜 혼인 잔치였. 즐거운 잔치를 거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입혀지는 구원을 거절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둘째 아들은혜로 무너진 자아와 회개의 탄생

우리의 육신은 본성적으로 세상의 쾌락과 행복을 추구하도록 끊임없이 끌려간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안으로 뚫고 들어오실 , 라는 자아를 부인하게 하시고, 철저히 털리게 하시며, 마침내 세상에서 버림받은 거지와 같은 자리까지 끌어내리신다. 추락의 자리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직면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의 것으로 붙들어 왔던 세상의 가치들이 얼마나 더럽고 헛된 배설물인가를 깨닫게 되고, 저주와 죽음의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 하늘나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열심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참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순종으로 내려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은 결코 인간의 본성인 자아에서는 나올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와 주셔서 은혜를 입히시고, 영의 눈과 귀를 열어 주셔야만 비로소 자아가 무너지고,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아보는 정체성의 인식, 회개에 이르게 된다. 회개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결단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주도하시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이기에, 그를 의롭다 하시고, 회개에 합당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첫째 아들무너지지 않는 자아와 은혜의 거

반대로, 아들과 같이 스스로를 의인이라 여기는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의 의에 집착하여 공로와 업적을 쌓고, 대가로 보상과 인정과 칭찬을 기대하는 자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결코 자신의 정체성,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자신의 실존을 깨닫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을 지켜 의를 세우는 자들이기에, 자신을 회개할 없는 의인으로 여긴다. 때문에 구원자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더더욱 자기 부인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5:40).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으나, 마음은 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았기에, 아버지가 베푼 기쁜 잔치에 참여할 것을 거부한다. 이는 율법적 열심이 얼마나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있는지를 보여준다. 대조 속에서 예수님은, 인간의 타락보다 심각한 죄가 자기 의에 사로잡혀 회개할 없게 되는 상태임을 드러내신다.

 잃어버림 : 주인의 열심으로 이루어진 구원에 이르는 회개

예수님은 3 가지 비유에서 특별히 잃어버림이라는 문구를 반복하여 강조하시며, 모든 비유를 회개 직접 연결하신다.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스스로 돌아올 능력이 전혀 없다. 모두가 오직 주인의 열심에 의해 다시 찾아져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며, 이를 주님은 죄인 하나의 회개”(15: 7,10) 결론을 내린다. 예수님은 우리를 비유에서는 양으로, 번째 비유에서는 드라크마로, 마지막 비유에서는 방탕한 아들로 점층적인 배열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와 회개의 주도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신다. 잃은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기뻐하시는 , 잃은 드라크마를 다시 찾아 주인의 소유로 회복시키는 것, 잃은 아들을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하심, 모두가 잃었던 것이 자기 자리로 되찾아짐 주님은 '회개'라고 부르신다.

회개란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오는 돌아옴 행위가 아니라, 소속된 존재가 잃었다가 다시 주인의 열심으로 되찾아짐 회복이며, 그것이 주님의 기쁨이요, 주님의 잔치임을 제시한다. 우리는 본래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었다( 1: 4-7). 잃어버려진 것처럼, 방탕한 자처럼, 버려진 것처럼, 죽음에 내던져진 자처럼 보이지만, 결코 버려진 자가 아니다. 반드시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하나도 잃지 않고 우리를 찾아내어 자신의 신부로 맞이하신다.

  •   6:39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는회개, 인간의 주도 아래 자발적으로 발휘되는 행위가 아니다. 회개는 잃어버려진 상태 자체, 그리고 상태에서 주인에 의해 다시 되찾아지는 은혜이. 이를 분명히 설명하여 주시 위해, 예수님은 굳이 아무것도 없는 잃어버린 양과 드라크마의 비유를 잃어버린 탕자의 비유 앞에 먼저 두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은혜를 입히시고, 영의 눈과 귀를 열어 주시며, 죄를 깨닫는 통회의 마음을 주시고, 구원의 의를 갈망하는 애통을 주시며, 생명의 진리를 향한 목마름을 주셔서, 마침내 소유에 이르게 하시는 성령님의 일방적이고 강권적인 사역이다.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 아래, 성령의 주도하에서 일어나는 회개가 바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고후 7:10)이며, 생명을 얻는 회개( 11:18)이다.

결론:

(1)  그러므로 기독교의 회개는 인간이 결단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은혜로 시작된다. 회개는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시작되지 않으며, 도덕적 반성이나 자기개선의 결심으로 성취되지도 않는다. 회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이며, 허물과 죄로 죽어 있던 자에게 생명을 부어 넣으시는 성령 하나님의 부활의 역사이다.

(2)  죄와 사망에 갇힌 인간은 결코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올 없는 존재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부르시고, 붙드시고, 자아를 깨뜨리시고, 철저한 자기 부인의 자리에서만 발생되는 돌이킴이다. 돌이킴은 방향 전환 이전에 존재의 전환이며, 행위의 수정 이전에 신분의 변화이며, 삶의 개선 이전에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이동이다.

(3)  기독교의 회개는, “내가 무엇을 했는가 문제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대한 정체성의 깨달음과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행하셨는가 대한 증언이며,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와 주셔서 자신의 소유로 되찾으신 구원의 선언이다.

(4)   회개를 받은 자는 이상 자신을 의지하지 않으며, 자신의 신앙, 자신의 결단, 자신의 열심을 결코 구원의 근거로 삼지 않는다. 그는 오직 십자가에 박히신 그리스도와, 그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든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회개이며, 이것이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이고, 이것이 택하신 자에게 반드시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의 최종적 열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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